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의역사 ▒

한산(韓山)에 이르니, 그 시조 이자성(李自成), 가정(稼亭) 이곡 목은 이색 이종선, 이종학, 이계완의 묘소가 모두 그 고을에 있으므로 -윤국형(尹國馨)-

천하한량 2007. 3. 7. 20:22

문소만록(聞韶漫錄) 
 

판서 윤국형(尹國馨) 저

 

 

-우리 어머니는 목은(牧隱)의 6대손이시다. 내가 호서(湖西)의 감사(監司)로 순회하다가 한산(韓山)에 이르니, 그 시조 이자성(李自成), 가정(稼亭) 이곡(李穀), 목은 이색(李穡), 한성 판윤(漢城判尹) 이종선(李種善), 지돈녕부사 이종학(李種學), 감찰 이계완(李季腕)의 묘소가 모두 그 고을에 있으므로 모두 성묘하고 잔을 올렸다.
지돈녕부사는 우리 고조모 이씨의 할아버지시기도 하다. 감찰의 묘 앞에 있는 비갈(碑碣)이 부서졌기로 내가 다시 만들어 세웠다. 목은의 풍비(?碑 공덕을 기려 세운 큰 비석)는 묘소 옆에 있고, 서원(書院)은 공저(公著 이성중(李誠中)의 자)가 군수로 있을 때 세운 것이라 한다.
그 뒤에 경립(敬立)도 어사(御史)가 되어 여러 묘소에 두루 참배했다 한다. 영감 여인(汝仁)에 의하면 감찰은 일찍이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로 있었고, 부인 민씨(閔氏)는 지평 민소(閔逍)의 딸이며, 묘소는 제릉(齊陵) 근처에 있다고 한다.
나는 아홉 살 때부터 교관(敎官) 유임(兪任)에게 6~7년 동안 글을 배워서 비로소 개몽(開蒙)하여 마침내 과거를 보았으니, 이는 모두 가르쳐 인도해 준 은혜이다. 그 뒤에는 혹 판사 황박(黃博)과 감사 이담(李湛)에게 배우기도 했으나 모두 유선생 문하에서와 같이 전념하고 오래 배우지는 못했다. 유선생은 91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도 총명이 여전하여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상을 치를 때에는 울면서 일을 하는 제자들이 위로는 육경(六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백 명이나 되었으니, 이때는 병술년(선조 19, 1586) 겨울이었다. 초상을 치르는 일에는 정성을 다하였고,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판서 권징(權徵), 판서 윤탁연(尹卓然)과 내가 성심껏 염출하여 본가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모든 기구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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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만록(聞韶漫錄)   
 
 
문소만록(聞韶漫錄) 
 

판서 윤국형(尹國馨) 저
○ 나는 태어난 지 겨우 반 달 만에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유씨(柳氏)와 외증조모 이씨(李氏)가 길러 주었다. 유모(乳母)를 얻으면 젖이 이내 끊어지고 나오지 않아서 여러 번 유모를 바꾸게 되었으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여섯 달을 이렇게 하였다. 어찌 할 방법이 없어서 쌀을 씹어 죽을 만들어 먹여 겨우 연명하였으니, 두 할머니의 고생이 오죽했으랴. 정씨(鄭氏) 집으로 출가한 고모도 출가하기 전에는 나를 많이 안아 주고 업어 주었다.
이씨는 계축년(명종 8, 1553)에 68세로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때 내 나이 11세였고, 유씨는 경진년(선조 13, 1580)에 71세로 돌아가셨으니 그때 내 나이 37세로 지평으로 있을 때였다.
일찍이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外職)을 구했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하늘에 사무치는 한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고모가 계유년(선조 6, 1573)에, 아버님이 갑술년(선조 7, 1574)에 모두 세상을 떠나시자, 할머니께서는 상심으로 병환이 나셨는데 회복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 나이 16세 때에 아버님을 따라 처음으로 의성(義城)에 와서 새 어머니를 뵈었는데, 어머니는 나를 자기가 낳은 자식과 다름 없이 사랑하시고 어루만져 주시었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효성이 부족해서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내가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 나는 외아들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고, 내외손(內外孫)도 많으며, 우리 내외 역시 병이 없고, 또 외람되게 국가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분에 넘치게 높고 두 아들도 현달(顯達)하니, 사람들은 모두 복 있는 집안이라고 칭하였다. 그런데 넷째 아들이 일찍 죽고, 막내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으며, 올 가을에는 또 맏며느리를 잃었으니, ‘교만한 자는 손실을 자초하고, 겸손한 사람은 이익을 받는다.’는 것이, 하늘의 도인 것이다. 모든 우리 아이들이 진실로 ‘겸손하면 이익을 받는다.’는 도에 마음을 다한다면 가득 차더라도 손해가 나지 않을 리가 어찌 없겠는가. 각각 힘쓰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는 두 아들을 잃은 뒤로 항상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조정에 벼슬한 지 거의 30년 동안 잘못한 일이 많지는 않은데 이러한 재앙을 만났으니, 하늘은 어찌 이처럼 심한 화를 내리시는가?”
하였는데, 이제 또 맏며느리를 잃어 집에 화가 그치지 않고 닥치니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몹시 두렵다. 상주(尙州)를 다스릴 때에 적을 잡아 문초하다가 죽은 자가 전후에 걸쳐 10여 명이 되고, 호남(湖南)을 다스릴 때 변고가 생긴 뒤에 처형된 자가 또 7~8명이나 된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모두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들이고, 하나도 원한이 있거나 미워서 고의로 죽인 것은 아니라고 여겼는데, 혹 죽음을 당하지 않을 사람이 원통하게 죽지나 않았는지 알 수 없다. ‘남은 앙화가 있다.’는 말과 ‘그 종을 실추시키리라.’는 말은 《주역(周易 곤괘(坤卦))》과 《상서(尙書 이윤편(伊尹篇))》에서 경계한 바이고, 제갈공명(諸葛孔明)도 “악한 일은 작다고 하여 하지 말라.’ 하였으니, 성현도 오히려 착하지 못한 일을 하지나 않나 경계했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겠는가. 착한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것이니, 이것을 내가 자손들에게 깊이 바라는 바이다.
○ 아버님께서는 비록 술을 좋아하셨어도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르신 일은 없으셨으며 취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기를 목표로 삼으셨다. 그런데 내 아이 경립(敬立)은 취하기만 하면 반드시 큰소리로 떠들며, 의립(義立)은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지난 여름에 우연히 술을 먹고 주정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것은 가장 나쁜 짓이다. 경립은 주량도 크고 술도 즐기니 끊을 수는 없겠지만 절제하는 것이 진실로 좋겠다. 옛날에 정일두(鄭一? 이름은 여창(汝昌)) 선생이 술에 취해서 들판에 쓰러져 하룻밤을 자고 집에 돌아갔다. 그 어머니가 몹시 책망함으로 인하여 임금이 내리는 술이나 음복(飮福)하는 경우 외에는 다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한다. 의립도 이것을 본받으면 더욱 좋겠다. 그러나 병이 있을 때에 기운이 돌 정도로만 마시는 것도 묘방이다. 신립(信立)도 술을 좋아하니 이상과 같이 경계하는 바이다.
○ 나의 살아 있는 여러 아이들은 앞날이 아직 창창하니, 어떻게 진취할 것인지 감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립(禮立)은 성품이 자못 단정하고 진중하며 말을 더듬거리고 글을 짓는 것은 비록 익숙하지는 못하나 재주는 속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잃었으니, 하늘이 나에게 이렇게 잔인하단 말인가.
덕립(德立)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진중하여 나이 10세가 넘자 엄연히 어른과 같았다. 막내 아들인 까닭에 우리 내외가 몹시 사랑하여 일찍부터 교육을 시키지 않다가 상주(尙州)에 와서 비로소 글 아는 시골 선비를 시켜 가르치게 하였다. 기축년(선조 22, 1589) 여름에 몹시 가물다가 폭우가 쏟아지므로 내가 밤에 기뻐하여 연구(聯句)을 짓게 하니, 시를 지을 줄 모른다고 사양하기에, ‘글자 수의 많고 적은 것에 구애하지 말고 네 맘대로 지으라.’ 했더니, 즉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용이 장난하여 비가 쏟아지니 / 龍亂雨落
사해 만민의 노여움이 풀렸도다 / 四海萬民解?兮

이 11자는 그 속에 포함된 뜻이 넓다 하겠다. 이듬해에도 절구로 ‘새죽순[新?]’이란 시를 읊었는데 아래의 두 구였다.

정이 없는지 생각이 있는지 어느 누가 알리 / 無情有思何人識
고운 껍질 속에 백 자나 긴 것이 감추어 있네 / 錦?中藏百尺長

매우 원대한 기상이 있어서 나는 은근히 크게 성취되기를 바랐는데, 또 적중에서 잃었으므로 필연 죽었을 것이다. 설령 죽지 않았다 해도 이미 포로가 되었을 것이니, 살아서 돌아오기란 바랄 수가 없다. 매양 이 생각을 하면 차라리 죽어서 아무 것도 몰랐으면 한다. 천지가 없어진들 이 한이야 없어지랴! 마음과 눈에 삼삼하니 언제나 잊을 것인가. 인하여 회포를 읊는 시를 지었다.

하늘이 내게 두 아이를 주어 / 天與我二兒
기대됨이 있는 것 같았는데 / 若有所待
하늘이 내 두 아이를 빼앗아가니 / 天奪我二兒
한결같이 나를 돌봐 주지 않는가 / 一何不貸
이미 주었다가 이내 빼앗으니 / 旣與而旋奪
하늘은 또한 무슨 마음인고 / 天亦何心
묻고자 해도 하늘은 말이 없으니 / 欲問而天無言
하늘도 실로 믿기 어렵구나 / 天實難諶

○ 우리 어머니는 목은(牧隱)의 6대손이시다. 내가 호서(湖西)의 감사(監司)로 순회하다가 한산(韓山)에 이르니, 그 시조 이자성(李自成), 가정(稼亭) 이곡(李穀), 목은 이색(李穡), 한성 판윤(漢城判尹) 이종선(李種善), 지돈녕부사 이종학(李種學), 감찰 이계완(李季腕)의 묘소가 모두 그 고을에 있으므로 모두 성묘하고 잔을 올렸다.
지돈녕부사는 우리 고조모 이씨의 할아버지시기도 하다. 감찰의 묘 앞에 있는 비갈(碑碣)이 부서졌기로 내가 다시 만들어 세웠다. 목은의 풍비(?碑 공덕을 기려 세운 큰 비석)는 묘소 옆에 있고, 서원(書院)은 공저(公著 이성중(李誠中)의 자)가 군수로 있을 때 세운 것이라 한다.
그 뒤에 경립(敬立)도 어사(御史)가 되어 여러 묘소에 두루 참배했다 한다. 영감 여인(汝仁)에 의하면 감찰은 일찍이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로 있었고, 부인 민씨(閔氏)는 지평 민소(閔逍)의 딸이며, 묘소는 제릉(齊陵) 근처에 있다고 한다.
나는 아홉 살 때부터 교관(敎官) 유임(兪任)에게 6~7년 동안 글을 배워서 비로소 개몽(開蒙)하여 마침내 과거를 보았으니, 이는 모두 가르쳐 인도해 준 은혜이다. 그 뒤에는 혹 판사 황박(黃博)과 감사 이담(李湛)에게 배우기도 했으나 모두 유선생 문하에서와 같이 전념하고 오래 배우지는 못했다. 유선생은 91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도 총명이 여전하여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상을 치를 때에는 울면서 일을 하는 제자들이 위로는 육경(六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백 명이나 되었으니, 이때는 병술년(선조 19, 1586) 겨울이었다. 초상을 치르는 일에는 정성을 다하였고,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판서 권징(權徵), 판서 윤탁연(尹卓然)과 내가 성심껏 염출하여 본가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모든 기구도 갖추었다.
유선생은 나이 70세가 넘어서도 기운이 매우 강녕하였다. 여러 제자들이 봄ㆍ가을로 잔치를 벌여 헌수(獻壽)했다. 묵사동(墨寺洞) 성 정승(成政丞)의 옛 집의 행랑이 넓으므로 언제나 여기에서 연회를 열었다. 선생은 명례동(明禮洞)에 살다가 만년에 묵사동으로 옮기셨는데, 잔치 때에는 언제나 매우 즐겁게 노셨다. 높은 벼슬에 있는 제자들이 많아 금관자나 옥관자가 번쩍번쩍했고, 대각(臺閣)으로 있는 벼슬아치들이 좌우에 늘어 앉았으며 유생(儒生)과 아이들까지도 모두 참여했다. 잔치가 파하면 선생은 말을 타고 가고 여러 제자들은 모두 걸어서 뒤를 따르는데, 등불이 휘황하고 음악 소리는 하늘을 울리며 거리를 메우고 지나가니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이 집에 돌아가신 뒤에라야 비로소 흩어졌다.
말년에 선생은, ‘성 정승의 집에서 잔치를 열면 여러 사람이 걸어서 따라오는 것이 몹시 불안하다.’ 하여, 본댁에서 잔치를 열도록 했다. 기사년(선조 2, 1569)으로부터 병술년에 이르기까지 18년 동안 국상(國喪)이 있는 해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이것을 상례로 삼았다. 묵사동에는 선배와 높은 벼슬아치들이 많았는데, 모두 흠모하여 감탄하기를,

“유 교관(兪敎官)의 복은 우리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
했다.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 전후에 통틀어 거의 천여 명에 달했으니, 당시 동몽 교관(童蒙敎官)으로서 제자를 가르친 것이 이처럼 많은 이는 없었다. 선생은 병진년(명종 11, 1556)에 태어나서 임오년(선조 15, 1582)에 생원이 되었다. 어질고 옛 사람을 존경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몸가짐이 간결하여 터럭만큼도 망령된 일을 하지 않았으며, 집이 몹시 청빈(淸貧)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딸 몇 명만 있고 아들은 없었다. 나이 91세로 병술년(인조 19, 1646) 10월 20일에 세상을 떠나니 광주(廣州)에 장사지냈다.
○ 경신년(명종 15, 1560)에 나는 장인을 따라 순안(順安)에 가서 산사(山寺)에 묵으며 글을 읽으면서 거지 한 사람을 만났는데, 이름은 천유(天裕)이며 용맹이 있고 글도 능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거처하면서 그가 본래 유유(柳游)임을 알았으니, 실로 성명을 바꾼 사람이었다.
갑자년에 서울에서 유연(柳淵)이 그 형 유유를 죽였다 해서 옥사가 일어나 승복을 받아 법으로 다스린 일이 있었다.
그 뒤에 내가 또 관서(關西)에 왕래하는데 유유는 아직도 살아 있어서 마음속으로 적이 의심했는데, 수십 년이 지나서도 다시 들어보면 유유는 분명 죽지 않았다 하므로, 유연이 죽은 것은 실상 억울한 일이었다. 기묘년 겨울에 내가 옥당의 당번으로 입시했을 때 이 일을 아뢰었더니, 상이 법사(法司)에 명하여 잡게 하였는데, 과연 유유는 생존해 있었다. 이리하여 유연의 원통한 옥사가 씻어졌으니 일이란 이와 같이 그 실상을 알기 어려운 것이다. 내 자손들 중에 옥사를 맡아보는 자가 있거든 이 일을 거울삼아 경계하면 매우 다행이겠다.
○ 정축년(선조 10, 1577)에 내가 비로소 옥당에 들어갔는데, 바야흐로 을사년의 위훈(僞勳)을 삭탈하기를 청하여 하루에 두 번씩 차자를 올려 7월에서 11월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고,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와 온 조정이 모두 논쟁하였다. 인묘대비(仁廟大妃 인종(仁宗)의 비 박씨) 공의전(恭懿殿)의 병환이 몹시 위중하므로 상은 비로소 조정의 청을 받아들여 대비의 마음을 위안시켰는데, 이튿날 대비가 승하하니, 백성들은 모두 성주(聖主)의 일 처리가 인정과 예법에 맞았다고 추앙했다. 공의전에게 인성(仁聖)이란 휘호를 올렸다.
○ 정축년 겨울 공의대비(恭懿大妃) 초상에 대신들이 전하의 복을 부장기(不杖朞) 로 정하니, 삼사가, “명종(明宗)께서 인종(仁宗)과 친하기로는 비록 형제간이지만, 왕위를 계승한 중함이 있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고, 닷새 동안을 청해서 윤허를 얻어 엿새 되는 날 비로소 성복(成服)을 했다.
○ 정축년 9월에 상이 선릉(宣陵 성종(成宗)의 능)과 정릉(靖陵 중종의 능)에 참배하고, 돌아올 때 제천정(濟川亭)에 납시어 음악을 연주하려 하는데, 삼사에서 계청(啓請)하되, ‘하룻동안에 남은 슬픔이 다 가시지 않았으니 음악을 정지하소서.’ 하니, 곧 그대로 좇아 시위하는 재상들에게만 술을 내리도록 했다. 이때 나는 수찬으로 수행했다.
○ 이조와 병조의 낭관이 이 사람을 추천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인데, 사람 가려 쓰기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계미년(선조 16, 1583) 가을에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이조에서 천거하는 것을 없애자.’고 아뢰었으니, 이는 전랑(銓郞)이 인사권을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었다. 병조에 대해서는 박사암의 장계에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있었다. 그때 나는 이조 정랑으로 있었는데, 이해 초여름에 좌랑 김자앙(金子昻)과 함께 홍태고(洪太古)를 천거했으나 이후로는 천거가 시행되지 못했다. 만일 인사권을 마음대로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만을 죄 주면 되는 것인데 그 천거하는 권한마저 없애 버리니, 마치 정(鄭) 나라 사람이 향교(鄕校)를 헐려고 한 일과 비슷하다.
○ 을유년(선조 18, 1585) 가을에 상이 명령하기를,

