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宣修 21卷 20年 12月 1日 (乙卯) 002 / 전 교수 조헌이 소장을 올려 왜국에 사신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다

천하한량 2007. 3. 23. 03:04

宣修 21卷 20年 12月 1日 (乙卯) 002 / 전 교수 조헌이 소장을 올려 왜국에 사신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다


○前敎授趙憲上疏, 請勿通使倭國, 竝進前疏, 不報。 旣歸鄕里, 傳聞日本使來責通聘, 遂草疏, 極言其失策, 呈監司。 監司以爲: “秀吉簒弑事未詳。” 而疏中又論時宰爲觸忌, 却不受。 乃徒步入京, 竝前言時事五疏上之, 留內不下。 政院以疏久留內, 請下史官。 上始下敎曰: “今見趙憲之疏, 乃人妖也。 天之譴告至深, 不勝兢惕。 豈非寡昧於賢相、名卿, 平日不能待以至誠, 委任不專, 有以致此耶? 尤不勝慙恧。 此疏不可不下, 而予不忍下。 一下則所損甚多, 予寧受過, 已焚之矣。 願史官大書予過, 以戒後世足矣。”【凡臣民章疏之上, 不出三日, 必下政院。 若無批辭, 而只踏啓字而下, 則承旨觀疏所言, 或下該司, 使之覆議, 或允其請, 則奉聖旨, 乃例也。 若不踏啓而下, 則政院藏之院閣, 史官取而採錄于《日記》, 無可錄則置之。 謂之留中不報者, 此也。 疏久不下, 則政院以《日記》纂入啓請, 亦例也。 疏雖焚, 自上猶批示其由則猶未廢, 例也。 自廢朝至今, 疏入不下, 政院不敢請, 便爲宮人所屑用, 非古所謂留中者也。】其論事疏曰:

