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글모음 ▒

음녀(淫女)의 탈선-진시황의 어머니

천하한량 2007. 3. 29. 16:41
음녀(淫女)의 탈선-진시황의 어머니
 
 
1.   음녀(淫女), 그들은 누구인가?
 
진시황의 어머니 주태후는 남자를 성욕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무도하게 불륜을 저지르다가 그로 인하여 아직 포악(暴惡) 광음(狂飮) 무도(無道)해지기 전의 아들, 진시황에 의하여 태후의 위에서 폐위되고 부양궁이라는 작은 궁에 유폐까지 당한 여자이다.
 
워낙 땅덩어리도 크고 역사도 오래다 보니 참으로 다양하고 별난 삶을 살아간 여인들의 얘기가 중국 역사에는 부지기수로 나온다. 그 중에도 성적 타락과 음란의 일생을 산 여인들의 얘기도 너무나 많다.
 
대표적으로 손 꼽을 수 있는 여인들로 하 나라의 말희, 상 나라의 달기, 당의 측천무후, 여기에 실린 진시황의 어머니 등등 .
 
그러나 말희나 달기가 매우 음탕하여 걸왕이나 주왕을 타락시켜 정사를 팽개치게 만들고 주지육림에만 파 묻혀 나라를 망하게 했지만 말희나 달기는 어쨌든 왕 한 사람만을 상대하여 정염을 불 태운 반면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은 후 젊은 나이에 과부의 신세가 되자 밤의 고독과 성애에의 몸부림을 못 이겨 많은 남성 편력을 통하여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웠지만 나라를 망하게 하지는 않았다. 
 
당 태종의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가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지만 대신 태자인 고종과 밀회를 즐기다가 태종이 죽고 나자 고종의 황후가 된다. 간질을 앓는 병약한 고종을 밀어내고 정권을 요리했던 그녀가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들을 독살 폐위시키면서 까지 황제에 올라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이미 고종이 죽고 없는 과부의 몸으로 아직도 몸을 태우는 불꽃처럼 저녁이면 타오르는 남자의 육체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가던 중 자신의 딸인 천금공주의 소개로 황실 귀족가문을 돌면서 강장제를 팔아 온 약장수 풍소보(馮小보)를 만나게 되었다.  당당한 체구에 힘 좋고 잘생긴 호남 풍소보에게 흠뿍 빠진 무후는 남의 이목을 속이려고 승려의 도첩(度牒)을 주고 백마사(白馬寺) 주지 자격으로 10여명 환관을 거느리고 궁중 출입을 시킨다. 이름도 설회의(薛懷義)로 바꾸었다.
 
 질펀한 성의 환락에 빠진 태후와 풍소보가 음탕한 이불 밑에서 만들어 낸 작품이 태후의 여 황제 등극이다. 황제 위에 오른 여 황제는 풍소보가 더 이상 자신의 지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성욕을 채워주지 못하자 싫증을 느끼고 궁중시의(宮中侍醫) 심남구(沈南구)를 새 애인으로 바꾼다. 무후는 그 때까지 복용하던 정력 강장제 메추리를 술에 담가 만들었다는 무후주(武后酒)를 마시며 신선옥녀분(神仙玉女粉)으로 젊음을 유지하였는지 심남구가 잠자리에서 맥을 못 추고 시들해지자 이번에는 무후가 가장 사랑하였던 딸 태평공주가 추천해 준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미소년 형제를 총애한다. 이 때가 보통 여자라면 밤에 별을 따볼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할 나이 무후가 69살이 되었을 때이다.   여 황제의 색정(色情)과 간부(姦夫)사냥은 끝없이 이어졌다. 여기서 잠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어찌 딸들이 어머니에게 외로움을 달래라고 남자를 소개해 주는가 하는 점이다.
 

