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의역사 ▒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은 목은의 막내 아들인데, 무덤이 한산(韓山) 고을 목은 무덤 아래 있다.

천하한량 2007. 3. 7. 20:37

 

선조(先祖)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은 목은의 막내 아들인데, 무덤이 한산(韓山) 고을 목은 무덤 아래 있다.

 

성종이 폐비 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死藥)을 내릴 때에, 공의 손자 이파(李坡)가 예조 판서로 있었다.

연산군이 당시의 재상과 언관(言官)의 죄를 물을 때에 이파는 벌써 죽어 관을 쪼갬[剖棺]을 당했고,

공도 또한 연좌(緣坐)되어서 무덤을 허물려서 평평하게 되었다가 중종이 반정(反正)한 후에도

오랫동안 봉분(封墳)을 쌓지 못하고 있었다.

좌의정(左議政) 이유청(李惟淸)은 양경공의 형 이종학(李種學)의 증손이니, 공에게는 종손(從孫)이 된다.

 

하루는 일찍 서울 집에 달려와서 봉화(奉化) 원을 지낸 나의 증조(曾祖) 이장윤(李長潤) 공에게 묻기를,

“꿈에 의젓한 어른이 말하기를, ‘집이 부서져서 비가 새어도 자손이 재력(財力)이 모자라서

수리하지 못하는데, 문중(門中)에 오직 그대만이 할 수 있으니,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꿈을 깨고 보니, 나도 모르게 등에 땀이 젖었습니다.

우리 문중에 반드시 변을 겪은 뒤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므로, 감히 와서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봉화 어른께서 양경공의 무덤이 허물어진 뒤에 여러 해가 되도록 복구하지 못한 사유를 자세하게 말하니, 상공(相公)은 크게 놀랐다. 드디어 함께 힘을 합쳐 흙을 보태어서 봉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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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와잡설(松窩雜說)   
 
 
송와잡설(松窩雜說) 
 

이기(李?) 찬
○ 왕씨(王氏)는 용(龍)의 종(種)이므로, 아무리 못난 자손과 먼 후손이라도 그 몸의 어딘가에 반드시 비늘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우(禑)의 왼쪽 어깨 위에 바둑돌만한 비늘이 있었는데, 우는 항상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임영(臨瀛 강릉)에서 죽음을 당하던 날에는 어깨를 드러내어 옆에 사람에게 보이면서, ‘지금 만약 보이지 않고 죽으면 내가 신(辛)가가 아닌 줄을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나?’ 하였다.
한다. 이 일이 비록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임영 사람은 지금까지 그 얘기를 하고 있다.
○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은 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일찍이 여흥(驪興)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공은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보고,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한 시편(詩篇)이 많았다. 공은 우왕(禑王)이 폐위(廢位)되어 강화(江華)로 귀양갔다는 말을 듣고, 대서특서(大書特書)하기를,

“나라에서 선왕(先王)의 아들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폐위하고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에 내쳐버렸다.”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시조왕의 신서가 하늘을 감동시켜 / 祖王信誓應乎天
남기신 은택이 오백 년을 내려오네 / 餘澤流傳五百年
진위를 어찌하여 일찍 분간 않았는고 / 分揀假眞何不早
저 하늘의 실피심은 밝게 빛나네 / 彼蒼之鑑昭昭然

창왕(昌王)은 폐위되어 강화로 가고, 우왕은 강화에서 강릉으로 옮겼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시를 지었다.

선왕의 부자분이 각각 떨어져 / 先王父子各分離
동쪽 서쪽 하늘 끝 만리 길일세 / 萬里東西天一涯
몸은 비록 서인된다 하여도 / 縱使一身爲庶類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 寸心千古不遷移

이와 같이 공은 우왕ㆍ창왕 부자를 선왕이라 하여 시를 쓰고 곡(哭)하였다.
○ 운곡공(耘谷公)은 통제사(統制使) 최영(崔瑩)이 형(刑)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통탄하는 마음으로 시 세 편을 지었다.


1

맑은 빛 묻히고 기둥이 무너져 / 水鏡埋光柱石?
사방 백성 모두가 슬퍼하누나 / 四方民俗盡悲哀
빛난 공업 마침내 쓰러졌지만 / 赫然功業終歸朽
꿋꿋한 충성이야 죽은들 사그라지랴 / 爾忠誠死不灰
역사에 기록할 일 편질에 가득한데 / 紀事靑篇曾滿秩
가엾게도 황토더미 벌써 되었네 / 可矜黃壤巳成堆
생각건대 아득한 저 황천에서 / 相應杳杳重泉下
동문에 눈을 걸어도 분 못 풀리 / 掛眼東門憤未開


2

조정에 홀로 설 제 뉘 감히 간여하랴 / 獨立朝端誰敢干
충의로써 어려운 일 꾀하였네 / 直將忠義試諸難
육도 백성의 바람 따라서 / 爲從六道黔黎望
삼한 사직을 편안케 했네 / 能使三韓社稷安
동료 영웅들은 낯이 어이 두터우뇨 / 同列英雄顔更厚
죽지 않은 간인들도 뼈가 서늘하리 / 未亡邪?骨猶寒
어지러움 다시 오면 뉘 헤쳐 나가리 / 更逢亂日誰爲計
가소롭다 세상 사람 하는 짓이 간사하다 / 可笑時人用事奸


3

내 지금 부음 듣고 애도의 시 짓노니 / 我今聞訃作哀詩
공 위한 슬픔보다 나라 위한 슬픔일세 / 不爲公悲爲國悲
천운의 비태도 알기 어렵고 / 天運難能知否泰
국가의 안위도 정해지지 않았네 / 邦基未可定安危
날카롭던 칼날 꺾였으니 슬퍼한들 무슨 소용 있으며 / ?鋒已絶嗟何及
충성스런 마음 늘 외로우리니 못내 한스러워라 / 忠膽常孤恨不支
산하를 홀로 대해 이 가락 노래하니 / 獨對山河歌此曲
흰 구름 흐르는 물이 다 서글퍼하여라 / 白雲流水摠噫?

○ 노산군(魯山君)이 영월군(寧越郡)에 물러간 후에도 매양 아침이면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걸상에 걸터앉아 있으니, 보는 사람으로서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내려왔으나, 문틈으로 바라보고는 움찔하면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날이 차츰 저물자 도사는 때를 늦추었다는 책망이 있을까 두려워, 걸상 옆에 있는 하리(下吏)와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노산군이 앉은 후면(後面)의 창구멍을 통해, 긴 끈으로 당기도록 하였다. 끈이 모자라자 베띠를 이어서 마침내 목을 졸라 죽였다.
○ 노산군이 영월에서 죽으니, 관(棺)과 염습(斂襲 시체에 옷 입히고 묶는 일)도 갖추지 않고 짚으로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매우 슬프게 곡하며 말하기를,

“평소에 이름을 알고 지냈고, 보살핌을 받은 분의(分義)가 있노라.”
하고, 며칠을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밤에 시체를 지고 도망쳐버렸다. 어떤 사람은 ‘산골짜기에서 태워버렸다.’ 하고, 어떤 사람은 ‘강물에 던져 버렸다’ 한다. 지금 무덤은 거짓으로 장사한 것이라 하니, 두 가지 말 중에 어느 편이 옳은지는 알 수 없으나, 점필재(?畢齋 김종직의 호)의 글로써 본다면 강에 던졌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렇다면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璉) 의 무리로서, 간신(奸臣)이 지휘한 것이었다.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그 한스러움이야 어찌 다하랴? 혼은 지금도 의탁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닐 터이니, 진실로 애달프다.
○ 목은(牧隱)은 우리 태조(太祖)가 크게 존중(尊重)한 사람이었다. 태조가 일찍이 자(字)와 당호(堂號)를 지어주기를 청하고, 또 둘째 아들의 이름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목은은, 계화(桂花)는 가을에 희고 깨끗하며, 계수나무의 짝으로는 소나무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중히 여기는 것이 절의(節義)이므로 변치 않음을 숭상한 것이다. 그래서 자를 중결(仲潔), 당호를 송헌(松軒)이라 하였다. 또 셋째 아들의 이름을 방의(芳毅)라 지었다. 전에 둘째의 이름을 방과(芳果)라 지었는데, 과(果)와 의(毅)는 서로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지었다.

추부에 들어서는 난 체하기 부끄러워하고 / 着鞭樞府愧揚揚
같은 날 어깨 겨루며 대성에 들어갔네 / 同日摩肩入臺省
달빛이 가득하니 산과 바다가 어찌나 밝던지 / 月滿海山何皎皎
겨울이 차가우니 송백 더욱 푸르구나 / 歲寒松柏愈蒼蒼
우애와 공순함으로 넉넉한 정을 보겠고 / 友恭可見親情洽
과단하고 굳세니 적의 형세강함을 어찌하여 걱정하리 / 果毅何憂敵勢强
원하노니 일시의 여러 대장들과 / 願與一時諸大將
종시토록 곽 분양을 스승으로 삼으소서 / 共師終始郭汾陽

○ 목은은 고려 공양왕(恭讓王) 기사년(1389) 12월에 귀양을 당해, 장단(長湍)에 있다가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에 부처(付處)되고, 그해 5월에 청주(淸州) 옥(獄)으로 왔으나, 수재로 인해 용서를 받고 다시 장단에 와서 있었다. 임신년 4월에 또 금양(衿陽)으로 귀양갔고, 6월에는 금양에서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벽사(?寺)에서 거처하면서 ‘배를 띄워 노자암(??巖)에 갔다.’는 등의 시가 있는데, 시는 이것이 끝이다.
혁명(革命)한 후에 조정에서 중형(重刑)으로 처치하려고 의논하였으나 태조가 특별히 용서하여, 여흥에서 장흥부(長興府) 남벽사역(南碧沙驛)으로 유배(流配)되고, 그해 겨울에 석방되어 한산(韓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은 한 곳에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을해년(1395 태조4) 가을에는 관동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 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해 11월에 태조가 친서(親書)로 여러번 부르므로 공은 부득이하여 교자(轎子)를 타고 들어가서 뵈었다. 태조는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친구간의 예로써 대우하면서,

“덕이 부족하고 식견(識見)이 어둡다 하여 버리지 말고, 한 말씀 가르쳐주시길 바라오.”
하니 공은.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로서 일을 도모할 수 없다. 하였으니, 다만 이 해골(骸骨)이나 고향 산천에 묻히기를 원할 뿐이오.”
하였다. 태조는 그를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중문까지 걸어 나가서 서로 읍(揖)한 다음, 작별하였다.
병자년 여름에는 공이 여흥으로 피서(避暑)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여, 5월 초3일에 벽란(碧瀾)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가는데, 호송(護送)하는 중사(中使)도 또한 와서 있었다. 초7일에 여흥 청심루(淸心樓) 하류 연자탄(燕子灘)에 도착하여 배안에서 공이 죽었는데, 공의 죽음을 사람들이 많이 의심하였다. 대개 고려 왕씨(王氏)의 자손이 배안에서 많이 처치를 당했는데 이것이 모두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의 술책이었으므로 공의 죽음에 대하여서도 여러 사람의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애통하도다.
○ 광묘(光廟 세조) 병자년 변란(變亂)에 하위지(河緯地)도 형을 당했다. 그 처자(妻子)가 일선(一善 선산〈善山〉)에 있었는데, 조정에서 연좌법(連坐法)을 걸어 금부 도사를 보내서 처치하게 하였다. 하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하호(河琥)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고, 둘째 아들 하박(河珀)은 나이가 20이 못 되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고 행동이 평소와 같았다. 도사(都事)를 돌아보며,

“도망할 리는 없으니, 형(刑)을 조금만 늦추어 주십시오. 부득이 모친과 영결(永訣)하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도사가 허락하니, 박이 문으로 들어가서 모친 앞에 꿇어앉아,

“죽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죽음을 당했으니, 자식으로서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自決)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시집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비록 적몰(籍沒)되어 천한 종이 되더라도 여자의 의리로써는 죽을 때까지 한 지아비만을 섬겨야 할 것이니, 훗날 개돼지같은 행실은 하지 말게 하십시오.”
하고, 드디어 두 번 절하고 나와서 조용하게 죽음을 당했다. 사람들이 모두들 하위지는 훌륭한 자식도 두었다 하였다.
○ 교리 정붕(鄭鵬)은 선산인(善山人)이다. 깨끗한 절조(節操)로 자신을 수양하여, 그의 문간에는 뇌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에 유자광(柳子光)은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으로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는데 간사하고 탐심(貪心)이 많으며, 또한 방자하여 기세가 조정을 휩쓸었다. 공은 유자광과 외가 친척이 되므로 비록 문안(問安)하는 예는 폐하지 않았으나, 여종이 갈 때에는 반드시 숙마(熟麻 누인 삼 껍질) 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고, 묶은 자리에 표를 해서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주었다. 그것은 묶인 곳이 아파서 그의 집에서 지체하지 않고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게 하려 한 것이었다.
한번은 공이 입직(入直)하였는데 집에 양식이 떨어졌다. 공의 부인이 유자광의 집에 꾸어줄 것을 청하자, 유자광이 쾌히 말하기를,

“친척의 정의(情誼)는 서로 구휼하는 데에 있다. 교리가 지나치게 괴퍅하지만 내가 어찌 괄시하겠는가?”
하며, 곧 쌀을 자루에 넣고, 장을 항아리에 담아 종을 시켜 노새에 실려 보냈다. 공이 직소(直所)에서 나와서 옥같은 쌀밥을 보고, 얻어온 곳을 물으니, 부인은 사실대로 알렸다. 공은 상을 밀치고 웃으면서 일어나,

“입직하던 날 아침에 비지를 사다가 죽을 쑤어 주기에 나는 양식이 떨어진 줄을 알았소. 그런데도 내가 조처를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나의 실수이지 집사람의 허물이 아니오.”
하고, 드디어 친구들에게 편지를 띄워 쓴 만큼을 채우고 본디 쌀과 합쳐서 돌려보냈다. 그가 궁핍(窮乏)하여도 절조를 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상공 신용개(申用漑)는 젊어서부터 의기가 구구하지 않고 큰 절조가 있었다. 그의 아비 신면(申?)이 함길도(咸吉道) 감사로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의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 변란에 대처할 길이 없었으므로, 대청 위에 있는 작은 다락 틈에 뛰어 들어가서 있었다. 적졸(賊卒)이 감사를 찾지 못하고 가려는 참이었는데, 소리(小吏)가 그가 숨은 곳을 가리켜 주어서,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공이 장성하자 부친이 도적의 손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반드시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홍유손(洪裕孫)과 친교를 맺고 여러번 함길도에 가서, 그 아전의 얼굴 모습과 성명(姓名)을 자세히 알아두었다. 하루는 그 아전이 일이 있어 서울에 오다가 중간에 인가(人家)에서 묵었다. 공은 그때에 사인(舍人)으로 있었는데, 홍유손과 함께 어둠을 타서 도끼를 가지고 그 사람이 유숙하는 곳으로 걸어서 갔다. 홍유손을 시켜 불러내어 관청일로 서로 고해 주는 척하게 하고 공은 뒤에서 도끼로 찍어 죽인 다음 돌아왔다. 그러나 주인집과 동행하던 사람은 마침내 무슨 연고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알지 못하였다.
○ 고령(高靈 고령은 고을 이름으로 봉호〈封號〉) 신숙주(申叔舟)의 부인 윤씨는 윤자운(尹子雲)의 누이동생이다. 숙주는 영묘(英廟 세종) 때에 8학사(學士)에 참여하였고, 성삼문(成三問)과는 더욱 친하였다. 광묘(光廟 세조) 병자년 변란 때에 성삼문 등의 옥사(獄事)가 발각되었는데, 그날 저녁에 신숙주가 자기 집에 돌아오니, 중문(中門)이 활짝 열렸고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공은 방으로 행랑으로 두루 찾다가, 부인이 홀로 다락에 올라 손에 두어 자 되는 베를 쥐고 들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부인이 답하기를,

“당신이 평소에 섬삼문 등과 서로 친교가 두터운 것이 형제보다도 더하였기에 지금 성삼문 등의 옥사가 발각되었음을 듣고서, 당신도 틀림없이 함께 죽을 것이라 생각되어,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자결(自決)하려던 참이었소. 당신이 홀로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소.”
하였다. 공은 말문이 막혀 몸둘 곳이 없는 듯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일은 을해년 여름 노산군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던 날에 있었던 일로, 진신(搢紳) 사이에 미담(美談)으로 전해오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잘못 전해 듣고서 쓴 것이다. 부인은 병자년 정월에 죽었고, 육신(六臣)의 옥사는 그해 4월에 일어났으니, 이러저러한 말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 판서 이세좌(李世佐)의 부인 모씨(某氏)는 모관(某官)의 딸이다. 성묘(成廟) 때에 폐비(廢妃)에게 죄를 주려 할 적에, 공이 대방 승지(代房丞旨)로 사약(死藥)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공이 집에 돌아와서 부인과 함께 한 방에 누워 있었다. 부인이 묻기를,

“들으니, 조정에서 폐비를 논죄(論罪)한다더니 필경 어찌 되었소?”
하니, 공은,

“벌써 사사(賜死)되었소.
하자,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애달퍼라, 우리 자손은 씨도 남지 않겠구려. 어미가 죄없이 죽음을 당했는데, 자식으로서 훗날 보복하지 않겠소? 조정에서 세자(世子)를 장차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한단 말이오?”
하였다. 그후 연산군(燕山君) 갑자년(1504)에 공의 아들 이수정(李守貞)이 죽음을 당했고, 공도 또한 동쪽 저자[市]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에 폐비론(廢妃論)을 고집하던 벼슬아치의 자손들이 남김없이 모두 죽었고, 나라도 거의 망할 뻔하였다. 부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는 실로 여러 신하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 목은(牧隱)은 고려 말기 새 임금을 세우려고 논의할 적에, 홀로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뭇 사람의 떠드는 중에서 주장하였다. 그후 우왕(禑王)이 폐위되어 강화(江華)에 있을 때에 공은 미복(微服)으로 가서 뵙고, 국화(菊花)를 보고 지은 시가 있다.

인정이 어이하여 만물처럼 무심하리 / 人情那似物無情
요즈음 경색 보니 마음 편치 못하여라 / 觸景年來漸不平
동리를 우연히 향하니 못내 부끄러워라 / 偶向東籬羞滿面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대했구나 / 眞黃花對僞淵明

막막한 용사에 추풍이 부니 / 龍沙漠漠又秋風
시든 풀 이어지는 구름에 낙조만 붉네 / 衰草連雲落照紅
국화를 꺾었으나 누구에게 바치리 / 折得黃花誰上壽
해서 천릿길, 여기가 행궁이네 / 海西千里是行宮

또 국화시가 있다.

울타리 옆 두어 가지 서리 맞은 꽃이 고와 / 數枚籬畔媚霜?
한산 사람 목은의 집 빛나게 하네 / 潤色韓山牧隱家
이 늙은이 갑자 쓸 줄 어이 알리오 / 此老豈知書甲子
문앞에 푸른 버들 연기 띠고 늘어졌네 / 門前碧柳帶煙斜

공의 간곡한 뜻을 알 수 있다.
○ 판서 이자(李?)는 자(字) 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거사(陰崖居士)이며, 우리 한산이 본관이다. 문장이 능하여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엄숙하고 충직(忠直)하여 당시 사람들이 뜻을 크게 펼칠 것을 기대하였다. 김안로(金安老)와는 인아(姻? 동서)의 친분이 있고, 또 주계군(朱溪君 이름은 심원〈深源〉)에게 함께 배웠다. 그러나 평생에 하는 짓은 향초와 누린내 풀처럼 서로 반대였다. 그리하여 김안로는 매양 공을 해칠 뜻이 있었으나 공이 올바른 도를 지키므로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병자년(1536, 중종 31)에 여러 현인이 내침과 죽음을 당하던 날에 공도 또한 파직되고 내침을 당해, 용궁현(龍宮縣)에 살고 있었다.
그후 가정(嘉靖 명세종〈明世宗〉의 연호) 병자년(1536, 중종 31)에 김안로가 좌의정으로 휴가를 받고, 함창(咸昌) 지역에 와서 성묘를 하면서, 먼저 공에게 사람을 보내 돌아가는 길에는 옛 벗을 찾겠노라고 알려왔다. 그러나 실상은 공을 꺼리고 미워하여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공은 그의 심사를 미리 알았으므로 그가 온다는 날 아침에 홰나무 꽃물로 낯을 씻고는, 이불을 두르고 앉아서 서로 대면하였다. 김안로는 공의 손을 잡고서 지극히 다정하게 대하고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나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음애공(陰崖公)이 죽게 되었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
하였다. 군자(君子)가 소인을 대할 때에 가끔은 스스로를 숨겨서 화를 피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도이다.
○ 목은이 장단으로 귀양 가서 성(省)에 낭관으로 있는 여러 아들에게 시를 부쳤다.


1

현릉 일대에 소인 선비로 / 玄陵一代小人儒
중서성 간의대부 역임했노라 / 揚歷中書諫大夫
시중이 된 것은 요행이었지 / 得至侍中?幸耳
사문에 무엇으로 맞먹게 보답하리 / 斯文何事答相圖


1

중용과 대학에서 증자ㆍ자사 배웠는데 / 中庸大學學曾思
사람들은 영왕이 네 스승이라 하네 / 人道瀛王是汝師
요즘 와서 장락이 나만은 아니리 / 長樂邇來非獨我
뉘 다시 귀거래사 지을것인가 / 有誰重賦去來辭


1

작년에 큰자식이 황천으로 갔는데 / 去年長子入黃泉
오늘 아침 중씨가 바닷가로 귀양갔네 / 仲氏今朝謫海堧
들으니 셋째 자식 탄핵을 당한다니 / 聞說三郞方被劾
어이한 하늘인가 어이한 하늘인가 / 奈何天也奈何天


1

세상의 성쇠는 돌고 도는 것 / 世間榮悴似循環
송백이 푸르러도 추위에 시달린다 / 松柏蒼蒼又苦寒
중니를 배워 구괘를 벌이고서 / 且學仲尼陳九卦
흰 머리 이 신세를 장단에 부쳤노라 / 白頭身世付長湍


1

벼슬길은 고금이 위태로운 것 / 官途今古足危機
늘그막의 시비됨이 무엇이 괴이하리 / 何怪衰年惹是非
성은에 감사하니 천지도 한없어라 / 再拜聖恩天地大
눈은 산에 가득한데 사립문이 닫혔네 / 滿山殘雪掩柴扉


1

탄핵 상소 큰 기세로 사람을 놀래지만 / 彈章大勢乍驚人
익히 읽고 생각하면 모두 진심 잃었구나 / 熟讀深思摠失眞
노옹을 잡아오라는 그 네 글자 / 捉敗老翁惟四字
쫓아낸 중이 도리어 왕륜 같을까 두렵구나 / 黜僧還恐似王倫


1

장단 태수 생선을 보내왔기에 / 長湍太守送?鱗
시장할 제 먹어보고 그 좋은 맛에 새삼 놀랐네 / 晩食還驚味更珍
성랑에게 왕의 은혜 심중함을 알았노니 / 始識省郞恩深重
주리면서 공직할 이 어이 없으리 / 忍飢供職豈無人


1

현릉 갑인년 책사에 뽑히고 / 玄陵第士甲加寅
신씨 때 방이 붙어 출신하였네 / 放榜辛朝始出身
지금엔 황야에 물러나 있는 운수이니 / 坐數至今荒野去
온 조정의 귀인들이 한 사람도 없구나 / 滿庭靑紫絶無人


1

천자께서 부르시어 팔진미를 내리시니 / 天子呼來賜八珍
시중의 광채가 조정의 신하를 놀라게 했네 / 侍中光彩動朝臣
화복이란 피하기가 어려운 것 / 請着倚伏難逃處
적적한 시골에서 들 사람과 벗하였네 / 寂寂荒村伴野人


1

송헌은 정권을 잡고 나는 떠도는 신세 / 松軒當國我流離
꿈 속엔들 이런 일을 생각했으리 / 夢裏何曾有此思
두 정씨가 더구나 큰 논의에 참여했으니 / 二鄭況今參大議
한 집안 어느 때나 모여질런가 / 一家完聚果何時


1

너는 가문 믿고 너의 완악 부리지만 / 汝恃家門逞汝頑
아비가 빙산임을 네 어이 알겠느냐 / 那知汝父是氷山
탄핵문은 죽이고 용서하려 않는데 / 彈文直欲殺無赦
아직도 천지간에 함께 삶이 다행이라 / 尙幸竝生天地間


1

죄주려 하면 할 말이 어이 없을소냐 / 欲加之罪豈無辭
헐뜯는 듯 기리는 듯 세상이 다 아는 바네 / 似?疑褒世所知
필경에는 하늘 믿고 걱정하지 않노라 / 畢竟有天吾不患
살진 고기 삶아 놓고 술잔이나 기울이리 / 爛烹肥肉倒深?

목은이 시중(侍中) 송헌(松軒)에게 부친 시는 아래와 같다.


1

죽어 마땅한 신의 죄 성주의 인자로 / 臣罪當誅聖主仁
관내에 살게 되어 몸 편하다오 / 屛居關內得安身
어이 천행을 만났는가 물어 온다면 / 問渠何以逢天幸
송헌이 나의 친구여서라고 / 只爲松軒是故人


1

흰 머리 신세가 사양에 놓였으니 / 白頭身世已殘陽
직 없고 밭 없어도 상관 없어라 / 無職無田赤不妨
산에 노니는 흥취 있는데 / 只有游山高興在
낭묘에서 헤아려 주기까지 바라리까 / 敢煩廊廟一商量


1

들판에 가을 드니 경치 맑게 변하여서 / 秋入郊原淑景移
물화가 산뜻한데 비 또한 적셔주네 / 物華晴好雨仍奇
태평한 낭묘에 훌륭한 모임 많았는데 / 太平廊廟多高會
언제나 연 구경가는 이 그 누구이런고 / 每趣看蓮又是誰


1

세 번째 함창길 흥 다시 새롭구나 / 三到咸昌興更新
여전히 꾀꼬리는 친절도 하여라 / 依然黃鳥赤相親
한산은 나의 부모 산소가 있는 고을 / 韓山有我先墳在
중추에 맞추어 양친께 배례하리 / 欲及中秋拜兩親


1

삼한이 천명 맞아 날이 방금 한창인데 / 三韓?命日方中
백 번을 꺾여도 사귀는 정 물이 동으로 흐르는 듯 / 百折交情水必東
난리는 저절로 사라지고 화기 동함은 / 乖亂自消和氣動
황각에 맑은 기풍 있어서이네 / 只緣黃閣有淸風

목은은 정포은(鄭圃隱)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우연히 시를 지었다.