臣竊聞東變, 無力詣闕, 裁疏駿奔, 追及于監司所去處, 謹以前月二十五日, 望闕拜疏于淸州客舍, 監司謂: “未聞易君之詳, 而陳疏未安。 且有論及數三大臣處, 藩臣之體, 未可輕進。” 臣無可奈何。 退而思之, 西伯, 祖伊奔告于商王; 高昌滅國, 魏徵陳戒于唐宗。 夫惟明智者, 能覩方萠之惡, 而豫圖所以消之。 故以天子而戒於夷狄, 猶致其邦之興。 反是而忽於鑑, 則如林之衆, 倒戈而稽首, 孟門太行, 忽焉失守。 嗚呼! 聖如西伯而戡, 不利於商; 高昌無道而戒隣, 反益於唐家, 矧玆日本, 素稱反覆而無信義之國也。 皇朝之初絶, 最爲上策; 中廟之中絶, 而終致款附, 乃是中策也; 高麗之不務自强, 而累通信使, 或致拘沒要盟, 最是下策也。 蓋此童男女之種, 肇占遐島中高原、曠野, 以爲資生之計, 其避中國之難, 亦云幸矣。 故自以上, 不聞有爲中國邊患者。 胡黷武, 妄擬普天之下無思不服, 不惟勞斃中國之民, 而幷驅東韓之士, 投之山濤鯨海之間, 以致骨不可拾, 而魂無所歸。 憬彼之徒, 始有輕中國之心, 侵自我國南疆, 冞入于之間, 乃至登比兒, 以窺江都, 高麗之民, 幾盡爲魚肉矣。 然而中得姜邯賛, 則狼烟爲之永息; 終得我聖祖, 則列鎭爲之森羅。 我能自守, 則彼不敢犯而越海, 以窺, 非其得計也。 皇朝則方以鎭服西北戎狄, 勞弊中土。 若又交此狡虜, 則垂橐稛載之費, 反爲中國生靈之害, 故逆拒其使, 竝絶獻琛。 是乃絶交契丹, 而竝致橐駝之死者也。 雖間有竊發之患, 而不敢爲深入之計。 不貴遠物之效, 於玆可見, 而因致邇民之安, 是其上策也。 彼之所以稱兵累窺者, 蓋以季之得志, 萬一僥倖。 而及其不勝然後, 潛形巢窟, 諱其所由來之島, 乃反貢琛, 還襲我衣冠, 佯款于釜山, 以及朝貢之期。 祖宗之朝, 不絶而受之者, 蓋爲邊民庶不被鋒鏑之患也。 故捐一道田稅之半, 歲許船輸。 彼中桀黠者必謂: “和親則利歸於島主, 作賊則幸得之利, 分於群下, 而島主無所與。” 雖緣乍怒, 而有所窺覘, 或因善禦, 而捉納罪魁。 庚午三浦之變, 蓋亦酷矣, 而弸中之所以來致賊魁, 必求款納者, 非其誠失所利, 能如是乎? 中廟之所以洞照姦狀, 坐鎭南訛者, 是其中策也。 交隣有道, 則大國役小國; 自治無術, 小役大、弱役强而已。 彼之於我, 累肆侵凌, 而我之於彼, 通三韓未嘗有一大擧。 如知楚國之寶, 惟善而已, 而視金珠如糞土, 則彼之要我者, 無所售其奸, 而我之制彼者, 自有盼子黔夫分守東南, 不敢使片帆西棹。 幸有竊發者, 則嚴兵不動, 先問其所自來, 謂我之兵, 未嘗一南, 而爾肆覬覦, 不勝其衆。 若將貽書國王, 聽彼自誅, 則師直爲壯, 彼自奪氣。 然後, 乘其懈、奮我挺, 扼其亢, 而撻其背, 則雖强如, 無若我何。 而況烟蒸風作, 不一其候, 潮進汐退, 難保俟便, 糧不繼, 而兵無援, 彼賊之憂, 必有深於我國者乎! 前朝强臣, 執國之命, 干城腹心, 一付私人, 務富其家, 而饑其師。 捍禦之策, 一無可觀, 而惟寶金玉, 貪彼之餌。 遠遣使臣, 仰彼鼻息, 使郭預客死, 鄭夢周轍環, 而一不止三道之憑陵, 是其下策之甚者也。 嗚呼! 今往何監? 非古人之得策者乎? 廊廟之議, 疎遠難聞。 自常情言之, 其必云: “接待羈縻不絶。” 而自其正名之義言之, 其必云: “拒而勿接矣。” 今其館待極厚, 請宴之日, 又問固要通价而後, 乃始赴闕。 不惟不能責其無禮, 而方將爲彼所制, 臣竊愧大臣之無人也。 李德裕之請納悉怛謀, 乃是忠之計, 而牛僧裕私有所惡於德裕, 則引義縛送, 而先儒是譏。 今求待彼之要, 須擇善處之術, 不可以東西異議, 而有所逕廷矣。 當於辭朝之日, 引諭來使曰: “請价修睦, 爲邦之一大務也。 契丹好戰, 而高麗絶交; 徐溫逐君, 而《綱目》誅之。 新君之績, 雖曰懋著, 而前王之廢, 未知何故。 若爲新交之甘, 遽忘舊好之定, 而十島之中, 或有一夫非寡人之心, 則寡人實無顔面, 可立於天地之裔, 玉帛璧之惠, 終歸虛地。 玆用返璧, 爾須領去。 使价之不可易通者, 又有三事。 天無二日, 民無二王。 大明天子, 一統天下, 我先祖之所敬事也, 東西南北, 無不賓服。 而爾島之中, 久假南越黃屋, 書契之間, 或稱天定幾年。 雖吾祖宗道大德宏, 不加苛責于絶域。 而今焉改紀之初, 旣號爲禮義是尙, 則先去此號, 改正國書然後, 乃通信使, 則寡人之事大交隣, 始無所憾於屋漏, 而竊懼汝國之不從, 一事也。 蕞爾三韓之地, 兵則不强, 食則不敷, 將則不良, 城則不固, 非敢謂能守能禦也。 粤自祖宗, 以及乎眇躬, 世守保邦之規者, 惟不欲侮奪于隣邦。 故未嘗一番興師駕海以南。 惟使李汝一, 討對馬叛賊, 是乃爾國耆舊之所共知也。 而爾國賊船, 無歲不窺, 虜我漁採之人, 不可勝數。 甚有炰人祭天, 刳剔嬰孩者, 所未聞於天下諸國也。 以至乙卯作賊, 明有擧國來寇之迹, 故問之諸道之使, 每道別有一種賊。 而頃有一使, 來納元績旗纛, 是不可以拾於道路者, 則其詐立現。 而爲寡人不曾經事, 久乃覺之。 