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질투! 골육지친 사이에도 일어나는가?
1. 유대교와 이슬람의 불가 양립성
1) 사라와 하갈
오늘의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이렇게까지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기에 이른 것은 지금으로부터 3700 여 년 전 아브라함을 사이에 두고 장자를 낳은 첩 하갈 (무슬림 이름 하자라)과 그와는 달리 적자를 낳은 본처 사라가 서로 아브라함 후계의 정통성을 차지했다는 적통성 시비가 주요 원인이긴 하지만 또 어쩌면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남편의 사랑을 자기에게 묶어 두고자 한 여인들간의 질투에 연유하고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자식이 없어 고민하며 이러다가 대가 끊기는 것 아닌가 하고 초조해 하던 아내 사라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녀의 젊은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브라함이 팔십 육세 되었을 때 그 여종의 몸에서 첫 아들을 얻고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주어 끔찍이 사랑하였다.
다시 1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그의 나이 구십 구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내년에 아내 사라의 몸을 통하여 아들을 주겠다고 하자 심지어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시큰둥하여 감지덕지하는 대신 이미 자기에게 준 큰 아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복 받고 잘 살기를 원한다는 이런 대답을 하고 있다.
이 때까지는 아브라함은 본처와 첩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자식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적자주의와 그에 반하여 장자주의에서 근원된 이슬람교가 역사상 갈등과 반목을 이렇게 계속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으리라.
통상적으로 아버지에게는 그가 아내에게서 태어났든 첩의 몸에서 태어났든지 간에 자신의
첫 아들인 경우 그에게 더 많은 기대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인데 하물며 그의 아내 사라가 그의 나이 백살이 되던 해 아들 이삭을 낳아주었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은 14년간 자신의 유일한 혈육으로 기대를 모아왔던 큰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깊은 관심을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그 어머니 하갈에 대한 사라의 질투로 첩 하갈과 그의 몸에서 난 장자 이스마엘을 함께 내어 보내어 따로 살게 하였지만…
먼저 성경에 등장하는 사라와 하갈의 얘기를 더듬어 보면 창세기 16장에 인류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의 씨앗을 잉태시키는 동기가 대를 이어 갈 자손을 두고자 하는 여인의 단순한 욕망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아들이 태어나게 되자 비록 종의 신분이었던 하갈이지만 그리고 그 여주인의 허락과 배려에 의해 주인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되고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식을 배게 되었지만 아직 뱃속의 아기를 낳기도 전에 부어 오른 배를 잔뜩 내밀고 하갈은 부어 오른 배만치나 남자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보이기라도 하듯 여주인 사라를 저만치 눈 아래로 내려다 보듯이 깔보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준 여인과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 사이에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여인들간의 사랑 싸움 즉 남자의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이 자리 잡기 시작하고 이에 따른 질투와 시기가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을 불러오기 시작하는 일이 생긴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사라의 번뇌와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만치 컸던 것이다. 이 보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계명과 율례를 받았을 때에 보면 종이 낳은 자식도 그 주인에게 속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아무리 남편의 씨를 배었다 하더라도 엄연히 자신의 종의 신분인 하갈이 일단 임신을 하게 되자 신분의 문제가 아닌 남녀간의 사랑을 매개한 복잡한 양상이 세 사람 사이에 벌어지게 된 것이니, 사라의 고뇌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을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세기 16장 1절-6절
이 때에 보면 아직 자식이 하갈의 배속에 있고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기에 자식에 대한 애정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든지 아브라함이 하갈을 무턱대고 두둔하고 보호하기보다는 마치 가정의 평화가 더 중요하다는 듯이 선선히 본처 사라의 처분에다가 하갈을 맡기고 있다.
주인 아브라함의 자기에 대한 한결 같은 사랑과 믿음을 본 사라는 하갈을 향하여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요망하게 군다고 학대하기 시작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도망을 가다가 브엘라헤로이라는 샘물 곁에서 목을 축이는 하갈을 만난 하나님의 사자가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셀 수 없을 만치 수가 많을 것이라는 축복을 하면서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고 설득을 하자 그 길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와 기한이 차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아 아브라함의 가슴에 첫 아들을 안겨주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사자의 약속을 가슴속에 깊이 담고 아들을 키우며 여전히 종의 신분으로 주인 내외를 섬겼던 것 같다.