성의 공격 대의 탄핵 지금까지 이르더니 / 省擊臺彈直到今
오천의 기화가 남의 맘을 놀라게 하네 / 烏川奇禍駭人心
오고 가며 마음을 쓰나 일에 무슨 방해되랴 / 往來屑屑何妨事
송헌이 날 사랑하는 것 다시금 느꺼워라 / 更感松軒愛我深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무자ㆍ기축년(1588~1589, 선조 21~22) 사이에 건원릉(健元陵 태조능) 위에서 곡성(哭聲)이 들려왔는데 수호(守護)하는 군사들이 가서 살펴보면 들리지 않았다. 수호하는 군사들만 들은 것이 아니라, 삭망제(朔望祭) 때에 헌관(獻官)과 집사원(執事員)도 가끔 주산(主山)에서 가느다란 곡성이 나는 것을 들었는데, 무슨 연고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왜적(倭賊)이 바다를 건너와서 대가(大駕)는 서쪽으로 가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성조(聖朝)의 혼령(魂靈)이 지하에서 걱정하고 애달파하여 이 세상에 정녕하고 간곡(懇曲)하게 가르쳐준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상하(上下)가 모두 어둡고 어리석어서 경계할 줄 몰랐으니,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 우리 나라가 개국한 지 2백 년이다. 세종(世宗)과 성종(成宗)이 백성을 편케 하고 은덕으로 보살폈다. 연산군(燕山君)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살육(殺戮)을 하였지만, 중종과 명종이 정사를 거듭 밝혀, 너그럽게 돌보았다. 대단한 병란으로 인한 참혹함도 없었고, 9년 홍수(洪水)와 7년 대한(大旱)같은 재앙도 없이, 금상(今上 현재 임금 즉 선조) 때까지 이르렀다. 그동안 백성은 번거로운 부역(賦役)에 곤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야(田野)는 개척(開拓)되고 일정한 살림이 있었고 숫자도 많아지고 부유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朝廷)에서, 아래로는 여염집 필부(匹夫)까지 호사하기를 숭상하여, 오직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 힘을 썼다.
물(物)이 성했다가 쇠하여지는 것은 천도(天道)의 상례이다. 수십 년 이래로 역질(疫疾)이 유행하여 백성이 많이 죽었고, 기축년 옥사에 죄를 얽어 만들어서 3년을 끌며 끝나지 않았는데, 죽은 자가 무려 1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임진년에는 왜노가 온 나라 군사를 몰고 와서 우리 백성들을 거의 다 죽였고, 간혹 남은 백성은 직업을 잃고 농지를 잃어 성안과 지방에 누워 죽은 시체가 서로 잇달아 있었다. 또 호서(湖西)와 해서(海西)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역적(逆賊)이 있다는 고발이 있어, 그들은 비록 형(刑)을 받았으나, 서민(庶民)들도 또한 많은 해를 입었다.
더구나 역질이 한창 성한 중에 학질(?疾)이 횡행하는데, 고약한 비바람에 여러 가지 놀랄 만한 재앙이 잇달아서 한번 전염되기만 하면 이내 죽으니, 겨우 살아남은 사람인들 그 어찌 며칠 안 되어서 다 없어지지 않겠느냐? 아! 인간을 사랑하여 살리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본심인데, 어찌하여 진노(震怒)하기를 그만두지 않는가? 왜노를 불러들여 폭행을 하게 하고 악귀가 흉한 짓을 하도록 맡겨두어 죽이고 또 죽여서, 지금 와서는 더욱 심하게 하니, 인(仁)으로 덮어주고 하민(下民)을 불쌍하게 여기는 지극한 덕이 과연 이와 같은가? 옛 사람이 말하는 죽을 운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온 세상 사람을 다 죽여버리고 별도로 마땅한 사람 하나를 낳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청구(靑丘) 수천 리 지역에 다시는 인간이 없고 원귀(寃鬼)의 터로 변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어지러움이 심하고 비운(否運)이 극도에 이르게 하여 인심이 허물을 후회하고 다스림을 생각하도록 한 다음에 다시 태평한 운수를 열어주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늘의 뜻을 진실로 알 수 없다.
○ 삼국(三國) 시대는 예문(禮文)이 소박하고 간략하였으며, 고려도 5백 년이나 오래된 나라였으나 상례(喪禮)가 간략함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 왕조에 와서는 예절 조목이 크게 갖추어져서, 비로소 최질(衰? 상복)과 거려(居廬 상주가 여막에서 사는 것)하는 제도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정사를 어지럽히면서 예법을 탕멸(蕩滅)하여, 드디어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제도를 만들고 어기는 자는 죄를 주었다. 사대부(士大夫)가 휩쓸려 따랐으나 또한 예법을 지켜, 심상(心喪)하는 자도 있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예전의 예법을 회복하였고, 정덕(正德) 기묘년 무렵에는 여러 현인(賢人)이 조정에 가득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강구해서 당시 후진들이 앞을 다투어 따랐다. 그리하여 여염에서는 단지(斷指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죽어가는 부모에게 먹이는 것)ㆍ할고(割股 다리 살을 베어서 병든 부모를 살리는 것)ㆍ철죽(?粥 삼년상 동안 죽만을 마시는 것)ㆍ여묘(盧墓) 사는 일은 흔히 있는 일들이었고, 혹 애훼(哀毁 지나치게 슬퍼함)하여 얻은 병이 고질이 되어도 오히려 권도(權道)를 따르지 않아 그대로 죽는 자가 또한 많이 있었다.
효도란 비록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나, 진정에서 나오지 못하고 억지로 힘쓰는 데서 나온다면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이치상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명종 때에는 이에 한 가지 핑계로써 스스로 편리하게 하려는 의논이 있어, ‘3년 동안 여묘를 사는 것은 가례(家禮)의 본뜻이 아니고, 권도를 좇는 것이 성인(聖人)의 남긴 가르침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반혼(返魂 장사지낸 후 신주를 집으로 모셔오는 일)을 하게 되니, 어진 사람이거나 못난 사람이거나 모두 예법을 하는 일이라 하여 그대로 따랐다. 그 사이에 옛법을 좋아하는 인사(人士)가 우리 나라는 중국과 같지 않으므로 반혼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는 뜻을 힘껏 말하였으나, 바로잡지 못하였다. 이로부터는 상례(喪禮)의 기강(紀綱)이 나날이 무너져 상주된 자가 반드시 궤연(?筵 영궤〈靈?〉와 혼백ㆍ신주를 모셔두는 곳)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병을 핑계하고 안방에 거처하면서 마시고 먹고, 손님 접대하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하였다.
임진년 왜란 이후에 조정에서 무사(武士)에게 기복(起復 거상중에 나와 벼슬하는 것)해서 종군(從軍)하라는 명이 있었다. 비록 종군하더라도 기복의 복색이 저대로 있었는데, 졸곡(卒哭 삼우제 다음 지내는 제사)도 지내기 전에, 혹은 연상(練祥 소상)도 마치기 전에, 고기를 먹고 채색 옷을 입어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그 무부(武夫)에 대하여서는 나무랄 것도 못 되거니와, 문관(文官)으로서 재상의 반열에 있는 자도 자기 스스로 기복한 자가 많았다. 혹은 모집을 핑계대고, 혹은 의병을 핑계하여 윤리와 기강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이롭게 하기만 일삼았다. 선비로서 스스로 글을 읽었다는 사람이나 예법을 배웠다고 자칭하는 자도 모두 상(喪)을 입지 않고 한 집안에 윗사람 아랫사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나도 상례를 실행하지 않았다. 그 동안에 예법을 숭상하여 상례를 지킨 자는 아주 없고 겨우 몇만 볼 수 있었다. 아! 전일에 권도를 따르기를 즐겨하지 않던 자는 무슨 마음이었으며, 오늘날에 상주로서 남을 대하고 마음대로 먹는 자는 또한 무슨 심사인가? 이것이 이른바 본심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대저 삼년상이란, 천경지의(天經地義 하늘의 떳떳함을 얻고 땅의 마땅함을 얻은 도리. 즉 정당하여 바꿀 수 없는 도리)이며, 백성이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진 자는 삼년상도 가볍게 여기나, 못난 자는 마땅히 애써야 할 바이다. 이는 어찌 이와 같이 우리 본연(本然)의 애달파하고 망극하게 여기던 본심이 하루아침에 흉악한 왜적의 변으로 인하여 씻은 듯 없어지고,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져들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탄식할 노릇이고, 괴이한 노릇이다.
○ 만력 임진년(1592) 여름에, 왜적이 바다를 건너 국경에 들어왔다. 잇달아 변경 성(城)을 함락시키고, 별다른 저항을 받음도 없이 그대로 달려왔다. 이일(李鎰)의 군사는 상주(尙州)에서 패하고, 신립(申砬)의 군사는 충주(忠州)에서 함몰되었다.
29일 저녁에 급보가 갑자기 왔다. 이튿날 새벽에, 대가(大駕)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동궁(東宮)ㆍ중전(中殿)ㆍ여러 빈(嬪)과 함께 비를 맞으며 허둥지둥 나섰다. 임진(臨津) 나루를 건너, 동파역(東坡驛)에서 자고, 개성(開城)을 거쳐 다시 관서(關西)로 방향을 바꾸었다. 종실(宗室) 및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중도에서 도망쳐 흩어지고 대부분 호종(扈從)하지 않았다. 심지어 첨지(僉知) 성세령(成世寧)ㆍ전 직장(前直長) 성세강(成世康)같은 자는, 사대부로서 또는 7품 녹봉(祿俸)을 먹던 신하로서, 성안에 편하게 있다가 왜노에게 항복하였다. 성세령은 손녀(孫女)를 왜장에게 아내로 주어 귀염을 받아 그 덕에 온 동리가 편하였다. 종친 및 사족(士族) 등이 처음에는 모두 성문을 나서서 기내(畿內) 고을에서 난을 피하였으나, 성세령 형제가 평안 무사함을 보고 다시 성안에 들어간 자도 또한 많았다. 삼의사(三醫司)와 각 관청의 서리(書吏)ㆍ전복(典僕) 및 잡색(雜色) 무리도 모두 왜적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저자를 벌이고 물자를 교역(交易)하기를 평시와 다름없이 하였다. 날마다 왜적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서로 방문하고 도박도 하였다.
더욱이 통분(痛憤)한 것은 대가(大駕)가 막 성문을 나섰고, 왜적은 채 입성(入城)하기도 전인데, 성안 사람이 궐내에 다투어 들어가서 내탕 부고(內帑府庫)에 있던 재물을 서로 탈취(奪取)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 궁궐(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및 육부(六部), 크고 작은 관청에다 일시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서, 한 달이 넘도록 계속해서 불탔다. 그들의 심사를 살펴보면 흉적(凶賊)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였으니, 매우 두렵다.
그후 중국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와서 평양에 있던 왜적이 섬멸(殲滅)되니, 왜적들은 저희들의 형세가 어려워짐을 스스로 깨닫고 물러가려고 사방 성문을 모두 닫고, 오직 숭례문(崇禮門) 하나만 열어두었다. 그리고 밤중에 분탕질하면서 성안의 늙은이 젊은이를 몰아다가 죽였으므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 그 중에 요행으로 빠져나온 자는 도리어 말을 요사스럽게 꾸며서, 전일에 도성에 남고 떠나지 않은 것은 우리 군사가 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내응(內應)하고자 해서였다고 하였다. 민정(民情)이 이랬다 저랬다 하여 헤아릴 수 없으니, 그 두려운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 야인(野人 여진족)이 모든 모물(毛物)을 진상(進上)할 때에는, 반드시 소속 변장(邊將)에게 간품(看品) 받는데, 변장은 그 수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각각 거둬들이는 것이 있으니, ‘상납(上納) 인정(人情)’이라는 명목이었다.
서울에 오게 되면 각 해조(該曹)와 정원의 하리(下吏)에게도 또한 다 인정물(人情物)이 있었다. 만력 정축년(1577, 선조 10) 겨울에 내가 나가서 양주 원 노릇을 하는데 나의 자식이 돌아가는 야인을 길에서 만나 동행하면서 묻기를,

“네가 진상한 것이 얼마이며, 어떤 것을 상으로 얻었느냐?”
하니 야인은,

“우리가 진상한 담비 가죽이 극히 좋았으므로, 당초 생각으로는 관직(官職)을 얻게 될까 기대했었는데 다만 상으로 포(布)를 받고 돌아왔소.”
하였다.

“어찌하여 관직을 받지 못하였는가?”
하고, 다시 물으니,

“인정 쓴 것이 모자랐던 까닭이오. 딴 사람은 다 주었는데 승지(承旨)에게는 주지 못한 까닭에 관직을 얻지 못한 것이오.”
하였다. 이 말은 반드시 정원 하리를 지목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변장이란 자가 간품(看品)하면서 인정물을 직접 받았으므로, 저 사람들은 각 관청에 인정 쓰는 것은 모두 관원이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 우리 나라 인정 쓰는 폐단이 그 해가 먼 지방 사람에게도 미쳐, 욕된 말이 조정 근시(近侍)의 반열에까지 이르니, 애닯구나.
○ 성종 때에 손순효(孫順孝)는 아주 융성한 은총(恩寵)을 받았다. 관동 방백(關東方伯)으로 나갔는데, 하루는 서울에 들어와서 숙배(肅拜)하게 되었다. 성종은 편전(便殿)에 납시어 인견(引見)하고 술을 내리고 조용하게 서로 말을 주고받기를 오랫동안 하다가 파하였다. 손순효가 그날로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양사(兩司)는 손순효가 번신(藩臣)으로서 소명(召命)이 없었는데도, 마음대로 서울에 올라왔다 하여 그를 파직시켜, 무례한 죄를 징계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은 편전에 양사 관원을 불러 술을 내리면서 묻기를,

“오랫동안 탑전(榻前)을 떠나 있으면서 그 임금이 그리워서 와서 보고 갔다. 이것은 인신(人臣)으로서 지극한 정인데, 이와 같이 논하니, 죄의 가볍고 무거움은 나로서는 모르겠으니, 모름지기 밝혀라.”
하니, 양사 관원은 어쩔 줄 몰라하며 물러났다.
○ 순회세자(順懷世子 명종〈明宗〉의 아들로 세자였다가 요절함) 때에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로서 나와서 뵙는 자가 모두 신(臣)이라 일컫지 않았다. 새로 제수(除授)된 관원이 동궁에게 사은(師恩)할 때에도 신이라는 글자는 쓰지 않았다. 순회 때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에도 예가 또한 그러하였다. 무릇 춘방(春坊) 관원으로서 동궁의 신하라 하지 않고 궁료(宮僚)라 하는 것은, 대개 위에 군부가 계시므로 나라에 두 지존(至尊)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라가 결딴이 난 나머지 집정자(執政者)가 조종(朝宗) 여러 대를 계속해서 준행(遵行)해 오던 법규를 강구(講究)하지 않고 다만 《오례의(五禮儀)》의 ‘신이라 칭한다.[稱臣]’는 조문에만 의거하여 그 예법을 갑자기 바꾸어 버렸다. 무릇 나와 뵈옵는 관원은 반드시 신이라 일컫고, 사은하는 단자(單子)와 문서에도 모두 신이라는 글자를 쓰게 되었다. 대개 기묘 제현(己卯諸賢 조광조 등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이 예법 조문을 강구하여, 잘못하거나 빠뜨린 것이 없었다. 그들도 《오례의》에 신이라 일컫는 조문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때에는 신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 논의를 고쳐 정할 때에 반드시 정설(定說)이 있었을 텐데 지금엔 얻어 볼 수 없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느냐?
○ 남사고(南師古)는 울진(蔚珍) 사람으로 여러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음양(陰陽)의 여러 가지 방서(方書)에도 능통하였으며, 천문(天文)과 망기(望氣)하는 술법도 잘 알았다. 조정에서 불러서 동반직(東班職)에 제수하였으나, 6품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서울 집에서 죽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원주(原州) 동남쪽에 왕기(王氣)가 있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믿지 않았는데, 임진년 여름에 광해군(光海君)이 왕세자가 된 다음에야 그의 말이 증명되었다. 대개 공빈(恭嬪)의 부모와 그의 선대가 살던 곳이, 원주에서 동남쪽으로 1사(舍 30리) 되는 지역인 손이곡(孫伊谷)이었고, 그들의 무덤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이때에 와서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술법이 정묘(精妙)함에 탄복하였다.
○ 연산군이 정사를 어지럽혀 극도에 이르자,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 세 대장이 성씨가 다른 경대부(卿大夫)로서, 이윤(伊尹)ㆍ곽광(?光)이 한 일을 행하여, 광포(狂暴)한 사람을 폐하고 성왕(聖王)을 세워서, 중종 40년 동안의 태평한 치적을 이루어 사직에 공업(功業)을 세우고, 명성이 후세(後世)에까지 드리웠다. 세 사람 중에서도 성희안은 더욱 문신(文臣)으로서 세상 사람에게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성희안은 연산군의 후궁(後宮)을 첩으로 삼아 데리고 살았다. 아! 임금이란 하늘이다. 하늘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섬기던 임금이라도 나라를 망치게 하면 종묘사직을 위하여 그만 두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 일신으로는 만고에 불행한 변고인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 임금의 후궁을 첩으로 삼았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랴? 성희안이 성취한 공이 그리 작은 것은 아니지만, 지은 죄는 천지에 가득하다. 이런 무리와 함께 임금을 섬길 것인가? 저 따위라니. 저 따위라니.
○ 용만(龍灣 의주)은 강 하나가 띠[帶]처럼 서로 막고 있어, 여기에서 서쪽은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귀머거리나 소경과 같아 보통 하는 말이라도 반드시 역관(譯官)에 의탁해야 된다. 요동은 본디 고구려 땅이었다가 당(唐) 나라 정관(貞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로 627~649) 말에 중국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그 전에는 반드시 우리 나라 말을 능히 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도 중국말을 잘하지 못할 리가 없고 다만 오랫동안 익숙해지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심하역(深河驛) 서쪽과 마파하(馬坡河)동쪽에 유관(?關)이 있는데 바로 송(宋) 나라가 요금(遼金)과 서로 쟁탈(爭奪)하던 곳이다. 금(金) 나라가 차지하면 철마(鐵馬)와 견갑(堅甲)으로 멀리 휩쓸 수 있고, 송 나라에서 빼앗기면 평주(平州)ㆍ난주(?州) 등 고을을 지켜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진시황(秦始皇)이 몽염(蒙恬)을 시켜, 장성(長城)을 쌓으면서 유관을 한계로 하였다.”
하나,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성터로 볼 만한 곳이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관문(關門)을 만들어서 한계로 할 만한 곳도 아니다. 삼차하(三叉河) 동쪽을 요동이라 하는데, 유관에서 삼차하까지는 거의 8백여 리가 된다. 장성이 만약 유관까지였더라면 《사기(史記)》에 반드시 ‘임조(臨?)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렀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역의 형세를 보고 나의 의견을 간추리면, 몽염이 석문령(石門嶺)을 한계로 한 것이 틀림없을 듯하다. 어떤 이는,

“진시황이 한번 포거(鮑車) 에 오른 뒤에 부소(扶蘇)가 죽음을 당했고 몽염(蒙恬)이 칼을 받았으니, 준공(竣功)이 되기 전에 벌써 살해된 것이다. 그러면 유관과 석문령이 모두 당시에 역사(役事)를 미처 마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기에 나는,

“《사기》 및 여러 가지 서적(書籍)에는 모두 성 쌓던 역사를 철회했다는 말이 없다. 그리고 조고(趙高)가 몽염을 죽일 때에 오히려 준공을 제때에 못한 것을 죄로 삼았다. 이세(二世)의 말년에 와서도 오히려, 여좌(閭左 땅 이름)의 백성을 일으켜서 어양(漁陽) 수자리에 가게 하였으니, 그 당시에 끝내지 못한 역사가 어찌 있겠느냐?”
말했다. 어떤 이는 또,

“진시황이 백성에게 해를 끼친 것이 극도에 달했지만, 지금까지 장성(長城)의 덕을 보고 있다. 만약 도(道)가 있어 사방의 오랑캐가 잘 지켜준다면, 성이 있고 없고는 따질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만약 영구히 다스리지 못하고, 몹시 어수선해진다면 3리 되는 성과 7리 되는 외성[郭]도 오히려 삼가 지켜서 난폭한 사람을 막아야 하는데, 하물며 화외(化外)에 있는 천교(天驕 흉노)의 사납고 거친 것들이야 요해처(要害處)에 방어 시설(防禦施設)을 하고 막아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한 시대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만세(萬世)의 백성을 편하게 하였음은 하늘의 뜻이라 하니할 수 없다. 시황이 비록 포악하고 패려함이 심하다지만 어찌 능히 하늘을 어기면서 이런 거창한 역사를 완성하였으랴?“
한다. 그 말이 이치에 근사하기에 우선 적어두는 바이다.
○ 김안로(金安老)는 폐출(廢黜)되어 풍덕(?德)에 살고 있었다. 민수천(閔壽千)이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안로를 찾아보고,

“영공(令公)이 뛰어난 재주로써 연세도 아직 높지 않은데, 조정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마치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안로는 다가앉으면서 넌지시 말하기를,

“조정으로 돌아갈 뜻이 어찌 없으리오. 다만 그 길을 얻지 못하였소.”
하니, 민수천은 말하기를,

“지금 세 허씨(許氏)와 두 심씨(沈氏)가 국론(國論)을 잡고 있으니, 만약 이 사람들이 끌어준다면 조정에 들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이는 허항(許沆)ㆍ허흡(許洽)ㆍ허확(許確)과 심언경(沈彦慶)ㆍ심언광(沈彦光)을 말한 것이었다. 김안로가,

“세 허씨와 두 심씨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하고 묻자,

“기묘 제현(己卯諸賢)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김안로는 조정 논의가 지향(指向)하는 바를 자세히 알고 그후부터는 남을 보면 반드시, 기묘 제현의 원통한 일을 풀어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크게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만약 조정에 돌아간다면 어찌 이와 같이 어물어물 세월만 보내고 말겠는가?”
하였다. 허항 등이 이런 소문을 듣고 자기들의 뜻이 같으니, 김안로를 의지해서 일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성원하고 싶었지만 명분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延城尉)는 인종의 매부(妹夫)였으므로 동궁을 보도(輔導)한다는 핑계로 말을 만들어, 힘껏 성원하였다. 그런데 김안로가 조정에 들어오자, 전일에 한 말을 뒤집어 기묘 제현의 죄를 더욱 꾸며댔다. 허(許)와 심(沈) 등은 이미 그 당파에 들어가 도리어 김안로의 부리는 바가 되었다.
그래서 혹은 매와 개[鷹犬] 노릇을 하고, 혹은 발톱과 어금니[爪牙]가 되어 조정의 기강은 어지러워지고 나라의 형세도 위태로워졌다. 다행히도 태평할 운수가 열려서, 간신(奸臣)이 죄를 입게 되어 세 허씨와 두 심씨도 혹은 내침을 당하고 혹은 참형(斬刑)을 받았으며, 민수천도 역시 죽은 뒤에 관직을 삭탈당하는 형을 받았다. 소인(小人)이 틈을 타서 진출(進出)하기를 구하는 기미(機微)가 처음에는 아주 하찮은 일이었으나, 악인끼리 서로 결탁하여 돕는 화가 이 지경에 이르니, 매우 두려운 바이다.
○ 목은이 우연히 지은 시가 있다.


1

현릉의 장상이 몇이나 남았는고 / 玄陵將相幾人存
벽상의 도형 또한 침침하구나 / 壁上圖形赤已昏
병 많은 목은은 벼슬 그만두었고 / 多病牧老頻任已
지금의 정사는 송헌 홀로 맡았네 / 至今經濟獨松軒


1

송헌의 충의 하늘에 닿으니 / 松軒忠義薄雲天
한의 강후 당의 양공과 어깨 겨루리 / 漢絳唐梁與比肩
태평한 참 기상을 알고 싶거든 / 欲識太平眞氣像
문 닫고 베개 베고 단잠 자노라 / 閉門高枕得安眠


1

단잠 자며 내 이미 무위함을 기뻐하니 / 安眠喜我已無爲
뜬 구름같은 세상 공명 생각 끊었네 / 浮世功名絶不思
다만 한 되는 건 평소의 버릇 남아 / 只恨多生餘習在
때때로 흥이 나면 시를 짓는 것 / 時時寓興卽題詩
○ 목은이 스스로를 읊조린 시가 있다.


1

이 늙은이 신장은 안영 같지만 / 老翁身似晏?長
비파 밀치니 증점처럼 뜻이 크구나 / 舍瑟還同點也狂
돌아감 청했으나 어디로 가리 / 縱得乞歸何處去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하기만 하여라 / 桃花流水渺茫茫


1

자사가 당일에 중용을 지으시고 / 子思當日作中庸
극구 칭찬했네 그 조부의 풍도를 / 極口稱揚乃祖風
대대로 아름다운 건 한산의 문자인데 / 世美韓山文字耳
지금엔 시구도 잘 짓기 어려워라 / 只今詩句尙難工

○ 목은의 ‘실인(室人)’을 읊은 시가 있다.

젊어서는 벼슬하느라 하늘가에 떨어져서 / 少年遊宦各天涯
꿈 속에 서로 만나 그리움을 나누었소 / 夢裏相逢話所思
오늘도 전날과 같은 줄을 어이 알리 / 今日那知是前日
마음이야 기쁘지만 또 한편 의심되오 / 縱然心喜又心疑

○ 또 사물을 대하여 지은 시가 있다.

전 자로 된 창이 구 자 뜰에 닿는데 / 田字窓臨口字庭
조석으로 밥 짓는 연기 빈청에 가득하네 / 炊煙朝暮?虛廳
문에 나서서 긴 휘파람 불 만하구나 / 出門可是舒長嘯
눈앞의 관악산이 각별히 푸르러 / 滿眼冠山分外靑

○ 점필재(?畢齋)가 영해부(寧海府)를 지나다가 목은을 회상하여 지은 절구(絶句)가 세 편이 있다.


1

무가보 뜰 가운데 화씨의 구슬이요 / 無價庭中和氏璧
관어대 아래 북해의 곤어였네 / 觀魚臺下北溟鯤
소매 흔들며 연ㆍ계 지방 놀고부터는 / 自從擺袖遊燕?
운몽호(雲夢湖) 도 시시해서 삼킬 것이 못 되었네 / 雲夢區區不足?


1

창해라 동쪽 끝에 선비를 몰라 / 滄海東頭不識儒
천 년의 간기가 다만 괴소였네 / 千年間氣只塊蘇
선생이 한번 나매 사람의 상서 되어라 / 先生一出爲人瑞
이로부터 단양엔 초목도 시들어지리 / 從此丹陽草木枯


1

사우의 연원이 전후에 뛰어나서 / 師友淵源絶後前
청구의 인물을 다 키워내셨네 / 靑邱人物盡陶甄
지금에야 비로소 즐기시던 곳 지나니 / 如今始過軒渠地
동시에 태어나 채찍 잡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 恨不同時執一鞭

○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에 왕방(王昉)과 조반(趙?)이 명(明) 나라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예부(禮部)에서 신등을 불러, ‘너희 나라 사람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彛)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가 황제(皇帝)에게 나와서 호소하기를, 「고려 이 시중(李侍中)이 왕요(王瑤)를 임금으로 세웠으나, 왕요는 종실(宗室)이 아니고 인친(姻親)입니다. 그리고 왕요는 이 시중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서 상국(上國)을 위태롭게 하려 하므로, 재상 이색(李穡) 등이 옳지 못하다고 하다가 곧 모두 죽음을 당하고 귀양도 갔습니다. 귀양간 재상 등이 우리를 보내, 천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하고 이어 천하의 군사를 일으켜서 토벌하여 주기를 청하였다.’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윤이왕 이초가 기록하였다는 성명(姓名)을 내어보였다. 이리하여 대간(臺諫)에서 윤이ㆍ이초의 당(黨)을 문초하게 하는 한편, 이색등을 청주(淸州) 옥에 가두고 문하 평사(門下評事) 윤호(尹虎) 등을 보내서 문초하게 하였으나 여러 죄수는 모두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뇌성과 비가 크게 일고 앞 냇물이 급히 넘쳐 남문을 휩쓸고 바로 북문을 덮쳤다. 성안에 물 깊이가 한 길이 넘고 관사와 민가가 거의 다 떠내려가고 잠겨버렸다. 객사(客舍) 앞에 은행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옥관들은 허둥지둥 나무를 부여잡아 죽음을 면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왕이 교서(敎書)를 내려 석방하였다.
권 양촌(權陽村)은 이런 시를 지었다.