“대간은 과실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 나를 구해 주었고, 옥당은 미연에 일깨워 주었으니, 각각 한 자급, 한 자리씩 올려 주라.”
하였다.
이때 나는 부응교에서 응교에 오르고, 품계는 통훈대부(정3품 하계(下階) 당하관의 최고 품계)가 되었다.
정해년 초겨울에 하교하기를,

“은대(銀臺 승정원의 별칭)는 조석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있으니, 각각 숙마(熟馬 길들여진 말) 한 필씩 주라.”
하였다. 나는 그때 우승지로 있었는데, 저녁에 나가 보니 태복시(太僕寺)의 사람이 벌써 말을 끌고 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자년 가을에 내가 또 좌승지가 되어 시골에 가서 부모를 뵙고 서울로 돌아오니, 상이 창릉(昌陵 예종의 능)과 경릉(敬陵 덕종의 능)에 거둥하려고 하여 승정원에 갓과 이엄(耳掩)과 활ㆍ화살을 하사했다.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인데, 나는 세 번이나 참여했다.
○ 내가 동부승지가 된 지 겨우 열흘이 되어 경기 감사 자리에 결원이 있었으므로, 정원(政院)에 특명을 내리기를,

“승지 중에 늙은 부모가 있는 자는 서계(書啓)하라.”
하였다. 그래서 도승지 김중숙 응남(金重叔應南 중숙은 자)과 우승지 김숙진(金叔珍)과 나 3인을 서계하였더니, 숙진이 낙점을 받았는데, 이는 전고에 없던 성은(盛恩)이었다.
○ 정해년(선조 20, 1587) 7월에 내가 승정원에 들어간 지 한 달도 못 되어 우부승지로 승격되어 혼자 계신 어머님을 가 뵈려고 청했더니 휴가를 주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예방 승지(禮房承旨) 윤모(尹某 필자 자신)의 늙은 어머니에게 음식을 보내 주도록 본도 감사(本道監司)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 감격의 눈물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시 우리 동배들 중에 노모가 있다고 해서 음식을 주라는 은혜를 입은 자는 유서애(柳西厓 이름은 성룡(成龍))와 이경함 발(李景涵潑 경함(景涵)은 자)과 나 세 사람뿐이었으므로, 사우(士友)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겼다.
○ 을유년 겨울에 내가 응교로 야대(夜對)에 입시하였다. 강이 파하자 술을 내렸는데 술상에 귤이 놓여 있었다. 수찬 홍군서 이상(洪君瑞履祥 군서(君瑞)는 자)이 몹시 취해서 손을 들어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전에 중국에서 보니 크기가 유자만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은 이렇게 작으니, 물산(物産)도 곳에 따라 다르구만.”
하므로, 나도 말하기를,

“나는 중국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통역관에게 들으니 무도 큰 것은 양끝을 마주 매어서 말갈기 위에 걸어 놓으면 말이 무거워한다고 한다. 물산이 같지 않은 것은 귤뿐만이 아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토질이 기름지고 메마른 데에 따라 그런 것이다. 사람에게 비유하면 신하 의 충직하고 아첨함이 처지를 바꾸면 달라지는 수도 있으니, 오직 임금이 기르기에 달렸을 뿐이다.”
하였다.
한림 허공언 성(許功彦筬 공언(功彦)은 자)이 또한 배거(裵炬)를 인용해서 풍자하니, 상이 이르기를,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 물건의 성질은 진실로 이런 것이다.”
하니, 좌중이 모두 대답하기를,

“주상 전하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 물건을 들어서 이치를 생각하는 것도 정치하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술이 두어 순배 돌자, 나는 몹시 취해서 술잔을 받들고 오래 꿇어앉아 있으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해서 마시지 않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소신은 주량이 크지 못해서 이처럼 술잔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기(禮記)》에, ‘어른이 물건을 내리면 젊은 자나 천한 자는 감히 사양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하물며 내가 주는 것임에랴? 그대의 말은 《예기》의 말과 아주 다르다.”
하였다. 삼가 성교(聖敎)를 들으며 감격하여 마음이 동해서 즉시 쾌히 잔을 기울였더니,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궐문 밖에 나오자마자 문득 넘어지니 하리(下吏)들이 부축하여 수직하는 데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후 3년 만인 정해년 겨울에 내가 부제학이 되었다. 그때 신립(申砬)이 남도 병사(南道兵史)가 되어 조정에 하직하려 하는데 상이 특명으로 인견(引見)하였다. 정승 정입부 언신(鄭立夫彦信 입부(立夫)는 자)이 당시 병조 판서로 나와 함께 들어가 참여했는데, 이때에도 술을 내렸다. 내가 몹시 취하자, 상이 웃으며 하교하기를,

“내가 옛날에 말한 것을 잊었소? 경은 본래 술을 잘 마시니, 사양치 말고 다 마시오.”
하였다. 나는 하교를 듣고 감격하여 눈물이 저절로 흐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여 절하고 사례했다.
이때 장령 송언신(宋言愼)이 공사장의 일을 가지고 호조 판서 황정욱(黃廷彧)을 논하는데, 그 말씨가 자못 심각하였다. 상은 이로 인하여 정욱이 혹 흔단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 뒤에 교리 권협(權?)이 경연에서 송언신에게는 딴 뜻이 없다고 아뢰자, 상은 송언신을 구원한다고 말하여 아랫사람들이 모두 송구스럽게 여겼다. 상이 나에게, “송언신의 말이 어떠냐?”고 묻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송언신의 계사(啓辭)는 과연 지나치게 심각하였으나 그것은 말을 쓰는 데 중도를 잃은 것에 불과하옵지, 실로 공격할 뜻은 없었습니다.”
라고, 여러 번 되풀이하여 아뢰었고, 입부(立夫)도, “윤국형(尹國馨)의 아뢴 것이 옳다.”고 조언하니, 상이 의심을 풀고 말하기를,

“장자(長者)를 얻어 옥당의 장으로 삼았으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랴?”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송구하여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아뢰고 나왔다.
○ 기축년 2월 1일에 나는 특명으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어 4일에 조정을 하직하였다. 처음에는 6일에 길을 떠나려 했는데, 3일 밤에 심백구 희수(沈伯懼喜壽 백구(伯懼)는 자)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일 삼사에서 차자를 올려 자네가 떠나는 것을 만류하려 하는 데 그것을 아는가?”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조금만 늦으면 반드시 낭패가 되겠다 싶어, 4일에 지레 떠났다. 동문 밖까지 나와서 전송해 주는 친구와 사대부들이 많아 해가 떨어진 뒤에 남벌원(南伐院)에 다다르니, 승정원 서리 수십 명이 모두 말머리에서 절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전별 술잔을 올리겠나이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이리 하느냐?”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승정원에서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은 일찍이 본 일이 없으니, 우리들이 마음으로 적이 탄식하여 감히 이렇게 하나이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도성 문이 닫힐 터이니 너희들은 오래 있을 수 없다. 너희들 중의 우두머리 되는 자가 대표로 잔을 들어 주면 나는 마시리라.”
하고, 말 위에서 두어 잔 마시고 파했다. 사우(士友)들 사이에 이 말을 듣고 아름다운 일로 전한다. 당초 특명이 승정원에 내리니, 늙은 서리 강수천(姜壽千)이 와서 앞에 엎드리면서 문득 눈물을 떨어뜨리기에 내가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를 입어 장차 노모(老母)를 봉양하게 되었으니, 이는 사사로운 기쁨 중의 큰 것인데, 네 어찌 이같이 하느냐?”
하였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공의 말씀은 옳습니다만, 오랫동안 승정원에 있으면서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마음이 동해서 이같이 됩니다…….”
하였다.
내가 함창(咸昌)에 이르러 동헌에 씌어 있는 시를 보니, 김양경(金良鏡)의 절구시가 있었다. 그 끝에,

승지가 일을 말한 때문에 / 以承旨言事
상주 목사가 되었군 / 爲尙州牧使

했는데, 흡사 내 일과 비슷하니, 괴이한 일이다. 양경은 고려 때 재상으로 시를 잘 짓는다는 이름이 났다 한다. 그의 시에,

어찌 하늘 향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랴 / 豈向蒼蒼有怨情
귀양 와서도 오히려 한 고을을 다스리네 / 謫來猶自得專城
어느 때나 영각에서 황각에 올라 / 何時鈴閣登黃閣
태수로서 재상이 되어 가리 / 太守行爲宰相行

하였는데, 뒤에 과연 재상이 되니, 사람들은 시참(詩讖)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원정(怨情)’이란 두 글자는 반드시 마음속의 생각을 표현한 말이고, ‘황각(黃閣)’ㆍ‘재상(宰相)’이란 말은 더욱 희망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니, 군자가 마음을 평탄히 갖고 이치에 순히 하는 도리로는 아마 이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의 일이 우연히 서로 부합되기 때문에 나의 글솜씨가 졸한 것을 따지지 않고 여기에 화답하였다.

성주께서 신의 까마귀 반포하는 정을 알아 / 聖主知臣烏鳥情
특별히 한 고을을 내주어 봉양하라 했네 / 洪恩特許養專城
상산(상주의 옛 이름)에 내일 관청 일이 파하면 / 商山明日新衙罷
문소로 빨리 가서 어머님을 모시리 / 將母聞韶敢緩行

그 뒤에 《동인시화(東人詩話)》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니, 모두 김양경의 시가 실려 있었다.
상주는 성이 몹시 허물어져서 조정에서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쌓을 것을 결심하고 온 고을을 모조리 8결(結)로 나누어 8결을 1부(夫)로 삼아, 1부에게 너비 두어 자씩 맡겨서 그 옛터대로 쌓도록 하여 열흘이 채 못 되어 공사가 끝났던 것이니, 이는 신묘년(선조 24, 1591) 봄의 일이다.
임진년(선조 25, 1592) 여름. 왜적이 크게 이르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서울에서 변고를 듣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으나 고을 사람들이 이미 흩어져서 성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북쪽 냇가에 나가 진을 치고 적과 교전했으나 크게 패하여 주성(州城)이 드디어 적에게 점령되었는데, 계사년 여름에 비로소 적이 물러났다. 내가 전에 고을에 간직된 옛 문서를 상고해 보았더니, “공민왕(恭愍王) 말년에 왜적이 본주를 불태워 함락시켜서 성이 모두 무너졌던 것을 안성(安省)이 판관으로 있을 때 다시 쌓았다.”하였다. 그런 지 2백 년 뒤에 내가 새로 쌓았는데, 겨우 1년 만에 적에게 함락되고 말았으니, 원통하고 또 원통한 일이다.
본주의 돈과 곡식을 윤상중(尹尙中) 목사 이전에는 중기(重紀 사무 인계 때 전하는 문서)가 없고, 경진년(선조 13, 1580)에 서애(西厓)가 목사가 된 이후로 비로소 중기(重紀)가 있기 시작했다. 서애가 덕순(德純)에게 전한 것이 18만이었고, 덕순이 만기가 되자 공원(公遠)에게 전한 것이 23만이었으며, 공원이 4년 만에 병으로 체직되자 나에게 전한 것이 25만이었다.
내가 3년 만에 만기가 되어 사회(士晦)에게 전한 것이 27만이었으니, 창고의 풍부함이 도내에서 제일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모두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적이 물러난 뒤에도 오히려 몇만 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 내가 상주를 다스린 지 3년 동안 온 집안의 위아래가 아무런 병 없이 늙은 부모를 극진히 봉양해서 명절이나 좋은 때든 혹 그런 때가 아니라도 잔치를 벌여 즐겼으니, 망극한 임금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었다. 난리(임진왜란을 말함) 후에 다시 이곳을 지나가니, 노래하던 집이나 춤추던 누각이 모두 여우나 토끼의 굴이 되었으니, 마음이 상하고 보기 참혹함을 어떻게 이루 형용하겠는가. 높은 것이 극에 달하면 무너지는 것이 비록 이치의 당연함이라고는 하지만, 뜻밖에 재앙을 당하게 되니 하늘이 차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고 눈을 닦고 기다렸건만, 요망스런 기운을 쓸어내지 못하니, 통곡한들 무엇하랴.
○ 신묘년(선조 24, 1591) 가을. 나는 상주 목사에서 갈린 지 얼마 안 되어 공저(公著 이성중(李誠中)의 자)를 대신하여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
대궐에 나가 하직하던 날 임금이 명하여 편전(便殿)에서 인견하였다. 겨우 자리를 정하고 앉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잘 있었는가? 상주를 정성껏 다스렸다고 하니, 대단히 기쁘오.”
하므로 나는 임금의 말씀을 듣자 감격하여 눈물이 저절로 흘러서 자리를 피하면서 사례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이어서 또 묻기를,

“그 고을 인심과 풍속이 어떠하였소?”
하시기에 나는, ‘진실로 아름다웠다.’고 대답했다. 임금이 또 묻기를,

“그 지방 인재가 어떠하였소?”
하시기에 나는, ‘그 고을 습속이 글을 숭상해서 공(功)과 학(學)에 흥기하는 자가 많다.’고 대답했다. 또 묻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네가 그 고을에서 인재를 얻었느냐?” 《논어》〈옹야편(雍也篇)에 보임 고 하였으니, 여기에 대해서 말해 보라.”
하시기에 나는,

“진사 정국성(鄭國成)은 노성하고 효행이 있으며, 유학 윤진(尹?)도 효행이 있었습니다.”
하였더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조에서는 어찌 이들을 수용(收用)하지 않느냐?”
하였다. 이때 승지 조인득(趙仁得)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에게 “잊지 말고 거행하라.”하였다. 또 묻기를,

“백성들이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 무엇이었소?”
하므로 대답하기를,

“그 고을은 땅이 넓고 백성이 많아, 부역에는 조그만 고을처럼 고생을 하지는 않지만,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들도 다 같은 백성들인데, 시초(柴草)의 공물이 과중함을 고통으로 여겨 더러는 이 지방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자리가 파할 무렵에 상이 이르기를,

