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朔壬戌/以趙憲爲公州州學提督官。 憲上疏, 因論學政之弊, 而極言時事, 其疏曰: |
臣狂率有病, 觸世多忤, 守縣無狀, 自取顚躓。 時値畿輔凶歉, 適又師友道喪, 時事日非, 身禍可虞, 自竄荒山, 黃鳥是依, 借廛力耕, 餒在其中, 將懼竝母, 胥塡溝壑。 乃今聖上躬化之秋, 謹庠序之敎; 申孝悌之義, 視中朝增損學制, 別設界首提督, 而不肖之臣, 誤蒙是選。 耕耘多苦, 專廢溫尋, 自以昏昏, 曷能使人昭昭? 內顧慙惶, 不敢就職則菽水之養, 迫於朝夕, 不得不祗掃聖庭, 遍誘蒙士, 以勸三餘之學。 追究禮曹事目中當爲者, 作手書, 布誠于列邑; 又思事目外合爲者, 具公牒, 備申于監司, 或求粘移, 冀以啓稟定奪。 訖潛思是擧, 實係大聖人作爲者, 迥出於尋常萬萬。 臣之職任, 雖不過下州文學, 而養人材、正風俗, 以開萬世之太平, 實是明道先生所願爲者。 須尊師重道, 自內而達外; 尙義去利, 淸源而及流然後, 表正影直, 風行草偃。 學校之臣, 抑可以奉令承敎, 罄師友之聞, 尋行數字, 講事達理, 十年之後, 萬一有螟蛉之化。 而厥今朝家擧措, 讒勝而殄行, 絶無推賢讓能之意, 搢紳之間, 學絶而養乖, 了無興悌不倍之俗。 以至三綱不明; 義理不分, 入主出奴之徒, 方騖於世, 遺君、後親之說, 肆行而無忌。 州縣士人, 亦惟利是求, 欲講立敎明倫, 便謂葩藻之爲急, 纔論白鹿學規, 便謂司馬之或緩。 匹夫之見, 萬無直遂之理, 臣恐不救斯弊, 則數年之間, 必有威陵君父, 戕殺士林, 如莽、操、全忠者作, 積漸爲惡, 率獸食人, 而擧世靡然, 莫之敢攖也, 洪水、猛獸之患, 莫逾斯急。 顧無瞻仰五雲之期, 玆因文武重試之日, 出鄭俠萬死之力; 陳崔(湜)〔寔〕策外之言, 切冀聖明之以身爲敎, 大有以振勵也。 臣聞, 道之在人, 均受同得, 不以聖豊; 不以愚嗇, 有敎則無類, 人可爲堯、舜。 爲君上者, 須知豫養於早, 親賢友善, 以身爲敎, 則其下化之, 自有不令而從者矣。 唐、虞、三代之治, 所以卓冠百王者, 用是道也。 降自叔季, 此學不明, 上不知素敎, 而明者歸昏, 則下有以欺蔽, 而讒說易行。 陳蕃、李膺之賢, 天下知之, 而圖危社稷之譖, 盡殲黨錮諸人; 司馬光、趙如愚之忠, 昭如日星, 而道學僞學之謗, 竝棄程、朱門徒。 靈帝鴻都之講, 斗筲皆與焉; 理宗恨不與朱子同朝, 而眞、魏見斥。 崇儒、設敎之事, 只資觀聽之美, 而所令, 實反於所好, 故民斯不從, 邪議竝橫。 學於盧【植。】鄭【康成。】者, 雖欲扶持一面, 而劉繇、王朗之論安、言計, 無補於漢亡; 漳、潭之人, 雖知死君死父, 而浙中怪論、戴雲鶻突之議, 只促宋滅。 周武王有銘曰: “與其溺於人也, 寧溺於淵。 溺於淵, 猶可游也; 溺於人, 不可捄也。” 玆數君, 由其溺於人之深, 故卒致喪其國之忽焉, 究其溺於人之深之故, 則諒由學不講, 而知不明, 視賢猶讐, 邪者似忠, 逐賢寵邪, 如恐不亟, 下咈民心; 上厭天意, 召災速寇, 與亂同事, 甘以宗器輸之他人, 而莫之知悔也。 嗚呼! 侫人之殆, 固爲可畏, 而此學之明, 尤爲當務之急者乎! 徂玆東土, 箕敎無徵, 三韓以降, 國紀蔑聞。 所賴以知君臣、父子之道, 越至于今, 或有忠孝之繼作者, 四書五經之前至, 而薛聰、禹倬因俗解講明; 《小學》、《家禮》之後至, 而李穡、鄭夢周變夷敎推闡, 用延麗季之危急, 而繼植我朝之綱紀。 金宗直之設敎, 義士如雲, 金宏弼、鄭汝昌, 寔倡道學, 趙光祖之登庸, 民俗幾變, 金淨、朴祥先進讜議。 雖被忌克者媒孽其間, 而代有善人, 跲而復起。 如鄭光弼之力救仁賢; 柳雲之不撓乎群小, 雖見挫折, 矻然有山岳不拔之氣。 李彦迪之辨奸獻忠; 權橃之臨危盡言, 雖謫遐荒, 凝然有大臣體貌。 金安國、宋麟壽之分按兩南, 宣澤敷敎, 而士民迄賴。 白仁傑、安命世之危言直筆, 砥柱頹波, 而公論昭垂。 倘無銷鑠斬伐之禍, 則濟濟之盛、匡輔之美, 必隣於文王之以寧矣。 噫! 此善人, 何負於國家; 何負於生民, 而彼讒人者, 必欲殄絶而不已乎? 惟其士禍之甚酷, 故識微之士, 咸謹於出處。 成守琛知有己卯之難, 而隱於城市; 成運身遇鴒原之慟, 而藏於報恩。 李滉心傷同氣之被禍, 而退居禮安; 林億齡駭見百齡之戕賢, 而棲遲外服。 又如徐敬德之遯于花潭; 金麟厚之絶意名宦; 曺植、李恒之幽栖海隅, 莫非乙巳之禍, 有以激之也。 鄭之雲學於安國, 而懲其師幾陷大網, 韜名麴糵; 成悌元身覩宋麟壽之遭慘, 則婆娑末班, 恢諧終保; 李之菡目見安命世之赴市, 則周遊海島, 佯狂逃世。 是皆廊廟大器、濟世高才, 鴻飛脫弋, 枯落巖壑。 自餘名流, 不遷則孥戮京外, 爲父兄者, 敎其子弟, 咸以禮學爲戒, 良才美質, 無不斲而小之。 |
