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때 한산 천방사 승려들의 변란사건 전말은 일부 구전 설화
로 전해지던 사실이 실록의 기사로 확인된 경우이다
로 전해지던 사실이 실록의 기사로 확인된 경우이다
이 사건은 이 사실은 현종5년(1664) 12월 13일조 기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 사건은 서천 천방사의 승려들이 관의 명령을 따
르지 않자 감사 이익한이 한산군수 신숭구(申嵩耉)로 하여금 그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들이게 하자 절의 승려 수백 명이 조총을
갖거나 활을 지니고서 지형이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저항한 사건이
었다.
이에 화약으로 천방사를 불태우고 또 침노한 벼슬아치의 집을
불질러 그 분을 풀었다. 이익한이 그 소문을 듣고 조정에 알리
지 않은 채 공주 영장 양일한을 한산에 보내 공격하여 붙잡게 하
였다. 그런데 양일한은 병사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채 그 관할 구
역이 아닌 임천 고을에 달려가 군병을 징발하였고, 또 가둬 놓
은 승려에게 애당초 명백히 자백을 받아내지 아니하고 곧장 효시
할 것을 청했다.
그 당시 한산과 서천 두 고을의 유향소 색리에게 캐물은 정황
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즉 처음에 순찰사가 절의 중을 체포하라
고 분부한 것으로 인해 중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세 떼로 나
누어 산에 올라가 떼지어 모였다. 그런데 당시 양일한은 공을 세
우고자 하여 절의 중 3인을 잡고 혹독히 형문을 가하여 그 자리
에서 쓰러져 죽게 하였다. 그리고 군인으로 하여금 그 절을 에워
싸 중을 만나면 죽이게 하였다. 심지어 중이 자백한 말까지 거짓
으로 만들어 뒷날 증거로 채택되도록 꾸미니, 한 도의 사람이
다 놀라며 분하게 여겼다 고 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당시 희대
의 큰 사건이었고, 이 일로 감사와 영장은 문초를 당하였고, 현
종6년(1665) 2월 12일 한산 군수 신숭구는 파직 당하게 되었다.
천방사에 관련된 구전 일화들이 당시 서천 사람들이 이 사건을
보는 민중 의식이었고, 그것이 전설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의미 있는 역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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