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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日躔)이 황도(黃道)를 한 바퀴 돌면 봄·여름·가을·겨울을 거쳐 네 철이 차례로 가름하여 일세(一歲)를 이루는 것이다. 일세는 삼백육십오 일로 영수(零數)가 있으니 이는 한 가지의 일이다. 이는 세실(歲實)이라 한다.
달은 백도(白道)를 걸쳐 한 바퀴 돌면 초하루·조금·보름·그믐을 지나 해를 추급(追及)하여 일삭(一朔)을 이룬다. 십이의 합삭(合朔)은 모두 삼백오십사 일로 영수(零數)가 있으니 이것이 또 한 가지의 일이다.
옛날 성인은 백성들이 절기(節氣)가 궁(宮)을 지나도 쉽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인하여 우선 합삭의 일주(一周)를 따라 한 달로 삼고 합삭의 십이주로 일 년을 삼았으니, 진실로 생명(生明)과 생백(生魄)은 고개만 쳐들면 보기가 쉽기 때문에 그 수시(授時)의 편의함을 취한 것이요 합삭의 십이주를 곧 세실이라 한 것은 아니다.
세실은 스스로 세실이 되고 합삭은 스스로 합삭이 되어 하늘에 있어서는 각자 운행하여 본래 한 궤도[一軌]가 아닌데 지금 이미 합삭을 빌려서 세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실은 모두 삼백육십오 일로 영수가 있어 십이의 합삭과 비교하면 열 하루의 약(弱)이 더 많으니 기영(氣盈)이란 것은 이 열 하루의 약이요, 십이의 합삭은 모두 삼백오십사 일로 영수가 있으니 세실에 비교하여 열 하루의 약이 적다. 삭허(朔虛)라는 것은 이 열 하루의 약이다.
이 년이 되면 이십일 일이 많고 영수가 있는데 동지(冬至)는 장차 제 십이월인 때문에 삼 년이면 반드시 윤(閏)을 둔다. 대개 세실은 삼주(三周)가 차면 이미 삼십칠 합삭을 지나서 영수가 있는 때문에 하나의 합삭이 많아서 그것이 윤이 된 것이다.
채주(蔡注)에는 이미 "일행(日行)의 수와 월행(月行)의 수"라 이르고서 또 이르기를 "삼백 육십이란 한 해의 상수(常數)이다."라 하였으니, 일·월의 행도(行度)의 밖에 이는 또 무슨 수란 말인가. 전혀 두루뭉수리가 되어 분별이 없으니 강해(强解)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요, 또 "기영(氣盈)과 삭허(朔虛)를 합하여 윤(閏)이 생긴다. 해는 하늘과 더불어 모이기 때문에 오 일이 많고 달은 해와 더불어 모이기 때문에 오 일이 적다. 그러므로 한 해의 윤의 율(率)은 곧 십 일이다……" 하였으니 그 오 일이 많은 것은 계산에 들 수 있겠거니와 오 일이 적은 것은 또 어떻게 계산에 들어가서 십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 또한 두루뭉수리가 되어 분별할 수가 없으니 강해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이다.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별은 비로소 《주례(周禮)》 빙상씨(馮相氏)에 나타났으나 그 명목은 자상하지 않다. 《이아(爾雅)》 석천(釋天)에는 별이 십칠수만 있고 여(女)·위(危)·위(胃)·자(觜)·삼(參)·정(井)·귀(鬼)·성(星)·장(張)·익(翼)·진(軫)은 없으며 월령(月令 《예기》편명)에는 겨우 이십육성(星)뿐인데, 대개 건(建)·호(弧) 들어 있고 기(箕)·묘(昴)·귀(鬼)·장(張)은 없다.
《사기》역서(曆書)에 비로소 이십팔성의 호(號)가 자상히 갖추어졌는데 건(建)·벌(罰)·낭(狼)·호(弧)만 있고 두(斗)·자(觜)·정(井)·귀(鬼)는 없으며 또 필(畢)을 탁(濁)이라 이르고 묘를 유(留)라 이르고 유(柳)를 주(注)라 일러서 지금과는 같지 않으며, 지금 전하는 이십팔수의 명목은 비로소 《회남자(淮南子)》 시훈해(時訓解) 및 《한서》 역지(曆志)에 나타났다. 대략은 금성(金星)이 해와 사십 도의 거리에서 나타나므로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한 것이다. 옛날에는 추보(推步)가 없었고 지금은 윤(輪)의 교(交)를 측차(測次)하여 본천(本天)의 안에 들어가면 땅과 가까워 주현(晝見)의 경계를 얻는 것이며 다시 위도(緯度)로써 남북을 가감(加減)하여 주현의 시기를 정하는 것이다.
예(禮)는 태일(太一)에 근본한 것이다.
복희(伏羲)는 십언(十言)의 교(敎)를 지었는데 건(乾)·곤(坤)·진(震)·손(巽)·감(坎)·리(离)·간(艮)·태(兌)·소(消)·식(息)이다.
문자가 없는 것을 역(易)이라 이른다.
육 선공(陸宣公) 주의(奏議)의 균세(均稅)·휼백성(恤百姓) 육조(六條)에 이르기를 "대범 천지의 사이에 나서는 오재(五材)의 용(用)이 제일 급한 것이 되는데 오재란 것은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이다. 수·화는 작위(作爲)를 자뢰하지 않고 금·목은 스스로 산택(山澤)에 나며 오직 토만은 파식(播植)을 주로 하므로 힘이 아니면 이루지를 못한다."라 하였다.
북두의 칠성은 이른바 "선(璇)으로 한 기(璣)와 옥(玉)으로 한 형(衡)으로 칠정(七政)을 제(齊)한다."는 것이다. 표(杓)는 용각(龍角)을 연하고 형(衡)은 남두(南斗)의 은(殷)이요, 괴(魁)는 삼성(參星)의 머리를 베개한다. 황혼을 이용하여 중을 가리킨 것은 표(杓)이며, 두(斗)는 제거(帝車)가 되어 중앙에 운전하고 사방을 임제(臨制)하며 음양을 나누고 사시(四時)를 가리키고 오행(五行)을 고르게 하고 절도(節度)를 옮기고 모든 기(紀)를 정하는 것은 모두 두에 매였다. 두(斗)·괴(魁)는 대광(戴匡)의 육성(六星)인데 문창궁(文昌宮)이라 이르며 괴 아래 육성이 둘 둘로 배비(排比)된 것은 이름을 삼태(三能)라 한다.
《춘추》의 운두추(運斗樞)에 이르기를 "두(斗)의 제일은 천추(天樞)요, 제이는 선(璇)이요, 제삼은 기(璣)요, 제사는 권(權)이요, 제오는 형(衡)이요, 제육은 개양(開陽)이요, 제칠은 요광(搖光)이며, 제일에서 제사까지는 괴(魁)가 되고 제오에서 제칠까지는 표(標)가 되며 합하면 두가 된다."고 하였다.
낭성(狼星)의 근지에 큰 별이 있어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라고 하는데 그 노인성이 나타나면 정치가 편안하다고 했다. 노인성의 한 별은 호성(狐星)의 남쪽에 있는데 인주(人主)가 수명을 연장하는 조응(照應)이 된다. 그러므로 수창(壽昌)이라 하며 천하가 안녕하다. 항상 추분(秋分)의 새벽에는 경방(景方)에 나타나고 춘분의 저녁에는 정방(丁方)에 나타난다.
석씨찬(石氏贊)에 이르기를 "노인성이 밝으면 임금이 수하고 창성하다."라 하였다.
별이란 금(金)의 산기(散氣)로서 그 본(本)은 화(火)이며 한(漢 하한(河漢)을 말함)도 금의 산기로서 그 본은 수(水)이다. 한에 별이 많으면 물이 많고 별이 적으면 가물다.
《건착도(乾鑿度)》에 이르기를 "세(歲)는 삼백육십오 일인데 일(日)을 사분(四分)한 하나를 괘(卦)로써 용사(用事)한다. 한 괘는 효(爻)가 여섯이요, 효는 하루로 치면 무릇 육 일이다. 칠분(七分)은 윤(閏)으로 돌아간다. 초효(初爻)가 용사하는 일일(一日)은 천왕제후에 해당되고 이일은 대부(大夫)에 해당되고 삼일은 경(卿)이요, 사일은 삼공(三公)이요, 오일은 벽(辟)이요, 육일은 종묘(宗廟)이다. 효사(爻辭)가 좋으면 좋고 흉하면 흉하다." 하였고 정강성(鄭康成)의 주(注)에 이르기를 "벽(辟)은 천자이다. 천왕제후란 것은 제후를 말한 것이요 그 길흉을 받는 것은 오직 천자일 따름이다."라 하였다.
대부(大夫) 이하는 주(主)가 없다는 것은 정(鄭)의 의(義)라 하겠지만 그러나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에 "축(祝)이 작(酌)을 씻어 국그릇의 남쪽에 전(奠)하면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축은 왼편에 있다." 하였으며 정주(鄭注)에 "축이 왼편에 있는 것은 마땅히 주인을 위하여 신에게 말을 풀이하기 위함이다."라 하였은즉 역시 정(鄭)도 사(士)로서 주(主)가 있음을 삼은 것이다. 교특생(郊特牲)에 "직제(直祭)에는 주에 축(祝)한다."라 했고, 정주에는 "천숙(薦熟)의 때를 이름이니 특생(特牲) 소뢰궤식(少牢饋食)을 하는 것과 같다."라 했으며, 정의(正義)에는 "천숙하는 정제(正祭)의 때에 축관이 축사(祝詞)로써 주(主)에게 고(告)함을 말한 것이다."라 하였으니, 정(鄭)도 또한 대부·사의 예에 의거하여 풀이한 것이다.
《의례(儀禮)》에 말하기를 "달을 간격하여 담(禫)한다. 이달에 길제(吉祭)하되 오히려 배(配)를 아니한다."하였고, 특생(特牲)·궤식(饋食)의 명서(命筮)하는 사(詞)에도 조(祖)만 말하고 배(配)에 미치지 않았으니 정히 이와 더불어 합치된다. 그런데 제가(諸家)들은 이로 인해 담월(禫月)에 조고(祖考)를 합제(合祭)할 때에도 다만 조(祖)만 제하고 비(妣)로써 배하지는 않는다 하고 있으나 모(某)의 생각은, 《의례》의 말한 바 배(配)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개 담월에 조묘의 길제를 만나면 새로 죽은 이를 조에 배식(配食)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비가 조에 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특생은 바로 사(士)의 상제(常祭)이며 담월의 길제에만 그친 것이 아닌데 어찌 그 배를 말하지 아니했다 하여서 상제에도 역시 비(妣)를 배하지 않는다고 이른다면 되겠는가.
훈호처창(焄蒿悽愴)은 주·소(注疏)가 다 백물(百物)의 정(精)으로써 말했는데 후유(後儒)들이 마침내 조고(祖考)의 신령(神靈)으로써 해당하게 하였으니, 모르괘라 이것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백물의 정이란 그 정(精) 자는 신(神) 자와 더불어 크게 다르니 "신의 나타남이다[神之著]"라는 신으로써 혼합하여 보아 넘겨서는 불가하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훈호처창은 그 윗대문에 보이는 소명(昭明)과 또 크게 다르니 정과 신의 차(差)와 인(人)과 물(物)의 별(別)과 음과 양의 계(界)가 대단(大段)은 통할 수가 없다. 훈호처창의 정에 속하는 것과 신의 저(著)를 연대어 보면 어떠하겠는가. 대개는 소명(昭明)의 아래와 신의 저의 위에 문득 이 "훈호처창은 백물의 정이다."라는 한 구절을 꽂아 넣어 위로도 붙지 아니하고 아래로도 연하지 아니하고 중간에 고립하여 귀속된 바가 없으며 "물의 정을 인하여[因物之精]"라는 구절에 끌고 와서야 비로소 연합될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나타남"이라는 한 구절이 또 두 사이에 가로질러 있어 혹은 끊기고 혹은 연하며, 연했다 다시 끊기어 일기(一氣)로써 아래에 접속됨이 없으니 이는 절대 착안(着眼)해야 하며 놓아 넘길 곳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조고의 신으로써 훈호처창에 구한다면 한갖 의의(擬議)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백물의 정 한 구절의 백(百)이 또한 너무도 군더더기가 아니겠는가.
대개 중생(衆生)이란 두 글자는 인과 물을 아울러 끌어 백물의 정에 관철시킨 것 같은데 "이를 귀신이라 이른다[此之爲鬼]"라는 한 구절로써 보면 이미 분별지어 말하여 정연하게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더구나 명명귀신(明命鬼神)이라는 것은 곧 물의 정을 인한 것으로서 마치 인과 물을 아우른 것같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물도 또한 귀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모르괘라 어떻게 풀이해야 할 것인가. 이 한 절(節)이 가장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소가(疏家)는 위에 나타난 백물의 정에 있어서는 분별지어 말하고 아래에 있는 인물지정(因物之精)에는 인과 물을 혼병하여 분별한 바 없으니 예로부터 읽기 어려움이 이와 같은 것이다.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은 정주(鄭主)에 "명명덕은 그 지덕(至德)을 현명(顯明)한다." 일렀는데, 지금 급고각본(汲古閣本)에는 현(顯) 자가 재(在) 자로 와전되었다. 명명이란 것은 현명의 의이다. 《시》노송(魯頌)에 "공소(公所)에 있으면 명명하다."라 했으며, 그 전(箋)에 역시 《대학》을 끌어 증거로 삼았다. 공소(孔疏)에는 몸에 명덕이 있는 것으로써 말을 했으나 정의 의는 아니다.
《맹자》에 나타난 "인(仁)이란 것은 인(人)이다."와 《중용》에 나타난 "인(仁)은 인(人)이다."와는 어의(語義)가 동일하지 않다. 《맹자》의 "인이란 것은 인이다."는 곧 능히 인은(仁恩)을 행하는 자는 사람이라는 것이요, 《중용》의 인(人)이란 것은 정(鄭)은 읽기를 상인우(相人偶)의 인과 같이 했다. 상인우는 곧 사람이 서로 존문(存問)하는 의를 뜻한 것이다.
강백석(姜白石) 요장(堯章)은 이르기를 "세상에서 중니(仲尼)가 계찰(季札)의 묘(墓)에 표(表)하기를 이러이러 했다고 전한다."라 하였으니, 백석같이 금석에 정박(精博)한 사람으로서 고서를 끌어 인증하지 아니하고 단지 "세상에서 전한다." 일렀다면 고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가히 소급해 알 수 있다.
또 구양공(歐陽公)은 이르기를 "중니의 각국 순방을 상고해 봐도 오(吳)에 이르렀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또 글자가 특별히 크니 옛 글자가 아니다."라 했다. 더구나 구비(舊碑)를 살펴보니 글자 크기가 한자[一尺]가 넘을 뿐더러 묘에는 본시 제자(題字)가 없었는데 동한(東漢)에 와서야 비로소 있었고 춘추 이상(以上)에는 풍비(豐碑)나 환영(桓楹)에 명전(銘鐫)이 있단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는 뒷사람이 의탁한 것이 너무도 적확하다. 고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 나라 장종신(張從申)의 발(跋)에 이르기를 "현종(玄宗)이 일찍이 은중용(殷仲容)을 명하여 모탑(摹榻)했는데 대력(大曆) 연간에 윤주자사(潤州刺史) 소정(簫定)이 계자(季子)의 묘(廟)를 짓고 이 비에 중각(重刻)하여 지금까지 전해온다." 하였으니, 그 최고로 증거할 수 있는 것은 당 나라 사람의 문자가 된다.
일본(日本) 문자의 연기(緣起)는 백제(百濟)의 왕인(王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나라 글은 그 나라의 일컫는 바에 의하면 황비씨(黃備氏)가 제정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중국과 통하지 못하고 무릇 중국에 관계되는 서적은 모두 우리나라에 의뢰했다. 지금 족리대학(足利大學)에 보존된 고경(古經)은 바로 당 나라 이전의 구적(舊蹟)이다.
일찍이 《상서(尙書)》를 번조(翻雕)한 것을 얻어 보았는데 제·양(齊梁)의 금석(金石)과 더불어 글자의 체가 서로 동일하며 또 신라 진흥왕비의 글자와도 같으니 이는 필시 왕인 시대에 얻어갔던 것으로서 지금 천년이 지난 나머지에도 고스란히 수장되어 있다. 이는 진실로 천하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나 소길(蕭吉)의 《오행대의》같은 등의 서는 다 중국에도 하마 없어진 것인데 오히려 그쪽에는 보존되어 있으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조감(晁監) 주연(奝然)은 지금 상고할 수가 없고 서경(西京) 동도(東都)의 사이에 그들의 한다는 문은 감루(弇陋)하고 벽유(僻謬)할뿐더러 그 언어를 따라 곧장 나가며 문세(文勢)는 부앙(俯仰) 전절(轉折)과 상하(上下) 토납(吐納)의 의가 없다.
《무림전(武林傳)》같은 것은 구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백여 년 이래로 등수(藤樹)· 물부(物部)의 학이 크게 성함과 동시에 시·문(詩文)은 전혀 창명(滄溟)을 숭상하여 약간 속체(俗體)를 변해 갔다. 그러나 옛날의 물든 것이 하마 고질이 되어 졸지에 면모를 고치기는 어려웠다.
지금 동도(東都) 사람 조본렴(篠本廉)의 문자 세 편을 보니 감루하고 벽유한 버릇을 깨끗이 씻어 사채(詞采)가 환발(煥發)하며 또 창명의 문격(文格)을 쓰지 아니하여 중국의 작가로도 더할 수가 없었다.
아! 장기(長崎)의 선박이 날로 중국과 더불어 호흡이 서로 통하여 사동(絲銅)의 무역은 오히려 제이에 속하고 천하의 서적도 산과 바다로 실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옛날에는 우리에게 의뢰해야만 했는데 마침내는 우리보다 먼저 보는 것도 있으니 조본렴이 아무리 글을 잘 아니하고자 해도 아니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일만 보고서도 천하의 대세를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이 사동(絲銅)이나 서적 이외에 중국에서 얻어가는 것이 또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리오. 아!
고금의 시법(詩法)이 도정절(陶靖節)에 이르러 하나의 결혈(結穴)이 되고 당의 왕 우승(王右丞)·두 공부(杜工部)가 각기 하나의 결혈이 된다.
왕은 혼솔이 없는 천의(天衣)와도 같으며 또 천녀(天女)의 산화(散花)와도 같아 많건 적건 막론하고 세간의 범상한 꽃으로서는 비의(比擬)할 바가 아니며 두는 마치 토석(土石)과 와전(瓦塼)을 땅으로부터 쌓아 올려 오봉루(五鳳樓)의 재목이 그 경중을 재량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다. 그리하여 하나는 바로 신리(神理)요 하나는 바로 실경(實境)으로서 인자(仁者)가 보면 인(仁)이라 이르고 지자(知者)가 보면 지(知)라 이를 것이며 백성은 날로 써도 알지 못한다. 마치 하나의 문호를 각기 한 것 같지만 그러나 우·직(禹稷)과 안회(顔回)는 그 법이 한 가지다. 분별과 동이를 논할 것 없이 능히 이 한 관문을 뚫고 난 연후라야 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의산(李義山 이상은(李商隱))·두번천(杜樊川 두목(杜牧)) 같은 이는 다 공부(工部)의 적파(嫡派)이며 백향산(白香山 백거이(白居易))이 또 하나의 결혈이 되어 그 광대교화(廣大敎化)의 명목에 부끄럽지 않다.
송의 소·황(蘇黃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은 또 하나의 결혈이 되며 육무관(陸務觀 육 유(陸游))의 칠언근체(七言近體)는 고금을 통하여 능히 구율(彀率)을 다한 것이며 금(金)의 원유지(元裕之)와 원(元)의 우백생(虞伯生)이 또 하나의 결혈이 되는데 우(虞)로 말하면 성정(性情)과 학문이 합쳐져 일사(一事)로 되었다.
명 나라 삼백 년에 와서는 하나도 족히 칭할 것이 없다가 왕어양(王漁洋 왕사정(王士禎))에 이르러 역하(歷下)와 경릉(竟陵)의 퇴풍(頹風)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또 능히 하나의 결혈이 되었으니 부득불 추대하여 일대의 정종(正宗)으로 삼지 않을 수 없으며 주죽타(朱竹垞)는 어양(漁洋)과 더불어 태화산(太華山)의 쌍봉(雙峯)이 아울러 일어난 것과 같아 갑을(甲乙)할 수 있다. 이 밖에는 다 방문(旁門) 산성(散聖)일 뿐이다.