朝無讜議, 權奸肆志, 幷取忠賢親友而撲殺之。 血流生民, 禍纏廟社者, 至於元衡、李芑極矣。 而李樑者繼芑交煽, 又將畢害餘人, 人之云亡, 邦國幾乎殄瘁矣。 何幸, 天佑東方, 明廟晩悟? 悉召海塞遷人, 漸復于朝, 林居逸民, 亦多奬敍。 惟其戕害士林, 罪關宗社者, 則不計戚里, 屛黜無疑。 雖其聖德天開, 忠邪自辨, 而李鐸、奇大恒、朴淳之宣力爲多。 噫! 桀、安不誅, 宣帝曷立; 伾、文不死, 憲宗何安? 試觀華督之殺孔父, 而弑殤公; 梁冀之弑質帝, 而殺李固, 奸臣擅國, 兇焰可畏。 手弄八柄, 口含百職, 非此勝彼, 卽彼殺此。 昔在仁廟賓天之日, 三臣就戮, 權橃抗論而見折, 則元衡之黨, 至有攘臂, 幸禍於賓廳。 不啻言論可繼者, 駢首就戮, 而先王愛子, 以次芟刈。 忠州己酉之禍, 草木皆枯; 百齡惡謚之加, 幾滅儒林, 斬伐之威, 氣象如何? 而中學一會之際, 合坐畏縮, 不敢秉筆, 大恒、鐸、淳, 視性命猶鴻毛, 惟以安國家、定社稷爲事, 抗章排雲, 不愛其死。 蓋大恒悼其父非命; 朴淳則父兄師友, 皆親見士禍者, 故慨憤有素, 戮力除姦, 是豈欲託於沈義謙者乎? 由其邪黨一散, 廟謀素定, 故代邸龍騰, 平、勃爲用; 賈誼疏策, 次第陳之。 時有金鎧, 以元衡餘黨, 忌李滉進用, 陰謀沮抑, 以間至治, 鄭澈以眇然末官, 忘身力爭, 幸賴离明旁照, 罪其媢嫉。 鎧也旣黜, 滉有來勢, 而平仲不知仲尼; 臧孫猶抑展禽, 使東周^舜民之機, 再失其時。 穆生、申、白之徒, 猶老林壑, 聖主在上, 而民不蒙澤, 朝著孤論, 人或謂黨。 而李珥壬申之疏, 逆覩姦萌, 隱憂浩歎, 累數萬言, 無一字一句, 不出於愛君之誠。 澈則學於奇大升, 而大升學於李滉。 珥則親承警欬於李滉, 又慕光祖之殉國, 謀猷氣槪, 有自來矣。 而精忠激烈, 上感宸衷, 蒙被器使, 展布心力。 澈按江原, 大均民役, 北使之行, 供億雖繁, 極殘之邑, 賴此保之。 且其淸名直節, 聳動一世, 珥甚重之, 期與同升。 保合之策, 又在朴淳, 淳之擧珥薦澈, 乃是相職之當務也。 珥則以爲, 啓沃之際, 不可無嚴憚自重之士, 故力拔其友一人, 置王左右, 乃成守琛之子渾也。 學得於家傳, 而篤信古道, 閉戶窮經, 源深發茂, 養心寡欲, 是可以起人主之敬, 而支大廈之傾者。 故寧暴史魚之屍, 冀用伯玉之賢。 淳亦愛之重之, 厥爲持平之日, 枉駕先之, 一揖而勉留, 以紹黃喜之風。 人之忌之者, 已有積謗, 而淳又加敬, 經席斷斷之啓, 終以致斯人爲急務, 是非淳之所善也, 擧朝好名之士, 孰不以用珥、渾爲言哉? 第此二人, 不諒衰末之俗, 心欲廣譬諭之, 造門之士, 一信其賢, 虛懷待之, 期與善世。 乃如楊畏之叛呂, 而邢恕之害程者, 寔繁有徒。 澈有獻可之明, 先察未形之惡, 而珥則晩悟, 乃致君實之疑。 是故, 人之怨澈者, 入于骨髓。 初忤金孝元, 則竝其姻家金繼輝, 目爲西人; 中忤李潑, 則竝其執友安敏學, 指爲攻東; 末言許篈之惡, 則擧國喧囂, 竝指珥、渾爲西帥。 嗚呼! 唐有牛、李之黨者, 自是相傾相軋, 均有厥咎, 固宜目之爲黨。 宋有川、洛之黨者, 只是川、朔之人, 指道學爲黨耳, 程門豈是樹黨者乎? 渾之行己, 一惟持正, 而好善之量, 無遠近彼此之間, 決不以毁譽, 動其喜怒者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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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20권 19년 10월 1일 (임술) 001 / 주학 제독관으로 제수된 조헌이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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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趙憲)을 공주(公州)의 주학 제독관(州學提督官)으로 삼았다. 조헌이 상소하여 학정(學政)의 폐단을 논하면서 시사에 대하여 극력 아뢰었다. 그 상소에, |