 
일설에는 무후가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할 남첩 3천명을 거느리고 음락을 즐겼다고 하니 그녀의 음욕이 얼마나 극성이었는지 그리고 십대의 젊음이 펄펄 끓는 두 소년에게 관계 후 코피를 흘린다 하여 정력강장제를 먹였다 하니 70 여인이 과연 이런 절륜의 정력을 유지한 비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음탕한 여자들이 중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서 고금을 통하여 인간의 삶이 이어 지는 곳에는 이런 여자들의 얘기가 늘 있기 마련인데 이 중 조선조의 여인들 가운데 유감동 (兪甘同)과 어우동 두 여인의 경우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세종 실록에 실린 기록을 보면 유감동(兪甘同)은 거의 40명의 남자들과 관계를 했다고 한다.
상호군 이효량(李孝良)은 고급 군관이었는데 감동의 남편인 평양현감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그녀와 간통을 했고 총제 정효문(鄭孝文)은 숙부 정탁이 감동과 간통한 사실을 알면서도 감동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렇게 남자 40명과 간통한 여자 유감동은 세종 9 9 16일에 사헌부에 의해 최중기와 부부로 살면서 김여달(金如達)과 처음으로 간통한 이후 남편과 함께 자다가 소변을 본다는 핑계로 달아나 김여달(金如達)에게 갔다는 구체적 죄목을 적시 받고 교형(絞刑)에 쳐해졌다.  그러나 지사간원사 김학지는 그의 상소문에서 다른 사실을 밝히고 있다.
 
김여달은 무뢰배와 작당을 하여 거리를 휩쓸고 다니다가 어느 어두운 밤에 길에서 유감동 여인을 만나자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 줄 알면서도 순찰을 핑계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 밤새도록 그녀를 유린하였는데 나중에는 남편 최중기가 있는 집까지 드나들면서 계속 성폭행을 하고 마침내는 유감동을 데리고 도망하기까지 하였는데 이후 유감동은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 이 사람 저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으로 김여달의 책임을 중하게 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의 딸로 임금의 종친인 태강수(太江守) 이동(李仝)
과 결혼했다.
어느 날 태강수가 은장(銀匠)을 집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부인 어우동이 계집종의 옷을 바꾸어 입고 은장과 얘기하는 것을 보게 된 태강수가 노하여 어우동을 내쫓고 말았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남편에게서 쫓겨나 친정 집에서 실의에 차서 적적한 나날을 보내는 어우동에게 오종년이란
사헌부 도리(都吏)를 소개시켜 준 것은 계집종이었다. 이후 어우동은 스스로 먼저 유혹하거나 또는 유혹당하기도 하면서 방산수 이란, 수산수 이기, 전의감 생도 박강창과 이근지, 내금위 구전, 생원 이승언, 학록 홍찬, 서리 김의향, 밀성군의 종 지거비 등과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했을 뿐이다.
 
성종 11 10 18. 어우동이 교형을 받던 날 어우동의 어미 정씨는 사람들이 그 딸이 저리 된 것은 그 어미가 음행(淫行)이 심하기 때문이라는 소리를 하자 인간은 누구나 성욕 (性慾)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에 따라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을 뿐 음욕 (淫慾)이 어찌 죽음의 대상이 된단 말인가 고 목 매달려 죽는 딸의 죽음을 원통해 하고 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성종 17 1 22일 왕의 종친 덕성군(德城君)의 처 구씨가 조카 이인언(李仁彦)과 간통(姦通)한 사건 이 있었는데 이인언이 사헌부 심문에서 밝힌 내막 일부 중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내가 일찍이 허벅지에 종기가 나서 누워 있는데, 숙모 구씨가 와서 아픈 곳을 묻고 종기 난 곳을 문지르면서 음욕(淫慾)의 빛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또 와서 종기를 만지다가 음근(陰根)에 미치기에 내가 발로 찼습니다. 그 뒤 내 병이 나은 어느 날 어두운 밤중에 구씨가 나를 불러 밀과(密果)를 주면서 침방(寢房)으로 끌고 들어가서 내가 차라리 어우동이 되어 죽더라도 정욕을 참을 수 없다 고 말하면서 여자가 먼저 옷을 벗기에 드디어 간음하게 되었습니다.
 
성경 구약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 벌거벗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에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을 보고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고 하나님이 부르자 벌거벗었기에 두려워 숨었다고 아담이 대답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먹었느냐고 아담에게 묻는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 12)
 
이 대화에서 보면 아담은 단지 이브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 끌어넣으려고 하고 있다.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사랑스런 여자가 간곡히 권하는데 어찌 안먹을 수 있냐는 투다.
 