今春又有劇賊來泊興陽諸島, 乘我不備, 而殺虜甚衆, 寡孤之怨, 格于窮蒼。 幸因歸正人, 訊其嚮導, 則我國逋亡者, 沙火同也。 而沙火同至於襲爾國冠帶, 富有榮寵云則非止爲一島之賊也明矣。 自我祖宗, 爲吾赤子軀命之重, 歲捐一道糧物, 以修隣好, 而旋被所欺, 略無所益。 寧以其糧物, 分恤我戰士之飢寒者, 則雖其瘖聾跛躄者, 爲寡人城守, 必盡其力矣。 自古無名之師, 上帝不佑, 而鬼亦陰誅。 爾雖有舟師百萬, 宜不可以必其得志也。 閉關絶之, 無損於我。 而和親則利歸於君上; 用兵則利歸於群下, 而上無所與者, 亦皆爾國君上之所共灼知也。 舊君之政, 自不能禁其國賊, 則宜其失位矣。 新君之政, 若反前規, 則如沙火同之反噬主足者、爾國人之炰人祭天、刳剔嬰孩者, 實是君民者所同惡也。 若能捉送春賊之魁與嚮導者, 明示邦刑, 以洗我將士之恥, 切禁一國大小島, 更不敢窺覦, 則弊邦之人, 俱各安枕矣。 兩君之好, 宜各永遠, 而竊懼汝國之不從, 又一事也。 厚往薄來, 雖是九經之道, 而濫觴于末流, 以至民困, 而國僨。 是乃有國之所同憂也。 當初爾國之通好於弊邦者, 非謂小邦之力, 可以威脅隣邦也。 必以九疇、八條之敎, 由箕子先明, 而之學, 粗行於世, 得聞其說者, 小可以保族宜家; 大可以尊主庇民故也。 乃若先朝通好之使, 則聘問之外, 或耽經籍, 物薄而情厚; 事簡而弊絶, 其往興來, 不勞酬酢。 而厥後使臣漸尙興販, 少不稱意, 怒形於色, 以至殺我市人; 激我邊患, 以虧廉讓之風; 以傷兩國之和者, 亦爾國有識人之所歎也。 古語云: “從善如登, 從惡如崩。” 若我不腆之臣, 習見東使所爲, 不欲輕裝而返國, 則區區禮義之貽羞者無窮, 而抑恐爾邦之用是勞弊。 兼此數年之間, 饑饉癘疫, 邦民少安, 宗社粢盛, 抑懼殄享。 賓客羔豚, 將不掩豆, 道路供億, 屢聞州縣之竭。 罍爵不豐, 恐貽行旅之傷, 況若差發臣隣, 遠于將之? 葛裘之辦, 費我經營; 朝夕之資, 輸將水陸, 則小邦之力, 又懼疲頓, 而不能專力於皇朝。 《禮》不云乎? “不盡人之懽; 不竭人之忠, 以全交也。” 若遵《大易》《隨》時損益之義, 歲幣物數, 只用祖宗朝舊規, 俾爲可繼之道, 吾之所仰于彼者, 亦止療病藥材、宗器之飾而已則歲一報聘, 亦可以達吾誠意。 而篤《詩書》之敎, 分大明禮樂之化, 于以壽國養老, 不亦樂乎? 而竊懼汝國諸島, 懷利相交之徒, 厭而不從, 亦一事也。 歸告爾主: “若能遵守侯度, 先正名義, 前王子孫, 皆待以不死, 賊船橫行者, 一切禁斷, 還我叛俘, 更勿事屠戮, 重義輕利, 廉讓成俗, 則一變至道, 吾猶有望, 向風慕義之使, 不得不一遣矣。” 先爲制彼之策, 以攻其諼詐之謀, 則至誠所感, 未有不動之理矣。 嗚呼! 樽俎一話, 機關甚大, 故古人之愛君者, 至於躡足附耳, 而陳其妙計。 李珥若在, 則其必進善處之策, 而其生之日, 召與獨對, 則旁觀忌之, 共謀駁之; 其死之後, 忠勞備著, 而餘人指以誤國, 幷逐忠藎之徒。 越歲踰年, 自不陳經國之猷, 而徒知蠧國之粟。 喪信虧義者, 靦居相位; 朋奸負國者, 冒居權要。 故主憂臣辱, 不知爲何事, 彝倫攸斁, 不以經意。 粘壁枯蝸, 涎已竭而不知退; 典守龜玉, 櫝已毁而不知過。 貪邪無忌, 一如安老元衡樹黨之廣, 浮於李樑金鎧。 而今之言責、論思之望, 悉是附會時論, 昵迹權門者則民咨國賊, 孰從而告上哉? 董越成廟朝臣曰: “爾國有君而無臣。” 今之市里窮閻, 白叟黃童, 皆謂當代之有君無臣。 若使敵國觀兵者聞之, 其害豈淺淺哉? 而山海一不聞之, 則是無耳目者也, 知而不改, 則是負君父者也。 無耳目之罪輕; 負君父之罪大, 臣所以嘆息痛恨於李穡之後者也。 人謂: “朴淳爲相, 一無所事”, 而正色朝端, 人多畏愼; 鄕邑之中, 未聞有餒死者; 南塵北警, 皆欲區處有方。 而他人爲相, 惟以殉貨色, 訓于百僚, 民愁兵怨, 饑饉荐臻。 至于臣之一弟, 首死於饑荒, 若以江乙母言論之, 則雖謂, 三公殺臣之弟可也。 有臘寇, 方向櫛林時, 有小官言: “今無策, 只有起劉元城陳了翁作相, 則寇不戰而自平。” 帝不聞, 而惟崇之徒。 故臘寇大熾, 金虜旋至。 今之大盜, 橫行京外, 至於殺軍鋪之警卒, 而盜士人之處子, 葛榮方臘, 不可謂不作也。 而南北之釁, 又將爲門庭之寇, 虞有大於金虜者, 而廟謨遠算, 一無之術, 古人所謂 “國亂思良相” 之言, 臣願一誦於明主前。 來奔弟喪之日, 瞻望都門, 不忍虛過, 又懼道路之 梗, 而臣亦餒死, 則將來貢忠, 更無其日。 故更瀝肝血, 貼于小疏之末, 大其聲而直上之。 焚蕩之計, 則臣願亟發鋪馬而止之。 如其不可, 則繼援之將, 就差申恪李宗仁等, 分伏于歸路要害處, 以爲萬一延活之計。 制之策, 則亟擲南金於館, 而旁名洪聖民李俊民安自裕李增李山甫李海壽之從事儒雅者, 就將臣策, 討論修潤, 而善爲調柔之術, 一面亟發中使, 以召等, 今日之亞者, 使其亟進大務, 表正百寮, 强幹固本則虜之憑陵、盜之縱橫, 雖不可及止, 而猶有扶持於危亂之謀, 不比今日之泄泄沓沓矣。