“신은 미치광이 같고 경솔한 병통이 있어 세상 사람들에게 저촉되어 거스름 받은 것이 많은데다가 고을살이를 형편없이 하였으므로 낭패스런 일을 자초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경기 지방에 흉년이 들었고 또 사우(師友)의 도가 무너진 데다가 시사가 날로 그릇되고 있었으므로 화가 몸에 닥칠까 걱정하여 스스로 황산(荒山)으로 도망가 농지를 빌려 힘써 농사를 지었으나 늘 굶주림을 면치 못하여 장차 어머니와 함께 골짜기에 쓰러져 죽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몸소 교화를 펴시는 때에 학교의 가르침을 신중히 하고 효제의 도의를 밝히며 중국 조정에서 개혁한 학제(學制)를 본떠 특별히 계수 제독(界首提督)을 신설하였는데, 불초한 신이 외람되게 그 직책에 선발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된 농사일 때문에 학문을 전폐하였으니, 혼미한 몸이 어찌 남을 밝게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돌아 봄에 부끄럽고 두려워 감히 선뜻 직에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미를 봉양하는 일이 조석으로 절박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정(聖庭)을 깨끗이 쓸고 어린 선비들을 교도하여 삼여(三餘)의 학문을 권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조의 사목(事目) 중에 응당 해야 될 것을 찾아 직접 써서 여러 고을에 통지하였고, 또 사목 이외에 시행할 만한 일을 공첩(公牒)을 갖추어 감사에게 품신하여 점이(粘移)하든지 또는 주상께 계품하여 재가받도록 할 것을 생각 중입니다. |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이 거사야말로 성인의 작위(作爲)에 관계되는 것으로 보통 일과 현저히 다르다고 봅니다. 신은 직책이 낮은 고을의 문학(文學)에 지나지 않지만 인재를 기르고 풍속을 바르게 하여 천만년 태평 성대를 여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는 실로 명도 선생(明道先生)이 해 보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스승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겨 그 정신이 안에서 밖으로 드러나고 의를 숭상하고 사리(私利)를 버림으로써 근원이 정화되어 지류에까지 미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형체가 바르면 그림자가 바르고 바람이 불면 풀이 쓸리듯이 교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학교에 있는 신하들이 교령(敎令)을 받들어 시행하는데 있어서 사우에게서 배운 것을 모두 활용하여 자행(字行)을 세어가면서 사리를 강명하여 통달시킨다면 10년이 지난 뒤에는 만에 하나라도 교화의 효과가 나타나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조가(朝家)의 거조는 참언(讒言)이 기승을 부려 형벌이 자행되고 어진 이를 추대하고 유능한 자에게 양보하는 뜻이 전혀 없으며, 관리들 사이에도 학문이 끊어지고 교양이 부족하여 효제(孝悌)의 정신을 흥기시켜 배반함이 없게 하는 풍속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에 삼강(三綱)은 매몰되고 의리가 분명치 못하여 이설(異說)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날뛰고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여기는 설이 기탄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