어느 날 이스마엘이 동생 이삭을 데리고 놀리는 것을 본 사라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남편 아브라함에게 당장 그 여종과 그 아들을 쫓아내라고 닥달을 하자 크게 근심하고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들을 내어 보내면 이스마엘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과 안심을 시키자 할 수 없이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어 주고 내어 보낸다. 그 길로 무턱대고 방향도 없이 집을 떠나왔지만 가도 가도 끝 없는 브엘세바 사막 길을 헤매다가 물도 떨어지고 목이 타 죽을 지경에 이르러 하갈은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면서 땅 바닥에 주저 앉아 방성 대곡을 하고 만다. 이 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의 눈을 밝히고 샘물을 보여주니 그가 일어나 가죽부대에 물을 가득 담아 아이에게 먹였다는 기록이 성경 창세기 21장에 자세히 나온다.
하여튼 사라와 하갈, 본처와 첩이라는 시앗 사이에서 움트기 시작한 갈등으로 인하여 종내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적통을 서로 바르게 잇고 있다는 유대와 이슬람의 양립불가(兩立不可)의 정통성 시비로 고착화된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인 것 같다.
2) 하갈의 우물 –성천(聖泉) 잠잠
하지만 무슬림들이 하는 얘기는 약간 다르다. 아브라함의 아내(첩이 아님) 하자라(하갈의 무스림식 이름)가 장사하러 고향을 떠나간 남편 아브라함을 기다리기 위해 어린 이스마엘을 데리고 홍해를 바라보며 메카 언덕에 서 있었다고 한다.
사막의 땡 볕 아래서 남편을 기다리는 중 마실 물도 떨어지고 물릴 젖도 나오지 않자 아이를 떨기 나무 아래 두고 언덕과 아이 사이를 무려 일곱 번이나 오가며 남편을 기다리랴 아이를 보살피랴 허기와 갈증을 이겨내랴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랴 기지맥진 하여 절망하고 있을 때 천사로부터 이스마엘이 동동거리는 발꿈치 아래 모래를 파 보라는 계시를 받고는 손으로 죽을 둥 살 둥 얼마큼 팠더니 신비의 물이 솟아나와 물을 아기에게 먹이고 자신도 배가 부르도록 실컷 마셨더니 메말랐던 젖도 나오게 되어 이스마엘에게 젖을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무사히 돌아온 아브라함을 만나 샘을 크게 파고 사람도 마시고 양과 낙타가 마시기에도 넉넉한 물이 나와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을을 이루게 되어 메카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의 내용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몇 가지 의문 점이 있어 잠깐 짚어보고자 한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준 때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게 된지 십 년이 지났다고 창세기 16장 3절에 기록하고 있다.
즉 장소가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과 사우디의 메카 땅이라는 엄청난 거리의 상거가 있다. 그리고 21장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바란 광야에 살았다고 하고 있다. 그 보다 훨씬 뒤의 사건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후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면서 이스마엘과 에서의 후손들이 사는 땅을 점령하기 위하여 싸우는 대신 그 곳을 피하여 돌아가고 있는데 그 곳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넓은 땅 홍해 쪽에 면한 메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무슬림들은 메카 순례시에 하자라처럼 일곱 번을 오가면서 순례를 행하고 이 우물은 잠잠이라는 성천으로 불리우면서 순례왔던 무슬림들이 고향으로 가져가는 가장 귀한 선물이 바로 이 샘물이다.
또 최초의 제단 건축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했는데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두 부자(父子)가 중건하였다는 카바신전에 대한 경배와 탑돌이는 마호멧 훨씬 이전부터 시행되어온 의식이라고 한다.
위의 두 가지 사실은 성경의 창세기 기록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깊은 연구과제를 안겨준다고 볼 수 있겠다.
3) 적자주의와 장자주의
유대교는 성경 구약의 기록대로 철저히 적자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반면 무슬림들은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장자로 인정한다.
따라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적자, 서자설이 이슬람에서는오히려 장자, 차자설로 바뀌고 있다.
