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군(王昭君)– 35살까지 세 남자를 떠나 보낸 비운의 여인
1. 아버지와 아들의 품에 차례로 안겼던 여인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 ≪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南匈奴傳)」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면, 소설로는 동한(東漢) 채옹(蔡邕)의 ≪금조(琴操)≫, 진인(晋人) 갈홍(葛洪)의≪서경잡기(西京雜記)≫, 대만 작가 고양(高陽)의 ≪왕소군≫, 희곡으로는 원대의 저명한 극작가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秋)≫, 곽말약(郭沫若)의 역사극
그 중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면, 소설로는 동한(東漢) 채옹(蔡邕)의 ≪금조(琴操)≫, 진인(晋人) 갈홍(葛洪)의≪서경잡기(西京雜記)≫, 대만 작가 고양(高陽)의 ≪왕소군≫, 희곡으로는 원대의 저명한 극작가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秋)≫, 곽말약(郭沫若)의 역사극
≪왕소군≫, 조우(曹? )의 역사극 ≪왕소군≫ 등이 있다.
중국 전한(前漢) 말 원제(元帝:재위 BC 49∼BC 33)의 후궁.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에 원제가 전국에서 궁녀를 모집하였을 때 남군(南郡) 자귀(?歸, 지금의 호북성 자귀) 출신의 양가집 딸로 왕소군(王昭君)도 18세의 한창 꽃다운 나이로 궁녀가 되었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이름은 장(·檣·牆). 자 소군.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자귀는 장강삼협에 속하는 곳으로 전국시기의 유명한 시인 굴원(屈原)의 고향이기도 하다.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정략의 도구가 된 宮女(궁녀) 왕소군은 匈奴(흉노) 왕에게 시집갔다.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정략의 도구가 된 宮女(궁녀) 왕소군은 匈奴(흉노) 왕에게 시집갔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기 3년 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선우'는 '왕'이라는 뜻)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가 왕이 되자 그 때의 풍속에 의하여 그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아버지의 아내였다가 아들의 아내가 되는 경우는 구약 성경에도 그런 사례가 나오는데 통일 이스라엘왕국의 성군 다윗 왕을 이어 그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뒤에 아버지 다윗 왕의 여자였던 수넴 여자를 사랑하여 자기의 후궁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물론 이 경우 수넴 여자가 솔로몬과 잠자리를 갖게 되기까지는 온전한 숫처녀로, 이미 남성기능을 상실한 다윗 왕과의 사이에 성관계를 갖지 않고 늙고 차갑게 시들은 다윗의 몸을 덮여주는 몸난로 역할만을 수행하였기에 그들 사이에는 자식을 두지 않았던 점이 왕소군이 호한야의 아들 복주루선우에게 시집갈 때 아들을 두고 있었던 사실과 틀리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솔로몬과 수넴 여자 사이에 자식을 몇 명이나 두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반면 왕소군은 복주루와의 사이에서 딸을 둘이나 두고 있는 것도 틀리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튼 한나라 원제의 후궁이 되었으나 종내는 원제의 사랑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변방 오랑캐 나라라고 내심 얕보고 있는 흉노의 왕을 달래기 위한 공녀로 선발되어 중원을 떠나기 사흘 전에야 왕소군의 아름다움이 원제의 눈에 띄었고 미앙궁(未央宮)에서 그 사흘 동안 밤낮으로 원제와의 아쉬운 사랑을 나눈 끝에 떠나 보내기 싫어하는 원제의 안타까운 심정을 가슴 한구석에 고스란히 담고 그 멀고도 먼 변방의 사막 길을 더듬어 가서 늙은 호한야 왕의 왕비가 되었다가 얼마 후 사별하고 다시 호한야 왕의 전 왕비의 아들을 남편으로 맞아 살다가 사막과도 같은 흉노의 땅에다 한 평생을 묻고 만 그녀의 드라마틱한 생애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시인 묵객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사흘 밤낮의 짧고도 아쉬운 사랑의 불꽃을 태우고 나서 할 수 없이 왕소군을 떠나 보내고 그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지새던 원제는 후회와 시름에 겨워 석 달 만에 결국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2. 낙안(落雁)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원제에겐 후궁이 너무 많아 일일이 천자가 그녀들을 볼 수가 없어서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3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왕소군은 궁중의 잡다한 일을 맡으면서도, 많이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독서와 서예, 가무(歌舞), 그림 등을 익히면서 항상 내실을 다지고 자신을 가꾸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방에서 홀로 고독을 달래며 언제나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 수심에 잠기곤 했다. 낙엽이 지고 풀벌레 슬피우는 가을이 찾아와 차가운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면 그때마다 그녀는 비파를 타면서 마음의 시름과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 유명한 <오경애원곡(五更哀怨曲)>에는 바로 그녀의 이러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마침내 이렇게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 찾아왔다