떠도는 말이 불행하게 주공에게 미치니 / 流言不幸及周公
갑작스런 큰 바람에 좋은 벼 쓰러졌도다 / 忽有嘉禾偃大風
듣건대 서원에 홍수가 넘쳤다니 / 聞道西原洪水漲
천도는 고금이 같음을 알았노라 / 始知天道古今同

김자수(金自粹)가 한산(韓山)을 제목으로 읊조렸다.

동국 문장을 집대성한 이로 / 東國文章集大成
가정 부자가 뭇 인재 중 첫째였네 / 稼亭父子冠群英
산천의 빼어난 정기 지금도 예와 같은데 / 山川孕秀今猶古
묻노니 어떤 이가 그 성명을 이을런고 / 且問何人繼姓名

조계생(趙啓生)이 그 시를 차운(次韻)하였다.

산은 곰나루를 끼고서 첩첩이 서 있는데 / 山傍態津疊?成
마침내 이씨가 그 영기를 받았구나 / 終敎李氏稟其英
부자가 과거에 오른 후부터 / 自從父子登科後
이 고을 이름을 천하가 다 알았네 / 天下皆知此邑名

‘뽕잎 먹는 누에소리[食葉蠶聲]’에 대한 시로,

푸른 나무 그늘 속에 가을비 뿌린다 / 綠樹陰中?秋雨

‘솜 타는 활소리[彈綿弓響]’에 대한 시로,

흰 구름 무더기 속에 봄 우fp가 동한다 / 白雲堆裏動春雷

라는 것을 세상에서 어무적(魚無迹)의 시라 전해 온다. 비록 전해 오는 말이 옳은지는 지금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참으로 소리 있는 생생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시가 있다.

밭 가는 소에겐 밤 넘긴 풀 없는데 / 耕牛無宿草
광에 있는 쥐는 남은 양식 있구나 / 倉鼠有餘糧
만 가지 일에 분수 정해 있는데 / 萬事分前定
덧없는 인생 스스로 바빠하네 / 浮生空自忙

이것이 어떤 사람의 시인지 알 수 없으나, 또한 재물을 탐내기에 급급하여 분수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경계가 될 만하다.
○ 고려 말엽에 시승(詩僧) 선탄(禪坦)이 어느 날 새벽에 송경(松京) 동쪽 성문 밖을 지나다가 닭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다. 그 시의 끝 연구(聯句)에,

천 마을 만 부락이 다 꿈속인데 / 千村萬落同昏夢
꼬리 빠진 수탉은 때를 잃지 않는구나 / 斷尾雄鷄不失時

했다. ‘꼬리 빠졌다[斷尾]’는 것은 선탄이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나라가 장차 망할 참인데, 여러 사람이 능히 알지 못함을 탄식한 것이었다.
○ 진사 조욱(趙昱)은 자는 경양(景陽), 호는 보진암(?眞庵)인데, 만년(晩年)에 용문산(龍門山) 밑에 집을 짓고 용문거사(龍門居士)라 하기도 하였다. 능란한 문장과 조촐한 절조로써 한 세대에 훌륭한 인사였다. 조정에서 특별히 발탁하여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삼았으나,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곧 병을 핑계하고 돌아왔다. 일찍이 원성(原城) 노 처사(盧處士)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시를 지었다.

경장천 냇가에 해가 질 무렵 / 慶莊川上日斜時
문앞에 말 세우고 목동에게 물었더니 / 立馬門前問牧兒
주인은 서울 갔다 알려주누나 / 報道主人京洛去
온 하늘 풍월인데 시 못 지음이 한스러워 / 一天風月恨無詩

○ 선조(先祖)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은 목은의 막내 아들인데, 무덤이 한산(韓山) 고을 목은 무덤 아래 있다. 성종이 폐비 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死藥)을 내릴 때에, 공의 손자 이파(李坡)가 예조 판서로 있었다. 연산군이 당시의 재상과 언관(言官)의 죄를 물을 때에 이파는 벌써 죽어 관을 쪼갬[剖棺]을 당했고, 공도 또한 연좌(緣坐)되어서 무덤을 허물려서 평평하게 되었다가 중종이 반정(反正)한 후에도 오랫동안 봉분(封墳)을 쌓지 못하고 있었다. 좌의정(左議政) 이유청(李惟淸)은 양경공의 형 이종학(李種學)의 증손이니, 공에게는 종손(從孫)이 된다. 하루는 일찍 서울 집에 달려와서 봉화(奉化) 원을 지낸 나의 증조(曾祖) 이장윤(李長潤) 공에게 묻기를,

“꿈에 의젓한 어른이 말하기를, ‘집이 부서져서 비가 새어도 자손이 재력(財力)이 모자라서 수리하지 못하는데, 문중(門中)에 오직 그대만이 할 수 있으니,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꿈을 깨고 보니, 나도 모르게 등에 땀이 젖었습니다. 우리 문중에 반드시 변을 겪은 뒤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므로, 감히 와서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봉화 어른께서 양경공의 무덤이 허물어진 뒤에 여러 해가 되도록 복구하지 못한 사유를 자세하게 말하니, 상공(相公)은 크게 놀랐다. 드디어 함께 힘을 합쳐 흙을 보태어서 봉분을 만들었다.
○ 연산 무오년(1498)에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나서, 김일손(金馹孫) 등을 죽였다. 그후에 연산군은 명문(名文)을 짓는 선비를 이미 잃었으니 이를 대신할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고 하여, 드디어 서울에다가 유생(儒生)을 크게 모아 시험을 치러 뽑았는데, 전시(殿試)에 책문(策文) 한 가지만 짓게 하였다. 과차(科次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차례)를 정하는 참인데, 한 시권(試券)은 말 꾸민 것이 졸렬하고 껄끄러워 집필관(執筆官)이 차등(次等 4등임)으로 정하려 하였다. 상고관(上考官)은 삼하(三下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 3등 중 셋째 등급)에 들 만하다 하였으나, 집필관이 인정하지 않았다. 상고관은 계속 우겼고 고시에 참여한 여러 관원은,

“만약 이런 것을 입격(入格)시키면 반드시 과방(科榜)에 오르게 될 것이니, 참으로 불가하다.”
하여, 서로 옥신각신하였다. 상고관이 삼하로 정하도록 강압하자, 집필관은 분이 나서 붓을 휘둘러 가로 세 획을 그은 데다가 바로 획을 내리긋고 점을 찍은 다음 나가버리니, 실제로는 이하(二下 2등 중 셋째 급)가 되어버렸다. 고사(考査)하기를 마친 후에 등수를 갈라서 서계(書啓)하자, 연산군은 2등에다 낙점(落點)하였다. 훌륭한 문장과 뛰어난 글씨로 삼상(三上)에 입격한 자는 모두 떨어지게 되었고, 다만 김극성(金克成) 등 6인이 뽑혔다. 그릇 이하(二下)로 적힌 자는 횡성 훈도(橫城訓導) 오희증(吳希曾)의 글인데, 말등(末等)에라도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찌 운명(運命)이 아니냐?
○ 정소종(鄭紹宗)이 젊었을 때, 꿈에 한 노인이 정소종의 손바닥에다,

우임금 발자취 있는 산천 밖이요 / 禹跡山川外
우 나라 뜨락의 새와 짐승 사이다 / 虞庭鳥獸間

라는 시구를 적었다. 소종은 그 시구를 기억하여 두고 잊지 않았다. 연산군 갑자년(1504) 겨울에 특별히 전시(殿試)를 보이는데, 칠언율시(七言律詩)로 하였다. 그 글제는, ‘봄에 이원(梨園)을 개방하고 한가롭게 기악(妓樂)을 본다.’라고 하였는데, 연산이 직접 낸 것이다. 정소종은 홀연히 젊었을 때 꿈에 본 노인의 시구가 떠올라 각각 두 자씩을 보태어, 글귀를 지었다.

봄은 우임금의 발자취가 있는 산천에 무르익고 / 春濃禹跡山川外
풍악은 우 나라 뜨락 새와 짐승 사이에 울린다 / 樂奏虞庭鳥獸間

그때 김 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가 고시관(考試官)으로 참석하였다. 상고관이 정소종의 글을 하등(下等)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모재가 이것은 실로 귀신의 말이라고 크게 칭찬하여, 드디어 상등으로 정했다. 그런데 최세절(崔世節)이 다른 시구와 통산[通算]하여 장원이 되고, 정소종은 넷째로 되었다. 과방(科榜)이 발표된 후에 정소종이 은문(恩門 과거 급제자가 시관을 일컫는 것)으로서 모재를 가서 뵙자, 모재는 시상(詩想)이 여기까지 미치게 된 것을 물었다. 정소종이 젊었을 때 꿈을 꾼 일을 자세히 말하였더니, 모재는 더욱 경탄(驚歎)하였다. 모재의 글을 알아보는 명성이 이로부터 나타났다.
○ 상공(相公) 안당(安?)은 평소에 자라 먹기를 좋아하여 가끔 삼강(三江) 어부(漁夫)에게서 구해 오고, 또한 공이 즐긴다는 말을 듣고서 가지고 와서 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공이 화(禍)를 당하기 전에, 동전(銅錢)만한 작은 자라가 행랑 마루 안팎 뜰에 헤아릴 수 없이 흩어져 다녀 다 쓸어낼 수 없어, 뜰에 독을 두고 집어넣었다가 가득 차면 독을 져다가 강물에 놓아주었다. 그런 후 겨우 1년이 되자, 공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무함을 받아 죽음을 당했고, 공도 또한 연좌되어 죽었으니, 화가 난 것이 자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또한 자라의 요변(妖變)이라 하겠다. 그의 집은 소격동(昭格洞)에 있었고, 무과(武科) 이승종(李承宗)이 살았는데, 임진년 난리에 왜적이 불태워 버렸다.
○ 무과 조현범(趙賢範)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는데, 부엌에서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것이 자라탕이었고, 공도 또한 그것을 즐겼다. 한번은 어부가 3~4일 이 지나도록 자라를 바치지 않자, 부엌일을 맡은 아전이 공에게 알려 공문을 띄워서 재촉한 다음에 큰 자라 세 마리를 가지고 왔다. 공은 자라목을 새끼로 잇달아 묶어, 부엌일을 맡은 아전에게 주고 내일 올리도록 하였다. 그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칼[枷]을 쓴 죄수(罪囚) 세 사람이 한 소장(訴狀)으로 호소하기를,

“당초에는 우리 무리가 참으로 번성하였는데, 본디 죄과(罪科)도 없이 날마다 죽음을 당한 지 이제 30여 년이 되었고, 이제 우리 세 사람도 또한 잡혀 갇히게 되어, 북쪽 청사 마루 밑에 엎드려 있습니다. 총명하신 부윤께서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하는 것이었다. 공은 꿈에서 깨어, 곧 형리(刑吏)를 불러서 문틈으로 물었다.

“같은 죄로 잡혀서 갇힌 자가 누구누구인가?”
하니, 형리는,

“갇힌 사람 중에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은 다시 부엌일을 맡은 아전을 불러서 세 마리 자라가 있는 곳을 물었다. 부엌일을 맡은 아전은,

“관청 광 안에 두었는데, 없어져서 지금은 간 곳을 모릅니다.”
하였다. 공이 북쪽 청사 마루 밑을 찾아보게 하였더니, 목 묶인 세 마리 자라가 과연 그 밑에 있었다. 공은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여겨, 곧 건장한 아전을 어부들이 있는 곳에 달려 보내어, 이제부터 다시는 자라를 잡지 말 것이며, 비록 잡히는 것이 있더라도 모두 놓아주게 하였다. 관아(官衙)에 있는 세 마리 자라는 공이 직접 가서 강에 놓아주고, 이날부터 다시는 자라를 먹지 않았다.
○ 무주(茂朱 무주는 지명으로, 무주 원님을 나타내는 것) 윤명은(尹鳴殷)은 집이 흥인문(興仁門) 안 동학(東學) 근처에 있는데, 문간 뜰에 늙은 홰나무가 있었다. 윤명은이 벼슬하기 전에 한번은 사정(射亭)에 있는 친구 집에 걸어서 갔다가, 술을 너무 마시고 흠뻑 취하여 날이 어두워서 홀로 돌아오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술이 깨어 머리를 들어보니, 달은 지고 별은 엉성한데 고요하게 사람 소리가 없었다. 다만 남자 한 명이 자신이 누워 있는 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으나 윤명은은 감히 성명을 묻지 못하였다. 술이 덜 깨어서 느린 걸음으로 돌아오는데, 그 남자도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길에서 어떤 사람이 그 남자와 만나 서로 말하는데,

“어디를 갔었는가?”
하자, 남자가,

“주인이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가서 맞아 온다.”
하는 것이었다. 자기 집 홰나무 밑에 와서 돌아보니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남자가 뜰에 있는 홰나무의 신(神)임을 알았다.
○ 만력(萬曆) 병술년(1586) 겨울에 여강(驪江)에서 어부가 얼음을 깨고 잉어 한 마리를 잡았는데 크기가 두어 자나 되었다. 짊어지고 집에 돌아왔더니, 그날 밤에 고기가 주인의 꿈에 나타나,

“부디 나를 놓아주고, 해를 끼치지 말라.”
는 것이었다. 주인은 괴이하게 여겨 삶아 먹지 않고, 이웃 사람에게 팔아 버렸다. 이웃 사람의 꿈에도 또한 그러하였으나, 이웃 사람은 놓아주지 않고 마침내 잘라서 삶았다. 그런데 그 국을 한 종지라도 맛을 본 사람은 누워 앓지 않는 이가 없었고, 6~7일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아! 고기의 신이 능히 어부의 꿈에 급한 신세는 알리면서, 얼음 밑의 낚시바늘은 피하지 못하였고, 또 국 먹은 사람에게 병을 줄 줄은 알면서 식탐 있는 사람에게 삶김은 능히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으로서도 궁(窮)한 바가 있고 지혜로는 미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안쓰럽구나.

○ 송강사(松江寺) 돌비[石碑]에 이런 시가 있다.

비기를 서로 전해 9백 년인데 / 秘記相傳九百年
앞 사람은 벌써 갔고 뒷사람에게 옮겨지네 / 前人已去後人遷
삼도 한낮에 여우와 토끼 오는데 / 三都白日來狐兎
오부 봄날에는 젓대와 거문고에 취하네 / 五部靑春醉管絃
신숭에 잎이 지니 차가운 비 내리고 / 木落神嵩寒泣雨
궁원에 풀이 나니 새벽 연기 자욱하네 / 草生宮苑曉生煙
황은은 너그러운 바다같이 깊어서 / 皇恩寬宥深如海
삼한을 두 번이나 온전하게 하였네 / 坐使三韓再得全

비석에 이 시가 있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오늘에야 발견되었고, 또 누가 지은 시인지도 알 수 없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계본(啓本)에,

“광양 현감(光陽縣監)의 첩정(牒呈)에, 예전부터 쇠무덤[鐵塚]이라 부르는 곳이 있어 헤쳐 보았더니, 쇠붙이는 없고 다만 지석(誌石)이 있는데,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동쪽으로 15리쯤 되는 거리에 황금총(黃金塚)이 있는데, 이것을 발견하면 그 이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식이 아비를 업신여기고, 종이 주인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중도 삿갓을 쓴다. 중이 속인(俗人)의 일을 하고 속인이 중의 일을 하며, 유생(儒生)은 붓과 벼루를 버리고, 베짜는 계집은 베틀과 북을 버리고, 농부는 쟁기와 보습을 버린다. 임진년에 나라가 셋으로 갈라졌다가 계사년에는 도로 안정되고, 오년(午年)ㆍ미년(未年)에는 태평하여진다.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서 피난하는 것이 제일이고, 호서(湖西)가 조금 편안하고, 여강(驪江)은 혈육이 낭자할 지역이다. 한양(漢陽)으로 환도(還都)하면 주(周) 나라 같이 8백 년을 지날 것이고, 중국 군사가 임진강(臨津江)을 건넌다면 주 나라보다 2백 년은 더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한다. 대개 하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하다. 항상 편하게 보전코자 하건마는 오직 그 인사(人事)의 득실(得失)과 운수(運數)의 소장(消長)으로 감응(感應)하여 간혹 혼란하기에 이르기도 하나, 이것이 어찌 하늘의 본심(本心)이겠느냐? 지금 이런 말로써 본다면 국가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과 흥하고 망함이 모두 일정한 운수에 연유한 것으로써, 하늘도 또한 어찌할 수 없으며, 사람의 힘도 그 사이에 능히 용납되지 못하는 것인가? 매우 괴이한 일이다.
○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어떤 사람이 남의 문간 벽에다 절구(絶句) 한 수를 적어놓고 갔다.”
하는데, 그 시에,

나는 신라의 말엽 사람 / 我是新羅末葉人
나이가 팔백 하고 다시 세 살이로세 / 年將八百又三春
바쁜 걸음에 비는 오고 돌아갈 길 멀어 / 行忙雨濕歸程遠
당신과 더불어 얘기하지 못하오 / 不與高門談笑然

그런데 사람들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선(地仙)이 되어,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고운(孤雲)의 시일 것이다.”
고 하였으나, 나는 고운의 시원스러운 문장으로써 반드시 이렇게 속된 시는 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물며 고운이 지금까지 생존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으니, 이것은 미친 아이가 한번 희롱삼아 읊조린 데 불과한 것이리라.
○ 중종조 정덕 연간(正德年間 정덕은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1505~1521)에 원역(院驛) 벽에 절구 두 수를 적은 것이 있었다.


1

비바람이 지난날 놀라게 하여 / 風雨驚前日
문명이 이때를 저버렸다오 / 文明負此時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에 노닐며 / 孤?遊宇宙
시끄러움 싫어서 시마저 그만뒀네 / 嫌?竝休時


1

새는 무너진 원 구멍을 엿보고 / 鳥窺?院穴
중은 석양의 우물물을 긷누나 / 僧汲夕陽泉
천지를 집 삼는 길손 / 天地爲家客
건곤 어느 곳에 끝이 있던가 / 乾坤何處邊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교리(校理) 정희량(鄭希良)이 연산 때에 갑자년의 화(禍)가 있을 줄 알고 몸을 빼쳐 가버렸다. 어떤 이는 ‘강에 빠져 죽었다.’ 하고, 어떤 이는 ‘중이 되어 구름처럼 떠돌아다녔다.’ 하는데, 이것은 정희량의 시이다.”
한다. 지금에 와서 비록 정말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나, 또한 난을 피해 은둔한 자의 말이리라.
○ 선조 가정(稼亭 이곡〈李穀〉)께서 36세 때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제과(制科 천자가 친히 시험 보이는 과거)에 이갑(二甲)으로 등과하였다. 가정 이전에는 동국(東國) 사람으로서 이갑으로 등과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27세 때에 제과에 응시하였는데, 고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크게 칭찬하고 장원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외국 사람이란 이유로 논란이 있어 억울하게 이갑 제이인(二甲第二人)으로 정해지고 말았다. 목은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부자(父子)가 중국 과거에 오른 뒤에, 천하가 모두 동국에 한산(韓山)이란 곳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그의 시에,

부자가 중국 과거 오른 후부터 / 自從父子登科後
천하가 이 고을 이름 모두 알게 되었네 / 天下皆知此邑名

라는 것이 이것이다.
○ 원주(原州) 흥원참(興原站)은 왜노가 수로(水路)로 우리 나라에 왕래하는 곳으로, 참(站)에는 뱃사람 이일정(李一貞)과 사삿집 종[私奴] 원유공(元有功) 등이 있는데, 왜말을 잘 해서 왜인들과 서로 친하였다. 내가 이일정을 불러서,

“왜인이 쳐들어오는 이유를 너는 평소에 이미 알고 있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몰랐겠습니까? 기축년 봄에 감사 정윤희(丁胤禧)가 체직되어 떠나는데, 도사(都事) 안중길(安重吉)이 따라왔습니다. 감사는 배로 건너고 도사는 우선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 왜의 사신 평조연(平調淵)이 서울로 가면서 여기에 배를 대었습니다. 참정(站亭)에서 식사할 참인데, 반찬과 술과 안주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하인을 결박하여 땅에 넘어뜨렸습니다. 도사가 이 소식을 듣고 향통사(鄕通事)를 잡아가니, 왜의 사신은 크게 성을 내며, ‘관원은 각자 맡은 일이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먹는 것은 국가 회계(會計)에서 빼주는 물건이니, 도사가 관여할 것이 아니다. 내가 정식대로 먹겠다는데, 도사는 자기일도 아니면서 이와 같이 업신여기오?’ 하며, 상을 밀치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와 원유공을 부른 다음, 칼을 휘둘러 옆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너희 나라를 해치려고 하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고, 오로지 너희 나라에 잘못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배를 만들고 칼을 주조하여 멀리 휩쓸어 버리려는 계획을 한 지가 벌써 30여 년이다. 명년에 우리 국왕의 사신이 나오면, 반드시 3~4년 이내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너희 나라에 들어올 것이다. 국왕의 사신이 나와서는 배와 사냥개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많이 청구할 터인데, 이것은 모두 너희 나라 형편을 정탐하려는 것이다. 우리 나라 형벌은 너희 나라 태장(笞杖)과는 다르다. 만약 잘못이 있으면 곧 작은 환도(環刀)로 목을 자르고 쟁반에 담아 여러 사람에게 보이므로 각자 힘껏 싸우니, 너희 나라에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다. 너희들은 만약 우리 군사가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거든 우리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착한 자도 있고, 악한 자도 있다. 착한 자를 만난다면 숨어 피하게 하여 해치지 않겠지마는 악한 자를 만난다면 보는 대로 곧 죽일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을 위해 진심에서 하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소인이 원유공과 함께, 비록 그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또한 의심되는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그 말을 목사(牧使) 김찬광(金纘光)에게 알렸더니, 목사는 ‘너는 어찌해서 망령된 말을 하느냐? 저들이 비록 그런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꼭 온다는 것도 아니고, 비록 들어온다 하여도 어찌 우리 나라 군사를 당하겠느냐? 조심하고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고 꾸짖었습니다. 그해 왜국에서 사신이 나와 매와 사냥개를 청구하였고, 오가는 길에 우리를 업신여기는 기세가 많았습니다. 그후 4년이 지난 임진년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서 곳곳에 분탕질을 하였는데, 이들 중에 사람을 잘 죽이는 자도 있고, 죽이지 않는 자도 있어 평조연의 말과 꼭 같았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를 속이지 않았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 함경도(咸鏡道)는 야인(野人)과 이웃하여 있고 또 번호(藩胡)도 있어, 조정에서는 예부터 방어(防禦)하는 일을 중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남북 병사(南北兵使)와 북도(北道)의 대소 수령(守令)은 모두 무부(武夫)를 가려서 보내는 것이 예(例)였다. 더구나 조정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수령이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이 오로지 가혹한 징수와 혹독한 형벌을 일삼았고, 백성을 초개(草芥)같이 여겼다. 그래서 백성도 또한 수령을 ‘낮도둑’이라 지목하여 원수같이 여겼다. 간혹 문관(文官)을 가려서 보내기도 하나 백성들의 기대에 걸맞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북도 시골 사람으로 서울에 처음 온 자가 있었는데, 동소문(東小門)으로 들어와서 성균관(成均館) 앞길에 이르러서는 같이 온 사람에게,

“여기는 어느 고을 읍내(邑內)이기에 관사(官舍)가 이같이 높고 넓은가?”
하고 물으니, 같이 온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모르는가? 여기는 읍내가 아니라, 조정에서 ‘낮도둑’을 모아서 기르는 곳이다”
하였다. 이 말이 비록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한 말로 그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듣기에 또한 괴이하다.
○ 기자(箕子)가 중국에서 유학(儒學)과 예악(禮樂)을 아는 사람 및 기예(技藝)에 능한 온갖 공인(工人)들을 3천여 명이나 거느리고 왔다. 상(商) 나라 문물(文物)을 다 거둬 동쪽으로 와서 평양에 도읍했던 것이다. 처음 왔을 때는 미개해서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있었고, 말이 통하지 않아 땅에다 글자 써서 비로소 뜻을 통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보궤(??)에 담아서 먹고, 변두(?豆)에 담아서 제사(祭祀)지내도록 가르쳤으며, 살아있는자를 봉양(奉養)하게 하고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였으며, 남녀 혼인에도 모두 예절이 있었다.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고 인의(仁義)의 교화(敎化)를 일으켜 도둑이 화하여 양민(良民)이 되고, 오랑캐가 변하여 중화(中華)가 되었다. 그가 실시하였던 정전(井田) 제도는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천여 년 동안에 동국 백성으로서 삼강 오륜(三綱五倫)을 알고 군신 부자(君臣父子)의 도리를 유지하여 금수(禽獸)와 같이 됨을 면한 것은 모두 기자의 교화이니, 비록 집집마다 그의 신위(神位)를 만들어서 축원하고 제사하여도, 그의 덕을 갚기에는 오히려 모자랄 것이다.
○ 하늘에는 열 가지 날이 있고 사람에게는 열 가지 등급이 있으니, 위로 공경(公卿)에서 아래로 하인에 이르기까지 높고 낮은 차례와 귀하고 천한 분수는 천지의 떳떳한 의(義)로써 진실로 문란하게 할 수 없다. 우리 나라 공천(公賤)ㆍ사천(私賤)의 법은 실로 성왕(聖王)의 정사가 아니다. 다 같은 동포(同胞) 백성이건만 억지로 종으로 만들어서, 대대로 내려가며 천한 무리에 쓸어 넣어 사족(士族)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니, 심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기자가 삼인(三仁 은〈殷〉의 세 어진 이, 즉 비간〈比干〉ㆍ미자〈微子〉ㆍ기자〈箕子〉)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나와 중국에도 없는 법을 만들었으니, 어찌 그만한 까닭이 없겠는가?
대개 동방은 산과 땅의 형세가 이리저리 꾸불꾸불하여 험하게 생겼고, 인심과 버릇이 억세고 간사하며, 법령(法令)을 잘 따르지 않고 이랬다 저랬다 하여 제어하기가 어렵다. 아침에 내린 명으로 저녁에 단속할 수 없고, 또한 사형으로 악을 징계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간사한 도둑이나 장물을 탐하는 무리는 잡아다가 그 집 노예(奴?)로 삼아, 각자 도맡아 다스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좋게 변화시켜 대문을 닫지 않아도 되는 훌륭한 다스림을 이룩하여 이로부터 드디어 동방 대대로 바꾸어지지 않는 큰 법을 이루게 되었다. 집집마다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고, 사람마다 상하(上下)의 분의(分義)를 알았으며, 나라의 역적(逆賊)과 사가(私家)의 반노(叛奴)를 같은 법률로 다스렸다. 지금도 수천여 년을 그대로 따라 지켜서 바꾸지 않아 예양(禮讓)하는 후(厚)함과 형정(刑政)의 훌륭함이 다른 나라가 따르지 못할 바이다. 그런 까닭에 중국 사람이 모두 예의의 나라라 일컬었고, 혹은 작은 중화(中華)라고 지목하니, 이것은 중국과 같은 방법이 아니면서 결국 다스려진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 제도를 바꾸어 중국과 꼭 같이 하려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정사가 풍속에 따라 변하고 풍속에 따라서 교화시키는 뜻을 모르는 것이다. 다만 크게 어지럽힐 뿐이니, 이를 시행해서는 안 된다.
○ 우리 나라에서 인심과 풍속이 교활(巧猾)하여 교화시키기 어려운 곳으로는 반드시 호남(湖南)을 첫째로 삼는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덕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니니, 만약 덕으로써 인도한다면 어찌 변화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만 남방(南方)에 보통 있는 물건을 보더라도 산야(山野) 채소의 맛과 개울의 물고기와 과수원의 과일 모양이 모두 동북(東北) 지방의 것과 같지 않으며, 새ㆍ까치의 울음, 닭ㆍ개의 소리가 모두 앙칼지고 급하며, 집에서 기르는 돼지도 붉은 빛이 많고 고양이의 얼룩도 모두 어두운 청색이거나 회색이며, 흑백 바탕에 금색 얼룩무늬가 있는 것은 아주 없다. 도내(道內)가 모두 그러하니, 물색(物色)이 다른 지방과 다름이 이와 같으니, 매우 괴이하다.
○ 우연히 진양산(陳兩山)이 기록한 것을 보았다.