성경에는 야곱이 그의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팟죽 한 그릇에 샀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당시의 유대 전통 사상에서 보면 장자의 축복권은 단순히 팟죽 한 그릇에 사고 팔 수 있는 그런 가치로 평가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경의 여러 군데서 언급되고 있듯이 장자 즉 태의 처음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슬림들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자 즉 다른 말로 하면 유대교의 하나님의 신에 해당하는 알라 신이 택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자설에 의하여 이슬람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유대교나 기독교는 이슬람에서 파생되어 갔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 경우 오랜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적서(嫡庶)의 개념을 사회적으로 가르는 전통 속에서 살아오다 보니 무슬림들의 장자권 주장 보다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적서 차별주의에 더 익숙해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사라가 여자의 질투의 본성을 깨닫고 아예 아브라함에게 자기 몸종을 부쳐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과 더 나아가 9.11 테러나, 아프가니스탄, 이락 크 전쟁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 성경 속의 결혼 금지
1) 골육지친과의 성관계는 악행이니라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네 어미의 하체는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라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고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비의 골육지친이니라
너는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의 골육지친이니라
너는 네 아비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 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백숙모니라
너는 자부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니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치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취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들은 그의 골육지친이니 이는 악행이니라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말지니라
레위기 18장 6-18절
누구든지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취하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지니 이는 너희 중에 악행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레위기 20장 14절
2) 레아와 라헬의 질투
위의 성경 말씀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지만 잠시 우리들의 숨을 한번
길게 고르고 창세기 29장과 30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야곱과 레아와 라헬의 애정 생활을 들여다 보기로 하자.
언니 레아가 남편 야곱의 아들을 네 명이나 계속 낳는데도, 자식을 갖지 못하는 동생 레아는 야곱에게 언니를 질투하여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투기를 부려대다가 마침내는 자기의 시녀 빌하를 야곱의 침상에 밀어 넣어 동침하게 한다. 차라리 자기의 시녀와 자게 할지언정 남편 야곱이 언니 레아에게 들어가게 하기 싫다는 참으로 고약한 심뽀가 작용한 것이다.
이리하여 엉뚱하게도 라헬의 질투 덕으로 시녀와 잠자리를 갖게 된 야곱은 그녀와 관계하여 아들 둘을 낳는다. 그리 되자 언니 레아가 또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런 중에도 간혹 야곱과 잠자리를 가져봐도 자식을 낳지 못하자 남편 야곱의 사랑이 전적으로 라헬과 그 시녀 빌하에게 쏠리게 될까봐 초조해진 그녀 또한 라헬의 시녀 빌하 만큼 젊은 자신의 시녀 실바를 야곱의 잠자리에 들여 보내어 첩을 삼게 한다. 이리하여 야곱은 얼떨결에 실바를 첩으로 얻어 그와의 사이에서 또 두 아들을 낳기에 이른다.
그런 후에 다시 레아가 야곱과 잠자리를 가져 아들 둘을 더 낳고 또 디나라는 딸까지 사이에 두게 되어 여섯 명의 아들과 딸 하나 칠 남매를 두게 되었으니 언니 레아는 동생 라헬을 누르고 남편의 절대적인 사랑을 얻었다고 좋아한다.
한편 레아에게서 얻은 아들 여섯 명과 두 시녀들에게서 각기 두 명씩 네 명의 아들을 얻어 야곱은 아들만 열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동생 라헬도 드디어 남편 야곱으로 더불어 아들 둘을 낳게 되었는데 이리하여 이스라엘 십이지파의 족장들이 서로 질투와 시기하는 자매의 사랑 싸움을 통하여 이 네 사람의 여자들의 몸에서 출생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남자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서 벌리는 여자의 마음이란 요상하다고 할 수 밖에…
도저히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 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인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악한 성정을 아시고 처음부터 골육지친과의 성관계를 아주 엄하게 금지하고 계신 이유를 우리들로 깨닫게 하고자 야곱과 두 자매 레아 라헬의 결혼 생활을 통하여 비록 친 동기간이지만 남편인 야곱의 사랑을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질투와 시기에 차서 엄청난 짓들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레아와 라헬의 사랑 싸움에 비추어 보건대 만약에 엄마와 딸이 한 남자를 남편으로 삼아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되어 남편을 사이에 두고 밤에 서로 잠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질투하게 된다면 이런 불행이 세상에 어디 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내와 장모를 아울러 취하면 그들을 모두 불 태워 죽이라고 성경은 엄히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3.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 (아가서 8장 6절 중)
1) 달기의 잔인한 복수
당시에 구후(九侯), 악후(鄂侯), 서백(西伯: 이후의 주나라 문왕)이라는 삼공(三公)이 있었다. 주왕은 구후의 딸이 달기에 필적할 정도로 그 용모가 아름답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를 강제로 데려와서 후궁에 앉힌 다음 그녀와 달기를 옷을 하나도 남김없이 벗겨 세워놓고 차례로 훑어보면서 비교해 보았다. 그녀의 용모에 흡족한 주왕은 그녀를 비에 책봉했으나 정숙한 구후의 딸은 그처럼 황음무도한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주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잔인한 달기는 기뻐한 나머지 또다시 독랄한 형벌을 생각해냈다. 미꾸라지를 여러 마리 잡아오게 한 다음, 구후의 딸을 벌거벗겨서 사지를 큰 대자로 침대 기둥에 묶어놓고 미꾸라지를 그녀의 음부에 집어넣게 했다.
