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宣修 9卷 8年 12月 1日 (乙丑) 004 / 전 내자시 정 이지번의 졸기

천하한량 2007. 3. 23. 03:02

宣修 9卷 8年 12月 1日 (乙丑) 004 / 전 내자시 정 이지번의 졸기


○前內資寺正李之蕃卒。 之蕃, 牧隱之後也。 嘉靖丙午, 陞進士。 自幼沈靜不好弄, 母病, 刲股血, 和藥以進, 疾得瘳。 居喪哀毁, 一遵《家禮》。 嘗被金安老媒孽, 流配海島, 安老敗, 得釋。 用太學薦爲齋郞, 謝恩不仕, 後累官爲司評。 子山海幼稱神童, 尹元衡欲以女妻之, 之蕃卽棄官, 與弟之菡, 遁居丹陽龜潭上, 攻苦食淡, 囂然自樂, 人稱爲龜仙李滉與之友, 勸勉以道學。 今上初年, 除淸風郡守, 使近舊隱, 李滉强之屑就, 臥理淸淨。 旣去而民思之, 紀石頌德, 後人皆尙其風節。

선수 9권 8년 12월 1일 (을축) 004 / 전 내자시 정 이지번의 졸기


전 내자시 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이 졸(卒)하였다. 지번은 목은(牧隱)의 후예인데, 가정(嘉靖) 병오년에 진사(進士)에 올랐다. 어릴 적부터 침착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다리를 찔러 피를 받아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상 중(喪中)에 몹시 슬퍼하였고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라 행하였다. 일찍이 김안로(金安老)의 재앙을 입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가, 안로가 패망하자 석방되었다. 성균관의 추천으로 재랑(齋郞)이 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는 출사(出仕)하지 않다가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사평(司評)이 되었다. 아들 산해(山海)는 어릴 적에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는데 윤원형이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아주려 하자, 지번이 즉시 벼슬을 버리고 아우 지함(之菡)과 함께 단양(丹陽)의 구담(龜潭) 곁에 가 살면서 열심히 학문을 닦고 담박한 생활을 하며 만족스럽게 스스로를 즐기니, 사람들이 그를 구선(龜仙)이라 불렀다. 이황(李滉)이 그와 벗하여 도학(道學)을 권면하였다. 금상 초년에 청풍 군수를 제수하여 옛날 은거하던 곳에서 가깝도록 하였는데, 이황이 강요하여 취임한 뒤 애쓰지 않고도 깨끗하게 잘 다스렸다. 떠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리었으며, 후인들은 모두 그의 풍절(風節)을 숭상하였다.

【원전】 25 집 464 면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