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58~ BC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흉노에는 내란이 발생하여 호한야의 형 질지골도(?支骨都)가 북흉노를 세워 남흉노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때 한나라의 서역도호(西域都護) 감연수(甘延壽)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질지골도를 죽이자, 호한야는 황급히 원제에게 글을 올려 알현을 청하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3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왕소군은 궁중의 잡다한 일을 맡으면서도, 많이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독서와 서예, 가무(歌舞), 그림 등을 익히면서 항상 내실을 다지고 자신을 가꾸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방에서 홀로 고독을 달래며 언제나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 수심에 잠기곤 했다. 낙엽이 지고 풀벌레 슬피우는 가을이 찾아와 차가운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면 그때마다 그녀는 비파를 타면서 마음의 시름과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 유명한 <오경애원곡(五更哀怨曲)>에는 바로 그녀의 이러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마침내 이렇게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 찾아왔다
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58~ BC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흉노에는 내란이 발생하여 호한야의 형 질지골도(?支骨都)가 북흉노를 세워 남흉노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때 한나라의 서역도호(西域都護) 감연수(甘延壽)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질지골도를 죽이자, 호한야는 황급히 원제에게 글을 올려 알현을 청하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 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자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라면 꼭 공주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라면 꼭 공주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호한야가 이렇게 원제에게 제의를 하자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왕소군을 지명하게 된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이 살폿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잇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 순간 원제도 첫눈에 그만 반하고 말았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이 살폿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잇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 순간 원제도 첫눈에 그만 반하고 말았다.
원제는 연회를 끝내고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철저하게 조사하여 진상이 밝혀지자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모연수를 참수하고 만다.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사흘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사흘 동안에 왕소군과 못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밤 사흘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소군"에는 "한나라 왕실을 빛내고" "황제를 대신하여 흉노를 빛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사흘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사흘 동안에 왕소군과 못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밤 사흘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소군"에는 "한나라 왕실을 빛내고" "황제를 대신하여 흉노를 빛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늙은 신랑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로 중국인으로서는 애석하게 생각하는 미녀이다. 왕소군의 이 역사적인 드라마틱한 슬픈 이야기는 중국이 오랑캐들을 달래기 위한 화친정책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 할 수 있다.
昭君出塞(소군출새)
昭君拂玉鞍 원제의 궁녀 소군,치맛자락으로 구슬 안장 건드리듯..
上馬啼紅頰 말 위에 오르니 붉은 두 빰이 우네
今日漢宮人 오늘까진 한궁의 여인이지만
明朝胡地妾 내일부턴 오랑캐의 첩(妾)
上馬啼紅頰 말 위에 오르니 붉은 두 빰이 우네
今日漢宮人 오늘까진 한궁의 여인이지만
明朝胡地妾 내일부턴 오랑캐의 첩(妾)
향계에 있는 기념관에는 왕소군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우물과 16세때 고향을 떠날 때 까지 사용했던 화장대라 불리우는 16개 돌계단과 동그란 거울 모양의 통로가 있다.
굴원의 고향 자귀는 미인 왕소군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자귀에서 향계하(香溪河)라는 강을 따라 올라가면 향계(香溪)라는 곳이있다. 이곳은 중국의 4대미인 왕소군(王昭君)의 고향이다.