주현(州縣)의 선비들도 오직 이욕만을 찾기에 급급하여 교육을 확립하고 인륜을 밝히는 내용을 강하려 하면 곧 시문을 짓는 일이 급하다 하고, 백록 학규(白鹿學規)에 대하여 논하려 하면 곧 사마시(司馬試)가 늦어진다고 말합니다. 필부(匹夫)의 견해가 곧바로 이루어질 수는 만무합니다만, 신은 생각건대 이런 폐단을 빨리 바로 잡지 않으면 몇 년이 안 되어 군부를 위협하고 업신여기기를, 마치 왕망(王莽)·조조(曹操)·주전충(朱全忠) 등이 했던 것처럼 사림을 해치고 살륙을 자행하는 자들이 나와서 차츰 악한 짓을 하여 짐승을 내몰아 사람을 해치게 하는 지경에 이를 것은 물론이고 온 세상이 그러하여 감히 손 쓸 수 없게 될 것이니, 홍수나 맹수의 환란도 이보다 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오운(五雲)을 우러러 볼 기약이 없는데 이번의 문무 관료들에게 중시(重試)을 보이는 때를 인하여 정협(鄭俠)이 죽을 힘을 다 쏟고, 최식(崔寔)이 대책(對策) 밖의 말을 올렸던 것처럼 글을 올려 성명께서 몸소 교화를 실천하여 크게 진작시키고 장려하는 계기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신은 듣건대 도(道)는 우리 인간이 누구나 균등하게 받아 가진 것으로 성인이라고 더 풍성하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더 부족하지도 않아 교육을 시키면 유(類)가 없어져 누구나 요순(堯舜) 같이 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조기에 미리 교양할 줄 알아서 현인을 친애하고 선인과 교제하여 몸소 교육을 실천하면 아래 백성들은 명령하지 않아도 절로 따르게 되는 것인데, 당우(唐虞)·삼대(三代)의 다스림이 여러 제왕들보다 우뚝한 까닭은 바로 그러한 도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부터 이 학문을 밝히지 못한 탓으로 윗사람은 평소의 교육을 알지 못하여 명철한 자가 우매하게 되고 아랫사람들은 속이는 데에 익숙하여져 참설(讒說)이 쉽게 행해지는 것입니다. 예컨대 진번(陳蕃)·이응(李膺)의 훌륭함은 세상이 다 알고 있었지만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도모했다는 참소로 결국 당고(黨錮)에 연루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죽었고, 사마광(司馬光)·조여우(趙如愚)의 충직함은 해와 별처럼 밝았지만 도학(道學)이 위학(僞學)이라는 비방을 받아 정주(程朱)의 문도들과 함께 폐기되었으며, 한 영제(漢靈帝)가 홍도(鴻都)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보잘것없는 소인들이 끼었고, 송 이종(宋理宗)이 주자와 한 조정에 있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지만, 당시에 진덕수(眞德秀)·위요옹(魏了翁)이 배척당하였습니다. |
따라서 유학을 숭상하고 교육을 베푸는 일이 단지 보고 듣는 데 아름다움이 될 뿐, 명령하는 바가 실상 자신의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기 때문에 백성들은 따르지 않고 간사한 말이 횡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로 노식(盧植)·정강성(鄭康成)에게 배운 자가 비록 한 방면을 부지(扶持)하려 하였으나 유유(劉繇)·왕낭(王朗)이 안정을 논하고 계책을 말한 것이 결국 한(漢)나라를 망하게 하였고, 장(障)·담(潭) 사람들이 비록 군부를 위하여 죽는 의리를 알았지만 절중(浙中)의 괴상한 말과 대운(戴雲)의 호도(糊塗)하는 논의가 송(宋)나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던 것입니다. 