“방백(方伯)으로서 할 책임이 교서 속에 다 씌어 있으니, 정성을 다해서 봉직하오.”
하고 또 ‘잘 가오.’라고 분부하였다. 이런 지 얼마 안 되어, 정국성(鄭國成)은 목청전 참봉(穆淸展參奉)이 되었고, 윤진(尹?)은 제릉 참봉(齊陵參奉)이 되었다. 그러나 정국성(鄭國成)은 늙었다고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날 경립(敬立)이 사관(史官)으로 입시(入侍)하여 부자가 함께 임금 앞에 나아갔으니,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어서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지난해로 말하면, 의립(義立)은 과거에 올라 사관이 되고, 경립은 옥당에 들어갔으며, 나는 또 비변 당상(備邊堂上)으로 있게 되어 혹 인견할 때나 또는 경연에서 특진관(特進官)의 강(講)이 있을 때에는 3부자가 함께 입시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영화스럽고 경사로움이 분수에 넘어 황송하고 민망한 마음이 지난 신묘년 때보다 몇 배나 더했다. 아이들이 성대하고 가득찬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늙은 아비와 같다면 끝까지 복을 누리는 데에 거의 도움이 될 것이다.
○ 아조(我朝)의 종계 악명(宗系惡名)을 변무(辨誣)하는 주청에 관해서는 조종조(祖宗朝)부터 사신을 보내서 여러 차례 중국 황제에게 주달했으나, 성상(聖上) 대에 이르러 비로소 황제의 승낙을 얻어 2백 년 동안의 억울함이 시원히 씻어졌으니, 온 나라의 경사스럽고 다행함이 어떻겠는가. 상이 전후 사신들의 공을 의논하여 광국(光國)이란 호를 내렸으니, 이는 무자년(선조 21, 1588)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임금의 성효(聖孝)와 지극한 덕을 형용할 길이 없어 휘호(徽號)를 올리고자 대신들이 힘껏 청했으나, 상은 완강히 거절하고 겸손한 덕을 지켰다. 나는 이때 부제학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주연(晝筵)에서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휘호를 올리기를 청하는 것은 실로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옛날 당 나라나 송 나라 때에 허례를 숭상하던 일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굳이 사양하시고 받지 않으시는 것은 지극히 겸손한 덕에서 나온 처사이시오니, 그 거룩하고 아름다움이 도리어 휘호를 받으시는 것보다 빛이 납니다. 성상의 마음이 곧 요순(堯舜)의 마음이신 것에 깊이 탄복합니다. 여러 신하들의 계사(啓辭)에, 방훈(放勳 요(堯) 임금)이나 중화(重華 순(舜) 임금)로 존호를 삼는다 하였는데, 이는 사관들이 추술(追述)한 것이고 존호는 아니옵니다. 이것을 끌어다 같이 하려고 한다면 이는 너무도 억지인 것입니다. 전모(典謨) 의 문자를 사실대로 인용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면 그 폐단이 말할 수 없게 될 것이오니, 몹시 옳지 못한 일이옵니다.”
했다. 기축년간에 조정에서 다시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했는데, 헌납 백유함(白惟咸)이 독계(獨啓)하기를,

“존호를 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감히 백관들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조정에서 청한 것이 윤허를 받게 되어 ‘정륜입극 성덕홍렬(正倫立極成德洪烈)’이란 존호를 올렸다.
금년 7월에 임금이 비변사의 여러 당상들을 인견할 때 나도 입시하게 되었다. 그날 임금의 얼굴은 온화하고 말소리는 명랑했다. 그래서 적의 정세를 논하는 데도 응대하는 것이 분명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각각 포부를 말하라고 재삼 하교하시어, 엎드려 듣고 감격하여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난리가 있은 뒤에도 존호를 그대로 쓰는 것은 변고를 만나면 몸을 낮추는 도리에 벗어남이 된다.’고 여겨 매양 아뢰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여 감히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다. 이날은 군신(君臣) 사이에 마음이 서로 통하여 마치 한집안의 부자간과 같으니, 어찌 감히 생각하는 바를 아뢰지 않아서 성교(聖敎)를 저버릴 수가 있으랴. 마침내 아뢰기를,

“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 감히 아뢰고자 합니다. 존호는 당초에 상께서 사양하고 받지 않으시므로 신이 진실로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복종하여 ‘요순 같은 성군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에 전하께서 조정의 청을 받아들이신 것은 필경 마지못해서인 것으로 아옵니다. 지금은 변란을 겪은 뒤라, 몸을 조심하여 수행하는 일이 지극하지 않으신 것이 없사온데, 유독 이 존호만은 그대로 쓰시니, 스스로 몸을 낮추시는 도에 미진한 바가 있습니다. 대신들이 좌중에 있으니 물어보시어 존호를 버리신다면 천지 신명에게 경계하고 두려워하시는 뜻을 보여주심이 적지 않을 것이니, 위로 종묘사직에 고하고 아래로 사방에 교서를 반포하시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였더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일찍이 그런 뜻이 있었으나, 결행하지 못했는데, 경이 지금 말하니 참으로 충신이로다. 내 당장 존호를 버리리라.”
하므로, 나는 감격해서 일어나 절을 했다.
수찬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신도 아뢰려 하였으나 소관(小官)이옵기로 감히 아뢰지 못했는데, 윤모(尹某)가 아뢰자, 전하께서 충신이라고 칭찬까지 하시오니 누군들 감격하지 않으오리까…….”
하였다. 내가 아뢴 말은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는 없고 그 큰 줄거리만 따서 적는 바이다.
이튿날 대신들이 계사를 올렸는데, 어떤 이는 “이것은 오늘날 말할 것이 아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당 나라 때는 사세가 급박해서 자신을 허물하는 조서(詔書)를 천하에 반포하여 강한 장수들의 마음을 진압해 복종시키려고 소장(疏章)에도 신성문무(神聖文武)란 호를 말하지 못하게 한 것이니, 이는 일시의 우연한 거조였다.……”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며칠 동안에 대신들이 4~5차례나 아뢰자, 좌상이 조정에서 또한 힘써 아뢰기를,

“신 등이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이것을 봉행(奉行)하지 못하게 하겠나이다.……”
해서, 이로 인하여 중지되었다.
내가 계달(啓達)하던 날에 비망기를 내렸는데, 대강의 내용은,

“오늘 다행히 등에 찔린 가시는 빼냈으나, 바늘 방석에 앉는 것은 언제나 면하려나. 존호를 삭제하는 일은 예관으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고 교서를 반포하도록 하라. 존호는 마땅히 중국 조정에는 숨겨야 하므로 중국 장수가 서울에 있으니 할 수 없고, 종묘에 고하는 일 역시 참작해서 하라.”
하였다. 삼공(三公)의 계사에 전후 비답한 것은 이러하다.

“내가 서토(西土 관서 지방)에 있을 때부터 이것을 면하기를 빌었어도 얻지 못했는데 이제 다행히 말이 나왔으니, 실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일이다. 이 일이 실로 아무런 유익함도 없이 죄인의 몸에 그대로 씌워진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으랴. 전교대로 지체하지 말고 속히 삭제하고 종묘에 고하는 것이 좋겠소. 교서를 반포하는 일은 참작해서 지휘하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렇게 분분하게 끌지 말고 속히 거행할 뿐이니, 행하기 어려운 아무런 곡절도 없는 일이오.”
하고, 또 이르기를,

“이 일은 이대로 두어도 유익함이 없고, 없애기도 어렵지 않으므로 속히 행할 뿐이니, 마땅히 번거롭게 말하지 마오.”
하고, 또,

“이 일은 결코 그대로 둘 수 없고 명령도 이미 내렸으므로 하루라도 지체할 수 없으니, 다시는 말하지 마오.”
하였다.
저번에 내가 무자년간에 탑전에서 계청(啓請)하기를, ‘마땅히 세자를 빨리 세워서 왕자로 교양시키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고 했는데, 곁에 있던 수찬 홍이상(洪履祥)도 내 말을 극력 도왔다. 임금 앞에서 내 마음을 잘 아는 자는 전후에 오직 홍이상과 정경세 두 학사뿐이었다.
기축년 옥사(獄事) 에 정적(鄭賊 정여립(鄭汝立)을 지칭함)의 악당들은 그 죄가 천지에 뻗쳐서 왕법이 이미 시행되었지만, 사실 역적의 실상을 모르는데 죄가 파급되어 억울하게 죽은 사류(士流)들로 말하면 억울하기 그지 없으되, 이를 과감히 말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김숙부 우옹(金肅夫宇? 숙부(肅夫)는 자)이 대사헌이 되어 비로소 글을 올려 신원해 줄 것을 청하고, 잇달아 유생 나덕명(羅德明)의 무리가 또한 이 일로 상소하니, 임금이 비변사에 내려 회계하게 하였다. 그래서 삼공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의논하여 회계하기를,

“청컨대, 김숙부의 말대로 행하소서.”
하니, ‘후일에 만나서 의논하자.’고 비답하였다. 그 뒤에 입시한 삼공들이 은미하게 이 일을 아뢰었으나, 임금은 이를 쾌히 승낙하지 않았고, 숙부가 또 아뢰어도 비답이 없었다.
이에 숙부는 자기 말이 시행되지 않는다 하여 거취를 결정지으려 했으니, 근일에 연이어 삼사(三司)의 장(長)을 사직한 것은 역시 이 때문이었다.
신하들이 이 일을 이미 아뢰었고, 상께서도 그 원통함을 통촉하셨으니, 지금 만약 강물을 터놓듯이 한껏 분명히 신원해 준다면 그러는 사이에 귀신과 사람이 모두 답답했던 가슴이 열려 중흥(中興)의 조짐이 실로 여기에서 터전이 이루어졌을 터인데, 쉽게 얻지 못한 것은 천명이라 하겠다.
○ 정해ㆍ무자년 사이에 일본에서 통신사를 보내줄 것을 극구 청했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다가 마침내 부득이하여 사신을 보냈다.
경인년(선조 23, 1590) 봄에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 허성(許筬)이 명을 받고 갔다. 오랫동안 동래(東萊)에 머무르다가 5월에 비로소 바다를 건너가서 신묘년 봄에 돌아왔다.
윤길은 일본왕 수길(秀吉)이 걸출하고 군사들도 날래니 뒷일이 걱정스럽다고 말하고, 성일은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임금 앞에서 서로 다투었다.
임진년에 적변이 크게 일어났으니, 윤길의 말이 맞은 것이다.
윤길은 난리 전에 죽었고, 성일은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있었는데, 난이 일어난 뒤에 잡혀서 의금부에 갇혀 있다가 적을 막아낸 공이 있다 해서 석방되었다. 직산(稷山)에 이르러서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아 도로 경상 우도로 들어가서 힘써 의병을 모집했으니, 우도에서 의병이 많이 일어난 것은 모두 그의 힘이었다. 가선대부로 승급되어 경상우도 감사(慶尙右道監司)가 되었다가 계사년 여름에 병으로 진양(晉陽)에서 죽으니, 사민(士民)들이 지금까지도 애석히 여긴다.
○ 계미년(선조 16, 1583) 가을. 김중숙(金重叔 김응남의 자)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어 하직하는 날 임금이 인견하고 매우 간절히 위로하며 호피(虎皮)까지 내려주면서 이르기를,

“바닷가의 습기를 이것으로 막으라.”
하였다. 을유년 봄에 특별히 승지로 소환했다.
○ 경인년. 왜적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우리 통신사에게 중국에 공물을 수송하는 길을 청하게 했으나 조정에서는 들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수길이 중국을 침범하려는 뜻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중숙이 절사(節使)로 중국 서울에 가게 되자, 주문(奏文)까지 준비하여 왜국의 실정을 중국에 두루 보고하기로 하여 그 문답할 내용도 모두 비밀히 여쭙고 갔다. 마침 복건(福建)을 지키는 변신(邊臣)이 황제에게 보고하기를, ‘조선이 일본과 약속하고 장차 중국을 침범하려 한다.’고 했기 때문에 바야흐로 우리를 의심하고 있었다. 중숙이 사실을 중국에 아뢰자, 중국에서는 모든 의심이 풀려 말하기를,

“조선은 충성하고 순종하는 나라이니, 어찌 왜국과 함께 악한 짓을 할 리가 있겠는가?”
했다. 중숙이 또한 자세히 사정을 말하자, 황제는 칭찬하는 빛을 보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상은 중숙을 편전(便殿)에 불러 보고 크게 칭찬하고 삽금대(鈒金帶)를 상으로 하사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자헌대부로 승격시켰다.
○ 임진년 4월 그믐. 대가(大駕 임금의 수레)가 도성문을 나가서 종일 비를 맞으며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러 배를 탔다. 상은 호행(扈行)하는 여러 재상들을 입시하게 하고, 유(柳) 정승(유성룡(柳成龍))에게 이르기를,

“경이 항상 나라의 방비가 소홀하다고 경계하더니,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
하고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들도 모두 울었다. 상이 시종에게 술이 있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주 한 병이 있습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에게 마시게 하여 뱃사공이 가지고 있는 사기 종지를 구해서 한 잔씩 돌렸다.
저물어서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니 밤비가 죽죽 내리는데,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잤다. 임금이 드실 음식도 어지러운 군사들에게 뺏기게 되어 찬성 최황(崔滉)이 쌀 두 말을 가지고 가서 임금께 바쳤다 한다.
상이 평양(平壤)을 떠날 때 정승 윤두수(尹斗壽)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정승 유성룡(柳成龍)에게는 중국 장수를 영접하게 하고, 병사 이윤덕(李潤德)과 감사 이원익(李元翼)에게는 역시 진(鎭)에 머물러 방비하도록 했다.
6월 14일. 적이 왕성탄(王城灘)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들어왔다. 처음에 적은 강물의 깊이도 모르고, 또 나룻배도 없어서 건너오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져 돌아가려 했는데, 마침 우리 백성들이 걸어서 왕성탄을 건너는 것을 보고 물이 얕음을 알고는 일제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여러 재상들이 모두 무너져 흩어졌는데, 이원익은 희천성(熙川城)으로 들어가서 7월 20일 후에야 비로소 흩어진 군사들을 모집하여 순안(順安)에 진을 쳤다.
8월.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중국에서 와서 평양성 10리 밖에 토착하여 왜장 평행장(平行長)을 부르니, 매우 공손히 영을 따르므로 드디어 강화(講和)를 맺기로 하였다.
11월 안으로 중국 조정의 명을 회보해 주기로 하고, 성 서쪽 수십 리 밖에 푯말을 세워 적에게 나와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더니, 적들이 모두 그대로 따라서 우리 백성들이 가을걷이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심 유격은 기한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가, 계사년 정월에야 비로소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말함)을 따라서 왔다. 제독은 성을 공격한 뒤에 적을 추격하여 벽제(碧蹄)까지 왔다가 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갔다가 행주산성(幸州山城)의 승리를 듣고 마침내 서울로 올라와서 심유경에게 적을 용산(龍山)에서 만나 또 강화를 약속하게 하였다.
4월 19일. 적이 성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갔다. 처음 6월 사이에 유격 사유(史儒)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7월에 평양을 공격하다가 패해서 죽자, 심유경을 보내서 비로소 강화를 맺었다고 한다.
적이 평양을 점령한 지 8개월이나 되었으니, 만일 그들이 저돌적으로 서쪽으로 향했더라면 필시 차마 말할 수 없는 욕을 당했을 터인데, 적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또 용강(龍崗)과의 사이에는 겨우 몇 사(舍 1사(舍)는 30리임)밖에 안 되었는데도 감히 마음을 먹지 못했으니, 어찌 하늘이 순종하는 자를 도와서 적의 수족을 묶어 놓고 이듬해 정월의 승리를 기다린 것이 아니겠느냐.
문소전(文昭殿)에 조석으로 올리는 상식(上食)과 공양하는 범절을 한결같이 살아 계실 때와 같이 행한 것은 세종조(世宗祖)부터 시작되었다. 임진년 파천 때에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만 모시고 가고, 문소전의 위판(位版)은 승지를 시켜 정결한 땅에 묻도록 하였는데,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다시 원묘(原廟)를 마련하지 않았다.
○ 난리 초에 선릉(宣陵 성종(成宗) 능)에 광중(壙中)을 파고 불을 지른 변고가 있었으므로 계사년 적이 물러간 뒤에 개장하였다. 정릉(靖陵 중종(中宗) 능)도 그러하였는데, 광중 밖에 시신 한 구가 버려져 있었다. 이것이 혹 광중에 있던 옥체(玉體)가 아닌가 하여 대신과 여러 재상들이 명을 받들어 중종을 모신 궁인(宮人)을 거느리고 가서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진위 여부를 가려낼 수 없었으므로 또한 그대로 개장만 하고, 버려져 있던 시신은 의관을 갖추어 딴 곳에 매장하였다. 강릉(康陵 명종(明宗)의 능)도 파헤치다가 반쯤 가서 중지했으며, 그 나머지는 무사하였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부인 덕빈 윤씨(德嬪尹氏)가 임진년 3월에 돌아가셨는데, 장사도 지내기 전에 난리가 나서 시신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난리 처음에 창경궁(昌慶宮) 뒷동산에 직접 묻었다.’고 조정에 보고하는 자가 있어서 파 보았으나 없었다.
○ 우리 나라 국사(國史)는 안으로는 춘추관(春秋館), 밖으로는 전주(全州)ㆍ성주(星州)ㆍ충주(忠州)의 네 곳에 나누어 간직해 두었다. 임진년 왜란에 전주에서는 병화가 미치기 전에 산속으로 옮겨 두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다. 승여(乘輿 임금의 수레, 즉 임금)가 서울에서 평양으로 파천하는 동안 기록한 사초(史草)는 사관들이 안주(安州)에 이르러 이것 역시 불태우고 도망갔고, 그 뒤의 사초(史草)는 외부인들은 얻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혹자는 사초가 너무 간략하고 미비한 것을 병통으로 여기기도 했다. 야사(野史)는 전혀 없었고, 오직 덕훈(德薰 이정형(李廷馨))이 병자년(선조 9, 1576)부터 임진년까지 쓴 《가장일기(家藏日記)》가 상당히 자세했다. 이것을 춘추관에 보내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게 했으니, 그 마음씀이 부지런하다고 하겠다.
전주에 간직해 두었던 국사(國史)는 지금 해주(海州)로 옮겨갔다고 한다.
○ 병부 상서 석성(石星)과 총독(摠督) 고양겸(顧養謙)이 힘껏 강화를 주장했는데, 이는 중국의 병력이 이미 고갈되어 형편상 적을 공격할 수 없어서였으니, 곧 하책(下策)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고양겸은 요동(遼東)에 있으면서 참장(參將) 호택(胡澤)을 보내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중국에 주문(奏聞)하여 청하게 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고집하고 듣지 않으니, 호택이 3~4개월을 머무르면서 매우 힘껏 독촉하여 마지않으므로 비로소 허락했다. 그 주문(奏文)의 대략에,