마찬가지로 숙모 구씨와 간통하게된 이인언은 전에는 자기의 아랫도리를 만져도 뿌리쳐 냈지만 깊은 밤 밀과를 들고 와서 침실로 끌어들인 뒤 한 꺼풀씩 옷을 벗어서 나신이 되어 요염하기 그지없는 탱탱한 여체로 어우동처럼 죽어도 좋다면서 뜨거운 입김을 뿜으면서 다가오는데 어찌 버틸 장사가 있겠느냐고 한다. 참말로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서화담 이라면 모를까 어느 남자가 이런 지경을 몰라라 하고 외면 할 수 있으랴.
 



 
중종 이후에는 이조 왕조실록에 이런 간통사건이 기록되지 않게 되는데 조선 중.후기 세도정치를 통하여 퇴폐행위(頹廢行爲)가 만연했던 사실에 비추어 유독 성 풍속 사범이 이후로 없어졌기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2의 유감동 어우동 사건 같은 게 비일비재 했겠지만 조선조 중기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윤리학을 바탕으로 한 성리학의 국가이념을 먹칠하는 성 담론을 추방시키므로써 이조 양반 사회의 성()에 대하여 위선적인 이미지를 덧 씌우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2.  차기화가거야(此奇貨可居也)
 
기원전 250년 경.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 후기는 14개 도시국가들이 서로 끊임없이 다투고 싸우는 투쟁의
시대였다. ()의 혜왕5(惠王五年)에 진()의 소양왕(昭襄王)은 전열을 정비하여 10
대군으로 조()나라를 쳤다. 그러나 진()은 대패하고, 오히려 황손(皇孫) 자초(子楚)만 사로 잡혀 인질이 되고 말았다.
 
 ()나라 소양왕(昭襄王)의 태자는 안국군(安國君)이었다.
 태자 안국군과 정부인 화양(華陽)부인 사이에는 아들이 없고, 애첩들 사이에만 20여명의 공자가 있었다. 그 중 안국군과 애첩 하희(夏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공자가 바로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가있는 자초(子楚)였다. 본시 조()와 진()은 한 임금의 자손이 갈라져 세운 나라여서 난형 난제의 형편으로 만나면 싸울 정도로 적대시 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조()의 혜왕(惠王)은 사로잡은 공자 자초(子楚)를 죽이지 아니하고 신하인 공손건(孔孫乾)의 집에 인질로 잡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나라 복양( 陽. 오늘날의 하남성 복양 서남쪽)사람으로서 양적(陽翟. 오늘날의 하남성 우현/禹縣) 지방의 대 상인이었던 여불위(기원전?-기원전 235)는 한단(邯鄲)에서 조()나라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진()나라 공자(公子) 자초(子楚)를 우연히 발견하고, 이른바 기화(奇貨)라고 판단하였다.
 
"이건 뜻밖의 물건이니 사둘 가치가 있겠는걸(此奇貨可居也)."
 
돈積居奇(돈적거기; To hoard up goods and take the advantage of their scare in the market) 진귀(珍貴)한 물건을 사 두었다가 훗날 큰 이익(利益)을 얻음을 뜻하는 말이며 위의 차기화가거야(此奇貨可居也)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여불위는 자초를 감시하는 조나라 대부 공손건에게 많은 돈을 주고 그의 소개로 자초를 만나게 되었다.
 
"제가 공의 문()을 크게 넓혀드리겠습니다."
자초는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문을 넓힌 다음에 내 문도 크게 만들어 주시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의 문은 공의 문이 커짐에 따라 커질 수 있습니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상황 등을 말하며 자신의 재력(財力)을 이용하여 자초가 태자에 세워지도록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공의 부군이신 안국군(安國君)께서 태자가 되셨으니, 안국군께서는 곧 소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그런데 안국군께서는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총애하시지만, 아들이 없습니다. 공께서는 20명의 형제가 있으나, 중간 아들이고 또 사랑도 받지 못하였으므로, 태자의 지위에 오르는데 결코 유리한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한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겠소?"
"저 비록 가난하지만 천금(千金)을 내던져, 우선 안국군과 화양부인의 환심을 사고, 공을 후사로 삼아주도록 힘을 써보겠습니다."
 