문체(文體)의 유(類)는 열세 가지인데 그 문이 되는 것은 여덟 가지로서 이른바 신·리(神理), 기·미(氣味), 격·율(格律), 성·색(聲色)이다. 신·리 기·미는 문의 정(精)이요, 격·율 성·색이란 것은 문의 추(粗)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 추를 놓아버리면 정이란 것이 어디에 부치리오.
배우는 자가 옛사람에 대하여 반드시 처음에는 그 추를 만나고 중간에는 그 정을 만나고 종경(終竟)에는 그 정한 것만 쓰며 그 추한 것은 버려야 하는 법이다. 지금 그 추를 만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정을 만나서, 그 정을 쓰며 그 추를 버리는 데 이를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매양 문(文)을 소도(小道)라 하여 경홀히 여기고 있는데 이는 문을 유희(遊戲)로 삼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며 문이 아니면 도가 부칠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 문과 도는 서로 필수적이며 갈라서 둘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역(易)》의 문언(文言)이 문의 조(祖)가 된 것이며 그 말단에 길(吉)한 사람의 말과 조(躁)한 사람의 말을 결부하여 거듭거듭 말하였으니 문의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어찌하여 붓을 잡으면 쉬지 않고 재제(裁制)하는 바도 없이 길을 달려 마구 나가 글자와 글구를 쌓고 쌓음으로써 문을 삼을 수 있겠는가. 이는 더욱이 크게 경계할 바이다. 어느 겨를에 그 정을 만나고 그 추를 만나는 것을 논할 수 있겠는가.
동인(東人)의 병체(騈體)는 임진년 이후부터 갑자기 변하여 송·원(宋元) 이후의 풍기가 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공령문(功令文)의 웅(雄)이 되었다. 이는 근자의 형세로 보아 면치 못할 바이지만 비록 문원(文苑)의 대수필(大手筆)도 대체로 이와 같다.
대저 우리나라의 임진년은 이 무슨 백육(百六)의 대운(大運)이기에 위로는 국가의 전장(典章)으로부터 아래로 여항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없어 지금까지 옛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문장·서화 같은 소도(小道)도 역시 따라서 천사(遷謝)되어 마침내 만회된 것이 없어서 명종·선조 이상의 왕성한 대아(大雅)의 풍(風) 같은 것은 얻어볼 수 없다.
고문(古文)의 체는 기정(奇正)·농담(濃擔)·상략(詳略)에 대하여 본래 일정한 법은 없으나 그 글을 만드는 지의(旨義)를 요약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도를 밝히는 일, 세상을 다스리는 일, 깊숙한 것을 드러내는 일, 속(俗)을 바르게 하는 일들이다. 이 네 가지를 지닌 뒤에 법률로써 묶는 것이다. 무릇 이렇게 한 연후라야 경·사(經史)를 우익(羽翼)하여 천하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친척 고구(故舊)에 관한 취산(聚散)과 존몰(存沒)의 느낌에 이르러는 한때에 기억된 바 있어 글로써 선양하여 그 성명(姓名)을 문집 속에 부현(附見)하게 하는 것도 있다.
이는 그 사람의 사적이 원래 고거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일체를 빼버리고 싣지 않은 것이며 본시 기록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글을 만드는 의법(義法)을 위해 생략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은 아니다.
혼·계(惲桂) 두 집(集)은 과연 바로 남천이우(南遷二友)라는 말에 비해 그다지 사양할 것이 없겠다.
혼집(惲集)은 십 년 전에 구득한 것인데 이제야 비로소 천풍(天風) 해도(海濤)의 속에서 쾌히 읽게 되니 역시 묵연(墨緣)이 속해 있는 것인가? 그 문은 근대 사람 중에 약간 백력(魄力)이 있어 비록 망계(望溪)의 파류(派流)는 아니지만 망계·해봉(海峯)·매애(梅厓)·석포(惜抱 요내(姚鼐)) 여러 사람들의 지키고 있는 정궤(正軌)를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망계로부터 석포에 이르기까지 각각 미사(微詞)가 있기는 하나 현저히 배척하기를 죽정(竹汀 전대흔(錢大昕))과 같이 아니하고 한결같이 정궤로 돌렸으니 역시 조금 공안(公眼)을 가졌으며 분박(噴薄) 규노(叫呶)의 버릇은 내보이지 않았다.
대개 그 인품이 항상(伉爽)하고 문 역시 그와 같아서 왕척보(王惕甫) 같이 초잡(稍雜)하고 원자재(袁子才)의 검색이 없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평심(平心)하여 논한다면 석포의 평아(平雅)와 한담(閒澹)은 끝내 미쳐가기 어려우니 다만 백력(魄力)만으로 뒤덮으려 해서는 안 되며, 석포의 성취한 것도 역시 철저한 곳이 있으니 그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 못한 것인데 또 하물며 망계를 올라섰다 할 수 있으랴. 진소현(秦小峴) 조미신(趙味辛) 제가도 역시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계집(桂集)은 너무도 영성(零星)하나 역시 한두 가지 볼 만한 것이 있으며 성운(聲韻)을 전치(專治)하였고 고문의 궤칙(軌則)에 이르러는 소장(所長)이 아니다. 그 인품이 매우 높아서 담계(覃溪)·운대(芸臺)가 자주 칭도(稱道)하였으니 영성한 문자 사이에 있지 않은 모양이다.
의상이 이르러 가지 않는 곳에 / 意想不到處
봉만이 갑자기 절로 열려라 / 峯巒忽自開
산 경지(境地) 곳을 따라 아름다우니 / 山境隨處佳
잘못 찾아와도 역시 기쁘네 그려 / 誤到亦可喜
만약 이 경지를 터득하고 나면 낱낱이 다 도(道)요 일일이 걸림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증남풍(曾南豐)의 시에
흐르는 물 차가워라 더구나 맑고 / 流水寒更澹
비인 창은 깊어도 저절로 밝네 / 虛窓深自明
외길이라 솔 밑으로 들어가 보니 / 一逕入松下
두 봉우리 말 앞에 비끼었구려 / 兩峯橫馬前
호상으로 경구와 마주 앉아라 / 壺觴對京口
말 웃음이 양주에 떨어지누나 / 笑語落揚州
라는 글귀는 다 아름다워 자못 도·사(陶謝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의 가법을 얻었다 하겠으며, 서중거(徐仲車)가 진형중(陳瑩中)에게 부친 시는 웅쾌하고 통절하여 소아(小雅)의 항백(巷伯 장명(章名)임) 과 더불어 기풍을 함께 하였으니 이는 정(正)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직(直)으로 기를 기른 공력이다. 어찌 괴방(怪放)하다 하랴. 그는 일찍이 학자에게 이르기를 "문자를 하려거든 섬려(纖麗)는 배우지 말고 모름지기 혼혼(渾渾)하여 고기(古氣)가 있어야 한다." 했는데, 이는 자기를 두고 말한 것이다. 맹동야(孟東野) 시에,
천지가 가슴속에 들어를 오니 / 天地入胸臆
갑자기 천둥치고 바람이 이네 / 吁嗟生風雷
문장은 그 미묘를 얻었다며는 / 文章得其微
물상은 나에게서 재량이 되네 / 物象由我裁
라 하였으니 시를 논하여 이 지경에 이르면 조화를 배태(胚胎)한 것이다. 또 이를테면,
남산이 천지를 채워 있으니 / 南山塞天地
해와 달이 돌 위에 돋아나누나 / 日月石上生
산중이라 사람이 절로 바르고 / 山中人自正
길은 험해도 마음 역시 평평하구나 / 路險心亦平
일본(一本)에는 이 아래에 "천태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니, 걸핏하면 적성(赤城)의 놀이 밟히네"라는 열 글자가 있음.
신령한 지경이라 물마다 곧아 / 靈境物皆直
만 그루 솔 하나도 비스듬 없네 / 萬松無一斜
이 등의 글귀는 자못 심경이 공활(空濶)하여 온갖 인연이 물러가버림을 깨닫겠으니 어찌 한검(寒儉)하다고 지목할 수 있으랴.
무릇 시도(詩道)는 광대하여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어 웅혼(雄渾)도 있고 섬농(纖濃)도 있고 고고도 있고 청기(淸奇)도 있으므로 각기 그 성령의 가까운 바를 따르며 일단(一段)에만 매이고 엉겨서는 아니 되는 것인데, 시를 논하는 자들이 그 사람의 성정은 논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습숙(習熟)한 것만으로써 단정하여 웅혼을 치켜들고 섬농을 그르다 한다면 어찌 만상(萬象)을 혼함(渾函)하고 촌심(寸心)이 천고(千古)라는 의가 될 수 있으랴.
이 때문에 두(杜)가 있고 왕·맹(王孟)이 있고 백(白)이 있고 한(韓)이 있고 의산(義山)이 있고 번천(樊川)이 있고 또 장길(長吉 이하(李賀))·노동(盧仝)이 있는 것이다. 지금 특별히 증남풍·서중거를 들고 끝맺음에 맹동야를 든 것은 따로 한 길을 찾자는 것이 아니니 정상(頂上)에 눈이 있는 자는 마땅히 거울과 거울이 서로 비치리라 믿는다. 오당(悟堂) 이아(李雅)가 시상(詩想)이 매우 묘하여 나에게 와서 시도(詩道)를 묻고 또 감산(甘山)의 시를 보여주기에 이를 써서 답한다.
오강의 물일랑 마시지 마소 / 莫飮吳江水
가슴속에 파도가 일까 두렵네 / 胸中恐有波濤起
상강의 고길랑 먹지를 마소 / 莫食湘江魚
분통터져 슬픈 울음 나오게 하네 / 令人寃憤成悲呼
상강 대는 화살을 만들 만하고 / 湘江之竹可爲箭
오강 물은 칼을 갈기 매우 좋거든 / 吳江之水好淬劍
화살로는 소인놈의 심장을 뚫고 / 箭射讒夫心
칼로는 소인놈의 얼굴을 베서 / 劍硏讒夫面
소인놈 심장은 깨졌다 해도 / 讒夫心雖破
가슴속의 쓸개는 오히려 크고 / 胸中膽猶大
소인놈 얼굴은 깨졌다 해도 / 讒夫面雖破
입 안의 혀 상기도 남아 있는 걸 / 口中舌猶在
살아서는 사람의 근심이 되고 / 生能爲人患
죽어서는 귀신 되어 해를 끼치네 / 死能爲鬼害
근심되고 해 끼치니 장차 어쩌리 / 患兮害兮將奈何
두 잔의 막걸리에 긴 노랫가락 / 兩巵薄酒一長歌
바람 향해 뿌리고 물에 흘리어 / 灑向風煙付水波
유자산(庾子山)의 시는 대장(對仗)이 가장 공(工)하다. 마침내 육조(六朝) 이후에 오고(五古)를 돌려 오율(五律)을 만드는 시작이라 하겠다. 그는 글귀를 만들되 능히 새롭고 고사를 사용함에 흔적이 없어 하수부(何水部)에 비하면 보다 나을 것도 같다. 무릉(武陵) 진윤천(陳允倩)이 이르기를 "두소릉(杜小陵)은 남(藍)에서 청(靑)이 나오지 못하고 곧장 걸으면 걷고 달려가면 달려가곤 하는 식이다."라 한 것은 또한 너무나 심한 말이다. 그 명구(名句)로는 보허사(步虛詞)에 이르기를,
한제는 복숭아씨를 바라고 / 漢帝看桃核
제후는 대추꽃을 묻네 / 齊侯問棗花
라 하였고, 산지(山池)에 이르기를,
연꽃바람 멱 감는 새를 놀래고 / 荷風驚浴鳥
교(橋) 그림자에 노는 고기 모여드네 / 橋影聚行魚
라와 우문 내사(宇文內史)에 화답하기를,
나무에는 앵두를 문 새가 잠자고 / 樹宿含櫻鳥
꽃에는 꿀을 캐는 벌이 앉았네 / 花留釀蜜蜂
라와, 군행(軍行)에 이르기를,
변새는 멀어 유엽이 번득이고 / 塞逈翻楡葉
관산은 차니 기러기 털이 떨어지누나 / 關寒落鴈毛
라와, 법연(法筵)에 이르기를,
부처의 영은 호인이 기록하고 / 佛影胡人記
경의 글은 한어로 번역되도다 / 經文漢語翻
라와, 설 문학(薛文學)에게 수답(酬答)하기를,
양장은 구절판을 연대어 잇고 / 羊腸連九阪
웅이는 쌍봉을 마주 대했네 / 熊耳對雙峯
라와, 사람에게 화답하기를,
이른 우뢰 칩호를 놀라게 하고 / 早雷驚蟄戶
날리는 눈 하원을 길게 하누나 / 流雪長河源
라와, 원정(園庭)에 이르기를,
초부 은사 언제나 길 함께 가고 / 樵隱恒同路
사람과 새 더러는 집 마주하네 / 人禽或對巢
라와, 맑은 새벽에 조수에 다다라 이르기를,
잔나비 파람하니 바람 급하고 / 猿嘯風還急
닭이 우니 조수가 밀어 닥치네 / 鷄鳴潮欲來
라와, 겨울사냥[冬狩]에 이르기를,
놀랜 꿩은 매를 쫓아 날아가고 / 驚雉逐鷹飛
뛰는 원숭이 화살을 보고 굴러가네 / 騰猿看箭轉
라와, 사람에게 화답하기를,
여치는 틀이 없이 베를 짜는데 / 絡緯無機織
나는 반디 불을 띠고도 추운가봐 / 流螢帶火寒
라와, 화병을 읊다[詠畫屛]에 이르기를,
돌 험하니 소나무는 가로 꽂히고 / 石險松橫植
바위 매달리니 시내 서서 흐르네 / 巖懸澗竪流고요를 사랑하여 고기 뛰놀고 / 愛靜魚爭樂
사람에게 의지하니 새 품에 드네 / 依人鳥入懷라와, 꿈에 당내에 들다[夢入堂內]에 이르기를,
햇빛 받자 비녀 색깔 어른거리고 / 日光釵焰動
창 그림자에 거울꽃이 흔들리누나 / 窓影鏡花搖라는 등의 글귀는 소릉의 이른바 청신(淸新)이란 것이 자못 이를 두고 이름이라 하겠다.
산중의 재상이라
선골을 지녔으니 / 山中宰相有仙骨
잿마루에 나는 하얀
구름을 사랑하네 / 獨愛嶺頭生白雲
이 그림을 벽에 걸면
놀래 넘어질테니 / 壁張此畫定驚倒
먼저 사람을 불러
부축하라 요청하게 / 先請喚人扶着君
라와,
난산이라 깊은 곳에
아지랑이 노을들이 / 亂山深處是煙霞
자욱한 비 갠 볕에
아침 저녁 아름답네 / 雨暗晴暉日夕佳
알괘라 선생님은
일찍이 여기 와서 / 要識先生曾到此
일부러 희필 남겨
그대 집에 걸렸구려 / 故留戲筆在君家
라는 등은 미원휘(米元暉 미우인(米友仁))의 제화시(題畫詩)인데 너무나 아름다워 한점도 연화(煙火)의 기는 없다.
문장의 논이 정해지기란 고금을 통하여 어려운 일이다. 원자재(袁子才)는 왕완정(王阮亭)의 시를 일컬어 "재주와 힘이 박하다." 하면서도 부득불 추앙하여 일대(一代)의 정종(正宗)으로 삼았으니 이는 끝내 그가 차지한 지위를 뒤덮어 아주 빼앗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가사 그가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재력(才力)과 정종이 함께 의논에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장심여(蔣心餘)는 또 당인(唐人)이 임서한 진첩(晉帖)으로써 비교했으니 역시 미사(微詞)라 하겠으나 오늘날에 만약 당모(唐摹)의 한 글자만 얻는다면 그 보배롭고 중함이 또한 진적(眞跡)에 내리지 않을 것이니 어찌 송·원 이후의 안각(贋刻)과 더불어 논할 수 있겠는가. 매양 굉장한 이름을 가지면 사람들이 다 증오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깊이 경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능히 그 실지에 부응되지도 못하면서 우뚝이 스스로 거만을 떠는 자에 이르러는 도적도 빼앗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원·장은 진실로 당시의 척안(隻眼)이나 오히려 도적을 자초함을 면치 못했거든 하물며 이보다 못한 자들이랴.
그러므로 소릉(少陵)의 시에 보이는 "문장은 천고의 일이라면 득실은 촌심이 아는 거로세[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의 한 마디 말은 전혀 혼전(渾全)하여 고금을 궤뚫은 것이다.
우연히 시를 논한 제십(諸什)을 뒤져보고 부질없이 이렇게 말을 마구 한다. 기우(屺友 강자기(姜慈屺))와 더불어 서로 보고 한번 웃으며 한 통(通)의 해설을 하게 했다.
강엄(江淹)의 의혜휴시(擬惠休詩)에 이르기를,
해 저무니 파란 구름 어울리는데 / 日暮碧雲合
아름다운 사람 자못 오지를 않네 / 佳人殊未來
라 했는데 지금 사람들이 마침내 휴상인(休上人)의 시로 쓰고 있으니 고사가 이처럼 그르친 것은 당(唐)의 시대부터 이미 그러했다.
석양남애(夕陽嵐靄)는 당자화(唐子華)의,
반조는 시내 동쪽을 지나는데 / 返照過溪東
중은 돌아가네 파란 안개 속으로 / 僧歸嵐翠裏
늦은 매미 소리를 실컷 들으니 / 厭聽晩蟬聲
대숲의 동산이 삼사리로세 / 竹園三四里
라를 모방하였고, 나소화(羅小華)의 사경(寫經)의 묵(墨)으로써 운서노인(雲西老人)을 임(臨)했는데,
열 길이라 우담의 저 숲 속에 / 十丈優曇林
현담하자 향기가 얼굴에 붙네 / 玄譚香着面
나무 밑에 경을 외던 그 사람은 / 樹底誦經人
달 비끼니 찾아도 보이지 않네 / 月斜尋不見
라 하였고, 노련(老蓮)은 전주(篆籒)의 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고졸(古拙)한 품이 위·진(魏晉) 시대의 수필(手筆)과 같아서 마치 고대의 신선 사람을 만난 것 같다. 그 제시에,
적막한 산마을 울타리 안에 / 寂寞山籬下
가을 뽕나무 높이 몇 자일는고 / 秋桑幾尺高
숨은 선비 장 중위를 찾고자 하니 / 欲尋張仲蔚
삼경이 봉호 속에 묻히었구려 / 三徑沒蓬蒿
미숙(美叔)의 제화시(題畫詩)는 연화(煙火)를 먹지 않은 것 같다.
옛사람들은 한 시를 함께 지을 경우라도 반드시 운을 같이 짓지는 않았으며 곧 운을 같이 하더라도 역시 한 운 중에서 가려서 쓰며 반드시 글귀마다 차운(次韻)하지는 않았는데 원·백(元白 원진(元稹) 백거이(白居易))으로부터 창시되어 피일휴(皮日休) 육구몽(陸龜蒙)이 창화(唱和)함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심해져서 운(韻)으로써 주장을 삼고 뜻으로써 서로 따르게 되니 속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얼른 통달하지 못했다.
근대에는 오로지 이로써 장점을 보이며 이름은 화운(和韻)이라고 하지만 실상인즉 운을 따르는 것이니 마땅히 그 혈맥이 가로 뻗히고 구연(句聯)의 뜻이 끊기게 된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속상(俗尙)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는 심귀우(沈歸愚)의 말이다.
심 진사(沈進士) 두영(斗永)이 기기(奇氣)가 천 길이어서 가어(駕馭)를 할 수 없으며 시(詩) 역시 그 인물과 같아서 평소에 자질구레한 말은 쓰지 않았다. 일찍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우모(羽旄)를 바라보며 지은 시구가 있는데,
산은 만마를 따라
맴돌며 내려오고 / 山隨萬馬逶迤下
구름은 떼 용을 끼고
나풀대며 다니누나 / 雲擁群龍
綷行
라 한 것은 심히 기굴(奇崛)하며 금강산에 들어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이생이 마휘령에
먼저 올라 하는 말이 / 李生先上摩暉語
팔월이라 높은 산에
하얀 눈이 쌓였다고 / 八月高山白雪長
옛날에 들은 것은
모두가 황홀할 뿐 / 昔者所聞都怳惚
갑자기 대하자니
지극히 황당하네 / 猝然相對極荒唐
멀리 보니 가을 일러
붉은 잎은 전혀 없고 / 遠看秋早無紅葉
가직이 오니 해 높아도
석양이 많다마다 / 近到日高多夕陽
쉬흔이라 네 해 동안
능사를 다 마치고 / 五十四年能事了
오늘에야 이 몸은
금강에 들었구려 마휘령(摩暉嶺) / 此身今日入金剛
또 그 아름다운 글귀로 이를테면,
각각으로 날아오르니
모두들 노한 듯도 / 落落飛騰如共怒
무리지어 끼고 읍하니
서로가 예쁜가봐 / 群群拱揖似相憐
만 이천봉 꼭대기에
마음 한번 풀어놓으니 / 放心萬二千峯上
오십 년이 지났어라
하계의 전생일레 헐성루(歇惺樓) / 下界前生五十年
또 이르기를,
바람 우레 아래서 이니
말 웃음이 평화롭고 / 風雷下作平談笑
하늘과 땅 중간이 비니
앉고 서기 자유롭네 / 天地中虛任起居
만리라 아득아득
동해의 갓이라면 / 萬里蒼蒼東海上
외로운 봉 우뚝이 선
석양의 처음일레 비로봉(毗盧峯) / 孤峯落落夕陽初
또는,
하늘에서 떨어져 서니
위태롭다 안정되고 / 從天落立危初定
바다 건너 날아오니
기세는 쉬지 않네 백운대(白雲臺) / 超海飛來勢未休
라는 등은 다 창해(滄海)를 거꾸로 뒤집고 은하를 구부려 쏟으려는 뜻이 들어 있다 하겠다.