“위엄을 보여서 그 마음을 두렵게 하고, 화친으로 얽어서 그 군사를 늦추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사신 허욱(許頊)을 보내서 이 글을 바치니, 중국에서는 상하가 모두, “조선이 왜국을 대신해서 화친을 청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드디어 사신을 보내고, 수길(秀吉)을 타이르는 칙서에도 ‘조선이 대신 청해 왔다.’고 하기까지 하였다. 상이 일찍이 경연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대신 청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인도(人道)에는 어찌 되며 의리에는 어찌 된단 말이냐?”
하고는, 머리를 숙이고 흐느껴 울었다. 그런데 신하된 자가 임금의 이 말을 듣고서도 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흉악한 적장으로 하여금 여전히 변경을 차지하게 하여 임금이 갈 곳이 없게 하였으니, 죽지 않고 무엇 하랴! 원통하고 원통한 일이다.
○ 중국 조정에서 왜국을 치기 위하여 제독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서 대장으로 삼으니 거느린 군사가 5만 명쯤 되었는데, 요동(遼東) 군사와 절강(浙江) 군사가 반반씩이었다. 그 중에 요동 군사는 활 쏘고 말 타기를 숭상하고, 절강 군사는 총 쏘고 창 쓰기를 숭상했다.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사(經略使)로 삼아 압록강(鴨綠江) 서쪽에 주둔해 있게 하였다.
제독이 계사년 정월 8일에 평양을 쳐서 크게 이기니, 죽은 적이 수천 명이나 되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했다. 그래서 서울에서 평양까지 진을 연결한 적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남쪽 군사의 공이 많았는데, 공을 논하는 데는 북쪽 군사를 주장으로 삼으니, 남쪽 군사가 원한을 품었다. 이는 제독이 북쪽 사람이었으므로 사정에 끌려 이렇게 한 것이니 원망을 산 것이 당연하다. 제독이 적병을 추격하여 경기(京畿)에 이르러 군사를 주둔하고, 가볍게 무장한 기병을 이끌고 벽제(碧蹄)까지 진격하다가 적을 만나 위기에 빠졌다가 겨우 면해서 놀라서 허둥지둥 평양으로 퇴군했다. 이때 풍원군(?原君) 유성룡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개성(開城)에 있으면서 만류했으나 제독은 듣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권율(權慄)이 행주(幸州) 싸움에서 크게 이기자, 제독이 마침내 경기도로 돌아왔다.
심유경(沈惟敬)이 적을 달래자, 4월 19일에 적이 도성을 나가 남쪽으로 내려갔다. 제독은 문경(聞慶)까지 갔다가 5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적은 군사를 거두어 경상도의 좌우 해변에 주둔했다.
경략사(經略使) 송응창은 평양에서 이겼다는 말을 듣고서야 강을 건너와서 정주(定州)와 안주(安州) 사이에 머무르고 한 발짝도 동쪽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더니, 얼마 안 되어 탄핵을 받아 연경으로 돌아갔다. 그가 지은 시에,

수레 몰아 평양으로 들어가 / 驅車入平壤
조선국 회복시켰네 / 恢復朝鮮國

하였다. 또 기자묘(箕子墓)에 참배한 시가 있었는데, 인쇄해 가지고 돌아가기까지 했으니, 그 뜻은 중국에 가서 자랑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허황된 행동이 이러하였으니, 어떻게 큰 공을 이룰 수 있었으랴.
시랑(侍郞) 고양겸(顧養謙)이 그의 일을 대신 맡아 오랫동안 요동에 머물러 있었는데, 호령이 엄숙하고 언론이 통달했으니, 그가 지은 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논핵(論劾)을 받고 돌아가자, 시랑 손광(孫鑛)이 대신 맡았다.
송 경략과 고양겸은 모두 강화를 주장했으니, 이는 중국의 재력과 병력이 모두 고갈된 까닭에 이렇게 주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손광은 공격하는 것도 강화하는 것도 주장하지 않고 다만 압록강 서쪽만 지키고 있으려고만 할 뿐, 우리 나라의 존망(存亡)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또 그 사람됨이 평범하고 전혀 용기도 없어서 파견된 장수나 군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노략질하고 포악하게 굴어도 금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변고가 생긴 뒤로 경략사가 세 번 바뀌었는데, 고양겸이 제일 나았고, 송응창은 고양겸만 못했으며, 손광은 송응창보다 훨씬 떨어졌으니, 중국의 인물을 또한 상상해 볼 수가 있다. 왜적들은 어찌 좀도둑처럼 그 뜻이 우리 나라를 쇠잔하게 하는 데 있었을 뿐이겠는가. 손광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경계를 생각지 않고, 압록강 서쪽만을 지키려고 하여 그의 생각이 원대하지 못했으니, 진실로 탄식할 일이다.
○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풍속이 검소함을 숭상해서 궁궐에도 오색(五色)의 흙으로 단청(丹靑)하고, 대궐도 낮고 좁게 지었다. 사대부들의 집도 모두 작고, 마루는 반드시 북쪽을 향했으니, 아직 남아 있는 옛날 집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런데 40~50년 이래로 권간(權奸)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탐욕을 부리는 기풍이 크게 번져서 방을 만드는 데도 남향으로 지어 밝은 것을 취하고, 큰 집은 백여 칸도 짓고, 작은 집도 60~70칸 이하로는 짓지 않았다. 그리고 주춧돌을 다듬고 기둥을 높이 세우며, 추녀는 날아갈 듯이 하늘에 치솟게 지었다. 단청으로는 반드시 진한 채색을 썼고, 의복과 음식도 지극히 사치하여 천한 사람일수록 더욱 심했다. 갑사옷과 비단옷이 거리에 휘황찬란하고, 혼인과 초상에도 지나치게 화려하게 하더니, 얼마 안 되어 이런 큰 변고를 만나서 사족(士族)과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거지가 되고, 궁궐과 종묘사직과 성 안의 큰 집들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쑥대밭이 되었으니, 옛 사람이 이른바, ‘사치의 해독이 흉년보다도 더 심하다.’는 말이 입증되었다.
난리 처음에는 재상과 조신(朝臣)들이 석새베로 짠 옷을 입는 것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한 그릇 국 마시는 것도 큰 고기라도 먹는 듯이 여기더니, 근래 1~2년 사이에는 비단옷을 거의 모두가 입어 석새베로 짠 옷은 서민들도 싫어하고, 음식도 점점 옛날 사치하던 습속을 따라가니, 지극히 한심스러운 일이다.
지난달 내가 탑전(榻前)에서 이런 뜻을 아뢰고, ‘상께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경계심을 다시 더해서 백성들보다 앞장 서시라.’고 청했다. 내가 옛날 상주 목사로 있을 때 관사(館舍)가 오래되어 빛이 바랬기에 모두 단청을 다시 했고, 병풍도 모두 새로 마련하고 진한 채색을 써서 사람들이 휘둥그레지게 하자, 모두들 보기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1년도 못 되어 모두 전쟁에 재가 되어 버렸다. 나는 풍속을 따라 헛된 사치를 너무도 숭상했던 것을 깊이 후회한다.
○ 우리 나라 풍속에 남녀가 어릴 때에 귀를 뚫어 귀걸이를 다는 것이 있어서 오랑캐 풍속과 유사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해온 지가 오래여서 고치려 하는 자가 없었다. 금상(今上 선조(宣祖)를 지칭) 초년에 오랑캐 풍속을 고쳐야 한다는 명이 있었다. 그래서 귀한 이든 천한 이든 아이를 낳으면 모두 귀를 뚫지 않았는데, 계집아이만은 혹 모양을 내려고 그대로 귀걸이를 하는 일도 있다.
○ 내가 젊었을 때에는 갓 모양이 춤은 얕고 테는 넓으며, 옷은 소매가 몹시 좁았다. 만일 춤이 높은 갓이나 소매가 넓은 옷을 보면 사람들이 옛날 것이라고 비웃었다. 국가의 법령으로 옛 것을 권해도 듣지 않았으며, 옷은 선비나 서민들이 모두 흰색을 숭상했다.
명종(明宗) 때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호)이 상소하여, ‘목소리가 슬프고 옷이 흰색은 나라가 망할 징조이다.’라는 말을 하였으므로, 홍담(洪曇)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흰색 옷을 입는 것을 엄격히 금하여 선비 이상은 겉의 홑옷은 모두 연분홍빛을 쓰게 했는데, 5~6년 만에 도로 중지되었다. 금상 초년 정묘년(명종 22, 선조 즉위년, 1567)에 중국 사신 허씨(許氏)와 위씨(魏氏)가 쓴 사모(紗帽)가 곧고 높았으며, 옷은 짧고 소매가 넓었는데, 온 나라가 이것을 본받고, 갓 모양도 이것에 따라 춤은 높고 테는 좁게 만들었다. 10년 동안은 사모의 맨위는 약간 펑퍼짐하고 옷 소매가 넓은 것도 조금 좁아지고, 집들도 잠시 낮아졌으니, 이것은 국가의 영이 없었어도 저절로 이렇게 했던 것이다.
난리가 난 뒤에는 중국 장수와 군사들이 온 나라에 가득찼기 때문에 조정 의론이 마땅히 중국 제도를 모방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족(士族) 이상은 갓을 쓰고, 천민은 갓을 쓰지 않고 조그만 모자를 쓰게 하자고 계청했으나, 난리 중이어서 의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할 뿐 아니라, 곤궁한 백성들은 모자를 만들어 쓰기도 힘들었으며, 또 옛 습관에 젖어 갓을 벗고 서로 보는 것을 자못 부끄럽게 여겨 법사(法司)의 금령이 또한 엄격하였는데도 백성들은 여전히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혹은 집에서는 갓을 쓰다가 문 밖에 나갈 때는 곧 벗기도 하고, 혹은 노상에서는 갓을 벗어서 남모르게 겨드랑이에 꼈다가 문 안에 들어선 뒤에야 쓰기도 했으니, 습속을 고치기 어려움이 이러한 것이다.
더구나 볕을 가리고 비를 막는 데도 갓을 쓰는 것이 매우 편리하므로, 중국 장관들은 이것을 구해 가는 자까지 있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버리려고 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 난리 초에 대가가 해서(海西)에 머물면서, “하삼도(下三道 경상ㆍ전라ㆍ충청도)의 감사(監司)들은 자기 경내 군사를 모두 데리고 와서 서울에 있는 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충청도에서는, 중원(中原)ㆍ서원(西原)ㆍ황간(黃澗) 등지가 패한 뒤에 백성들이 산골짜기에 흩어져 있었으므로 겨우 군사 8천여 명을 모을 수 있었다. 사무(士武 이광(李洸))도 금강(錦江)에서 군사를 파한 뒤에 간신히 만 명을 얻었고, 자앙(子昻 김수(金?))은 군사가 없어서 다만 아병(牙兵)과 군관(軍官) 백여 명만을 거느리고 5월 20일 후에 온양(溫陽)에 모여 4~5일을 머물다가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다.
내 관하(管下)는 충청 병사 신익(申翌)과 방어사 유옥(兪沃)에게 8천 명을 나누어 소속시켰다. 진위(振威)에 이르러 우리 3인이 모든 장수들과 의논한 다음 먼저 수원(水原)에 있는 적을 쳐서 길을 개통하고 이어서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마침 수원에 있던 적이 공격하기도 전에 저절로 달아났다. 나는 생각하기를, ‘대군이 한 번 진위를 떠나면 경기와 충청 사이에는 군사를 주둔할 곳이 하나도 없으니, 용인(龍仁)과 죽산(竹山)에 있는 적이 와서 보급로를 끊는다면 위태로울 것이다. 마땅히 한 진(陣)을 진위에 머물러 두어 괴산(槐山)에 주둔해 있는 조방장(助防長) 이세호(李世灝)의 군사와 서로 기각(?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으면 뒤를 엄습당할 근심이 없을 것이다…….’ 했으나, 이 계교는 마침내 쓰이지 못했다. 수원부 안에 이르러 진을 쳤는데, 호남 방백(湖南方伯)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조방장 이지시(李之詩)ㆍ백광언(白光彦)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용인과 수원 사이에서 분탕질하는 적들을 치게 하므로, 나도 방어사와 병사(兵使)를 거느리고 함께 힘을 다하여 쳤으니 이때는 6월 5일이었다.
이지시와 백광언은 모두 이 싸움에서 패해 죽었고, 나머지는 겨우 죽음을 면하고 퇴군하여 중도에 주둔했으니, 곧 광교산(光校山) 옆이었다. 이 싸움에서 패했다는 보고가 가기도 전에 사무는 진을 옮겨서 진격하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교전한 곳이 얼마 떨어지지 않았는데, 더 앞으로 나간다면 적과의 거리가 가장 가깝게 되므로 설령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군사들이 물러가 주둔할 곳이 없고, 광교산 근처는 지형이 험하고 평이한지도 탐지해 보지 않았으니, 경솔히 나갔다가는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곳을 굳게 지키고 계속하여 군사를 더해서 성원하도록 하는 것이 나으니, 그렇게 하면 군사들의 마음도 후원이 있는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 터이므로 이것이 상책일 것이다.”
했으나, 사무는 고집하고 듣지 않았다. 자앙은 군사가 없는 장수로 사무에게 빌붙어 있는 터였으므로 전혀 왈가왈부함이 없었다. 그래서 내 계교는 마침내 쓰이지 못했다.
신시(申時)에 산림이 우거져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광교산 근처로 진을 옮겼으니, 지형이 매우 좋지 못한 곳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적이 코앞에 이르자 모든 진이 다 무너지니, 우리 진과 사무의 진도 모두 지탱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우리들은 백면 서생으로 병가의 일을 알지 못하여 규모와 계획이 몹시 졸렬해서 마침내 이런 실패를 당했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원통하나 어찌하랴.
난리 초에 내가 공주(公州)에 있었는데, 유생 신난수(申蘭秀)와 장덕개(張德蓋) 등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연기(燕岐)에 속명(俗名)이 정만억(鄭萬億)이라 하는 중이 있는데, 적을 잘 치므로 사람들이 승장군(僧將軍)이라 불러 명성이 자자합니다.”
하고, 목사 허욱(許頊)도 말하기를,

“이 고을의 중 영규(靈圭)가 자진해서 의병 모집에 응하며 말하기를, “만억이 매우 못난 사람이면서도 장군이란 이름을 얻었으니, 나도 종군(從軍)하리라.’하고, 뜻을 같이하는 중 9명을 데리고 적의 형세를 탐지해서 적을 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으니, 그 말을 취할 만합니다.”
하였다. 내가 곧 영규를 불러 보았더니, 매우 건장하기는 하나 별다른 지혜나 꾀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녹록한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니어서 한 방면을 방어하게 할 만은 하였다. 내가 시험삼아 그가 탐지했다는 적의 형세를 물었으나 별로 공을 세울 만한 것은 없었다. 내가,