宣祖大王修正實錄卷之二十一

선수 21권 20년 12월 1일 (을묘) 002 / 전 교수 조헌이 소장을 올려 왜국에 사신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다


전 교수(敎授) 조헌(趙憲)이 소장을 올려 왜국에 사신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고 아울러 전의 소장도 올렸으나 회보(回報)하지 않았다.

조헌이 향리로 돌아오고 나서 일본 사신이 와서 통빙(通聘)을 요구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드디어 소장을 초하여 그것이 실책임을 극력 말하는 내용으로 감사에게 올렸다. 감사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찬시(簒弑)에 관한 일은 자세히 모른다.’ 하고, 소장에 또 당시 재상을 논하였으므로 기휘(忌諱)에 저촉된다 하여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조헌이 이에 도보로 서울에 들어와서 전에 시사(時事)에 대해 말한 다섯 건의 소장과 함께 올렸더니 궁내에 보류해 두고 내리지 않았다. 정원이 소장을 궁내에 오래 보류해 둔다 하여 사관에게 내리기를 청하니, 상이 비로소 하교하기를,

“지금 조헌의 소장을 보건대 이는 곧 인요(人妖)이다. 하늘의 견고(譴告)가 지극히 깊어 두렵고 조심스러움을 견딜 수 없다. 어쩌면 과인이 현상(賢相)과 명경(名卿)에게 평일 지성으로 대우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위임하지 못한 탓으로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더욱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 이 소장을 내려보내지 아니할 수 없으나 내가 차마 내리지 못하겠다. 일단 내려보내면 손상되는 바가 매우 많을 것이어서 내가 차라리 허물을 받는 것이 낫겠기에 이미 태워버렸다. 사관은 내 허물을 크게 기록하여 후세를 경계하면 좋겠다.”【무릇 신민의 소장이 올라오면 3일을 넘기지 아니하고 반드시 정원에 내려보내야 한다. 만일 비사(批辭)가 없고 계(啓)자만 찍어 내릴 경우에는 승지가 소장에서 말한 내용을 혹 해사(該司)에 내려 복의(覆議)하게도 하고 혹 소청을 윤허하면 성지(聖旨)를 받들기도 하는 것이 곧 규례이다. 만일 계(啓)자를 찍지 않고 내리면 정원이 원각(院閣)에 간직하는데 사관(史官)이 취하여 일기(日記)에 채록(採錄)하고 채록할 만한 것이 없으면 그대로 두는데 유중불보(留中不報)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소장이 오래도록 내리지 않으면 정원에서, 일기에 찬입(纂入)하기를 계청(啓請)하는 것이 또한 규례이다. 조헌의 소장을 불태웠으나 위에서 그 사유를 비시(批示)하였으면 폐기하지 못하는 것이 규례이다. 폐조(廢朝)로부터 오늘날까지 소장이 대내에 들어가서 내려오지 않아도 정원이 감히 청하지 못하고 번번이 궁인(宮人)이 설용(屑用)하였으니 이는 옛날에 이른바 유중(留中)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조헌이 왜의 일에 대해 논한 소장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삼가 동쪽의 변을 듣고도 예궐(詣闕)할 힘이 없어 소장을 지어 빨리 달려 감사(監司)가 가 있는 곳에 가서 삼가 지난달 25일 망궐(望闕)하고 청주 객사(淸州客舍)에서 소장을 올렸더니, 감사가 ‘왜가 임금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자세히 듣지 못하였는데 소장을 진달하는 것은 미안하고 또 몇몇 대신(大臣)에게는 논급(論及)된 곳이 있으니 번신(藩臣)의 사체에 가벼이 올릴 수 없다.’ 하므로 신이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러와서 생각건대 서백(西伯)이 여(黎)나라를 토벌하여 이기자 조이(祖伊)가 두려워하여 상왕(商王)에게 뛰어가 고하였고, 고창(高昌)이 나라를 멸망시키자 위징(魏徵)이 당 태종(唐太宗)에게 진계(陳戒)하였습니다. 무릇 밝고 지혜로운 이라야 바야흐로 싹트는 악을 보아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미리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자로서도 이적(夷狄)을 경계하여 오히려 나라를 홍성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은감(殷鑑)을 소홀히 하면 군대가 숲처럼 많을지라도 창날을 돌려대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맹문(孟門)과 태행(太行)을 홀연히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서백(西伯)처럼 성스러웠으나 여(黎)를 쳐서 이긴 것은 상왕(商王)에게 이롭지 못하였고 고창(高昌)이 무도하였으나 이웃 나라를 경계한 것이 도리어 당(唐)나라에는 도움이 되었는데, 하물며 일본은 본디 반복하여 신의가 없는 나라로 일컬어졌는 데이겠습니까. 황조(皇朝)에서 애초에 끊어버린 것이 제일의 상책(上策)이었고, 중종(中宗)이 중간에 끊었다가 마침내 관부(款附)하게 한 것이 곧 중책이었고 고려가 자강(自强)을 힘쓰지 않고 신사(信使)를 여러 번 교통하고 혹 구몰(拘沒)하여 요맹(要盟)한 것이 하책(下策)이었습니다.

이들은 동남 동녀(童男童女)의 종족이 먼 섬의 고원(高原)과 광야(廣野)를 처음으로 점유하여 생활 밑천의 계획으로 삼았으니 중국의 난을 피한 것을 또한 다행으로 여겼다 합니다. 그러므로 송(宋)나라 이전은 중국의 변환(邊患)이 된 적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호원(胡元)이 무력의 정벌을 남행(濫行)하여 망령되이 온 천하의 인민을 복종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중국의 백성만 지쳐 죽게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 동한(東韓)의 군사까지 아울러 몰아다가 산 같은 파도가 이는 험한 바다에 던져넣어서 해골조차 수습할 수 없고 혼도 돌아갈 데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멀리 있는 저 오랑캐들이 비로소 중국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남쪽 변경으로부터 침범하여 경기·황해 사이까지 깊이 들어왔고 곧 등비아(登比兒)가 강도(江都)를 엿보기에 이르렀으니 고려의 백성이 거의 다 어육이 될 뻔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강감찬(姜邯賛)을 얻고 나서는 오랑캐들의 기미가 영원히 종식되었고 마지막으로 우리 성조(聖祖)를 얻게 되어서는 열진(列鎭)이 숲처럼 벌여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능히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자 저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청주(淸州)·양주(楊州)를 엿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좋은 계책이 못되었습니다. 중국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서북(西北)의 융적(戎狄)을 진복(鎭服)하는 것 때문에 중국 지방이 노고에 시달려 퇴폐되고 있는 중이었는데, 만일 또 이 교활한 오랑캐와 교통한다면 사신이 왕래하는 비용이 도리어 중국 생령(生靈)의 해독이 되겠기에 사자를 지레 막고 아울러 조공(朝貢)까지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곧 고려 태조가 거란[契丹]과 교통을 끊어버리고 아울러 탁타(槖駝)를 죽게 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간혹 노략질하는 근심이 있기는 하였으나 감히 내지에 깊이 들어올 계획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먼 지방의 기이한 물건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게 한 효과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동시에 따라서 가까이 있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상책입니다.