자초는 머리를 숙여 절하며 여불위에게 말했다.
 
"만약 그대의 계책이 실현된다면 그대와 함께 진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겠소."
 
여불위는 오백금을 자초에게 주며 말했다.
 
"널리 빈객들과 교제하시며 인재를 모으십시오. 저는 공의 귀국을 위해 조나라의 고관들에게 손을 쓰겠습니다."
 
여불위는 오백 금으로 진기한 물품을 사 가지고 수소문하여 화양부인의 언니를 찾아갔다.
여불위의 계획 대로 그녀는 화양부인을 감언 이설하여 인질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가 돌아오면 적자로 삼을 것을 약속 받는다. 마침내 여불위는 온갖 재력과 능변(能辯)으로 자초를 태자로 세우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여불위는 일찍이 한단의 여자들 가운데 미모가 빼어나고 가무(歌舞)에 능한 여자들을 골라 첩으로 두고 있었는데 그 중에도 주희(朱姬)라는 미모의 애첩을 제일 사랑하였다.
 
여불위는 공손건과 자초를 초청하고 애첩을 시켜 자초를 유혹한다.
포로가 되어 초라한 생활에 찌들었던 젊은 자초는 여불위의 융숭한 대접과 아름다운 주희의 유혹에 앞뒤 돌아볼 겨를 없이 밑 없는 그녀와의 사랑의 독에 빠져 버렸다.    
그녀가 택일을 하고 자초에게로 갔을 때 주희의 뱃속에는 여불위와의 사이에서 만들어진 생명이 잉태되고 있었다.
 
주희는 이듬해 사내아이를 낳고 이름을 정()이라 하였으니 그가 곧 후일, ()나라의 시황제가 되는데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따라다니게 된다.
 
소양왕 58년 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태자 안국군(安國君)이 진나라 효문왕으로 보위에 오르고 자초는 태자로 책봉된다. 이에 조나라는 자초의 부인과 그의 아들 영정을 진나라로 보내주었다 물론 주희는 태자비로 책봉 되었다.
  
진나라 효문왕이 즉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태자 자초는 그의 뒤를 이어 장양왕(莊襄王)으로 즉위하였다. 장양왕 자초는 화양왕후를 화양태후로 책봉하는 한편, 자신의 부인인 주희는 황태후(皇太后)로 세웠다. 효문왕은 여불위를 진나라의 승상에 임명하고, 그를 문제후(文諸侯)에 봉하여 하남 낙양의 십만 호를 그의 봉지(封地)로 삼게 하였다.
 
3.   여씨춘추
 
돈과 권력을 한 손에 넣은 여불위는 지식인들을 널리 초빙하여 후원했다. 이러한 일은 전국 시대 제나라에서 위왕, 선왕, 양왕 대에 걸쳐(4세기 중엽-BC 3세기 중엽 B.C.) 특히 성행하여, 이른바 직하(稷下)의 학문을 이루었다. 제나라가 쇠퇴한 이후 직하의 지식인들은 흩어져서 여러 나라의 제후들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직하의 학자들은 제나라 도읍의 서문인 직문(稷門) 근처의 건물에 머물렀다. 맹자, 추연, 신도, 순자 등도 직하의 학자로서 활동한 바 있다.
 
이러한 지식인들을 다시 끌어 모은 것이 바로 여불위였다. 그의 집안에는 하인 1만 명에, 4천 명의 식객들이 있었다고 하며, 여불위는 그들에게 각자의 식견을 발휘하여 저술을 하게 했다. 그들이 쓴 것을 집대성하여,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 등 모두 26권에 20여만 자로 이루어진 책을 만들었다 그 결과 기원전 239년에 탄생한 것이 바로 여씨춘추(呂氏春秋)이다.
 
