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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죽여 권력을 취한 측천무후(則天武后)

천하한량 2007. 3. 29. 16:40
자식을 죽여 권력을 취한 측천무후(則天武后)
 
 
1.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던 후궁
 
() 고조(高祖) 무덕(武德) 7, 서기 624 1 23일 무측천은 수도 장안(長安)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관적은 병주(幷州) 문수(文水: 지금의 산서성 문수)이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武士확)은 수() 양제(煬帝) 때 목재상이었는데 수양제의 대형 토목공사 덕택으로 거부가 되었다. 이때 그는 목재 장사를 하면서 권문세족들과 교분을 두텁게 쌓아 하급 군관으로 들어갔다.

617
년 당 고조 이연(李連)이 거병을 하자 무측천의 아버지는 군수관(보급물자 담당장교)의 신분으로 이연을 보좌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이연은 장안을 점령한 후에 그러한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하고 태원군공(太原郡公)에 봉했다. 이로써 그는 14명의 개국공신 행열에 들어가 당 왕조의 신흥 귀족이 되었다
.

620
년 무측천의 아버지는 본처가 병으로 사망하자 수 왕조 때의 권세가 양달(楊達)의 딸과 재혼하여 세 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 중 두 번째 딸이 바로 무측천이다
.

무측천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담이 컸다. 일찍이 무측천의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무측천은 13~14세 때 이미 많은 서적을 박람하여 견식을 넓히고 시사(詩詞)의 기초를 닦았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

636, 당 태종 정관貞觀 10,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황후 장손씨(長孫氏)가 병사한 후, 그 이듬해에 무측천의 용모가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황궁으로 불러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았다. 이때 무측천은 불과 14세의 어린 소녀였는데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다소 거친데다 여자로서 애교를 부릴줄 몰랐기 때문에 좀처럼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당시 그녀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어 소개한다.

그녀가 갓 황궁에 들어온 어느 날 태종은 후궁들을 데리고 성질이 포악하여 사자총 이란 이름을 가진 사나운 말을 보러 갔다. 태종은 사자총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

"그대들 중에서 저 말을 제압할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겠는가?"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였지만 무측천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에게 쇠채찍과 철퇴와 비수만 주시면 됩니다. 먼저 저 말이 말을 순순히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후려치고, 그래도 계속 난동을 피우면 비수로 저놈의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실로 연약하고 아름다운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을 함부로 하는 그녀를 태종은 예쁘게 보지 않았다. 결국 무측천은 황궁에 들어간지 12년이 지나도록 태종을 위해서 단 한 명의 자식도 생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재인의 직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도 못하였다.
 
649(정관 22)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무측천은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이러한 무측천이었지만 오히려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고종)는 일찍이 태자 시절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이치가 태자 시절에 무측천과 어느 정도 깊은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역사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세간에 전해오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허구화된 소설일지라도 흥미진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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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 태종의 기일(忌日)에 황제가 된 고종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다가 홀로 쓸쓸히 지내는 무측천의 모습을 보고 옛정에 사로잡혔다. 이에 고종은 예교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데리고 들어갔다.

 
2.    딸을 죽여 황후가 되다
 
아버지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던 그녀는 태자 고종과 은밀한 사랑을 불태운 도덕적으로는 패륜을 즐긴 여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여인이면서 아들과 놀아난 여인이었으니.
 
무측천이 다시 황궁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28세였다. 보통 그 나이의 여자라면 열 몇 살의 젊고 싱싱한 다른 후궁들에 비해 신선미가 다소 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측천은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고종의 12명의 자녀 중  뒤의 6(4 2)이 모두 무측천의 소생인 것을 보면 당시 무측천에 대한 고종의 총애가 어느 정도였던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측천이 다시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와 후궁 소숙비(蕭淑妃)의 사랑 다툼이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고종의 마음은 황후 왕씨의 라이벌이었던 소숙비에게 쏠려 있었는데, 황후 왕씨는 그러한 고종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 놓기 위하여 고종에게 무측천의 입궁을 적극 부추켰던 것이다. 실로 고양이를 잡기 위해 범을 데리고 온 셈이 되었다.
 
이리하여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동시에 받으면서 무측천의 품계도 정이품 소의(昭儀)까지 올라갔다. 이로써 그녀는 9명의 빈()들 중에서 으뜸이 되었으니, 그녀의 위에는 황후와 4명의 비()밖에 없었다.
 