“도척(盜?)이 말하기를, ‘도둑질하는 데에 또한 도(道)가 있으니, 남의 방안에 있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성(聖)이고, 될지 안 될지를 아는 것은 지(智)이고,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勇)이고, 뒤에 나오는 것은 의(義)이고, 고르게 나누는 것은 인(仁)이다. 이 다섯 가지 도(道)가 없이 큰 도둑이 되는 자는 천하에 없다.’ 하고, 부자가 말하기를, ‘부자가 되고 싶거든 먼저 5적(賊)을 버리라. 5적을 버리지 않고 능히 부자가 되는 자는 천하에 없다. 5적이라는 것은 인ㆍ의ㆍ예ㆍ지ㆍ신(仁義禮智信)이다.’ 하였다. 도둑은 다섯 가지의 도를 보존하여 그들의 도둑을 이루려고 하고, 부자는 다섯 가지가 적이라 하여 꼭 버리고 부자가 되려 하니, 그렇다면 지금 큰 부자는 옛날 큰 도둑보다 심한 자들이다.”
하였으니, 진공(陳公)이 세상을 풍자(諷刺)한 뜻이 지극하다. 양화(陽貨)가

“부자가 되려 하면 어질지 못해진다.”
한 것도 또한 그 하나이다.
○ 중원(中原) 영평부(永平府) 칠가령(七家嶺)에서 서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높은 봉우리 위에 당(堂)같은 무덤이 있는데, 경계가 분명하므로, 통역에게 묻기를,

“이 산이 무슨 산이며, 누구네 무덤인가?”
하니, 통역은,

“환야산(幻爺山)입니다.”
라고 답했다.

“환야는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자식을 두었는데, 공순하지 못하여, 동쪽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가고 북쪽을 물으면 남쪽을 가리켰으며, 땔나무를 하게 하면 반드시 돌을 져오고, 물을 길어 오게 하면 반드시 불씨를 받아왔다. 그 아비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 자식에게, ‘나를 반드시 높은 봉우리 위에다 장사하라.’고 하였다. 대개 그 아비의 뜻은 평지에 장사하라 하면 반드시 높은 봉우리에다 장사할 것이므로 높은 봉우리에다 장사하라 한 것은 아래쪽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얻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그 자식은, ‘임종(臨終) 때의 말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곳에다 장사하여 길 가는 사람이 지금까지 그 얘기를 한다고 하며, 살았을 때나 죽은 뒤에 그 아비의 뜻을 어기지 않은 것이 없다 하여, 이 산을 환야산이라 이름 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이것도 옛날 이리 새끼가 그 아비의 죽을 무렵의 말을 따라 물속에다 장사하고, 모래를 쌓아서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과 꼭 같다. 불순(不順)한 자식을 경계하는 말이다.
○ 옛날 명왕(明王)은 뇌물 받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지켜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뇌물 받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하지 않고 능히 그 국가를 보존한 자는 있지 않았다. 한(漢) 나라 광무황제(光武皇帝)와 같이 너그럽고 어진 임금으로서도 수천 학도(學徒)가 궐문(闕門)에 서서 슬프게 부르짖음에는 비록 애달파하였지만, 구양흡(歐陽?)의 죄는 끝내 용서하지 않아 마침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광무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고 당(唐)ㆍ송(宋) 여러 임금으로서 조금이라도 다스림의 도를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조종(祖宗)의 세대는 조정이 맑고 밝아서 간사한 것이 행해지지 못하였었으니, 세종ㆍ성종 두 임금의 다스림은 후세에서 능히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중종 초년은 비록 연산군의 혼란을 겪은 다음이지만 국가의 전장(典章)이 아직도 남았고, 공정한 논의도 없어지지 않아서 사대부(士大夫)로서 탐심이 많고 행실이 더러워서 남의 기롱을 당한 자는 모두 조정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리고 자문(咨文)에 쓰는 종이 한 장이라도 개인적으로 쓴 자는 종신토록 누명(累名)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 금법(禁法)이 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7년 이래로는 권력 잡은 간사한 자가 잇달아 기율이 없어지고, 재물을 탐내는 버릇이 나날이 성해져서, 공정한 논의에 의해 버림을 당해 남의 손가락질을 받던 자가 교만스럽게 큰소리를 치며, 남들이 비웃고 욕을 해도 다시 부끄러워함이 없다. 다만 법대로 거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서로 그 본을 받고, 더욱 그릇된 곳으로 유인하니, 이러고서 민생이 곤란하지 않고 종사(宗社)가 망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 제왕(帝王)의 법이란 모두 인정(人情)에 근본하므로, 반드시 인정에서 근본하고 천리(天理)에 순응(順應)한 다음이라야 시행하는 데에 어긋남이 없고 후세에 나무랄 일이 없다. 우리 나라 법에 알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여자의 정절(貞節)은 극히 권장할 만한 것이나, 나이 젊은 과부를 일체 금고(禁錮)하고, 개가(改嫁)하여 낳은 자식은 간음(姦淫)하여 낳은 것으로 단정해 버리니, 이것이 과연 인정에 가까운 것일까? 그리고 고자[宦者]라는 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흉하고 더러워서 실상 인류(人類)가 아닌데, 아내를 두고 가정을 이루어 일반 사람과 똑같이 살고, 혹 아내가 행실을 삼가지 못하면 죄를 주니, 이것이 천리(天理)에 합당할까? 인정에 어긋나고 천리에 거스림이 이보다 더함이 없으니, 성인의 법이 아닌 듯하다.
○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최영(崔瑩)의 무덤을 지나다가 시를 지었다.

위엄 떨치고 나라 구하느라 귀밑머리 희어졌네 / 奮威匡國?星星
말 배우는 아이까지 장군 이름 다 아누나 / 學語街童盡識名
한 조각 장한 마음 어이 없어질손가 / 一片壯心應不死
천추에 영원히 태산과 우뚝하리 / 千秋永與太山橫

○ 고려 조정은 오직 백성을 애호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낭장(郞將) 등은 백성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고 다스리는 도를 모른다 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은 제수(除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제(巨濟)는 바다 가운데 있어, 왜적이 우리 나라에 오는 첫 길목이지만, 오히려 문관(文官)으로서 6품에 처음 오른 자를 차임(差任)하였다. 이규보(李奎報)가 서문(序文)을 지어, 작별한 글이 《동문선(東文選)》에 기재되어 있어 지금에도 볼 수 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낭장 등의 호소로 인하여, 비로소 선택해서 교대로 차임하겠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낭장으로서 수령(守令)이 된 자 역시 드물었고, 이때에 무과(武科)에서 뽑는 것이 다만 네 사람뿐이었다. 이리하여 5백 년 동안 백성이 생업을 편케 할 수 있었고 인구가 많아지고 또 부유하였으며, 여러 고을의 창고가 또한 가득 차게 되었다. 우리 나라도 대대로 무관은 내지(內地)에 차임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는데, 정릉(靖陵 중종의 능) 중년 이후에 권세가 있는 간신이 잇달아서, 뇌물만 좋아하고 방비하는 데에는 소홀하여, 친하고 나이 어린 무관을 부유한 고을 원으로 차임한 적이 많았다. 그 원들은 세도를 믿고 방자하여져서 남에게 환심을 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못하는 짓이 없어 민심이 원망하여 배반하고 나라의 근본이 병들어 버렸다.
○ 왕궁의 법전(法殿)은 남향(南向)을 하는데, 그것은 정사를 듣고 조회를 받는 바른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政府)와 추부(樞府)ㆍ6조(曹) 여러 관청이 모두 광화문 밖에 벌여 있어 동쪽에 있는 것은 서쪽을 향하고 서쪽에 있는 것은 동쪽을 향해 있다. 한갓 관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대부의 사가(私家)나 대청마루도 모두 동향이나 서향으로 되어 있어, 감히 남향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집에 있을 때라도 분수에 넘치게 남쪽을 향해 앉을 수 없어서였다. 도성(都城) 안에, 고가 세족(故家世族)의 집들이 바둑돌같이 벌여 있고 별처럼 흩어져 있으나, 모두 북향하여 있었는데, 중종 이후로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인심이 나날이 사치스러워져, 분수를 어기고 예도를 넘는 일이 끝이 없어 집의 좌향(坐向)이 남인가 북인가는 물을 것도 없었으니, 세도(世道)가 점점 못하여지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조종 때에는 오직 대전(大殿)과 동궁빈(東宮嬪)만은 사대부 집 딸의 나이 단자(單子)를 거둬, 그들을 대궐에 들어오게 하여 선택하였고, 이 밖에는 비록 대군(大君)의 아내라 하더라도 혹 상궁(尙宮)을 시키거나 혹은 감찰각씨[監察可氏]를 시켜서, 여염집 처녀의 본집에 가서 선택하여 의정(議定)하였다. 금상(今上) 때에 와서 후궁(後宮)이 낳은 여러 군(君)의 아내도 모두 단자를 거두고 처녀를 대궐에 오게 하여 직접 선택하는데, 이것은 선왕 여러 대로 지켜 오던 가법을 어긴 것일 뿐 아니라, 분수를 넘치고 예도를 넘는 화(禍)도 또한 여기에서 시작된다.
○ 중국은 문명한 지역이다. 구주(九州) 밖의 사해 모퉁이에 있는 나라는 각각 호칭이 있으니, 남쪽을 만(蠻)이라 하는데, 만이란 벌레 같다는 것이고, 서쪽을 강(羌)이라 하는데, 강은 양[羊]과 같다는 것이고, 북쪽은 적(狄)이라 하는데, 적은 개와 같다는 것이다. 우리 동방만은 이(夷)라 하는데 이는 궁(弓)에다 대(大)가 있는 것으로 이것은 큰 활이니, 활을 잘 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기자(箕子)가 봉(封)해진 지역으로서, 민속(民俗)이 어질고 오래 사는데 ‘이적(夷狄)에 임금 있는 것이 중국에 임금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고, 공자가 여기에서 살고 싶다고 한 곳도 여기다. 또한 대살[竹箭]은 중국이 비록 넓다 하여도 오직 형주(荊州)의 형산(衡山)에서만 생산될 뿐 다른 고을에는 없는 까닭에, 중국 사람은 모두 나무로써 화살을 만든다. 우리 나라는 북방에서만 나지 않을 뿐이고, 각 도 모두에서 생산된다. 활이 억세고 화살이 날카로우며 사람이 날쌔고 말이 건장한 것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 수 양제(隋煬帝)와 당 태종(唐太宗)이 천하 군사를 일으켜 왔어도 능히 뜻대로 하지 못하고 갔는데, 지금 왜적에게 패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한 것은 활 재주가 예전 같지 못한 것이 아니고 다만 민심(民心)이 흩어져 배반한 지가 이미 오래였고 여러 장수가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서, 능히 진격하지 못해서이다. 통분하고 통분하다.
○ 천하가 넓어 기후가 고르지 않고 풍속도 달라 외적(外賊)을 막아 싸우는 기구도 또한 그 지방에 따라 각각 다르다. 중국에는 중국의 장기가 있고 이적(夷狄)에는 이적의 장기가 있으니, 춘추 시대(春秋時代) 여러 나라를 보더라도, 진(秦)ㆍ초(楚)의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칼날, 제(齊)ㆍ진(晉)의 깃발과 칼ㆍ창, 그리고 한(韓)ㆍ위(魏)의 넓은 수레와 말배때끈과 가슴걸이[?靷], 또 연(燕)ㆍ조(趙)의 굽은 창과 긴 목투구가 그것이다. 억센 활과 굳센 쇠뇌[弩]로 쏘는 것마다 맞추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장기이고, 포환(砲丸)을 묘하게 쏘고 창검(槍劍)에 익숙한 것은 왜적의 장기이다.
군사를 잘 쓰는 자는 나의 장점을 숨기고 적의 단점을 알아내고, 나의 단점을 닦고 적의 장점을 꺾는다. 그리하여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이 서로 기회를 틈타 적을 유인하여 승리로 이끄니, 이것이 손무(孫武) 삼사(三駟)의 법이다. 만약 예부터 전해 오는 나의 기술을 싫어하고 저들의 새 재주를 본받는다면 한단의 걸음[邯鄲之步]이 되니 잘할 수 있겠는가? 나의 장점을 더욱 익히고 적의 능한 것을 겸한다면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양쪽 군사가 어울려서 싸울 때는 바람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때리며, 구름을 따르고 비도 따르듯 하여 숨도 쉴 수 없다. 이런 때를 당하여 나아가고 물러나면서 창을 휘두르는 기술과, 내려다보고 쳐다보면서 칼을 쓰는 방법은 반드시 쓸 곳이 없을 것이니, 다만 조총(鳥銃)을 배울 것이요, 딴 것은 반드시 본받을 것이 아니다.
○ 자산공(慈山公)이 일찍이 자녀(子女)를 경계하기를,

“자기 일은 부지런히 하고 남의 일에 게으른 것은 인정이 다 같다. 종들은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날마다 하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일마다 능히 부지런히 하겠는가? 너희들은 다만 너그럽게 보호할 것이요, 너무 꾸짖거나 성내지 말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마다 명언이라 하였다.
○ 정 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기묘 연간에 수상(首相)으로 있었다. 중종이 재변(災變)으로 인해, 사정전(思政殿)에서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문의하니, 좌우에서 차례로 나아가서 재변을 그치게 할 방책을 아뢰었다. 한충(韓忠)이 나아가서,

“성상(聖上)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구하시나, 비루(鄙陋)한 사람이 감히 수상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재변이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연유가 있는 것이며, 다스림도 이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물러나오자, 우상 신용개(申用漑)는 얼굴빛을 바꾸며 큰 소리로,

“신진의 사자(士子)가 면전에서 정승을 배척하니, 이 버릇은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공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손을 저어 말리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들이 성내지 않을 줄 알고 이 말을 한 것이요, 만약 조금이라도 꺼리는 것이 있었다면 비록 권한다 해도 반드시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오. 나에게는 진실로 해로운 바가 없으니, 젊은 사람이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氣風)을 꺾을 것이 아니오.”
하였다. 신용개도 그 말에 탄복하였고 듣는 사람들도 대신(大臣)의 도량이 있다 하였다.
정 문익공 당시에, 청류(淸流)들이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려 하였고, 삼사(三司)에서도 또한 청하였으나 공만은 옳지 못하다 하여,

“현량이라는 명목이 비록 좋으나 삼대(三代 하ㆍ는ㆍ주) 이후에 있어서는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중종이 듣지 않았다. 그후 여러 현인이 배척되고 죽음을 당하자, 그들이 시행하였던 좋은 정사도 일체 뒤엎게 되어, 온 조정에서 현량과도 없애도록 청하였는데, 공은 또 없앨 수 없다 하였다. 중종이 공에게 이르기를,

“현량과를 처음 시행할 적에 온 조정이 모두 좋다 했는데 경만은 시행할 수 없다 하였소. 이제 없애려 하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데 경만은 또 없앨 수 없다 하오. 어째서 경의 견해가 매양 여러 사람의 논의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당초에 진실로 시행할 수 없음을 말하였거니와, 지금은 이미 과거를 설행하여 홍패(紅牌)를 주고 관직도 제수하였으니, 어찌 없앨 수 있습니까? 한번 시행하고 한번 없애는 데에 있어 국가 정령(政令)이 이와 같이 엎치락뒤치락 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중종은 또 듣지 않았다. 공의 말이 비록 전후에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곧고 분명하여, 빼앗기 어려운 기개는 바로 옛날의 대신(大臣)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었다.
○ 금산(錦山) 원님 최극성(崔克成)은 부안인(扶安人)이다. 젊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을 항상 즐겁게 해드렸다. 출신(出身)한 후에도 오로지 편하게 봉양하기만을 힘쓰고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 모친이 병이 나서,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위중하고 온갖 약이 효과가 없었다. 의원은 제비 고기를 구해서 약으로 쓴다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였으나, 한창 추울 때여서 사방에 눈이 가득하였다. 앉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 걱정하다가, 밤중에 밖으로 나가 배회하는데, 무엇이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공이 급히 손으로 더듬어보니 바로 제비였다. 곧 약을 지어 먹였더니 묵은 병이 금방 나았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감탄하여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는 최극성의 조카 최위지(崔謂之)가 전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최극성의 형 최필성(崔必成)이 그 아비가 학질(?疾)을 앓을 적에 박쥐가 저절로 온 것을 잡아서 효험을 본 일이라고도 한다.
○ 원주(原州)에서 서남쪽으로 30리 밖에 구파촌(仇破村)이 있는데, 떠돌이 백성 내외가 와서 수년 동안 살고 있었다. 가정(嘉靖) 갑인년(1554, 명종 9) 동짓달 밤에 사나운 호랑이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그 지아비를 물어 죽였다. 아내는 밖에 나서서 소리쳤으나, 이웃집에서는 한 사람도 소리에 응하는 자가 없었다. 호랑이가 그 지아비를 끌고 가므로 아내는 지아비의 허리를 부여잡고 호랑이와 같이 울타리 틈으로 나가 손으로 호랑이를 치면서,

“네가 나의 남편을 죽였으나, 시체는 가져가지 못하리라.”
하고, 범과 밤새도록 싸웠다. 범은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다가 날이 밝아오자 그냥 포기해 버리고 갔다. 그 아내는 이웃 사람을 모아서 예대로 장사지내고 재물을 다 털어서 제사를 지낸 후에 외로이 홀로 살았다. 이 여자의 행실이 옛날 열부(烈婦) 못지 않았는데, 이웃에서 관청에 알리지 않아 포상을 받지 못했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갔는지 모두 알지 못했다.
○ 통천군(通川郡) 읍내에 가난한 백성이 있었다. 겨울에도 입은 것이라고는 다만 묵은 솜과 해진 굵은 베옷뿐이었다. 소를 몰고 추지령(楸池嶺) 밑에 나무하러 갔는데, 마침 그날은 풍설이 너무도 차가웠다. 날이 저물자, 몰고 갔던 소가 빈 길마로 홀로 돌아오자, 그의 아내는 깜짝 놀라서 몹쓸 짐승에게 해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달려가 찾았다. 중대(中臺) 길에 이르니, 그의 남편은 동상(凍傷)을 입고, 눈 위에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아내는 곧 옷을 벗고 가슴을 맞대어 안고 누웠다. 혹시 다시 깨어나기를 바란 것이나 아내도 또한 옷이 얇아,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었다. 이튿날 아침에 집에 있던 두세 어린아이가 기어가 시체 옆에서 울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수 이응린(李應麟)이 매우 불쌍하게 여겨,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 조정(朝廷)에 보고하여 고아(孤兒)를 구휼하고 그 집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 16)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 참판 김사재(金思齋 이름은 정국〈正國〉)는 모재(慕齋 이름은 안국〈安國〉) 선생의 아우이다. 해서(海西) 감사로 있을 때, 아들한테 매맞고 욕을 당했다고 고발해 온 백성이 있었다. 공은 곧 관차(官差)를 보내서, 그 아들을 잡아 안마당으로 끌고 왔다. 섬돌에 오르게 하여 직접 문초하니, 꾸짖고 욕한 죄상이 대개는 나타났다. 공이 크게 노하여 책상을 밀치고 일어나며,

“너는 강상(綱常)을 범했으니, 반드시 죽고 용서함이 없으리라.”
하고 이어,

“부모가 낳아서 기른 은혜는 한이 없어 보답하기 어렵고, 나라의 법은 지극히 엄해서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은혜와 법이 이와 같은데, 너는 어찌 은혜를 저버리고 법을 업신여겼느냐?”
고 말하니, 그 아들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다.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시골 백성이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장성하기까지 항상 슬하에 있으면서, 오직 가까이하고 너나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조심해야 하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동안에 대들고 행패를 부린 일이 진실로 많았는데, 이제야 천륜(天倫)의 높음과 국법(國法)의 엄함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공은 얼굴빛을 고치며,

“이 사람이 몰라서 법을 범하였다고 스스로 말하고, 또 의리에 감복하고 죄를 뉘우치는 정성이 있으니, 어찌 차마 죽이겠는냐? 이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법의 본뜻이 아니다.”
하였다. 그 사람은 그후부터 효자가 되었으니, 이것은 왕환(王奐)이 진원(陳元)을 벌하지 않고 교화시킨 것과 같은 뜻이었다.
○ 성명을 알 수 없는 임영(臨瀛) 군사 세 사람이 만력(萬曆) 병술년(1576, 선조 9) 경에 초관(哨官)으로서 북방에 수자리를 살고 있었다. 마침 돌림병이 크게 일어나서 세 사람이 차례로 병들었다. 먼저 앓는 자가 아직 일어나지 못했는데 뒷사람이 다시 앓아누웠다. 재삼 전염되어 앓다가 최후에 한 사람이 급기야 죽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 세 사람은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천리길을 같이 왔다. 한 막사에서 같이 누워 같은 병으로 서로 구호하면서 번갈아 서로 의지하였는데, 그만 홀로 불행히 먼 지역에서 죽었다. 살아서 같이 왔다가 죽어서 버리고 돌아가는 것은 우리들 정리로서 실상 참기 어렵다.”
하고, 입었던 옷을 각자 벗어서 염(斂)한 다음, 막사 뒤에다 장사하였다. 그후 수자리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두 사람은 그 시체를 번갈아 짊어지고서 먼 길을 고생스럽게 걸었다. 양식이 떨어지고 발이 부르터서 죽을 고비를 겪으며, 한 달이 넘어서야 돌아왔다. 그의 아비가 아들의 죽음에 애통하고는 또 시체를 지고 온 은덕에 감사하여, 장사한 후에 술과 과실을 약간 갖추고 두 사람을 초청하여 사례하고자 하니, 두 사람은 끝내 마다하면서,

“우리들은 대접을 받기 위하여 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한 끼 밥이라도 신세를 진다면, 당초에 서로 돌보던 뜻이 헛되게 됩니다.”
하고, 마침내 가지 않았다. 상사(上舍) 함시화(咸始和)가 나를 보고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 모재(慕齋) 선생은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하여, 기묘 제현(己卯諸賢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영수(領首)가 되었다. 평생을 성실(誠實)을 주로 하여 학문을 하였고, 일에 대처함도 확실하여 소홀하지 않았다. 기묘 제현이 배척되어 죽음을 당한 후에 공도 또한 파직되어, 여흥(驪興) 이호(梨湖)에 물러가 살았다. 정자 두어 칸을 지어 범사정(泛?亭)이라 이름하고, 20년 동안을 가난하게 살면서,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기를 일삼았다. 그리하여 경서(經書)를 가지고 의심되는 곳을 묻는 사람이 먼 곳에서 왔다. 무릇 여러 가지 노래와 시에, 경물(景物)을 보고 뜻을 붙인 것은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그리워한 뜻이 아닌 것이 없었다.
만년에 조정에 돌아와서 드디어 대제학을 맡았는데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초안을 잡을 때에는 홀로 서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고서 정신을 모아 연구하고 생각하면서 여러 날을 신음한 다음에 탈고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글은 전아(典雅)하고 명쾌하여 중국 조정에서도 칭찬하였다. 후일 그 임무를 이은 자들은 학력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지성으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어서, 막대한 천조(天朝 중국 조정)에 올릴 표문(表文)을 짓는 것도 평범한 일로 생각해 가볍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인재가 나날이 수준이 낮아지고 문장도 예전과 같지 못하다.
○ 정(鄭) 문익공(文翼公 정시귀〈鄭蓍龜〉)은 소인들의 모함을 받아, 파출(罷黜)되어 회덕현(懷德縣)에 있었는데, 조석 반찬도 갖추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하루는 관인(官人)이 앞산에서 사냥을 하는데 죽음에서 벗어난 사슴이, 공이 우거(寓居)하는 집 울타리로 뛰어들었다. 자제들은 하늘이 내는 것이라 하여 함께 쫓아 잡아서, 찬을 만들어 드렸다. 고을 원이 알고서,

“죄인이 진상(進上)할 물건을 훔쳐 먹었으니, 또한 죄가 있다.”
하고, 관차(官差)를 보내 그 사슴을 내놓으라며 문간에서 독촉하였다. 그러나 산에 가서 잡을 수 없고, 시장에 가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온 집안이 허둥지둥 어찌할 줄 몰랐다. 그 때 마침 공의 친족으로서 이웃 고을에 원으로 있는 자가 우연히 사슴 한 마리를 보내와서 독촉하는 사람을 따라가 관가에 바치고, 원의 분노를 풀게 하였다. 그후 공이 조정에 돌아왔는데, 조정에서 이 일을 알고 그 원을 관직에서 쫓아내려 하였다. 공은,

“문음(門蔭)으로서, 권세잡은 사람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입니다. 또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며, 그의 본정은 아니므로, 심하게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여, 다시 관직에 서용(敍用)되도록 힘껏 변호하였으나, 끝내 되지 않았다.
○ 정 문익공은 덕망이 온 세상을 뒤덮었으나, 김안로(金安老)만은 미워하여, ‘희릉(禧陵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을 옮겼다.’고 하였으니, 오로지 공을 죽이기 위한 발언이었다. 온 조정이 중형(重刑)으로 처단하도록 다투어 청하니, 중종은 여러 신하를 대궐 뜰에 모아놓고 각자 의논을 드리게 하였는데, 한두 신하 외에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중종은 특별히 용서하여 김해부(金海府)로 멀리 귀양을 보냈다. 김해부는 동래군(東萊郡)과 경계가 맞닿는 곳이었다. 그 고을은 공의 본관(本貫)으로, 시조의 무덤이 있었다. 공은 술과 과일을 간단하게 갖추어 자제들을 시켜, 가서 성묘하게 하였다. 그때에 무부(武夫)로서 동래 현령이 된 자가 이 소문을 듣고, 김안로에게 잘 보이고자 하여 큰 소리로,

“정모(鄭某)는 죄를 짓고서 귀양왔으니, 이는 곧 서인(庶人)이다. 그 부모에게만 제사하는 것이 옳은데, 어찌 그 자제들을 보내서 지경 너머에 있는 먼 조상에게까지 제사를 지내느냐?”
하고, 건장한 군졸을 많이 출동시켜 몽둥이를 휘두르며 몰아내어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공의 자제들은 할 수 없이 경계 위에서 무덤 쪽을 바라보며 제사지냈다. 현령은 또 ‘향소(鄕所) 등도 죄인과 마음이 같아서 그의 자제들을 보호하였으니, 그 죄 또한 무겁다’ 하고, 다른 일로 죄를 얽어, 관문(關文)을 경재소(京在所 서울에 둔 각 고을의 출장소)에 보내, 그 직임을 갈도록 청하였다.
그해 겨울에 김안로가 죽음을 당하고 공은 조정에 들어와서, 다시 경소 당상(京所堂上)이 되었는데, 동래 현령이 죄를 논란한 관문이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공은 성주(城主 원)의 관문을 오랫동안 체류(滯留)시킬 수 없다 하여, 곧 그가 지적한 대로 소임을 갈아 보냈다. 현령의 간사함이 회덕(懷德) 원보다 심하였는데도 공은 말이나 얼굴빛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고, 자제들도 또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몰랐다. 그 현령은 품계(品階)가 높아져서 승진하였고 끝까지 관직을 보전하였으니, 공의 훌륭한 덕은 참으로 따라갈 수가 없다.
○ 전림(田霖)은 국조(國朝 조선)의 유명한 장수이다. 성품이 과감하여 지나치게 굳세었다. 그러나 조촐한 절조가 세상의 으뜸이었고, 경서(經書)와 역사서에도 넓게 통하였다. 젊었을 때에 두세 동무와 함께 절에 올라가서 《송사(宋史)》를 읽었는데, 진회(秦檜)가 거짓으로 조서(詔書)를 꾸며 군사를 소환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분함을 능히 참지 못하여서, 활과 화살을 가지고 창을 밀치며 나가서, 사미승에게 쓴 건(巾)을 벗어 절 문간 위에 걸어두게 한 다음 활을 힘껏 당겨서 화살 두 개를 잇달아 꿰어 맞혔다. 도로 돌아와 앉으면서,

“지금 역적 진회의 골을 깨고 나니, 조금은 시원하다.”
고 말하였다. 그의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와 악을 미워함을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다.
○ 사재(思齋) 선생이 또 황모(黃某)에게 부친 편지는 다음과 같다.

