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바친 사랑, 백색 대리석 진혼곡(鎭魂曲)
인도 최대의 건축물이자 아그라의 상징인 '타지마할'은 그 완벽한 예술성을 위하여 무갈왕조의 모든
재력과 미술, 공예의 정수를 쏟아 부은 것입니다.
가로, 세로 57m, 높이 76m로 중앙 돔 직경이 17.7m로 되어 있는데 완성되기까지 22년의 세월과 국가
예산의 5분의 1이 투입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곳의 내부는 바깥 날씨가 영하이든 영상이든 상관없이 항상 영상 22∼24도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1. 사랑이여! 영원한 사랑이여!
39 살에 아이를 낳다가 죽은 사랑하는 아내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결혼전의 이름)의 영혼의 안식처
를 위하여 이토록 거창하고 아름다운 영묘, 뭄타즈 마할(Mumtas Mahal : ‘선택받은 궁전’이라는 뜻)
을 조성한 인도 무굴 (Moghul)제국의 제5대 왕 샤자한(Shah Jahan)을 우리는 우리의 평범한 상식을
기준으로 하여서는 어떻게도 이해 할 수가 없음을 먼저 고백해야 합니다.
‘뭄타즈 마할’ 이라는 이름이 전와되어 ‘타지 마할’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합니다.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은 1612년에 황제와 결혼한 뒤 샤자한은 아내와 국정에 관해 의견을 자주
나누고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가장 가까운 심복으로 여겼으며, 몸소 군사
원정을 나설 때는 아내를 대동하고 싶어했을만치 부부금슬이 유별났다고 합니다.
1631년 샤자한이 데칸고원으로 원정을 떠났던 어느 날 아내 뭄타즈 마할은 부란푸르라는 도시에서
열 다섯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20살에 왕비로 책봉돼 궁전에 들어와서 39세에 세상을
뜨기까지 14명의 아이를 낳았으니 궁전생활 19년 동안 대부분의 세월을 임신, 산후조리와 아기들을
돌보면서 궁중생활을 끝마친 어찌보면 비운의 여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낳은 아이들 중 7 명이나 죽었으니 어찌 영일(寧日)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확실한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죽기 전에 남편에게 네 가지 약속을 지켜 줄 것을 다짐
했다 합니다. 그 약속은 만약 자신이 죽으면 이 세상에 다시없을 아름다운 영묘를 지어줄 것과,
재혼할 것, 아이들을 잘 돌봐줄 것, 그리고 매년 자신이 죽은 날 무덤에 찾아와 줄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죽거든
나를 위해 슬픈 노래 부르지 마셔요.
머리맡에 장미 심어 꽃 피우지 말고
그늘지는 사이프르스도 심지 말아요.
비를 맞고 이슬에 담뿍 젖어서
다만 푸른 풀만이 자라게 하셔요.
그리고 그대가 원한다면 나를 생각해줘요.
아니, 잊으시려면 잊어주셔요.
나를 위해 슬픈 노래 부르지 마셔요.
머리맡에 장미 심어 꽃 피우지 말고
그늘지는 사이프르스도 심지 말아요.
비를 맞고 이슬에 담뿍 젖어서
다만 푸른 풀만이 자라게 하셔요.
그리고 그대가 원한다면 나를 생각해줘요.
아니, 잊으시려면 잊어주셔요.
뭄타즈 마할은 어찌보면 영국의 여류시인 크리스티나 로젯티보다 훨씬 사랑의 욕심이 많은 여인이
었던가 봅니다. 수다한 후궁을 거느리고도 한눈 팔지 않고 자신만을 사랑하였던 샤자한 왕의 재혼을
허락하면서도 최소한 자기와의 추억을 연면히 이어가기를 소원하여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일년에
한번씩 만나 그 아름다웠던 사랑을 회상하여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샤자한은 아내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대중 앞에 나서는 일도, 왕의 의상을 입는 일도 거부
했으며, 잘 차려진 식사는 물론 음악을 듣는 일조차 중지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은 밤새 새하얗게
변해버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선두에 서서 군사를 이끄는 일도 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일은 남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그라에 머무는 일이 많았고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2년 동안이나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합니다.
16세기부터 인도는 이슬람 영향권에 있는 무굴 제국의 통치를 받았고, 무굴 제국의 5번째 왕인
샤자한(재위기간:1628-1658)의 통치기간 동안 무굴(Moghul)제국은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였
습니다. 샤자한은 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건축 방면에 상당히 탁월한 지식을 가진 군주였기에
야무나(Yamuna) 강기슭에 아내의 영묘를 건설하는 일은 하나의 위안이 되었습니다.
장려한 이 기념비와 똑 같은 것을 두 번 다시 만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샤자한은 타지마할의
주임 건축가를 제거하고 또 건축에 참여했던 모든 인부들의 손목을 잘랐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지고 있습니다.
무굴 제국의 최전성기인 1630년대에 샤자한은 이 세상에서 못 다한 왕비와의 사랑을 위해 흰
타지마할이 건너다 보이는 야무나강 맞은편에 검은색 대리석으로 된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양쪽을
다리로 연결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 종말의 날,즉 알라의 심판
날까지 왕비와 함께 조용하게 잠들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비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국력을 낭비하고, 고달픈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모든 계획을 백지로 돌려 결국 검은 대리석 무덤을
짓겠다는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샤자한은 야무나강 맞은편 멀리 그가 사랑했던 타지마할이 조그맣게 보이는 아그라성에 갇혀서
샤자한은 야무나강 맞은편 멀리 그가 사랑했던 타지마할이 조그맣게 보이는 아그라성에 갇혀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빼앗기는 했지만 아들인
아우랑제브는 샤자한이 죽자 타지마할의 어머니 옆에 아버지를 잠들게 해주었습니다.