무측천의 최종 목표는 황후였다. 그녀는 갖은 방법으로 환관과 궁녀들을 구슬리면서 이용하였는데 특히 황후나 소숙비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그들에게 황후와 소숙비의 행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일차적으로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찍어냈으며, 고종이 소숙비를 폐서인 시킨 후에는 곧바로 황후 왕씨에게 마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무측천은 둘째 아이로 아주 귀여운 딸을 낳았다. 고종과의 사이에 애가 없었던 황후 왕씨는 자주 찾아와서 이 딸애를 데리고 놀았는데, 고종이 올 때 쯤이면 여자로서의 질투심을 누르고 무측천과 임금의 사랑놀음을 위하여 자리를 비켜주고자 먼저 나가곤 했다. 무측천은 황후 왕씨를 제거하는데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무측천은 황후 왕씨가 딸애를 보러 왔다가 먼저 나간 뒤에 자기의 딸애를 목졸라 죽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때 고종이 들어오자 그녀는 웃으면서 고종을 맞이하였고, 잠시 후 고종이 이불을 젖혀보니 이미 딸애는 죽어 있었다. 깜짝 놀란 고종은 조금 전에 누가 이 방에 왔다 갔는지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조금 전에 이 방에 왔다 간 사람은 황후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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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
년 겨울, 고종 영휘(永徽) 5 10 13일에 고종은 마침내 무측천을 지지하던 이의부(李義府)와 허경종(許敬宗)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폐서인 시킨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로부터 6일 후인 10 19일 무측천은 공식적으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이렇게 하여 황후가 된 무측천은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그 두 사람에게 각각 곤장 백대씩을 친 다음 잔인하게도 두 다리를 잘라서 산채로 술 항아리 속에 넣어두고 고통 속에 죽어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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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권력이냐 아들이냐 ? 비정한 어머니의 선택
 
무측천은 권력을 위하여 첫 아들과 둘째 아들을 손수 죽인 참으로 비정하고 악독한 여인이었다.
 
무측천은 자신의 권세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친자식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무측천에게는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현(李顯 :다른 이름 이철(李哲), 이단(李旦, 이륜李輪 이라고도 함)이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656년 태자 이충(李忠)이 폐위되자 무측천의 장남 이홍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홍은 착하고 온순한데다 겸손의 미덕까지 갖추고 있어 고종과 여러 대신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후 고종은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황위를 그러한 이홍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자신이 공들여 닦아놓은 권력의 기반을 송두리째 자기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 이홍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 권력이냐 자식이냐? 이 양자택일의 중대한 기로에 선 무측천은 비정하게도 자식을 버리고 권력을 택하였다. 675(高宗 上元 2) 무측천은 24살의 아들에게 독약을 먹여서 죽여 버린다
.

이홍이 죽은 후 고종은 원래 두통 증세가 있던데다 정신적 충격까지 받아 현실적으로 더 이상 정사를 계속 돌보기가 어려워 황위를 무측천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측천은 황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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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이 죽은지 한 달 후에 둘째 아들 이현이 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은 형 이홍에 못지 않을 정도로 총명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뛰어났다. 더욱이 재상들이 주변에서 그를 잘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측천은 다시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다. 결국 무측천은 다른 사람을 교사하여 태자가 여색을 탐한다고 모함하게 하였다. 680 8월 이현은 태자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폐서인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파주(巴州)로 추방되었다. 684년 무측천은 중종 이철을 폐위시킨 사흘 후에 파주로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둘째 아들인 이현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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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이 폐서인 된 이튿날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에 책봉되었다. 683년 고종은 황위를 태자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써 태자 이철이 황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중종(中宗)이다. 중종은 그의 형들에 비해 아주 나약했기 때문에 무측천은 처음부터 순순히 그의 즉위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황태후가 된 어머니 무측천을 안중에 두지 않고 황후 위씨(韋氏)와 그 일족들을 총애하여 먼저 자기의 장인 위현정(韋玄貞)을 재상에 임명하였다. 고종이 임종시에 임명하였던 고명(顧命) 재상 배염(裵炎)이 동의하지 않자 중종은 안하무인격으로 그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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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천하를 모두 그에게 주었는데 어쩌겠단 말이오?"