“그대가 살림 모으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내가 서울에서 들었소.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그만 정지하고 고요하게 살면서 천명(天命)에 순응(順應)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70살이면 상수(上壽)이니, 가령 나와 그대가 상수를 누린다 하여도 남은 것은 불과 10년인데, 무엇 때문에 마음을 수고롭혀 가며 말 많은 자들의 욕을 먹는 것이오? 내가 20년을 빈곤하게 사는 동안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지(田地)를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이 각 두어 벌 있었으나, 눕고서도 남은 땅이 있고 옷을 입고서도 여벌 옷이 있고 주발 밑바닥에 남은 밥이 있었소.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세상을 편하게 지냈소. 비록 넓은 집 천 칸과, 옥같은 곡식 만 섬과 비단옷 백 벌을 보아도 썩은 쥐같이 여겼고 이 한 몸 살아가는 데에 여유가 있었소.
듣건대, 그대가 입고 먹고 잠자는 것이 나보다는 더 좋다 하는데, 어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 것이오?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서적(書籍)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바람 통할 창 하나, 햇볕 쪼일 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하나, 늙은 몸을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이오. 이 열 가지는 비록 번거롭기는 하나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오. 늘그막을 보내는 데에 있어 이 외에 더 무엇을 구하겠소? 분주하고 고단한 중에도 매양 자연과 벗하는 열 가지 재미가 생각나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오만, 몸을 빼낼 술책이 없으니, 어찌하오. 오직 나의 지기(知己)만은 알아주기 바라오.”
○ 신기재(申企齋 신광한〈申光漢〉)는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기묘년(1519, 중종 14)에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었고, 정승 상진(尙震)은 상재색장(上齋色掌)으로서 명륜당(明倫堂)에 출입하고 있었다. 여러 현인이 배척을 당하고 죽음을 받을 때에 공도 또한 벼슬이 좌천되어 실직부사(悉直府使 실직은 삼척임)가 되었다가 곧 파출(罷黜)되어, 중원(中原 충주의 옛 이름) 달천(達川)에 물러가서 20년을 지냈다. 상공(尙公)은 기묘년 겨울에 과거에 올랐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명종 16)에 이르러 김안로가 죄를 당하자, 무술년 봄에 공은 조정에 돌아와서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 상공은 그때에 호조 참판으로 있었는데 길에서 서로 만났다. 초헌(?軒)을 몰아, 공의 말앞에 와서 공에게 이르기를,

“영공(令公)께서 나를 모르시오? 나는 기묘년에 색장이었던 생원 상진이오.”
하였다. 공은,

“그렇소? 지금 그대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귀양에서 살아남은 목숨이 옛날의 얼굴을 어찌 기억하겠소?”
하고, 서로 읍한 다음 지나갔다. 벼슬길의 번복은 예부터 그러하니, 적신(積薪)의 비유가 또한 알맞지 않은가?
○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벼슬시킬 적에 사람을 가렸으므로, 비록 심상한 벼슬아치라도 모두 그 직에 합당한 사람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어진이를 빠뜨리고 관직을 소홀히 하는 근심이 없었다. 광묘(光廟 세조) 이후에는 공을 숭상하고 덕은 숭상하지 않았지만, 정승을 제배(除拜)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감히 경솔하게 제배하지 않았다. 중종 초년은 비록 연산군의 혼란을 겪은 뒤였지마는 반드시 한 시대의 신망을 받는 사람을 가렸다. 그때에 정승 자리가 비자, 여러 사람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누가 정승이 될 만한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신공 용개(申公用漑)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문익공(文翼公)을 돌아보면서,

“조정 신하 중에 아저씨만한 사람이 없으니, 아저씨가 반드시 승진될 것입니다.”
하더니, 문익공이 과연 승진되었다. 신용개는 문익공의 척질(戚姪)이었다. 그후에 정승 한 자리가 또 비자, 또 처음과 같이 묻는 사람이 있었다. 신용개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천천히 말하기를,

“나만한 사람도 없으니, 내가 반드시 하게 되리라.”
하더니, 신용개도 또한 승진되었다. 여기에서 어려워하고 조심하여 반드시 가리던 뜻을 알 수 있다. 근세 이래로는 비록 정승을 뽑는 명목은 있으나, 정승을 뽑는 실상은 없다. 오직 관직 품계가 그 차서에 닿으면 되는 것으로 여겨, 일반 벼슬자리가 빈 것같이 여기니, 다른 일이야 알 만하다.
○ 반역(叛逆)은 천하에 큰 죄악으로,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먼저 발견하여 변(變)을 알린 사람에게 논공(論功)할 적에 후하게 상을 줌이 비록 토지를 나누어서 봉한다 하여도 법으로 볼 때 당연하고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추국(推鞫)한 관원에 있어서는, 다만 여러 사람의 초사(招辭)에 따라 캐어물어 하나로 귀착시킨 다음, 위에 아뢰어서 죄를 정할 따름이니,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음이 발견되지 않는다. 만약 추국하는 관원이 죄인의 비밀을 잘 밝혀내고 숨긴 것을 잘 끄집어내는 것을 공이라 한다면 지금 죄상이 잘 드러나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은 논할 것도 없지만, 만약 후세에 불행히 의심스러워 밝히기가 어려운 일에 모함을 당한 사람이 끼어 있다면, 어찌 옥(玉)인지 돌인지를 가릴 수가 있겠는가? 상 받으려고 한 짓이라고 하여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근래의 일은 또 이와 같지 않다. 역적은 외부에서 일어나고 고발한 자는 내부에 있는데, 추국하는 관원이 다만 예에 따라 참석하여도 모두 논공하게 되며, 금부 옥졸(禁府獄卒)도 형장(刑杖)을 잘 쳤다는 것으로써 상을 받기도 한다. 세정(世情)에 어두운 선비의 못난 소견으로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왕자(王者)의 정사가 아닌 듯하다.

○ 고려는 5백 년이나 오래된 나라이다. 만 가지 조목이 비록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선조(先祖)의 법은 그대로 지켜, 감히 분수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못하였다. 가사(家舍)에 대한 한 가지 일로 말하건대, 말엽에 국력이 쇠하여 장차 망하게 되어서도 임견미(林堅味)같이 권세를 지니고 신돈(辛旽)과 같이 간악하여 극도로 호사를 부리던 자들도 그들의 집이 굉장하거나 화려하지가 않았던 것은, 아직도 국법(國法)을 두려워해서였다. 우리 나라는 세운 법이 더욱 엄하여 위로 공경에서 아래로 서인까지 가사(家舍)의 칸 수에 모두 일정한 제도가 있었다. 혹 정해진 분수를 넘을 것같으면, 한성부(漢城府)에서 가끔 순찰하고 제도를 어기고 더 지은 수는 허물어 버렸다.
나의 외삼촌 원 상사(元上舍 상사는 진사의 별칭임)의 집이 인왕산(仁旺山) 밑 내섬동(內贍洞)에 있었다. 그 집 칸 수를 지금 생각해 보면 많다 할 것도 없는데, 가정(嘉靖) 병신년(1536, 중종 31) 무렵에, 정해진 칸 수 이외의 것이라 하여 여러 차례 철거당했으니, 국법이 그때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중엽 이래로는 나라에서 능히 금하지 못했고, 사람들도 법을 꺼리지 않았다. 구름같은 처마가 골목에 자리하고 있고 큰 집이 길에 우뚝하게 서 있어 공경의 집이 궁궐과 비길 만하였다. 서인의 집은 관청 집같아 분수를 어기고 제도를 넘는 것이 끝이 없었다. 그러다가 임진년 왜적의 난리에, 도성(都城) 안 크고 작은 집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부서진 기와와 흩어진 주춧돌이 눈에 띄는 것마다 모두 참혹하였다. 물(物)이 성한 다음에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 관상감 정(觀象監正) 이번신(李?身)은 나의 선조 문렬공(文烈公)의 서증손(庶曾孫)이며, 할아버지 한성군(韓城君)의 종제(從弟)이다. 음양ㆍ지리(地理)ㆍ복서(卜筮)ㆍ술수[數學]ㆍ율려(律呂) 등 학문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천문(天文)에 대해서는 더욱 정통하여, 그가 말한 바는 모두 징험이 있었다.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1567~1572) 연간에 나의 집에 왔다가 천문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다. 내가,

“천문에 관한 말은 미묘하여 알기 어렵습니다.”
하니, 공은,

“어찌하여 알기 어렵다 하는가? 재앙과 상서란 모두 인사의 선악과 기수(氣數)의 굴신(屈伸)에서 감응(感應)하는 것으로 밝게 보이는 것이 매우 엄하고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데, 다만 사람들이 살피지를 못할 뿐이다.”
하여, 내가 말하기를,

“모재 선생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나라는 천하를 놓고 본다면, 금천(衿川 과천〈果川〉의 고호)이 동방(東方 우리 나라)에 있는 것과 같다. 하늘은 반드시 금천 때문에 상서나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실언(失言)이라 하여 선비들에게 나무람을 받았습니다. 이 말이 어떠합니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해와 달이 기울고 일식, 월식이 있는 것은 비록 이와 같이 말해도 오히려 가하거니와, 분야(分野)에서 별들의 도수가 잘못 되는 것과, 아침과 낮에 구름과 안개가 이상스레 탁한 것은, 다른 나라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니, 매우 두려운 일이다.”
하였다. 나는,

“지금 천문의 역(逆)과 순(順)은 어떠하고, 후일에 응할 길흉(吉凶)은 어떠합니까?”
하니, 공이 한참 동안 찡그리더니,

“화가 닥치는 고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재앙이 닥치는 고비라는 것은, 변방에 문제가 생겨, 성이 함락되고 군사가 무너지는 근심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변경 지역이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러웠다 안정되었다 하고, 이기기도 하고 패하기도 하는 것은 어느 나라인들 그렇지 않으랴? 이것을 두고 재앙이 닥쳐오는 고비라고는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렇다면 조정에 간신이 죄를 교묘하게 얽고, 서로 다투어서 선비들을 다 타도하는 재앙이 있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그라지고 늘어남은 벼슬아치들의 보통 있는 일이요, 나라를 가진 자로서 능히 면치 못할 바이니, 이것을 두고 재앙이 닥치는 고비라 할 수는 없다.”
하였다. 나는 비참하여 말하기조차 어려웠다. 다시 묻기를,

“그 징험이 어느 때에 나타나겠습니까?”
하니, 공이 답하기를,

“천체(天體)가 지극히 무겁고, 느낌을 쌓은 지 벌써 오래이니, 그 노여움을 나타내는 것을 아침 저녁도 기약하기가 어렵다. 가까우면 20년 지나서이고, 멀어도 30년 안에는 화가 닥치는 고비가 다가올 것이니, 사대부로서 턱없이 나서고자 할 때가 아니다.”
하였다. 나는 공의 말을 마음에 간직하여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다. 그후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 22)에 옥사(獄事)가 일어나 그의 말이 비로소 징험되었다. 그리고 임진년 왜적의 난리에 대가(大駕)는 서쪽으로 가고 종묘사직은 빈 터가 된 다음에 그의 말이 더욱 징험되었다. 하늘의 꾸지람이 이와 같이 두렵다. 또한 공이 추보(推步 천체의 운행을 관측함)를 잘한 것도 지금에야 알 수 있다.
○ 중국 과거의 제도를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3년만에 보이는 대비(大比) 외에 특별히 과거를 보이는 법은 전혀 없다. 외방 각도(各道)의 초시(初試)는 자ㆍ오ㆍ묘ㆍ유(子午卯酉)가 드는 해에, 경사(京師)의 회시(會試)ㆍ전시(殿試)는 진ㆍ술ㆍ축ㆍ미(辰戌丑未)가 드는 해에 보인다. 연월일도 조종조에서 한번 정한 후로는, 비록 국가에 큰 연고가 있어도 당기거나 물리지 않고, 뽑는 수효도 또한 전일에 정한 것이 있다. 지금 2백여 년이나 오래되었으나 예전 법규를 그대로 지켜, 조금도 흔들리거나 고침이 없다. 이것은 중국이기에 될 수 있는 것이었고, 좁고 작은 외국으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 내가 만력 기묘년(1579, 선조 12)에 중국으로 가던 날, 노소재(盧蘇齋) 상공(相公)이 나에게,

“금년은 순천부(順天府)에서 과거 보이는 해이니, 그 형식과 조목을 상세하게 알아 오시오.”
하였다. 나는 8월 초에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다.
26일에 순천부 방목(榜目)을 얻어보니, 과거본 사람의 수효가 1백 35명인데, 첫째로 뽑힌 사람은 이름이 풍가우(馮加遇)로서 직예성(直?省) 백향현(柏鄕縣) 학생이었다. 각자 전공한 경서를 이름 밑에 기록하였는데, 《시경(詩經)》 53명, 《역경(易經)》 39명, 《서경(書經)》 28명이고, 《춘추(春秋)》는 9명, 《예경(禮經)》은 6명이었다.
역관(譯官)을 시켜 시험하는 규칙을 서반(序班)에게 물어보니, ‘소속된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에 과거보는 사람이 정해진 수효가 있는데, 그들을 모아 다시 가려낸 다음, 시정(試庭)에는 각각 한 칸씩 되도록 미리 대자리로 둘러서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한다. 그 안에는 붓ㆍ벼루ㆍ종이와 그 사람이 먹을 떡ㆍ차 따위 물품을 고루 갖추어 두는데 소변 그릇까지 함께 둔다. 시험하는 날 새벽에는 하나하나 수색하여 유생은 홑옷과 빈손으로 들어갔다가 문제에 해답을 쓴 다음 나온다. 초장(初場)에는 오경(五經) 및 사서의의(四書疑義)를, 중장(中場)에는 논문(論文)과 표문(表文)을, 종장(終場)에는 대책(對策)을 시험하는데, 모두 이틀 간격으로 본다. 본월(本月) 9일, 12일, 15일 해서 삼장이라.’는 것이다. 서반의 말이 이와 같았고, 딴 사람에게 물었으나 대개 이와 같았다. 초시 및 회시ㆍ전시에 관한 규칙은 들을 길이 없으니 한스럽다.
○ 우리 나라에서 과거로 사람을 뽑는 제도는, 삼국 때는 물을 필요도 없고, 고려도 5백년이나 오래된 나라여서 그 처음은 자세하게 알지 못하며, 중엽 이후 다만 3년만에 한 번씩 33인을 뽑는 외에 또 다른 과거는 없었다.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전조(前朝 고려)의 규칙에 의하여 식년(式年)에 33인을 시험해서 뽑는 규칙이 있었는데, 그때그때 뽑으므로 당기기도 하고 물리기도 하여 처음부터 정해진 날짜가 없었다. 영묘(英廟 세종) 때에 이르러서 문학을 숭상하여, 비로소 학궁(學宮 성균관)에 거둥하여 제술(製述) 시험을 치르고 몇 사람을 뽑아, 홍패(紅牌)를 하사하였다. 이뒤부터는 드디어 특별 규정이 되어서 점점 성하게 되었고, 연산 및 중묘 때에 와서는 극도로 범람하였다. 명종조에 또 점수를 주고 과시(科試)에 나아가게 하여 그 점수를 통계하는 규칙이 있어, 혹은 바로 회시(會試)에 나아가게 하고, 또는 바로 전시(殿試)에 나아가게 하였다. 식년시(式年試) 외에도 별시(別試)ㆍ행학(幸學)ㆍ정시(庭試)라는 명목으로 혹 행사에 따라 거행하기도 하고, 혹은 예(例)를 들어 베풀었다. 봄ㆍ가을에 각각 거행하기도 하고, 한 달에 두 번 거행하기도 하며, 혹 해마다 특별히 베풀고, 혹은 한 해에 세 번이나 거행하기도 하였다. 사방에 알리지 않으며 많은 선비를 모으지도 않고, 오직 표문ㆍ전문(箋文) 두어 문구(文句)를 한정된 시간 안에 짓게 하는데, 이를 촉각(燭刻) 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루 동안에 문득 높은 과거에 오르게 되니, 요행을 바라는 문이 활짝 열렸다. 선비들은 모두 분주하게 짧은 글귀를 뽑아 외워서 높은 벼슬을 도모하게 되어 3년만에 보이는, 경서에 통하고 글을 제술하던 대비(大比)의 법도가 점차 예전 같지 못하였다. 정시의 방을 낸 뒤에 보면, 모두가 벼슬아치의 나이 어린 자제이고 시골에서 학문을 깊이 연구한 무리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아! 지금 본다면 전조 때에는 과거가 매우 드물어, 어진 인재가 많이 빠졌을 터인데도, 유명한 공경(公卿)과 웅대(雄大)한 문필가가 모두 과거를 통해서 나왔다. 우리 조정에 와서는 과거가 매우 잦았으니, 어진 인재가 무리지어 나올 듯한데, 재주가 빛나고 덕이 있는 선비는 거의 없으며, 여염집과 시골에 사는 사람으로 문채가 빛나서 등용(登用)할 만한 사람이 빠져 있는 탄식을 면치 못한다. 과거는 더욱 번거로우면서도 선비의 풍습이 더욱 경박해지고, 인재는 날이 갈수록 수준이 떨어지니, 진실로 한스럽다.
○ 국가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방법은 문과ㆍ무과 두 과거를 통해서 출신(出身)한 사람 외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는 선인(選人 뽑힌 사람)이라 해서 임용(任用)하고, 효자이거나 순손(順孫)한 사람과 문학ㆍ덕행이 있는 선비는 유일(遺逸)이라 하여 천거하게 한다. 관리(官吏)까지도 합당한 사람은 해조(該曹)의 천거에 의해, 재주를 시험하고 합격한 다음에 가려서 서용(敍用)한다. 까닭에 씨족 관계가 분명하지 못하거나 문벌이 비천한 자는 동ㆍ서반(東西班) 정직(正職)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명종 때에 이르러서는 심의겸(沈義謙)과 이이(李珥)가 함께 국론(國論)을 맡아 어진이를 등용한다는 핑계로 문음(門蔭)으로 뽑는 규정을 만들어, 오직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마음대로 등용하니, 조종의 옛 제도가 크게 바뀌고 벼슬길도 점차 혼잡하여졌다. 지금은 또 왜적의 난리를 겪음으로 인해서, 시골에 사는 미천한 자와 항오(行伍)를 따르던 뭇 졸개와 관부(官府)의 하예(下?)와 공사(公私)의 서얼(庶孼)도, 혹은 의병이라 하여, 혹은 군공(軍功)이 있다 하여, 혹은 양식을 바쳤다 하여, 혹은 전쟁에 나가 죽은 사람의 자손이라 하여, 혹은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한 사람의 자제(子弟)라 하여, 어질고 어리석음을 묻지 않고 각사(各司)에 서용(敍用)하여 동료(同僚)끼리 손가락질하고 전복(典僕)이 업신여기며, 상하가 서로 능멸하여 일에 체계가 서지 않으니, 이것도 쇠망하는 형상의 하나이다.
○ 옛말에, 실상은 없으면서 그 말만 전해 오는 것이 있으니, 야다시(夜茶時)같은 것이 이것이다. 전중(殿中 옛날 전중어사〈殿中御史〉로 감찰〈監察〉을 뜻함) 관원도 모두가 대관(臺官)인데, 본부(本府)에 출사(出仕)하지 않는 날에는, 대장(臺長)으로서, 성상소(城上所) 를 맡은 자가 여러 전중을 한곳에 모아서 대관을 분간만 하고 파하는 것을 다시(茶時)라 한다. 차를 마시고 그만 파한다는 말이다.
○ 조종 때에, 재상이나 혹 낮은 벼슬아치로서 간사하거나, 부세(賦稅)를 많이 거두어서 백성을 해치거나, 재물을 탐내어서 깨끗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여러 전중이 야다시(夜茶時)를 이용하여 그 사람의 집 근처에서 그 탐악(貪惡)함을 조사하고 흰 판자에다 적어서 그 집 문위에 걸었다. 그리고 가시덤불로 그 집 문간을 막아서 굳게 봉하고 봉한 것에 표시를 한 다음에 물러갔다. 그러면 그 사람은 드디어 세상에서 버림받아, 다시는 의관 반열(衣冠班列)에 참여하지 못하고 영구히 버려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까닭에 갑자기 공격하는 환란을 당하는 것을 ‘야다시’라 하는데, 이 말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쓰인다.
○ 감찰(監察)은 옛날 전중어사(殿中御史)로서, 온 관료(官僚)를 규찰(糾察)한다. 그래서 자기의 처신(處身)이 반드시 검소한 다음이라야 남의 재물 탐내는 것과 분수에 넘치는 짓 하는 것을 책망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추한 옷을 입거나 더러운 얼굴을 한 사람과 둔(鈍)한 말에 망가진 안장을 한 사람과 짧은 모자, 해진 띠를 맨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전중인 줄을 알게 된다. 고려조에는 어떠했는지는 미록 상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1백 70여 년이란 오랜 기간, 아무리 귀족의 자제와 유명한 문사라도 전중이 되기만 하면, 그 복색(服色)은 예전 규칙을 그대로 지키고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다.
명종 말년 무렵에 와서는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인심이 사치하여졌다. 더럽고 추한 것을 싫어하고 사치하기를 좋아하여 전중들까지도 모두 복색을 바꾸겠다고 청원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 심의겸(沈義謙)ㆍ박순(朴淳)ㆍ박응남(朴應南) 등이 당시의 논의를 가지고서, 드디어 그들의 소원에 따라 고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전중의 복색 제도가 시종(侍從)의 복색보다 몇 배나 더 화사하고 선명해졌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상대(霜臺 사헌부)의 옛 풍습이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존양(存羊)의 뜻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아!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는 것은 국정 중에 큰 것인데, 위에 아뢰지도 않고 여러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스스로 고쳐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권신(權臣)의 방자하며 꺼림 없음이 이와 같으니, 그들의 행위가 참으로 두렵도다.
‘양한적(養漢的)’이라는 명칭이 중국에서는 유행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없다. 대개 중국의 양한적이라는 것은 특히 항산(恒山)ㆍ대산(岱山)의 옛 풍습에서 나온 것인데, 당초부터 금수같은 행실을 즐겨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길러주는 부모가 없고 의탁할 만한 친척이 없으므로, 추위와 굶주림에 부대끼다가, 서로 모여서 머리 빗고 화장하고 남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계책을 삼은 데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각자가 본남편이 있고, 또한 높고 낮고 헐하고 중한 값이 있어, 남편이 허락하지 않거나, 값이 자기에게 적당하지 않으면 또한 서로 관계를 맺지 않았으니, 오히려 저들이 우리보다 낫다. 우리 나라에는 비록 양한적이라는 명칭은 없으나, 음탕한 풍습은 크게 성하여, 길가에 있는 관창(官娼)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집의 여종과 여염집의 천한 계집으로서 음란한 짓을 일삼는 자는 값이 있건 없건 사람이 귀하건 천하건 밤낮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취한 듯 미친 듯하여, 그 하간(河間)의 계집이 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다. 이것을 보면, 우리 나라의 음탕한 풍습이 중국보다 심하다 하겠다. 남의 윗사람이 되어 교화하는 권리를 잡은 자는 막아내는 대책을 세우는 데 태만해서야 되겠는가?
○ 나라 풍속에 대변(大便)과 소변(小便)을 대마(大馬)ㆍ소마(小馬)라 한다. 나는 이 말이 무슨 일과 관련된 것이며, 어느 때에 나온 것인지 몰랐다. 그런데 우연히 《양산묵담(兩山墨談)》을 열람하다가, ‘귀빈(貴嬪)의 집에서 오줌 그릇을 만들 때에, 복판은 비게 하고 말 모양같이 굽게 한다. 등 위에 구멍이 있고 그 등에 걸터앉아서 변을 보는데 이것을 「수자(獸子)」라 한다.’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다음에야 비로소 그 말이 중국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고, 똥을 누면서 마(馬) 본다는 것도 또한 의심이 없었다. 우리 나라에서 ‘마요(馬腰 마렵다는 말)’라고 하는 것도 또한 ‘수자’와 관련해서 한 말이었다.
○ 성종 때에 재상 이영은(李永垠)ㆍ이곤(李坤) 두 사람은 한 창기(娼妓)를 함께 관계하고는 서로 빼앗게 되었다. 언관(言官)이 그들의 죄를 논란하여 파직하기를 청한 지 여러 날 되었으나, 성종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궐에 나아가 스스로 변명하는데, 서로에게 허물을 돌리고 각자 옳다고 하면서 두세 번 아뢰었다. 성종이 비답하기를,

“옛부터 사대부끼리 서로 처첩을 훔치는 것은 망해 가는 세대의 일이었소. 나는 이 세대를 차마 쇠망하는 세대로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대간(臺諫)의 말을 윤허하지 않는 것이지, 경등에게 죄가 없어서가 아니니, 물러가서 반성하시오.”
하였다. 여기에서 그때 임금과 신하 사이가 부자간 같을 뿐만이 아니었으며 성주(聖主)의 한 말씀이 도끼로 베어 죽이는 것보다 더 엄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극하여라.
○ 양 남원(梁南原 남원은 지명으로, 양성지〈梁誠之〉의 봉호 남원군(南原君)을 가리킴)은 성묘(成廟) 때에 오랫동안 풍헌(風憲)을 맡았는데, 그는 돈을 밝히는 버릇이 있었고 꿋꿋하게 바른 말을 하는 절조가 없었다. 하루는 연석(宴席)에서 성종이 양성지에게 이르기를,

“경은 법관(法官)이 된 지 8년이나 되었으나 나를 향해 한번도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적이 없어, 나는 매우 장하게 여기오.”
하였다. 성주가 한 마디 풍자로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뜻이 깊다.
○ 조종조에 관(官)을 설치하고 직(職)을 분담시켰는데, 관은 통제하는 바가 있고 직은 맡은 바가 있었다. 6조(曹)는 정부의 통제를 받고 각사(各司)는 6조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관원이 많아서 맡기고 부리는 것은 예비 없음을 염려하지 않았으니, 만약 길사(吉事)와 흉사(凶事)ㆍ군사(軍事)와 빈객에 관한 일이 있으면 해조(該曹)가 소속 각사를 거느려서 책임지고 완성하였다. 큰 일이면 입계(入啓)하여 왕지(王旨)를 받고, 작은 일이면 대신(大臣)에게서 결정하였다. 전적으로 위임을 하여 각각 그 직에만 전력하게 하였으므로, 기강이 문란하지 않고 다스림도 질서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태평한 날이 오래되니, 안일한 것이 버릇이 되어 사물(事物)을 밝히는 정사는 나날이 없어지고 겉치레만 꾸미는 절차가 점점 번거로워져, 조금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다. 난리를 겪은 후로는 기율이 없어져서, 온갖 법도(法度)를 새로 만들기 시작하여 해사(該司)에 책임지우지 않고 새 관청을 설립하기에 힘썼다. 군공(軍功)ㆍ양향(糧餉)ㆍ모속(募粟)ㆍ복수(復讐)ㆍ훈련(訓鍊)ㆍ청용(廳用)ㆍ포수(砲手)ㆍ염초(焰?)ㆍ주성(鑄成)ㆍ안집(安集)ㆍ둔전(屯田) 등 한때 도감이 여러 가지여서 다 기록하기도 어렵다. 모두 1품(品) 아문(衙門)으로 불렸으며, 관청을 설치한 것이 많을수록 일은 더욱 계통이 서지 않아 그럭저럭 날만 보내니, 누가 허물을 잡고 일의 성과가 있도록 책임지려 하겠는가? 회복될 기일이 더욱 멀어져 가니, 어찌 인사(人事)가 극진하지 못한 것이 실로 천운(天運)이 이르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통분해 한들 어찌하겠는가?
○ 평양 영귀루(詠歸樓)는 남쪽 성 함구문(含毬門) 밖 10 리 되는 지점에 있는데, 지나가는 곳에 정전(井田)하였던 터가 있다. 밭두둑과 도랑이 분명하고 동서로 뻗친 이랑과 종횡(縱橫)으로 뚫렸던 길이 모두 곧고, 비스듬하지 않아 정전의 모습과 제도가 완연히 남아 있다. 길 북쪽에 있는 민가(民家) 담 밖에 우물이 있는데 기자정(箕子井)이라 한다. 입구는 작고, 가운데는 넓은데 깊이는 측량할 수가 없다. 그때에 여덟 집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우물로서 없는 곳이 없었지만, 천 년을 지난 오늘날에, 어떤 것은 메워져도 쓸 수 없고, 어떤 것은 아직도 주민(住民)이 식수로 이용하고 있는데, 오직 이 우물만을 기자정이라 한것은, 기자가 이 우물을 설치하던 날에 고국(故國)을 떠난 시름을 한번 씻어버리고 유민(遺民)에게 존모를 받음이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내가 부(府)의 하리(下吏)에게 묻기를,

“정전 제도는, 도랑을 나누는 데 있어 반드시 크거나 작음이 없는데, 밭 모양이 어떤 것은 넓고 어떤 것은 좁은 것은 왜 그런가?”
하니, 하리는 대답하기를,

“때가 가고 해가 바뀌어서, 그 참모양이 점점 없어지는데, 더구나 경계를 수리하지 않아서 토호(土豪)가 침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에 간직된 문안(文案)에 기재된 결부(結負)의 경중(輕重)은 밭의 크기와 상관없이 하나같이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농부는 같은데 밭이 작은 자는 지금 밭두둑이 침범되었다는 송사를 합니다.”
하였다.
○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가, 시골집 서당에 도둑이 들어 벽을 뚫고 서책(書冊)을 다 훔쳐 갔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었다.

