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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 17卷 9年 2月 14日 (丁亥) 001 / 길창군 권근의 졸기

천하한량 2007. 3. 23. 02:15

太宗 17卷 9年 2月 14日 (丁亥) 001 / 길창군 권근의 졸기


○丁亥/吉昌君權近卒。 是日曉, 上聞病革, 命世子視疾, 臨發聞已卒, 乃止。 可遠, 後改思叔, 號陽村, 安東府人, 高麗政丞之曾孫, 檢校政丞之子。 少讀書孜孜不輟, 洪武己酉年十八, 擢丙科, 拜春秋檢閱, 爲王府閟者赤。 癸丑, 中科擧鄕試第三名, 以年未滿二十五, 不赴京師。 甲寅, 拜成均直講、藝文應敎。 恭愍王暴薨, 朝遣使頒赦, 令國家欲禮接之。 鄭夢周鄭道傳等上書都堂, 請毋納使, 其言切直不小諱。 當國者皆誣以罪逐之, 以年少不解事得免。 壬戌, 拜左司議大夫。 僞主在位, 久淫戲無度, 上疏極諫, 乃聽納, 命寫諫草, 貼諸屛障。 甲子冬, 代言有闕員, 時宰擬進名, 曰: “此人嘗爲諫官, 使我不得有爲。” 乃取筆周其名。 戊辰春, 崔瑩當國, 有抗中國之志, 凡申朝廷之事, 不用事大舊例, 欲以草檄移之。 面斥其非, 竟不用草檄。 夏, 太祖擧義回軍, 執退, 拜左代言, 尋遷知申事, 同知貢擧, 取李垠等三十三人。 己巳春, 進拜簽書密直司事, 夏, 與門下評理尹承順奉表如京師, 秋, 齎禮部咨一道還國。 國舅李琳, 時爲左相坐廟堂, 以其咨付之。 我太祖爲右相, 適違豫在邸, 或乘間進言於太祖曰: “禮部咨, 乃責異姓爲王。” 獨與拆視。 十月, 臺諫劾李崇仁奉使如京貨殖之罪而貶之。 崇仁朝京, 故知崇仁被誣, 上書明其無罪, 臺諫以黨罪人毁言官, 劾貶牛峯。 及恭讓王卽位, 臺諫劾私拆咨文, 先示李琳, 是黨於異姓也, 論罪移貶寧海。 庚午春, 臺諫更論劾, 欲置極刑, 賴太祖申救, 決杖量移興海。 其年夏, 李穡以下諸在貶所者, 俱逮繫淸州獄。 天忽大雨, 水漲入城中, 公廨皆沒, 諸問事官至上樹得免, 被繫者亦皆走避, 獨堅坐, 神色自若曰: “我若有罪, 當伏天誅, 若無罪, 則天豈死我於水哉!” 於是免歸漢陽, 徙益州, 著《入學圖說》。 辛未春, 得自便歸忠州, 定禮經而未就, 至是乃得立藁。 癸酉春, 太祖雞龍山, 特召赴行在, 命與鄭摠撰定陵墓碑。 甲戌秋, 拜中樞院使, 丙子夏, 大明太祖高皇帝怒表箋有戲侮字, 遣使徵撰表人鄭道傳道傳稱疾, 來使日督之。 自請曰: “撰表之事, 臣亦與知, 願隨使赴京。” 太祖以非有徵命止之, 復啓曰: “臣於前朝之季, 身被重譴, 幾不保首領, 幸賴殿下欽恤之仁, 獲保性命。 及今國初, 又蒙收用, 再造之恩, 如天罔極, 而臣未有報效。 願乞赴京, 如天之福, 庶得辨明, 少答聖恩之萬一。” 太祖密賜黃金以贐行。 及渡鴨綠江, 使臣孛羅與諸宰, 相問入對之辭, 而不問於, 曰: “大人何獨不與我言?” 孛羅改容曰: “今子無徵命而自往, 國之忠臣也。 帝有何所問, 子亦何所對?” 九月, 入朝。 翌日, 禮部欽奉聖旨, 爲留撰表(人)〔文〕, 移咨本國, 勑召視咨草, 叩頭曰: “小國事大, 不因表文, 無以達情, 而臣等生於海外, 學不通方, 使我王之忠誠, 不能別白於黈纊, 誠臣等之罪耳。” 帝然其言, 待以優禮。 命題賦詩十八篇, 每進一篇, 帝嘉歎不已, 仍勑有司, 備酒饌具妓樂, 使之遊觀三日, 亦命賦詩以進。 帝乃親製長律詩三篇賜之, 勑仕文淵閣, 得與翰林學士劉三吾許觀景淸張信戴德彝, 相周旋, 每稱美我太祖回軍之義、事大之誠, 帝聞而嘉之, 特稱老實秀才, 乃命遣還。 旣還, 道傳嗾臺諫, 劾以鄭摠等皆被拘留, 獨得放還之故, 申請其罪, 太祖曰: “當天子震怒之時, 挺身自往, 善辭專對, 能霽天威, 功實不細, 反加罪乎?” 亦上書, 自敍微勞, 於是稱下元從功臣。 戊寅秋, 丁外憂, 己卯, 起復拜簽書, 再上箋乞終制, 不允。 俄遷政堂文學兼大司憲, 上疏罷私兵。 庚辰十一月, 上卽位, 賜推忠翊戴佐命功臣之號。 壬午春, 以參贊議政府事知貢擧, 取申曉等三十三人。 中國使臣必先問動靜, 及相接, 加以禮貌。 御史兪士吉、內史溫不花, 奉使而來, 亦於鴨綠江問安否。 及至都, 殿下慰宴使臣, 諸宰相以次行酒禮, 及行禮, 士吉不花皆起坐, 殿下曰: “天使何至是也?” 士吉曰: “何敢慢斯文老成君子乎?” 不花曰: “太祖皇帝之所致敬者也。” 不花, 卽孛羅也。 癸未, 上表乞解仕就閑, 終考禮經節次, 上不許曰: “昔司馬光《資治通鑑》, 未嘗解職。” 乃命三館士二人, 日就第, 供翰墨。 及成, 繕寫一本以進。 乙酉春, 拜議政府贊成事, 冬, 居內憂。 丙戌春, 命起復拜大提學, 再上箋乞終制, 不允。 其秋, 上將禪于世子, 上書請停禪位, 又輿疾詣闕啓之, 上謂左右曰: “吾固知其非常人, 然其胸中斷事, 不謂如此精確也。” 丁亥夏, 上親試文士, 命與左政丞河崙讀卷, 取藝文館直提學卞季良等十人。 戊子冬, 疾篤, 聞上怒臺諫官, 將置極刑, 上書切諫, 上乃釋之。 自寢疾, 賜藥問安無虛日, 卒年五十八。 上聞而震悼, 輟朝三日, 命有司治喪事, 賜祭弔誄賻贈甚厚。 中宮亦遣中使致奠, 世子親臨柩祭之, 成均大司成崔咸等領三館士, 祭以小牢。 贈諡文忠自檢閱, 至爲宰相, 常任文翰, 歷揚館閣, 未嘗一補外寄。 天資精粹溫雅, 深於性理之學, 平居雖甚倉卒, 未嘗疾言遽色, 至於擯斥廢黜, 死生在前, 處之泰然, 曾不隕穫。 凡經世之文章, 事大之表箋, 亦皆撰述。 有集若干卷行于世。 其將卒也, 聚子若壻, 遺命不作佛事。 其子壻治喪, 一依《家禮》, 不用浮屠法云。 子四,

