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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나라를 멸망시킨 포사(褒似)의 화사한 웃음

천하한량 2007. 3. 29. 16:46
주 나라를 멸망시킨 포사(褒似)의 화사한 웃음 
 
 
세상에 아무리 엉뚱한 일들이 많다 해도 한 여자의 아름다운 웃음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니 그 사실 만으로도 다변가(多辯家)나 제제다사(濟濟多士)의 관심대상이 되고도
남을 것 같다.
 
1.   신화 속에서 태어난 여인
 
신화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들 얘기로는 희랍 최초의 주신 제우스의 탄생만큼 극적인 경우도 드물다. 절대권력의 소유자인 아버지를 죽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여 그 아버지가 하던 절대자의 폭압을 계속하는 그가 여섯 번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자
그 아버지를 다시 죽이는 이런 패역을 통하여 친부(親父) 살인자의 모습으로 제우스는 등장한다.
 
크로노스는 누이인 레아를 아내로 맞아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을
낳았으나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모두 잡아먹고 만다.
다섯 아이 모두를 남편 크로노스에게 잡아먹힌 아내 레아는  여섯번째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레아는  출산 예정일이 되자  돌맹이를 질속에 삽입하고 잔뜩 긴장한 채 크로노스를 맞이한다. 크로노스는 레아의 외음부에 입을 대고 질속을 미끄러져 나온 묵직한 덩어리를  받아 삼키고는  마침 타르타로스 감옥을 탈옥한 퀴클톱스 일당을 잡으러 뛰어 나간다. 잠시 후 레아는 배를 갈라  제우스를 낳고  크레타섬으로 비밀리에 옮기고 거기서 자라게 한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잡아 먹혔다가 살아난 다섯 형과 누나들의 도움을 받으며 신군(神軍)을 창설하여 총사령관이 된 청년 제우스는 전쟁 끝에 결국 아버지 크로노스를 산채로  
잡아  타르타로스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기원전 800년 경 포사(褒似)라는 한 사람의 미녀가 탄생하는 데에는 천 년도 더 되는 긴
세월이 흐르고 있다.
 
포사(褒似)가 태어나기 1천여 년 전인 기원전 18 세기경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 시절. <: 지금의 섬서성 포성현(褒城縣)>나라에 살고 있던 두 백성이 갑자기 두 마리의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그 두 마리 용은 단번에 수 천리를 날아가서 하나라의 도성 짐심<: 지금의 하남성 공현>에 있던 걸왕(桀王)의 궁궐에 떨어졌다. 한참 후 그 두 마리 용은 피로에 지쳐 입에서 침을 흘리다가 갑자기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포나라의 선왕이다."
 
겁에 질린 걸왕(桀王)은 그것들을 죽이려고 무당을 불러 점을 치게 하였다. 걸왕(桀王)의 명을 받고 점을 친 무당은 깜짝 놀라며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하였다. 놀란 걸왕(桀王)은 그것들을 밖으로 쫓아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 무당은 다음과 같이 하라고 왕에게 간하였다.
 
"신선이 속세에 내려온 것은 길조이니 폐하께서는 그것들의 침을 잘 간수해 두소서. 침은 용의 정기이니 그것들을 잘 간수해두면 훗날 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걸왕(桀王)은 그것들의 침을 쟁반에 받아서 황실의 보물창고인 주거()에 보관하였다. 그러자 그 두 마리 용은 큰 비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갔다.
 
그로부터 천 년이 지난 기원전 9세기 50년대 주나라 10대 여왕() 말기에 이르러 그 용의 침을 보관해 두었던 주거에서 갑자기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이것을 본 담당 관리가 여왕()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왕이 그것을 가져오게 하자 관리는 주거를 열어 그 안에 있던 쟁반을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은 그 이상한 물건을 받아 들고 무엇인지 몰라 두려워하다가 그만 그것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1천년 전에 담아두었던 용의 침이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쟁반에서 흘러내렸는데 금방 그 침이 자라로 변하여 정원을 기어 다녔다. 겁에 질린 여왕()은 나체의 미녀들이 사악함을 쫓아낼 수 있다는 전설을 믿고 궁녀들에게 명하여 모두 옷을 벗게 하여 자라를 둘러싸고 고함을 지르게 하였다. 갑작스런 소란에 놀란 자라는 이리저리 기어 다니다가 왕궁 안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바로 이때 후궁에 있던 6~7세 가량의 어린 계집종이 우연히 자라의 발자국을 밟았는데 그로부터 그녀는 갑자기 배가 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여왕()은 그렇게 어린 것이 발칙하게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여 임신을 한 것이라 생각하고는 크게 노하여 그녀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기원전 828년에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선왕(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녀를 석방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감 된지 40년이 지나서 그녀는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다가 계집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선왕(宣王)은 그 계집아이를 물속에 던져 버리라고 명했다.
 