저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여러 차례 엿보게 된 까닭은 고려 말기에 바라던 일이 성취되어 만일의 요행을 기대하였던 탓입니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게 된 뒤에야 소굴에 형적을 감추고 어느 섬에서 왔는지를 속이고서는 도리어 조공을 바치고 다시 우리 의관을 계승하고 거짓으로 부산에 와서 관복(款服)하며 조공의 기일에 미쳤습니다. 그러나 조종조에서 끊어버리지 아니하고 받아들인 것은 변민(邊民)이 병화의 근심을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1개 도의 전세(田稅)의 반을 해마다 배로 수송하도록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저들 중에 교활한 자는 반드시 ‘화친(和親)하면 이익이 도주(島主)에게 돌아가고 노략질하면 요행히 얻은 이익이 아랫사람들에게 나뉘어지나 도주는 관여되는 바가 없다.’ 합니다. 그리하여 잠시의 분노로 인하여 엿보는 바가 있기는 하였으나 혹 잘 방어함으로 인하여 죄괴(罪魁)를 잡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경오년 삼포(三浦)의 왜란은 혹독한 것이었습니다만 붕중(弸中)이 적의 괴수를 바쳐와서 기필코 관납(款納)하기를 구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이로운 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면 이같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중종이 그들의 간상(姦狀)을 통촉하고 남쪽 지방을 진정시킨 것이 곧 중책(中策)입니다.

이웃 나라와 교제함에 있어 도가 있으면 대국(大國)이 소국에게 부림당하고 자치(自治)함에 방술이 없으면 소국이 대국에게 부림당하고 약국이 강국에게 부림당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여러 차례 침릉(侵凌)을 가하여 왔습니다만 우리는 저들에게 삼한(三韓)을 통하여 일찍이 한 번도 대대적으로 거병(擧兵)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초국(楚國)의 보배는 오직 어진이를 보배로 삼는 것 뿐이고 금과 구슬을 썩은 흙처럼 여긴다는 것을 안다면 저들이 우리에게 요구함에 있어 간사함을 행할 수 없을 것이고 우리가 저들을 제어함에 있어서도 저절로 반자(盼子)·검부(黔夫) 같은 사람이 동남 지방을 나누어 지켜 감히 한 척의 배도 서쪽을 향해 노를 저어 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혹시 노략질하는 경우가 있으면 군사를 엄히 경계하여 움직이지 않고서 먼저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고서 ‘우리의 군사가 일찍이 한 번도 남쪽으로 출동한 적이 없는데 네가 방자하게 엿보니 그 대중을 이루 다 죽일 수 없다.’ 하고,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그들 스스로 주벌(誅罰)하게 한다면 군대의 체모가 정직하고 장대(壯大)하게 될 것이고 저들은 저절로 기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 뒤에 해이해진 때를 이용하여 우리가 떨치고 나아가 그들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친다면 진·초(晉楚)처럼 강한 나라라도 우리에게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안개가 서리고 바람이 일어서 기후가 고르지 않고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물러가서 편의를 기다림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양식을 이어대지 못하고 군사의 후원이 없게 되면 저 적들의 근심이 반드시 우리 나라보다 더 깊은 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전조(前朝)의 강신(强臣)이 나라의 권한을 잡고서 간성이요 심복인 장수를 일체 사인(私人)으로 임용함으로써 자기 집을 부유하게 하기를 힘쓰게 하는 반면 군사는 굶주리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방어하는 계책은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고 오직 금옥(金玉)만을 보배로 여겨 저들의 미끼를 탐낼 뿐이었습니다. 멀리 사신을 보내어 저들의 사정을 탐색케 했다가 곽예(郭預)는 객사(客死)하였고 정몽주(鄭夢周)는 철환(撤環)하게 하였으나 하나도 삼도(三道)의 노략을 막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더없는 하책(下策)인 것입니다.

아, 지금 이후로 무엇을 거울삼아야 하겠습니까. 옛 사람의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낭묘(廊廟)의 의논은 멀어서 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정(常情)으로 말하면 반드시 ‘접대하고 기미(覊縻)하여 끊어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할 것이고, 명분을 바르게 하는 의리로 말하면 반드시 ‘거절하고 접대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관대(館待)가 극히 후한데 연회에 청하는 날에도 진실로 사신을 내왕할 것인지 물어본 다음에야 대궐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무례함을 꾸짖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바야흐로 저들에게 견제당하였으므로 신은 대신 중에 대신다운 사람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덕유(李德裕)가 실달모(實怛謀)의 항복을 받아들이기를 청한 것은 곧 당(唐)나라에 충성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우승유(牛僧孺)가 사사로이 이덕유를 미워하여 의리를 끌어대어 포박하여 송치하자 선유(先儒)가 이를 비평하였습니다.