태종 17권 9년 2월 14일 (정해) 001 / 길창군 권근의 졸기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졸(卒)하였다. 이날 새벽에 임금이 권근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세자에게 문병하도록 명하여, 세자가 막 떠나려고 하였는데, 권근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권근의 자(字)는 가원(可遠)인데 뒤에 사숙(思叔)으로 고쳤다. 호(號)는 양촌(陽村)이고 안동부(安東府) 사람이다. 고려 정승 권부(權溥)의 증손이며, 검교 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읽기를 부지런히 하여 그칠 적이 없었다. 홍무(洪武) 기유년에 나이 18세로서 병과(丙科)에 뽑혀 춘추 검열(春秋檢閱)에 제배(除拜)되어 왕부 비자치(王府閟者赤)가 되었다. 계축년에 과거(科擧) 향시(鄕試)에 3등[第三名]으로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25세 미만(未滿)인 까닭에 경사(京師)에 가서 응시하지 못하였다. 갑인년에 성균 직강(成均直講)과 예문 응교(藝文應敎)에 제배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이 갑자기 죽자, 원조(元朝)에서 사신을 보내어 반사(頒赦)하고 우리 나라로 하여금 예(禮)로 접대하기를 강요하니, 권근이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도당(都堂)에 상서(上書)하여 원나라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이 간절하고 곧아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국정을 담당한 자들이 이들을 모두 무고하여 죄를 뒤집어 씌워 내쫓았으나, 권근은 나이가 어려서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면할 수 있었다. 임술년에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제배되어, 위주(僞主) 우왕(禑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음희(淫戲)로 절도가 없었으므로, 상소하여 극진히 간하니, 우왕이 이에 말을 받아들이고, 간초(諫草)를 써서 병풍에 붙이도록 명하였다. 갑자년 겨울에 대언(代言)에 궐원(闕員)이 생겼는데, 당시 재상이 권근의 이름을 올려 추천하였더니, 우왕(禑王)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간관(諫官)이 되어 나로 하여금 꼼짝 못하게 하였다.”