“만일 그대에게 승군 약간 명을 준다면 그대는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치겠소?”
했더니, 그는 기꺼이 승낙하였다. 이에 내포(內浦)의 승군 수천 명을 뽑아서 그에게 거느리게 하고, 승병패두(僧兵牌頭)라고 불렀다. 그는 열흘 동안에 대오를 정돈하여 청주(淸州) 안심사(安心寺)로 나가 진을 쳤는데, 이 절은 고을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이다. 그는 방어사 이옥(李沃)과 서로 성원이 되었다.
이옥은 당시 연기 동쪽에 있는 나루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영규가 서문(西門) 밖 빙고현(氷庫峴)으로 나가 진을 치니, 모두 세 개의 진이었다. 때때로 정예병을 내어 사면에서 적을 맞아 싸우니 적이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했다. 이때는 임진년 7월 보름과 스무날 사이였다.
이달 29일에 방어사와 이웃 고을 수령들이 영규와 함께 청주의 적을 치기로 했는데, 모든 지휘는 나의 명을 들었다. 종일토록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옥과 영규가 군사를 거두었기에, 나는 공주 목사를 시켜 이옥의 진으로 달려가서 경솔히 퇴군한 것을 책망하고, 곧 다시 싸움을 독려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8월 1일에 크게 싸워서 비록 적의 머리를 베는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적도들이 화살과 총탄에 많이 맞아 그 형세가 매우 고립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적은 무리들을 다 이끌고 도망했다. 이 뒤로는 적들이 다시 와서 침범하지 않아 청주 경내가 편안하여 백성들은 곡식을 수확할 수가 있었다. 영규는 이 때문에 중외에 명성이 났다.
8월 열흘께 전라도 순찰사가 금산(錦山)의 적을 쳐서 이기지 못하자, 영규를 선봉으로 삼고자 하기에 나는 이를 승낙하였다. 영규는 그 군사를 거느리고 유성(儒城)에 나가서 진을 쳤다. 조 제독(趙提督 조헌(趙憲))은 일찍이 이달 1일 다시 싸울 적에, 영규의 진으로 가서 군사 수백 명을 내어 싸움을 도왔다. 이때 영규가 쓸 만한 사람임을 알고 유성으로 따라가서 영규와 진영을 합하고, 영규를 독려하여 함께 금산으로 들어갔다. 영규는 말하기를,

“전라도 순찰사가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진격하려 하면서 나에게 선봉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시기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경솔히 나갈 수는 없습니다.”
하고, 조헌에게 순찰사와 날짜를 약속하도록 권했다. 그런데 회보가 오기도 전에 조헌은 적을 속히 쳐야 한다고 강경히 고집하면서 그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금산으로 들어가니, 영규도 마지못해 따랐다. 그의 부하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패할 것이 분명하니 가지 마소서.”
했으나, 영규는 말하기를,

“가부를 의논할 적에는 그래도 그의 말을 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 사람이 이미 먼저 갔으니, 내가 만일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누가 구원하겠느냐?”
하고는 따라갔다. 이때는 8월 17일이었다. 영규가 조헌과 금산 5리 안에서 진을 연결해 치고 있노라니, 적이 크게 몰려와 조헌의 진이 먼저 함락되고, 영규의 진도 다음으로 함락되었다. 이 싸움에서 죽은 우리 군사가 10명 중에 8~9명이나 되었고, 적도 죽은 자가 많았다. 조헌이 만일 영규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이같은 실패가 있었으랴. 원통하고 원통한 일이다.
군사가 패한 이튿날 조헌의 군관이 권 순찰사의 날짜 약속한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였다. 그러나 때가 이미 지났으니 말한들 무엇하리오. 청주의 적을 몰아냈다는 보고가 의주(義州)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영규에게 당상관을 제수하고 옷감까지 보냈으나, 영규는 이미 죽어서 받지 못했다.
이 뒤로 승병(僧兵)들이 곳곳에서 계속 일어났으니, 실로 영규가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영규는 청주에서 적을 칠 적에 수령들이 혹 물러서면 짚고 있던 큰 몽둥이로 등을 치면서 말하기를,

“평일에는 육식(肉食)을 하며 잘 지내더니, 이제 와서는 도망갈 생각밖에 없느냐?”
하니, 수령들이 감히 누구도 뒤처지는 자가 없엇다. 관하에 혹시 영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군법으로 다스리니, 사람들이 감히 그의 영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연기 현감(燕岐縣監) 임태(任兌)가 공주 목사 허공(許公 이름은 욱(頊))을 보고서 한 말이다. 영규는 글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의 성명 정도만 조금 분별했다.
○ 임진년 난리 후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비록 대가세족(大家世族)이라도 모두 생업을 잃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으며, 여자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적들에게 몸이 더럽혀진 자가 몹시 많았다. 이 중에서 두드러지게 절개를 지킨 자는 조정에서 알아 보고 정문을 세워 주었다. 시체는 들에 가득하고 매장된 것은 거의 없었다. 아비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았으며, 계사년 봄에는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시체를 쪼개어 앞을 다투어 먹었으며, 골육지간끼리도 서로 죽이는 자도 있었으니, 우리 동방의 변란의 화가 참혹함이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다.
임진년에는 모를 심고 김을 맨 뒤에 적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심한 흉년은 아니었고, 계사년에는 모를 심은 곳은 풍년이 들었지만, 중외의 들판에는 쑥대만 우북하고, 모 심은 곳이 3분의 1도 안 되어 흉년이나 다름이 없었다. 갑오년에는 모 심은 것이 계사년에 비해서 조금은 많았으나,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자가 반이 넘었기 때문에 김을 맬 사람이 없어서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었지, 하늘이 풍년이 들지 않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올해에는 중외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는 고초를 겪어서 지난 일을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농사에 힘써서 황폐한 밭을 많이 개간한 데다가 마침 큰 풍년을 만났으며 서리도 늦게 내렸다. 그래서 비록 척박한 밭이라 할지라도 곡식이 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에 백성들이 곡식을 마치 진흙이나 모래처럼 보아 포목 한 필 값이 곡식 몇 섬씩 가게 되고, 쌀로도 열 말이 넘게 되었다. 그런데 무명만은 극히 귀해서 겨울옷을 해 입을 길이 없었다. 촌에서는 한껏 술을 빚어 마시고 노래 소리가 서로 들렸으니, 이는 거의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서 이런 풍년을 만났기 때문에 실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었다.
민간에서는 비록 곡식을 너무 허비하는 것을 서로 금하고 경계했지만, 역시 영을 듣지 않았으며, 부역이 아무리 번거로워도 백성들은 이를 괴롭게 여기지 않았으니, 어찌 하늘이 화 내린 것을 뉘우치고 우리의 중흥을 돕기 위해서 우리 백성들을 살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해변에 주둔하고 있던 흉적들이 천행으로 중국 황제의 위엄에 굴복하여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으니, 불에 탄 나머지를 수습해서 점차 중흥을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찍이 《시경(詩經)》을 읽다가 보니,

진펄에 보리수 있으니 / 濕有?楚
그 가지가 부드럽구나 / ?儺其枝
곱고도 윤택하니 / 夭之沃沃
그대의 앎이 없음을 즐겨하노라 / 樂子之無知

라 했고, 또,

외로이 사는 백성 / 鮮民之生
죽는 것만 못한 지 오래로다 / 不如死之久矣
했으며, 또 이르기를,
행여 잠들어 움직이지 말지어다 / 尙寐無?
행여 잠들고 듣지 말지어다 / 尙寐無聰

했는데, 이를 무심히 읽고서 그 말이 아프고 절박한 데서 나온 것임을 몰랐다. 그런데 직접 변고를 겪고 나서야 그 한 자 한 구가 모두 폐부 속에서 나온 것이고, 헛말이 아님을 알았으니, 《시경》의 인정에 곡진함이 대개 이와 같다.
○ 일찍이 맥수(麥秀)의 노래와 서리(黍離)의 시(詩)를 읽고, 이는 그 종묘와 궁실이 망해 없어진 지 오래된 것을 탄식하여 지은 글로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은 실로 조석 사이의 일이었다.
계사년 4월에 적이 물러가서 5월에 내가 서울에 들어가 보니, 병화(兵火)를 겪은 것 이외에는 거리에 있는 인가가 옛날과 같은 것이 여전히 많았다. 그해 10월 환도한 뒤에 민간에서는 집을 헐어 땔나무로 때서 법으로 금해도 듣지 않았다. 이렇게 수년이 지나고 보니 쑥대만 성안에 가득해졌다. 이야말로 이른바. “만드는 것은 백 년을 두고 거듭해도 부족하고 부수는 것은 하룻동안에도 넉넉하다.’란 말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함이로다.
○ 계사년 10월에 환도하여 양천 도정(陽川都正)과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대궐로 쓰고,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쓰고,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썼으니, 모르겠지만 왕기(王氣)가 이 지대에도 서려 있던 것이었을까.
소공주궁(小公主宮)은 의안군(義安君)의 신궁(新宮)이 되었는데, 적추(賊酋)가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다가 나갔고, 지금은 중국 사신과 장수들을 접대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니 진롱(秦?)의 요새(要塞)와 힘들여 건설한 역사(役事)가 왕자가 누리는 곳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 될 줄 누가 생각했으랴. 천하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 금년 초여름, 중국 조정에서 왜국을 봉하려고 사신을 보내어 이종성(李宗城)과 양방형(楊方亨) 두 사람이 용절(龍節)을 받들고 왔다. 여기서 이른바 용절이란 일찍이 듣지 못하던 것으로, 그 제도는 대개 누런 실로 만들어 마치 갓끈 매듯이 했는데, 그 길이는 한 자쯤 되었다. 이것을 용정(龍亭 천자의 위패가 있는 집)에 안치하여 마치 황제가 친히 임한 것처럼 공경하고,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여기에 절을 하게 하였다. 문례관(問禮官) 기자헌(奇自獻)이 길에 나가 마중하였더니, 두 사신이 말하기를,

“국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 나와 용절을 맞는데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발 구르고 춤추는 예절이 있어야 한다…….”
고 하였다. 그러나 상은 이르기를,

“발 구르고 춤추는 것은 원래 경축에 관한 일이다. 왜국을 봉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실로 불행한 일인데, 어찌 경축을 한단 말이냐?”
하고, 예조로 하여금 다시 의식에 관한 주석을 정하게 하여 기자헌을 시켜 다시 가서 의논하게 했으나, 두 사신은 듣지 않았다. 이리하여 4월 28일에 영조문(迎詔門)에서 굳이 청하자, 이에 우리 나라 의식에 관한 주석에 따라 발 구르고 춤추는 일은 감하고 남별궁(南別宮)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두 사신이 그들 일행을 거느리고 먼저 조례(朝禮)를 행하자, 우리 임금도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그 다음으로 조례를 행했다.
두 사신이 처음 남별궁으로 들어올 적에, 용절이 먼저 들어오면 상은 중문 밖 판위(版位)에 서서 그것을 맞이하고, 두 사신은 용절을 받들고 따라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지형이 몹시 낮고 판위는 높아서 보기가 몹시 미안했다.
우윤(右尹) 이관(李瓘)이 부총관으로 임금을 호위하고 옆에 있다가 판위를 치우자고 아뢰자, 상이 곧장 윤허했다. 옆에서 모신 자가 또 양산을 받들고 있었는데, 내가 병조 참판으로 옆에 모시고 있다가 이것 역시 치우자고 청했더니, 상이 내 말을 따라 주었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창졸간에 나온 것이지만, 모두 두 사신이 문에 들어서기 전에 주선하였으니, 몹시 다행한 일이었다.
○ 한림이 당번이 되어 정원에 입직할 때에는 비록 병이 있어도 감히 임의로 나가지 못하고 반드시 교대할 사람을 기다려서 서로 바꾸게 마련인데, 자앙(子昻 김수(金?))이 처음으로 버려두고 나갔다. 옥당에 입직하는 관원들은 교대할 적에 동료들과 서로 미루는 버릇이 그 유래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모두 농담에 그칠 뿐이었는데, 여우(汝友 배삼익(裵三益)가 교리로 있을 적에 처음 버려두고 나갔다. 이 두 관사에서 입직이 교대되기 전에 버려두고 나가는 습관이 김수와 배삼익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혹은 이를 본받아서 행하는 자도 있었으니, 시속의 변고를 알 만하다.
○ 실주서(實注書)가 연고가 있으면 반드시 장래가 있는 참하 문관(參下文官 참하는 7품 이하)을 뽑아서 가주서(假注書)로 삼았다가, 그대로 실주서로 승진시키는 일이 또한 많았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사람들이 영화로 여기며, 원중(院中)에서도 대우해 주는 것이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임무를 받은 자는 시일이 비록 오래되더라도 감히 수고스럽다고 해서 자리를 버려두고 나가지 못했다.
근래 10여 년 사이로부터 비로소 들어와서 겨우 며칠만 지나면 바로 들어왔다가 바로 나가는 자도 있고 원중에서도 가관(假官)이라 하여 선택을 정밀하게 하지 않으니, 사류(士流)들 중에 전해 오던 예전 일은 다시 볼 수가 없다. 이런 지 얼마 안 되어 난리가 일어났다.
○ 문신이 선전관(宣傳官)을 겸하는 것은 역대로 당하관 중에서 현직(顯職)의 관원으로 겸하게 했으니, 이는 시위(侍衛)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 때문이다. 일찍이 전직 문신으로 이를 삼지 않은 것은 본직이 없으면 겸관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공호(李公浩 양중(養中))는 당하관 때에 파직을 당했는데, 이 자리를 얻기 위하여 학관(學官)의 예에 따라 군직(軍職)에 붙여 녹을 받았다. 그래서 식자들은 자못 아름답지 못한 일로 여겼는데, 그대로 고사(故事)가 되어서 파직당한 자는 번번이 이 자리를 구하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 사관(四館 승문원ㆍ예문관ㆍ성균관ㆍ춘추관)에서는 서로 지극히 공경하여 지위마다 더욱 엄격하고, 아랫사람을 검속하는 데도 엄격해서 만일 미비한 점이 있으면 조금도 가차없이 책망하여 그 종을 매질하게 하였으며, 또 처벌과 예우가 병행하기 때문에 상하 사이에 체모를 존중했다. 사관(史官)은 역사를 편수하는 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괴원(槐阮 승문원의 별칭)에서는 반드시 아랫사람부터 일찍 출사하고 공사(公事)는 감히 잠시도 지체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수토(水土)에 침해당하는 따위의 일은 지극히 무리하니, 파직시키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지만 아랫사람을 검속하는 풍습에 이르러서도 내려오면서 폐기되었다. 만일 옛 일을 진흥시키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떼를 지어 욕하고 원망했으니, 어찌해서 선비의 기풍이 이렇게 박하게 되었는가.
내가 무진년(선조 1, 1568)에 사관(四館)에 들어갔는데, 그때까지는 아랫사람을 검속하는 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옛 선배들은 매양 옛날만 못하다고 탄식했는데, 하물며 오늘에랴.
난리 뒤에는 심지어 차례를 무시하고 추천서를 쓰는 자가 있으며, 혹은 실직하거나 파직당한 자도 있어 여섯 달을 서로 기다리던 풍습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으니, 탄식할 일이다.
○ 남행(南行) 으로 대간이 되는 일은 조종조에서 일찍이 있던 일인데, 중간에 폐해졌다가 금상 초년에 비로소 회복되었다. 대간이 된 사람으로는 이항(李恒)ㆍ한수 (韓修)ㆍ민순(閔純)ㆍ남언경(南彦經)ㆍ정구(鄭逑)ㆍ유몽학(柳夢鶴)ㆍ홍가신(洪可臣)ㆍ기대정(奇大鼎)ㆍ유몽정(柳夢井)ㆍ정인홍(鄭仁弘)ㆍ김천일(金千鎰)ㆍ송대립(宋大立)이었고, 최영경(崔永慶)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이것을 10년 동안 시행하다가 임금의 명으로 없애 버렸다.
내가 젊었을 때 남명(南溟)의 상소를 보니, 말하기를,