배염은 무측천에게 달려가서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무측천은 즉각 대신들을 건원전(乾元殿)에 소집하여 중종을 폐위시켜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한 다음 유폐시키고 자기의 막내 아들 이단(李旦), 즉 예종(睿宗)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예종의 정사 참여를 배제한 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모든 대소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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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초의 여자황제
 
순조롭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무측천은 미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형성해 나갔다. 예를 들면 그녀의 조카 무승사(武承嗣)는 사람을 시켜 "황제의 모친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황제의 업적이 영원히 번성하리라(聖母臨人, 永昌帝業)"라는 글귀가 새겨진 흰돌을 낙수(洛水)에서 가져왔다고 하면서 바치게 하였다. 그것을 본 무측천은 매우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였다.

690 9 9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하여 무측천은 마침내 예종을 폐위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준비해 둔 도읍지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그녀를 "무주(武周)"라 일컫는다. 무측천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였으니, 중국역사상 그녀는 황제에 즉위한 나이가 가장 많은 황제가 되었다.

2005 8 1, 사우디의 압둘라 왕은 82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에 비하면 그녀는 오히려 많이 젊은 편이다.  
 
무측천은 비록 심성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인재들을 초빙하기 위하여 무측천은 최초로 과거제도 중 최고의 시험으로 궁전의 대전(大殿)에서 거행하며 황제가 친히 주관하는 전시(殿試)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녀는 또 무거(武擧)를 설치하여 무예에 뛰어난 사람을 관리로 선발하였으며, 각급 관리와 백성들이 직접 천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뛰어난 문인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조정을 위해서 정책을 마련하거나 상소문을 처리하게 하는 등 재상의 업무를 보좌토록 하고, 그들을 북문학사(北門學士)라 하였다. 그녀의 집권 시기에는 정관(貞觀: 627~649, 당 태종의 연호) 시기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궁궐에 인재가 가득하였는데 당시에 재상을 역임하였던 이소덕(李昭德)·소량사(蘇良嗣)·적인걸(狄仁杰)·요숭(姚嵩) 등은 모두 뛰어난 재상으로 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무측천이 총애하던 환관 설회의(薛懷義)가 권세를 등에 업고 거만하게 횡포를 일삼자 많은 고관대작들이 모두 그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아첨을 다 떨었다.

어느날 그가 재상만 출입할 수 있는 남아(南牙)라는 곳에 들어갔다가 재상 소량사에게 들켰다. 소량사는 부하들에게 명하여 그를 끌어내어서 따귀를 몇 십대 치게 했다. 설회의는 곧장 무측천에게 달려가서 자신의 억울함을 울면서 호소했으나 무측천은 오히려 그를 꾸짖었다.

"
남아(南牙)는 재상이 출입하는 곳인데 네가 어찌 그리로 들어갔단 말인가?"

이 에피소드는 무측천이 재상에 대한 신뢰와 위계질서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갖고 사사로운 정리나 감정으로 인재를 다루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이미 74세의 고령이었던 무측천은 만년에 이르러 황위를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어 무씨 정권을 계속 유지시킬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아들(중종 이철과 예종 이단)에게 물려주어 다시 당 왕조의 황태후로 돌아갈 것인지, 무측천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그리하여 재상 적인걸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했다.

"
내가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큰 앵무새의 양날개가 잘려져 있더군요. 경이 보기에는 이것이 무슨 징조인 것 같소?"

그러자 적인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측천에게 이렇게 말했다.

"
폐하의 성씨가 ''씨이니 그 앵''새는 바로 폐하이시고, 양날개는 바로 폐하의 두 자제분이십니다. 만약 폐하께서 다시 두 자제분을 기용하신다면 양날개는 새롭게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699
년 무측천은 유폐시켰던 자신의 셋째 아들 중종 이철(즉 이현李顯)을 다시 불러 황태자로 삼았으며, 당시의 태자였던 예종 이단은 현명하게 태자를 형에게 양보했다.

이미 82세의 고령에다 병까지 겹쳐 황제의 권위가 무력해진 705년 정월, 재상 장간지(張柬之) 등이 문무대신들을 거느리고 궁궐로 진입하여 무측천의 환관 장역지(張易之)·장창종(張昌宗) 등을 죽이고 중종(中宗)을 황제로 옹립한 후 당()이라는 국호와 당 왕조 전장제도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무측천을 그대로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 일컬으면서 존대하였다.