임신한지 40년 만에 아이를 낳는 괴이한 일을 당한 선왕(宣王)은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다. 바로 이때 수도 호경(鎬京)에서는 다음과 같은 동요가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뽕나무로 강한 활을 만들고
가는 풀로 화살통을 짜니
주나라도 더 이상 남아있지 못하리라
 
선왕(宣王)은 크게 분노가 치밀어 뽕나무로 만든 활과 가는 풀로 짠 화살통의 판매를 금지시켰다. 그리고는 이렇게만 하면 주나라 왕실이 안전할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시골 부부가 국왕이 그러한 엄중한 금령을 공포한 줄 전혀 모르고 뽕나무 활과 풀로 짠 화살통을 팔려고 낙양(洛陽)으로 갔다.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병사들은 국왕의 금령을 어긴 죄로 그들을 붙잡으려고 했다. 남편은 재빨리 도망을 쳤으나 불행히도 그의
아내는 병사들에게 붙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한참을 도망쳐 온 그 남자는 슬픔을 억누르며 홀로 한적한 강가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때
그는 한 계집아이가 깊이 잠들어 있는 거적이 강물에 떠내려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새들이 하늘을 날며 그 거적을 보호하면서 거적의 네 모퉁이를 물고 밖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그 남자는 거적에 올라가서 그 계집아이를
꺼내었다. 그러나 죄인의 몸으로 쫓기고 있던 그 남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았기에 생각 끝에 포()나라로 친구를 찾아갔다.
 
애굽왕 바로가 이스라엘 사람 중 어린애가 태어나면 남자애는 하수에 던지고 여자애는 살리라는 명령을 내린 뒤 이스라엘 레위 족속인 여자가 아들을 낳아 석 달을 숨기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지켜 보던 중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 왔다가
상자에 어린 사내애가 담겨 있는 것을 보고 구하여 공주의 궁으로 데리고 간다는, 즉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예사롭지 않은 출생에 얽힌 얘기가 성경 출애굽기 2장을
열면서 시작되고 있다.
 
이 남자가 강물에 떠내려 가는 여자애를 구한 것이나 바로의 딸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남자애를 구한 것이나 사건의 측면에서는 몹시 유사하다.
 
2.  웃지 않는 왕후
 
포사(褒似)는 주()나라 유왕(幽王) 희궁열(姬宮涅)의 왕후(王后)이다.
 
기원전 782년에 선왕(宣王)이 죽고 그의 아들 희궁녈(姬宮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그가 바로 주나라의 제12대왕 유왕(幽王)이다. 그는 신<: 하남성 남양현(南陽縣)>나라의 공주를 왕후로 맞아들였으며, 그후 신후(申后)는 태자 희의구(姬宜臼)를 낳았다. 그러나 유왕(幽王)은 성격이 포악하고 방탕하여 하()의 걸왕(桀王)이나 상()의 주왕(紂王)에 못지 않는 폭군이었다. 그는 다른 폭군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간언을 하는 충신들을 죽이고 미녀들을 선발하여 유희에 빠졌다.

어느 날 포나라의 제후 포향(褒珦)이 유왕(幽王)을 알현하고 간언을 올렸다가 유왕(幽王)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이에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포향(褒珦)의 아들 포홍덕(褒洪德)은 주의 문왕(文王)이 상()의 주왕(紂王)을 멸망시킨 고사를 떠올리고는 각지에서
미녀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의 미녀들을 뽑아 매일같이 유희(遊戱)와 연락(宴樂)에 흠뻑 빠진 유왕(幽王)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즉 미인계로 아버지를 구해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때 뽕나무 활 때문에 죄인이 된 남자가 강가에서 거두어 갔던 그 계집아이도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여 그 모집에 응했으니, 그녀가 바로 포사(褒似)이다.  