주 무왕(周武王)의 명(銘)에 ‘사람에게 빠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 물에 빠지면 오히려 헤엄이라도 칠 수 있지만 사람에게 빠지면 구제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몇몇 임금들은 사람에게 깊이 빠졌기 때문에 마침내 쉽게 나라를 잃어 버렸는데 사람에게 깊이 빠지는 연유를 따져보면, 모두 학문을 강하지 않아 지혜가 밝지 못한 탓으로 어진 사람을 원수처럼 대하고 간사한 사람을 충직한 사람처럼 여긴 나머지 어진 사람을 쫓아내고 간사한 사람을 총애하기에 급급하여,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거스로고 위로는 하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재앙과 도적을 불러들이는가 하면 불량한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 기꺼이 종기(宗器)를 내어 주고도 후회할 줄을 몰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
아, 간사한 사람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도 진실로 두려워할 만하지만 학문을 강명하는 것은 더욱 힘써야 할 급선무입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 전해졌던 가지(箕子)의 교훈은 고증할 수 없고 삼한(三韓) 이래의 국기(國紀)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군신 부자의 도리를 알아 간혹 충신·효자가 잇따라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사서 오경(四書五經)이 들어오자 설총(薛聰)·우탁(禹倬)이 속어(俗語)로 해석하여 강명하였고, 나중에 《소학(小學)》과 《가례(家禮)》가 들어오자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가 우리 나라의 교육에 맞게 천명한 결과로 고려 말기의 위급한 상황을 부지하고 아조(我朝)의 기강을 부식(扶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뒤 김종직(金宗直)이 교육을 베풀자 수많은 의사(義士)들이 구름처럼 모였는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도학을 창도하였고, 조광조(趙光祖)가 등용되어서는 민속을 거의 변모시켰고, 김정(金淨)·박상(朴祥)은 앞장서서 바른 언론을 펼쳤습니다. 비록 시기하여 이기려는 자들이 그 사이에 모해를 하였지만, 시대마다 끊이지 않고 올바른 인물이 나와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
이를테면 어질고 훌륭한 이를 구원한 정광필(鄭光弼)과 군소배들에게 꺾이지 않은 유운(柳雲)은 비록 좌절을 당하긴 하였지만 우뚝이 산악과 같은 기상이 있었고, 간인을 변핵하여 충정을 바친 이언적(李彦迪)과 위급한 상황에서도 직언을 다한 권벌(權橃)은 비록 먼 변방으로 유배당했지만 늠름한 대신의 체모가 있었고, 김안국(金安國)·송인수(宋麟壽)는 양남(兩南)에 관찰사로 나가 은택과 교화를 베풀어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덕택을 입고 있으며, 백인걸(白仁傑)·안명세(安命世)의 위언(危言)과 직필(直筆)은 휩쓸리는 물결의 지주(砥柱)가 되어 공론이 밝게 전하여졌습니다. 만일 짓누르고 참벌(斬伐)하는 화만 없었더라면 많은 선비들이 바루고 보좌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반드시 문왕(文王)이 그런 선비들을 힘입어 편안할 수 있었던 일과 같게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 이런 착한 사람들이 국가와 백성들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저 참소하는 자들은 기필코 모두 없애버리려는 마음을 가져 그만두지 않는단 말입니까? 오직 사화가 흑심하였기 때문에 기미를 아는 선비들은 모두 출처(出處)에 대해서 조심하였습니다. 성수침(成守琛)은 기묘의 화란이 있을 것을 알고 성시(城市)에 숨었고, 성운(成運)은 동기간의 슬픔을 당하고서 보은(報恩)에 숨었으며 이황은 동기가 화를 입은 것을 상심하여 예안(禮安)으로 물러갔고, 임억령(林億齡)은 아우 백령(百齡)이 어진 이를 해치는 것을 보고 놀라 외지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습니다. 또한 서경덕(徐敬德)이 화담(花潭)에 은둔한 것과, 김인후(金麟厚)가 벼슬에 뜻을 끊은 것과, 조식(曹植)·이항(李恒)이 바닷가에 숨어서 살았던 것 등은 모두 을사년의 사화가 격분시킨 것입니다. |
