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太宗 9卷 5年 3月 30日 (乙丑) 002 / 지의정부사 이첨의 졸기. 문장에 능하고, 학문에 힘씀

천하한량 2007. 3. 23. 02:14

太宗 9卷 5年 3月 30日 (乙丑) 002 / 지의정부사 이첨의 졸기. 문장에 능하고, 학문에 힘씀


○知議政府事李詹卒。 , 洪州人, 字中叔, 自號雙梅堂, 贈參贊議政府事熙祥之子。 至正乙巳, 中監試第二人。 戊申, 恭愍王幸九齋, 以經義試諸生, 命李穡讀卷, 中者七人, 爲第一, 特賜及第, 拜藝文檢閱。 明年, 擢右正言, 上疏請令百官, 每日五更啓事, 史官二人入侍左右, 王從之。 乙卯, 拜左獻納, 與正言全伯英上疏, 論守門下侍中李仁任、贊成事池奫潛通亡, 交結王, 禍不可測, 請誅二人。 坐此流貶者十年。 戊辰, 起拜內府副令、藝文應敎, 五轉至右常侍。 恭讓王素與善, 拜代言, 頗信重之。 壬申春, 以知申事, 掌監試, 及金震陽等杖流, 亦流于結城, 冬, 得自便。 戊寅秋, 起爲吏曹典書, 陞中樞院學士、(同知壬午貢擧)〔同知貢擧。 壬午,〕 以知議政府事, 從河崙入賀皇帝登極, 奏于帝, 請改賜誥命印章。 使還, 以功賜田口, 進階正憲。 卒年六十一。 輟朝三日, 賜棺槨, 贈諡文安天資厚重, 力學能文, 手不釋卷。 一子小畜

태종 9권 5년 3월 30일 (을축) 002 / 지의정부사 이첨의 졸기. 문장에 능하고, 학문에 힘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첨(李詹)이 죽었다. 첨(詹)은 홍주(洪州)사람으로, 자(字)는 중숙(中叔)이고, 자호(自號)를 쌍매당(雙梅堂)이라 하였다. 증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희상(熙祥)의 아들이다. 지정(至正) 을사년 감시(監試)에 2등으로 합격하고, 무신년에 공민왕(恭愍王)이 구재(九齋)에 거둥하여 경의(經義)로써 여러 생도들을 시험하고,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권자(卷子)를 읽게 하여 합격한 자가 일곱 사람이었는데, 첨(詹)이 1등이었다. 이에 특별히 급제(及第)를 주고,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우정언(右正言)으로 뽑히어 상소하여 청하기를,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매일 5경(更)에 일을 아뢰[啓事]게 하고, 사관(史官) 두 사람을 좌우(左右)에 입시(入侍)하게 하소서.”

하여, 왕이 그대로 따랐다. 을묘년에 좌헌납(左獻納)에 임명되어 정언(正言) 전백영(全伯英)과 더불어 상소하여 논(論)하기를,

“수 문하 시중(守門下侍中) 이인임(李仁任)과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이 망한 원(元)나라와 몰래 통하여 심왕(瀋王)과 교결(交結)하니, 화(禍)를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하여, 두 사람을 베기를 청하였다. 이로 인하여 죄를 입어 유폄(流貶)된 지 10년이 되었다가, 무진년에 다시 내부 부령(內部副令)과 예문 응교(藝文應敎)에 임명되어 다섯 번 옮겨서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공양왕(恭讓王)이 원래 첨(詹)을 좋아하여, 첨(詹)을 대언(代言)에 임명하고 매우 신중히 여기었다. 임신년 봄에 지신사(知申事)로서 감시(監試)를 맡았었는데, 김진양(金震陽) 등이 장류(杖流)됨에 이르러 첨(詹)도 역시 결성(結城)으로 유배되었다. 〈그해〉 겨울에 자편(自便)을 얻고, 무인년 가을에 다시 이조 전서(吏曹典書)가 되었다가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동지공거(同知貢擧)에 올랐다. 임오년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서 하윤(河崙)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서 황제의 등극(登極)을 하례하고, 황제에게 아뢰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고쳐 주기를 청하였다. 환국(還國)하자 그 공(功)으로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내려 주고, 자급을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올렸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가 61세다. 3일 동안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관곽(棺槨)을 내려 주었으며, ‘문안(文安)’으로 시호(諡號)를 주었다. 첨(詹)은 천자(天資)가 중후(重厚)하고 학문에 힘을 써서 문장에 능하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아들이 하나이니, 이소축(李小畜)이다.

【원전】 1 집 323 면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