기원전 780년 포홍덕(褒洪德)이 포나라의 미녀들을 호경으로 보내자 유왕(幽王)은 크게
기뻐하여 곧바로 그 아버지 포향(褒珦)을 석방하였다. 특히 유왕은 선녀처럼 아름다운 포사(褒似)의 용모를 보고 더없이 흡족해 하였다.



포사(褒似)는 왕궁에 들어가자마자 뛰어난 미모와 총명한 지혜를 발휘하여 즉시 유왕(幽王)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년 후 그녀는 아들 희백복(姬伯服)을 낳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왕후의 자리와 태자의 자리를 탈취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때 유왕(幽王)은 포사(褒似)에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했다.
말희(
)가 하()나라 걸왕(桀王)을 치마폭에 싸버리고 또 달기(妲己)가 상()나라의 주왕(紂王)을 아랫도리로 녹여버렸던 것처럼 미모와 지모를 동원하여 유왕(幽王)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가슴에 꼭 품고 말았던 것이다.

기원전 773년 유왕(幽王)은 마침내 포사(褒似)의 꾐에 말려들어 신후(申后)와 태자 희의구를 폐한 후, 신후를 옥에 가두고 희의구를 신()나라로 유배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포사
(褒似)와 그녀의 아들 희백복을 각각 왕후와 태자에 책봉하였다. 모든 고관대작들을 피로써 물리치고 당당히 권력의 핵심에 들어서게 된 이 때가 포사(褒似)의 나이 겨우 스무 살 밖에 안되었을 때였다.

그러나 포사(褒似)는 비록 유왕(幽王)의 극진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조정의 대권을
좌지우지하며 자신의 의향대로 요리하였지만 좀처럼 웃는 법이 없었다. 유왕(幽王)은 그러한 그녀의 웃음을 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녀는 결코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웃음을 보이지 않자 결국 유왕(幽王)은 그녀의 웃음을 보기 위해 괵석보(石父)에게 지혜를
구하게 되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계책을 올렸다.

"옛날 서쪽의 만족(蠻族)이 강성하여 자주 수도를 침범하였는데, 그들의 급습을 방비하기 위하여 일찍이 20여 개의 봉화대를 설치해 두었습니다. 비상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봉화에 불을 붙여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면 부근의 제후국에서 구원병을 보내줍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여러 해 동안 천하가 태평하여 그것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왕후와 함께 여산(驪山)으로 가셔서 봉화를 올린다면 그것을 보고 주변의 제후국에서 대군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입니다. 그들이 급히 달려와서 헛걸음 치게 한 다음 그 제후들을 놀린다면 왕후께서는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왕(幽王)은 과연 묘책이라 생각하고 포사(褒似)를 데리고 여산으로 갔다.
여산은 수도 호경<鎬京: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3.   여산봉화(驪山烽火)

유왕(幽王)은 포사(褒似)와 함께 여산에 도착한 이후 저녁이 되자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봉화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당시 삼군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정()나라의 제후 희우(姬友)는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황급히 행궁(行宮)으로 달려가서 유왕(幽王)을 만류하였지만 유왕(幽王)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유왕(幽王)의 명령으로 봉화가 오르자 그것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수도 부근에 있던 제후들은 밤중에 봉화가 올랐다는 급보를 듣고 수도 호경이 오랑캐에게 포위당한 것으로
판단하고 놀라서 급히 지원군을 편성하여 달려왔다. 이때 유왕(幽王)과 포사(褒似)는 여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제후들의 군대가 집결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즐기고 있었다.

왕실을 구하겠다는 충성심으로 피로도 잊은 채 사방에서 밤새워 달려온 제후들의 군대가
새벽 무렵 여산 아래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막상 여산 아래에 도착한 이후 전열을
정비하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적들의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자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있던 유왕(幽王)은 크게 만족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
여러분 수고가 많았소. 적이 침범한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태평성대라서 봉화를 올린 적이 없었기에 내가 심심해서 한번 봉화를 올려본 것뿐이오. 그러니 모두들 원대복귀 하시오
."

