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宣祖 3卷 2年 閏6月 7日 (己酉)001 / 《논어》를 강하고 기대승이 예악과 교화, 전대의 인물 등에 대해 아뢰다

천하한량 2007. 3. 23. 03:00

宣祖 3卷 2年 閏6月 7日 (己酉)001 / 《논어》를 강하고 기대승이 예악과 교화, 전대의 인물 등에 대해 아뢰다


○己酉/上召對于文政殿, 講《論語》《陽貨》篇, 自子之武誠, 止知其必不能改也。 奇大升臨文啓曰: “禮樂不可斯須去身, 禮樂失序, 萬事顚倒。 古禮、古樂, 今雖不可復見, 學其心, 而尋其聲器, 則可也。” 又曰: “十室之邑, 敎以禮樂, 則相爲揖讓, 近來二十年前, 分憂一道者, 或爲謁聖之禮。 自乙卯變之後, 專意於軍器摘奸, 而不復爲興起勸奬之道。 雖號爲盡心者, 不過補葺書院, 供饋儒生而已。 敎導就善之方, 絶少未聞矣。 欲興治化, 必有敎化, 然後有觀感之美。 人性雖曰本善, 非敎, 則不能成就。 前朝恭愍王時, 李穡聚士敎之, 故多有忠臣義士。 近來未見興起之士, 然必留念于此, 毋曰無人, 而悠久行之以誠, 則敎化漸可興也。” 上曰: “前朝李穡, 善人耶?” 大升進對曰: “李穡人論甚多, 而大槪不爲偶然。 少時入中原, 擢制科, 仕于元。 博學高才, 所學雖主於文章, 而其於禮文儒者之學, 所見亦多, 而敎誨之事, 甚有功力。 鄭夢周, 非全學於李穡, 而亦以奬勸興起, 而有成。 高麗將亡, 流竄在外。 太宗卽位, 卽命擇之, 迎見禮遇。 又使之仕, 不屈而死。 高麗崇佛, 而此人文章甚高, 故如守宇之記、佛經之序, 皆出此人之手, 故年少之儒, 以爲崇佛而詆毁。 此人雖非學問中人, 氣節甚高, 實東方學問之源流也。” 尹根壽鄭琢等亦陳不虧大節之義。 大升曰: “所啓盡是。 不事我朝, 意思甚高, 而立朝之時, 不能壁立千仞, 不無浮沈之病, 故前朝史記, 以此少之。 不知其論果出於公, 而尙論則可知其長短。” 尹根壽啓曰: “伏聞昨日經席傳敎之辭, 至爲惶恐。根壽, 前日經席, 論我國人心本不如中原, 而昨日上敎以爲不正, 而有弊, 故根壽有是啓。】 小臣之意以爲, 二十餘年, 人畏元衡虐焰, 莫敢一言, 尋常憤嘆于心, 故啓之。 其言思之, 則有弊矣。” 上曰: “昨日予所言者, 以頃日所啓不無後弊, 故欲救其失, 非所以非之也。” 大升曰: “一時所啓之偏, 自上留念, 思憶如此, 凡事每加睿念, 則聖學益就高明矣。 我國學問, 箕子時事, 無書籍難考。 三國時, 天性雖有粹美, 而未有學問之功。 高麗雖爲學問, 只主詞章。 至末, 禹倬鄭夢周後, 始知性理之學。 及至我世宗朝, 禮樂文物, 燠然一新。 以東方學問相傳之次言之, 則以夢周爲東方理學之祖, 吉再學於夢周, 金叔滋學於再吉, 金宗直學於淑滋, 金宏弼學於宗直, 趙光祖學於宏弼, 自有源流也。 邇來, 儒士欲爲聖賢之學, 自上能主敎化, 則此其復古之機會也。 勉力學問之人, 雖似不多, 今聞議論, 長者之知學問, 視己卯爲多云。” 尹根壽曰: “己卯之後, 人懷向善, 蓋出於趙光祖之功也。” 大升曰: “近來閭巷間, 下賤之輩莫不修擧喪禮, 或有靑年寡婦不之他適, 皆己卯振作之餘效也。 但光祖年止三十八, 而一時仕宦于朝, 未暇著書傳後, 故不知學問深淺, 而其所爲之事, 則人皆欽仰。” 根壽曰: “小臣傳聞, 則一日明廟有敎曰: ‘閭巷間當讀《小學》。’ 尹漑爲政丞, 聞此傳敎而贊襄。 尹元衡以爲: ‘人當爲善於心。 己卯年, 崇尙《小學》, 而辛巳年生亂, 乙巳年又生亂逆, 《小學》亂逆之書。’ 