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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청나라의 멸망을 재촉한 서태후(西太后)

천하한량 2007. 3. 29. 16:41
저무는 청나라의 멸망을 재촉한 서태후(西太后)
 
1.  야심많은 여인
 
1851년 서태후 자희(西太后 慈禧)가 함풍제(咸豊帝: 청나라 9대황제, 1850~1861)의 후실인 다섯 번째 부인으로 발탁 되었을 때 그녀는 꽃다운 나이 17세였다.
 
만주 귀족출신 하급 관리의 딸로 16살에 궁녀로 발탁되어 입궐하고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년 동안 노력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산보를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래 소리를 따라 찾아가보니 웬 예쁘게 생긴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로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드디어 황제의 다섯 번째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비록 왕의 후궁이 되었지만 많은 후궁들 중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으려면 우선 황제의 침실에 들어갈 야간 당번 대장(當番台帳 ; 血統台帳)에 올라야 한다. 그녀는 황제를 지근(至近)에서 모시는 내시를 매수하여 어느 날 밤 발가벗은 그녀의 누드를 붉은 양탄자에 싸서 황제의 침실에 바치게 한다. 그 날 이후, 자희(慈禧)의 이름이 혈통대장에 계속 나타나고, 황제와 그녀의 동침일시는 문서에 기록되어 옥새가 찍혀졌다.
 
그 때 까지, 황제는 황후(東 太后 慈安)와의 사이에는 물론, 다른 후궁 사이에서도 딸만 하나 있을 뿐, 아들이 없었다.
1856 4. 자희(慈禧)의 나이 스무 살 때 아들을 낳게 되자 황후 자안이 동쪽 채에 살아 동태후라 부르고 대신 그녀는 서쪽 채에 거처가 있었기에 서 태후(西 太后)라는 칭호와 함께 둘째 부인으로 승격된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황태후로 된 후부터 매일 경극을 보았고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허약한 함풍제(咸豊帝) 1860년 영국군이 중국을 침략하여 일으킨 태평천국 난을 피해 간 열하(熱河)의 별궁에서 사망하였다.
황제가 사망하자 황제의 유체(遺體)가 북경에 도착하기 전, 그녀는 앞질러 북경에 도착하여 황제의 동생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실권을 장악하고 재빨리 환관을 매수하여 옥새를 훔쳐 6살 난 아들의 황제즉위를 선언해 버린다. 이 아들이 청의 10대 황제 목종 퉁치제(穆宗 同治帝)이다.
 
함풍황제가 죽은 후 자기가 낳은 6살 난 어린 아들이 황제로 되면서 그녀의 나이 26세 때부터 서태후는 황비에서 황태후가 되어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을 통치한 시간이 거의 48년이나 된다.
 

 
2.  동태후와 서태후
 
함풍제가 죽었을 때 동태후가 제1태후 서태후가 제2태후였는데 처음에는 어린 황제를 대리하여 두 태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서태후는 야심가였으며 정치에 관여하기를 즐겼고 대신 동태후는 정치에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인자하고 사리 밝은 동태후는 복잡한 정치문제는 대신들에게 맡기려고 했기 때문에 서태후는 대신들한테도 환심을 살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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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에 즉위한 동치황제가 17살이 되자 황후를 맞이하여 결혼하고 두 태후의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결정했지만, 생모인 서태후는 계속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무슨 일이나 보고를 받기를 원했고 아들의 주관대로 결정을 못하게 하다 보니 충돌이 많아졌다. 반면 동태후는 정치에서 관심을 떼고 조용히 지냈다. 그러니 동치황제는 차츰 생모인 서태후를 멀리하고 동태후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를 택할 때도 동치황제는 양모인 동태후가 좋아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았고, 이런 일들로 서태후는 동태후 때문에 자기와 친아들 사이의 관계도 벌어진다고 동태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했다
.

어느 해 동태후, 서태후는 궁중 사람들과 함께 함풍황제의 릉에 제사 지내러 갔다. 제사를 지낼 때 동태후는 서태후더러 한 발자욱 뒤에 서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함풍황제 생전에 동태후는 중궁태후(1황후)고 서태후는 황비였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한 서태후는 동태후를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황궁에 돌아온 서태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한가지 두려운 생각 즉 함풍황제가 죽기 전에 동태후한테 준 밀서 생각이 떠올랐다.
서태후의 됨됨이를 알고 있는 함풍황제는 서태후가 자기가 낳은 아들이 황제가 되었다 하여 동태후를 무시하면 이 밀서의 내용대로 서태후를 죽여 버리라는 것이었다.
 
서태후가 어찌해야 좋을까 궁리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마침 동태후가 감기로 앓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태후는 한가지 꾀가 생각났다. 동태후의 병이 나은 후 서태후는 동태후를 보러 갔다. 동태후는 서태후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서태후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거짓말로 동태후를 속였다.