여러 학자들이 집필한 글을 모아서 편찬한 책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무척 다양하며, 내용상의 일관된 체계성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다. 도가, 음양오행가, 소설가, 묵가, 법가, 유가, 종횡가, 농가 등, 사실상 선진 시대의 다양한 학문 유파들의 사상을 모두 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절충주의적, 제설혼합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다양한 사상 유파의 장점을 취하여 통일 제국 시대를 예비하고자 했던 여불위의 뜻은 현실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못했다. 시황제는 오히려 다양한 사상 유파를 제거하고 오로지 무력, 강제, 법에 의한 통치를 시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시황제는 획일적 통일성을 강조한 법가 사상가 이사(李斯: ?-208 B.C.)를 중용하여 통일 제국 진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게 했다.
 
그는 이 책을 도읍인 함양 성문에 진열하고, 그 옆에는 천금의 현상금까지 놓아둔 채, 제후국의 세객(說客)들과 빈객들로 하여금 참관하도록 하며,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이 책에서 잘못을 찾아내어, 한 자라도 빼거나 더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상금으로 천금을 주겠다(延諸侯遊士賓客有能增損一字者予千金)."
 
하지만 여불위의 권세가 두려워 감히 고치려고 나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4.  음락(淫樂)에 지고 새는 밤과 낮
 
태후 주희의 지침 없는 밤 놀음 즉 황음행위(荒淫 行爲)에 진이 빠져버린 장양왕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주태후는 병약한 장양왕을 옆에 두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건장한 옛 정인 여불위를 황후의 침방으로 불러들여 성관계를 갖고 성애의 갈증을 달래곤 했다. 드디어 장양왕이 3년 만에 죽게 되자 13살의 어린 태자 영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여불위는 다시 상국(相國)으로 추대되고 중부(仲父)라 칭하였다.
 
왕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왕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던 탓으로 과부가 된 황태후 주희는 타오르는 정욕의 불길을 끌 수 없어 아무 때고 여불위와 궁중에서 사통(私通)하였는데 진시황이 장성하도록 이런 두 사람의 음행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성경 구약 잠언 7장에서 우리는 음탕한 여자가 어떤 여자인가를 알게 하는 사건과 만난다.
 
남편이 한 보름 돈벌이 하러 집을 떠나자 마자 그새를 못 참은 여인이 남편이 집에 없는 동안 어떤 남자를 유혹해 성적 만족을 실컷 채울까 하고 궁리하여 요란하게 옷을 차려 입고 이 거리 저 광장 모퉁이로 돌아다니며 남자들을 유혹하려다가 마침내 깊은 밤에 만난 소년에게 다가가 더운 입김을 뿜어내며 다짜고짜 입을 맞추고 남편이 출장 가고 없는 자기 집 안방으로 끌어 드린다. 여자의 침실로 들어가자 화려한 문양의 침구들이 놓여있다. 화문요와 이집트 상인한테서 산 꽃 무늬가 아름다운 애굽 문채의 이불이 펼쳐져 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향을 뿌린 방안은 젊은 남녀의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여자가 청년을 끌어 안고 침상에 들어 누우며 뜨겁게 속삭인다.
 
우리 아침까지 밤새도록 사랑해 보자. 마음껏 즐겨 보자꾸나.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것이다. 여자하고 자 본적 있어? 없지 그렇지?  인생이 뭐 별건가? 온 전신을 훑는 남녀가 벌리는 격렬하고 깊은 교합의 쾌락보다 더 즐거운 것이 세상에 어떤 것이 있는가 이제 알게 될 꺼야? “
 
남편이 집을 나가자 말자 혼자 자야 하는 잠자리의 외로움과 허전함을 그 새 못 참고 이를 달래기 위하여 당장 길거리로 뛰쳐나가 다른 남자의 품을 찾는 여자를 여기서는 음탕한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잠언 7 22절과 23절에 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소가 푸주로 가는 것과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그 깊은 열락(悅樂)의 함정 속에 함몰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음탕한 여자의 말로도 마찬가지이리라. 쾌락은 짧지만 파멸은 길다.
 
한번 억제하지 못하고 정염의 불길에 몸을 내 맡기게 되면 겉잡을 수 없이 타오르게 되는 것이 육체의 정욕의 속성인가?
 