서법이 변천함에 따라 유파(流波) 또한 혼란되었으니 그 근원을 거슬리지 않으면 어떻게 옛으로 돌려 놓을 수 있겠는가. 대개는 예(隸)의 글자가 변하여 정서(正書)가 되고 행초(行草)가 되었는데 그 전이(轉移)는 한말(漢末) 위·진(魏晉)의 사이에 있었으며 정서 행초가 남·북의 양파로 나누어진 것에 대해서는 동진(東晉)·송(宋)·제(齊)·양(梁)·진(陳)이 남파가 되고 조(趙)·연(燕)·위(魏)·제(齊)·주(周)·수(隋)는 북파가 된다.
남파는 종유(鍾繇)·위관(衛瓘)을 경유하여 왕희지·헌지·승건(僧虔)에 미쳐 지영(智永)·우세남(虞世南)에 이르렀으며, 북파는 종유·위관·색정(索靖)을 경유하여 최열(崔悅)·노침(盧湛)·고준(高遵)·심복(沈馥)·요원표(姚元標)·조문심(趙文深)·정도호(丁道護) 등에 미쳐 구양순(歐陽詢) 저수량(褚遂良)에 이르렀다.
남파는 수(隋)의 시대에는 드러나지 못하고 당 나라 정관(貞觀)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드러났다. 그러나 구·저 여러 인물들이 근본은 북파에서 나왔으며 영휘(永徽) 이후로 곧장 개성(開成)에 이르러는 비판(碑版)이나 석경(石經)이 오히려 북파의 여풍이 흘렀다. 남파는 바로 강좌(江左)의 풍류로서 소방(疏放)하고 연묘(姸妙)하여 계독(啓牘)에 장점을 가졌으나 필획을 감하여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전예(篆隸)의 유법(遺法)도 동진(東晉) 시대에 이미 고치고 변한 것이 많았으니 송·제는 논할 것도 없다.
북파는 바로 중원의 옛법으로서 구근(拘謹)하고 졸루(拙陋)하여 비(碑)와 방서(牓書)에 장점을 가졌으며 채옹(蔡邕)·위탄(韋誕)·한단순(邯鄲淳)·위개(衛覬)·장지(張芝)·두도(杜度)의 전·예(篆隸)·팔분(八分)·초서에 대한 유법(遺法)은 수의 말기 당의 초엽에 이르러도 오히려 보존된 것이 있다.
두 파는 갈라짐이 강하(江河)와 같아서 남북의 세족(世族)이 서로 통하여 익히지 않았다.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것은 공통된 논이 아니다. 구양은청(歐陽銀靑)의 구성(九成) 화도(化度) 같은 것은 정호(精毫)가 아니면 불가능하며 추호(麤毫)를 가지고도 정필(精筆)처럼 쓸 따름이다. 삼묘(三泖)에서 윤생(尹生) 시영(始榮)에게 보이다.
"초미(貂尾)는 진재(珍材)로 붓을 만들어 쓸 수 있다.[貂尾珍材眞可筆]"는 것은 바로 황산곡(黃山谷)의 글귀이다. 박혜백(朴蕙百)이 자못 제필(製筆)에 공하여 청서(靑鼠)를 낭호(狼毫)의 상으로 삼으면서 스스로 그 묘리를 얻었다고 여기는 동시에 사람이 혹 그렇지 않다 해도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급기야 초미를 보고서 크게 칭찬을 하며 품(品)이 낭호나 청서의 위라고 하는데 그 말이 진실로 빗나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밖에 또 초미나 낭호보다 더한 것이 있어 등수(等數)로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겠지만 호영(湖穎)의 여러 품종을 두루 보이어 그로 하여금 그 안목을 넓히게 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옛 선백(禪伯)이 이른바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으니 다시 이를 보라."는 말도 있거니와 동쪽 사람들이 원교(圓嶠)의 필에 묶여 있어 다시 왕허주(王虛舟)·진향천(陳香泉) 여러 거벽(巨擘)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필을 일컫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한번 웃음이 터진다. 천하의 일이란 견정(堅定)하고 주수(株守)하곤 할 수 없는 것이 마침내 이와 같음을 말해 둘 뿐이다.
황모필(黃毛筆)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숭상하는 바이나 살짝 거칠고 미끄러운 흠이 있다. 중국에서 뽑아낸 황영(黃穎) 같은 것은 또 동쪽에서 나와서 통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와 같은 진재(珍材)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지도 않으며 역상(譯商)들이 다니면서 파는 것은 또 하나의 하품·열품(劣品)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깨닫지 못한다. 초미는 이것이 중국의 자영(紫穎)과 같은데 중국 사람들은 또 황모(黃毛)를 초호(貂毫)라고 한다. 지금 통행하는 초호 소필은 다 초호라는 두 글자를 새겼는데 역시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감히 초·황의 사이에 이름을 정하지 못하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컫는 청서(靑鼠)도 역시 중국 붓에서는 보지 못했으며 자영(紫穎)이 청서와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한데 자영은 본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컫는 초미요 청서는 아니다.
양호(羊毫)는 효자(孝子)나 순손(順孫)이 부조(父祖)의 뜻을 먼저 알아 받들어 순히 하는 것과 같으며 자영과 같은 일종(一種)은 너무 강하여 완력(腕力)이 약한 자는 거의 쓸 수가 없다.
일찍이 희헌유풍(羲獻流風)이라 새겨진 일종의 필을 보았는데 대나무 같이 강하고 딱딱했다. 유성현(柳誠懸)도 능히 희·헌의 유법(遺法)으로 된 붓을 쓰지 못한 것은 그것이 너무 강한 때문이었다. 지금 이 종의 붓은 과연 우군이 옛날 만들어 쓰던 그 유제(遺制)로 된 것인지는 모르나 희헌유풍의 위에는 다시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 필이 제일 상품이 되어 양호의 위에 있으니 이 묘법을 터득한 연후라야 필을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컫는 황모나 청서에 이르러는 어찌 대해(大海)의 구경에 참여할 수 있으랴. 곧 오봉루(五鳳樓)에의 옹유(甕牖)와 승추(繩樞)일 뿐이다.
결구(結搆)의 원만(圓滿)한 것은 전법(篆法)과 같고, 표양(飄颺)하고 쇄락(灑落)한 것은 장초(章艸)와 같고, 흉하고 험하여 두려워할 만한 것은 팔분(八分)과 같고, 요조(窈窕)하게 출입하는 것은 비백(飛白)과 같고, 경계(耿介)하여 우뚝이 선 것은 학의 머리와 같고, 울장(鬱杖)하고 종횡(縱橫)한 것은 고예(古隸)와 같으며, 점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붓을 거두는 데 있어 긴하고 중함을 귀히 여기며, 획을 만들 때는 반드시 늑(勒)으로 하는데 껄끄러우면서 더디고, 측(側)은 그 붓을 평평하게 해서는 안 되며, 늑은 그 붓을 뉘어서는 안 되며 모름지기 필봉이 먼저 가야 한다.
노(努)는 곧은 것만이 좋지 않으니 곧으면 힘을 상실하며, 적(趯)은 그 필봉을 보존하여 세(勢)를 얻어서 출봉(出鋒)해야 하며 봉을 끌고 내려가 세를 잡아 가슴을 내밀고 서며, 책(策)은 앙필(仰筆)로 나가 거두어야 하며, 약(掠)은 필봉이 왼편으로 나가되 예리해야 하며, 탁(啄)은 붓을 눕혀 빨리 나가 덮어야 하며, 책(磔)은 전필(戰筆)로서 출발하여 뜻을 얻어 서서히 출봉해야 한다.
무릇 점은 준각(峻角)을 요하여 원평(圓平)을 꺼리고 통변(通變)을 귀히 여기며, 합책(合策)하는 곳의 책은 년(年)의 글자가 그것이며, 합늑(合勒)하는 곳의 늑은 사(士)의 글자가 그것이다. 무릇 횡획(橫畫)이 모두 위는 앙획 아래는 부획(覆畫)으로 하는데 사(士)의 글자를 말한 것이며, 세 횡획이 어울리면 위는 평획(平畫) 중은 앙획(仰畫) 위는 부획(覆畫)으로 되는데 춘(春)·주(主)의 글자가 그것이다. 무릇 세 횡획에는 다 사용한다. 일설은 상은 앙획 중은 평획 하는 부획이라고 함. 측(側)은 그 붓을 측하여 내려가고 먹은 정(精)해야 하며, 늑은 그 붓을 뉘여서는 안되며 중은 높고 두 머리는 낮은데 필심(筆心)으로써 누른다.
단획(短畫)의 조(祖)로서 제일은 책의 법인데 앙필 역봉(䟐鋒)으로 가벼이 들고 나아가서 마치 편책(鞭策)의 세(勢)와 같이 한다. 두 머리는 높고 중은 낮다. 유종원(柳宗元)은 이르기를 "책은 앙필로 거두어 살짝 쳐든다." 했다. 기(其)·천(天)·부(夫)·재(才)와 같은 유로써 무릇 단획은 다 책이 된다.
종파(從波)의 ⓐ은 오정(五停)인데 수(首) 일(一), 중(中) 삼(三), 미(尾) 일이요 횡파(橫波)의
ⓐ은 오정인데 수 일, 중 이, 미 이이다. 대체로 앙획을 만들 때에는 준(蹲)을 아니하고 봉으로써 겉으로 싸며, 준(蹲)은 삼면(三面)에 힘이 충만히 가서 순지(順指)로 비스듬히 내려가 힘이 가득차면 살짝 머물러 쳐들면서 삼과(三過)하여 출봉한다. 필획 중에는 또 삼과가 있어 수파(水波)가 기복(起伏)하는 것과 같다. 전(戰)은 전(顫)의 뜻인데 전동(顫動)하며 서서히 나간다는 뜻을 취한 것이며, 준(蹲)은 거(踞)의 뜻인데 돈주(頓駐)의 비유이며, 역(䟐)은 음이 역(歷)인데 가는 것이요, 석(趞)은 음이 석(昔)인데 측행(側行)하는 것이며, 억(抑)은 석행(趞行)하여 더디고 꺼끄럽게 나간다는 뜻이다. 서법에 또 수(
무릇 서를 공부하는 문(門)은 열 두 종의 은필(隱筆)의 법이 있으니 바로 지필(遲筆)· 질필(疾筆)·역필(逆筆)·순필(順筆)·도필(倒筆)·삽필(澀筆)·전필(轉筆)·와필(渦筆)·제필(提筆)·탁필(啄筆)·엄필(罨筆)·역필(䟐筆)이다.
무릇 용필(用筆)에 있어 생사(生死)의 법은 유은(幽隱)에 있고 지필의 법은 질((疾)에 있고 질필의 법은 지(遲)에 있다. 역입(逆入) 도출(倒出)하여 세를 취해 가감(加減)하고 때를 살펴 조정(調停)한다. 그 묘리를 믿기까지는 모름지기 공력(功力)이 깊어야 하며 쉽게 얻으려 들면 얻기 어려운 것이다.
붓의 가벼운 것은 양(陽)이 되고 무거운 것은 음(陰)이 된다. 무릇 글자 중에 두 개의 직획(直畫)이 있는 것은 왼편 획은 가늘고 바른편의 획은 굵어야 하며 글자 속의 주(柱)는 굵어야 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늘어야 한다. 이는 음양을 나눈 법이다.
정봉(正鋒) 편봉(偏鋒)의 설이 고본(古本)에는 없었는데 근래 사람들이 오로지 축경조(祝京兆 축윤명(祝允明))를 배우고자 하여 짐짓 이를 빌려 말한 것이다. 정(正)으로써 골(骨)을 세우고 편(偏)으로써 태(態)를 취하는 것은 자연 말자고 해도 말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서가 비록 장봉(藏鋒)을 귀히 여기지만 모호(糢糊)한 것으로써 장봉이라 할 수는 없으며 모름지기 붓을 쓰기를 태아검(太阿劍)이 자르고 베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대개 경리(勁利)로써 세를 취하고 허화(虛和)로써 운(韻)을 취하여 인(印)으로 인주를 찍는 것 같이 하며 송곳으로 모래를 긋는 것 같이 해야만 되는 것이다.
조문민(趙文敏 조맹부(趙孟頫)) 이 용필(用筆)을 잘 하는데 쓰는 붓이 완전(宛轉)하여 뜻과 같이 나가는 것이 있을 때는 그 붓을 선뜻 짜개어 그 정호(精毫)만을 가려서 따로 모은다. 그리하여 붓 세 자루의 정호((精毫)만을 합쳐 필공에게 주어 한 자루로 매게 하면 진서(眞書)·초서(草書)의 거세(巨細)를 막론하고 던지면 아니되는 것이 없으며 여러 해가 가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서가(書家)가 이르기를 "진서(眞書)를 쓰면서 능히 전주(篆籒)의 법을 붙여 나가면 고금에 높다."라 했다.
서법은 시품(詩品)·화수(畫髓)와 더불어 묘경(妙境)은 동일하다. 이를테면 서경(西京)의 고예(古隸)가 못[釘]을 베고 철(鐵)을 자른 것 같으며 흉하고 험하여 두렵게 뵈는 것은 곧 건(健)을 쌓아 웅(雄)이 되는 의(義)이며, 청춘(靑春)의 앵무(鸚鵡)는 꽃을 꽂은 무녀(舞女)가 거울을 당겨 봄에 웃는 의이며, 유천희해(遊天戲海)는 곧 앞으로 삼신(三辰)을 부르고 뒤로 봉황을 끄는 의로 시와 더불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상(象)의 밖에 초월하여 그 환중(環中)을 얻는다는 한마디 말에 벗어나지 않는다. 능히 이십사품(二十四品)의 묘오(妙悟)가 있다면 서경(書境)이 곧 시경(詩境)인 것이다. 이를테면 뿔을 떼어 놓은 영양(羚羊)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는 저절로 신해(神解)가 들어 있으니 신(神)으로써 밝혀 나가는 것은 또 종적으로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은 은술(隱術)로 십수 가지 법이 있으니 지(遲)·질(疾)·순(順)·역(逆)·도(倒)·삽(澀)·전(轉)·와(渦)·엄(罨)·탁(啄)·제(提)·역(䟐) 등의 법을 들고 있으니 발등(撥鐙)의 예행(例行)하는 통법(通法)으로써 제한하는 것은 불가하다. 이는 나이 젊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엽등(躐等)하여 나갈 수는 없는 것이며, 삼십 년의 노련한 공력이 있지 아니하면 절대로 망행(妄行)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한예(漢隸)의 한 글자가 해행(楷行)의 열 글자를 당할 만한데 요즘 사람들이 익히는 것은 다 동경(東京) 말에 만들어진 것이며 서경(西京)에 이르러서는 손을 댈 수가 없으니 능히 진예(晉隸)를 만들 수 있는 것만도 역시 다행이다.
예리하고 가지런하고 건강하고 둥근 것은 필의 네 가지 덕이다.
난곡(蘭谷)의 서법은 너무도 해숭위(海嵩尉)의 필의(筆意)를 지녔으니 어찌 그 연원이었던가? 창울(蒼鬱)하고 돈좌(頓挫)하여 속본(俗本)과는 매우 틀린다. 필은 봉(鋒)이 가지런하고 허리가 강한 것을 요하며 벼루는 윤택함과 껄끄러움이 서로 겸하여 거품이 뜨고 먹이 빛나는 것을 취한다.
백양산인(白陽山人)의 서법은 손건례(孫虔禮)·양소사(楊少師)의 규도(規度)가 있으니 바로 초법(草法)의 정종(正宗)이다. 초법이 손·양을 말미암지 않으면 다 진택부(鎭宅符 집 지키는 부적)를 만들 뿐인데 동인(東人)은 더욱 심하여 악찰(惡札)이 아닌 것이 없다.
소재(蘇齋 옹방강의 호)는 원조(元朝)에 참깨 하나에다 천하태평(天下太平)의 네 글자를 썼는데 이때 소제의 나이 칠십팔 세였다. 글자가 승두(蠅頭)와 같은데도 역시 안경도 쓰지 않았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또 원조로부터 금경(金經)을 쓰기 시작하여 종이 한 장을 일과로 삼아 그믐날에 끝마쳐 법원사(法源寺)에 시주했다. 그리고 또 내가 공양하는 대사(大士)의 소정(小幀)에 제자(題字)한 글씨는 몹시 가는데 다 동시의 일이다.
육조(六朝)의 비로서 무평(武平)의 제석(諸石)과 조준(刁遵)·진사왕비(陳思王碑) 같은 것은 다 극적(劇迹)이며 정도소(鄭道昭)의 비는 곧장 초산명(焦山銘)과 더불어 갑을을 다툴 만하다. 이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비궤(棐几 우군(右軍)을 이름)의 풍류(風流)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랴.
옛사람이 글씨를 쓴 것은 바로 우연히 쓰고 싶어서 쓴 것이다. 글씨 쓸 만한 때는 이를테면 왕자유(王子猷)의 산음설도(山陰雪棹)가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는 그 기분인 것이다. 때문에 행지(行止)가 뜻에 따라 조금도 걸릴 것이 없으며 서취(書趣)도 역시 천마(天馬)가 공중에 행하는 것 같다.
지금 글씨를 청하는 자들은 산음에 눈이 오고 안 오고를 헤아리지 않고 또 왕자유를 강요하여 곧장 대안도(戴安道)의 집으로 향해 가는 식이니 어찌 크게 답답하지 않겠는가. 지금 서극(西極)의 용매(龍媒)로 하여금 어노(圉奴)의 기적(羈靮)을 받아 준판(峻阪)에 올라가게 한다면 어떻게 섭운(籋雲)의 걸음을 펼 수 있겠는가. 필을 놓고 한번 웃는다.
홍보명(洪寶銘)은 역시 아름답다. 비록 시평(始平) 무평(武平)에 미치지는 못하나 오히려 북조(北朝)의 고격(古格)을 증명할 수 있다.
용용용필(用筆)의 법은 다섯 손가락을 사면에 성글게 벌리며 붓대를 식지 가운데 마디의 끝에 세워 잡아당겨 안으로 향하고, 엄지손가락의 나문(螺紋) 있는 곳으로써 눌러 밖으로 향하며 가운데손가락으로 그 양(陽)을 걸고 무평지와 새끼손가락으로 그 음(陰)을 받치면 손가락은 실하고 손바닥은 비어 운전하기가 편하고 빠르며, 운전하는 법에 있어서는 식지의 뼈는 반드시 가로 대어 필세(筆勢)로 하여금 왼편으로 향하게 하고 엄지손가락의 뼈는 반드시 밖으로 튀어나 필세로 하여금 바른편으로 향하게 해야만 만호(萬毫)가 힘을 가지런히 하고 필봉이 마침내 중으로 가게 된다. 만약 단단히 잡기만 하고 돌리지 않으면 힘은 붓대에만 있고 호(毫)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구양영숙(歐陽永叔)의 이른바 "손가락으로 하여금 운용하여 완(腕)은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며, 동파(東坡)의 이른바 "비고 너그럽게 한다."는 것이다. 가로 다붙이는 기(機)는 무명지의 손톱과 육(肉)의 사이에 있으며 밖으로 튀어나는 묘는 가운데손가락의 강하고 부드러운 그 사이에 있는 것이며, 또 "무명지의 손톱과 육의 사이로써 붓대를 떠받아 위로 향하게 한다."는 말도 있다.
측(側)을 점(點)이라 하지 않고 굳이 측이라 한 것은 측으로 비스듬히 쏟아 점을 만드는 형세가 있음으로 해서이다. 면(宀)의 윗점 같은 것에 이르러는 역시 측이라 불러서는 불가하니 파(波)를 날(捺)이라 하고 별(撇)을 불(拂)이라 하는 호칭(互稱)과는 같지 않다.