尹漑聞之震慄。 元衡心術, 此可知也。” 上曰: “尹元衡作罪我國, 不可勝言, 而此言則予固不知。 今聞此言, 盡詆先儒, 眞得罪萬世者也。” 大升曰: “韓侂冑朱子以僞學, 古今無異也。 觀尹元衡當日所爲之事, 此固常事, 不足怪也。 元衡之惡, 昨日大槪啓之。 元老元衡乃兄弟, 而皆邪毒。 明宗卽位之初, 亟黜元老, 故元老不得參勳, 以尤元衡元衡敎誘春年, 上疏竄逐而殺之。 元老之罪可誅, 殺之者元衡也。 以兄弟之至親, 而猶若是, 國人之畏怯, 寧有極哉? 自古小人, 熟如元衡之甚者乎?” 上曰: “頃日儒生, 上疏以爲: ‘方威稜震疊之時云。’ 如此, 故莫敢言也。” 大升曰: “傳敎至矣。 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 小人如尹元衡者, 固稀罕矣。 雖以小小小人, 乘間抵隙, 亦足以累聖治。 克己從善, 親近賢士, 則時世好矣。” 根壽曰: “宋麟壽從事學問, 孝行超卓, 正色立朝, 見忤於李芑尹元衡, 被罪而死。 此人之賢, 可與權橃李彦迪竝論也。” 大升曰: “初以浮薄徒之領袖而罷之, 後因良才驛壁書之變, 至於賜死。 自上旣已伸雪, 而深恐此人之賢, 自上不能洞知, 士林怨痛之矣。” 又各曰: “會盟文, 至以謀反名之。” 又啓曰: “麟壽一生, 欽慕己卯之人。 癸卯、甲辰年間, 爲全羅監司, 勸勉《小學》, 引接後生。 其時讀《小學》, 皆麟壽之功也。 今午雷動, 此雖時節, 聖敎以爲未安, 可謂至矣。 夏月雖曰雷雨之時, 而雨聲過澇, 兩南水災, 極爲慘酷。 春而旱, 夏而水, 禾穀之傷, 民命誰賴。 此其天地乖戾之氣, 自上各別省念, 可也。 人君一念, 可以贊成天地造化, 故《中庸》曰: ‘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自戒謹恐懼, 而精之約之, 以至吾心正, 而天地之心正, 吾氣順, 而天地之氣順, 則雨暘以時, 天地位矣。 三代盛時, 曁鳥獸魚鼈, 咸若天地之氣和, 故以致此也。 太宗有水旱, 而民無差怨者, 以其憂勤撫綏也。 終致斗米三錢之効, 雖曰假仁義, 而亦其魏澂勸行之致也。 卽祚之後, 當春夏之交, 風雨和順, 皆望大有爲之慶。 至秋風, 災不絶, 田卒汚萊, 水田差有所收, 故僅免餓莩之憂。 今年則粤自春節, 雨水不中, 到夏益甚, 民生之事, 極爲艱苦。 各別省念, 如有未盡之事, 務極修省, 回天心可也。 天生萬民, 不能自治, 立之君以主萬民, 君不能獨治, 又分憂於守令, 守令治民不善, 而民有嗟怨, 則君必罪之。 以此推之, 人君愛民之心, 不能誠實, 至於流離失所, 則天心豈不震怒乎? 人主在億兆之上, 無他可畏, 而上有皇天之赫臨, 一念之差, 每恐上帝之震怒, 則天心悅豫矣。” 上曰: “此言至當。” 大升曰: “小臣偶思而啓達, 聖敎如此, 不勝感激。 燕間之中, 無少間斷, 則與聖人同也。”

선조 3권 2년 윤6월 7일 (기유) 001 / 《논어》를 강하고 기대승이 예악과 교화, 전대의 인물 등에 대해 아뢰다


상이 문정전(文政殿)에서 소대(召對)하고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의 ‘공자가 무성(武城)에 가서……’에서부터 집주(集註)에 나오는 ‘그가 반드시 개과(改過)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라는 대목까지 강(講)하였다. 기대승이 임문(臨文)하여 아뢰기를,