미꾸라지는 습하고 따뜻한 구멍을 좋아하는지라 그녀의 음부 속으로 다투어 파고들었다. 구후의 딸은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2) 여태후와 척부인
사랑의 라이벌 죽이기로 역사에서 기억되는 여인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황후인 여후(呂后)다.
유방이 살았을 적에는 질투심이 타올랐지만 억제 할 수밖에 없었던 여후는 이제 유방이 죽자 것 잡을 수 없는 잔인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척부인(戚夫人)을 잡아놓고 그녀의 옷을 벗기고 힘이 센 내시들로 하여금 두 다리를 잡아당기게 한 다음, 남편 유방과 관계를 가졌던 음부(陰部)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리고는 죄수들에게 척부인을 욕보이게 던져놓았으며, 강제로 독약을 먹여 말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고 코를 발라 뒤집고 귀에는 유황을 붓고 두 눈까지 뽑아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손발을 차례로 잘라 반죽음시킨 다음 '돼지우리' (<사기>「여태후본기」에는 '측중(厠中) 이라 되어 있는데, 혹자는 이를 분통(糞桶)이라고도 풀이함) 에 던져 넣어 사육하게 했다.
당시에는 마치 제주도의 옛날 화장실 모양으로 "돼지우리 + 화장실"로 되어있었기에 여기에 그녀를 집어넣어서 똥과 오줌을 받아먹으면서 목숨을 연명하게 했다는데 참으로 사람의 목숨이란 그토록 질긴 것인가? 그러고도 죽지 못하였던 척부인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련함을 넘어서서 오히려 모진 목숨 때문에 질리고 만다.
3) 측천무후와 왕황후의 원령(怨靈)
잔인한 라이벌 죽이기에는 또 한 사람 중국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들 수 있다. 당 고종(高宗)의 후궁으로 있을 때 자신이 낳은 딸을 목 졸라 죽이고 라이벌인 왕황후(王皇后)와 숙비(肅妃)가 죽였다고 모함하여 이 두 라이벌의 사지를 촌단 술독에 담가 죽였다.
그렇게 죽이고도 왕황후의 친정 성(姓)을 구렁이 망( )가로, 숙비의 친정 성을 부엉이 효(梟)가로 개성(改姓)시켰다. 왕황후가 죽으면서 “내세에 너는 쥐로 태어나고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 너의 목을 물어 죽일 것이다” 했다. 측천무후는 이 원령(怨靈)에 시달려 궁중에 고양이 기르는 것을 금했고 그녀의 사당인 황택사에서도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 것이 법통일 뿐 아니라 이 절에 드는 불경에서 고양이 묘(猫)자는 모조리 삭제시켰다고 한다.
4. 브닌나와 한나
성경에는 수태고지를 받고 아들을 낳는 여인들 얘기가 더러 나온다.
성령으로 예수가 마리아에게 수태되는 얘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대신에 성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여호와, 여호와의 사자, 천사 또는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수태고지를 받는 몇 사람의 여인들 중의 하나가 바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이다.
사무엘상의 1장은 엘가나라는 사람의 두 아내 중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자식이 없다는 기록으로 시작된다.