"호를 편다[伸毫]"는 것은 바로 고금 서가의 들어보지 못하던 말이다. 필봉은 항상 필획의 안에 있어야 하며 한 획의 속에서도 기복이 봉초(鋒抄)에서 변하며 한 점의 속에서도 육좌(衄挫)가 호망(毫芒)으로 달라진다 하였는데 이는 본시 종유· 색정 이래의 진결(眞訣)로서 고금을 통하여 바꾸지 못하는 것이며 인(印)과 인처럼 서로 전하는 것이다. 근일에 동인의 이른바 호를 펴는 한 법은 곧 바람벽을 향하여 허위조작한 것으로 전혀 낙착(落着)이 없다. 만약 별(撇)의 말필(末筆)을 만난다면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후학들이 다 이의 그르침을 입어 점점 귀굴(鬼窟)로 들어간 것이다.
법은 사람마다 전수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회(興會)는 사람마다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다. 정신이 없는 것은 서법이 아무리 볼 만하다 해도 능히 오래두고 완색하지 못하며 흥회가 없는 것은 자체(字體)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기껏해야 자장(字匠)이란 말 밖에 못 듣는다. 가슴속에 잠재한 기세(氣勢)가 글자 속과 줄 사이에 유로(流露)되어 혹은 웅장하고 혹은 우여(紆餘)하여 막자도 막아낼 수 없는 것인데 만약 겨우 점·획의 면에서 기세를 논한다면 오히려 한 층이 가로막힌 것이다.
박군 혜백(蕙百)이 글씨를 나에게 물으며 서의 원류(源流)를 터득하는 방법을 청하므로 나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었다. 이십사 세 적에 중국 연경(燕京)에 들어가 여러 명석(名碩)들을 만나보고 그 서론(緖論)을 들어본 바 발등법(撥鐙法)이 머리를 세우는 제일의 의가 되며 지법(指法)·필법(筆法)·묵법(墨法)으로부터 분항(分行)·포백(布白)·과파(戈波)·점획(點畫)의 법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익히는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한·위(漢魏) 이하 금석(金石)의 문자가 수천 종이 되어 종·색(鍾索) 이상을 소급하고자 하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많이 보아야만 비로소 그 조계(祖系)의 원류의 소자출(所自出)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악의론(樂毅論)은 당의 시대부터 이미 진본은 없어졌고 황정경은 육조 시대 사람이 쓴 것이며 유교경(遺敎經)은 당 나라 경생(經生)의 글씨이며, 동방삭찬(東方朔贊)·조아비(曹娥碑) 등의 글씨도 전혀 내력이 없으며, 각첩(閣帖)은 왕저(王著)가 번모(飜摹)한 것으로써 더욱 오류(誤謬)가 되어 이미 당시에 미원장(米元章)·황백사(黃伯思)·동광천(董廣川 동기창(董其昌) 같은 이가 일일이 박정(駁正)한 바 있으니 중국의 유식자들은 악의·황정 등의 서로부터 각첩(閣帖)에 이르러는 다 말하기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대개 악의·황정 등의 서는 만약 근거될 만한 진본이었다면 당의 구·저·우(虞 우세남(虞世南))·설(薛 설직(薛稷),·안(顔 안진경(顔眞卿))·유(柳 유공권(柳公權))·손(孫 손건례(孫虔禮))·양(楊 양응식(楊凝式))·서(徐 서계해(徐季海))·이(李 이옹(李邕)) 여러 사람들의 쓴 글씨가 하나도 황정· 악의와 같은 것이 없으니 그 황정· 악의로부터 입문하지 않은 것을 입증할 만하며 다만 여러 북비와는 인과 인이 서로 합할 뿐만 아니라 방경(方勁)하고 고졸(古拙)하여 모릉(模綾)이 원숙한 것은 없다.
근일에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서가의 이른바 진체(晉體)니 촉체(蜀體)니 하는 것은 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며 곧 중국에서 이미 울 밖에 버려진 것들을 가져다가 신물(神物)과 같이 보고 규얼(圭臬)과 같이 받들며 썩은 쥐를 가지고서 봉새를 쪼으려 든다[腐鼠嚇鳳]는 격이니 어찌 가소롭지 아니한가.
혜백은 말하기를 "이 추사의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전일에 정(鄭)·이(李) 여러 사람에게 익히 들었던 것은 모두 남원(南轅)에 북철(北轍)인 격이 아니겠소?" 하므로 나는 또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정·이 여러 사람들의 허물이 아니다. 정·이 여러 사람들은 다 천분(天分)은 지녔지만 궁려(窮廬)에 묻혀 있어 옛사람의 선본(善本)을 보지 못했으며 또 유도(有道)의 대방가(大方家)들에게 취정(取正)하지 못하고 모두 옹유 승추(甕牖繩樞)로서 많이 보고 많이 들은 것은 없으나 그 학을 하는 고심(苦心)에 있어서는 무시하지 못할 점이 있다. 그래서 어렴풋이 그림자만 찾고 황홀하게 소리만 어루만져서 내심으로 생각하기를 "천상(天上) 옥경(玉京)의 경루(瓊樓) 금궐(金闕)도 반드시 응당 이렇고 이러리라." 하며 능히 눈으로 보고 발로 가지는 못했으니 어떻게 경루·금궐의 실상을 증명할 수 있으랴.
옛날 동파(東坡)가 나한복호(羅漢伏虎)를 찬한 글귀에,
일념의 차로써 / 一念之差
이 비이에 떨어졌네 / 墮此髬髵
도사가 비민히 여겨 / 導師悲憫
너를 위해 빈탄하도다 / 爲汝嚬歎
너 같은 맹렬로서 / 以爾猛烈
본성 찾기 어렵잖네 / 復性不難
라 하였으니, 제군들도 다 일념의 차로써 타락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맹렬한 것도 역시 본성을 되찾기가 어렵지 않은데 특히 도사의 비민을 만나지 못한 탓이다 하고서 서로 크게 웃었다. 그 실상을 헤아려 보면 실로 정·이의 허물이 아니니 이는 책비(責備)만 해서는 옳지 않은 것이다.
원교(圓嶠)의 필결에 이르러는 가장 가르침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터럭을 편다는 법이라 하겠는데 이것이 더욱더 틀려나가서 그른 것이 쌓여 옳은 것을 이길 작정으로 구·저 여러 사람들을 다 무시하고 위로 종·왕(鍾王)에 접속하려 드니 이는 문 앞길도 거치지 아니하고 곧장 방 아랫목을 밟겠다는 격이라, 그것이 되겠는가.
조자고(趙子固)는 말하기를 "진(晉)을 배우려면서 당 나라 사람을 거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요량없는 것을 내보일 뿐이다. 해서(楷書)에 들어가는 길이 셋이 있으니 화도(化度)·구성(九成)·묘당(廟堂)의 세 비(碑)일 따름이다."라 했으니, 자고(子固)의 때에 어찌 악의·황정이 없어서 이 세 비를 들어 말했겠는가. 때문에 악의·황정은 유식자로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황정은 오히려 육조 사람이 쓴 진본이 있어 사람이 다 볼 수 있으니 만약 이를 임서하고 싶으면 바로 우연히 한번 희묵(戲墨)으로 시험하는 데 불과할 따름이며 이 어찌 법을 세우는 정종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황정의 진본은 필세가 가볍게 드날려 근일에 행세하는 묵각(墨刻)과는 특별히 다르기만 할 뿐 아니라 빙탄(氷炭)과 훈유(薰蕕)가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여 진체(晉體)라 일러 집집마다 떠받드는지 모를 일이다.
안평원(顔平原)의 글씨는 순전히 신으로써 나가 이는 곧 저법(褚法)으로부터 왔으나 저와는 일호도 서로 근사한 것이 없다. 황산곡(黃山谷)은 바로 진인(晉人)의 신수(神髓)라 했는데 사람들은 혹 우군의 과파(戈波)가 없다 하여 미사(微詞)가 있으니 다 그 변한 곳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논한 것이다.
근일의 유석암(劉石庵) 같은 이는 동파(東坡)의 서로부터 들어가 곧장 산음(山陰)의 문정(門庭)에 이르렀는데 지금 파서(坡書)의 형상을 가지고서 석암을 가책(苛責)한다면 되겠는가. 고예(古隸)도 역시 이와 같아서 한비(漢碑)를 보면 허화(虛和)하고 졸박(拙朴)하고 흉험가외(凶險可畏)의 상이 있는데 근세 사람들의 천량(淺量)과 소견(小見)으로는 오히려 문형산(文衡山)·동향광(董香光)의 한 획조차 능히 만들지 못하니, 어떻게 해서 동경(東京)의 한 파(波)인들 만들며 또 어떻게 해서 서경(西京)의 한 횡(橫)인들 만들 수 있으리오.
지금 한비로 현재 보존된 것은 겨우 사십 종류이며 또 잔금영전(殘金零塼)으로도 모추(摹追)할 만한 것이 있는데 촉천(蜀川)과 서로 통하는 곡부(曲阜) 제령(濟寧)의 밖에는 형언할 수 없이 괴괴기기(怪怪畸畸)하여 마치 공양(公羊)의 비상하고 가괴(可怪)한 것은 좌씨(左氏)에만 익숙한 자로는 규측(窺測)할 바 못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의심하여 심한 사람은 혹 묶어 저장해 놓고만 있으니 이 비록 하나의 소도(小道)이나 그 어려움이 이와 같아서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이원교(李圓嶠)가 황산곡의 글씨를 여지없이 논척(論斥)한 것을 보았는데 이는 곧 조미숙(晁美叔)의 말을 주워 모은 것에 불과하며 미숙의 이 말이 이미 산곡에게 감파(勘破)되었다는 것은 몰랐던 모양이다.
대개 논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디고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원교마냥 곧장 당·송·육조를 뛰어넘어 지레 산음의 비궤(棐几)를 침범하려 드는 것은 바로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격이다.
원교는 십가(十駕)로도 안평(安平)·석봉(石峯)에게 미치지 못하고 또 안평·석봉은 십가로도 동현재(董玄宰)에게 미치지 못하고 현재는 또 십가로도 동파(東坡)와 산곡에게 미치지 못할 터인데 그런 처지로서 어떻게 함부로 산곡을 논한단 말인가. 원교의 글씨는 어찌 일찍이 산곡의 파절(波折)의 법만이라도 지녔던가. 만약 원교가 파절을 모른다 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크게 놀랄 터이지만 실상은 파절의 오정(五停)하는 고법을 모른다.
조자고는 말하기를 "진(晉)을 어찌 쉽게 배울 수 있으랴. 당(唐)을 배우면 오히려 규구(規矩)는 잃지 않는다. 진을 배운다면서 당 나라 사람을 따르지 않는 것은 너무도 요량 모르는 것을 내보일 뿐이다. 해서(楷書)에 들어가는 것이 겨우 세 가지가 있으니 화도(化度)·구성(九成)·묘당(廟堂)이다."라 했다. 지금 조자고의 시대를 들어 말하자면 이미 육칠백 년이 지났으니 지금 통행하는 황정·악의·유교 등의 법서 같은 것은 어찌 자고가 이를 보지 못했겠는가. 그렇지만 반드시 이 세 비만을 뽑아든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황정은 산음(山陰)의 글씨가 아니며 악의론은 이미 그때에 선본(善本)이 없어져서 표준으로 삼을 수 없으며 유교는 곧 당의 시대 경생(經生)의 글씨라 부득불 이 세 비에서 구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석본(石本)이라 할지라도 원석이 상기 보존되어 있으니 진적(眞跡)에 비하여 한 등급이 낮지만 후세 석각(石刻)의 자꾸자꾸 서로 번모(飜摸)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서법은 신라 고려 두 시대에 오로지 구체(歐體)만을 익혀서 지금 남아 있는 구비(舊碑)로써 오히려 그 한두 가지를 거슬러 얻을 수 있는데 본조부터 이래로는 다 송설(松雪)의 한 길로만 쏠리었다. 그러나 신장(申檣)·성임(成任) 같은 여러 분들이 쓴 문방(門榜)의 액(額)은 웅기(雄奇)하고 고아하여 대단히도 옛법을 지녔으며 석봉에 이르러도 비록 송설의 기미는 있으나 역시 정성껏 옛법을 따랐던 것이다.
뒤에 와서 스스로 힘을 다하여 고법을 만회한다고 여기는 자들이 걸핏하면 다 황정·악의의 진체(晉體)를 말하고 있는데 모르괘라 황정·악의는 과연 이것이 무슨 본이었던가.
마침내 원교에 이르러는 또 예로부터 내려온 유규(遺規)를 다 말살하고 한 법을 억조(臆造)하여 붓 잡는 법에 있어서도 현비(懸臂)와 발등(撥鐙)을 익히지 아니하고 결자(結字)에 있어서는 "왼편은 위를 가지런히 하고 바른편은 아래를 가지런히 한다."는 등의 법으로 예로부터 감히 바꾸지 못한 것을 알지도 못하며 온 세상이 육침(陸沈)이 되어 거의 돌이켜 깨닫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서가의 하나의 큰 변이라 하겠다.
글씨를 배우는 자가 진을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당 나라 사람을 경유하여 진에 들어가는 지름길을 삼는다면 거의 그릇됨이 없을 것이다.
고현(古賢)이 글자를 만듦에 있어 공중에 올려 곧장 내림으로써 능히 신품(神品)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는 현비(懸臂)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현비를 하면 공제(空際)에서 선전(旋轉)하여 가는 곳에 따라 살찌건 여위건 간에 다 묘취(妙趣)를 이룬다. 그러므로 장득천(張得天) 사구(司寇)는 글씨를 배움에 있어 먼저 현비를 하고서 원권(圓圈)을 그려 삼개월이 지나 그 권자(圈子)가 둥글고 깨끗하며 순숙(純熟)할 때를 기다려서 붓을 쓰면 자연히 주경(遒勁)하고 원전(圓轉)하여 여유가 작작하며 붓을 눌러 글자를 만들면 스스로 편봉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다만 권자만으로는 다 되지 못하며 지운(指運)으로써 참(參)해야 한다.
종정(鍾鼎)의 고문자는 다 예법(隸法)이 이로부터 나오게 된 것이니 예를 배우는 자가 이를 알지 못하면 바로 흐름을 거스르고 근원은 잊어버린 격이다.
우리들이 한예(漢隸)의 글자를 배웠다지만 모두 결국 당예(唐隸)를 쓰게 되고 만다. 그러나 당예도 미쳐가기 어렵다. 당예는 하나의 명황(明皇) 효경(孝經)에만 그치고 말 따름이 아니다. 한비(漢碑)에 없는 글자는 함부로 만들어 내서는 안 되며 만약 당비(唐碑)에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 모양에 의해 만들 수도 있으니 전체(篆體)와 같이 지극히 엄하지는 않다. 전자(篆字)는 결코 당으로 흘러가서는 안 되니 비록 이소온(李少溫)의 전(篆)이라도 단연코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강백석(姜白石 강기(姜虁))이 수장한 정무난정(定武蘭亭)은 바로 조자고(趙子固)의 낙수본(落水本)이다. 소미재(蘇米齋 옹방강(翁方綱)의 재호임)가 손수 모(摹)하여 호리(毫釐)의 차와(差訛)도 없다. 또 강개양(姜開陽)이 산음(山陰)에서 각을 했으니 난정이 강씨에게 있어 크나큰 묵연(墨緣)이라 하겠다.
서가(書家)는 반드시 우군의 부자(父子)를 들어 준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왕(二王)의 서는 세상에 전본(傳本)이 없으며 진적으로 상기 보존된 것은 쾌설시청(快雪時晴)과 대령(大令)의 송리첩(送梨帖) 뿐이어서 모두 계산해도 백자(百字)를 넘어가지 않으니 천재(千載)의 아래에 있어 비궤(棐几)의 가풍을 추소(追溯)할 것은 이에 그칠 뿐이다. 이 역시 내부(內府)로 들어가서 외인으로는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모(劉摹)나 장각(章刻) 같은 것은 오히려 한번 번모(飜摹)한 것으로서 모법(摹法)이나 각법(刻法)이 하마 송·원 시대에 미치지 못하는데 또 어찌 양모(梁摹) 당각(唐刻)을 상대하여 논할 수 있으랴.
육조(六朝)의 비판(碑版)은 자못 전본(傳本)이 있어 구·저가 모두 이에서 나왔다. 그러나 송·원(宋元)의 여러 분들이 그다지 칭도(稱道)함이 없는 것은 그 이왕(二王)의 진적이 지금과 같이 다 없어지지는 않은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마땅히 북비(北碑)로부터 하수(下手)해야만 제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초산명(焦山銘)·예학명(瘞鶴銘)은 곧 육조 사람의 글씨이며 또 정도소(鄭道昭)의 여러 석각 같은 것도 다 볼 만하다. 황산곡 같은 이는 자주 초산(焦山)은 언급했지만 정(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형방비(衡方碑)·하승비(夏承碑)를 올려 보내는데 하승비의 원석(原石)은 이미 있지 않으며 이는 다 중각(重刻)한 통행본이다.
윤백하(尹白下)의 글씨는 문형산(文衡山)에게서 나왔는데 세상이 다 알지 못하며 우선 백하(白下) 자신도 또한 말하지 않았다. 문(文)의 글씨로서 소해(小楷) 적벽부 묵탑본(墨塌本)이 우리나라로 건너온 것이 있는데 백하가 전심하여 이것을 배웠다. 그 짧은 수획(竪畫)의 위는 풍성하고 아래는 빤 것은 바로 문(文)에게서 얻어온 법인데 문의 서는 청완(淸婉)하고 경리(勁利)한 반면 백하는 살짝 둔하고 조금 살찌며 우선 문의 결구는 다 구·저(歐褚) 안·유(顔柳)의 서로 전하는 옛 식에 들어 맞는데 백하는 다 되는 대로 썼으며 한 글자의 안에서 그 횡(橫)·수(竪)·점(點)·날(捺)에 따라 늘어놓기만 했다. 그러나 그 천품이 매우 특이한데다 인공마저 더하여 끝내 하나의 가수(家數)를 이룬 것은 형산을 비근하다 여기지 아니하고 머리를 숙여 배우고 익히곤 하여 먼 데로 치달려 스스로 대단한 척하기를 근래의 종·왕을 망칭(妄稱)하는 사람같이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해(大楷)의 금석비판(金石碑版) 전면(前面) 글자는 오로지 파공(坡公)의 표충비(表忠碑)를 법받았으며 그 반초(半艸)는 미남궁(米南宮)을 귀숙(歸宿)으로 삼아서 모두가 송인(宋人)의 권자(圈子)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곧 그 식력(識力)이 크게 상량(商量)을 가진 곳이다.
그 문하에서 진수를 얻은 사람으로는 원교를 제일로 삼거니와 원교의 초년에 쓴 해자는 곧 사문(師門)과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어 한 솜씨와 같았다. 실상 모를 일은 단지 사문의 써낸 것에서만 배우고 일찍이 한번도 사문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는 더듬어 보지 않은 점이니 이는 또 웬일이며 사문 역시 자기의 나온 바를 일러주지 않은 것은 또 웬일인가.
다시 생각하면 사도(師道)가 너무도 엄하여 감히 함부로 묻지 못했던 것이었던가. 사문이 일러주지 않은 것도 또한 박(璞)을 보여주지 않은 의에서였던가.
백하는 양호필(羊毫筆)을 썼던 모양이다. 서단양(徐丹陽)은 일찍이 말하기를 "사문의 쓰는 붓을 보니 중국의 대호로써 희기가 눈 같은데 끝내 무슨 붓이 되는지를 알지 못했고 또한 끝내 청해 묻지도 못했다."고 했다. 대개 옛사람은 사도(師道)가 엄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서·이(徐李)는 모두 그 고족(高足)이며 이(李)는 또 그 필법마저 물려받았으나 모두 양호인지는 알지 못했으며 비록 알았다 해도 백하는 능히 부려 쓸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필성(筆性)으로 보아 맞지 않을 것이다.
강표암(姜豹庵) 글씨는 바로 저하남(褚河南)에서 나왔으나 역시 어디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백하와 같으니 옛사람들은 이와 같은 곳이 많았다.