지금 저들을 접대하는 요점을 구함에 있어 모름지기 선처(善處)할 술책을 가려내야 할 것이요 동서(東西)의 의논이 다르다 하여 아주 다른 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조정을 하직하던 날을 당하여 온 사자를 인접(引接)하고 이렇게 타일러야 합니다

‘사신을 청하고 친목을 맺는 것은 나라 다스리는 데 있어 하나의 큰 일이다. 거란[契丹]이 전쟁을 좋아하자 고려에서는 교제를 끊었고, 서온(徐溫)이 임금을 내쫓자 《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는 그를 주벌(誅罰)하였다. 일본의 새 임금의 공적이 성대하게 드러났다 하더라도 전왕(前王)의 폐위(廢位)가 무슨 까닭인지 모른다. 새 교제의 달콤함을 위하여 갑자기 옛날 친호(親好)하던 약정을 잊음으로써, 10개 도서(島嶼) 중에 혹 한 사람이라도 과인을 그르게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면 과인은 실로 부끄러워 천지의 끝에도 설 수 없을 것이고, 옥·비단·구슬의 혜물(惠物)이 마침내 허지(虛地)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예물을 돌려주니 너희는 모름지기 가지고 가라.

사신을 가벼이 교통하지 못하는 이유가 또 세 가지 일이 있다.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왕이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대명 천자(大明天子)는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여 우리 선조(先祖)가 삼가 섬기던 바이고 동서남북에 복종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그런데 너희 섬 중에 오래도록 남월(南越)의 황옥(黃屋)을 빌어서 서계(書契)를 보내는 사이에 혹 천정(天正) 몇 년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 도가 크고 덕이 넓어서 절역(絶域)에 대해 가혹한 견책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개기(改紀)한 초기에 이미 예의(禮義)를 숭상한다고 부르짖는다면 먼저 이 연호를 제거하여 국서(國書)를 개정하라. 그런 뒤에 신사(信使)를 교통하면 과인의 사대 교린(事大交隣)에 대해 비로소 사람이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서도 유감되는 바가 없겠으나, 너희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 두렵다. 이것이 한 가지 일이다.

조그마한 삼한(三韓)의 땅이 군사도 강하지 않고 양식도 넉넉하지 못한데 장수는 뛰어나지 않고 성은 튼튼하지 않으니 감히 지켜내고 막아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조종(祖宗)으로부터 내 몸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지켜오면서 나라를 보전한 법규는 오직 이웃나라를 침탈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한 번도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타고 남쪽으로 출정한 적이 없었다. 오직 이여일(李汝一)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의 반적(叛賊)을 토벌하게 하였을 뿐인데 이는 너희 나라의 늙은 이들은 모두 아는 일이다. 그런데 너희 나라의 적선(賊船)이 넘보지 않는 해가 없어 우리 나라의 고기잡이하는 사람을 사로잡아 간 것이 이루 셀 수 없으며 심지어는 사람을 구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어린 아이를 쪼개어 살을 바르는 일까지 있었는데 이는 천하의 제국(諸國)에서 듣지 못한 일이다.

을묘년의 변란을 일으킨 데 이르러서도 분명히 너희 온 나라가 내침(來侵)한 형적이 있으므로 제도(諸道)의 사신에게 물어보았더니 도(道)마다 다른 일종의 적왜(賊倭)가 있었다고 했다. 저번에 한 사자가 와서 원수(元帥)의 깃발을 바쳤는데 이는 도로에서 주울 수 없는 것이니, 그 거짓이 당장에 드러났다. 그런데도 과인이 일의 경험이 없어 오랜 뒤에야 그 간사함을 깨달았다.

올 봄에 또 큰 도적이 흥양(興陽) 제도(諸島)에 와서 정박하고서 우리의 방비가 없는 틈을 타고 살상하고 사로잡아간 것이 매우 많으므로 과부와 고아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다. 다행하게도 귀순한 사람을 인하여 향도(嚮導)가 된 자를 물어보았더니 우리 나라의 도망자 사화동(沙火同)이라 하였다. 사화동은 너희 나라의 관대(冠帶)를 착용하고 영총(榮寵)을 성대히 누리고 있다 하니, 한 섬의 도적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 나라는 조종조로부터 우리 적자(赤子)들의 목숨이 중함을 위하여 해마다 1도의 양곡과 물품을 떼어내어 이웃나라와 친호(親好)를 수교하였던 것인데, 도리어 속아서 조금도 도움되는 바가 없었다. 차라리 그 양곡과 물품으로 주림과 추위에 고생하는 우리 전사(戰士)에게 나누어주어 구휼하였다면 벙어리·귀머거리·절름발이로 하여금 과인을 위해 성을 지키게 하였더라도 반드시 힘을 다하였을 것이다.

예로부터 명분없는 군사는 상제(上帝)가 도와주지 않고 귀신도 몰래 주벌(誅罰)하는 법이다. 너희들이 주사(舟師)가 1백만 명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뜻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관문(關門)을 닫고 끊어버리는 것은 우리에게는 손해가 없다. 화친을 하면 이익이 임금에게 돌아가고 군사를 출동하면 이익이 아랫사람에게 돌아가지만 위에는 관여되는 바가 없는 것도 또한 너희 나라의 임금이 모두 환하게 아는 바이다. 예전 임금의 정치가 스스로 국적(國賊)을 금지하지 못하였으니 그 지위를 잃는 것이 마땅하다. 새 임금이 정치를 만일 전과는 반대로 한다면, 사화동(沙火同)이 주인의 발을 물어뜯은 것과 너희 나라 사람들이 사람을 구워 하늘에 제사지내고 어린 아이를 쪼개어 살을 바르는 일은 실로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이 함께 증오하는 것이니, 봄에 흥양(興陽) 경내에 침구한 적의 괴수와 향도자(嚮導者)를 잡아 보내어 국법을 밝게 보임으로써 우리 장수와 군사의 수치를 씻게 하는 한편 너희 일국의 크고 작은 섬에 엄히 금하여 다시는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나라 사람이 모두 각자 잠을 편히 잘 것이고 두 나라 임금의 교호(交好)도 각기 영원해질 것이다. 그러나 너희 나라가 따르지 않을 것이 두렵다. 이것이 또 한 가지 일이다.