하고, 필(筆)을 잡아 그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무진년 봄에 최영(崔瑩)이 국정을 담당하여 중국에 대항할 뜻을 가지고, 무릇 중국 조정에 보내는 글에 사대(事大)의 구례(舊例)를 쓰지 아니하고 초격(草檄)으로 이자(移咨)하려고 하니, 권근이 면대하여 그 잘못을 지적해서 마침내 초격(草檄)을 쓰지 아니하였다. 여름에 태조(太祖)가 의(義)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최영을 잡아 물리치매, 좌대언(左代言)에 제배(除拜)되었다가 곧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이은(李垠) 등 33인을 뽑았다. 기사년 봄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승진하였고, 여름에는 문하 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더불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다가, 가을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1통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국구(國舅) 이임(李琳)이 당시에 좌상(左相)이 되어 묘당(廟堂)에 나와 앉아 있었으므로, 그 자문(咨文)을 넘겨 주었다. 우리 태조는 우상(右相)이 되었으나 마침 신병으로 인하여 집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틈을 타서 태조께 진언하기를,

“예부(禮部)의 자문은 이성(異姓)이 왕이 된 것을 문책한 것인데, 권근이 홀로 이임과 더불어 뜯어 보았습니다.”

고 하였다. 10월에 대간(臺諫)에서 이숭인(李崇仁)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서 재물을 모은 죄를 탄핵하여 폄출(貶黜)되었는데, 권근이 이숭인의 뒤를 이어 경사에 갔던 까닭으로, 이숭인의 무고(誣告)를 당한 사실을 알고 상서(上書)하여 그의 무죄함을 밝히니, 대간에서 권근이 죄인의 편을 들고 언관(言官)을 헐뜯는다고 탄핵하여 우봉(牛峯)으로 폄출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卽位)하게 되자 대간에서 탄핵하기를, ‘권근이 사사로이 자문(咨文)을 뜯어서 먼저 이임(李琳)에게 보였으니, 이는 이성(異姓)을 편든 것이라’고 논죄(論罪)하여, 영해(寧海)로 옮겨 유폄(流貶)시켰다. 경오년 봄에 대간에서 다시 논핵(論劾)하여 극형(極刑)에 처하려고 하였으나, 태조가 구원하여 줌에 힘입어 장(杖)을 맞고 흥해(興海)로 양이(量移)되었다. 그해 여름에 이색(李穡) 이하 여러 폄소(貶所)에 있던 자가 모두 청주(淸州)의 옥(獄)으로 잡혀 와 갇혔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 성안에 들어와서 공해(公廨)가 모두 물에 잠겼었다. 여러 문사관(問事官)들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물을 피하였으므로, 갇힌 자들이 모두 달아나 피하였다. 권근만은 홀로 꼿꼿이 앉아서 신색(神色)이 자약(自若)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약 죄가 있으면 마땅히 천벌(天罰)을 받을 것이고, 만약 죄가 없으면 하늘이 어찌 나를 물에 빠져 죽게 하겠느냐?”