그해 11월 무측천의 병세가 위독하여 중종이 병문안을 갔다. 이에 무측천은 중종에게 무씨(武氏) 집안을 잘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한 후,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이미 82년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모두 다 했으니 더 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지난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꿈만 같구려. 차후에 나를 꼭 황제라 칭하지는 말고 여전히 태후라 칭하여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불러주시오."

그리고는 다시 중종에게 자기에 의해 학살된 황후와 저수량·한애() 등의 가족을 사면해 달라고 부탁했다. 죽음에 임박해서 보여주는 그녀의 인생을 정리하는 모습에서 보건대 철의 여황제 측천무후도 결국은 나약한 늙은 여인에 불과하였던 것 같다.


5.  
묘비명이 없는 측천무후의 비석 


705 11 2일 무측천은 상양궁(上陽宮) 선거전(仙居殿)에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무측천이 임종에 앞서 가장 사랑하였던 태평공주에게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딸로 나만큼 총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총기로 잘못을 저지르지는 마라." 는 말을 남겼다.
죽음 앞에서 얻어진 권력의 무상함 그리고 그 권력으로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이 부질없는 허상이더라는 깨달음

무측천은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평가할 때 양단으로 엇갈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죽기 전에 자기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도 무측천의 묘비는 이례적으로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만 남아 있다. 706년 정월에 무측천의 영구는 장안으로 운송되어 그녀의 유언에 따라 지금의 서안시 서북쪽 건현(乾縣) 양산(梁山)에 있는 고종의 무덤인 건릉(乾陵)에 합장되었다.
 
12년 동안 모셨던 첫 남자 태종을 찾는 대신 자신에게 여섯 명의 자녀를 낳게 했던 두 번째 남자 고종의 유택에 같이 눕기로 하는 무측천의 선택은 모르긴 해도 저승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사이에 서게 되는 여인으로서 어떤 아픔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무측천이 죽은 후 그녀의 휘호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후손들의 존경심은 바뀌지 않았다. 중종이 죽은 후 다시 황위에 오른 무측천의 막내 아들 예종 이단은 그녀의 존호를 천후(天后)라 하였다가 다시 대성천후(大聖天后)에서 천후황제(天后皇帝), 성후(聖后)라 하였다.

() 현종(玄宗)이 즉위한 후에는 다시 측천황후(則天皇后)라 하였다가 749년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무측천의 휘호를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로 확정하였다
.

무측천은 약 반세기 가량 국정을 다스리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특히 농경장려, 인재중용, 측근단속 등의 조치를 취하여 당시의 사회를 효과적으로 안정시키고,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업적을 공고히 다져서 경제를 윤택하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녀는 잔혹한 살상과 천륜을 위배하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상 그 정치적 공헌을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


6.   신선옥녀분(神仙玉女粉)

무측천은 80세의 고령에도 여전히 젊은 시절의 용모를 유지했다고 전해지는데 신당서(新唐書)에서는 그녀를 일러,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자신을 잘 가꾸어 측근들조차 그녀가 노쇠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였다.

무측천이 사용한 미용 비방은 후세에 당대 관청에서 편찬한 약전(藥典)
신수본초(新修本草)에 수록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민간으로 전해졌다. 그 방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5
5일에 익모초를 흙이 없도록 잘 캐어 온다. 그것을 햇볕에 말린 후 잘게 찧어서 체로 친다. 거기에 다시 밀가루와 물을 넣어서 잘 섞은 다음 계란 크기 만한 약단(藥團)으로 빚어서 다시 햇볕에 말린다. 황토로 화로를 만들어 사방에 구멍을 낸 다음 목탄을 쌓고 그 속에 이 약단을 넣는다. 밥 한끼가 될 시간 동안 센불을 가한 후에 다시 하루 밤낮 동안 약한불을 가한다. 그것이 식으면 꺼내어 잘게 갈아서 체로 친 다음 건조한 자기 그릇 속에 넣어 둔다. 그것을 사용할 때는 활석분 십분의 일, 연지 백분의 일을 함께 잘 섞어서 잘게 간 다음 목욕이나 세수할 때 발라서 씻어내면 된다. 이 비방은 "신선옥녀분(神仙玉女粉)"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