정지운(鄭之雲)은 김안국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자기 스승이 큰 죄망에 빠질 뻔하였던 것을 징계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어 이름을 감추었고, 성제원(成悌元)은 직접 송인수의 변을 보고 낮은 관직에서 전전하며 해학으로 일생을 보냈고, 이지함(李之菡)은 안명세(安命世)의 처형을 보고 해도(海島)를 돌아다니면서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도피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조정의 큰 그릇이고 세상을 다스릴 만한 고매한 인재들인데, 기러기가 높이 날아 주살을 피하듯이 세상을 버리고 산골짜기에서 늙어 죽었습니다. 그밖의 명류(名流)들도 귀양가지 않으면 경외(京外)에서 처자들과 함께 형벌을 받았으니, 부형들은 자제들에게 예학(禮學)을 배우지 못하게 경계하여 마치 큰 재목을 깍아 작게 만들 듯이 아름답고 우수한 재질들을 보잘것 없는 인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정에는 바른 의논을 하는 사람이 없게 되고 권간(權奸)들이 제멋대로 행세하여 충성스럽고 어진 이들의 친구까지 끌어다가 박살하였습니다. 백성들을 피로 물들이고 종묘 사직에 화가 얽히게 하는 것이 윤형원·이기(李芑)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이양(李樑)이 이기를 이어 함께 선동하여 남은 사람들까지 모조리 해치려 하였으니 인재들의 멸망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우리 나라를 보우하사 명종이 늦게 뉘우침으로써 바닷가나 변방으로 귀양보냈던 사람들을 불러 점차 조정에 복귀시켰으며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들도 많이 등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림을 해치고 종묘 사직에 죄을 지은 자들은 척리(戚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쫓아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비록 성덕(聖德)을 하늘이 깨우쳐주어 충(忠)과 사(邪)가 저절로 분변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이탁(李鐸)·기대항(奇大恒)·박순(朴淳) 등이 힘쓴 덕택이 큽니다. 아, 걸(傑)·안(安)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선제(宣帝)가 어떻게 설 수 있었겠으며 비(伾)·문(文)이 죽지 않았다면 헌종(憲宗)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화독(華督)이 공보가(孔父嘉)를 죽이고서 상공(殤公)을 시해한 일과 양기(梁冀)가 질제(質帝)를 시해하고서 이고(李固)을 죽인 일을 보더라도 간신이 국사를 독단하며 흉악한 기세를 부리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은 권병(權柄)을 멋대로 주무르면서 온갖 관직을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쪽이 저들을 이기지 못하면 저들이 이쪽을 죽이게 됩니다. |