"
언니가 몸져 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중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해서 내피를 중약에 넣어 언니한테 대접했더니 과연 언니의 병이 나아졌다  
 
원래부터 마음이 착한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동생이 이토록 나를 생각하는데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하면서 함풍황제가 준 밀서를 꺼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그 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180도로 달라졌는데 동태후는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번은 서태후가 몸져 누웠다. 마음씨가 어질고 착했던 동태후는 병들어 누워있는 서태후를 보러 몇 번이나 문병을 했는데 서태후의 태도는 웬 일인지 친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몸져누운 서태후가 동태후한데 전병을 보내왔는데 동태후는 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던 것이다.
 
3.   광서황제와 무술정변
 
그리고 그의 아들 동치황제가 황후를 택할 때 자기 뜻을 따르지 않았다 하여 황제와 황후의 접촉을 자주 못하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며느리 되는 황후를 핍박했다. 이에 서태후를 닮아 성격이 급하고 과격했던 동치황제는 황후와도 다투게 되고 타락하기 시작하여 밤이면 변복을 하고 몰래 기생집을 드나들다가 얼마 후 19세의 나이로 천연두(天花)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아들이 죽자 서태후는 자기가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하여 남편을 핍박해 죽였다는 죄명으로 동치황제의 황후를 자살하게 만든다. 그리고 서태후의 여동생과 자신의 시동생 (함풍황제의 동생)이 낳은 아들인 3살밖에 안 되는 조카를 광서황제 자리에 올려놓고 수렴청정을 계속한다. 이 때 광서황제의 아버지 곧 서태후의 시동생은 서태후의 거침없는 정치수완을 두려워하여 3살 밖에 안된 자기 아들을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광서제(光緖帝) 덕종(德宗) 18세가 되자 그녀는 일선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실권을 쥐게 된 광서황제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 사람들의 지지하에 유심파에 의해 군정 실권을 잡으려 하였고 개혁을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1898년에 "유심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무술변법이라고도 한다.
베이징대학을 설립하고, 남경을 새 수도로 정하는 한편, 외국 시찰을 장려하였다.
기술학교를 전국에 설치해서 사원을 학교로 바꾸고 중국식 의복이 양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파작업은 잠시. 황제의 측근이 서태후의 추방을 거론하자 원세개(袁世凱)의 밀고로 추방소식을 들은 서태후는 근위병을 시켜 황제를 가택에 연금시키고 원세개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여 103일만에 변법은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다. 담사동 등 개혁파는 살해되고 강유희, 양계초 등은 외국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백일정부(百日政府)의 종말, 곧 무술정변(戊戌政變)이다.
  <황제는 병환이 위중하여 황태후가 섭정 한다.>
서태후는 예순 네살의 노불야(老佛爺 ; 늙은 부처)가 되어, 다시 정권을 잡는다.
 
광서황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광서황제는 10년간 같혀 있었으며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에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4.   이화원(이和園). 천년 만년을 살고팠던 여름별궁
 
 
서태후는 극히 사치하고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한 식탁은 먹는 것이고 한 테이블은 상상만 하는 것이었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 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 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천여 상자에 가득 들어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고, 또한 자기의 존엄을 위하여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 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줄곧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다고 한다. 매일 내시들이 사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난다고 했다. 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빠지는지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매일 저녁 두 애기 엄마는 목욕을 한 후 젖만 내놓고 몸을 붉은 천으로 다 감싸고 서태후가 침대에 누우면 젖먹이는 두 여인들은 양쪽에서 무릎을 꿇고 젖을 물려 이쪽 저쪽 돌아가며 젖을 먹도록 했다. 중국의 여인들이 누워 있는 남자한테 젖 먹이는 풍습은 아마도 서태후한테서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서태후의 생애에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 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서태후가 비록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제일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문의 중간 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으며 황제와의 결혼식 날 황후의 가마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기 때문이다.
 

 
이화원(이和園).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궁.
곤명호(昆明湖) 호수를 끼고 만수산(萬壽山) 자락에 펼쳐진 궁궐의 모습은 정녕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서태후는 이화원을 무척 좋아하였다고 한다.
아편전쟁과 의화단 사건으로 훼손된 금대(金代)부터 내려온 호산원(好山園)이라는 별궁을
어려운 국고를 탕진하면서 재건하고 이화원(이和園)이라 이름을 고쳐 아끼던 별궁이다.
이화원은 다른 궁궐들보다 여성스럽고 아름답다. 다시금 그녀의 애착을 느끼는 것 같다.
 
청일전쟁에 패하고, 의화단 난 등 말기증세의 혼란을 거치면서 유폐되었던 광서황제도
죽고,  만수산 이화원에서 황제처럼 군림하던 서태후는 1908 11 15일 과식으로 숨졌다.
음욕을 주체하지 못하여 타락한 끝에 파멸에 이른 여인은 많지만, 서태후처럼 먹는 것에 집착하여 너무 많이 먹고 죽었다는 얘기는 또 금시초문일 것 같다. 하루 식사비가 10,000 명 분에 해당했던 그녀가 결국 식욕을 억제치 못하고 과식하여 죽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서태후가 죽기 3일전,  그녀에 의해서 세 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되어 연전에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로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는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를 끝으로 대청제국은 문을 닫고,  1911년 신해혁명의 깃발을 달고, 중국은 공산주의 돛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