한 사람의 남자를 가운데 두고 두 여자가 남편으로 섬기는 삶에 대한 얘기 중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한 사람은 자식이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의 여인은 자식을 두지 못하는데, 자식이 없는 여인이 먼저 자식을 가진 다른 여인을 질투하게 되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보면 자식이 있는 여인은 우쭐하여 자식을 갖지 못한 여인에게 남자의 사랑이 자기에게 있다는 듯이 오만 방자하게 굴게 된다.
이리하여 자식을 갖지 못한 여인은 그렇잖아도 질투가 나서 속을 끓이고 있는 판에 자식을 낳은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재롱 뜨는 모습을 보이며 더욱 우쭐대면서 이제 남편은 내 꺼야 하고 부아를 돋우니 견딜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일 수 밖에….자식을 두지 못하여 경쟁 사이인 상대방 여인에게 남편의 사랑까지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게 되는 여인의 초조와 한과 질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게 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자 남편의 대(代)라도 잇게 해야겠다는 순수하고 좋은 뜻으로 자기의 여종을 남편에게 바쳤다가 막상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크게 받아 아들을 낳게 되고 이제는 자신의 종의 신분이라기 보다 자기의 남편을 자기와 공유하는 첩의 신분으로 상승하여 남편 아브라함의 사랑을 다투어야 하는 위치가 되자 예전에 미쳐 예상하지 못하였던 사실 앞에 당황하게 되고 자연적으로 여인으로서의 질투심에 사로 잡히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레아와 라헬은 비록 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동기간이지만 한 남자와 결혼한 사이가 되어 서로 남편을 공유하게 되자 서로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경쟁하게 되고 그 사랑을 많이 차지한 증표가 곧 자식을 낳는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시녀까지 바쳐가면서 자식 낳기 경쟁까지 벌리는 어리석고 이상야릇한 짓을 저지른다.
본질적으로 여인들이란 한 사람의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픈 욕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언니 동생 간이든, 어머니와 딸의 사이이든, 남남 관계든 상관 없이 같은 남자의 여자가 되면 서로 경쟁관계가 되어 투기로 얼룩지게 되는 이런 여인들의 성정을 지니고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경우가 위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 또 한번 한 남자의 아내 되는 두 여인이 질투와 긴장관계를 벌리는 얘기가 실려있다.
그리고 자식을 낳느냐 못 낳느냐가 마치 남자의 사랑을 많이 차지하느냐 않느냐 하는 척도처럼 인식되어 아이를 배지 못한 한나의 고뇌와 슬픔을 나타낸다.
남편 엘가나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혼자 몸인 한나에게는 배나 더 많이 주었는데 그만큼 그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더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남편이 자식을 낳아준 자기보다 자식도 낳지 못한 한나를 남편이 더 위하는 것에 질투가 나고 화가 난 브닌나는 오히려 이를 빌미로 한나를 구박하고 아이도 못 낳는 년이라고 심히 격동을 시키는 바람에 한나가 고민하여 울고 식음을 전폐하곤 했다.
비록 그 남편 엘가나가 이런 한나를 향해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하고 위로 하고 달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그 남편이 아내 한나에게 자식이 없으면 어떻냐고, 내 사랑이 변치않고 그대를 사랑하는 한 열 아들보다 낫지 않냐고 설득을 시키고자 하였지만 한나는 브닌나의 멸시와 우쭐대는 꼴을 더 이상 참지 못하여 화를 삭이지 못하는 한편 남편 엘가나의 위로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는가?
결국 한나는 그 괴로움을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어 어느 날 여호와께 통곡하며 서원기도를 드리게 된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무엘상 1장 11절)
이렇게 하여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이후 그토록 자식을 못 낳아 브닌나의 핍박을 받아 눈물의 세월을 보냈던 한나는 여호와의 은혜로 모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되었다.
아브라함과 잠자리를 갖고 임신하게 된 여종 하갈의 멸시에 견딜 수 없었던 사라가 14년 만에 아들 이삭을 낳고 그 분을 갚았듯이 그리고 언니 레아가 아들만 여섯을 낳고 또 두 사람의 시녀들이 야곱과 관계하여 네 명의 아들을 두고 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그 막혔던 태를 열어주시므로 두 아들을 낳게 된 레아처럼 한나도 종국에는 자식들을 슬하에 두는 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우리는 여기서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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