이 말을 들은 제후들과 병사들은 허탈감에 빠져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난 수의 군대가 모였다가 어처구니 없는 사실에 맥이 빠져 돌아가는 군대의 모습을 본 포사(褒似)는 비로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생긋 웃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웃음이 담겨있는 포사(褒似)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데 성공한 유왕(幽王)은 몹시 기뻐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여산봉화"의 고사이다.
그 후 유왕(幽王)은 그러한 계책을 건의한 괵석보에게 상으로 황금 1천냥을 하사 하고,
그 뒤로도 몇 번 포사(褒似)의 아름다운 웃음을 다시 더 보고 싶어서 유왕(幽王)은 봉화를 올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세상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왕후의 웃음 한번에 나라가 망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4.   늑대 떼에게 잡아 먹힌 목동

기원전 771년 유왕(幽王)은 신()나라에 유배시켰던 태자 희의구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나라의 제후는 원래 유왕(幽王)의 장인이자 희의구의 외조부였는데 그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단지 포사가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 희백복(姬伯服)의 안전을 위하여 후환제거를 목적으로 자기의 외손자를 죽이라는 명령에 반발하여 유왕(幽王)에게 그 일의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

"
옛날 하()왕조의 걸왕은 말희(
())를 총애하여 망했고, ()왕조의 주왕은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포사를 총애하여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옹립함으로써 부부의 정은 물론 부자의 정도 끊었습니다. 그러니 즉시 명령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이 나라도 망하고 말 것입니다."

유왕(幽王)은 이것을 다 읽어보기도 전에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격분하였다. 그는 신속하게 명령을 다시 내려 신나라 제후의 작위를 박탈한 다음 그를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
.

신나라의 제후는 자기 혼자서는 유왕의 공격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호경 부근의 만족(蠻族) 견융부락(犬戎部落)의 추장과 동맹을 맺었다. 신나라의 제후는 견융의 추장에게 자기의 외손자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호경의 모든 금은보화와 많은 남녀를 노예로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에 견융의 추장은 즉시 1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호경을
공격하였으며, 신나라의 군대도 그와 동시에 호경으로 향했다.

신나라와 견융부락이 연합하여 공격해왔지만 유왕(幽王)은 거기에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는데 조그만 제후국과 오랑캐 부락이 아무리 연합하여도 결코 그들이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주나라의 적수는 될 수 없고 그리고 봉화를 올리기만 하면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제후국들의 수십만 구원병들이 금방 당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견융부락의 군대가 호경성 아래에 다달았을 때 유왕(幽王)은 봉화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삽시간에 봉화의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 전국으로 퍼졌다. 그러나 밤새워 달려와야 할 제후국들의 구원병은 끝내 오지 않았다. 봉화의 불길을 본 제후들은 지난번에 유왕(幽王)과 포사(褒似)에게 몇 번 속았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이번에도 똑 같이 심심풀이 삼아
올린 봉화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왕(幽王)진짜로 늑대떼가 나타나서 목동과 양떼를 유린하고 만 유명한 이솝우화의 거짓말쟁이 목동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 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한복음 102kd 12)

호경에 미리 숨어있던 신나라의 군사들이 성문을 열어 젖히자 견융부락의 군사들은 손쉽게 호경에 진입할 수 있었다. 크게 당황하고 낙담한 유왕(幽王)은 포사(褒似)를 데리고 여산으로 탈출하였지만, 뒤따라온 견융족에게 붙잡여 목이 달아났다. 그러나 견융의 추장은 포사(褒似)를 보고는 그 미모에 반하여 죽이지 않고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그 이후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채 다만 만족(蠻族)의 수중으로
잡혀간 최초의 중국 황후로 포사(褒似)는 기록되고 있다.

그녀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전해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신나라의 제후가
견융부락의 황음무도한 행위에 분개하여 진(), (), (), ()나라와 연합하여
견융을 물리치고 포사를 데려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포사(褒似)는 신나라의 제후가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는 것이다.
이때가 기원전 771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