미남궁(米南宮 미불(米芾))의 글씨는 나양(羅讓)에게서 나왔는데 세상은 다만 미(米)를 알 뿐이요, 나(羅)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난정(蘭亭)은 하나는 구(歐)의 모본(摹本)이요, 하나는 저(褚)의 임본(臨本)으로서 구는 구의 체가 있고 저는 저의 체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다만 산음(山陰)의 것인 줄만 알고 도리어 이것은 구, 이것은 저임을 알지 못하며 만약 구·저의 서(書)를 들어 말을 하면 비록 구성(九成)·화도(化度)·삼감(三龕)·성교(聖敎 저(褚)의 안탑성교(雁塔聖敎)를 말함)라도 모두가 경홀히 여긴다. 중국 사람들은 일찍이 이와 같지 않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말살하려 든다. 이를테면 송·원의 여러 사람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침폄(鍼砭)하려 들며 서경(西京)·동경(東京)으로 곧장 뛰어넘어 올라가려 하나 그 실상인즉 화도·삼감을 보지도 못하고서 공연스레 허세와 공갈로만 오만을 부리는 것이다.
미남궁은 저임(褚臨)을 들어 천하의 제일로 삼았는데 그 당시에는 정무본(定武本)이 적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저(褚)를 중히 여겼으니 남궁의 감식(鑑識)은 의당 참증한 바 있어 뒷사람의 천량(淺量)으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 산곡(黃山谷) 같은 이는 또 정무본은 추켜들었으며 강백석(姜白石)·조이재(趙彝齋)가 다 정무를 진(眞)으로 삼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정무를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상세창(桑世昌)·유송(兪松) 여러 감상가들은 오로지 정무를 제일로 삼지 아니하고 아울러 저본(褚本)을 들었다.
악의론(樂毅論)의 양모·당각(梁摹唐刻)은 이미 북송(北宋) 시대부터 대단히 드물었으며 근세에 유행하는 속본(俗本)은 바로 왕저(王著)의 글씨이다. 동쪽 사람들은 더욱이 감별이 없어서 비궤(棐几)의 진영(眞影)으로 인식하고 아이 때부터 머리가 하얗토록 익혀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마치 채구봉(蔡九峯 채 침(蔡沈))이 전(傳)을 한 서경(書經)의 고문(古文)은 다 매색(梅賾)의 위본(僞本)임을 모르는 것과 같다.
서와 화(畫)는 도가 한 가지이다. 화가가 반드시 위로 조불흥(曹不興) 장승유(張僧繇)만 찾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만약 왕우승(王右丞 왕유(王維))의 강간설재(江干雪霽) 전본(傳本)이나 오도현(吳道玄)의 보살천왕(菩薩天王) 모필(摹筆)을 얻는다면 받들기를 천구(天球)와 홍벽(弘璧)같이 한다. 송의 연문귀(燕文貴)와 역원길(易元吉)의 것 같은 것도 세상에 드문 보배로 삼으며 원의 사대가(四大家) 조송설(趙松雪) 예운림(倪雲林) 황대치(黃大痴) 왕몽(王蒙)를 말하더라도 역시 그 진본은 얻기 어렵다. 비록 명의 심석전(沈石田)·유완암(劉完庵)·문형산·동향광 같은 지극히 가까운 시대 사람들의 작품도 보기를 금과 옥조(金科玉條)처럼 하는데 글씨만은 그렇지 아니하여 반드시 종·왕을 준칙으로 삼으며 이것이 아니면 선뜻 다 경홀히 여긴다.
무릇 구·저 같은 이는 다 진인(晉人)의 신수(神髓)인데도 이원교는 방판(方板)이라 칭하여 하찮게 여기며 "우군은 이렇게 쓰지 않았다." 하고 있으나 그 평생을 두고 익힌 것은 바로 왕저가 쓴 악의론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동향광은 바로 서가로서 하나의 큰 결국(結局)인데도 마구 말살하여 넘어뜨리고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동이 임서한 난정시(蘭亭詩)를 난정의 팔주첩(八柱帖) 안에 꽂아넣어 적파(嫡派) 진맥(眞脈)이 서로 전하는 것과 같이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목이 훨씬 중국의 감상가들보다 나아서 그렇단 말인가. 너무도 요량 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만약 원교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창정(暢整) 경객(敬客)의 글씨로 향하여 배우고 익혔더라면 그만한 천품으로써 구·저를 거슬러 가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니 또한 반드시 깊이 가책(苛責)을 가할 것도 아니다.
이왕(二王)의 진적으로 지금도 오히려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우군(右軍)의 쾌설시청(快雪時晴) 원생(袁生) 등의 첩(帖)과 대령(大令)의 송리첩(送梨帖) 같은 것인데 이런 것도 그들은 다 심상(尋常)히 거쳐 가고 심상히 모습(摹習)하는 터이며 또 우모난정(虞摹蘭亭)·저본난정(褚本蘭亭)·풍(馮)의 난정·육(陸)의 난정·
개황난정(開皇蘭亭) 같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찌 꿈엔들 이에 미쳤으랴.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고 한결같이 미오(迷誤)되어 돌아오지 못하며 삼전(三錢)의 계모필(鷄毛筆)을 견집하여 걸핏하면 진체(晉體)라 칭하고 있으나 그들의 말하는 진체는 과연 무슨 본인고 하면 왕저의 악의론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아니하랴.
우연히 손과정(孫過庭 손건례 (孫虔禮))의 사자부(獅子賦)·임조(林藻)의 심위첩(深慰帖)을 펴보고 저도 몰래 신이 나서 한번 써 보았는데 손·임은 곧 진인(晉人)의 규칙이다. 초법(草法)을 배우고자 하면서 손의 문경(門逕)을 말미암지 않으면 또 촌구석 가게에나 술집 바람벽에 붙이는 하나의 진택부(鎭宅符)의 악찰(惡札)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서품(書品)이나 화품(畫品)이 다 한 등급을 뛰어나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다 속장(俗匠) 마계(魔界)일 따름이다.
구(歐)의 서는 기화(奇花)가 갓 맺은 것 같아서 함축하고 드러내지 않는다. 옹사탑명(邕師塔銘)은 그 신(神)이 행하고 환(幻)이 나타난 곳으로서 사람들이 그 그림자나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저의 삼감(三龕)·맹법사(孟法師)·성교(聖敎) 등의 서는 해[歲]가 새로워짐을 보는 것 같고 꽃이 벌어지는 것을 만난 것 같아 유행하고 변형(變形)하여 헤아릴 수 없지 않는 것이 없다. 화엄누각(華嚴樓閣)이 한 손가락으로 탄개(彈開)하는 것은 미륵이 아니고서는 이를 판출(辦出)할 수 없고 선재(善財)가 아니면 이에 들어갈 수 없어 바라볼 수는 있어도 나아가지는 못한다.
서(書)는 현완(懸腕)·발등(撥鐙)·포백(布白) 등의 법과 부앙(俯仰)·향배(向背)·상하(上下)·조응(照應)에 여러 묘(妙)가 있으며 점과 획이 청초(淸楚)하고 장법(章法)이 구비해야 되는 것이다. 우선 종·색(鍾索) 이래로 능히 바꾸지 못하는 한 법식이 있으니 좌우의 글자 이것이다. 우가 짧으면 아래를 가지런히 하고 좌가 짧으면 우를 가지런히 하며 간가(間架) 결구(結搆)의 팔십여 격(格)도 이로부터 들어가지 아니하고서 함부로 한 획을 긋고 맹목적으로 한 파(波)를 뽑기를 근일의 속장(俗匠)과 같이 전도(顚倒)하고 창광(猖狂)하면 모두 다 이 악찰(惡札)일 뿐이다.
영정본(穎井本)·왕문혜본(王文惠本)은 소재(蘇齋)가 그다지 허여하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소재의 정법안(正法眼)만이 심정(審定)할 바이며 얕은 사람으로는 또 망령되이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상구진씨(商邱陳氏)의 송탁구본(宋拓舊本)은 운대(芸臺)가 이것을 정무(定武)의 원석(原石)이라 하였고 소재(蘇齋)는 송의 번본(飜本)이라 했으니 소재의 정확은 마땅히 특식(特識)을 갖추어 범안(凡眼)으로는 능히 뚫고 갈 바가 아니다.
운대는 고목난원본(古木蘭院本)을 두 돌에 각하여 하나는 고목난원에 두고 하나는 문선루(文選樓)의 가숙(家塾)에 두었으며 전매계(錢梅溪) 영(泳)은 조오흥(趙吳興 조맹부(趙孟頫))의 십삼발(十三跋)을 각했는데 이는 불에 타지 않은 이전의 완본이다.
조자고의 낙수본은 장씨(蔣氏)의 집 물건이 되었는데 소재가 빌려다 재중(齋中)에 두고 평소에 공력들인 것이 이에 있었다. 근자에 들으니 역시 내부(內府)로 들어갔다 한다. 조오흥(趙吳興) 십삼발의 이미 타다 남은 것은 현재 영후재(英煦齋)에 소장되어 있는데 역시 소재의 품정(品定)을 거친 것이다.
난정첩(蘭亭帖)은 다 당 태종(唐太宗) 때에 비로소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수(隋) 나라 개황(開皇) 연대에 이미 각본(刻本)이 있었다. 그 "변재(辨才)가 단단히 감춰둔 것을 소익(蕭翼)이 속여서 내왔다."라는 말을 준신하여서는 아니될 것 같다. 지금 통행하는 정무본은 바로 구모(歐摹)요, 신룡본(神龍本)은 저임(褚臨)인데 구는 구의 체가 있고 저는 저의 체가 있으니 모르괘라 이 두 본 중에 어느 것이 과연 산음의 진영(眞影)이었던가?
미남궁은 저본을 평생의 진완(珍玩)으로 삼았고 황산곡은 정무본을 가장 칭찬했다. 그래서 송·원 이래로 정무본이 마침내 세상에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감상가들은 또 많이 저본을 주장하여 정무와 더불어 서로 갑을(甲乙)하였다.
회인(懷仁)이 성교서를 집자(集字)할 때에 혹은 구본의 글자를 취하기도 하고 혹은 저본의 글자를 취하기도 했다. 그때에 궁중에 수장된 것도 역시 각각 두 본이 있어 아울러 취한 것이니 다 진(眞)을 모하는 데에 해로움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탕(湯)·풍(馮) 같은 여러 모본에 이르러는 또 어느 곳에 유장(留藏)되었던 것인가? 지금 중국 내부(內府)에 수장된 것은 백 수십 본이어서 그 사이에는 기체(奇體)도 많아 또 지금 통행본과는 크게 다르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지 지금 통행하는 양 본을 난정의 진면으로 삼는다면 또 하나의 각주구검(刻舟求劍)에 불과하다 하겠다.
소릉(昭陵)에서 발굴한 이래 옥갑(玉匣)의 진본이 다시 나와 장사꾼의 손으로 들어가서 정강(靖康 송휘종(宋徽宗)의 연호) 연간에 직녀(織女)의 지기석(支機石)과 더불어 서울에 팔러온 것을 가사도(賈似道)가 직접 목도하였는데 이윽고 휘종(徽宗) 흠종(欽宗)이 북으로 가게 되어 마침내 그 물건이 간 곳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신물(神物)은 반드시 연운(煙雲)과 더불어 환멸(幻滅)할 리는 없고 마땅히 인간에 있을 텐데 특별히 사람들이 묵륜(墨輪)의 윤전(輪轉)할 때를 만나지를 못하고 있으니 오직 가섭(迦葉)의 출정(出定)한 해를 기다려야만 다시 제본(諸本)을 감험(勘驗)할 수 있을 것이다.
진(晉)·송(宋)의 사이에는 세상이 헌지(獻之)의 서를 중히 여기고 우군의 서는 도리어 중히 여기지 않았다. 양흔(羊欣)이 자경(子敬)의 정·예(正隸) 서를 중히 여겨 세상이 모두 존중하였던 것이다.
양(梁) 나라가 망한 이후로 비각(祕閣)에 수장된 이왕(二王)의 서가 처음으로 북조(北朝)에 들어가서 진위(眞僞)가 혼잡되어 당시에도 이미 분변하기 어려웠다.
도 은거(陶隱居)가 양 무제(梁武帝)에게 답한 계(啓)에 이르기를 "희지(羲之)가 선령(先靈)에 고하고 벼슬하지 않은 이후로는 대략 자수(自手)로 쓰지 아니하고 대서(代書)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상이 얼른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그 느리고 다른 점을 보면 만년의 글씨라서 이렇다고만 했으나 그 실은 우군의 진서가 아니다. 자경이 나이 십칠팔 세에 전혀 이 사람의 글씨를 모방했다."고 했다.
지금 이왕(二王)의 글씨는 일단 이와 같이 분별하기 어려운데 나아가서 경서를 읽으며 낡은 것만 고수하고 빠진 것을 안아서 끊어지지 않음이 실낱과 같은 것이 또 어찌 하나의 서가와 대비해 논할 수 있는 정도랴. 이는 학자로서 열백 번 신중히 생각해야 할 곳이다.
성저(成邸 성친왕(成親王))의 글씨는 송설(松雪)로부터 들어갔는데 늦게는 구의 화도비·송탁구본을 얻어 차츰 변하여 깊이 그 당오(堂奧)에 들었으며 초서의 법은 더욱 손건례(孫虔禮)의 구법(舊法)에 특장(特長)이 있어 악찰의 진택부(鎭宅符)의 속습을 깨끗이 씻어냈으니 족히 뒷사람의 법식이 될 만하다.
이 권은 대개 조(趙)의 필의가 많지만 그러나 한 체로 이름짓지 않고 종왕의 여러 법이 각각 그 묘를 나타냈다. 고순첩(苦荀帖)은 그가 수장한 것이며 내부(內府)에 비장한 진·당 이래의 극적(劇迹)은 다 그가 익숙히 익혀 침자(枕藉)하던 것이니 아무리 잘 쓰고 싶지 않지만 되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력도 알지 못하는 각첩(閣帖)·난정·악의를 가지고서 곧장 산음의 정맥을 거스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삼가촌락의 동홍(冬烘) 선생이 고두강장(高頭講章)으로서 소릉(召陵) 북해(北海)에게 버티고자 하는 것이다.
일찍이 법원사(法源寺)에서 성친왕이 쓴 찰나문(刹那門)이라는 삼대자(三大字)를 보았는데 금시(金翅)가 바다를 가르고 향상(香象)이 바다를 건너가는 기세가 있어, 우리나라의 석봉으로는 열이라도 당해낼 수 없거니와 만약 다시 석암(石庵)·담계(覃溪)의 웅강(雄强)이라면 또 어떤 구경거리를 만들었을는지, 자신도 모르게 망연자실이 된다.
지영선사(智永禪師)는 철문한(鐵門限)을 만들고서 그 선조 우군의 가법을 독실히 익혀 횡획은 반드시 여위고 직획은 반드시 살찌니 이는 필세(筆勢)의 자연으로 말자도 말지 못하는 곳이다.
우군의 글씨도 역시 이와 같아서 혹은 은봉(隱鋒)하여 쓴 것도 있는데 그 절각(節角)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흔연한 일색(一色)으로 되어 비·수(肥瘦) 대·소(大小)의 구분이 없으나 자세히 보면 역시 차등이 있다. 이는 서가(書家)가 모를 깎아 원을 만드는 하나의 전변(轉變)인 것으로서 마치 양한(兩漢)의 문체가 종경에는 글귀를 단련하고 글자를 조탁하며 누런 것을 뽑아 흰 것과 대하여 문선(文選)의 이(理)로 된 것과 같다. 지금의 글씨 쓰는 자는 이러한 원류를 알지 못하고 걸핏하면 글씨란 크로 작은 획이 없다 하여 드디어 그 음양·향배·추세(麤細)·비수(肥瘦)로써 예로부터 일정하여 감히 바꾸지 못하는 체식(體式)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하나의 산자(算子)를 만드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종·색(鍾索) 이하의 서가는 다 전하는 비결이 없고 오직 입과 입으로 서로 주고받고 할 뿐이었는데 지영(智永)에게 와서 비로소 영자팔법(永字八法)을 글로 만들어 놓았으며 또 야(也)의 글자의 한 법이 있었으나 오로지 과구(窠臼)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팔법이 차츰 변하여 칠십여 칙(則)이 되었으며 또 은술(隱術)로 십여의 필이 있어 언어와 문자로는 형용할 바 아니니 신(神)으로써 밝혀나가야 할 것이다.
백정(白丁)은 운남(雲南)의 중인데 난초를 잘 그렸다. 매양 문을 닫고 혼자서 그리며 물로써 그 지면에 뿜어 먹빛이 나를듯이 피어나는데 아무도 그 법을 터득한 자 없고 오직 정판교(鄭板橋)만이 그것을 배웠다. 백정(白丁)의 난정에 제함.
이는 봉안(鳳眼)과 상안(象眼)으로 통행하는 법인데 이것이 아니면 난을 만들 수 없다. 비록 이것이 소도(小道)지만 법이 아니면 이루지 못하는데 하물며 나아가 이보다 큰 것에 있어서랴.
그렇기 때문에 잎 하나 꼭지 하나도 스스로 속이지 못하거니와 또 남을 속여서도 안 된다. 열 눈이 보는 바요 열 손이 가리키는 것이니 얼마나 무서운가. 이 때문에 난(蘭) 그림에 손을 대고자 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속임이 없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자고(趙子固)가 그린 난은 한 획 한 획이 좌로 향했다. 소재노인(蘇齋老人)이 자주 칭했다.
원 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은 고묵(枯墨)으로써 시작하여 차츰차츰 먹을 쌓아 나가므로 끝마치지 못한 나무와 탑용(闒茸)한 산도 다 천기(天機)를 따라 얻어냈다. 대치(大痴)는 대치의 준(皴)이 있고 운림(雲林)은 운림의 준이 있으니 인력을 빌려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오(靜悟)는 청록(靑綠)을 연구한 삼십 년에 원인(元人)의 필로써 당인(唐人)의 기운을 운전하고 송인(宋人)의 구학(邱壑)을 만들었는데 붓끝에는 금강저(金剛杵)가 있어 천마(天馬)가 공중을 다니는 것도 같고 천의(天衣)가 꿰맴이 없는 것도 같고 신룡(神龍)이 머리만 나타내고 꼬리를 보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백목단(白牧丹)을 두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신선의 무리 속에
풍류롭긴 쉽지마는 / 神仙隊裏風流易
부귀의 마당 안에
본색 갖긴 어렵구려 / 富貴場中本色難
라 했고, 백도화(白桃花) 시에 이르기를,
후정의 노래 멎자
술기운이 다 깨고 / 後庭歌罷酲初醒
전에 간 사람 오자
귀밑 하마 하얗도다 / 前度人來鬢已華
라와, 또,
식국을 망하기는
홍분의 누로써요 / 亡息國因紅粉累
진인을 피한 것은 바로
백의의 존자로세 / 避秦人是白衣尊
라 한 것이 있으니, 시란 이(理)를 말하지 아니해도 참으로 이를 말한 것이 있다. 이를테면 당 나라 사람이 바둑을 두고 읊기를,
인심이 헤아릴 수 없는 곳엔 / 人心無算處
국수도 지고 말 때가 있구려 / 國手有輸時
와 돛을 두고 읊기를,
하마 몸이 머문 줄만 알았는데 / 恰認己身住
도리어 저 언덕으로 옮겨가는가 / 飜疑彼岸移
와, 눈을 두고 지은 시에,
무슨 수로 백성들의
따뜻함을 얻어볼꼬 / 何由更得齊民煖
숙맥에 하 많이
못 내린 것 한이로세 / 恨不偏於宿麥深
와, 구름을 두고 지은 시에,
한없는 가뭄벼가
말라져 다 죽는데 / 無限旱苗枯欲盡
한가하다 유유히
기봉만 만들다니 / 悠悠閒處作奇峯
라 하였다. 태제(台濟)에게 보임.
동정귤(洞庭橘)·당금귤(唐金橘)·소귤(小橘)·금귤(金橘) 네 종(種)이 상(上)이 되며 별귤(別橘)은 품종이 가장 귀하나 종자가 몹시 드물어서 능히 공납에 충당을 못한다. 산귤(山橘)은 가장 많으나 가장 하질이며 청귤(靑橘)·석금귤(石金橘)은 다 맛이 좋지 못하며 대귤(大橘)은 보지 못했으며, 감자(柑子)·등자(橙子)는 다 중국이나 일본산만 같지 못하다. 유감(乳柑)은 조금 시원하나 산미(酸味)가 많으며 당유자(唐柚子)는 농창하게 익어 봄을 지낸 것이라야 달고 시원하다. 감자는 향이 없으며 지각(枳殼)은 청귤과 함께 약에 들어간다.
동정귤은 고성(高姓)의 집 사원(私園)에 단지 두 그루가 있고 관원(官園)에는 단 한 그루뿐이며 당금귤(唐金橘)은 관원(官園)에 한 그루가 있을 뿐이다.
건초척(建初尺)은 성척(省尺)의 칠촌 오푼과 절척(浙尺)의 팔촌 사푼에 해당된다.