 
남편과의 나이 차이가 35살이나 되었던 로마황제 크라디우스의 황후 메사리나는 늙은 황제로부터 성적 욕망을 충분히 채우지 못하여 저녁마다 미남 배우들을 불러들여 궁중에서 난교 파티를 벌렸지만 그래도 성욕을 채우지 못하였다고 한다.  드디어는 창녀로 변장하여 길거리로 나가서 밤새도록 닥치는 대로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고는 새벽에 궁궐로 돌아갔는데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었다고 한다.  주태후가 어쩌면 메사리나와 어금버금 가는 동서양의 색광으로 이름 떨친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갈수록 젊은 주태후의 만족을 모르는 한정 없는 육정(肉情)의 불길을 꺼 주기에 자신의 정력으로는 불감당이라는 것을 느끼는 한편으로 왕에게 들통이 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여불위는 한 가지 계책을 마련하였다.
 
여불위는 암암리에 남성의 심볼이 큰 것으로 소문난 노애(노毒)라는 사인(舍人)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여불위는 오동나무로 작은 수레를 만든 다음,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노애로 하여금 그의 거대한 물건을 꺼내어 바퀴의 축에 끼워 빠르게 돌리도록 하였는데, 노애의 그것은 한참 동안 조금도 시들어지지 않고 전혀 다치지도 않았다. 이 일은 하나의 기문(奇聞)이 되어 함양성에 널리 퍼져나갔다.
   
주태후가 노애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노애라는 사람을 손에 넣고 싶어 안달이 난 어느 날, 자신을 실컷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시원찮은 여불위한테 노골적으로 노애처럼 물건이 큰 남자와 잠자리를 갖고 싶다는 하소연을 한다.  
 
그러자 그렇잖아도 한없이 탐욕스럽게 파고드는 주태후와의 성관계가 이제 부담스럽기 조차 했던 여불위는 노애가 부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여 부형에 처한 척 속이고 앞으로 환관행세를 하게해서 궁궐에 두면 될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녀는 여불위의 계교대로 부형(腐刑)을 관장하는 관리에게 몰래 후한 상을 내리고, 노애의 수염과 눈썹을 모두 뽑아 고자가 된 것으로 꾸미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후는 노애를 수중에 넣은 뒤, 노애의 엄청난 물건의 위력과 왕성한 정력으로 눌러대는 힘 앞에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날마다 하늘이 노래지는 음락(淫樂)에 빠져 있었다.
 
성경 창세기 1장에는 천지 창조 첫째 날부터 엿새 동안 매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 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처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날과 달의 바뀜에도 성애(性愛)의 탐닉(耽溺)에 빠져 세월 가는 줄도 몰랐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태후는 노애와 즐기다가 결국 임신하게 되었는데 이를 숨기기 위하여 주태후는 거짓으로 점을 쳐, 액운을 피해야 한다는 구실로 노애와 함께 궁을 떠나 100 킬로나 떨어진 옹궁(雍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렇게 두 아들을 두게 된 노애와 주태후는 진시황이 죽으면 자신들이 낳은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을 꾀하기도 했다. 
 
진시황 9(기원전 238), 누군가가 진시황에게 노애는 진짜 환관이 아니며, 주태후와 음행을 일삼고 있으며, 이미 두 아들까지 낳았다 라고 고해 바쳤다. 진시황은 소문의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한 뒤, 모든 사실을 파악하게 되고 이 일에 상국 여불위까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해 9, 진시황은 노애와 그의 삼족을 멸하고, 자신의 어머니 곧 주태후가 낳은 두 아들, 즉 씨가 다른 두 아우는 낭박(囊拍; 자루에 넣어 때려 죽이는 형벌)으로 죽였으며, 어머니 주태후를 옹()지방으로 유폐시켰다가 효를 간()하는 자의 호소를 듣고 환궁 조치하여 부양궁에 유폐시켰다. 
 
이듬해 10, 여불위는 진나라 상국의 직위를 박탈당하자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여불위와 노애를 제거한 진시황은 장군 내사승(內史勝), 왕분(王賁), 왕전(王전) 등과 함께 한(), (), ()를 멸망 시켰다.
 
전 중국을 통일시킨 왕은 수도 휀양(咸陽)에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마침내 황제의 위()에 오르고, ()의 시황제(始皇帝)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