2. 백색 대리석 의 신비
타지마할은 이란의 쉬라즈(Shiraz) 출신인 우스타드 이샤(Ustad Isa)에 의해 설계된 것인데, 설계된
대로 만들기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등지에서 동원된 장인들을 포함하여 총 인원이 2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둘러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독이 타지마할만이 백색입니다. 건축 자재 운반을 위해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
되었으며 라자스탄의 마크라나(Makrana)에서 채취된 대리석을 비롯하여 건물 안의 세세한 장식을
위하여 실론(스리랑카)으로부터는 라피스라줄리(청금석), 러시아에서는 공작석, 바그다드에서는
하여 만든 타지마할의 건축비는 4,000만 루피의 엄청난 비용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1631년에 짓기 시작하여 1643년경에는 영묘가 완공되었고,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
1631년에 짓기 시작하여 1643년경에는 영묘가 완공되었고,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
건물이 완공되었으며 22년만인 1653년에야 완공된 이 건물의 정면 마당에는 수로가 있는 정형적인
무굴(Moghul) 양식의 정원을 두고, 좌우로는 회교사원과 회당을 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632년에 건설 초기의 현장을 둘러본 영국인 피터 맨디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 건설은 빈틈없는 근면함으로 진행되고 있다. … 금이나 은은 보통의 금속처럼 밖에 취급되지 않으며,
대리석도 흔하디 흔한 돌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
타지마할의 정면 입구 문은 본래 순은으로 되어 있었으나, 무굴 제국 붕괴 후에 힌두 교도들에게 약탈
되고 말았으며, 지금의 문은 놋쇠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타지마할의 뒤편으로는 야무나(Yamuna)강이 흐르고 있는데, 높은 축대로 쌓여진 야무나 강 쪽의
뒷면을 제외한 타지 마할의 삼면은 모두 높은 담이 둘러져 있습니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
타지마할로 들어서기 위한 1차 관문이 있고 이 1차 관문을 통과하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는데
타지마할은 이 마당을 건너 또 다른 문을 통과해야 볼수 있습니다. 타지마할로 통하는 최종 관문으로
세워진 붉은 사암으로 된 문에는 아랍어로 코란(Kolan)의 경구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흰 대리석의 아름다움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납니다.
이동하는 햇빛을 따라 칠면조의 표정처럼 변해가는 건물의 색채는 의도적으로 고려한 건축의
특별한 기술이라고 합니다.
새벽녘과 저물녘에는 보랏빛과, 분홍의 장미빛, 그리고 억제된 황금빛을 안으로 머금은 채 고요히
새벽녘과 저물녘에는 보랏빛과, 분홍의 장미빛, 그리고 억제된 황금빛을 안으로 머금은 채 고요히
물이 들고 또 날씨의 변화에 따라 보랏빛을 띠기도 하다가 또 푸른색으로 빛나기도 합니다.
이른 아침 안개가 피어 오를 때에는 건물 전체가 선명하게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보여서, 마치
안개 그 자체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념건축물의 형태로 응고된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
킵니다. 많은 모습 중에서도 가장 환상적인 것은 보름달이 비치는 밤의 타지마할입니다.
얼음과도 같은 빛이 돔에서 시작되어, 잔물결을 일으키는 가늘고 긴 연못의 수면에 반사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 그 이상입니다.
묘라기 보다는 하나의 예술품에 가까운 타지마할은 곳곳에서 세심한 배려를 느낄수 있습니다.
영묘의 내부는 빛이 격자 창을 통해 순화되므로, 번쩍이는 외관에 비하면 훨씬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지붕을 이루는 크고 높은 둥근 돔은 하늘나라로 간 왕비의 혼이 오래 머물도록 한
것이랍니다. 묘당 내부는 하얀 대리석 벽면을 일일이 파내어 그 빈 공간에 채색 대리석을 끼워
넣어 꽃을 만든 것으로 매우 화려합니다.
왕비의 석관 또한 꽃무늬로 장식돼 있어 관이라는 느낌을 못 느끼게 합니다. 뭄타즈 마할과
왕비의 석관 또한 꽃무늬로 장식돼 있어 관이라는 느낌을 못 느끼게 합니다. 뭄타즈 마할과
샤자한 두 사람의 묘비는 섬세한 투조 문양을 새긴 대리석 칸막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19세기에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게 되자, 종종 이곳은 야외 파티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한 영국군
장교 부인은 파티에 참석했다가 타지마할을 찬찬히 눈 여겨 보며 죽어서까지 이런 엄청난 호사를
누린 뭄타즈 마할이 너무나 부러워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누가 내게 이런 걸 지어준다면, 내일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예요 !"
타지마할과 관련하여 유명해진 영국인이 두 명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인도 총독(1828-35)을 지낸 윌리엄 벤팅크로, 이 사람은 타지마할을 해체하여 영국으로
가져가 이를 모두 따로따로 경매에 부치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전에 시험 삼아
열린 경매 - 아그라 요새의 대리석을 팔려했던 계획 -에 당시의 빅토리아조 사람들이 냉담한 반응
을 보였던 탓에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타지마할은 수백 개의 조각으로
분리되어 사방에 흩어져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인도총독(1898-1905)을 지낸 또 다른 영국인 조지 커즌은 사적 보호자로서 인도 각지의
마찬가지로 인도총독(1898-1905)을 지낸 또 다른 영국인 조지 커즌은 사적 보호자로서 인도 각지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복구하는데 힘썼던 인물이죠. 타지마할도 그의 노력으로 모습을 일신하게
되었으며, 건설 당시의 모습을 지금까지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유사이래 지구상에 타지마할보다 더 화려한 무덤은 없고, 이보다 더 잔칫집 같은 분위기의 무덤
또한 이 세상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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