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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기 기(碁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3. 24. 05:53

기(記)
 
 
기 기(碁記)
 

이색(李穡)

선정(先正 돌아간 자기 아버지를 가리킴)께서 다른 기예(技藝)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바둑만은 대강 묘리를 얻어서 당시의 능수(能手)들도 혹 양보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집에는 그 기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상제가 되어 서울에서 내려와 마음이 쓸쓸하여 학업을 그만두었는데, 소상(小祥)을 마치고 서질(書帙)을 정리하다가 바둑알이 나와 살펴보니, 하나는 조개로서 흰 바탕에 누렁 무늬가 있고, 다른 하나는 돌로서 옥같이 곱고 검은데, 갈고 다듬은 것이 정교하여 둥글둥글한 것이 마치 별 같아, “선비로 자리 위에 보배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바둑알은 겨우 2백 개이며 파도에 씻기고 깨진 돌로 보충하여 겨우 부족이 없었다. 하루는 손군(孫君)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중 계홍(戒弘)에게서 얻은 것인데, 영선대부(令先大夫 이색의 아버지)를 채시(綵侍)하실 때 우리 아이 기(起)가 올린 것이요.”하고, 곧 찾아다가 개수를 세어 보고 말하기를, “처음에는 3백 60개가 넉넉하였는데 이제 남은 것이 어찌 이렇게 적은가.”한다. 내가 그의 말한 뜻을 살펴보니, 그의 마음 속에 개연(慨然)함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곰곰이 생각하니, 비록 조그만 물건이라도 반드시 명수(命數)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이니, 군자(君子)로서 알아 두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 근원을 찾아보면 계홍(戒弘)의 위에 이것을 만든 이가 누구였으며 전한 이는 누구였을까. 계홍으로부터 손(孫)에게로, 손으로부터 이(李)에게로 전해지는 동안 잃어 버린 것이 반(半)의 반이니, 이제 여기를 지나서 또 어느 사람에게 전해질 것인가. 점점 흩어지고 잃어버릴 것인데, 어느 사람의 손에 가서 다 없어지고 말 것인가. 또 우리 선비의 소용이 될 것인지, 아니면 부자나 호협객(豪俠客)의 노리개가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개연히 고금(古今)을 생각하고 물리(物理)를 자세히 살피면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않으리요. 원(圓 바둑알)은 동(動)하고 방(方 바둑판)은 정(靜)하는 원리와 불리한 모양과 사나운 기세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는 미처 말할 겨를이 없다.
삼가 기록하기를, “흰 알 1백 40개, 검은 알 1백 9개”라고, 두 통을 써서 한 통은 손군에게 보내어 이 바둑알을 보내 준 데를 알게 하고, 한 통은 이 바둑알이 온 곳을 기록해서 스스로 간직하여 혹 잃어버림이 없기를 바란다.


[주D-001]채시(綵侍) : 초(楚) 나라 노래자(老萊子)가 늙으신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채색이 화려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어리광을 부렸다는 고사를 가리킴. 자식이 부모를 봉양함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