昭君怨(소군원) 1
이백(李白)
漢家秦地月(한가진지월) 한나라 시절 진 땅에 떠 있던 달
流影照明妃(유영조명비) 그림자 흘러 명비를 비추네.
一上玉關道(일상옥관도) 한 번 옥과도에 올라
天涯去不歸(천애거불귀) 하늘 가에 떠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네.
漢月還從東海出(한월환종동해출) 한나라 달은 다시 돌아와 동해에 떠오르건만
明妃西嫁無來日(명비서가무래일) 명비는 서쪽으로 시집가 돌아오지 않네.
燕地長寒雪作花(연지장한설작화) 연나라 땅 긴 추위 눈 꽃을 만들었으나
娥眉憔悴沒胡沙(아미초췌몰호사) 고운 얼굴 초췌하여 오랑캐 모래에 사라지도다.
生乏黃金枉畵工(생핍황금왕화공) 살았을 때 돈이 없어 화공이 잘못 저질렀으니
死遺靑塚使人嗟(사유청총사인차) 죽어 푸른 무덤만 남겨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케 하네.
연지(燕支) : 몽고의 산이름
청총(靑塚) : 왕소군의 무덤으로 백초(白草)가 자라는 호지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중국의 무덤처럼 푸른 풀이 났다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昭君怨(소군원)
동방규 (당나라 시인)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저절로 옷과 띠가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이는 허리 몸매 때문이 아니라네.
昭君墓(소군묘)
상건(常建)
漢宮豈不死(한궁기불사) 어찌 한나라 궁궐에서 죽지 못하고
異域傷獨沒(이역상독몰) 다른 나라에서 홀로 죽어 슬프게 하노라.
萬里馱黃金(만리타황금) 만리 길에 황금을 실어 보냈지만
娥眉爲枯骨(아미위고골) 고운 모습은 마른 뼈가 되었네.
廻車夜黜塞(회거야출새) 수레 돌려 밤에 변방을 나오려 하지만
立馬皆不發(입마개불발) 모두 말을 세우고 떠나지 못하노라.
共恨丹靑人(공한단청인) 그림 그린 사람 함께 원망하며
墳上哭明月(분상곡명월) 무덤에 가서 밝은 달아래 곡하노라.
明妃曲(명비곡) 1
왕안석(王安石)
明妃初出漢宮時(명비초출한궁시) 명비가 처음으로 한나라 궁궐을 나올 때
淚濕春風빈脚垂(누습춘풍빈각수) 눈물은 봄바람에 젖고 귀밑머리는 밑으로 드리웠다.
低回顧影無顔色(저회고영무안색) 고개 떨어뜨려 그림자 보고 안색이 형편 없어
尙得君王不自持(상득군왕불자지) 오히려 군왕이 자제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도다.
歸來却怪丹靑手(귀래각괴단청수) 돌아와서 도리어 그림 그린 사람 괴이하게 여겼나니
入眼平生未曾有(입안평생미증유) 평소에 눈에 듦이 어찌 일찍 없었을까.
意態由來畵不成(의태유래화불성) 의태는 원래 그림으로 이루어짐이 아니거늘
當時枉殺毛延壽(당시왕살모연수) 당시 모연수를 죽임이 잘못이었도다.
一去心知更不歸(일거심지갱불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마음으로 알아
可憐著盡漢宮衣(가련착진한궁의) 가련하도다. 한나라 궁궐 옷을 끝까지 입었구나.
寄聲欲問塞南事(기성욕문새남사) 소리 전하여 변방 남쪽(장안) 일을 물으려 해도
只有年年鴻雁飛(지유년년홍안비) 단지 해마다 날아가는 기러기뿐이로다.
佳人萬里傳消息(가인만리전소식) 가인이 만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기를
好在氈城莫相憶(호재전성막상억) 성안에 잘 있으니 서로 생각 말자고.
君不見咫尺長門閉阿嬌(군불견지척장문폐아교)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지척인 장문궁에 아교를 유
폐한 것을
人生失意無南北(인생실의무남북) 인생 뜻을 잃음이 남북이 따로 없도다.