“예(禮)와 악(樂)을 잠시도 몸에서 떼어서는 안 되니 예악이 질서를 잃게 되면 모든 일이 전도되고 맙니다. 고례(古禮)와 고악(古樂)을 지금 다시 볼 수는 없으나 그 마음을 배우고 그 성기(聲器)를 찾아볼 수는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집이 열 채밖에 안 되는 작은 동네라도 예와 악으로 교화하면 서로 읍양(揖讓)하게 됩니다. 근래 20년 전만 해도 한 도(道)에 지방관으로 있는 자들이 혹은 알성(謁聖)하는 예를 설행하기도 했습니다만, 을묘 왜변(乙卯倭變)이 있고 난 뒤부터는 오로지 군기(軍器)의 적간(摘奸)에만 뜻을 두고 학교를 흥기하여 권장(勸奬)하는 도리는 다시 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말로는 마음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서원(書院)을 보수하거나 유생을 공궤(供饋)하는 데 불과할 뿐 교도하여 선(善)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도는 거의 끊어져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치화(治化)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교화(敎化)시킨 다음에야 보고 느끼어 흥기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되는 법입니다. 사람의 성품을 본래 선하다고 하지만 교화시키지 않으면 성취시킬 수 없습니다. 전조(前朝)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색(李穡)이 선비들을 모아 가르쳤기 때문에 충신·의사(義士)가 많이 있게 되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흥기(興起)하는 선비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에 유념하시어 사람이 없다 하지 마시고 오래도록 참된 마음으로 시행해 가시면 교화가 점차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조의 이색은 선인(善人)이었는가?”

하니, 기대승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색에 대한 인물 평가는 매우 많으나 대체로 범연하지는 않습니다. 이색은 소년 시절 중국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뽑혀 원(元)나라에서 벼슬했습니다. 박학하고 재질이 뛰어난 인물로서, 그의 학문은 문장(文章)을 위주로 하였으나 예문(禮文)과 유자(儒者)의 학문에도 견해가 훌륭하여 교회(敎誨)하는 일에 무척이나 공력을 들였습니다. 정몽주(鄭夢周)가 전적으로 이색에게서 배운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로부터 장려 권면되어 흥기함으로써 이룬 것이 있었습니다. 고려(高麗)가 망할 무렵 유배되어 외방에 있었는데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즉시 택지(擇之)에게 명하여 그를 영접하여 보고 예우하였고, 또 벼슬하도록 하였지만 지조를 굽히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고려는 불교를 숭상했고 이 사람의 문장이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사우(寺宇)에 대한 기문(記文)이나 불경의 서문 같은 것은 모두 이 사람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이 때문에 연소한 유자(儒者)들이 그가 불교를 숭상했다고 하여 헐뜯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비록 학문하는 가운데에 거론되는 인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기개와 절조가 무척 고결하였으니 실로 동방 학문의 원류(源流)라 하겠습니다.”

하고, 윤근수(尹根壽)·정탁(鄭琢) 등도 이색이 대절(大節)을 훼손하지 않았던 의리를 개진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아뢴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우리 조정을 섬기지 않은 그 의사(意思)는 무척 고결합니다. 그런데 입조(立朝)할 때에, 천길 암벽이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기상이 없고 시속(時俗)에 부침(浮沈)한 병통이 없지 않다 하여 《고려사》에서는 그를 과소 평가했는데, 과연 그 논평이 공적(公的)인 측면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따져 본다면 그의 장단처(長短處)를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윤근수는 아뢰기를,

“어제 경연 석상에서 전교하신 말씀을 삼가 듣건대 지극히 황공합니다.【전일에 윤근수가 경연 석상에서 우리 나라의 인심(人心)이 본시 중국과 같지 못하다고 논했는데, 어제 그런 의논은 바르지 못하여 폐단이 있다고 하는 상의 하교가 있었으므로 윤근수가 이처럼 아뢴 것이다.】 소신의 의중으로는, 20여 년 동안 사람들이 원형(元衡)의 포악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마디도 말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마음속으로만 분개하고 개탄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아뢰었던 것인데 그 말을 생각해 보니 과연 폐단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내가 말했던 것은 저번에 아뢴 것이 뒤폐단이 없지 않았기에 그 실수를 구해 주려고 한 것이지 비난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일시적으로 편벽되게 아뢰었던 것에 대해 위에서 이처럼 유념하시고 기억해 주시니 모든 일에 생각에 더하신다면, 성상의 학문이 갈수록 고명해질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학문을 보면, 기자(箕子) 때의 일은 서적이 없어 상고하기 어렵고, 삼국 시대(三國時代)에는 천성(天性)이 수미(粹美)했으나 아직 학문의 공은 없었으며, 고려 시대엔 학문을 하긴 했지만 단지 사장(詞章)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우탁(禹倬)·정몽주(鄭夢周) 이후로 처음 성리(性理)에 관한 학문을 알게 되었는데 급기야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서 예악과 문물이 찬연히 일신(一新)되었습니다.