보내주는 것은 후하게 하고 받는 것은 박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구경(九經)의 도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말세에 와서는 이것이 과람해져서 백성이 곤궁하고 나라가 패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나라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다 같이 근심해야 할 일이다. 당초 너희 나라가 우리 나라에 통호(通好)한 것은 우리 나라의 힘이 이웃 나라를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필시 구주(九疇)·팔조(八條)의 가르침이 기자(箕子)를 통하여 먼저 밝아졌고 주공(周公)·공자(孔子)·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학문이 세상에 대강 행해짐에 따라 그 학설을 듣게 된 사람은 작을 경우에는 종족을 보존하고 집 안을 적의하게 할 수 있으며, 클 경우에는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조(先祖) 때 통호(通好)한 사신으로 말하면 빙문(聘問)하는 이외에 간혹 경적(經籍)을 탐하기도 하여, 물품은 박하였으나 인정은 두터웠고 일은 간략하여 폐해가 없었으므로 가고 오는 데에 있어 수작(酬酢)이 수고롭지 아니하였다. 그 뒤 사신이 점차 흥판(興販)을 숭상하여 조금만 뜻에 맞지 아니하면 얼굴에 노기를 띠고 우리 저자의 사람을 죽여 우리 변경의 근심을 격동시키는가 하면 염치와 겸양의 풍교(風敎)를 무너뜨려 두 나라의 화친을 손상시킨 것은 또한 너희 나라의 식견 있는 사람도 탄식한 바이다.

옛말에 「선도(善道)를 따르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악도(惡道)를 따르는 것은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쉽다.」 하였다. 우리의 변변치 못한 신하가 흥판하는 왜국 사신의 소위를 익히 본 탓으로 사신으로 가서 가벼운 행장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면 구구한 예의의 나라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주게 될 것이고 또한 너희 나라도 이 때문에 노고와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 겸하여 이 수 년 사이에 기근과 여역으로 나라 백성이 편치 못하고, 종사의 자성(粢盛)도 제향을 드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까 두렵다. 그런데 빈객을 접대하는 데 있어 염소와 돼지의 고기를 그릇에 채울 수 없게 되었고 도로의 지공(支供)도 주현(州縣)의 재용이 고갈되었다는 말이 여러 차례 들려오고 있다. 따라서 주연이 풍요롭지 못하여 행려(行旅)에 손상을 끼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사신을 차출하여 멀리 보냄에 있어서이겠는가. 여름·겨울 의복의 마련을 우리의 재력으로 장만하고, 아침·저녁의 자량(資糧)을 수륙(水陸)으로 수송한다면 우리 나라의 재력이 장차 피폐할까 두렵고 황조(皇朝)에도 전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남에게 무진한 즐거움을 요구하지 아니하며 남에게 무진한 성의를 요구하지 아니하여 교분을 영구히 유지한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만일 《대역(大易)》 수괘(隨卦)의 「때에 따라 줄이고 보탠다.」는 의리에 따라 세폐(歲幣)의 물량을 조종조의 구규(舊規)에만 의거하여 계속할 수 있는 도리로 삼게 하고, 우리가 저들에게 바라는 것도 병을 치료하는 약재(藥材)와 종묘 제기(祭器)의 장식에 그칠 뿐이면, 한 해에 한 차례 보빙(報聘)하더라도 우리 성의를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주공(周公)·공자(孔子) 시서(詩書)의 가르침을 도타이하고 명(明)나라 예악(禮樂)의 교화를 화성(化成)하여 이로써 국가를 장구하게 하고 노인을 기른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익을 품고 서로 사귀는 너희 나라 여러 섬의 무리가 싫어하여 따르지 않을까 두려우니, 이 또한 한 가지 일이다.

돌아가서 너희 임금에게 「만일 제후(諸侯)의 법도를 준수하여 먼저 명의(名義)를 바르게 한 다음 전왕(前王)의 자손을 모두 죽이지 않도록 하며, 횡행하는 적선(賊船)을 일체 금단하고 우리의 반역자와 포로를 돌려주며, 다시는 도륙을 일삼지 말고 의리를 중히 여기고 이익을 가벼이하여 염치와 예양(禮讓)으로 풍속을 이룬다면 혁신되어 도(道)에 이를 것이고, 우리도 오히려 바라는 바가 있어 풍교(風敎)와 의리를 사모하는 사신을 한번 보내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하라.’