(*阿嬌는 진황후로 처음 사랑을 받았으나 나중에 유폐됨)
서기 766년 시인 두보(杜甫)는 왕소군의 고향이었던 흥산현 일대를 둘러보며 감회에 젖어 다음의 시를 남기고 있다.
? 懷 古 迹 (영 회 고 적)
두보(杜甫)
群 山 萬 壑 赴 荊 門 生 長 明 妃 尙 有 村 (군 산 만 학 부 형 문 생 장 명 비 상 유 촌)
一 去 紫 台 連 朔 漠 獨 留 靑 塚 向 黃 婚 (일 거 자 대 연 삭 막 독 유 청 총 향 황 혼)
畵 圖 省 識 春 風 面 環 ? 空 歸夜 月 魂 (화 도 성 식 춘 풍 면 환 패 공 귀 야 월 혼)
千 載 琵 琶 作 胡語 分 明 怨 恨 曲 中 論 (천 재 비 파 작 호 어 분 명 원 한 곡 중 론)
수많은 산과 골짜기는 부단없이 이어져 형문에 까지 이르렀는데
자귀현엔 소군이 생장한 마을이 여전히 남아있구나
한나라 궁정을 이별하고 사막을 지나 흉노로 가게 되니
지금은 푸른 무덤만 남아 후세인들을 조문케 하는구나
화공이 그의 모습을 대충 그려내니
달 밝은 밤에 원혼이 되어 그 한이 끊이질 않는다
흉노의 언어로 된 비파의 곡조가 지금껏 내려오는데
소군의 원한이 노래 속에 숨어있는 게 분명하도다
형문산(荊門山)은 지금의 호북성 형문현에 있는 산으로 산 형세가 문과 같다고 하며
시 중에 나오는 명비, 춘풍면, 환패 이 모두가 소군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왕소군의 묘는 청총(靑塚)이라고 불려지는데 지금의 수원성 귀수현 남쪽에 있다고 한다
烏棲曲(오서곡)
이백
姑蘇臺上烏棲時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들이려 할 적
吳王宮裏醉西施 부차는 궁중에서 서시에 흠뻑 취했었네.
吳歌楚舞歡未畢 오가 초무의 환락 끝나지 않았는데
靑山猶銜半邊日 푸른 산은 어느 덧 지는 해를 반쯤 삼켰었네.
銀箭金壺漏水多 은 바늘 세운 금 항아리에선 물 많이 새었고
起看秋月墜江波 일어나 바라보면 가을 달 물결 속에 빠져 있었네.
東方漸高奈樂何 동녘 어느새 밝아 왔으니 못 다한 즐거움 어이 했을까.
이백은 왕소군이란 제목의 시를 두편 지었는데,이것은 후편이다.
4. 청가(靑家) – 고국에의 그리움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눈 앞에 펼쳐져 보이는 것이라곤 황량한 사막과 부옇게 날리는 먼지,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로 뛰노는 소와 양떼들 뿐이었다.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호한야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천막마다 등롱을 달고 아름답게 장식을 하여 왕소군과 혼례를 치른 뒤 "흉노족에게 안녕과 평화를 가져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왕소군을 "영호알씨(寧胡閼氏)"에 봉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호한야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천막마다 등롱을 달고 아름답게 장식을 하여 왕소군과 혼례를 치른 뒤 "흉노족에게 안녕과 평화를 가져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왕소군을 "영호알씨(寧胡閼氏)"에 봉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슬픈 피리소리와, 달리는 준마, 비릿한 음식, 이역의 풍경 등은 왕소군에게 고국의 그리움만 더해 줄 뿐이었다. 왕소군이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지 3개월 후, 3일간의 너무나 짧았던 사랑의 아쉬움에 한이 맺혔던 원제는 왕소군에 대한 그리움을 못 잊어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년후, 즉 한 성제(成帝) 건시(建始) 원년, 왕소군은 호한야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 하였으며 후에 일축왕(日逐王)이 되었다. 아들이 태어난 지 1년이 지난 후 호한야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왕소군의 나이는 불과 24세였다. 이미 3년간 흉노땅에서 생활한 왕소군은 점점 흉노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대알씨(大閼氏)의 장자 복주루(復株累)가 선우의 직위를 계승하자, 흉노의 예법에 따라 왕소군은 복주루의 아내가 되었다. 젊은 선우 복주루는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아 왕소군은 두 명의 딸을 낳았다. 장녀의 이름은 운(雲)이고, 차녀의 이름은 당(當)인데, 후에 이들은 모두 흉노의 귀족에게 시집갔다.