하였다. 이때 죽음을 면하여 한양(漢陽)으로 돌아왔다가 익주(益州)로 옮겼었는데,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다. 신미년 봄에 자편(自便)을 얻어 충주로 돌아갔다. 《예경(禮經)》을 찬정(撰定)하다가 이룩하지 못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고를 쓸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계유년 봄에 태조가 계룡산(鷄龍山)에 거둥하여 권근을 특별히 불러 행재소(行在所)에 나오게 하여, 정총(鄭摠)과 더불어 능묘(陵墓)의 비문(碑文)을 찬정하도록 명하였다. 갑술년 가을에 중추원 사(中樞院使)에 제배(除拜)되었다. 병자년 여름에 명나라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표전(表箋)에 희모(戲侮)의 글자가 있다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지은 사람인 정도전(鄭道傳)을 부르니, 정도전이 병이 있다고 칭탁하였다. 내사(來使)가 날마다 독촉하니, 권근이 자청(自請)하기를,

“표(表)를 짓는 일에 신도 참여하여 알고 있으니, 사신을 따라 경사(京師)에 가기를 원합니다.”

하니, 태조가 부르는 명이 없다고 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권근이 다시 아뢰기를,

“전조(前朝) 말엽에 몸이 중한 죄를 입어 거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는데, 다행히 전하의 불쌍히 여기시는 인덕(仁德)에 힘입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고, 이제 국초(國初)를 당하여 또 거두어 써 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재조(再造)의 은덕(恩德)이 하늘처럼 망극(罔極)하오나, 신이 보답한 공로가 없습니다. 원컨대, 경사(京師)에 가서 하늘 같은 복(福)으로 변명(辨明)을 하여, 성은(聖恩)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까 합니다.”

하였다. 태조가 남몰래 황금(黃金)을 하사하여 행자(行資)로 쓰도록 하였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니, 사신 발라(孛羅)가 여러 재상(宰相)들에게 중국 조정에 들어가 대답할 말을 물었는데, 권근에게는 묻지 아니하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은 어찌하여 오로지 나에게는 말하지 아니합니까?”

하니, 발라(孛羅)가 낯빛을 고치며 말하기를,

“지금 그대는 부르는 명령이 없는데도 자진하여 가니, 나라의 충신(忠臣)입니다. 황제께서 무슨 물을 말이 있겠으며, 그대 역시 무슨 대답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9월에 중국 조정에 들어가니, 그 이튿날 예부(禮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표문(表文)을 지은 사람들을 억류(抑留)하기 위해 본국(本國)으로 자문(咨文)을 보내고, 칙명(勅命)으로 권근을 불러서 자문(咨文)의 초(草)를 보여 주었다. 권근이 고두(叩頭)하며 말하기를,

“소국(小國)이 사대(事大)함에 있어 표문(表文)이 아니면 하정(下情)을 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해외(海外)에서 자라서 학식이 통달하지 못하여, 우리 임금의 충성을 능히 주광(黈纊)에 각별히 사뢰지 못하였사오니 진실로 신 등의 죄입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우례(優禮)로 대접하고, 시제(詩題)를 내어 시(詩) 18편(篇)을 짓도록 명하였다. 시 한 편을 지어 올릴 때마다 황제가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주찬(酒饌)을 준비하고 기악(妓樂)을 갖추어 사흘 동안 유람(遊覽)하게 하고, 또 시(詩)를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황제가 이에 장률시(長律詩) 3편을 친히 지어 하사하고, 문연각(文淵閣)에 출사(出仕)하도록 명하여 한림 학사(翰林學士)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경청(景淸)·장신(張信)·대덕이(戴德彝) 등과 더불어 서로 교유하게 하였다. 매양 우리 태조의 회군(回軍)한 의거(義擧)와 사대(事大)하는 정성을 칭송하니, 황제가 듣고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노실수재(老實秀才)’라고 일컫고,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돌아오자, 정도전(鄭道傳)이 대간(臺諫)을 사주(使嗾)하여, 정총(鄭摠) 등은 모두 구류(拘留)되었는데 혼자서만 석방되어 돌아왔다는 이유로써 탄핵하여 그 죄를 거듭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천자가 진노(震怒)한 때에 몸을 일으켜 자진하여 가서 좋은 말로 전대(專對)하여 능히 황제의 노여움을 풀게 하였으니, 공이 실로 적지 아니한데, 도리어 죄를 주라고 한단 말인가?”