동방의 학문이 서로 전해진 차서로 말하면, 정몽주가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조(祖)로서 길재(吉再)가 정몽주에게서 배우고 김숙자(金叔滋)는 길재에게서 배우고 김종직(金宗直)은 김숙자에게서 배우고 김굉필(金宏弼)은 김종직에게 배우고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에게 배웠으니 본래 원류(源流)가 있습니다. 그 이후로 유사(儒士)들이 성현의 학문을 하고자 하게 되었으니 위에서 능히 교화를 주장하시면 지금이야말로 복고(復古)할 수 있는 기회라 하겠습니다. 학문에 힘쓰는 사람들이 비록 많지 않은 듯하나 지금 의논을 들어보면 학문을 아는 장자(長者)들이 기묘년에 비해 많다고들 합니다.”

하고, 윤근수는 아뢰기를,

“기묘년 이후로 사람들이 선(善)을 향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대개 조광조가 쏟은 공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근래 여항(閭巷) 간에 하천배(下賤輩)들까지도 상례(喪禮)를 닦아 거행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젊은 나이의 과부도 다른 곳으로 재가하지 않는 것은 모두 기묘인들이 진작시킨 효과입니다. 다만 조광조는 나이가 38세에 그쳤고 당시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술을 하여 후세에 전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학문은 심천(深淺)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한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흠앙(欽仰)하고 있습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소신이 전해 들으니, 하루는 명묘(明廟)로부터 ‘여항에서 《소학(小學)》을 읽혀야 한다.’는 전교가 있었는데 윤개(尹漑)가 정승으로서 이 전교를 듣고 찬양(贊襄)하자 윤원형이 ‘사람은 마음속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기묘년에 《소학》을 숭상하더니 신사년에 난이 일어났고 을사년에 또 난역(亂逆)이 일어났으니 《소학》은 난역의 책이다.’고 하였으므로 윤개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 떨었답니다. 윤원형의 심술(心術)을 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원형이 우리 나라에 죄를 지은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지마는 이 말은 내가 정말 모르고 있었다. 지금 이 말을 들어 보건대 선유(先儒)를 모두 헐뜯었으니 참으로 만세에 죄를 진 자이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한 탁주(韓侘胄)가 주자(朱子)를 위학(僞學)이라고 조롱했는데, 과거나 현재나 다름이 없습니다. 윤원형이 당시에 저지른 일을 보건대 이는 진실로 심상한 일로서 괴이하게 여길 것도 못 됩니다. 윤원형의 악행에 대해서는 어제 대략 아뢰었습니다.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은 바로 형제간이면서 모두 사특하고 악독했습니다. 명종이 즉위하신 초년에 곧바로 윤원로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윤원로가 참훈(參勳)되지 못하였는데 이로 인해 윤원형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윤원형이 춘년(春年)을 사주해 상소하여 유배케 하고는 이내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윤원로의 죄는 죽어야 마땅하나 죽인 자는 원형이었습니다. 지친(至親)인 형제간에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겁먹게 된 것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자고로 윤원형보다 더한 소인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 유생이 상소하여 ‘바야흐로 위세가 천지를 진동하던 때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았기 때문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자, 기대승이 아뢰기를,

“전교가 지극하십니다.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일의 스승이 됩니다. 윤원형과 같은 소인은 진실로 드물다고 하겠습니다만 아무리 소소한 소인이라도 틈을 타고 일을 저지르게 된다면 성치(聖治)에 누가 될 것입니다. 사심을 버리고 선을 따르며 훌륭한 선비들을 친근히 대한다면 세상이 좋아질 것입니다.”