“자전(慈殿 문정왕후(文定王后))은 사려가 깊으시건만 깊은 궁중에 있는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어린 전하께서는 선왕(先王)의 한 고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여, 말이 너무 준절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하가 임금에게 진언하는 데에는 마땅히 충성과 공경을 다해야 할 뿐이고, 이처럼 모가 나는 말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때 권간(權奸)들이 조정에 있었으나, 처사(處士)의 큰소리치는 것이라 해서 감히 죄 주지 못했다 한다. 퇴계(退溪)와 회재(晦齋)의 상소 중에도 일찍이 이런 글귀들이 있었던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호)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호) 두 선생이 함께 중종 때에 벼슬해서 소재는 이조 정랑, 미암은 수찬으로 있었는데, 을사년(인종 1, 1545)의 화에 연루되어 소재는 진도(珍島)로, 미암은 제주(濟州)로 귀양갔다가, 미암은 해남(海南) 사람이어서 고향에서 가깝다 하여 종성(鍾城)으로 배소를 옮겼다.
명종(明宗) 말년에 을사년 화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이 점점 풀려 나오게 되었으니, 이는 문정왕후가 승하한 뒤에 명종이 그들의 억울함을 알고서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금상 초년에 소재와 미암은 모두 현직(顯職)에 올랐다.
○ 소재는 마침내 정승 자리에 올라 임금에게 중한 대우를 받은 지 20여 년 동안 비록 일을 하거나 건의한 일은 없었어도 선비들의 마음이 모두 그에게로 향하여 여론을 진압하는 장점이 있었으며, 항상 간결하고 침묵하는 것으로 자처했다. 나도 여러 번 임금 앞에 그와 함께 입시했지만, 글 뜻을 논의하는 데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기축년 역옥(逆獄)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그는 부축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 일이 번지게 하지 말라고 아뢰더니 얼마 안 되어 일찍이 역적을 천거했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 경인년(선조 23, 1591) 봄에 세상을 떠났다. 사대부 중에서 유 정승(柳政丞 유성룡을 지칭)과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만이 그 초상을 힘껏 돌봤을 뿐, 조정에서는 부의나 예장(禮葬) 같은 일이 없었다. 나는 그때 상주(尙州)에 있으면서 힘껏 초상 일을 돌봤다.
소재는 젊었을 때부터 절행과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런데 을사년의 죄명은 “일에 서툴고 고집이 세다[疎戇].’는 것으로 지목하였으니, 이것은 간사한 자들이 죄를 꾸며내는 데 명목을 붙이기 어려워서 억지로 이 두 글자를 덮어 씌운 것이다. 원통한 일이다. 시문(詩文)이 고고(高古)해서 사람들이 한 구절만 얻어도 반드시 이를 외우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숙흥야매잠주(夙興夜寐箴註)》가 있다. 무진년(선조 1, 1568) 겨울에 《학문혜경(學問蹊逕)》을 올렸는데, 퇴계와는 길이 조금 달랐으니, 이는 소재는 나정암(羅整菴 명대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의 호)을 위주로 했기 때문이다.
미암은 총명이 뛰어나 한 번 보면 문득 외었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호)가 일찍이 말하기를,

“유희춘과 함께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하면 아무 걱정이 없다.”
하였다 한다. 귀양에서 풀려 온 이후로 옥당의 장관으로 매우 오래 있었다. 내가 강연에 들어갔을 때 상이 추념(追念)하여 이르기를,

“학식과 견문이 많기는 유희춘과 같은 사람이 없었다.”
하였다. 정축년 봄쯤에, 미암이 시골에 있을 때 상이 간곡히 그를 부르자, 병든 몸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온 후로 병이 심해져 얼마 안 되어 죽었다. 그런데 죽은 뒤에는 의례적으로 부의하는 이외에 아무런 특별한 은전이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속으로 적이 이상히 여겼다. 어느날 경연에서 내가 아뢰기를,

“유희춘이 연로하여 시골로 물러가 있다가 상의 간곡하신 부름에 감동되어 부축을 받고 올라와서 객지에서 죽었는데, 특별히 베풀어 주시는 예우를 보지 못했으니, 어진 선비를 대우함에 있어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가 다르므로 신은 몹시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했으나, 비답을 받지 못하였다.
그의 벼슬은 자헌대부로 부제학에 그쳤는데, 정2품으로서 옥당의 장관이 된 것은 이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그가 귀양가 있을 적에 저술한 《속몽구(續蒙求)》가 세상에 전하고, 또 《천해록(川海錄)》 80여 권이 있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였다.
○ 추만(秋蠻) 정지운(鄭之雲)은 뛰어난 선비이다. 그는 우리 아버님과 몹시 가까웠다. 아버님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판관 윤기(尹紀)는 시를 잘 짓는다는 이름이 있어 사람들이 소중히 여겼다. 어느날 여럿이 모여 술을 마셨는데, 추만이 찌그러진 갓을 쓰고 죽림(竹林) 속에 취해 자빠져 있었다. 판관이 시 한 구를 지었다.


찌그러진 갓으로 분별이 없이 / 破笠無分別
대숲에 비를 □ 즐기네 / 耽看竹雨□


이것을 당시 동류들이 서로 외어 전하면서 그 구법(句法)이 청진(淸眞)하다고 했다.”
하였다.
○ 을유년(선조 18, 1585) 여름. 내가 호남 전운사(湖南轉運使)로 일을 마치고 두치진(豆恥津)을 경유하여 의성(義城)에 가서 근친(覲親)한 일이 있었으니, 처음 내려올 때 상소하여 근친할 것을 청해 임금의 윤허를 받았던 것이다. 이때 평경(平卿 이준(李準))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었다. 나는 5~6일을 그곳에 머물러 있었는데, 당시 감사 권극례(權克禮)도 이 고을에 머물렀다. 어느날 방백(方伯) 이하 여러 사람들과 배를 타고 최효원(崔孝元 영경(永慶))의 집을 방문했더니, 우거진 대숲 속에 초당을 정결히 쓸고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 그 뒤에 또 추고 경차관(推考敬差官)으로 그 고을을 지나다가 다시 그를 찾았을 때, 글로 문답한 것도 있었는데, 마침내 기축옥사에 걸려 감옥에서 말라 죽었으니, 산림에 사는 청고(淸苦)한 선비로도 면할 수 없는 것은 천운이라, 원통한 일이다.
○ 서애(西厓)가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기축옥사가 바야흐로 일어날 때 나는 대신으로서도 아무런 말도 임금께 올리지 못했는데, 이흠재(李欽哉 이헌국(李憲國)의 호) 영공(令公)은 금부 당상(禁府堂上)으로서 매양 임금 앞에서 계함(季涵 정철(鄭澈)의 자)의 말을 면전에서 비난하되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또 옥사가 너무 지나치게 파급된다고 임금께 경계했으니, 참으로 옛날의 유직(遺直 옛날의 곧은 사랑의 유풍(遺風)이 남아 있음을 말함)이었다. 어느날 임금께 아뢰는 일이 끝나고 나와서 빈청(賓廳)에 앉았노라니, 계함은 노염이 가시지 않아서 흠재에게 호통치기를 “영공은 어찌 그리 망령된 말이 많소?”하자, 흠재는 조금 자리를 피하면서, “소인이 참으로 노망(老妄)했나 보오.”하고, 조금도 얼굴빛을 변치 않았다.”
하였다.
○ 정승 정입부(鄭立夫 정언신(鄭彦信)의 자)는 나이가 나보다 17살이나 많은데도 교분이 몹시 두터워 서로 왕래하고 지냈다.
기축년(산조 22, 1589)에 나는 상주(尙州)에 있고, 입부는 처음에 충주(忠州)로 귀양갔다가 남해(南海)로 옮겨져 상주를 지나게 되었는데, 요통(腰痛)이 심해서 말을 타지 못하기로 내가 침대를 만들어 소에 태워 보냈다. 처음에는 말에 태워 보내려고 했더니, 입부는 말타기가 거북하다 하면서 듣지 않았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또 왕옥(王獄)에 잡혀 갑산(甲山)으로 귀양가서 드디어 세상을 떠났다. 그때 행로(行路)는 금산(金山)으로 잡았으므로 다시는 만나보지 못했다. 그 성심으로 봉직(奉職)하여 끝내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 중에서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에 조백유(趙伯由)가 함안(咸安) 시골 집에서 잡혀갔으니, 전에 금구(金溝) 수령으로 있을 때 정적(鄭賊 정여립(鄭汝立)을 말함)과 서로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주를 지날 때 그가 오는 길에 술을 보냈고, 우리 고을에 이르자 또 술을 주어 위로했다. 하도원(河道源 하낙(河洛)의 자)도 와서 함께 몹시 취했었다. 도원이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해서 그 역적을 알게 되었더냐?”
하자, 백유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내가 역적을 아는 것은 네가 역적을 아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니, 도원도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그런 지 4~5개월이 지나서 석방되어 돌아오므로 하례하는 술을 차려 만나 보았으니, 영외(嶺外)에서 잡혀간 사람 중에 살아서 돌아온 이는 오직 이 사람 하나뿐이었다. 전후 잡혀간 허다한 사람들 중에 오직 정언신과 조백유가 내 옛 친구였으니,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으랴!
○ 홍혼(洪渾)의 자는 혼원(渾元)으로 나보다 두 살이 많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같이 놀아 뜻도 같고 하는 일도 같았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초탈하며, 친척들과 화목하고 친구들에게 진실하며 남을 속이지 않으려고 애썼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선비이다.
세상과는 뜻이 맞기 어려워 악을 미워함이 너무 지나쳤다. 전에 지평 벼슬을 내놓고 집안 식구를 데리고 시우동(時雨洞)으로 들어가 산밭을 짓고 살더니, 얼마 안 되어 중화 군수(中和郡守)가 되었다가 또 얼마 안 되어 교리로 소환되었다. 뒤에 사간을 거쳐 승지가 되었고, 외직으로 강원 감사가 되었다. 늘그막에는 자못 술을 즐겨 이로 인해 병이 들었는데 취하기만 하면 미친 듯한 노래를 불렀으나, 그 지조만은 여전히 굳세어 변하지 않았다.
임진 난리에 처음에는 임금을 모시고 갔고, 다음에는 세자를 모시고 갔는데, 유상(兪相 유홍(兪泓)을 말함)의 잘못을 힘껏 공격하여 당시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충청도에서 방랑하다가 병으로 예산(禮山)에서 죽었으니, 아깝고 아깝도다. 그의 호는 시우(時雨)이다.
○ 김 영흥 효원(金永興孝元 영흥(永興)은 지명으로 영흥 부사를 지냄)의 자는 인백(仁伯)으로 가정(嘉靖) 임인년(중조 37, 1542)에 태어났다. 나는 을미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끝까지 의리를 변치 않았다.
사람됨이 총명하기가 남보다 뛰어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일찍부터 재주 있다는 명망이 퍼졌다. 을축년(명종 20, 1565)에 알성과(謁聖科)에 장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역임했는데, 갑술ㆍ을해년 사이에 동(東)ㆍ서(西)의 설이 일어나자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 이 뒤로는 침체되어 빛을 보지 못하고, 혹은 내직으로 들어왔다 혹은 외직으로 나갔다 했으나, 끝내 개의하지 않았다.
신묘년에 당상관에 올라 영흥 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사람됨이 후덕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또 악을 미워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더니, 말년에는 너그럽고 부드러워 남을 용납했으며, 또 세상을 다스리는 재주가 뛰어나므로 사람들이 크게 쓰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일찍 죽었으니, 천명이다.
나는 그의 언론이 강직하고 말투가 단정하던 모습이 생각날 때마다 문득 슬픈 마음이 들어 목이 멘다. 친구간에 서로 도와 유익하게 하는 것이 경선(景善 우성전(禹性傳)의 자)과 함께 좋은 벗이 되었는데 모두 잃었으니, 내 말로가 캄캄하다.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인가.
인백(仁伯)이 처음 벼슬할 때에 명을 받고 영외(嶺外)로 나가서 남명(南溟)을 뵈니, 남명이 크게 허여했었다. 중년에는 역시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니, 이는 퇴계가 무진년 사이에 서울에 왔을 때의 일이다.
그 아들 극련(克鍊)은 효행이 있어 상중에 지나치게 애통해 하다가 실명(失明)했다고 한다.
○ 좨주(祭酒) 우성전 경선(禹性傳景善 경선(景善)은 자)은 임인년(중종 37, 1542)에 태어났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놀던 좋은 벗이다.
경선은 일찍부터 스스로 분발하여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드디어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되었다.
신유년(명종 16, 1561)에 나와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무진년에도 나와 함께 별시(別試)에 합격했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해서 좀처럼 사람을 허여하지 않으며, 자신을 굽혀 세상과 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속배들의 미움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30년 동안이나 침체되었으되, 개의하지 않았다.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란 오직 서애ㆍ파곡(坡谷 이성중(李誠中))ㆍ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ㆍ시우당(時雨堂 홍혼(洪渾))ㆍ자앙(子昻 김수(金?)의 자)과 나 몇 사람뿐이었다. 계미년에 응교가 되어 차자를 올렸는데, 언론이 매우 정당해서 비록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탄복했다. 그러나 선비와 벗들 사이에서는 종시 그를 이해해 주는 자가 없었으니, 이것은 천명이라, 어찌하겠는가.
동과 서라는 두 글자가 이미 나라를 병들게 하는 큰 좀이 되었는데, 일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은 또 남(南)ㆍ북(北)의 설을 만들어내어 그 여파가 점점 번져가더니, 기축년의 옥사까지 일어나서 백중겸(白仲謙 백유양(白惟讓)의 자)이 죽을 때에 경선을 남인의 우두머리라고 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미혹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말인가. 중겸의 죽음은 극히 원통한 일이지만, 이 말은 매우 애석하다. 남과 북이란 두 글자를 어찌 차마 입에서 냈단 말인가. 지금까지도 중겸의 남은 의론으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들이 있으니, 더욱 괴이한 일이다.
난리가 난 뒤에 그는 90세 노모(老母)를 모시고 해변으로 돌아다니다가 의병을 일으키니,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특별히 당상관으로 승격시켜 대사성(大司成)을 삼고 인신(印信)을 주었다. 그는 자기가 거느린 군사를 장의병(仗義兵)이라 하고, 강화(江華)로 들어가서 김천일(金千鎰)과 서로 호응해서 바다를 함께 지켰다.
계사년에 적이 물러갈 때 의령(宜寧)까지 추격했다가 병이 심하여 들것에 실려 돌아오던 중 부평(富平)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2세였다.
상은 그가 연안(延安)으로 가서 후원(後援)하라는 명을 듣지 않았다 하여 그의 관작을 삭탈했다. 그는 스스로 호를 추연(秋淵)이라 했다.
금협지(琴協之 이름은 응협(應夾)이다. 협지는 자)가 서울에 와서 여관에 있을 때 우경선이 그를 찾아갔다.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강원경(姜遠卿 서(緖))이 술이 몹시 취해서 맨발로 와서 손으로 경선의 두 눈을 여러 번 쓰다듬어 내렸다. 경선이 왜 이러느냐고 묻자, 원경이 대답하기를,