하였고, 권근도 또한 글을 올려 스스로 적은 노고를 서술하였으므로, 이에 원종공신(元從功臣)이라고 칭(稱)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외우(外憂)를 당하였다. 기묘년에 기복(起復)시켜 첨서(簽書)에 제배(除拜)하니, 두 번이나 전(箋)을 올려 상제(喪制)를 마치기를 애걸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윽고 정당 문학(政黨文學) 겸 대사헌(大司憲)으로 천전(遷轉)되어, 상소를 올려 사병(私兵)을 혁파(革罷)하였다. 경진년 11월에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추충 익대 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다. 임오년 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 33인을 뽑았다. 중국의 사신이 반드시 권근의 안부를 먼저 묻고, 서로 대해서는 공경하는 예를 더하였다. 어사(御史) 유사길(兪士吉)과 내사(內史) 온불화(溫不花)가 사명을 받들고 왔을 때도 역시 압록강에서 권근의 안부를 물었다. 도성(都城)에 이르자, 전하가 사신에게 위호하는 잔치를 베풀어, 여러 재상들이 차례로 술잔을 돌리는 예를 행하였는데, 권근이 예를 행하게 되매, 유사길과 온불화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가 말하기를,

“천사(天使)께서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시오?”

하니, 유사길이,

“어찌 가히 사문(斯文)의 노성 군자(老成君子)를 만홀(漫忽)히 대하겠습니까?”

하고, 온불화는,

“태조(太祖) 황제께서 공경하는 분입니다.”

하였다. 온불화는 바로 발라(孛羅)이다. 계미년에 표(表)를 올려, 벼슬을 사임하고 한가한 데에 나아가 《예경(禮經)》 절차(節次)를 상고하는 일을 마치겠다고 애걸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예전에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하였으나 벼슬을 사임하지는 아니하였다.”

하고, 곧 삼관(三館)의 선비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권근의 집에 나아가서 글 쓰는 일을 돕도록 명하였다. 책이 이룩되자, 선사(繕寫)하여 한 본(本)을 바쳤다. 을유년 봄에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제배(除拜)되고, 겨울에 내우(內憂)를 당하였다. 병술년 봄에 기복(起復)을 명하여 대제학(大提學)을 제수하니, 두 번이나 전(箋)을 올려 상제(喪制)를 마치기를 애걸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그해 가을에 임금이 세자에게 선위(禪位)하려고 하니, 상서(上書)하여 선위를 정지하도록 청하고, 또 병중에 예궐하여 계달(啓達)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은 알았으나. 그의 가슴속에서 일을 결단함이 이처럼 정밀하고 정확할 줄은 몰랐다.”

하였다. 정해년 여름에 임금이 친히 문사(文士)를 시험하였는데, 권근과 좌정승 하윤(河崙)을 독권관(讀券官)으로 명하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무자년 겨울에 병이 위독하였었는데, 임금이 노하여 대간(臺諫)의 관원을 장차 극형(極刑)에 처한다는 말을 듣고 상서(上書)하여 간절히 간하니, 임금이 이에 석방하였다. 병들어 누운 날부터 임금이 약(藥)을 하사하고 문병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졸(卒)할 때 나이가 58세였다. 임금이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였으며, 사제(賜祭)하고 조뢰(弔誄)하고, 부증(賻贈)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중궁(中宮)도 중사(中使)를 보내어 치전(致奠)하고, 세자가 친히 관구(棺柩)에 나아가 제사지냈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최함(崔咸) 등이 삼관(三館)의 선비들을 거느리고 소뢰(小牢)의 제사를 지냈다.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권근이 검열(檢閱)에서부터 재상이 되기까지 항상 문한(文翰)을 맡아서 관각(館閣)의 직임을 두루 역임하고, 일찍이 한번도 외직(外職)에 임명되지 아니하였다. 타고난 성질이 정수(精粹)하고 온아(溫雅)하며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평상시에 비록 아무리 다급할 때일지라도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는 빛이 없었고, 배척을 당하고 폐출(廢黜)되어 사생(死生)이 목전(目前)에 있었던 때에도 태연하게 처신하고, 일찍이 상심하지 아니하였다. 무릇 경세(經世)의 문장(文章)과 사대(事大)의 표전(表箋)도 또한 모두 찬술(撰述)하였다. 문집(文集)이 약간 있어 세상에 전한다. 장차 임종하려 할 때에 아들과 사위를 불러 모아 놓고 유명(遺命)으로 불사(佛事)를 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아들과 사위들이 치상(治喪)을 일체 《가례(家禮)》대로 행하고 부도법(浮屠法)을 쓰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아들이 넷이 있으니, 권천(權踐)·권도(權蹈)·권규(權跬)·권준(權蹲)이다.

【원전】 1 집 474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