《원사(元史)》의 태조본기(太祖本紀) 및 야율초재전(耶律楚材傳)에 의거하면 "제(帝)가 동인도에 이르러 철문(鐵門)에 머물렀는데 각단(角端)이 나타나서 회군하게 되었다."라 했는데 이것은 대개 송자정(宋子貞)이 지은 초재(楚材)의 신도비(神道碑)를 근본으로 삼은 것이며 태조의 군사가 설산(雪山)을 넘어서 북인도에 그쳤다는 것을 몰라서였다. 북인도에까지 왔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빈해(瀕海)의 동인도에 이르렀겠는가. 철문 같은 데는 가지 못했으며, 설산은 북인도와 거리가 상기도 멀다. 《담연집(湛然集)》
을 상고해 보면 초재(楚材)가 서역에 있던 십 년 동안에 심사간성(尋思干城)에 머물렀으니 우연히 철문에 이르렀더라도 인도까지 갔을 리는 없다. 신도비를 짓는 사람이 공을 초재에게 돌리려고 했기 때문에 인도의 일을 철문에 옮겨 써서 부회(傅會)한 것이나 여러 가지가 서로 맞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몽고원류(蒙古源流)》에 이르기를 "성길사한(成吉思汗)이 장차 액납특아극(額納特阿克)을 정벌하기 위하여 곧장 제탑납능령(齊塔納凌嶺)의 산등성이에 당도하자 하나의 외뿔 돋은 짐승을 만났는데 제 이름은 새노(賽魯)라 이르며 한(汗)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니 한은 말하기를 ‘저 액납특아극은 바로 대성인이 강생(降生)한 곳인데 지금 기이한 짐승이 앞에 왔으니 자못 하느님이 뜻을 보인 것이다.’ 하고 회군하여 처소로 돌아왔다."라 하였다. 이는 분명히 짐승을 만난 곳은 바로 설산에서이고 철문도 아니요 동인도도 아니요 또 초재의 간언(諫言) 때문도 아님을 말한 것이다.
대개 초재는 서역에 있은 십여 년에 머물러 심사간성을 지켰는데 곧 새마 이한성(賽馬爾罕城)이다. 종신토록 인도 북의 대설산에 가지 못했는데 뒷사람이 야율(耶律)의 신도비를 지으면서 반드시 공을 초재에게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설산의 일을 철문에 옮기어 천취(遷就)한 것이나 천리의 어긋남을 모른 것이다. 그런데 《원사》도 인습하고 《명사(明史)》도 인습하였다.
원 태조의 군사가 설산을 넘었으니 단실(端實)을 추산(追算)하면 북인도에 이르러 그쳤으며 중인도까지 친히 가지는 못하였다. 장춘서행기(長春西行記)가 있어 입증이 된다. 만약 겨우 철문에 그쳤다면 북인도도 오히려 가지 못했는데 하물며 중인도를 넘어 빈해(瀕海)의 동인도에까지 갔겠는가. 이는 만리(萬里)의 오류(誤謬)이지만 역시 야율의 신도비에서 비롯되어 《원사》가 인습하고 《명사》가 인습한 것이다.
오인도(五印度)의 강역(疆域)은 남인도는 큰 바다로써 한계하고 서인도는 홍해(紅海)·지중해(地中海)가 있어 한계하여 예나 이제나 절연(截然)하여 어긋나지 않으며 오직 동·북의 두 인도는 육지의 경계가 각국과 들쑥날쑥하다. 그러나 동인도는 항해(航海)가 서로 통하여 상이(商夷)가 모두 익히 내왕하며 북인도는 총령(蔥嶺)의 서쪽이 간격이 되어 내왕하지를 못한다. 또 원·명 이후에는 나라 이름이나 땅의 이름이 당 나라 이전과는 서로 일관되지 못하며 다행한 것은 극십미이(克什彌爾)가 당·송의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이 되어 천여 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대설산이 있어 그 북을 경계했는데 그를 근거로 하여 북인도의 계빈(罽賓)이 되었다.
《원사》에서 철문을 들어 동인도로 삼았고 《명사》에는 새마이한을 들어 고 계빈(古罽賓)을 삼아서, 중중첩첩(重重疊疊)으로 빗나간 것이 이로부터 일어났으니 이를 가려놓지 않으면 인도 북경(北境)은 끝내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한 나라 시대에 대월씨(大月氏)가 점령한 대하(大夏)의 지역은 바로 새마이한의 지역이며 겸하여 지금의 오한포합이(敖罕布哈爾)·애오한(愛烏罕) 여러 부(部)의 지역이다. 가정(嘉靖) 이후로부터 입공(入貢)하였는데 한 나라에서 왕이라 칭하는 자가 오십여 명이었으니 이미 사분오열(四分五裂)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총령 서쪽에는 다시 새마이한의 이름이 없으며 서역의 그림 그리는 자들도 그 구국(舊國)을 열거하여 총령 제부(蔥嶺諸部)를 총괄하였으며 곤여(坤輿)·직방(職方)의 제도(諸圖)나 해국문견록(海國聞見錄)·장씨지구도(莊氏地球圖)도 아울러 그러하다. 자못 실지를 고사하여 이제를 따르는 의가 아니기 때문에 상세히 분별하는 것이다.
[주D-001]일전(日躔) : 해의 운행하는 전차(躔次)임. 《방언(方言)》에 "日運爲躔"이라 하였고, 《원사(元史)》 역지(曆志)에는 "非日躔 無以交其列舍"라 하였음.
[주D-002]황도(黃道) : 천문학 용어임. 천구(天球) 상의 한 대권(大圈)이 1년 내에 지구상에서 보이는 태양이 지나가는 길이 되어 곧 지구 궤도의 평면이 천구와 서로 어울리는 선(線)이다. 지구 궤도의 평면을 황도면이라 하고, 적도면과 비스듬히 어울려 23도 27분의 각(角)을 이루면 황적대거(黃赤大距)라 하고, 또 천구의 중심을 통과하여 황도면의 직선과 수직이 되면 황도축(黃道軸)이라 하고, 이 축이 천구의 점(點)과 어울리면 황도의 극(極)이라 하는데 생략하여 황극이라 칭함.
[주D-003]백도(白道) : 달이 다니는 길로서 황적도와 더불어 비스듬히 어울리는데 오직 춘분·추분 절서에는 적도와 교점(交點)을 이룸.
[주D-004]궁(宮) : 역법(曆法)에 30도를 궁으로 삼는데 곧 원주(圓周) 12분의 1임.
[주D-005]생명(生明) : 재생명(哉生明)인데 초사흘의 달을 말함. 《서경(書經)》 무성(武成)에 "厥四月 哉生明"이 있음.
[주D-006]생백(生魄) : 재생백(哉生魄)인데 16일로서 이른바 달의 기망(旣望)을 말함. 재는 시(始)의 뜻임.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公以八月哉生魄庚子"가 있음.
[주D-007]수시(授時) : 옛날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책력을 만들어 민간에 반포하여 농시(農時)를 알려 주었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라 하였음.
[주D-008]삭허(朔虛) : 《서경(書經)》 요전(堯典) 기삼백(期三百)의 채전(蔡傳)에 나와 있음.
[주D-009]이십팔수(二十八宿) : 고대의 천문학에는 주천(周天)의 성(星)을 나누어 이십팔수를 만들어 사방에 각기 칠수(七宿)가 있으니, 동방은 각(角)·항(亢)·저(氐)·방(房)·심(心)·미(尾)·기(箕), 북방은 두(斗)·우(牛)·여(女)·허(虛)·위(危)·실(室)·벽(壁), 서방은 규(奎)·누(婁)·위(胃)·묘(昴)·필(畢)·자(觜)·삼(參), 남방는 정(井)·귀(鬼)·유(柳)·성(星)·장(張)·익(翼)·진(軫)으로 되었음.
[주D-010]빙상씨(憑相氏) : 관명(官名)인데 《주례》춘관(春官)의 속(屬)임. 《주례(周禮)》 춘관(春官)빙상씨의 주에 "빙은 승(乘)이요, 상은 시(視)인데 대대로 고대(高臺)에 올라 천문의 차서를 살펴본다." 하였음.
[주D-011]건(建) : 두성(斗星)에 가까이 위치한 별자리임.
[주D-012]호(弧) : 별 이름인데 낭성(狼星)의 동부에 있어 하늘의 활이라 이름.
[주D-013]벌(罰)·낭(狼) : 벌은 벌삼성(罰三星)을 말함이요, 낭은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其東有大星曰狼"이라 하였음.
[주D-014]추보(推步) : 일월(日月) 오성(五星)의 도(度)와 혼단(昏旦) 절기(節氣)의 차(差)를 추측함을 이름. 《後漢書 注》. 지금은 의기(儀器) 및 산술을 이용하여 천상(天象)을 고측(考測)하는 것을 추보라 이름.
[주D-015]태일(太一) : 《예(禮)》 예운(禮運)에 "夫禮必本於太一"이라는 대문이 있고, 그 소(疏)에 "천지가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의 혼돈의 원기를 이름이다. 극히 큰 것을 천(天)이라 하고 나누어지지 않은 것을 일(一)이라 하는데 그 기(氣)가 극히 크면서도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태일이라 이른다." 하였음.
[주D-016]육 선공(陸宣公) : 육지(陸贄)는 당 가흥인(嘉興人)으로 자는 경여(敬輿), 시호는 선공이다. 덕종(德宗) 때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조정에 있어 논간(論諫)함에 말이 개절(剴切)하여 그 주의(奏議)가 후세에서 존봉(尊奉)하는 바 되었음.
[주D-017]용각(龍角)을 연하고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杓携龍角"이란 말이 있고 그 집해(集解)에 "맹강(孟康)은 말하기를 '표(杓)는 북두의 표요, 용각은 동방의 별이며, 휴(携)는 연한다는 말이다." 하였음.
[주D-018]은(殷)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집해(集解)에 "형(衡)은 남두(南斗)의 중앙이요, 은(殷)은 중(中)의 뜻이다." 하였음.
[주D-019]대광(戴匡) : 광(匡)은 해갑(蟹甲)인데 형상이 광(匡)과 같아서 대광이라 함.
[주D-020]삼태(三能) : 능(能)은 태(台)와 통하므로 여기서는 능을 태로 읽음.
[주D-021]경방(景方) : 경은 본디 병(丙)인데 당시대에 어휘(御諱)로서 글자를 바꾸어 경이 되었음.
[주D-022]《건착도(乾鑿度)》 : 서명인데 역위(易緯) 8종의 제이(第二)이다. 구본(舊本)에는 정강성(鄭康成)의 주라고 칭했는데 당(唐) 이전에는 설경 제가(說經諸家)가 항상 서로 인용하였음. 그 태을행구궁법(太乙行九宮法)은 바로 후세의 낙서(洛書)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주D-023]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 : 《의례(儀禮)》의 편명인데 특생은 큰 제사 때 쓰는 소 온 마리와 돼지 온 마리를 말함.
[주D-024]교특생(郊特牲) : 《예기》의 편명인데 교는 제천(祭天)의 이름이며 제천에 있어서는 붉은 송아지 온 마리를 쓴다. 그러므로 특생이라 한 것임.
[주D-025]직제(直祭)에는……축(祝)한다 :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보이는 대문으로 정주(鄭注)에 "직제의 직(直)은 정(正)인데 제(祭)는 숙(熟)을 정(正)으로 삼는다." 하였음.
[주D-026]훈호처창(焄蒿悽愴) : 《예(禮)》 제의(祭儀)에 나오는데 그 주(注)에 "훈(焄)은 향취이고 호는 기(氣)가 증출(蒸出)하는 모양을 이름이다." 하였으며, 소(疏)에는 "이 향취가 뭉게뭉게 위로 솟아서 그 기운이 호연(蒿然)함을 이름이다." 하였음.
[주D-027]소명(昭明) : 《예(禮)》 제의(祭儀)에 나타난 훈호처창(焄蒿悽愴)의 윗 대문에 "其氣發揚于上爲昭明"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주에 "發揚于上 爲昭明者 言此升上 爲神靈光明也"라 하였음.
[주D-028]강백석(姜白石) : 이름은 기(夔), 자는 요장(堯章)인데 송(宋) 파양인(鄱陽人)으로 무강(武康)에 우거(寓居)하여 백석동천(白石洞天)과 더불어 이웃을 하였으므로 호를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 하였음. 그 시는 풍격이 고수(高秀)하며 사(詞)는 더욱 정심화묘(精深華妙)하여 음절문채(音節文采)가 다 한때에 으뜸이었다.
[주D-029]계찰(季札)의 묘(墓) : 계찰은 오(吳) 계찰을 이름인데 춘추 시대 오 나라의 공자(公子)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므로 연릉(延陵)에 봉하였다. 그러므로 연릉계자(延陵季子)라 칭하였다. 그는 상국(上國)에 빙(聘)하여 당시의 현대사부(賢士大夫)를 두루 교제하였으며, 노(魯) 나라에 들러 악(樂)을 관찰하고 열국(列國)의 치란 흥쇠(治亂興衰)를 알았다. 춘추 시대의 현자(賢者)임. 세상에서 전하기를 중니(仲尼)가 계찰의 묘에 표하기를 "有吳延陵季子之墓"라 했다고 하여 그 글씨가 중니의 수필(手筆)이라 하는데 고증가들에 의하여 위작임이 판명되었음.
[주D-030]환영(桓楹) : 목비(木碑)임. 제7권 주 153) 참조.
[주D-031]장종신(張從申) : 당 나라 오군인(吳郡人)인데 진사제(進士第)에 뽑혀 관은 대리사직(大理寺直)에 이르고 글씨를 잘 써서 세상이 독보라 칭하였음.
[주D-032]은중용(殷仲容) : 당 나라 사람인데 무후(武后) 때에 비서승(祕書丞)으로 신주자사(申州刺使)를 지냈으며 인물·화조(花鳥)를 잘 그리고 전예(篆隷)를 잘 썼음.
[주D-033]천녀(天女)의 산화(散花) : 《유마경(維摩經)》에 "천녀산화의 꽃은 사리불등(舍利佛等)의 몸에 붙으면 떼어버리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하였음. 《심지관경 1(心地觀經 一)》에 "六欲諸天來供養 天花亂墜徧虛空"이라 하였음.
[주D-034]광대교화(廣大敎化) : 광대교화주(廣大敎化主)의 약칭임. 당(唐) 장위(張爲)가 주객도(主客圖)를 찬(撰)하면서 시가(詩家) 6인을 세워 주(主)를 만들고 나머지는 입실(入室)·승당(升堂)·급문(及門)으로 나누어 객(客)을 삼았다. 백거이(白居易)는 광대교화주, 맹운경(孟雲卿)은 고고오일주(高古奧逸主), 이익(李益)은 청기아정주(淸奇雅正主), 맹교(孟郊)는 청기벽고주(淸奇僻古主), 포용(鮑溶)은 박용굉발주(博容宏拔主), 무원형(武元衡)은 괴기미려주(瓌奇美麗主)라 하였다.
[주D-035]구율(彀率) : 활을 당기는 법을 이름. 《맹자(孟子)》 진심(盡心)에 "羿不爲拙射變其彀率"이란 대문이 보임. "率"은 "律"과 통용함.
[주D-036]원유지(元裕之) : 금(金)의 수용인(秀容人)으로 이름은 호문(好問), 자는 유지, 호는 유산(遺山)인데 7세에 능시(能詩)하여 관(官)은 상서성 좌사원외랑(尙書省左司員外郞)에 이르렀으며, 금(金)이 망하자 벼슬하지 아니하였음. 학술이 침심(沈深)하고 재기(才氣)가 탁월하여 금·원(金元) 시대의 문학하는 자로는 호문이 가장 드러났음. 《유산집》40권이 있음.
[주D-037]우백생(虞伯生) : 원(元) 인수인(仁壽人)으로 이름은 집(集), 자는 백생, 호는 도원(道園)인데, 홍재박식(弘才博識)하여 시용(施用)하면 적의치 않은 곳이 없었다. 관은 규장각 시서학사(奎章閣侍書學士)에 이르렀으며 일시의 대전책(大典冊)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저술로는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 50권이 있음.
[주D-038]경릉(竟陵) : 명(明) 종성(鍾惺)의 자는 백경(伯敬)이요, 경릉인인데 원굉도(袁宏道)가 왕세정(王世貞)·이반룡(李攀龍) 시의 폐단을 교(矯)하여 청진(淸眞)을 외쳐서 공안파(公安派)를 이루었는데 종성이 다시 그 폐단을 교하여 변해서 유심고초(幽深古峭)를 만들었다. 그래서 동리(同里) 사람 담원춘(譚元春)과 함께 당인(唐人)의 시를 평선(評選)하여《고시귀(古詩歸)》를 만들었다. 그래서 종·담의 이름이 천하에 가득했으며 이를 경릉체라 이름함.
[주D-039]주죽타(朱竹坨) : 청 수수인(秀水人)으로 이름은 이준(彝尊), 자는 석창(錫鬯), 호는 죽타인데 강희(康熙) 시에 박학굉사(博學宏詞)에 시(試)하여 검토(檢討)에 제수되었으며, 고학(古學)에 사력(肆力)하여 글이라면 안 본 것이 없었으며 시문(詩文)이 승(勝)하고 금석 고증의 학(學)도 겸하였다. 8만 권의 서(書)를 저술하였으며 《폭서정전집(曝書亭全集)》이 있음.
[주D-040]산성(散聖) : 지위가 없이 세상에 떠돌며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을 이름인데 말하자면 출가한 포대화상(布袋和尙)과도 같음.
[주D-041]병체(騈體) : 사륙(四六) 대우(對偶)의 문(文)을 이름.
[주D-042]혼·계(惲桂) : 혼은 청 무진인(武進人)으로 이름은 경(敬), 자는 자거(子居), 호는 간당(簡堂)이며 고문을 전치(專治)하여 소순(蘇洵)과 더불어 서로 상하(上下)하며 법가(法家)의 언(言)에 가까웠다. 세상에서 양호파(陽湖派)라 칭함. 계는 계복(桂馥)인데 청 곡부인(曲阜人)으로 자는 동훼(冬卉), 호는 미곡(未谷)이요, 건륭 진사로 운남(雲南) 영평지현(永平知縣)에 데두되었다. 소학(小學) 및 금석, 전각에 정(精)했으며 일찍이 《설문(說文)》과 제경(諸經)의 의(義)를 취해 서로 소증(疏證)하여《설문해자의증(說文解字義證)》을 찬집(撰輯)하였음.
[주D-043]남천이우(南遷二友) : 송 소식(蘇軾)이 영해(寧海) 간에 귀양가 있던 시절에 도연명(陶淵明)·유 자후(柳子厚) 두 집(集)을 가장 좋아하여 남천이우라 일렀음. 《老學菴筆記 九》
[주D-044]해봉(海峯) : 유대괴(劉大槐)인데 청 동성인(桐城人)으로, 자는 경남(耕南), 호는 해봉, 고문(古文)은 장자(莊子)를 희학(喜學)하고 더욱 창려(昌黎)를 역추(力追)하였음. 요희전(姚姬傳)이 그를 종유하여 드디어 동성파의 지목이 있었음.
[주D-045]왕척보(王惕甫)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기손(芑孫), 자는 염풍(念豐), 호는 척보이며 또 호는 능가산인(楞伽山人)이다. 공시(工詩) 선서(善書)하여 《연아당시문집(淵雅堂時文集)》의 저술을 남겼음.
[주D-046]원자재(袁子才) : 청 전당인(錢塘人)인데 이름은 매(枚), 자는 자재, 호는 간재(簡齋)요, 건륭 진사로 강녕(江寧)에 출재(出宰)하다가 소년(少年)으로 기관(棄官)하고 강녕성 서쪽에 수원(隨園)을 복축(卜築)하여 음영 저작(吟詠著作)으로 낙을 삼았다. 저술로는 《소창산방시문집(小倉山房詩文集)》 및 필기(筆記) 등이 있음.
[주D-047]진소현(秦小峴) : 청 무석인(無錫人)으로 이름은 영(瀛), 자는 능창(凌滄), 일자는 소현이며, 건륭 거인(擧人)으로 가경(嘉慶) 때에 관은 형부 우시랑(刑部右侍郞)에 이르렀다. 시와 고문이 다 고인의 품격을 역추(力追)하여 능히 자득(自得)한 바 있었으며 저술로는 《소현산인시문집(小峴山人詩文集)》이 있음.
[주D-048]조미신(趙味辛) : 청 무진인(武進人)인데 이름은 회옥(懷玉), 자는 억손(億孫), 일자는 미신이며 건륭 거인으로 관은 등주지부(登州知府)이다. 호학 심사(好學深思)하고 공시(工詩)하여 동리(同里)의 손성연(孫星衍)·홍양길(洪良吉)·황경인(黃景仁)과 더불어 손홍황조(孫洪黃趙)라 병칭(並稱) 되었으며, 저술로는 《역유생재집(亦有生齋集)》이 있음.