지난날 인종(仁宗)이 승하하던 때에 세 신하가 죽음을 당하였고, 권벌이 항론(抗論)하였으나 좌절당하자 윤원형의 무리는 빈청(賓廳)에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화를 다행으로 여기는 자까지 있었는데, 잇따라 바른 말을 하는 자들만이 머리를 나란히 하여 형장에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선왕의 사랑하던 아들도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충주(忠州) 기유 옥사(己酉獄事)의 화는 사류들을 초목처럼 모두 죽게 하였고 임백령(林百齡)에게 악시(惡諡)를 주려다가 유림(儒林)이 거의 전멸하였으니, 참벌의 위세야말로 그 기상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중학(中學)의 모임에서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위축되어 감히 붓을 잡지 못하였는데 기대항·이탁·박순은 생명을 홍모(鴻毛)처럼 여기고 오직 국가와 사직을 안정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소장(疏章)을 들고 궁궐로 달려가 죽음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대개 기대항은 그의 아비가 비명에 죽은 것을 슬퍼하였고, 박순은 부형과 사우들이 직접 사화를 당하였기 때문에 평소 비분 강개하여 있는 힘을 다해 간인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니, 어찌 이들이 심의겸에게 빌붙으려 한 자들이겠습니까. |
간사한 무리들이 한번 흩어지고 묘당의 계모가 평소부터 정해졌기 때문에 대저(代邸)가 즉위하자 진평(陳平)·주발(周勃)이 기용되고 가의(賈誼)의 소책(疏策)이 차례대로 올려지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김개(金鎧)는 윤원형의 잔당으로서 이황의 기용을 시기하여 저지할 음모를 꾸며 지치(至治)를 이간하려 하였는데, 정철이 미관 말직에 있으면서 몸을 돌보지 않고 힘써 쟁논하였으므로 성상께서 명찰하시어 시기하던 무리들을 단죄하였습니다. 김개가 쫓겨나가게 되자 이황이 다시 조정에 나올 기세가 있었던 것인데 평중(平仲)이 중니(仲尼)를 알아보지 못하고 장손(藏孫)이 전금(展禽)을 저지하듯 하여 우리 나라가 태평 성대로 될 수 있었던 기회를 잃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목생(穆生)·신공(申公)·백생(白生) 같은 무리들을 초야에서 늙게 하여 성스러운 주상이 위에 계셨지만 백성들은 그 은택을 입지 못하였고, 조정의 외로운 언론을 사람들은 간혹 편당을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
그런데 이이는 임신년 상소에 간당들의 조짐을 예견하고 속으로 걱정하면서 크게 탄식하였는데, 그 수만 마디 말이 한 글자 한 구절도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정철은 기대승(奇大升)에게 배웠고 대승은 이황에게 배웠는데 이이는 이황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조광조의 순국 충절을 사모하였으니 그의 경륜과 기개는 연원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충정이 격렬하여 위로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자 능력을 인정받아 등용되어 온 힘과 마음을 쏟았던 것입니다.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백성들의 요역을 균등하게 하였고, 북쪽에서 오는 사신의 행차에 접대하는 비용이 매우 많았으나 극도로 잔파된 고을이 그의 덕택으로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깨끗한 명성과 곧은 절개는 온 세상을 흥분시켰으므로 이이가 매우 중히 여겨 함께 조정에 오를 것을 기약하였던 것입니다. 사림을 보합(保合)하는 계책은 또 박순에게 있었으니 그가 이이와 정철을 천거한 것은 재상의 직분상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었습니다. |