평생 사 모은 것이 겨우 천 권이니 / 平生購聚?千卷
공택 의 산방에 감히 비길손가 / 公擇山房敢擬乎
자취는 제법 양상군자 같구나 / ?迹頗同樑上賊
시서는 구중주도 아니거늘 / 詩書非是口中珠
배워서 몸 위하면 용서하지만 / 學之爲己猶相恕
팔아서 돈 만들면 어찌 우리 무리랴 / 賣以求財豈我徒
담과 문 조심 않은 연고이거니 / 不謹垣墉與??
집 지킨 종이나 벌을 주겠네 / 惟當深罪守家奴

○ 내가 전에 초록(抄錄)한 글 중에서 당시(唐詩) 오언 절구 한 수를 보았다.

다리에 임하거든 말에서 내리고 / 臨橋須下馬
길이 있거든 배 타지 말라 / 有路莫乘船
저물지 않아서 숙소에 들고 / 未暮先投宿
닭소리 들려도 하늘을 다시 보라 / 聞鷄更看天

이 시는 이학(李?)이, 멀리 가는 아들을 전송하면서 지은 것이다. 간절한 훈계가 어찌 이와 같이 두터울 수 있겠는가?
○ 운곡공(耘谷公 원천석〈元天錫〉)은 학문이 깊고 몸가짐이 곧았다. 젊은 나이에 아내 상(喪)을 당했으나,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후취(後娶)를 하지 않고, 첩(妾)도 두지 않고서 21년을 쓸쓸히 홀로 살면서 아이들이 장성하여 혼인할 때까지 기다렸다. 도를 지키고 궁함을 견디는 군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어미 잃은 아이들이 눈앞에 있어 / 失母兒童在眼前
곤궁 속에 20여년 분수를 지켰네 / 困窮知分卄餘年
시렁 위에 쌓아 둔 천 권 책을 의지했고 / 但憑架上堆千卷
주머니에 일 전 없어도 운명에 맡겼네 / 也任囊中欠一錢
늙기까지 새 살림 장만하지 못했는데 / 到老不成新活計
죽게 되어 옛 인연 공연히 생각하네 / 殘生空憶舊寅緣
혼인을 다 시켰으니 남은 한은 없어라 / 已終婚嫁無遺恨
이제는 편안하게 구천을 향할 수 있으리 / 方得安然向九泉
공이 아내 상을 당했을 때는 37세였다.
○판서 이현보(李賢輔)는 예안(禮安)에 살았고 호는 농암(聾岩)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외방(外方) 선비로서 조정에서 벼슬한 자가, 나이가 많아지면 물러가려는 뜻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당초에 먼 후일을 생각하지 않고 서울에서 자녀의 혼사를 치렀기 때문에 늘그막에 돌아가려 해도, 인정에 얽매이고 생각에 끌려서 능히 떠나지 못한다.”
하였다. 공은 조정에 있으면서 자녀의 혼사를 모두 같은 고을에서 치렀다. 나이 70이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에 돌아와서 자그마한 집을 짓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하였다. 자손이 많고 나이와 덕이 모두 높아 사람들이 모두 곽 분양(郭汾陽)ㆍ배 사도(裵司徒)라고 일컬었다. 인간의 즐거움과 임천(林泉)의 경치를 오래도록 편하게 누리다가 89세에 죽었다.
○ 이희보(李希輔) 선생은 자는 백익(伯益), 호는 안분당(安分堂)이고, 주계군(朱溪君)에게서 배웠다. 천성이 영리하고 총명이 뛰어나서, 책을 두루 읽고 기억을 썩 잘하여, 통하지 못한 글이 없었다. 신기재(申企齋 신광한의 호)ㆍ소 찬성(蘇贊成 이름은 세양〈世讓〉)ㆍ정호음(鄭湖陰 정사룡의 호)과 더불어, 당세에 이름을 나란히 했으나, 사람들은 유독 공을 박학(博學)하다 하였다. 이조 낭관이 되었다가 옥당(玉堂)을 거쳐, 당상으로 승진하였다. 중년에 운수가 불행하여 한직(閑職)에 눌러 있었으므로 오로지 후진을 훈도하는 것을 일삼아서, 공의 문하에서 수업한 선비 중에 학업을 성취한 자가 매우 많았다. 만년에 이르러, 조정에서 ‘사문 노성(斯文老成)으로 운수가 사나웠던 것이 가석하다.’고 아뢰어서, 특별히 가선(嘉善)에 승급되고 동지(同知)를 제수받았다. 나이 76세에 죽었다.
○ 전우치(田禹治)는 해서(海西) 사람이다. 배우지 않고서도 글에 능하며 시어(詩語)가 시원스러워 사람들은 모두 그가 도술(道術)이 있어서 귀신을 부린다고 말하였다. 현감 이길(李佶)은 전우치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이길의 전장(田莊)이 부평(富平)에 있었는데,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에 역질(疫疾)이 크게 성하여, 이길의 종과 이웃집 10여 인이 몹시 심하게 앓아 누웠었다. 이길이 전우치에게 병을 물리쳐 주기를 청하니, 전우치는 허락하면서,

“그 지역에 앉을 만한 높은 언덕이 있소?”
하고 물었다.

“숲에 앉을 만한 정자가 있소”
하니, 전우치는

“아무 날에 갈 터이니, 미리 정자에 좌석을 마련하고 기다리시오.”
하였다. 그날이 되어 전우치는 숲 밑에 앉아서 두어 마디 소리로 무엇을 부르는 것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온 이웃의 앓던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일어나 앉으며 일시에 ‘나았다.’ 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병이 나아서, 다시 전염되는 걱정이 없었다.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집현전 교리가 되었을 때이다. 휴가를 받아, 남쪽으로 돌아오다가 광산(光山)에서 방백(方伯)을 만났다. 방백은 공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그리고 세 젊은 기생에게 각자 잔을 잡고 앞에 나서게 한 다음에 공에게 스스로 고르라고 하였다. 공이 고른 기생은 이름은 승양비(勝楊妃)였다. 술이 오르자, 방백은 그 기생에게 전지(箋紙)를 가지고 시를 청하게 하였다. 공은 곧 붓을 휘둘렀다.

아름답고 가냘픈 양씨 딸보다 / ??楊家女
천 년 지나 네가 감히 낫다 하는가 / 千年汝敢優
쪽머리는 방장산 비인 듯하고 / ?述方丈雨
눈동자 굴리니 한궁의 가을일레 / 眸轉漢宮秋
처음엔 석 잔 술로 희롱하더니 / 初作三盃?
끝내는 한바탕 웃어 주노라 / 終成一笑留
호사자가 누굴 위해 / 誰爲好事者
청루에 승양비를 부쳐준 걸까 / 傳勝付靑樓

공의 여러 시가 정묘하고 화려하여 당시에 따라갈 만한 자가 드물었다.
○ 왕부(王?)는 《시경(詩經)》을 읽다가 ‘슬프고 슬프다 우리 부모여! 나를 낳아 기르느라 수고하셨네.’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세 번을 거듭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적이 없으니,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모두 육아편(蓼莪篇 시경의 편명)은 읽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간옹(艮翁)이 말년에 《소학(小學)》을 읽다가, ‘인생이 백 년을 살아가는 동안에 병들 적이 있고,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가 있다. 어버이가 이미 죽었으니 비록 효도하고 싶어도 누굴 위해서 효도하며, 자신이 이미 늙었으니 비록 우애하고 싶어도 누굴 위해 우애하랴? 그러므로 효도를 하려 해도 미치지 못함이 있고, 우애를 하려 해도 그때가 아님이 있다.’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모르게 책을 덮고 눈물 흘리고 종일토록 강개한 마음을 능히 스스로 진정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성현(聖賢)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킴이 또한 이와 같다.
○ 국상(國喪) 3년 안에는 풍악(風樂)을 그친다. 만약 왕후(王后)의 상이면 신하로서 기년복(朞年服)을 벗은 다음에도 풍악은 들을 수 있어도, 잔치하는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임금이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으므로 신하의 정의(情義)로 감히 그러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지금 우리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상이 기년은 비록 지났으나 상제(祥制)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 경성에서, 밖으로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히 풍악을 울리지 못하였다. 내가 출발한 후에 각 고을에서 접대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비록 해서(海西)와 기경(箕京 평양) 두 곳 방백의 간곡한 정으로도 오히려 색다른 것이 없었고, 상을 들 때나 술을 칠 때도 모두 작은 아이를 시켰다. 그러나 안흥관(安興館)에 도착하여 병사(兵使)와 고을 원과 만나 이야기하던 날 저녁에 비로소 기생이 있어 짤막한 노래로 술을 권하였다. 이 다음부터는 참(站)이 있는 곳에는 모두 여인(女人)이 나왔다. 신안(新安)에 이르니 노래와 북을 아울러 연주하였고, 용만(龍灣)에 이르자,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변경 지역이어서 풍교와 예법이 없고 풍속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까?
○ 옛날에 박효종(朴孝宗)이란 사람이 충주(忠州)에 살았는데, 힘이 몹시 셌다. 젊었을 때 일이다. 일가집에서 계집종이 문안차로 와서 기둥 주추 곁에 앉아 있었다. 박효종은 기둥 옆에 섰다가 한 손으로 가만히 기둥을 들고 계집종의 옷깃을 기둥 밑에 넣어서 눌러두었다. 계집종은 처음에는 모르고 있다가 돌아가려는데 기둥이 옷을 당기는 것이었다. 일어났다가는 다시 주저앉기를 두어 번 하고 나서는 귀신이 옷깃을 잡았는가 의심하여 당황해서 낯빛이 변하므로 주인되는 부인이 곧 효종을 불러서 풀어주게 하였다.
박효종은 평소에 개암[榛]과 잣의 껍질을 모두 두 손으로 비빈 다음 껍질을 불어버리고 먹었다. 박효종의 아들 박염(朴恬)도 힘이 뛰어나서 능히 백근짜리 활을 당겼다. 그런데 글자를 전혀 몰라서, 초시(初試)에서는 반드시 장원을 하였으나, 회시에서는 매번 낙방(落榜)했다. 마침 강서(講書)는 제외(除外)하는 별시(別試)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의심할 것도 없이 박염이 장원할 것이라 하여, 모두들 와서 축하해 주었다. 과거 날짜가 다가오자, 응시(應試)할 여러 사람은 새 줄과 강한 활을 박염에게 먼저 시험해 보도록 청하였다. 박염은 힘을 자랑하여 사양하지 않고 모두 시험했다가 과장(科場)을 개시할 때에는 두 팔이 붓고 아파서 약한 활도 능히 당기지 못하였고, 끝내 시험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천명(天命)이 없으면 인력으로는 취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 상공 이준경(李浚慶)은 엄숙 정직하고, 효우와 충신(忠信)이 천성에서 나왔으며, 말소리는 큰 쇠북같고 눈빛은 자색 번개같았다. 청렴하고 결백하여 공정하므로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으며, 학문이 해박(該博)하여 일을 만나면 즉시 결단하였다. 명종이 승하(昇遐)하던날, 왕비의 친척이 정권을 잡으니, 인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의젓하게 움직이지 않으니, 조야(朝野)가 믿어서 걱정하지 않았다. 본조(本朝)의 어진 정승으로서, 황희(黃喜)ㆍ허조(許稠)ㆍ정광필(鄭光弼) 외에는,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다.
○ ‘천 리를 지나면 풍기(風氣)가 같지 않고 백 리를 지나면 습속이 같지 않다.’는 것은, 예부터 전해 오는 보통 있는 말이다. 중국에 있어서는 평평한 언덕과 넓은 들이 사방으로 바라보아도 끝이 없어, 반드시 천 리를 지난 다음에 풍기가 같지 아니하고, 백 리를 지난 다음에 습속에 차이가 난다. 옛날 춘추(春秋) 13국이 숭상하던 바가 같지 않았음은 《시경(詩經)》을 상고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다. 천 리 되는 강이 없고 백 리 되는 들이 없다. 한 고을 안에도 높은 산이 겹쳐 있고, 큰 마을 안에도 강물이 서로 굽이쳐 있다. 산 안팎의 물맛이 한쪽은 짜고 한쪽은 쓰며, 강 남북쪽에도 풍기가 순하기도 하고 역하기도 하여, 곳곳이 다 그렇다. 풍기의 후하고 박함과 습성의 아름답고 악함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니, 백성의 풍속을 살피는 자는 마땅히 유의할 바이다.
○ ‘너[爾汝]’란 것은 가볍게 여기는 호칭이다. 이보다 더한 것은 또한 짐승으로서 부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중국은 인심이 순후하여, 내가 일찍이 사신으로 왕래하며 가는 길을 죽 보았으나, 감히 남에게 폭언(暴言)을 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 나라는 인심이 간사하고 완악하여, 예의(禮義)로 양보하기는 생각하지 않고, 거만하고 업신여기기를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자기와 뜻이 맞지 않으면 문득 이 자식 저 자식이라 부르고, 혹 남의 어미와 아내를 들어서 꾸짖고 욕한다. 심지어 아이들과 심부름하는 졸개들은 보통 하는 말에도 더럽고 나쁜 말을 못하는 소리 없이 한다. 기명(器皿)을 나무랄 때도 반드시 ‘이놈의 그릇’이라 하고, 마소에게 성이 나도 반드시 ‘이놈의 말, 이놈의 소’라 한다. 버릇이 성품으로 된 것이 이와 같으니, 예의의 풍속을 어찌 볼 수 있겠느냐? 내가 일찍이 선배에게 들으니, ‘이런 부끄럽고 나쁜 말이 조종조에는 전혀 없었는데, 연산군 말년과 정릉(靖陵 중종) 초년에 호남의 영광(靈光)ㆍ만경(萬頃) 지방에서 처음 나와서 사방으로 전해졌다.’ 한다.
○ 원성읍(原城邑) 서쪽 30리 밖에 안창관(安昌館)이라는 역관(驛館)이 있는데, 역관 남쪽에 강이 있고 강 동쪽에 산이 있다. 세상에서 건등산(建登山)이라 부르는데 왕건(王建)이 올랐던 산이라는 것이다. 한가운데가 높고 둘레가 커서, 새가 날개를 편 것같다. 그 위에는 넓고 평평하여 백여 명이 앉을 만하며, 찬 샘물이 있어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는, ‘고려 태조(太祖)가 태봉(泰封)에게 벼슬하면서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정벌하던 날에, 좌우 군사를 산 남쪽과 북쪽 들판에 머물러 두고, 이 산에 올라 기를 꽂았다.’ 한다. 고려는 5백 년이나 오래된 나라로 문물과 예법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시조의 이름을 피하지 않고 건등이라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민속(民俗)의 야비(野鄙)함이 심하기도 하다.
○ 원성(原城) 치악산(雉岳山) 동쪽에 각림사(覺林寺)가 있다. 처음에는 띠집 두어 칸이 숲속에 황폐하게 있었는데, 헌릉(獻陵 태종의 능으로 태종을 지칭)이 즉위하기 전에 오가며 머물렀다. 절 남쪽으로 3~4리쯤에 용추(龍湫)가 있고 그 위에 대암(臺巖 대바위)이 산에 기대어 서 있는데, 헌릉이 때때로 책을 끼고 바위 위에서 읊조렸다 한다. 등극(登極)한 후에 특별히 명을 내려 고쳐 짓게 하여 드디어 큰 절이 되었으며, 주민은 대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불렀다. 임진년 왜적의 난리에 절은 다 타서 없어졌으나 대바위는 우뚝히 서 있다.
○ 고려 말, 진사(進士) 원천석(元天錫)은 나의 외조부의 고조로 호는 운곡(耘谷)이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해박하였는데, 원주(原州) 변암촌(弁巖村)에 살았다. 고을 동북쪽 5리쯤에 영천(靈泉)이라는 절이 있었다. 현릉이 즉위하기 전에 이 절에 묵으면서, 공에게 자문(咨問)하여 공의 깨우침[啓沃]이 자못 많았다. 대개 평창군(平昌郡)은 목조(穆祖)의 외가(外家) 고을이고, 고비(考?)의 능(陵)이 삼척(三陟)에 있었으므로, 헌릉이 가끔 삼척에 왕래하였던 것이다. 헌릉이 즉위하자, 역말[驛馬]을 달려보내, 공의 안부를 물으니, 공은 죽은 지 벌써 오래였고, 공의 아들 원통(元?)이 있었다. 편전(便殿)으로 불러와서 특별히 기천 현감(基川縣監)에 제수하였으니, 성주(聖主)께서 스승의 옛 정을 잊지 못함이 이와 같았다. 절이 허물어진 지 몇 해 인지 모르나 세 탑은 지금도 오똑하게 남아 있다.
○ 영묘(英廟 세종) 때에 광묘(光廟 세조)는 아직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잠저(潛邸)에 있었는데, 길례(吉禮 혼인)를 치르기 전의 일이다. 처음에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언니와 혼인 말이 있어 감찰각씨[監察可氏]가 그의 집에 가니, 주부인(主夫人)이 처녀와 함께 나와서 마주 앉았다. 그때 정희왕후는 나이가 아직 어렸으므로 짧은 옷과 땋은 머리로 주부인의 뒤에 숨어서 보는 것이었다. 주부인이 밀어 들어가라 하면서,

“너의 좌차(坐次)는 아직도 멀다. 어찌 감히 나왔느냐?”
하였다. 감찰각씨는 주부인에게,

“그 아기의 기상이 범상치 않아 보통 사람과 겨눌 바가 아니니, 다시 보기를 청합니다.”
하고, 아름답게 여겨 마지않고 대궐에 들어와서 아뢰어 드디어 정혼 하였다. 각씨의 사람 알아보는 안목을 지금까지도 일컫는다.
○ 조종 때에 궁중 아기씨[阿只氏]가 피접(避接) 나가는 곳은 반드시 종실(宗室)이나 혹은 외족(外族)의 집이었다. 그러므로 여러 군(君) 및 옹주(翁主) 등이 피접하는 일을 여염 사람은 전연 몰랐다. 금상(今上) 때에 와서는 궁중각씨와 별감(別監) 등이 농간을 부려서 ‘아무 방위, 아무 지역이 가장 좋으니 아무날 아무 시에 아무 집으로 가는 것이 좋다.’ 하고 갑자기 사족(士族)의 집에 와서 바깥 문에다 표를 붙이고 그날로 당장 비우라고 독촉을 한다. 주인집은 당황하여 살림살이 할 것도 제대로 거두어 간수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버리고 간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자도 많았다. 또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혹은 수십 일만에, 혹은 반 달만에 문득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긴다. 이리하여 시끄럽게 구는 폐단으로 원망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건마는, 성상(聖上)께서 알지 못하니, 한스럽다.
○ 춘방 하번(春坊下番)으로 입시(入侍)하는 관원은 세자(世子)가 배운 글과 좌우에서 강론(講論)한 말을, 나와서 단자(單子)에 기록하여 정원(政院)에 바쳐서 대전(大殿)에 전계(轉啓)하는 것이 예전부터 전해 오는 규례(規例)였다. 인묘(仁廟 인종)는 무려 수삼십 년을 동궁에 있으면서 학문이 나날이 진보하였다. 삼시 서연(三時書筵 삼시는 아침ㆍ낮ㆍ저녁. 즉 조ㆍ주ㆍ석강(朝晝夕講)) 외에 또 야대(夜對)가 있고, 또 불시에 접견(接見)하는 일도 있었으므로, 하번(下番)은 추가하여 기록하기가 어려워서 붓과 벼루를 가지고 입시하기를 마치 대전에 사관(史官)이 있는 것같이 하였다. 하루는 빈객(賓客) 임권(任權)이 동궁에게 고하기를,

“서연의 말을 빠뜨리더라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는데, 붓을 가지고 입시하는 것은 윗전[上殿]에서 하는 일입니다. 윗전과 같이 하는 일은 비록 작은 일이라도 참람되이 해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붓을 가지고 입시하는 일은 드디어 없어지고 거행하지 않았다.
○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36세 적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 제1명(第一名)에 합격하고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드디어 제과(制科)에 뽑혔다. 이에 앞서 본국 사람으로서 비록 제과에 합격하였으나 죄다 하열(下列)이었는데, 공이 지은 대책(對策)은 독권관(讀券官)이 크게 칭찬하여 제2갑(第二甲)에 들어,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로 제수되었다가, 중서성 좌우사 낭중(中書省左右司郞中) 벼슬까지 하였다.
○ 선조(先祖) 목은(牧隱)은 무진생(戊辰生)이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원년 신사(辛巳 1341, 고려 충혜왕2)에 송당 선생(松堂先生) 김광재(金光載)가 과시(科試)를 주장할 적에 공이 14세로서 시과(詩科)에 합격하였다. 무자년에는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으로서 중국 서울에 가서 입학하였다. 기축년에는 학궁(學宮)에 있었고, 경인년에는 분학(分學)으로서 상도(上都)에 갔다가 겨울에는 학궁으로 돌아왔다. 신묘년 정월(正月)에 가정(稼亭)의 부음(訃音)을 받고 분상(奔喪)하여 본국에 돌아왔고, 계사년 여름에 상기(喪期)를 마쳤다. 5월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과거를 개설하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지공거(知貢擧)로, 양파 선생(陽坡先生) 홍언박(洪彦博)이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있었는데, 공이 제1인(第一人)으로 합격하였으며, 가을에는 정동성시(征東省試) 제1명(第一名)으로 합격하였다. 갑오년에 공의 나이 27세로,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응시하였는데, 고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아주 훌륭하게 여겨서, 처음에는 장원으로 매기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논의가, 외국 사람이라는 것으로써 어렵게 여겼다. 그리하여 제2갑 제2명(第二甲第二名)으로 내려 결정되었고, 응봉한림문학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學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에 제수되었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부자가 중국 과거에 오른 후부터 천하가 모두 동국에 한산(韓山)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 목은의 화상(畵像)은 제용동(濟用洞) 종가(宗家)에 간직되어 있다. 사모(紗帽)와 홍포(紅袍)와 서대(犀帶)를 착용하였고, 권양촌(權陽村 이름은 근〈近〉)이 찬(贊)을 지었는데, 고려 말년에 조정에 있을 때의 화상이었다. 내가 괴원(槐院 승문원의 별칭)에 있을 적에 박식(博識)한 선비 하나가 나에게 말하기를,

“선정(先正)에게 들으니, 혁명(革命)한 후에 공은 항상 초립(草笠)을 쓰고 흰옷에다 가는 실띠를 띠고 거상(居喪)하는 옷차림을 하였는데, 그 화상이 도성(都城) 안에 남아 있어, 직접 보았다 하였습니다.”
하므로, 나는 널리 물어보았으나 볼 수 없었고, 항상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였다. 왜적의 난리를 겪은 후에는 대성 거족(大姓巨族)이 서로 전해 오던 문헌(文獻)도 씻은 듯 없어져 남음이 없으니, 내가 그의 흰옷 차림의 화상을 볼 수 없음이 확실하다. 한탄스럽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고려 말기에 적성 훈도(積城訓導)로 있었다. 적성에서 송경(松京)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노옹(老翁)을 만났다. 노옹은 누렁소와 검정소 두 마리를 이끌고 밭을 갈다가 방금 쟁기를 벗기고 숲 밑에서 쉬던 참이었다. 공도 또한 그 곁에서 말을 쉬이고, 노옹과 서로 말하게 되었다. 공은,

“노옹의 두 마리 소가 모두 살지고 크며 건장합니다. 밭 가는 힘에는 우열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노옹은 옆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낮은 말소리로,

“어떤 색 소가 낫고 어떤 색 소가 못하오.”
라고 말하였다. 공이,

“노옹은 어찌 소를 두려워하여 이같이 가만히 말하오.”
하니, 노옹은,

“그대가 나이 젊어서 들은 것이 없음이 심하구려! 짐승이 비록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사람의 말의 좋고 나쁜 것은 모두 알아듣는다. 만약 제가 못나서 남만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마음에 불평스런 것이 어찌 사람과 다르겠나? 그대가 나이가 젊어서 들은 것이 없구려!”
하였다. 공은 이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공의 평생에 겸후(謙厚)한 도량은 이 노옹의 한 마디 말에서 얻은 것이었다. 고려가 망하려 하자, 군자(君子)로서 숨어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노옹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 황 익성공이 수상이 되어 정부에 나가는데, 의복이 남루한 노옹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앞에 와 서서 익성공의 자를 부르면서,

“내가 그대를 보기 위해서 왔는데, 어디로 가는가?”
하였다. 공이 수레를 멈추고,

“마침 공사(公事)가 있어 나가나 오래지 않아서 돌아올 것이니, 그대는 우리집에 가서 밥을 청해 먹고 우선 머물러 있게.”
하였다. 노옹은 공의 집에 가서 공의 자제에게,

“너의 아버지가 나에게 집에 가서 기다리라 하였다. 밥을 지어다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말에 따라 밥을 지어주었다. 조금 후에 공이 돌아와 노옹과 함께 한방에 들어가서 수일 동안 같이 있었다. 너나 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나 그들이 의논한 바가 어떤 것인지는 비록 집안 사람과 그 자제들도 또한 알지 못하였다. 노옹이 떠날 무렵에 공에게,

“근래에 양식과 찬이 다 떨어져 걱정이니, 그대가 도와주겠나?”
하였다. 공은 간략하게 두어 가지를 전대에 담고 청지기를 시켜 노옹이 가는 곳을 따라가게 하였다. 옹은 노량진(鷺梁津)을 건너 관악산(冠岳山) 밑으로 가는 것이었다. 빙빙 돌아서 오르다가 산 중턱에 와서 청지기에게,

“아침밥을 먹었는가?”
하고 물었다.