이와 같이 먼저 저들의 계책을 제어하여 거짓된 모의를 공파한다면 지성에는 감동되는 것이어서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 사신과의 연회 석상에서의 한마디 말은 기관(機關)이 매우 중대하므로 옛 사람으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자는 발을 밟고 귓전에 대고 묘계(妙計)를 진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이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선처할 대책을 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살았을 적에 불러서 독대(獨對)할 때에는 옆에서 보는 자가 그를 꺼리어 공모하여 공박하였고 그가 죽은 뒤에는 충성과 공로가 갖춰 드러났으나 남아 있는 사람들은 나라를 그르친 것으로 지목하여 충신(忠藎)한 무리까지 아울러 쫓아냈습니다. 그리하여 몇 해가 지나도록 스스로 나라를 경영하는 데 대한 계책은 진달하지 않고 한갓 나라의 녹만 축낼 줄 알 뿐입니다. 신의를 잃은 자가 뻔뻔스레 정승의 자리에 있고 간인과 붕당을 지어 나라를 저버린 자가 권요(權要)의 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에게는 욕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고 인륜의 실추를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벽에 붙은 마른 달팽이가 타액이 다 메말랐으나 물러갈 줄을 모르고, 지키고 있는 구옥(龜玉)이 궤가 이미 깨졌는데도 잘못된 줄을 모릅니다. 탐욕하고 간사하여 기탄없는 것이 김안로(金安老)·윤원형(尹元衡)과 같고 당여를 널리 부식시키는 것은 이량(李樑)·김개(金鎧)보다 더 심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언책(言責)과 논사(論思)의 인망은 책임이 있는 자는 모두 시론에 부회하고 권문을 가까이하는 자들이니 백성의 고통과 나라의 적을 어떻게 위에 고할 수 있겠습니까.

동월(董越)이 성종조의 신하에게 ‘그대 나라에는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 하였는데, 지금의 시장 마을이나 외진 여염의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모두 당대의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적국의 첩자가 이 말을 들으면 해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그런데 이산해(李山海)가 한 번도 듣지 못하였다면 이는 귀와 눈이 없는 것이고, 알고서 고치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군부(君父)를 저버린 것입니다. 귀와 눈이 없는 죄는 가볍고 임금을 저버린 죄는 크니, 신이 이색(李穡)의 후손에 대해 탄식하고 통한하는 까닭입니다.

사람들은 ‘박순(朴淳)이 정승이 되어 한 가지 일도 한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조정에서 안색을 바로 하고 엄정한 자세를 지니어 사람들이 대부분 두려워하고 삼갔고, 향읍 가운데 굶어 죽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남방(南方)의 침구(侵寇)와 북변(北邊)의 경보를 모두 방도가 있게 구처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정승이 되어서는 오직 재화와 여색을 구하는 것만으로 백관에게 본을 보여 백성은 시름하고 군사는 원망하며 기근이 거듭 이르렀습니다. 신의 한 아우가 기황(飢荒)으로 먼저 죽은 것에 이르러서는 강을(江乙) 어미의 말로 논하면 삼공(三公)이 신의 아우를 죽였다 해도 옳을 것입니다.

송(宋)나라에 납구(臘寇)가 바야흐로 즐림(櫛林)을 향할 적에 어느 소관(小官)이 ‘지금 다른 대책은 없고 다만 유원성(劉元城)·진요옹(陳了翁)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으면 도적은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평정될 것이다.’ 하였는데, 송제(宋帝)가 듣지 않고 오직 장돈(章惇)·채경(蔡京)의 무리만을 존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납구가 크게 성해지고 금로(金虜)가 곧바로 침입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큰 도적이 경외(京外)를 횡행하면서 군포(軍鋪)의 경졸(警卒)을 죽이고 사인(士人)의 처녀를 도적질하기에 이르렀으니, 갈영(葛榮)·방납(方臘) 같은 도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남북의 흔단이 장차 문정(文庭)의 도적이 될 근심이 송(宋)의 금로(金虜)보다 더 큰데도 묘당(廟堂)의 원대한 계책에는 진요옹·유원성 같은 술책이 하나도 없으니,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는 말을 신은 명주(明主)의 앞에서 한번 외기를 원합니다.

아우의 상을 치르려고 달려오던 날 도문(都門)을 바라보고 차마 그대로 지나갈 수 없었고 또 도로가 막혀 신도 굶어 죽게 되면 장래에 충심을 바칠 날이 없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간혈(肝血)을 다 기울여 소소(小䟽)의 끝에 붙이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곧바로 올리는 바입니다.

야인의 부락을 분탕(焚蕩)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신은 속히 포마(鋪馬)를 내어 중지시키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것이 불가하면 계원(繼援)하는 장수를 신각(申恪)·이종인(李宗仁) 등으로 차견(差遣)하여 돌아가는 길의 요로에 나누어 매복시켜 만분의 일이라도 살리는 계책으로 삼으소서. 왜인을 제어하는 계책은 속히 남금(南金)을 왜관(倭館)에 뿌리고 한편으로는 홍성민(洪聖民)·이준민(李俊民)·안자유(安自裕)·이증(李增)·이산보(李山甫)·이해수(李海壽) 등 유아(儒雅)에 종사하는 자를 불러서 장신(將臣)의 계책에 의하여 토론하고 윤색해서 조유(調柔)의 술책을 잘 할 것이며, 일면으로는 중사(中使)를 속히 보내어 박순(朴淳)·정철(鄭澈)·민순(閔純)·성혼(成渾) 등을 불러 오늘날 진요옹·유원성의 아류(亞流)인 자를 조속히 큰 임무에 진용(進用)시켜 백관의 모범이 되게 하고 근본과 줄기를 강하고 튼튼하게 하도록 하소서. 그러면 오랑캐들의 침릉(侵凌)과 도적의 종횡(縱橫)을 그치게 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위란(危亂)에서 부지할 수 있는 모의가 있게 되어 오늘날의 답답한 상황과는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원전】 25 집 573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