그리고 이이는 경연에서 강론할 때 임금께서 경계하고 꺼릴 만한 중후한 선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친구 한 사람을 애써 발탁하여 임금의 좌우에 두려 하였으니, 그가 곧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성혼입니다. 성혼은 가문의 학문을 이어받았는가 하면 옛 성현의 도를 독실히 믿었는데 집안에 들어앉아 경서를 탐구하여 근원이 깊었기 때문에 발현되는 것이 성대하고 마음을 수양하여 욕심을 적게 가졌으니, 그는 참으로 임금이 공경할 만한 사람이고 위태로운 나라를 지탱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는 사어(史魚)가 시체를 드러내어 훌륭한 백옥(伯玉)을 쓰게 한 것처럼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박순 또한 성혼을 애지중지하여 그가 지평이 되던 날 먼저 찾아가 한 번 인사하고서 조정에 머무르기를 권하여 옛날 황희(黃喜)의 기풍을 이었습니다. 그를 시기하는 자들은 이미 많은 비방을 하였지만 박순은 더욱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 경연에서 차근차근 아뢰어 끝까지 그의 초치를 급선무로 하였는데 이는 박순만이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에서 명예를 좋아하는 선비라면 누구인들 성혼·이이를 기용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
다만 이 두 사람의 쇠퇴해진 말세의 시속을 헤아리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널리 깨우치려고 하였으므로 그의 문하에 찾아온 자들을 하나같이 그 사람의 훌륭함만 믿어 마음을 터놓고 대우하면서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기약하였으니, 이에 양외(楊畏)가 여대방(呂大方)을 배반하고 형서(邢恕)가 정자(程子)를 해쳤던 것처럼 하는 자들이 수없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철은 헌가(獻可)의 안목을 가져 드러나지 않은 악을 미리 살폈지만, 이이는 늦게서야 깨달아 군실(君實)의 의심을 자초하였는데 이 때문에 정철에 대한 사람들의 원망이 골수에 박혔습니다. 처음에 김효원(金孝元)의 뜻을 거스르자 그의 인척인 김계휘(金繼輝)까지 서인이라 지목하였고, 중간에 이발의 뜻을 거스르자 그의 치구 안민학(安敏學)까지 동인을 공격하였다고 지적하였으며, 마지막에 허봉의 나쁜 점을 말하자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 이이·성혼도 서인의 영수라 지목하였습니다. |
아, 당나라 때 우(牛)·이(李)·당(黨)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들은 양측이 서로 모함하고 알력이 생겨 똑같이 잘못이 있었으니 진실로 당이라고 지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송나라에는 천(川)·낙(洛)의 당이 있었는데 이는 다만 천당(川黨)·삭당(朔黨)의 사람들이 도학(道學)을 지적하여 당이라 한 것이니 정자의 문하에 어찌 당파를 세우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성혼의 행실은 한결같이 바른 것을 견지하였고, 착한 사람을 좋아하는 도량은 원근(遠近)과 피차의 구분이 없었으며, 결단코 훼예(毁譽)에 따라 성내거나 기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교육(敎育) / *역사(歷史) / *군사(軍事) / *사상-유학(儒學) / *변란-정변(政變)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