“아직 먹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노옹은

“갈길이 아직 머니, 먹지 않고서는 안 된다.”
하며, 산밑 인가(人家)를 가리키면서,

“저 집 주인은 나와 평소에 친한 사람이다. 네가 가서 내 말을 하고 밥을 요구하면 반드시 후하게 대접할 것이다. 나는 우선 이 나무 밑에 앉아서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
하였다. 청지기가 그 집에 가서 노옹의 말을 전하니, 그 집에서는 꾸짖으면서,

“노옹이란 자가 누구냐? 너는 뭐하는 놈이길래 나에게 밥을 요구하는 것이냐?”
하면서, 지팡이를 들고 쫓아내는 것이었다. 청지기는 허망하여 노옹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오니, 노옹과 메고 갔던 물건이 모두 없었고, 마침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 황 익성공이 영묘(英廟 세종)가 좋은 정사를 하는 때를 만나서 예법을 마련하고 악(樂)을 지으며, 큰일을 논하고 큰 논의를 결단하였다. 날마다 임금을 돕는 것만 생각하였고 집안 대소사는 모두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루는 계집종들 간에 서로 싸워서 한동안 떠들썩하였다. 한 계집종이 공의 앞에 와서 자리를 두드리며,

“아무 계집이 나와 서로 싸웠는데 이렇게 극악하게 저를 해쳤습니다.”
하고 아뢰니 공은,

“네 말이 옳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한 계집종이 또 와서 자리를 두드리며, 꼭 같이 호소 하였다. 공은 또,

“네 말이 옳다.”
하였다. 공의 조카가 공의 옆에 있다가 마땅치 않은 기색으로 나서며,

“아저씨는 몹시 흐리멍텅합니다. 한 사람은 저렇고 한 사람은 이와 같으니,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릅니다. 아저씨의 흐리멍텅함이 심합니다.”
하니 공은,

“너의 말도 또한 옳다.”
하면서, 글읽기를 그치지 않고 끝내 분변하는 말이 없었다.
○ 찬성(贊成) 손순효(孫舜孝)는 옛것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겨하였다. 관동 방백(關東方伯)이 되어서는 무릇, 효자ㆍ열녀의 정려각(旌閭閣)을 만나면 반드시 예(禮)를 올리고 지나갔다. 원주(原州)에서 횡성(橫城)으로 향해 10리를 들어가면 길가에 고려 원종량(元宗亮)의 효자비(孝子碑)가 있는데, 순찰(巡察)하던 날 마침 비가 와서 길이 진흙탕이었다. 공이 그 비석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도롱이를 땅에다 깔고 절하였다. 절한 다음에 보니 도사(都事)는 도롱이를 둘러쓰고 똑바로 서 있는 것이었다. 돌아보면서,

“도사도 절하였는가?”
하니,

“먼저 절하였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자는, 절하지 않았다 하여도 될 일인데 먼저 절하였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가소롭다 하였다.
○ 상공 이극배(李克培)는 어진 덕과 깨끗한 명망이 당시에 높았다. 그의 아우 이극돈(李克墩)도 또한 재상 반열에 있었는데, 재물을 탐낸다는 것으로써 꽤 나무람을 받았다. 하루는 이극돈이 공에게,

“언제가 저의 생일입니다. 집사람이 간략한 술자리를 베풀고자 하니, 잠깐 왕림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므로, 공이 허락하였다. 그날이 되어 공이 정부(政府)에서 바로 아우의 집으로 갔다. 바깥 문간에 들어가다가 새로운 숙마(熟麻) 새끼줄이 처마밑에서 담 위에까지 뻗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공은 물러서면서, ‘이 새끼줄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누구에게서 얻은 것인가?’ 물었다. 이극돈은 숨기지 못하고, 바른대로 고하여,

“사복시(司僕寺) 관원 중에 서로 아는 자가 있어 빨래하는 데에 쓰라고 보내 왔습니다.”
하였다. 공은 성을 내며 말하기를,

“사복시의 새끼는 사복시의 말을 매는 데 써야지 어찌해서 너의 뜰에 걸려 있느냐?”
하고, 드디어 초헌을 타고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으니, 그의 엄한 가법(家法)은 두려워할 만하다. 조종조 재상이 이와 같았으니, 백성이 어찌 부유하지 않겠으며, 나라의 창고가 어찌 가득하지 않겠는가?
○ 근세 유명한 경상(卿相) 중에 우애로 칭찬받는 이는 오직 상공 안현(安玹 상공은 재상의 높임말)과 이준경(李浚慶) 두 집뿐이다. 안현은 공경하는 것을 주로 하여, 그의 형 판서 안위(安瑋)를 엄부(嚴父)같이 섬겼다. 형이 말을 탔으면 자기는 말에서 내려서 가고, 형이 앉았으면 반드시 평상 앞에 나아가서 절하여, 응답(應答)하기를 매우 조심하였다.
이 정승은 사랑하는 것을 중시하여, 그의 형 판서 이윤경(李潤慶)과 친구처럼 지내며 우애하였다. 앉으면 무릎을 맞대고, 누우면 베개를 가지런하게 하였다. 말하며 웃을 적에는 너나 하며 장난치기도 하였다. 두 정승의 가풍은 비록 같지 않았으나 모두 당시 진신(搢紳)들의 흠모(欽慕)하는 바 되었다. 그러나 이윤경이 죽자 상공은 제복(制服)을 입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슬퍼하였고, 안 정승의 죽음에 안위는 조문(吊問)받고 곡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어, 상공 평생의 두텁던 우애를 저버린 듯하였다. 안위는 이것으로써 식자들의 나무람을 면치 못하였다.
○ 판서 조사수(趙士秀)는 문과에 제1등으로 올랐다. 처음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으로 제수 되었는데, 그때 나라가 태평하고 농사가 풍년이 들어 각사(各司)의 관원도 국고에 간직한 물건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공이 숙직하던 날 밤에 벗 두세 명이 달빛을 받으며 와서 향온주(香?酒) 맛보이라고 요구하였다. 공은 그들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였다. 한참 후에 본집에서 하인이 좋은 술과 맛난 고기를 싣고 와 서로 권하며 즐기다가 마쳤다. 공이 평생에 청렴하고 결백하여, 구차하지 않던 절조가 처음 벼슬하던 때부터 의젓하였으니, 아! 숭상할 만하도다.
○ 황형(黃衡)은 명장(名將)이고, 벼슬이 형조 판서까지 올랐다. 서사(書史) 읽기를 좋아하고 작은 예절에는 구애받지 않았으며, 엄숙하고 침착하여 시위(侍衛)하는 졸개들이 두려워하였다. 사는 집을 짓는데, 청사 마루를 층지어 낮추었다. 그래서 낭료(郞僚)로서 공사를 가지고 오는 자는 비록 문사(文士)라 하더라도 반드시 아래층에서 절하게 하여 감히 방자히 굴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상하의 체모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 참판 윤부지(尹釜之)가 관동 방백(關東方伯)이 되어 원주로 하계(下界)하여 평창군(平昌郡)을 지나고 강릉(江陵) 월정사(月精寺)에 이르렀다. 비로 인해 머물러 묵게 되었는데, 거기에 기개(氣槪)가 너그럽고 활달한 눈썹이 많은 노승(老僧)이 있었다. 공은 한자리에 앉히고 서로 말을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그대는 오랫동안 길옆 절에 있었으니, 감사가 하지 않아야 할 것이 어떤 일인지 알 것이오.”
하니, 노승은,

“빈도(貧道 중이 자기를 낮추어 일컫는 말)가 비록 말할 것이 있으나, 상공이 능히 곧이 듣고 가려서 시행하겠습니까?”
하였다. 공은,

“우선 말해 보시오.”
하니,

“상공은 보장사(報狀使)가 지체한 죄를 벌하지 말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완악하고 게으른 버릇을 징계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거요?”
“그렇지 않습니다. 각 고을 보장사는 으레 가난한 관속(官屬)을 보냅니다. 입은 것이 몸을 가리지 못하고 먹는 것이 배를 채우지 못하므로, 얼고 굶어서 엎어지고 자빠지느라 능히 달리지 못합니다. 평상시에도 오히려 그런데, 하물며 얼음이 얼고 눈이 쌓인 날에 능히 강을 날아 건너고 나무를 뛰어 넘어서 가겠습니까? 하루만 지체하여도 책망과 형벌이 따르니, 실로 어질고 너그러운 정사가 아닙니다.”
공이 말하기를,

“또 말할 만한 것이 있소?”
하니, 중이 말하기를,

“상공은 순행하는 날짜는 반드시 먼저 보낸 문서에 따르고, 당기거나 물리지 말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가?”
하니, 중이 말하기를,

“기다리는 관리가 경계에서 오래 머무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죽을 끓이고 국수를 삶아놓고서 목을 빼고 기다리는데, 오늘도 행차가 정지되고 내일도 오지 않아 밤을 넘긴 음식물을 두고 쓸 수 없으므로 다시 마을에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구해 들이기를 몹시 급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이 해를 입는 것이 또한 큽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또 할 말이 있소?”
하니, 중이 말하기를,

“원컨대, 상공은 기생을 싣고 다니지 마소서.”
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사(大師)의 말이 이에 이르니,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이오?”
하니, 중이 말하기를,

“미인[尤物]이 정치를 방해하는 것은 진실로 산인(山人)으로서 알바가 못 되나, 기생 하나가 다니는 데에는 반드시 방에서 부리는 계집종과 따르는 사내종이 있습니다. 여러 고을에서 음식을 마련하고 뇌물을 주는 폐단과 각 역에서 짐바리를 실어 나르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너의 말을 따르리라.”
하였다. 공은 임기 내에 너그럽고 간략한 것으로 다스려 폐단을 없애기에 힘써서 백성이 지금까지 일컫는다.
○ 조종조에는 사대부(士大夫)의 옷 빛깔은 토홍(土紅)을 상등 빛깔이라 하였다. 대개 붉은 흙을 물에 담가서 찌꺼기는 버리고 정하게 만들어서 준비 하였다가 아교를 타서 물들이는데, 그 빛이 찬란하였다. 우리 나라 풍속에 토홍 직령(土紅直領)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말세(末世)에 와서는 천한 하리(下吏)들도 모두 홍화(紅花)로 물들인 빛을 입는다. 홍화는 이시(利市 이익〈利益〉)인데, 이시라는 말은 그 값이 중하고 귀하다는 것이다. 또 당사(唐絲)를 섞어서 짠 베는 곱고 쫀쫀하여, 짜기가 어려워서 공력이 백 배나 든다. 재상 외에 당하관(堂下官 통훈〈通訓〉 정3품 이하) 이하는 착용할 수 없음은 국법으로 금하던 것이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병진년(1556, 명종 11) 여름에 괴원 정자(槐院正字) 정담(鄭?)이 일과(日課)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다가 종루(鐘樓) 거리에서 사헌부(司憲府)의 금난리(禁亂吏)에게 걸렸다. 정담은 죽은 정승 정순붕(鄭順朋)의 아들로서, 젊은 나이에 명망이 높던 문관이었는데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오히려 용서하지 않았으니, 국법이 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십 년 이래로는 하천(下賤)한 무리가 모두 무늬 있는 비단을 입어도 나라에서 능히 금하지 못하여 참람한 습속이 바로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아! 탄식할 일이다.
○ 고려 때 무과의 제도는 비록 자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우리 나라 식년(式年)의 규칙은, 인ㆍ신ㆍ사ㆍ해년(寅申巳亥年)에 문과(文科)와 함께 서울 및 각도에 초시(初試)를 실행한다. 각도에는 정해진 수효가 있고, 과거본 사람이 맞힌 화살의 많고 적은 수효에 따라서 방(榜)을 낸다. 다음 자ㆍ오ㆍ묘ㆍ유년(子午卯酉年)에는 초시에 합격한 사람을 서울에다 모아서, 육량전(六兩箭)ㆍ편전(片箭)을 쏘게 하고, 말타기와 창쏘기에 합격한 다음에 《장감박의(將鑑博議)》나 무경(武經) 중에서 하나, 사서(四書) 중에서 하나와 대전(大典)을 강하게 한다. 그리하여 조통(粗通) 이상을 맞힌 사람을, 맞힌 화살의 수효와 강서(講書)한 점수를 합계하여 높고 낮은 등수를 분간하며 다만 28인을 뽑는 것을 회시(會試)라 한다. 또 회시한 사람의 재주를 임금이 직접 시험하고 그 좌차(座次)를 정하는 것을 전시(殿試)라 한다.
광묘(光廟 세조)가 즉위한 지 6년 되는 경진년(1460)에는 사방을 순행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무과를 시행하였다. 초시를 하지 않고 규정에 제한도 없이, 맞힌 화살 수효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뽑았는데, 1년 동안에 뽑은 사람을 통계하면 1천 8백여 명이나 되었다. 지금까지도 무사(武士)로서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활을 당기지 못하는 자를 ‘경진년 무과’라 한다. 이후부터는 무과도 또한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성묘ㆍ중묘 때는 별과의 규칙이 반드시 육량전(六兩箭)을 말을 타고 20보 밖에서 쏘게 하여 네 번 맞혀야 하고, 강(講)도 조통(粗通)한 다음이라야 방(榜)에 올랐다. 그런 까닭에, 뽑힌 무사는 모두 헌걸차서 쓸 만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계미년(1583, 선조 16)에 북쪽 오랑캐 니탕개(尼湯介)가 변경(邊境)에 들어와서 성을 함락시켰던 그때, 이이(李珥)가 병조 판서로 있었는데, 나라를 지키다가 전장에 나가게 하는 계책을 건의(建議)하여 드디어 특별 과거를 설행하여 무사 6백여 명을 뽑았으며, 그후 해마다 뽑는 것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조종조부터 내려온 과거 규칙은 이때에 와서 씻은 듯이 없어져서 온갖 소임과 여러 군사로서 조금이라도 활을 집을 줄 아는 자는 모두 방에 올랐다. 그러나 왕궁을 시위(侍衛)하는 갑사(甲士)와 별시위(別侍衛)ㆍ정로위(定虜衛)의 무리와 외방 여러 진(鎭)에 기병(騎兵)ㆍ보병과 수군(水軍)을 새로 뽑는 데에는 수효가 많이 부족하였다.
○ 임진년 왜란 때 대가(大駕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간 후 관서(關西)와 황해도에는 해마다 무과를 실시하였다. 계사년 가을에 동궁(東宮)이 주재하던 전주(全州)의 무군소(撫軍所)와 영남(嶺南)의 도원수부(都元帥府)와 각도에서 뽑은 것도 매우 많았다. 계사년에 대가가 도성에 돌아온 뒤부터 정유년까지 5년 동안에 여러 차례 대과[大擧]를 실시하였는데, 강서(講書)는 하지 않고 다만 화살 하나를 맞혀도 입격시켰으니, 명목은 과거라 하지만 실상은 군목(軍目)과 같았다. 신은방(新恩榜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의 방)을 발표하던 날에는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홍패(紅牌)를 잡고 미투리를 신고 걸어서 가는 자가 많았다. 왜란 이래로 앞서 출신(出身)한 자가 무려 수만 명인데, 그 중에는 한량(閑良)ㆍ사족(士族) 이외에, 서얼(庶孼)ㆍ공천(公賤)ㆍ사천(私賤)ㆍ백정(白丁) 따위도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뽑은 사람이 많을수록 장수 재목은 더욱 모자랐다. 용렬하고 어리석어 거의 모두가 활도 당기지 못하며, 글자 한자도 모르는 자들이었다. 이들로써 굳세고 사나운 적을 막고자 하였으니, 국사를 꾀하는 자가 생각지 못한 것이 심하도다.
○ 중묘(中廟)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여염(閭閻) 동구(洞口)에서 병을 요양하고 있었는데, 시골 사람 하나가 거의 열흘동안을 아침 저녁으로 문앞을 지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하루는 그 사람이 비를 만나, 중묘가 요양하고 있는 집 문안에 들어왔다. 중묘는 당(堂)에 오르게 하고, 이어서 누구의 아들이며, 무슨 일로 어디를 그렇게 부지런히 가고 오는가를 물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성명을 말하고 이어서,

“이 동리 안에 사는 이조 서리가 나에게 증산 훈도(甑傘訓導)를 시켜주기로 약속하였는데, 오래도록 비답이 내리지 않으므로, 자주 가서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중묘는 편지를 써주면서,

“내가 참의를 안다. 이 편지를 그에게 주면 반드시 소원대로 될 것이니, 다시 고생하지 말라.”
하였다. 그 사람은 편지를 받아갔으나, 처음부터 대군(大君)이 요양하고 있는 곳인 줄을 몰랐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 반정하고 중묘가 즉위한 다음에, 그 사람이 참의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 사람의 말하는 바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고, 또 어휘(御諱)가 있었다. 참의는 곧 대궐에 들어가서 아뢰었다. 중묘는 전교(傳敎)하기를,

“이것은 내가 직접 쓴 것이나 그가 말한 것은 잊었으니, 그 사람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정원(政院)이 패초(牌招) 하여 물으니, 곧 증산 훈도를 원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특명으로 제수하였다.
○ 팔도하(八渡河) 북쪽에 답동(沓洞)이 있다. 내가 전에, ‘중국에는 산도(山稻)만 있고 쌀[玉粒]이 없는 것은, 남방 구석진 곳 외에는 모두 대륙(大陸)이어서 높고 건조하며, 하수(河水)는 깊고 넓어서 관개(灌漑)할 수 없으므로 그런 것이라.’ 하였다. 그후 강을 건너 지나가는 곳을 두루 살펴보니, 산세(山勢)가 빙 돌았고 물 흐름도 느려서, 물기 있고 기름진 땅이 많이 있었다. 고려 때에 이런 곳을 논으로 만들려고 하였다면 안 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또 답(沓)으로 동네 이름을 지어 지금까지 그러한데도 오히려 논이 없는 것은 갈고 심으며 김매는 공력이 밭보다 백배나 더 들므로, 힘든 것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임금만이 옥식(玉食 하얀 쌀밥)하는 것이므로 서민(庶民)은 감히 참람히 할 수 없어서 심지도 못하여 그런 것인가? 이것은 알 수 없다.
또 농기(農器)를 보더라도 우리 나라의 호미라는 것은 자루 길이가 불과 반 자이고, 날이 좁고 끝이 날카로워서 새의 부리와 같다. 이랑 사이에 앉아서 잡풀을 뽑는 것인데, 쓰기에 편리하다. 관내(關內)와 남방에도 호미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모양은 또 우리 나라의 예자(刈子)라는 것과 다르다. 자루 길이는 거의 두 발[丈]이고 날은 넓고 커서, 우리 나라의 가래와 같은 점이 있다. 이것은 모두 밭에 서서 가꾸기에 알맞고 논에 쓰는 것은 아니다. 대저 중국은 흙이 두터워서 밭일이 그리 고되지 않은데, 우리 나라는 땅이 메마른데다가 논농사를 하여 그 노동하는 고됨이 반드시 밭보다 곱절이나 힘을 들여야만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 나라 농민의 괴로움을 알 수 있다.
○ 뇌계(?溪) 유호인(兪好仁)은 천성이 순후(醇厚)하고 문장이 풍부하여, 성묘가 가장 중하게 여겼다. 공이 집현전 교리로 있을 적에 부모를 편하게 봉양할 뜻으로 고을살이를 청해서 함양(咸陽) 원으로 나갔다. 공이 학문을 강론(講論)하는 데에는 밝았으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서툴렀다. 여러 학생과 학사루(學士樓)에 올라 날마다 경서와 《사기(史記)》를 토론하였는데, 시골 백정 한 사람이 단(壇) 밖에서 호소하기를,

“소장(訴狀)을 바친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까지 처분이 없으니, 극히 민망합니다.”
하였다. 안전 아전(案前衙前)이 머리를 들어 묻기를,

“네가 바친 것이 며칠이나 되느냐?”
하니, 백성은,

“지금 벌써 사흘이오”
하였다. 아전이 꾸짖으며,

“5~6일 전의 것도 아직 판결이 없는데, 너는 어찌 바쁘게 구느냐? 우선 물러가서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여러 학생이 서로 돌아보고 웃으니, 공은,

“사람마다 가소로운 일이 있다. 너희들은 나의 정사를 웃거니와, 나는 또 너희들의 제술(製述)을 웃는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뇌계는 함양 사람인데, 어찌 본 고을에 원으로 나왔겠는가? 일찍이 들으니, 합천(陜川) 원으로 있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기록하는 자의 잘못일 것이다.
○ 호남(湖南) 변산(邊山) 근처에 조 상사(曺上舍 상사는 진사임)라 부르는 자가 살았다. 이웃에 양수척(楊水尺 무자리)이 있었는데, 조씨(曺氏)의 집 재물을 꾸어 쓰고 오랫동안 갚지 못하였다. 하루는 버들을 베려고 산밑에 갔다가, 큰 호랑이가 네 발을 벌리고 바위 밑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호랑이가 개를 잡아 먹고 잠에 취해서 곤하게 잠든 것이었다. 양수척은 바라보고 죽은 호랑이로 여겨, 상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갚지 못한 빚이 있는데 지금 큰 호랑이를 잡았으니, 가져다가 쓰십시오.”
하였다. 상사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날뛰었다. 양수척과 서로 의논하되 ‘싣거나 끌어오거나 하면 털이 상할 염려가 있다.’ 하고, 곧 떠메고 올 틀을 만들어서 건장한 종 5~6명을 거느리고 양수척이 지시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상사는 빙빙 돌아서 바위에 올라, 호랑이를 굽어보고 앉았고, 종들은 틀을 가지고, 바로 호랑이 곁에 가서 소리를 치면서 틀을 놓았다. 그러자 호랑이는 놀라 일어나서 으르렁대며 모래를 날리고 나무 끝을 후리쳤다. 소리를 질러 골짜기를 울리면서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상사는 황급하여 바위 밑에 떨어졌는데 얼굴과 사지를 모두 다쳐 말을 타지 못하고 틀 위에 뉘여서 메고 돌아왔다. 그때는 중춘(仲春)이어서 상사는 누른 삼베 새 홑옷을 입고 있었다. 집에 있던 자제들은 문에 나서서 바라보고 서로 돌아보며 가리키면서,

“이번 호랑이는 얼룩 무늬 호랑이가 아니고 누른 호랑이다.”
하였다. 집에 이르자, 상사가 끙끙대면서 틀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온 집안이 혀를 내둘렀다. 상사는 집에 누워 두어 달 동안 약을 먹은 뒤에야 겨우 소생하였으니, 재물을 탐내는 자의 경계가 될 만하다.
○ 코피 흘리는 증세에는 참먹[眞墨]을 삼키고, 개에게 물린 상처에는 호(虎) 자를 진한 먹으로 쓰고, 말에게 물린 상처에는 말채찍을 태워서 붙이고, 물고기 뼈가 걸린 목에는 고깃 그물을 걸고서 노자(??)를 부른다 한다. 의서(醫書)에 기재된 이런 처방이 하나뿐이 아니거니와, 그 이치는 실로 알 수가 없다.
○ 성묘조(成廟朝)에 환관(宦官)이 휴가를 받고 관서(關西)에 갔다가 돌아온 자가 있었다. 성묘가 하루는 편전(便殿)에서 묻기를,

“네가 가는 길에서 들은 것과 본 것이 있으면 숨김없이 아뢰어라.”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달리 보고 들은 일은 없고, 다만 돌아올 적에, 하루 동안에 청천강(菁川江)을 아홉 번이나 건넜습니다.”
하였다. 성묘가,

“어찌해서 그랬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가산(嘉山)에서 안주(安州)를 향해 오는데 청천강에 와서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서변(西邊)의 소임으로 있다가 돌아온다는 만호(萬戶)가 방지기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강변에서 서로 작별하려 하더니 방지기가 말하기를, ‘어찌 차마 여기에서 작별하겠습니까? 저쪽 언덕에 가서 이별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저쪽 언덕에 오게 되자, 만호는, ‘네가 강을 넘어서까지 나를 전송하는데, 나도 여기에서 너만 홀로 보낼 수가 없다.’ 하며, 드디어 상앗대를 서쪽 언덕으로 돌렸습니다. 방지기는, ‘도로 와서 전송하는 두터운 정을 내가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면서 함께 돌아왔습니다. 만호는 또,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이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 아니다.’ 하고 또 함께 가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배 안에서 제 마음재로 할 수 없어, 같이 갔다가 같이 왔다가 하였는데, 가고 오고한 회수가 아홉 번이나 되었습니다. 겨우 뭍에 내려서자, 날이 벌써 저물어서, 멀리 가지 못하고 강변에서 잤습니다.”
하고, 만호의 성명을 아뢰었다. 두어 해 뒤에 그 사람이 변장(邊將) 말망(末望)에 참여하였는데, 성묘는 미소를 지으며,

“이 사람이 청천강을 아홉 번 건너던 사람인가?”
하고, 드디어 붓을 휘둘러서 낙점(落點)하였다.
○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洪允成)이 광묘(光廟)에게 총애를 받아, 여러번 훈적(勳籍)에 참여하였고, 벼슬이 수상(首相)에 이르러, 권세가 혁혁(赫赫)하였다. 성묘(成廟) 초년에도 선조(先朝)의 옛 신하로서 세력이 성하여 온 조정이 감히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왕자(王子) 오산군(烏山君)이 일찍이 그의 기세를 꺾어서 욕보이고자 하였다. 하루는 비가 와서 길이 수렁이었다. 인산(仁山)이 대궐에 나아가는데 영추문(迎秋門)으로 가는 것을 틈타서, 오산군은 종각(鐘閣) 모퉁이 돌다리 남쪽에 숨어 있다가, 짚자리를 길 위에 깔고 그 위에 서 있었다. 인산이 수레를 몰아 달려오다가 왕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수레에서 내렸다. 오산은 손을 마주 잡고 읍하였다. 인산은 한참 동안 걸어서 지나가는데 진흙 수렁에 목화[?]가 빠지고 옷이 다 더러워졌다. 인산은 낯빛이 흙빛으로 변하였는데, 보는 사람은 모두가 통쾌하게 여겼다. 대궐 문에서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 차비문(差備門)에서, 오산이 자기를 모욕한 정상을 아뢰었다.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크게 노하여 오산을 대궐에 불러들여서 꾸짖었다. 오산은,