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원년, 복주루는 왕소군과 11년의 부부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왕소군의 나이 35세였다.
2년후, 즉 한 성제(成帝) 건시(建始) 원년, 왕소군은 호한야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 하였으며 후에 일축왕(日逐王)이 되었다. 아들이 태어난 지 1년이 지난 후 호한야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왕소군의 나이는 불과 24세였다. 이미 3년간 흉노땅에서 생활한 왕소군은 점점 흉노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대알씨(大閼氏)의 장자 복주루(復株累)가 선우의 직위를 계승하자, 흉노의 예법에 따라 왕소군은 복주루의 아내가 되었다. 젊은 선우 복주루는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아 왕소군은 두 명의 딸을 낳았다. 장녀의 이름은 운(雲)이고, 차녀의 이름은 당(當)인데, 후에 이들은 모두 흉노의 귀족에게 시집갔다.
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원년, 복주루는 왕소군과 11년의 부부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왕소군의 나이 35세였다.
왕소군. 아, 비련의 여인이여!
사흘 밤낮 아쉽게 불태웠던 한 원제와의 짧은 사랑. 3년 간의 건듯 부는 바람처럼 스쳐가는 호한야와의 부부생활, 그리고 다시 11년 세월이 흘러 서른다섯으로 부부애를 한껏 누릴 즈음에 운명은 아직도 젊은 복주루를 왕소군에게서 그만 무참히도 빼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직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그녀의 배에서 낳은 세 자매만 곁에다 두고 언제나 고국이 그리워 베갯머리를 적셨던 그녀를 이국 흉노 땅에다 댕그마니 남겨놓고 모두 떠나 버린 것이었다.
한 어머니 배에서 나왔지만 씨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보니 그녀의 아들과 그녀의 두 딸의 관계는 삼촌과 조카라는 어색한 사이였기에 그녀의 결혼 생활이 한 여인으로서는 슬플 수 박에 없는 것이었으리라
한편 왕소군의 형제는 서한의 후작(侯爵)에 봉해졌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칙명을 받들어 흉노의 사신으로 가서 왕소군을 만났다. 왕소군의 두 딸도 장안으로 와서 입궐하여 태황태후(太皇太后)를 모신 적이 있다. 이 태황태후는 바로 원제의 황후였다. 태황태후에게는 왕망(王莽)이라는 조카가 있었는데, 후에 왕망은 서한 정권을 찬탈하고 "신(新)"나라를 세웠다. 이에 흉노의 선우는 유씨(劉氏)의 후손이 아닌 왕망을 중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다시 중국의 변방을 자주 침범함으로써 전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립된 화친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왕소군은 한없는 원망과 절망 속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청가(靑家) 또는 청총(靑塚) 이라 하였다고 한다.
역사에서는 왕소군을 "명비(明妃)"라고도 칭하는데, 그 이유는 서진(西晋) 시기에 사마소(司馬昭)의 휘를 피하여 "소군(昭君)"을 "명군(明君)"으로 개칭했다가 후에 점점 "명비"라고 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아들 축일왕 계열은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진 후 동한(東漢)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두헌(竇憲)의 추격을 피하여 모두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계속하여 총령(蔥嶺)을 넘어 유럽으로 들어가 고딕인(Gothic)을 점령하고 그것을 토대로 로마제국의 붕괴를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유럽대륙에 강대한 흉노제국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후세의 헝가리와 세르비아 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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