“네 눈이 하도 높기로 쓸어 내리려 하는 것이다.”
하고, 매우 즐겁게 놀고 돌아갔다.
원경은 술로써 미치광이란 말을 들었지만, 정말로 미친 것은 아니었으니 마치 원정(猿亭)이 부서진 배로 노천(老泉)을 비유한 것과 같다.
○ 교리 김첨(金瞻)의 자는 자첨(子瞻)이니, 황박(黃博)의 문하에서 나와 함께 공부하던 벗이다. 성품이 지조가 있고 청렴하였다.
신유년(명종 16, 1561) 감시(監試 조선 시대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에, 나와 함께 성균관에 나갔다가 파할 무렵에 시권(試券)을 받아 가지고 바치지 않았다. 내가 펴보면서 그 까닭을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내가 지은 글이 맘에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부제(賦題)도 잘못 써서 고쳤다. 이러한 데도 과거를 보겠는가?”
하면서, 끝내 겨드랑이에 끼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그가 타백(拖白) 하는 줄 알았으나, 그의 뜻은 이렇게 구차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청빈(淸貧)하게 고요히 살며 오래도록 과거를 보지 않았다. 병자년에 비로소 별시에 나가 급제해서 예문관을 거쳐 홍문관 전랑(銓郞)이 되었으니, 모두 나와 같은 때였다.
계미년 가을에 한 번 풍파를 겪어 지방으로 나가서 지례 현감(知禮縣監)이 되었다가 갑신년 가을에 죽었다. 이해 여름에 내가 조정에서 물러나 문소(聞韶 의성(義城)의 옛 이름)의 시골집에 있다가,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제수받고 서울로 올라오려는데, 이때 방백(方伯) 유서애(柳西厓)가 성주(星州)에 머물고 있다가 자첨(子瞻)을 맞아 보았다. 자첨은 내가 서울로 간다는 말을 듣고 성주에서 군위(軍威)까지 왔다. 당시 군위 태수(軍威太守)는 권형숙(權亨叔)이었다. 나에게 요청하여 서로 회포를 풀고 수일 동안 머물다가 작별했는데, 그 뒤로는 다시는 만나보지 못했다. 이것이 사생의 영결이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지금까지도 생각할수록 눈물이 흐른다. 그는 사람됨이 깨끗하여 세속의 티끌에서 벗어났고, 또 시를 잘 지었다. 그런데 나이 겨우 43세에 죽었으니, 참으로 아까운 일이로다.
○ 나는 청주 목사에 부임했다가 한 달도 못 되어 파직당해서 문소로 돌아왔다. 이때 응교 이공직(李公直 경중(敬中))이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병으로 응천(凝川)에서 죽어 그 영구가 서울로 돌아가는데 길이 성주를 지나가게 되었다. 성주 목사는 내 친구 홍혼원(洪渾元)이었는데, 인부와 말을 보내 주었다. 나는 경립(敬立)을 데리고 가서 공직을 조상하여 보냈다. 그 길로 나는 혼원과 함께 지례로 가서 자첨을 조상했다. 한 번 걸음에 두 친구를 조상했으니, 시운이란 말인가. 운명이란 말인가. 슬퍼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때는 갑신년(선조 17, 1584) 9월이었다.
○ 을묘년(명종 10, 1555) 겨울에 나는 처음 이 교관(李敎官)의 문하에서 이공저(李公著 이름은 성중(誠仲))를 만났다. 당시에 함께 교류한 사람들은 인백(仁伯)ㆍ형언(亨彦)ㆍ공직 몇 사람들이었다. 공호(公浩)는 나이가 어려서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공저는 단아하고 결백하고 온화한 데다가 일찍부터 가정의 교훈을 받아 이때에 벌써 《근사록(近思錄)》ㆍ《소학(小學)》ㆍ《사서(四書)》를 읽었으니, 비록 성년이 되지는 않았어도 사람들이 감히 그를 경솔히 여기지 못했다. 또 글도 잘 지어서 무오년(명종 13, 155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니, 당시 사람들이 조숙하다고 칭하였다.
그 뒤에 나와 동서간이 되면서부터 정분이 더욱 두터워져서 뜻도 같고 하는 일도 같아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반드시 함께 하였다.
경오년(선조 3, 1568)에 그의 아우 공직(公直)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자 빛난 이름이 날로 드러나고 대각(臺閣)을 역임하니, 당시의 인망이 그에게 많이 돌아갔다.
을해년에 인백이 외직으로 나간 뒤로는 친구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는데, 그도 부모를 봉양하고자 한산 군수(韓山郡守)가 되었다가 신사년에 조정에 돌아와서 다시 청반직(淸班職)에 올랐다. 갑신년간에 당상관으로 오르고, 신묘년에는 행부제학으로 충청 감사가 되었으니, 이는 특명으로 된 것이었다.
얼마 안 되어 당시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 파직당했다가, 임진 난리가 나자 다시 벼슬에 서용되어 대가(大駕)를 따라 의주(義州)에 가서 판서가 되었다. 계사년 봄에 평양(平壤)에 있던 적이 물러나자 군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제독 이여송(李如松)을 따라다녔다. 영남(嶺南)에 이르러 그해 초가을에 병이 나서 함창(咸昌)에서 죽었다.
그의 맏아들 유징(幼澄)은 나이 20세에 과거에 올라 역시 높은 벼슬을 역임하더니, 이해(선조 26, 1593) 5월에 의주의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불과 몇 달 동안에 부자가 잇달아 죽었으니,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혹독한 화를 편벽되게 내리는가.
공저는 스스로 호를 파곡(坡谷)이라 했다. 공직은 몸가짐이 견실하고 곧으며, 또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주도 있었다. 갑신년에 왕명을 받들고 영남에 갔다가 병으로 응천에서 죽었으니, 벼슬이 응교에 그쳤다. 기축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사람들이 이모(李某 공직을 말함)가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정적(鄭賊 정여립(鄭汝立)을 지칭)의 사람됨을 알고서 힘써 배척하고 쓰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임금이 특명으로 이조 참판을 추증하여 그의 감식력 밝음을 포상한 것이다. 형언(亨彦)은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고, 공호(公浩)는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는데, 모두 40세 남짓해서 죽었다.
○ 김숙부(金肅夫 우옹(宇?))는 화산(花山 안동의 옛 이름) 수령으로 있을 때, 기축년(선조 2, 1589) 겨울에 역적과 사귄 일이 있다 하여 북쪽 변방으로 귀양갔다. 이때 그의 형 경부(敬夫 김우굉(金宇宏)의 자)는 상주 읍내에 있다가 죽령(竹嶺)까지 쫓아가서 작별하려고 했다. 나도 편지를 보냈더니, 숙부는 이미 조령으로 향하였다. 경부는 겨우 노상에서 만나 보고 풍병(風病)에 걸려 집으로 돌아와서 비통해 하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내 편지는 미처 전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숙부는 임진년 난리 초에 귀양에서 풀려나와 지금 바야흐로 높은 벼슬을 역임하고 있다. 숙부는 기축년에 귀양갔던 사람이지만 피혐(避嫌)하지 않고, 기축년에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을 풀어 주려고 애썼다. 그래서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는 차자를 올렸고, 입시했을 때에는 임금께 면대해 아뢰기도 했다. 내가 《모재집(慕齋集)》의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호)과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호)의 서문과 발문(跋文)을 보니, 선생은 기묘년(중종 14, 1519)에 폐출되어 전원(田園)으로 돌아가서 산 지 20년이었는데, 다시 부름을 받은 뒤에는 기묘사림(己卯士林) 들의 원통함을 풀어주기 위하여 간곡히 여쭈며 피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숙부의 마음씀도 모재에게 부끄럽지 않다 하겠다.
○ 허봉 미숙(許?美叔 미숙(美叔)은 그의 자)은 초당 선생의 둘째 아들로 총명하고 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열 살 전에 빛나는 재주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다.
18세에 무진년(선조 1, 1568) 증광생원시(增廣生員試)에 장원으로 뽑히고, 22세에는 임신년 정시(庭試)에 급제해서 예문관을 거쳐 오랫동안 경연(經筵)에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그와 옥당의 동료로 있으면서 살펴보건대, 용모와 행동이 청일(淸逸)하고 의론이 초월하여 그 예리한 비판을 숨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를 아는 자는 그의 비상한 격조를 사랑했고, 알지 못하는 자는 그가 지나치게 재주를 드러내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으며, 심한 자는 그의 흠을 꼬집어 배척하기도 하였다.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한 번 보기만 하면 문득 외어서 고금의 일을 꿰뚫어 조금도 빠뜨리지 않았다. 또 시와 문장을 바로바로 지었으며, 비록 술을 마시고 크게 취했어도 문득 등불을 켜놓고 글을 읽은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모든 소차(疏箚)를 올리는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계미년 가을에 한 대신을 여지없이 배척하는 상소가 들어오자 그 대신은, “이는 필시 전한(典翰)이 지은 것일 게다.”하고, 사람을 시켜 알아 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되어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나갔다가, 또 얼마 안 되어 갑산(甲山)으로 귀양가는데, 상주를 지나서 가게 되었다. 전에 무진년 과거에 장원한 하도원(河道源 이름은 낙(洛))은 미숙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람으로, 미숙을 길에서 만나 보려고 하니, 미숙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도(道)가 같지 않은 자와는 함께 일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만나 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을유년 가을에 귀양이 풀렸다. 정해년간에는 금강산(金剛山)에 가려고 금화(金化)의 직목역(直木驛)을 지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재사(才士)로만 인정하였는데, 그가 함경도 순무사가 되어서는 모든 하는 일이 시의(時宜)에 맞고 또 원대한 계획이 있으니, 비로소 그에게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주도 있음을 알았다.
자첨(子瞻)이 일찍이 미숙을 희롱하기를,

“그대의 시가 비록 아름답기는 하나 맑지 못하니, 반드시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만 속태(俗態)를 면할 것이다.”
하였다. 이런 지 얼마 안 되어 과연 갑산으로 귀양갔는데, 이 뒤로 그의 시가 전보다 나아졌다고 하니, 예언이 이렇게도 용하게 맞는 수도 있을까.
○ 김임보(金任甫)의 이름은 홍민(弘敏)이다. 경자년(중종 35, 1540)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상주(尙州)로 후계(后溪 김범(金範)의 호)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기상이 화락하고 마음씨가 평탄했다.
경오과(庚午科 선조 3, 1570년의 과거)에 올라 예문관에 벼슬하기 시작하여 삼사(三司)에 드나들다가 전한(典翰)을 사퇴하고 힘써 청주 목사가 되기를 구하여 노부모를 봉양했다.
일찍이 중모(中牟)의 백화산(白華山) 아래에 정사(精舍)를 짓고 사담(沙潭)이라고 호를 지었다. 집이 본래부터 가난하였으나 편안히 지냈다. 난리가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속리산(俗離山)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가 갑오년에 옥천(沃川) 도중에서 병사하였다.
올봄에 내가 아침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김홍미(金弘微)는 학식이 많은 선비였는데, 지금 어디에 있으며, 그 형 홍민(弘敏)은 벌써 죽었느냐?”
하니, 학사 정경세(鄭經世)가 대답하기를,

“홍민은 작년에 죽었다 하옵고, 홍미는 기축년(선조 22, 1589)에 죄를 얻었다가 난리 뒤에 경상 좌도사(慶尙左都事)가 되었는데, 지금은 어머니 상을 당하여 안동(安東)에 살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그러면 언제 상복을 벗느냐?”
하였다. 이처럼 임보 형제에 대해서 유념하시는 것이 실로 보통보다 지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영화롭게 여겼다.
홍미의 자는 창원(昌遠)인데, 복을 벗자 교리(校理)로 등용되었다가 지금은 이조 정랑으로 있다. 내가 창원을 보고 이 일을 말하니, 창원은 슬픈 감회를 금치 못하였다.
○ 내가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사람으로 가장 친하고 가까이 지낸 자는 이하수 장원(李河壽長源 장원은 자)군과 허준 중칙(許準仲則 중칙은 자)군과 허심 군신(許諶君信 군신은 자)군이었다.
장원은 자질이 노둔하고 천성이 졸렬했지만 질박한 사람이었고, 벼슬은 내자시(內資寺) 봉사(奉事)까지 했다.
중칙(仲則)은 애써 글을 읽어 문장이 매우 단아했으며, 천성이 견실하고 청렴하였다. 기사년(선조 2, 1569)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하기 시작하였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양성(陽城)ㆍ곽산(郭山)ㆍ서천(舒川) 세 고을의 원이 되었는데,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다. 그리고 재물이라곤 털끝만큼도 함부로 취하지 않아서 청렴한 지조가 옛 사람에게 비교하여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말년에 술을 몹시 마셔 몸이 상한데다가 또 여색을 삼가지 못해서 수명을 반도 채우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다. 마침내 그 노모와 병든 아내는 10년 동안 고생하다가 어머니는 난리 때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고, 어린 아이들은 가르치지 못하고 그 집안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몹시 아까운 일이다.
군신은 일생 동안 병을 앓다가 겨우 벼슬을 얻어 별좌(別坐)에까지 오르고 죽었다. 그러나 그의 정직하고 성실함은 오래되어도 잊을 수가 없다.
장원은 병신년(중종 31, 1536)에 태어나서 계미년에 죽었으며, 중칙은 경자년(중종 35, 1540)에 태어나서 임오년에 죽었으며, 군신은 임인년(중종 37, 1542)에 태어나서 병술년에 죽었으니, 세 친구가 모두 겨우 40세를 넘기고 죽은 것이다.
그런데 나만 홀로 이미 50세까지 살고 벼슬도 재상의 반열에 올라 분수에 넘는 은덕을 입었다. 변란을 겪었지만 아직도 백발을 보전하고 있으니, 복이 지나쳐 재앙이 되어서 사삿집의 슬픈 일이 잇달아 생긴다. 차라리 죽고 싶어도 되지 않는 일이다.
○ 송백수 정로(宋柏壽貞老)는 신축년(중종 36, 1541)에 태어났다. 나와 서로 가장 아끼는 사이여서 글을 읽어도 반드시 같은 글을 읽고 잠을 잘 때도 반드시 한 이불에서 잤다.
임술년 가을에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그는 청수한 얼굴이 남보다 뛰어나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얼음이나 옥(玉)을 보는 듯했으니, 아직도 눈에 선하여 잊히지 않는다.
그 아들 희록(希祿)이 유학(儒學)을 배워 선비의 풍도가 있어 가문의 명성을 계승할 만하니, 정로는 죽었어도 죽지 않은 셈이다.
○ 내가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 이평경(李平卿 이름은 준(準))과 함께 한 책상에서 공부를 해서 교분이 몹시 두터웠다. 또 민직부(閔直夫 이름은 충남(忠南))도 뒤에 교류하여 교분이 두터웠고, 중칙도 우리와 함께 공부했다. 무진년에 나와 평경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중칙은 기사년에 벼슬하기 시작했으며, 직부는 5년 뒤 임신년에 비로소 별과(別科)에 합격했다.
중칙은 일찍 죽었으나, 우리 세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어 함께 금관자ㆍ옥관자 영화를 누리니, 또한 한 가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평경은 평탄하고 결백했으며, 직부는 중후하여 화려한 맛이 적었으니, 이들은 모두 어진 선비들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두 사람은 모두 침체되어 있고, 나 혼자 조정에 있으니, 탄식할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난리가 끝나지 않아서 온 세상이 모두 정신이 없으니, 어느 겨를에 성공하고 침체된 것을 따지겠는가. 이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다.
○ 권중립(權中立 이름은 화(和))의 아들이 셋인데, 그 가운데 아들 반(盼)은 내 사위이다. 그 아우 근(?)과 함께 나이도 젊고 힘도 있으니, 앞날의 성취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의 큰형 준(?)은 사람됨이 온화하기가 옥과 같고 맑기가 물과 같으며, 깨끗하고 초탈하여 쳐다보면 마치 신선과 같았다. 행실은 효도와 우애에 돈독하고 몸가짐이 몹시 단아했다. 그와 나는 인척간이기 때문에 자못 나를 허여했고, 나 역시 그를 나이를 따지지 않는 벗으로 여겼다. 그런데 불행히 일찍 죽었으니, 원통하고 아까운 일이다. 그 아내와 딸도 전후로 모두 죽었으니, 몇 달도 되지 않는 사이에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참혹한 화를 내리는가. 반의 둘째 아들로 뒤를 잇게 하였다. 둘째와 막내가 가정의 행실에 더욱 돈독해서 끼친 풍도와 남은 운치를 계속해 나가게 한다면 어찌 그 큰형만이 죽지 않은 것이 될 뿐이랴. 그 아버지도 반드시, “나의 훌륭한 후손이 있구나.”할 것이니, 힘쓰고 힘쓸지어다.
○ 고려 말년에 정포은(鄭圃隱 이름은 몽주(夢周))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일이 있더니, 그 뒤에 우리 나라에 와서 드디어 풍속이 되어 2백 년 동안 사족(士族)의 집안뿐만이 아니라, 비록 천민일지라도 효행이 있는 자는 역시 이를 본받아서 행하는 자가 있었다.
기사ㆍ경오년(선조 2~3, 1569~1570)간으로부터 장사 지낸 뒤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정당한 예법이라 하여 이름 있는 선비들이 행하기 시작하자, 시묘살이에 관한 일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지금부터 10년 전에 노소재(盧蘇齋)가 임금 앞에 입시했을 때 시묘살이하는 자가 점점 적어진다고 탄식했는데, 내가 직접 그 말을 들었었던 것이다.
난리 뒤에 초상에 대한 기강이 아주 무너졌는데, 후생들로 연소한 사람 중에는 공저(公著)의 아들 유청(幼淸)ㆍ유심(幼深)등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호)의 손자 이의윤(李宜潤) 4형제가 그 아버지를 위해서 모두 시묘살이를 했으니 가상한 일이다.
○ 근세에 와서 규수(閨秀)로는 허씨(許氏 김성립(金誠立)의 아내로, 허엽(許曄)의 딸)가 제일 뛰어났고, 충의(忠儀) 이봉(李逢)의 서녀도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내 친구 조백옥(趙伯玉 원(瑗))이 데리고 살았다.
기축년에 내가 새로 상주(尙州)에 부임했을 때 백옥은 성주 목사에서 갈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 관사에서 자고 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백옥과 함께 그의 첩이 묵고 있는 곳에 술자리를 베풀었더니 백옥은 그 첩에게 시 한 구를 지어서 나에게 주라고 권하자, 이는 즉석에서 입으로 부르며 백옥에게 대신 쓰게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낙양의 재주 있는 사람 진작 부르질 않고 / 洛陽才子何遲召
상담부 지어 굴원을 조상하라 하나 / 作賦湘潭弔屈原
손으로 역린을 잡은 것은 위태로운 일인데 / 手扮逆鱗危此道
회양에 편히 누운 건 역시 임의 은혜라네 / 淮陽高臥亦君恩