“홍윤성의 호소는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정희왕후는 사람을 시켜 끌어내게 하였다.
○ 감사 송흠(宋欽)은 늙어서 호남 방백이 되었으나, 미인[尤物]에 대한 생각은 능히 잊지 못하였다. 순찰하다가 기생 없는 고을에 이르면, 저녁에는 반드시 훈도(訓導)를 방안에 불러들여서 나그네의 잠자리가 쓸쓸하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면 훈도는 나가서 원과 의논하여 관비(官婢) 중에 얼굴이 조금 쓸 만한 자를 골라서 잠자리를 모시게 하였다. 공이 순찰하다가 하루는 아주 궁벽진 고을에 도착하여 역시 훈도를 불렀다. 훈도는 산증(疝症)이 재발(再發)하여 능히 굴신(屈伸)하지 못하던 참이었다. 새벽이 되어 지팡이를 잡고 가서 창밖에 엎드려, 소리(小吏)를 시켜 아뢰기를,

“저녁에 부르심을 받았으나 마침 병을 앓아서, 거의 죽을 뻔하다 요행히 살아나 이제야 왔습니다.”
하니 공은,

“훈도는 나의 병은 모르는 자로다. 저녁 훈도는 서로 접견하지마는 새벽 훈도는 본디부터 보기를 즐기지 않으니, 물러가라.”
하였다.
○ 김안로(金安老)는 오랫동안 정승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간사하고 탐심(貪心)이 많아서, 뇌물의 양에 따라 반드시 얼굴빛이 달라졌다. 황침(黃琛)이 충청 병사(忠淸兵史)가 되어, 참깨 20말을 김안로에게 보냈다. 그후 임기가 다 되어 돌아와, 첫새벽에 안로의 집에 가서 명함을 들여보냈으나 김안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황침은 오랫동안 문밖에 서서 피로하게 바라보며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해가 높이 오르자, 임천손(林千孫)이 또한 충청 수사(忠淸水使)로서 벼슬이 갈려서 왔다. 명함을 들여보내자 김안로는 곧 청사에 나와서맞이하였다. 황침도 따라서 들어갔는데 김안로가 임천손을 향해서는 정답게 웃고 말하며 다소 덕스러운 기색이 있었으나, 황침에게는 쌀쌀하게 한마디 위로하는 말조차 없었다. 그후에 황침은 총부(摠府)에 부총관(副摠管)으로 되었고, 임천손도 삼청 위장(三廳衛將)으로 가게 되었다. 황침이 맞이하여 서로 이야기하다가,

“전에 정승이 그대를 향해서 지극히 은근한 뜻을 표시하였는데, 반드시 한 일이 있었을 것이오. 숨기지 말고 말해 보시오.”
하였다. 임천손이 처음에는 말을 숨겼으나 황침이 강요하자, 임천손이 웃으면서,

“내가 수영(水營)에 있을 때에, 정승이 혼수감을 요구하기에, 큰 나무를 베어서 큰 배를 만들고 모든 소용되는 일체의 물건을 가득 실어서 배째로 보냈는데, 반드시 이 때문에 기뻐한 것이오. 그 밖에는 딴 것이 없소.”
하였다. 황침은 손벽을 치고 땅에 넘어지면서,

“나의 참깨 스무 말은, 큰 바다에 던진 것이었구나.”
하였다. 이는 사소한 물건이어서 그 욕심에 차지 않았을 것이므로, 자취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조종조는 육조(六曹)에 숙직하는 낭관들은 달밤에 창기(娼妓)들과 어울려서 광화문 밖에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노래도 불러 밤새도록 마시고 담소하였으니, 이것은 태평 시대의 일이다. 한갓 육조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미원(薇垣 사간원의 별칭)의 관원도 또한 곡회(曲會 이리저리 꾸며대서 모임)를 일삼았고, 입직하는 밤에는 반드시 기생을 끼고 잤다. 새벽녘이면,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창밖에 서서 뵙기를 청하는데, 이것은 계집을 일찍 내어 보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후에는 세상 인심이 점차 박하여지고, 금법(禁法)이 점점 세밀하여져서, 육조에 숙직하는 풍습이 아주 바뀌고 미원에서 밤놀이하던 것도 또한 없어졌다. 그런데 숙직하는 날 밤에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뵙기를 청하는 고사는 아직도 남아 있다.
○ 남소문동(南小門洞)에 사족(士族)의 과부(寡婦)가 있었다. 선대(先代)부터 보화(寶貨)를 많이 모았고, 또 항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을 모아, 특별히 나무궤 하나에 따로 보관해 두었는데, 무게가 열 섬이나 되었다. 매우 단단히 봉하고 얽고 잠그어서 다락 위 처마 밑에 두었다. 도둑떼가 그 소문을 듣고 들고 가려 하여도 무거워서 옮길 수 없고, 꺼내 가려 해도 잠근 것이 단단하여서 열 수가 없었다. 서로 돌아보고 침만 흘릴 뿐, 어쩔 방도가 없었다.
어떤 한 도적이 열쇠 10여 개를 만들었는데, 크기가 서로 같지 않고 모양도 각각 달랐다. 하루는 주인집에서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부하 두세 사람을 거느리고 담을 넘어서 들어갔다. 여러 열쇠를 죽 시험해서 맞추어 열고 감추어 둔 것을 다 찾아내었다. 그리고 스스로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궤안에 들어가 누운 다음, 열쇠를 전과 같이 채우게 하였다. 도둑은 궤안에서 가지고 있던 열쇠로 긁어서 쥐가 씹는 소리를 내었다. 여종들이 그 소리를 듣고 주모(主母)에게 알리니, 주모는 불을 밝혀 들고 궤문을 열었다. 도둑도 궤안에서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치면서 뛰쳐나왔다. 종들은 놀라서 등불을 던지고 땅에 넘어졌는데, 도둑은 몸을 솟구쳐서 혹 뜰에 내리기도 하고, 혹 마루 위에 오르기도 하며 온갖 괴상한 소리를 다 내었다. 온 집이 놀라서 혼이 나가 반쯤 죽어 있었다. 도둑은 한참 뒤에 창을 열고 도망쳐 버렸다. 그 집에서 날이 밝은 뒤에 궤안을 살펴보니, 텅텅 비었고 한 가지 물건도 없었다. 그러자 진기(珍奇)한 보배가 오래되면 반드시 말썽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런 몹쓸 귀신이 되어서 갔다고 여겨, 무당을 부르고 소경을 맞아다가 빌고 액막이를 하여 장차 올 화만 면하여 하였고, 도둑의 짓이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도둑의 꾀가 이토록 측량하기 어려우니, 참으로 큰 도둑이라 하겠다.
○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김순초(金順初)는 내가 괴원(槐院)에 있을 때의 옛 동료로, 사람됨이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군자였다. 원주 목사(原州牧使)가 되었을 적에 임진왜란이 갑자기 일어나자, 공은 고을 군사를 모으고 동남쪽을 가로막아 서로(西路)를 지킬 것을 계획하였다. 나는 호소근왕사(號召勤王使)로서 원주의 흥원창(興原倉)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공은 가리령(加里嶺) 영원성(?原城)에 들어가서 웅거하였다. 나는 정병 약간을 가려 보내서 원조해 주었다. 왜적이 성에 오르게 되자 민병(民兵)은 무너져 흩어졌고, 공은 부인과 차자(次子)와 함께 살해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염습(殮襲)하여 주천강(酒泉江) 동남쪽 산기슭에다 임시로 장사하였다가, 계사년 가을에 왜적이 물러가자, 여주(驪州) 땅으로 발인(發靷)하였다. 공의 맏아들 정랑 김시헌(金時獻)씨가 만사(挽辭)를 굳이 청하므로, 나는 사양하지 못하여 짧은 율시 3장을 지어 종이에 적어서 사람을 시켜 보냈다.


1

시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 勤苦詩書業
재주가 온전하고 덕 또한 많네 / 才全德又純
태평할 때는 뜻만을 즐기더니 / 時平唯樂志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몸 바쳐 인을 이루었네 / 世難却成仁
싸움에 패해 달아나니 장수 없음 부끄러워라 / 棄甲?無將
관문에 이르니 사람 있음 기쁘네 / 當關喜有人
당당한 천고의 절개는 / 堂堂千古節
장순 보다 못지 않으리 / 未必後張巡


1

백성은 청렴한 태수를 곡하고 / 民哭還珠守
조정은 높은 절의를 기렸네 / 朝褒死節隆
청렴 절의 다 이루고 아들 있으니 / 雙成又有子
온전한 아름다움 누군들 공과 같으리 / 全美孰如公
늠름한 기개는 안고경 의 지조요 / 凜凜?卿志
건건한 마음은 왕촉 의 충성일세 / 乾乾王?忠
산하같이 장하고 곧은 기개 / 山下壯直氣
때때로 긴 무지개 되리 / 時有化長虹


1

다섯 해나 승문원 옛 동료였고 / 五載承文舊
양대 조정에 묵은 정분 깊었네 / 二天宿契深
원래부터 좋아하여 상종함이 있었고 / 相從元有好
막역한 사이여서 서로 맘을 알았네 / 莫逆共知心
간절한 책선은 천 년의 가락이었고 / ?切千年調
형제간의 우애는 백 대의 소리였네 / 壎?百世音
기약을 같이 하고 함께 죽지 못했기에 / 同期未同死
저버림 부끄러워 눈물 흘리네 / 愧負淚盈衿
○ 실상이 없는 말을 헛말이라 하며, 말하고서 행하지 않는 것도 헛말이라 한다. 옛날에 사명(司命)이, ‘구천 상제(九天上帝)의 옆은, 뭇 별이 있는 곳이다.’ 하여, 실상이 없는 헛말을 부대 세 개에다 담고 하계(下界)에 던져서 길에 버려두었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이원(梨園) 노기(老妓)가 차지하고 그 다음은 길 옆 수령(守令)이 차지하고, 또 그 다음 것은 이조 판서가 차지하였다 한다. 이것은 세상에 보통 있는 이야기로, 잘 비유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이 세 사람은 지위(地位)도 같지 아니하고, 행하는 것도 다르되, 그 승낙한 것을 하나하나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형세가 저절로 그렇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러나 헛말이라는 나무람은 어찌 면할 수 있겠느냐?
○ 상공 이동고(李東皐 이름은 준경)가 수상이 되어, 도당(都堂)의 홍문록(弘文錄) 회의 때에 당초에는 몇 권(圈)으로 하기로 정했는데, 권을 다 거둘 무렵에 공은 다시 한 권을 추가하게 하였다. 그것은 공의 아들 이덕열(李德悅)이 초권(初圈)에 들었던 까닭에 한 권을 더한 것이다. 전후 수십 년 이래로 함께 참여한 당상(堂上)들이 모두 기를 부리고 마음으로 사귀어, 젖냄새 나는 그들의 자제도 권에 들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것은 권세 잡은 간신의 방자하게 군 것이었다. 이 상공이 비록 당초 약속을 어겼으나, 그의 정대(正大)한 기상은 따를 수 없다.
근자에 홍문록을 가릴 때에, 처음은 다섯 권으로 한정하였는데, 권을 수합한 뒤에 좌상(左相) 윤두수(尹斗壽)가 다섯 권으로는 인원수가 모자라니, 한 권을 줄여서 4점 이상은 수용(收用)하도록 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윤훤(尹暄)과 이조 참판 강신(姜紳)의 아들 강홍립(姜弘立)이 모두 4점으로써 홍문록에 참여하였다. 그 일처리가 이동고와 비교해 볼 때 어떠한가?
○ 박영(朴永)이라 부르는 자가 있었는데, 그의 근본은 나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북부(北部) 준수방(俊秀坊)에 우거(寓居)하여,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까닭에 가끔 서로 만났다. 사람됨이 온당하고 활달하여 모나지 않고, 또한 속된 무리와 섞이지 않았다. 초립(草笠) 만드는 것이 직업이었으나, 또한 부지런히 하지 않았다. 의식(衣食)이 자주 곤궁해졌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고, 술수학에 능통하여 말한 것에 맞는 것이 많았다. 중간에 소식이 오래도록 들리지 않다가 만력 정ㆍ무년간에 기쁜 얼굴로 와서 보고는,

“거의 10년을 관서 지방에서 생계를 꾸려 오다가 이제야 서울에 돌아오니, 인심과 풍속이 전과 크게 다릅니다. 위로 조사(朝士)로부터 아래로 일반 선비까지 모두 남을 깔보고 스스로 잘난 체하는 버릇이 있어 이미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형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영공(令公)이 비록 풍헌(風憲)을 맡았으나, 나이 젊은 신진(新進)들이 반드시 믿고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 견해만을 고집하면 저들은 반드시 이론(異論)을 세울 것이고, 나의 올바른 뜻을 굽혀 저들을 따르면 도리어 사체(事體)를 해치게 될 터이니, 차라리 산야(山野)에 물러가서 편하게 누워 있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내가 그의 말에 깊이 감복하였으나, 능히 따르지 못하였다. 그후 역옥(逆獄)의 변이 일어나서 3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고, 왜적의 난리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주D-001]동문에 …… 풀리 : 춘추 시대 월(越) 나라가 오(吳) 나라에 패하자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미인 서시(西施)를 바치면서 강화를 간청했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이를 승낙하고 간하는 충신 오자서(伍子胥 이름은 원〈員〉)마저 자결하게 했다. 그러자 오자서는 집사람에게,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빼서 동문(東門) 밖에 걸라. 월 나라가 오 나라를 망치는 것을 보겠다.’ 하였다. 그뒤 9년 후에 과연 월 나라가 이 오 나라를 멸망시켰다.
[주D-002]양련(楊璉) : 원(元) 나라 때 중 양련진가(楊璉眞伽)를 가리킨다. 양련진가는 원주(元主) 홀필렬(忽必烈)의 신임을 얻어 송(宋) 나라 옛 서울에 가서 송 나라 역대 황제의 능을 발굴하고 거기에 묻혔던 보물을 모두 훔쳐갔다.
[주D-003]곽 분양(郭汾陽) : 당(唐) 나라 명장 곽자의(郭子儀)를 이름.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여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짐으로써 얻은 별칭이다.
[주D-004]동리(東籬) : 동진(東晉) 말기에 도연명(陶淵明)이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딴다[採菊東籬下]’라는 말을 시에 쓴 뒤로 국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주D-005]용사(龍沙) : 중국 북방의 사막을 말한다. 북방의 사막이기 때문에 가을이 일찍 든다 한다.
[주D-006]갑자 :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육갑(六甲)만 쓴 것을 의미한다. 도연명(陶淵明)은 유송(劉宋)에게 동진(東晉)이 망한 후 연호를 쓰지 않고 갑자을축(甲子乙丑)만을 써서 유송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음을 보였다.
[주D-007]푸른 버들 : 도연명(陶淵明)의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오류 선생(五柳先生)이라 자칭했다. 그러므로 목은이 은근히 자기를 도연명에게 비유한 것이다.
[주D-008]현릉(玄陵) : 공민왕의 능이다.
[주D-009]영왕(瀛王) : 후주(後周)의 풍도(馮道)를 이름. 중국 오호(五胡) 때 왕조가 다섯 번 바뀌었으나, 풍도는 언제나 정승으로 있으며 임금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영왕에 봉해지고 자칭 장락로(長樂老)라고 했으므로 역사상 염치 모르는 정치가의 표본이 되었다.
[주D-010]장락(長樂) : 후주(後周)의 풍도(馮道)가 오래 향락한 것을 뜻한다. 주 9) 참조.
[주D-011]귀거래사(歸去來辭) : 동진(東晉)의 도연명이 팽택 령(彭澤令)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가며 지은 작품이다.
[주D-012]구괘(九卦) : 미상.
[주D-013]왕륜(王倫) : 쫓아낸 중이란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자세치 않다. 왕륜(王倫)이 《목은시고(牧隱詩藁)》에는 왕륜(王輪)으로 되어 있으니, 인명인지 왕의 수레인지 자세치 않다.
[주D-014]송헌(松軒) : 이성계(李成桂)의 호이다.
[주D-015]두 정(鄭)씨 : 정도전(鄭道傳)과 정총(鄭摠), 모두 목은을 해치려 하였다.
[주D-016]완악[頑] : 《목은시고(牧隱詩藁)》에는 안(顔) 자로 되어 있다.
[주D-017]빙산(氷山) : 빙산은 보기에는 큼직한 산이지만 햇볕만 나면 녹아 없어진다는 뜻으로, 권세를 믿을 수 없다는 말로 쓰인다. 《通鑑節要》
[주D-018]오천(烏川) : 연일(延日)의 옛 지명. 포은(圃隱)의 관향이 연일이므로 포은을 지칭함.
[주D-019]기축년 옥사 : 선조 22년(1589)에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을 다스리던 옥사를 말한다.
[주D-020]이윤(伊尹) …… 한 일 : 반정(反正)을 뜻함. 이윤은 은(殷) 나라 재상으로, 임금 태갑(太甲)을 잘못한다 하여 폐위하였다가 태갑이 개관천선하자 복위시켰으며, 한(漢) 나라 정승 곽광(?光) 역시 포악한 창읍왕(昌邑王)을 폐위하고 선제(宣帝)를 옹립(擁立)하였다.
[주D-021]저 따위라니 : 공자가 초(楚) 나라 정승 자서(子西)를 얕잡아 평한 말로써 말할 것도 못된다는 뜻임.
[주D-022]포거(鮑車) : 진시황(秦始皇)이 순행 중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죽자, 승상 이사(李斯) 등이 변이 날까 염려하여, 발상(發喪)을 하지 않고 반구(返柩)하였는데, 7월이라서 냄새가 나므로 수레에 포어(鮑魚) 1 석을 실었다. 포어 냄새로 시체의 냄새를 가시게 하자는 것이었다. 《史記》
[주D-023]부소(扶蘇) …… 받았으니 : 부소는 진시황의 장자이고, 몽염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지키던 장수인데, 진시황이 죽자, 차자 호해(胡亥)를 계승시키려던 이사 등이 거짓으로 시황의 명령이라 하여 사사(賜死)했다. 《史記》
[주D-024]한의 …… 양공(梁公) : 강후(絳侯)는 한(漢) 나라 장수 주발(周勃)을 말하고, 양공(梁公)은 당 나라 정승 적인걸(狄仁傑)을 말한다. 강후는 여후(呂后)가 친정 여씨에게 한의 정권을 넘기려는 것을 막았으며, 양공은 칙천무후(則天武后)가 친정 무씨에게 당의 정권을 넘기려는 것을 막았다.
[주D-025]안영(晏?) : 춘추 시대 제(齊) 나라의 현상(賢相)인데, 신장이 아주 작았다 한다.
[주D-026]증점(曾點) …… 크구나 : 증점은 공자 제자로 뜻이 커서 작은 일은 돌보지 아니하고 특히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아니했다고 한다.
[주D-027]무가보 …… 구슬이요 : 춘추시대 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얻은 구슬로, 세상에서 제일 좋아 값을 매길 수 없어 무가보(無價寶)라 하였다 한다.
[주D-028]운몽호(雲夢湖) : 중국 호남 지방의 큰 호수인데, 도량이 큰 사람을 운몽호도 들어마실 수 있는 인간이라 한다.
[주D-029]간기(間氣) : 천지간에 뻗쳐 있는 깨끗한 기운으로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 이 간기를 타고난다 한다.
[주D-030]괴소(塊蘇) : 흙덩이와 풀더미라는 뜻으로, 주 목왕(周穆王)이 신선의 옷을 입고 하늘에 올라, 자기의 궁궐을 바라보니 흙덩이와 풀더미 같았다 한다. 《列子》
[주D-031]단양엔 …… 시들어지리 : 단양은 영해(寧海)의 옛 명칭이다. 위인이 나면 그 지방의 초목이 시든다는 고사에서 나옴.
[주D-032]채찍 잡지 : 그 덕을 흠모하여 채찍 잡는 것같은 천한 일이라도 그를 위해 하기를 원하는 것을 말한다. 《史記》
[주D-033]떠도는 말이 …… 미치니 : 주 성왕(周成王)이 즉위하여 나이가 어려서,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하였는데, 관숙(管叔)이, ‘주공이 장차 성왕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래서 주공이 동도(東都)로 피해 살았는데, 그해 가을 추수하기 전에 큰 천둥ㆍ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어 벼가 다 쓰러졌다. 《書經 金?》
[주D-034]가정(稼亭) : 가정은 이곡(李穀)의 호이다.
[주D-035]삼도 : 여기서는 한양(漢陽)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을 말한다.
[주D-036]오부(五部) : 한성(漢城)을 중부ㆍ동부ㆍ서부ㆍ남부ㆍ북부 다섯 구역으로 나누고 그 각 구획 안에 둔 소송ㆍ도로ㆍ금화(禁火)ㆍ택지(宅地)에 관한 사무를 맡은 다섯 관아를 일컫는다. 태조 3년에 정하여 고종 31년에 없앴다.
[주D-037]신숭(神嵩) : 숭(嵩) 자는 숭(崧) 자와 통하므로, 송악산(松嶽山)을 가리킨다.
[주D-038]하늘에는 …… 있으니 : 하늘의 열 가지 날이란 천간(天干) 갑(甲)ㆍ을(乙)ㆍ병(丙)ㆍ정(丁)ㆍ무(戊)ㆍ기(己)ㆍ경(庚)ㆍ신(辛)ㆍ임(壬)ㆍ계(癸), 사람의 열 가지 등급이란 왕(王)ㆍ공(公)ㆍ대부(大夫)ㆍ사(士)ㆍ조(早)ㆍ여(輿)ㆍ예(?)ㆍ요(僚)ㆍ복(僕)ㆍ대(?)를 말한다. 《春秋在氏傳 昭公7年》
[주D-039]삼사(三駟)의 법 : 옛날 중국에서 말을 상ㆍ중ㆍ하 3등급으로 네 필씩 골라 경주시켰는데, 손무는 자기 하등마는 적의 상등마와, 자기 상등마는 적의 중등마와, 자기 중등마는 적의 하등마와 경주하게 하여 한 번은 참패하였으나 두 번은 승리하였음. 이것을 실전에도 응용하였음.
[주D-040]한단의 걸음[邯鄲之步] : 중국 한단은 걸음 잘 걷기로 유명하였다. 어느 사람이 한단으로 걸음을 배우러 갔었는데, 배우지도 못하고, 한단까지 가느라고 발병이 나서 예전의 걸음조차 잊어버렸다 함. 자기 본분을 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면 두 가지 다 잃는다는 비유.
[주D-041]왕환(王奐)이 …… 교화시킨 것 : 한 나라 때 왕환(王奐)이 고을 원으로 나갔는데, 늙은 노파가 와서 아들이 때렸다고 호소했다. 왕환은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소치’라 생각하고, 그 아들 진원(陳元)을 불러 타일렀는데 그 아들이 결국 효자가 되었다 한다.
[주D-042]적신(積薪) : 땔나무를 쌓을 때 먼저 온 것은 밑으로 들어가고 나중에 온 것은 위에 오르듯이 선진자는 하위에, 후진자는 상위에 처하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급암전(汲?傳)에, ‘폐하가 뭇 신하를 쓰는 것은 마치 나뭇가리 쌓는 것과 같아 나중에 온 자가 상위에 처한다[陛下用郡臣如積薪耳後來者居上].’ 하였다.
[주D-043]대비(大比) : 경대부의 덕행과 도예(道藝)를 3년마다 시험을 치러 어질고 능한 자를 뽑은 데서 비롯되었다. 《周禮》
[주D-044]촉각(燭刻) : 시간을 제한하는데, 밤에 시간을 알기 어려우므로 초에 금을 그려서 시간 가는 것을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주D-045]성상소(城上所) : 조선 시대 때 직소의 하나로 양사(兩司)의 관원이 대궐문 위에서 드나드는 백관을 살피던 곳이다.
[주D-046]존양(存羊)의 뜻 : 옛날 제도를 일부러 그대로 두는 일을 말한다. 공자 제자 자공(子貢)이 종묘에 초하루를 고할 때 양을 제물로 쓰는 제도를 없애려 하자, 공자가 그대로 두게 한 일에서 나온 말이다. 《論語 八佾》
[주D-047]하간(河間)의 계집 : 중국 하간 지방은 여자의 음행이 많기로 유명하여 음란한 여자의 대명사처럼 되었음.
[주D-048]소공(召公)의 감당(甘棠) : 백성이 시정자(施政者)의 덕을 우러름을 뜻한다. 주(周) 나라 소공(召公)의 선정에 감격하여 백성들이 그가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겨 꺾지도 않고 베지도 않았다 한다. 《詩經召南》
[주D-049]공택(公擇) : 송(宋) 나라 이상(李常)의 자이다. 그는 산방(山房)에 수천 권 서책을 쌓아 글읽는 이에게 공개했는데, 소동파(蘇東坡)는 이씨산방장서기(李氏山房藏書記)를 썼다.
[주D-050]양상군자(樑上君子) : 도둑을 말한다. 한(漢) 나라 진식(陳寔)이 대구(大邱)의 원으로 있을 적에 도둑이 들보 위에 숨은 것을 알고 아들에게, ‘들보 위의 군자도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라 생활이 어쩔 수 없어 저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자 도둑은 감복해서 들보에서 내려와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 한다.
[주D-051]구중주(口中珠) : 옛날, 사람이 죽으면 반함(飯含)이라 하여 입속에 구슬을 넣었다. 《莊子 外物》 여기서는 책이 구슬도 아닌데 도둑질해 갔음을 뜻한다.
[주D-052]배 사도(裵司徒) : 당 헌종(唐憲宗) 때 평장사(平章事) 배도(裵度)를 가리킨다. 배도는 회채(淮蔡)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졌는데, 그후 환관들이 정치를 흐리게 하자, 동도(東都)에 녹야당(綠野堂)이란 별장을 짓고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음.
[주D-053]금난리(禁亂吏) : 사헌부에 소속하여 법령을 어기고 어지럽히는 것을 막던 아전을 말한다.
[주D-054]패초(牌招) : 각 관아에서 사람을 부를 적에 소환하는 패가 있는데, 그 패를 초패(招牌)라 하고, 그 초패를 가지고 가서 부르는 것을 패초라 한다.
[주D-055]종각(鐘閣) : 종각은 지금의 종로 보신각이 아니고, 경복궁 서남 모퉁이에 있는 서십자각(西十字閣)을 말한다. 예전에는 서십자각에 종을 달았다.
[주D-056]장순(張巡)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충신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허원(許遠)과 함께 수양(?陽)을 사수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잡혀 죽었다.
[주D-057]안고경(顔?卿)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충신이다. 상산 태수(常山太守)를 지내, 안상산(顔常山)이라고도 한다.
[주D-058]왕촉(王?) : 전국시대 제(齊) 나라 충신이다. 임금의 잘못을 간하다가 듣지 않으므로 농사 짓고 있었는데, 연(燕) 나라가 제 나라를 격파하고 왕촉을 불렀다. 왕촉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받들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하고 자살하였다. 《通鑑節要》
[주D-059]이원(梨園) : 이원은 당 현종(唐玄宗)이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던 곳이다. 전하여 기생들이 있는 곳을 말한다.
[주D-060]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ㆍ수찬을 선거 임명하는 기록이다. 교리ㆍ수찬의 선거는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이 뽑힐 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홍문관 부제학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마음에 둔 사람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을 다시 의정(議政)ㆍ참찬ㆍ대제학ㆍ이조 참판ㆍ이조 참의 등이 행하는 도당록(都堂錄)을 거쳐서 임금에게 올리면 차점 이상의 득점자를 교리 또는 수찬에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