[주D-049]증남풍(曾南豐) : 송 남풍인(南豐人)으로 이름은 공(鞏), 자는 자고(子固)임. 가우(嘉祐) 진사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발탁되었다. 경술(經術)에 깊고 문장에 공(工)하여 저술로는 《원풍유고(元豐類稿)》가 있음. 당송팔가(唐宋八家)의 한 사람임. 또한 《전국책(戰國策)》에 주(注)하고 고문전각(古文篆刻)을 모아 《금석록(金石錄)》을 만든 바 있음.
[주D-050]서중거(徐仲車) : 송 산양인(山陽人)으로 이름은 적(積), 자는 중거임. 3세에 부친이 죽었는데 부친의 이름이 석(石)이었으므로 종신토록 석기(石器)를 쓰지 아니하였으며, 길을 걷다가도 돌을 만나면 밟지 않았다. 정화(政和) 중에 시(諡)를 내려 절효처사(節孝處士)라 하였으며 그의 한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절효어록(節孝語錄)》과 《절효집》이 있음.
[주D-051]진형중(陳瑩中) : 송인(宋人)인데 이름은 관(瓘), 자는 형중, 호는 요옹(了翁)임. 학문이 있어 진사 갑과(進士甲科)에 올랐다. 간관(諫官)이 되었을 때 채경(蔡京)을 써서는 안된다고 극언(極言)하였으므로 채경이 깊이 유감을 품어 누차 귀양을 갔었는데 사면을 받아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학자가 요재선생(了齋先生)이라 칭했다. 저술로는 《요옹역설(了翁易說)》·《존요집(尊堯集)》이 있음.
[주D-052]맹동야(孟東野) : 당 호주인(湖州人)인데 이름은 교(郊), 자는 동야이며 숭산(嵩山)에 은거하였다. 천성이 경개(耿介)하여 해합(諧合)이 적었는데 한유(韓愈)는 한번 보고 망형(忘形)의 벗이 되었음. 나이 50에 진사제(進士第)를 얻어 평양현(平陽縣)에 조용(調用)되었음. 시체(詩體)는 철마(鐵馬)를 깊이 몰아 층빙(層氷)을 밟아 깨뜨리는 것 같았고 문체(文體)는 춘산(春山)의 고죽(孤竹)에 두우(杜宇)가 피를 흘리며 우는 것 같았음.
[주D-053]촌심(寸心)이 천고(千古) : 두보의 시에 " 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라는 글귀가 있음.
[주D-054]노동(盧仝) : 당인(唐人)으로 누거 부중(累擧不中)하여 동도(東都)에 살면서 스스로 옥천자(玉川子)라 하였다. 한유가 하남윤(河南尹)이 되어 그의 시를 사랑하여 후례(厚禮)를 올리고 시를 지어 보냈음.
[주D-055]정상(頂上)에……자 : 불가어로서 정문상유안(頂門上有眼)의 약칭임. 마해수라천(摩醯首羅天)에 삼목(三目)이 있는데 그 수(竪)의 한 척안(隻眼)은 정문안이라 이르며 그 눈은 가장 상안(常眼)보다 뛰어나다. 《벽암(碧巖)》 35칙 수시(垂示)에 若不是頂門上有眼 肘臂下有符往往當頭蹉過"라 하였음.
[주D-056]서산 : 오자서(伍子胥)는 춘추시대 초인(楚人)인데 이름은 원(員)이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섬겨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무너뜨리고 패업(霸業)을 이루었는데 뒤에 태재(太宰) 비(嚭)의 참소를 듣고 자서에게 칼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다. 서산은 자서의 묘(廟)가 있는 곳임.
[주D-057]멱라 : 초 나라 굴원(屈原)이 처음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참소를 입고 상강(湘江)으로 귀양가서 이소(離騷)·구가(九歌)를 지어 임금의 회오(悔悟)를 기다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음.
[주D-058]유자산(庾子山) : 남북조(南北朝) 신야인(新野人)으로 이름은 신(信), 자는 자산이며, 군서(群書)를 박람하고 문장의 이조(摛藻)가 염려(艶麗)하여 서릉(徐陵)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서유체(徐庾體)라 일컬었음. 양 원제(梁元帝) 때에 우위장군(右衛將軍)을 지냈으며 누천(累遷)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므로 세상에서는 유개부(庾開府)라 칭한다. 유신은 직위가 비록 현달했지만 행상 향관(鄕關)의 생각이 있어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었다. 그 병우(騈偶)의 문(文)은 실로 육조(六朝)의 집대성이었음.
[주D-059]하수부(何水部) : 남조(南朝) 양(梁) 동해(東海) 섬인(郯人)으로 이름은 손(遜), 자는 중언(仲言)임. 8세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약관(弱冠)에 범운(范雲)과 더불어 망년(忘年)의 교호(交好)를 맺었다. 관(官)은 상서수부랑(尙書水部郞)에 이르고 문(文)은 유효작(劉孝綽)과 더불어 제명하여 당시에 하류(何劉)라 칭하였음.
[주D-060]진윤천(陳允倩) : 청 전당인(錢塘人)으로 이름은 조명(祚明), 자는 윤천임. 박학하여 속문(屬文)을 잘 하였음. 생활이 가난하여 경사(京師)에서 용서(傭書)하다가 객관(客館)에서 죽었으며 저술로는 《계류산인집(稽留山人集)》이 있는데 《폐추집(敝帚集)》이라고도 함.
[주D-061]산중의 재상 : 도홍경(陶弘景)은 남북조 때 말릉인(秣陵人)으로 자는 통명(通明)인데 제고제(齊高帝) 때에 일찍이 제왕(諸王)의 시독(侍讀)이 되었다가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숨어 화양은거(華陽隱居)라 자호(自號)하고 늦게는 화양진일(華陽眞逸), 또는 화양진인(華陽眞人)이라 호하였다. 국가에서 매양 큰 일이 있으면 찾아와서 자문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산중 재상이라 불렀다. 그는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 比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이라 하였음.
[주D-062]장심여(蔣心餘) : 청 연산인(鉛山人)으로 이름은 사전(士銓), 자는 심여인데, 건륭 진사로 관은 편수(編修)이며 시와 고문사(古文辭)에 공(工)하여 성명(盛名)을 짊어졌다. 그가 찬(撰)한 구종곡(九種曲)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음.
[주D-063]미사(微詞) : 《공양전(公羊傳)》 정공(定公) 원년(元年)에 "定哀多微詞"라는 대문이 있는데 이는 존자(尊者)를 위하여 휘(諱)하며 그 과실을 현저하게 드러내고자 아니하여 살짝 그 뜻만 보인 것임.
[주D-064]강엄(江淹) : 남조(南朝) 양(梁) 고성인(考城人)으로 자는 문통(文通)이요, 관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젊어서 문장으로써 이름이 났는데 말년에는 재사(才思)가 미퇴(微退)하여 시문(詩文)에 가구(佳句)가 없으니 시인(時人)이 재진(才盡)이라 일렀음.
[주D-065]노련(老蓮) : 진홍수(陳洪綬)의 별호인데 명말(明末) 제기인(諸曁人)으로 자는 장후(章侯)임. 명경(明經)으로써 등제(登第)하였으나 벼슬하지 않다가 숭정(崇禎) 간에 불러들여 공봉(供奉)을 삼았다. 산수(山水)·인물을 잘 그려 용면(龍眠)·오흥(吳興)의 묘를 겸했고 설색(設色)은 도자(道子)를 배워 역량과 기국이 구영(仇英)·당인(唐寅)의 위에 있었으며 당시에 삼백 년 내에는 이런 필묵이 없다고 일렀다.
[주D-066]피일휴(皮日休) : 당 양양인(襄陽人)으로 자는 습미(襲美)요, 문장에 능하여 진사에 올랐으며 맹호연(孟浩然)과 더불어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여 스스로 취사(醉士)라 호하였고 또 주민(酒民)이라 하였다. 육구몽(陸龜蒙)과 벗이 되어 《송릉창화시집(松陵唱和詩集)》 이 있음
[주D-067]육구몽(陸龜蒙) : 당 장흥인(長興人)으로 자는 노망(魯望)이요, 젊어서부터 고방(高放)하여 송강(松江) 보리(甫里)에 살면서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며 혹은 보리 선생(甫里先生)이라 하였다. 뒤에 고사(高士)로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음.
[주D-068]심귀우(沈歸愚)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덕잠(德潛), 호는 귀우이며, 건륭 진사로서 늦게 예부 시랑에 발탁되었는데 연력(年力)이 쇠약하므로 고귀(告歸)를 허락하고 원함(原銜)으로 녹을 받게 하였다. 졸년(卒年)이 97이며 시호는 문각(文慤)임.
[주D-069]심 진사(沈進士) 두영(斗永) : 청송인(靑松人)인데 전남 옥과(玉果) 출신으로 시(詩)에 공(工)하여 일세(一世)의 교유(交遊)가 모두 현사대부(賢士大夫)였었고, 특히 김이양(金履陽)과는 망형(忘形)의 교분이었음.
[주D-070]위관(衛瓘) : 진(晉) 안읍인(安邑人)으로 자는 백옥(伯玉), 관은 상서령(尙書令)이며 상서랑(尙書郞) 색정(索靖)과 더불어 때를 같이하여 초서를 잘 쓰니 시인(時人)이 이름하여 일대이묘(一臺二妙)라 하였음.
[주D-071]지영(智永) : 남북조 진(陳)의 영흔사(永欣寺) 승(僧)으로 속성(俗姓)은 왕(王)이요, 회계인(會稽人)인데 호는 영선사(永禪師)라 했다. 선서(善書)하여 능히 제체(諸體)를 겸했고 초서는 더욱 승(勝)하여 임서(臨書)한 30년에 진초 천문(眞草千文) 8백여 본을 만들었음.
[주D-072]최열(崔悅) : 후조(後趙) 동무성인(東武城人)으로 자는 도유(道儒)인데 석호(石虎)에게 벼슬하여 벼슬은 사도우장사(司徒右長史)이며 재학(才學)으로 일컬음을 받고 글씨를 잘 써 범양(范陽) 노침(盧湛)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였는데 침(湛)은 종유(鍾繇)을 본받고 열(悅)은 위관(衛瓘)을 본받았음.
[주D-073]노침(盧湛) : 제8권 주 72) 참조.
[주D-074]고준(高遵) : 후위(後魏) 수인(蓨人)으로 자는 세례(世禮)요, 문사(文史)를 섭렵하여 자못 필찰(筆札)에 공(工)했으며 제주자사(濟州刺史)에 올랐음.
[주D-075]심복(沈馥) : 북위 선무제(宣武帝) 때 사람으로 서(書)에 공했다. 후위(後魏) 경명(景明) 3년에 일찍이 정정비(定鼎碑)를 정서하였는데 일명은 어사비(御射碑)라고도 함.
[주D-076]요원표(姚元標) : 북조 제(齊) 위군인(魏郡人)으로 관은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이르렀으며 공서(工書)로써 이름이 당시에 알려졌음.
[주D-077]조문심(趙文深) : 북주(北周) 완인(宛人)으로 자는 덕본(德本)임. 어려서 예해(隷楷)를 배워 11세 때에 글씨를 위제(魏帝)에게 올렸는데 자못 종·왕(鍾王)의 법칙이 있었음.
[주D-078]정도호(丁道護) : 수인(隋人)으로 관은 양주제주종사(襄州祭酒從事)에 이르렀으며 정서(正書)를 잘 써 후위(後魏)의 유법을 겸했다. 수·당(隋唐)의 즈음에 선서(善書)하는 자가 많았으나 다 한 법에서 나왔는데 도호의 얻은 바가 가장 많았다. 그가 쓴 양양(襄陽) 계법흥국사비(啓法興國寺碑)가 가장 정(精)하여 우세남(虞世南) · 구양순(歐陽詢)의 소자출(所自出)이 되었음.
[주D-079]채옹(蔡邕) : 동한 진류인(陳留人)으로 자는 백개(伯喈)이며, 영제(靈帝) 때에 낭중(郞中)에 제수되어 양사(楊賜) 등과 더불어 육경(六經)의 문자를 주정(奏定)하여 비(碑)를 태학문(太學門) 밖에 세웠는데 이윽고 사건이 생겨 면관(免官)되었다. 동탁(董卓)이 불러 좨주(祭酒)를 삼아 누천(累遷)하여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렀는데 뒤에 탁당(卓黨)으로 지목되어 옥중에서 죽었음.
[주D-080]위탄(韋誕) : 삼국 시대 위(魏) 경조인(京兆人)으로 자는 중장(仲將)인데 문재(文才)가 있어 사장(辭章)을 잘 하고 또 선서(善書)로 이름났다. 태화(太和) 중에 능서(能書)로써 시중(侍中)에 보직되어 관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마쳤으며 위씨(魏氏)의 보기 명제(寶器銘題)는 다 그가 쓴 것임.
[주D-081]한단순(邯鄲淳) : 삼국 시대 위(魏) 영천인(穎川人)으로 자는 자숙(子叔)이요, 박학유재(博學有才)하여 창아충전(蒼雅蟲篆)을 잘 썼음.
[주D-082]위개(衛凱) : 삼국 위 안읍인(安邑人)으로 자는 백유(伯儒)요. 젊어서부터 재학(才學)으로써 칭도(稱道)되었다. 한말(漢末)에 사공연(司空掾)이 되어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며 위국(魏國)이 건립되어서는 시중(侍中)에 제수되어 왕찬(王粲)과 더불어 제도(制度)를 맡았다. 그는 문장으로 현달하여 고문을 좋아하며 조전예초(鳥篆隷草)를 잘 하지 못한 것이 없었음.
[주D-083]장지(張芝) : 후한 서가(書家)인데 주천인(酒泉人)으로 자는 백영(伯英)이요, 초서를 잘 썼다. 임지학서(臨池學書)하자 못물이 다 검어졌으며 세상에서 초성(草聖)이라 일컬음.
[주D-084]두도(杜度) : 후한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度)임. 초서에 공하였고 그 법을 최원(崔瑗)·최 실(崔實) 부자가 이어받았음.
[주D-085]왕허주(王虛舟) : 청 금단인(金壇人)으로 자는 약림(若霖), 호는 허주, 또는 양상산인(良常山人)이라 한다. 강희 진사로 관은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에 이르고 서화에 공하였음. 저술로는 《우공보(禹貢譜)》·《학용본의(學庸本義)》·《정주격물법(程朱格物法)》·《순화각첩고정(淳化閣帖考正)》 등이 있음.
[주D-086]오봉루(五鳳樓) : 《명의고(名義考)》에 "양 태조(梁太祖)가 오봉루를 건립했는데 주한(周翰)이 이른바. 땅에서 백 길을 솟아 하늘의 반공(半空)에 있어 다섯 봉이 날개를 쳐든다는 것과 같다." 하였음.
[주D-087]옹유(甕牖)와 승추(繩樞) : 깨진 항아리 입으로 문을 만들고 노끈으로 돌조구를 동인다는 것으로 극히 가난한 집을 이름.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에 "陳涉甕牖繩樞之子"라는 대문이 보임.
[주D-088]환중(環中) : 공허를 비유한 말임.《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이라는 대문이 있고, 그 주(注)에 "시비가 반복하여 서로 다함이 없으므로 환(環)이라 이른다. 환중은 공(空)이니 지금 시비로써 고리를 삼아 그 중(中)을 얻은 자는 시도 없고 비도 없다." 하였음.
[주D-089]손건례(孫虔禮) : 당 진류인(陳留人)으로 이름은 과정(過庭), 관은 솔부녹사참군(率府錄事參軍)에 이르렀으며 서(書)에 공하여 일찍이 서론(書論)을 저술했는데 절묘하여 그 지취(旨趣)를 다했으니, 곧 서보(書譜)이다. 원서(原書)는 6편인데 지금 전하는 진적(眞蹟)은 겨우 그 총서(總序)의 문(文)만 있고 전서(全書)는 이미 없어졌음.
[주D-090]양소사(楊少師) : 오대(五代) 주(周)의 화음인(華陰人)으로 이름은 응식(凝式), 자는 경도(景度)임. 외모는 못생겼으나 정신이 영오(穎悟)하여 문조(文藻)가 부유함으로 당시 사람들이 중히 여겼다. 후한(後漢)에서 소부(少傅)·소사(少師)를 지냈으므로 세상이 양 소사라 칭한다. 시가(詩歌)에 장(長)하고 더욱 필찰(筆札)을 잘 하였으며 서법은 안진경(顔眞卿) 이후로는 따라갈 자가 없었다. 황정견(黃庭堅)은 그 서(書)가 산승입성(散僧入聖)과 같다고 일렀으며, 조맹부(趙孟頫)는 그 서가 견지(見知)의 밖에 벗어났다고 일렀다. 구화첩(韭花帖) 일종은 더욱 유명함.
[주D-091]정도소(鄭道昭) : 북위(北魏) 형양인(滎陽人)으로 출사(出仕)하여 광주자사(光州刺史)가 되었으며 스스로 중악 선생(中岳先生)이라 칭하였음. 서(書)에 공하여 처음에는 심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청(淸) 가·도(嘉道) 간에 이르러 운봉산(雲峯山)의 여러 석각(石刻)이 발견됨에 따라 포세신(包世臣)·장기(張琦)·오희재(吳熙載) 등이 극히 추중(推重)하여 마침내 북비(北碑)를 익히는 자의 종(宗)하는 바가 되었음.
[주D-092]초산명(焦山銘) : 초산정명(焦山鼎銘)을 이름.
[주D-093]왕자유(王子猷) : 진인(晉人)으로 이름은 휘지(徽之), 자는 자유이며, 희지(羲之)의 아들이다. 산음(山陰)에 살면서 하루는 밤눈이 개자 달빛을 타고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가 그 문앞에 당도하여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는데 어찌 꼭 만나보아야 하느냐."고 대답하였다.
[주D-094]용매(龍媒) : 준마(駿馬)의 이칭임. 한 무제(漢武帝)의 천마가(天馬歌)에 "天馬徠兮龍之媒"라 하였음. 당(唐)에는 비황(飛黃)·길량(吉良)·용매·도여(騊駼)·쾌재(駃騠)·천원(天苑) 등 육한(六閑)이 있는데 모두 천자의 말을 기르는 곳임.
[주D-095]섭운(籋雲) : 섭(籋)은 섭(躡)과 같음. 사장(謝莊)의 무마부(舞馬賦)에 "蘊籋雲之銳景 戢追電之逸足"이라 하였음.
[주D-096]육좌(衄挫) : 육(衄)은 절(折)로서 꺾는다는 뜻이고 좌(挫)도 같은 뜻임. 서법의 술어임.
[주D-097]발등법(撥鐙法) : 제7권 주 328) 참조.
[주D-098]분항(分行)·포백(布白) : 서법에 관한 말인데 분항은 줄을 나누는 것이요, 포백은 곧 그 공백처와 착묵처(着墨處)를 포치(布置)하여 소밀(疏密)이 상간(相間)하게 하는 것임.
[주D-099]황백사(黃伯思) : 송인(宋人)으로 자는 장예(長睿), 별자는 소빈(宵賓)이며, 운림자(雲林子)라 자호하였다. 원부(元符) 진사로 비서랑(祕書郞)에 제수되었으며 책부(冊府)의 장서를 종관(縱觀)하여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다. 천성이 고문 기자(古文奇字)를 좋아하여 이기관지(彝器款識)를 모두 능히 변증하였으며, 육경(六經) 및 자사 백가(子史百家)를 정구(精究)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시문에도 공(工)했다. 글씨로는 전(篆)·예(隷)·행(行)·초(草)·비백(飛白)이 다 묘절(妙絶)했다. 저술로는《동관여론(東觀餘論)》 및 문집이 있음.
[주D-100]부서혁봉(腐鼠嚇鳳) : 《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위에 자세히 보임.
[주D-101]비이 : 범이 성을 내어 갈기털이 꼿꼿하게 서는 모양을 말한 것임.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孟毅髬髴"의 구가 있음.
[주D-102]책비(責備) : 책현자비(責賢者備)의 준말로서 어진 자에게는 항상 구비하기를 책한다는 뜻임. 춘추(春秋)의 법은 항상 현자에게 책비하였으므로 나온 말임.
[주D-103]훈유(薰蕕) : 《좌전(左傳)》 희공(僖公) 4년에 "一薰一蕕 十年尙猶有臭"라는 대문이 있는데, 훈은 향초요 유는 취초(臭草)로서 두 가지를 한 곳에 모아 두면 아무리 십 년이 가도 오히려 취기가 있다. 그러니 선(善)은 소멸되기 쉽고 악은 제거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가어(家語)》 치사(致思)에 "薰蕕不同器而藏"이라 하였음.