하였다. 근수가 아뢰기를,

“송인수(宋麟壽)는 학문에 종사하여 효행이 뛰어나고 안색을 바르게 하여 조정에 섰는데 이기(李芑)와 윤원형에게 거슬림을 받아 죄를 입고 죽었습니다. 이 사람의 훌륭함은 권벌(權橃)이나 이언적(李彦迪)과 같은 수준에서 논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부박(浮薄)한 무리의 영수라 하여 파직되었고 나중에는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의 사건에 휘말려 사사(賜死)까지 되었습니다. 위에서 이미 신원(伸冤)해 주셨습니다만 이 사람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상께서 잘 아시지 못하여 사림에서 원통하게 여기는 것이 매우 우려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회맹문(會盟文)에는 모반했다고 적기까지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송인수는 일생 동안 기묘인(己卯人)을 흠모하였습니다. 계묘·갑진 연간에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되어서는 《소학(小學)》을 권면하고 후생들을 인도하였으니, 당시에 《소학》을 읽게 된 것은 모두 송인수의 공입니다.

오늘 대낮에 천둥이 쳤는데 이것이 아무리 현재의 절기에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성교(聖敎)에서 미안하게 여기셨으니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하월(夏月)이 비록 천둥치고 비오는 계절이긴 하지만 비가 너무 많이 쏟아져서 양남(兩南) 지방의 수재가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봄에는 가물고 여름에는 홍수가 져 벼와 곡식이 상했으니 백성이 무엇에 의지해 살겠습니까. 이는 하늘과 땅이 서로 어긋나 일어나게 된 현상이니 위에서 각별히 성념(省念)하셔야 합니다.

임금의 한 생각이 천지의 조화를 찬성(贊成)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용(中庸)》에서 ‘중화(中和)의 경지를 이루면서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성장한다.’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계근(戒謹)·공구(恐懼)하고 정밀하게 하고 요약하여 내 마음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천지의 마음이 바르게 되고 나의 기운을 순하게 가짐으로써 천지의 기운이 순해지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비오고 볕 쪼이는 것이 때에 맞게 되어 천지가 제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의 융성하던 시대에는 새·짐승·물고기·파충류까지 모두 화락하였으니, 천지의 기운이 조화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 태종(唐太宗) 때 가뭄과 장마가 들어도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던 것은 태종 자신이 우려하고 근신하면서 백성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경제 부흥의 공효를 세웠으니, 비록 ‘인의(仁義)를 가차(假借)했다.’는 평이 있기는 하나 그래도 이러한 공적이 있게 된 것은 위징(魏徵)이 권면하여 시행한 데서 얻은 결과였던 것입니다.

즉위하시고 나서 봄·여름의 교체기에는 비와 바람이 순조로와서 큰 풍년의 경사를 기대하게 하더니, 가을에 들어서면서 풍재(風災)가 끊이지 않아 밭농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논농사는 그래도 조금 수확할 수 있어 길거리에서 아사(餓死)하게 될 우려는 간신히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봄부터 강우량이 제대로 맞지 않더니 여름이 되면서 더욱 심해져 민생에 대한 일이 지극히 어렵고 괴롭게 되었으니 각별히 성념하시어 미진한 일이 있거든 수성(修省)하시는 데 극력 힘쓰심으로써 하늘의 마음을 되돌리셔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만민을 내었으나 스스로 다스릴 수 없기에 임금을 대신 세워 만민의 주인이 되게 하였고, 임금은 또 혼자서 다스릴 수 없기에 수령과 근심을 나눠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수령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에게 원망이 있게 되면 임금이 반드시 벌을 주게 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실하지 못하여 유리(流離)하여 살 곳이 없게 만든다면 하늘의 마음이 어찌 진노하지 않겠습니까. 억조 창생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 인주로서는 다른 것을 두려워할 것이 없으나 황천(皇天)이 환히 살펴보고 계시니, 한 생각이라도 잘못될 때마다 상제가 진노할 것을 두려워하시면 하늘의 마음이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지당하다.”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소신이 우연히 생각한 것을 계달했는데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감격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겠습니다. 평소 일이 없을 때에도 간단(間斷)함이 조금도 없게 하시면 성인과 동덕(同德)의 지경에 이르실 것입니다.”

하였다.

【원전】 21 집 217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인물(人物) / *과학-천기(天氣)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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