그는 시를 읊고 생각하는 동안에 손으로 백첩선(白疊扇)을 부치면서 때로는 입술을 가리기도 하는데, 그 목소리는 맑고 처절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그 첩의 호는 옥봉(玉峯)이라고 한다.
○ 내가 정해년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관북(關北)에 가는데, 단천읍(端川邑)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늙은 관비(官婢) 하나가 나이 80세가 넘었는데, 일찍이 남명(南溟)을 섬긴 일이 있다 하여 절개를 지키고 있다.”
하므로, 불러 보니, 그는 말하기를,

“남명은 그의 아버님이 이 고을 군수로 있을 때 자제로 여기에 오셨지요. 저는 남명과 동갑으로 나이 17세 때에 모시고 자서 정이 들었다가 5년 만에 작별했지요.”
한다. 그 뒤에 딴 군수가 왔을 때 찰방이 가까이하려 하므로 거짓 미친 체하고 발가벗고 달아났다고 한다.
그런 뒤로는 다시는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남명을 생각하다가 이내 미친 병이 생겼는데, 지금은 조금 나았다고 한다. 내가 술 두어 잔을 주었더니, 그는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조씨(曺氏)가 지은 것이지요.”
하였다. 함흥(咸興)에 기생 하나가 있었다. 평사(評事) 황위(黃瑋)가 아문(衙門)의 어린이로 있을 적에 오랫동안 그를 데리고 살다가 딸을 낳았는데, 그 뒤로 수절(守節)하여 종신토록 변하지 않았다. 이 말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를 내렸다.
단천(端川)의 관비(官婢)는 남명을 만나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을 거쳤다 하여 정표(旌表)하지는 않았다 한다. 변방에 사는 천한 기생이 절개를 지킨 것도 가상하거니와, 관가에 매인 계집들은 촌 계집과는 같지 않아서 수절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임진 난리 초에 나는 청주(淸州)에 있었는데, 사순(士純) 김성일(金誠一) 이 잡혀 가는 길에 객관(客館)에 들어와 나를 보았다. 이때 흉적들은 이미 상주를 함락하고 장차 고개를 넘어오고 있는 판이라,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번 걸음에 필경 살아올 이치는 없는 것이므로 서로 손을 잡고 작별할 적에 그 심사가 어떠했겠는가. 이때 사순이 술을 달라고 몹시 급히 서두르기에 나는 이를 중지시키면서 말하기를,

“형이 지금 길을 재촉하여 빨리 가느라고 기운이 몹시 쇠약했을 뿐 아니라 지금은 밤도 깊었으니, 만일 술을 마시게 되면 반드시 몹시 취할 것이고, 몹시 취하면 필경 쓰러질 것이니, 이렇게 되면 갈 길이 점점 늦어질 것이므로 술을 마시지 않고 빨리 가는 것이 나을 것이오.”
했더니, 사순도 이 말을 옳게 여겨 마시지 않고 떠나갔다. 이번 이별이 영결(永訣)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직산(稷山)에 이르러 석방되었다가 마침내 병으로 죽었다. 이 역시 운명이라 하겠다.
○ 임진년 난리 초에 막객(幕客) 이원(李瑗)이 나에게 말하기를,

“경상 감사가 이미 가야산(伽倻山)으로 도망했다고 하니, 사또께서도 나가 피하십시오. 저도 따르겠습니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도사(都事)는 어디서 이 말을 들었는가?”
했더니, 그는 찰방과 영리(營吏) 아무개가 모두 이렇게 말하더라고 했다. 그래서 찰방 김가기(金可幾)와 영리 아무개 아무개를 불러 물었더니,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그런 지 며칠 뒤에 이원이 또 사직하기를,

“늙은 어미의 사생을 알지 못하므로 찾아 나가는 길입니다.”
하기로, 나는 말하기를,

“나도 어머니가 영외(嶺外)에 계시니, 사생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미 한 지방의 책임을 맡았으니, 이런 위급한 때에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니, 그는 여전히 떠들어 마지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말하기를,

“도사의 직책이 방백(方伯)보다 가볍기는 하지만 내가 만일 연고가 있으면 모든 처리와 계문(啓聞)하는 일들을 그대가 전담해야 할 것인데, 버리고 가려 하니, 이는 도망가는 것이다. 정 그럴진대 마땅히 군법(軍法)으로 처리할 터이니,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
하였더니, 중지되었다.
청주(淸州)가 패한 뒤로 방어사(防禦使) 이옥(李沃)과 종사관(從事官) 최기(崔沂)가 모두 와서 작별하기를,

“임금의 파천 길에는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이 반드시 많지 않을 것이니 가서 임금을 시종하고 싶습니다.”
하는데, 그들의 정상을 살펴보니, 실제로는 도망가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큰소리로 책망하였더니, 중지되었다.
이튿날 보덕(輔德) 심대(沈岱)가 개성(開城)에서 표신(標信)을 가지고 왔는데, 임금의 분부로 군사를 내어 적을 토벌할 일로 왔던 것이다. 나는 이옥의 무리들이 도망하려 한다고 말하자, 심대도 그들을 몹시 꾸짖어 마침내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내 지휘를 들어 드디어 청주에서 적을 쫓아낸 공을 세웠다.
방어사 유극량(劉克良)은 죽령(竹嶺)에서 진을 치고 지키다가 적이 충주(忠州)를 함락시킨 뒤에, 사잇길로 직산에 이르러 나의 통제를 받기를 원하므로, 그로 하여금 그대로 직산을 지키게 했는데, 회보를 받지 못하고 바로 임진(臨津)으로 향해 가다가 패해 죽었다고 한다. 그가 충청도 경계를 지키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나,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몹시 애석한 일이다.
○ 상이 평양(平壤)에 머무른 지 한 달 만에 적은 이미 대동강(大同江)에 몰려왔다. 이에 혹은 성을 지키자고 청하고, 혹은 피해 나가자고 청해서 조정 의론이 분분하여 여러 날 동안 결정을 짓지 못했다. 상의 뜻이 나가 피하기로 결정되니, 성안 백성들은 죽기로 지키기를 원해서 심지어는 공손치 못한 말을 하는 자까지 있었다. 이리하여 중전이 겨우 먼저 떠나고, 감사 송언신(宋言愼)에게 명하여 난민 몇 명을 목 베게 한 뒤에 조금 안정되어 대가(大駕)가 드디어 떠났다. 대간과 한림(翰林)ㆍ주서(注書)로 안주(安州) 사이로 도망했던 4~5명은 영변(寧邊)에 이르고 대가는 의주(義州)를 향했는데, 형세가 만일 다급하게 되면 요동(遼東)으로 건너갈 계획이었다.
동궁(東宮)은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산 속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7월 무렵에 강원도에 다달아 오랫동안 이천(伊川)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경기도의 사민(士民)들이 점점 모여들어 인심이 비로소 나라를 생각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번 이천의 걸음이 중흥의 근본이 되었다고 했다.
계사년 7월에 중국 군사가 평양성(平壤城)을 수복한 후로 대가가 점점 동쪽으로 돌아와 혹은 정주(定州)에 머무르기도 하고, 혹은 강서(江西)에 머무르기도 하고, 혹은 해주(海州)에 머무르기도 했다. 10월 1일에 서울로 돌아오니, 이날 유생 몇 명이 반송(盤松)에 나와 맞았고, 서울 백성들도 이곳까지 나와 맞아 상하가 통곡하니 천지도 빛이 변했다 한다.
동궁의 행차는 이천에 있다가, 임진년 9월과 10월 사이에 성천(成川)으로 옮겨가서 용강(龍岡)에서 겨울을 나고, 계사년 정월에 정주에 나가 대가를 뵙고 그대로 대가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중국에서 동궁에게 명하여 군사의 일을 맡아 처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에 가 있으라고 하므로 윤11월에 남쪽으로 내려가 잠시 공주(公州)에 머무르다가 그대로 전주에 가서 설날을 지냈다. 그리고 갑오년 봄에 홍주(洪州)로 돌아왔다가, 이해 8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전주에 있을 때 조정에 보고하여 과거를 보여 문사(文士) 9명과 무사(武士) 수천 명을 뽑았다.
○ 임진년 난리 초에 수원(水原)에서 패전하고 공주(公州)로 돌아가 주둔했는데, 제독 조헌(趙憲)이 장차 의병(義兵)을 일으키려 하므로, 내가 이를 권하여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본 고을 유생들과 의논이 맞지 않아 옥천(沃川) 집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안 되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편지를 뜯어보니, 이른바 한리(韓吏)의 편지라는 조그만 쪽지 하나가 동봉되어 있었다. 그 중 한 조목에 말하기를,

“순찰사가 관군(官軍)을 내주지 않으니, 그 뜻이 황당해서 측량할 수가 없다.”
했다. 내가 이것을 보고 몹시 놀라서 여기저기 물어 보았으나 모두 말하기를,

“한리란 누군지 알 길이 없다.”
고 했다. 뒤에 들으니, 이것은 청양(靑陽) 아전이라고 한다.
호남(湖南) 선비 양산숙(梁山璹)과 호서(湖西) 선비 곽현(郭賢)이 의주에서 강화(江華)로 돌아와서 김천일(金千鎰)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그 끝에 말하기를,

“조정에서 나를 창의사(倡義使)로 삼았으니, 호남과 호서에서는 마땅히 나의 토제를 받아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여전히 고집하고 관군을 의병으로 뽑아가지 못한다고 하면 마땅히 천지의 엄격한 대의(大義)로 낱낱이 임금께 보고해서 역적의 죄로 처단하리라.”
했다. 내가 웃으면서 양산숙과 곽현에게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이냐? 관군으로 의병에 들어간 자를 내가 과연 찾아오게는 했지만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령은 없었으니, 필경 잘못 듣고 하는 말일 게다. 설령 실지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해도 관군이 의병에 응모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 것이 어찌 위를 거스르는 것이겠느냐? 그대들은 어찌해서 장수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했더니, 두 사람은 모두 부끄러워하는 빛을 띠고 딴 말을 꺼냈다.
그 뒤에 조헌공이 금산(錦山)에 갈 때 나를 찾아 왔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른바 한리(韓吏)란 누구인가? 그대가 의병을 처음 일으킬 때에 아전들과 서로 편지로 왕복하며 심지어는 순찰사를 들어 황당하다고까지 했으니, 너무 심한 말이 아닌가? 여러 장수의 휘하에 있는 관군을 그대가 모두 빼앗아 차지했는데, 이른바 의병을 모집한다는 것은 매인 곳이 없는 사람이나 자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이고, 관군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며, 내가 관군의 모집을 금한 것도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하물며 이미 위에 아뢰었으니 더욱 찾아 오지 않을 수 없음에랴? 이것이 황당한 일인가?”
하고 또 대의(大義)를 들어서 책망하니, 그는 오직 손으로 앉은 자리만 긁을 뿐이었다. 얼마 안 되어 적에게 죽었으니, 그 꾀도 없이 경솔하게 진격하다가 마침내 몸까지 죽이고 말았음은 몹시 원통한 일이다.
충주(忠州) 유생 민성길(閔星吉) 등이 상소하여 내가 앉아서 성패만 구경하고 일을 미룰 계획만 한다고 말했다 한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재주와 지혜가 없어서 여러 장수를 통제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진실로 할 말이 없지만, 만일 내 마음을 측량할 수 없다느니, 상을 거스른다느니, 일을 미룬다느니 하는 말들은 몹시 흉패(凶悖)한 말인데, 어찌 차마 입 밖에 내어 남을 모함한단 말인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 생원ㆍ진사에 장원한 자에 대해서는 같이 급제한 사람들이 매우 지극히 공경하여 보기만 하면 반드시 나아가서 절하고 감히 나란히 걷지도 못하며 나란히 앉지도 못한다.
방(榜)을 내던 이튿날 모두 명함을 드리고, 방방(放榜)한 이튿날에는 생원에 장원한 사람의 집에 또 그 이튿날엔 진사에 장원한 집에 함께 나아가 모시고 가서 사은(謝恩) 알성(謁聖)의 예를 행하였다. 문과와 무과도 모두 그러하였다.
수십 년 동안 성균관에서 신ㆍ구방(新舊榜)을 파한 뒤에는 나이대로 앉아 비록 장원이라도 나이가 적으면 방하(榜下)에 앉게 되자 공경하는 예가 점점 소해져서 혼동되어 등급이 없기에 이르러 2백 년 동안 돈독하고 순후한 풍속이 모두 없어져 버렸으니, 아까운 일이다. 아비의 동년(同年)도 장원처럼 공경했는데, 이런 일로 해서 역시 폐해졌다가, 난리 뒤에 와서는 아주 없어졌다.
○ 을사년(인종 1, 1545)에 죄를 입은 사람으로서 살아남아 임금의 은혜를 입은 자로는 노소재(盧蘇齋)는 영의정, 유미암(柳眉巖)은 부제학, 김난상(金鸞祥)은 대사간, 백인걸(白仁傑)은 삼재(三宰 좌참찬), 이담(李湛)은 감사, 황박(黃博)은 판결사(判決事), 유담(柳湛)은 사복정(司僕正), 한주(韓澍)는 사인(舍人), 민기문(閔起文)은 감사, 윤강원(尹剛元)은 판교(判校), 이염(李?)은 정랑, 한호(韓灝)는 판교, 이원록(李元祿)은 판교를 제수받았으며, 한숙(韓淑)ㆍ권물(權勿) 등이고, 이 밖에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이미 죽어서 뒤에 추증된 자로는 이회재(李晦齋)는 영의정 문원공(領議政文元公)에 증직되었고, 송규암(宋圭菴)은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주D-001]을사년의 위훈(僞勳) : 윤원형(尹元衡)의 공훈을 이름.
[주D-002]부장기(不杖朞) : 상례(喪禮)에 재최(齊衰) 기년복(朞年服)에도 지팡이를 짚느냐[用杖] 짚지 않느냐[不用杖]의 구별이 있음.
[주D-003]명종(明宗)께서 …… 있으니 : 명종이 인종(仁宗)과 비록 형제간이지만 국체(國體)를 계승한 중함이 있으니, 부장기는 옳지 못하므로, 즉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임.
[주D-004]정(鄭) 나라 …… 한 일 : 《좌전(左傳)》 양공(襄公) 31년 조에, 정 나라 사람들이 향교(鄕校)에 노닐면서 집정관의 잘못을 논하므로 연명(然明)이 자산(子産)에게 향교를 헐어버림이 어떠하냐고 하자, 자산은, 사람들이 조석으로 가 놀면서 집정의 잘잘못을 논한다면 그들이 잘한다는 것은 내가 행하고 싫어하는 것은 내가 고치면 되지 않겠느냐? 무엇 때문에 허느냐고 답하였음.
[주D-005]전모(典謨) : 《서경(書經)》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를 가리킨다.
[주D-006]기축년 옥사(獄事) : 선조 기축년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을 말함.
[주D-007]기각(?角)의 형세 : 군대가 양면으로 나뉘어 적에게 대항하는 것을 기각(?角)이라 이름. 《좌전》에 “비유하자면 범을 사로잡는데 진(晉) 나라 사람은 앞에서 뿔을 잡고 여러 융(戎)은 뒤에서 다리를 당긴다[譬如擒虎 晉人角之 諸戎?之].” 하였음.
[주D-008]맥수(麥秀)의 노래 : 조국의 멸망을 슬퍼하는 노래로 은(殷) 나라 기자(箕子)가 조국이 멸망한 뒤에 도읍지를 지나면서 감개무량하여 지은 노래임.
[주D-009]서리(黍離)의 시(詩) : 주(周) 나라가 동천(東遷)한 뒤에 그 대부(大夫)가 옛 도읍지를 지나면서 지은 시를 말한다.
[주D-010]남행(南行) : 문과(文科) 출신이 아닌, 유일(遺逸)이나 문음(門蔭)으로 등용된 자에게 쓰는 말.
[주D-011]동(東)ㆍ서(西)의 설 :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당파(黨派)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을 이름.
[주D-012]남(南)ㆍ북(北)의 설 : 이 역시 당파(黨派)로 남인ㆍ북인을 말함. 서인(西人) 정철(鄭澈)이 제기한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몰락하자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는데, 온건파인 남인은 우성전(禹性傳)과 유성룡(柳成龍)을 중심으로, 강경파인 북인은 이발(李潑)과 이산해(李山海)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주D-013]타백(拖白) : 과거보는 사람이 글을 지어 올리지 못하고 백지의 시권을 내는 것을 이름.
[주D-014]기묘사림(己卯士林) :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관계되어 화를 입은 사람들을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