[주D-104]조미숙(晁美叔) : 송인으로 이름은 단언(端彦), 자는 미숙이며 장돈(章惇)과 더불어 동생(同生)하여 동방급제(同榜及第)이고 또 관(館)의 직을 함께 지냈다. 그래서 항상 서로 삼동(三同)이라 불렀다. 소성(紹聖) 초에 장돈이 입상(入相)하자 단언이 그의 소위를 보고 힘써 간하다가 쫓겨나서 협수(陜守)가 되었다. 문장과 서법이 조야(朝野)의 종상(宗尙)하는 바 되었음.
[주D-105]이소온(李少溫) : 당 조군인(趙郡人)으로 이름은 양빙(陽氷), 자는 소온이며 건원(乾元)간에 진운령(縉雲令)이 되었다가 뒤에 당도령(當塗令)으로 옮겼는데 전서를 잘 썼음. 서원여(舒元輿)는 그 전서를 이사(李斯)에게 내리지 않는다고 일렀다. 지금도 그 유적이 전해 옴.
[주D-106]윤백하(尹白下) : 이름은 순(淳),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인데 해평인(海平人)으로 이조 판서 유(游)의 제(弟)이다. 숙종(肅宗) 계사년에 문과에 올라 관은 이조 판서에 이르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경신년에 평안 감사로 임소(任所)에서 졸했다. 선서(善書)하여 절예(絶藝)를 이루었으며 후학을 계발한 공이 석봉(石峯)·안평(安平)에 비할 바 아니었음. 원교(圓嶠)가 그 문하로서 사문(師門)의 진수를 얻었다 함.
[주D-107]박(璞)을……였던가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마원이 유소시(幼少時)에 큰 뜻이 있어 일찍이 제시(齊詩)를 배우면서도 능히 장구(章句)에 뜻이 가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형 황(況)을 하직하고 변군(邊郡)으로 나가서 목축(牧畜)을 하고자 하니, 황은 말하기를 '너는 대재(大才)라 마땅히 만성(晩成)할 것이니 양장(良匠)은 사람에게 박(璞)으로써 보이지 않는다. 너의 소호(所好)를 따르라.' 했다." 하였음.
[주D-108]고족(高足) : 품학(品學)이 넉넉한 문인(門人)을 이름.《세설(世說)》 문학(文學)에 "鄭玄在馬融門下 三年不得相見 高足弟子傳授而已"라 하였음.
[주D-109]강표암(姜豹庵) : 이름은 세황(世晃),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이요, 진주인(晉州人)으로 일찍이 부사(副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갔었는데 청조(淸朝) 사람들이 세황의 서화(書畫)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청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였다. 세황은 소기(小技)를 자랑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마지못해 몇 사람에게만 응하고 말았다. 일강관(日講官) 석암(石菴) 유용(劉鏞)·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이 글씨로 천하에 유명하였는데 세황의 글씨를 보고 천골개장(天骨開張)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음.
[주D-110]상세창(桑世昌) : 송 회해인(淮海人)으로 천태(天台)에 세거(世居)하였으며 육유(陸游)의 생(甥)이다. 저술로는《난정고(蘭亭考)》가 있으며《회문유취(回文類聚)》를 편집하였음.
[주D-111]유송(兪松) : 송 전당인(錢塘人)으로 자는 수옹(壽翁), 호는 오산(吳山)이며, 관은 승의랑(承議郞)이다. 저술로《난정속고(蘭亭續考)》가 있음.
[주D-112]조불흥(曹不興) : 삼국 시대 오(吳)의 오흥인(吳興人)인데 황무간(黃武間)에 화명(畫名)으로써 일시에 관절(冠絶)하였음. 이때 오 나라에 팔절(八絶)이 있었는데 불흥이 그 중 하나에 참여했으며, 그 화룡(畫龍)이 더욱 묘하다고 함.
[주D-113]장승유(張僧繇) : 남북조 양(梁)의 화가인데 오인(吳人)으로 관은 우군장군(右軍將軍)·오흥태수(吳興太守)에 이르렀으며, 산수와 불상을 잘 그렸다. 또 일찍이 네 용을 그리고 점정(點睛)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굳이 점정하기를 청하여 점정하자 점 찍힌 두 마리 용은 벽을 부수고 날아가고 점 찍지 않은 것은 그대로 있었다 함.
[주D-114]오도현(吳道玄) : 오도자(吳道子)인데 당 양적인(陽翟人)으로 회사(繪事)를 잘하여 필법이 초묘(超妙)하니 당시에 화성(畫聖)이라 칭하였다. 현종(玄宗) 때에 불러들여 공봉(供奉)이 되었으며, 또 불상을 잘 그렸음.
[주D-115]연문귀(燕文貴) : 송 오흥인(吳興人)으로 도화원(圖畫院)에 들어왔는데 인물·산수를 잘하여 세쇄 청윤(細碎淸潤)하여 일가(一家)를 자성(自成)하였음.
[주D-116]역원길(易元吉) : 송 장사인(長沙人)으로 자는 경지(慶之), 사생(寫生)을 잘하여 집 후원에 원포(園圃)를 쌓고 물새와 산 짐승을 순양(馴養)하여 그 동정을 엿보아 화사(畫思)의 바탕을 삼았다. 더욱이 노루와 원숭이를 잘 그려 식자(識者)는 서희(徐熙) 이후 일인이라 일렀음.
[주D-117]심석전(沈石田) : 명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주(周), 자는 계남(啓南), 호는 석전이며,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문(文)은 좌씨(左氏)를 배우고 시는 백거이·소식을 배우고 글씨는 황정견을 배웠다. 더욱이 화(畫)에 공하여 당인(唐寅)·문징명(文徵明)·구영(仇英)과 더불어 병칭하여 명의 사가(四家)가 되었음.
[주D-118]임조(林藻) : 당인으로 피(披)의 아들인데 자는 위건(緯乾)임. 소싯적부터 기지(奇志)를 품어 농(農)이 되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구양첨(歐陽詹)과 더불어 문학에 각의(刻意)하여 굉사과(宏詞科)에 탁제(擢第)하였음. 관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임.
[주D-119]소릉(昭陵)에서……옥갑(玉匣) : 소릉은 당 태종(唐太宗)의 능임. 태종이 평소에 왕희지의 진적(眞跡)을 몹시 아껴 차마 손에서 놓지 못했는데, 그 뒤 고종(高宗)이 그것을 옥갑에 넣어 소릉에 저장하였음.
[주D-120]가사도(賈似道) : 송 태주인(台州人)인데 이종(理宗) 때에 자기 누나가 귀비(貴妃)로 되는 바람에 누진(累進)하여 관은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으며 추밀사(樞密使)를 겸했다. 원병(元兵)이 건강(建康)에 육박하자 송군(宋軍)이 자주 패하니, 진의중(陳宜中) 등이 사도의 죄를 탄핵하여 내쳤는데 도중에서 피살되고 말았음.
[주D-121]양흔(羊欣) : 진(晉) 남성인(南城人)으로 유소시(幼少時)부터 정묵(靖黙)하여 용지(容止)가 아름답고 언소(言笑)를 잘 하였으며, 경적을 박람하고 더욱 예서(隷書)에 장(長)하였음. 흔의 나이 12세 때에 왕헌지(王獻之)가 오흥태수(吳興太守)가 되어 몹시 지애(知愛)하였다. 그 서법은 더욱 당송인(唐宋人)의 일컫는 바가 되었음.
[주D-122]도 은거(陶隱居) : 도홍경(陶弘景)을 말함. 제8권 주 61) 참조.
[주D-123]건초척(建初尺) : 건초는 한 장제(漢章帝) 연호인데 그 당시 통용하던 동척(銅尺)을 말함. 완당이 옹성원(翁星源)으로부터 건초척 탁본을 기증받은 바 있음.
[주D-124]야율초재전(耶律楚材傳) : 원(元)의 명신으로 자는 진경(晉卿)이요, 요동단왕(遼東丹王) 돌욕(突欲)의 후손인데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원 세조는 군국(軍國)의 대사를 맡길 만하다고 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몽고의 누풍(陋風)을 다 개혁하였으며, 원 나라의 입국 규모(立國規模)는 다 초재의 소정(所定)이었음.
[주D-125]각단(角端) : 짐승 이름임.《송서(宋書)》 부서지(符瑞志)에 "각단은 하루 1만 8천 리를 가며 또 사예(四裔)의 언어를 이해한다." 하였고,《원사(元史)》에는 "원 태조(元太祖)가 동인도(東印度)에 이르러 각단이 능히 말하는 것을 보았다." 하였음.
[주D-126]《담연집(湛然集)》 : 야율초재가 저술한 문집임.
[주D-002]황도(黃道) : 천문학 용어임. 천구(天球) 상의 한 대권(大圈)이 1년 내에 지구상에서 보이는 태양이 지나가는 길이 되어 곧 지구 궤도의 평면이 천구와 서로 어울리는 선(線)이다. 지구 궤도의 평면을 황도면이라 하고, 적도면과 비스듬히 어울려 23도 27분의 각(角)을 이루면 황적대거(黃赤大距)라 하고, 또 천구의 중심을 통과하여 황도면의 직선과 수직이 되면 황도축(黃道軸)이라 하고, 이 축이 천구의 점(點)과 어울리면 황도의 극(極)이라 하는데 생략하여 황극이라 칭함.
[주D-003]백도(白道) : 달이 다니는 길로서 황적도와 더불어 비스듬히 어울리는데 오직 춘분·추분 절서에는 적도와 교점(交點)을 이룸.
[주D-004]궁(宮) : 역법(曆法)에 30도를 궁으로 삼는데 곧 원주(圓周) 12분의 1임.
[주D-005]생명(生明) : 재생명(哉生明)인데 초사흘의 달을 말함. 《서경(書經)》 무성(武成)에 "厥四月 哉生明"이 있음.
[주D-006]생백(生魄) : 재생백(哉生魄)인데 16일로서 이른바 달의 기망(旣望)을 말함. 재는 시(始)의 뜻임.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公以八月哉生魄庚子"가 있음.
[주D-007]수시(授時) : 옛날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책력을 만들어 민간에 반포하여 농시(農時)를 알려 주었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라 하였음.
[주D-008]삭허(朔虛) : 《서경(書經)》 요전(堯典) 기삼백(期三百)의 채전(蔡傳)에 나와 있음.
[주D-009]이십팔수(二十八宿) : 고대의 천문학에는 주천(周天)의 성(星)을 나누어 이십팔수를 만들어 사방에 각기 칠수(七宿)가 있으니, 동방은 각(角)·항(亢)·저(氐)·방(房)·심(心)·미(尾)·기(箕), 북방은 두(斗)·우(牛)·여(女)·허(虛)·위(危)·실(室)·벽(壁), 서방은 규(奎)·누(婁)·위(胃)·묘(昴)·필(畢)·자(觜)·삼(參), 남방는 정(井)·귀(鬼)·유(柳)·성(星)·장(張)·익(翼)·진(軫)으로 되었음.
[주D-010]빙상씨(憑相氏) : 관명(官名)인데 《주례》춘관(春官)의 속(屬)임. 《주례(周禮)》 춘관(春官)빙상씨의 주에 "빙은 승(乘)이요, 상은 시(視)인데 대대로 고대(高臺)에 올라 천문의 차서를 살펴본다." 하였음.
[주D-011]건(建) : 두성(斗星)에 가까이 위치한 별자리임.
[주D-012]호(弧) : 별 이름인데 낭성(狼星)의 동부에 있어 하늘의 활이라 이름.
[주D-013]벌(罰)·낭(狼) : 벌은 벌삼성(罰三星)을 말함이요, 낭은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其東有大星曰狼"이라 하였음.
[주D-014]추보(推步) : 일월(日月) 오성(五星)의 도(度)와 혼단(昏旦) 절기(節氣)의 차(差)를 추측함을 이름. 《後漢書 注》. 지금은 의기(儀器) 및 산술을 이용하여 천상(天象)을 고측(考測)하는 것을 추보라 이름.
[주D-015]태일(太一) : 《예(禮)》 예운(禮運)에 "夫禮必本於太一"이라는 대문이 있고, 그 소(疏)에 "천지가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의 혼돈의 원기를 이름이다. 극히 큰 것을 천(天)이라 하고 나누어지지 않은 것을 일(一)이라 하는데 그 기(氣)가 극히 크면서도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태일이라 이른다." 하였음.
[주D-016]육 선공(陸宣公) : 육지(陸贄)는 당 가흥인(嘉興人)으로 자는 경여(敬輿), 시호는 선공이다. 덕종(德宗) 때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조정에 있어 논간(論諫)함에 말이 개절(剴切)하여 그 주의(奏議)가 후세에서 존봉(尊奉)하는 바 되었음.
[주D-017]용각(龍角)을 연하고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杓携龍角"이란 말이 있고 그 집해(集解)에 "맹강(孟康)은 말하기를 '표(杓)는 북두의 표요, 용각은 동방의 별이며, 휴(携)는 연한다는 말이다." 하였음.
[주D-018]은(殷)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집해(集解)에 "형(衡)은 남두(南斗)의 중앙이요, 은(殷)은 중(中)의 뜻이다." 하였음.
[주D-019]대광(戴匡) : 광(匡)은 해갑(蟹甲)인데 형상이 광(匡)과 같아서 대광이라 함.
[주D-020]삼태(三能) : 능(能)은 태(台)와 통하므로 여기서는 능을 태로 읽음.
[주D-021]경방(景方) : 경은 본디 병(丙)인데 당시대에 어휘(御諱)로서 글자를 바꾸어 경이 되었음.
[주D-022]《건착도(乾鑿度)》 : 서명인데 역위(易緯) 8종의 제이(第二)이다. 구본(舊本)에는 정강성(鄭康成)의 주라고 칭했는데 당(唐) 이전에는 설경 제가(說經諸家)가 항상 서로 인용하였음. 그 태을행구궁법(太乙行九宮法)은 바로 후세의 낙서(洛書)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주D-023]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 : 《의례(儀禮)》의 편명인데 특생은 큰 제사 때 쓰는 소 온 마리와 돼지 온 마리를 말함.
[주D-024]교특생(郊特牲) : 《예기》의 편명인데 교는 제천(祭天)의 이름이며 제천에 있어서는 붉은 송아지 온 마리를 쓴다. 그러므로 특생이라 한 것임.
[주D-025]직제(直祭)에는……축(祝)한다 :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보이는 대문으로 정주(鄭注)에 "직제의 직(直)은 정(正)인데 제(祭)는 숙(熟)을 정(正)으로 삼는다." 하였음.
[주D-026]훈호처창(焄蒿悽愴) : 《예(禮)》 제의(祭儀)에 나오는데 그 주(注)에 "훈(焄)은 향취이고 호는 기(氣)가 증출(蒸出)하는 모양을 이름이다." 하였으며, 소(疏)에는 "이 향취가 뭉게뭉게 위로 솟아서 그 기운이 호연(蒿然)함을 이름이다." 하였음.
[주D-027]소명(昭明) : 《예(禮)》 제의(祭儀)에 나타난 훈호처창(焄蒿悽愴)의 윗 대문에 "其氣發揚于上爲昭明"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주에 "發揚于上 爲昭明者 言此升上 爲神靈光明也"라 하였음.
[주D-028]강백석(姜白石) : 이름은 기(夔), 자는 요장(堯章)인데 송(宋) 파양인(鄱陽人)으로 무강(武康)에 우거(寓居)하여 백석동천(白石洞天)과 더불어 이웃을 하였으므로 호를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 하였음. 그 시는 풍격이 고수(高秀)하며 사(詞)는 더욱 정심화묘(精深華妙)하여 음절문채(音節文采)가 다 한때에 으뜸이었다.
[주D-029]계찰(季札)의 묘(墓) : 계찰은 오(吳) 계찰을 이름인데 춘추 시대 오 나라의 공자(公子)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므로 연릉(延陵)에 봉하였다. 그러므로 연릉계자(延陵季子)라 칭하였다. 그는 상국(上國)에 빙(聘)하여 당시의 현대사부(賢士大夫)를 두루 교제하였으며, 노(魯) 나라에 들러 악(樂)을 관찰하고 열국(列國)의 치란 흥쇠(治亂興衰)를 알았다. 춘추 시대의 현자(賢者)임. 세상에서 전하기를 중니(仲尼)가 계찰의 묘에 표하기를 "有吳延陵季子之墓"라 했다고 하여 그 글씨가 중니의 수필(手筆)이라 하는데 고증가들에 의하여 위작임이 판명되었음.
[주D-030]환영(桓楹) : 목비(木碑)임. 제7권 주 153) 참조.
[주D-031]장종신(張從申) : 당 나라 오군인(吳郡人)인데 진사제(進士第)에 뽑혀 관은 대리사직(大理寺直)에 이르고 글씨를 잘 써서 세상이 독보라 칭하였음.
[주D-032]은중용(殷仲容) : 당 나라 사람인데 무후(武后) 때에 비서승(祕書丞)으로 신주자사(申州刺使)를 지냈으며 인물·화조(花鳥)를 잘 그리고 전예(篆隷)를 잘 썼음.
[주D-033]천녀(天女)의 산화(散花) : 《유마경(維摩經)》에 "천녀산화의 꽃은 사리불등(舍利佛等)의 몸에 붙으면 떼어버리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하였음. 《심지관경 1(心地觀經 一)》에 "六欲諸天來供養 天花亂墜徧虛空"이라 하였음.
[주D-034]광대교화(廣大敎化) : 광대교화주(廣大敎化主)의 약칭임. 당(唐) 장위(張爲)가 주객도(主客圖)를 찬(撰)하면서 시가(詩家) 6인을 세워 주(主)를 만들고 나머지는 입실(入室)·승당(升堂)·급문(及門)으로 나누어 객(客)을 삼았다. 백거이(白居易)는 광대교화주, 맹운경(孟雲卿)은 고고오일주(高古奧逸主), 이익(李益)은 청기아정주(淸奇雅正主), 맹교(孟郊)는 청기벽고주(淸奇僻古主), 포용(鮑溶)은 박용굉발주(博容宏拔主), 무원형(武元衡)은 괴기미려주(瓌奇美麗主)라 하였다.
[주D-035]구율(彀率) : 활을 당기는 법을 이름. 《맹자(孟子)》 진심(盡心)에 "羿不爲拙射變其彀率"이란 대문이 보임. "率"은 "律"과 통용함.
[주D-036]원유지(元裕之) : 금(金)의 수용인(秀容人)으로 이름은 호문(好問), 자는 유지, 호는 유산(遺山)인데 7세에 능시(能詩)하여 관(官)은 상서성 좌사원외랑(尙書省左司員外郞)에 이르렀으며, 금(金)이 망하자 벼슬하지 아니하였음. 학술이 침심(沈深)하고 재기(才氣)가 탁월하여 금·원(金元) 시대의 문학하는 자로는 호문이 가장 드러났음. 《유산집》40권이 있음.
[주D-037]우백생(虞伯生) : 원(元) 인수인(仁壽人)으로 이름은 집(集), 자는 백생, 호는 도원(道園)인데, 홍재박식(弘才博識)하여 시용(施用)하면 적의치 않은 곳이 없었다. 관은 규장각 시서학사(奎章閣侍書學士)에 이르렀으며 일시의 대전책(大典冊)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저술로는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 50권이 있음.
[주D-038]경릉(竟陵) : 명(明) 종성(鍾惺)의 자는 백경(伯敬)이요, 경릉인인데 원굉도(袁宏道)가 왕세정(王世貞)·이반룡(李攀龍) 시의 폐단을 교(矯)하여 청진(淸眞)을 외쳐서 공안파(公安派)를 이루었는데 종성이 다시 그 폐단을 교하여 변해서 유심고초(幽深古峭)를 만들었다. 그래서 동리(同里) 사람 담원춘(譚元春)과 함께 당인(唐人)의 시를 평선(評選)하여《고시귀(古詩歸)》를 만들었다. 그래서 종·담의 이름이 천하에 가득했으며 이를 경릉체라 이름함.
[주D-039]주죽타(朱竹坨) : 청 수수인(秀水人)으로 이름은 이준(彝尊), 자는 석창(錫鬯), 호는 죽타인데 강희(康熙) 시에 박학굉사(博學宏詞)에 시(試)하여 검토(檢討)에 제수되었으며, 고학(古學)에 사력(肆力)하여 글이라면 안 본 것이 없었으며 시문(詩文)이 승(勝)하고 금석 고증의 학(學)도 겸하였다. 8만 권의 서(書)를 저술하였으며 《폭서정전집(曝書亭全集)》이 있음.
[주D-040]산성(散聖) : 지위가 없이 세상에 떠돌며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을 이름인데 말하자면 출가한 포대화상(布袋和尙)과도 같음.
[주D-041]병체(騈體) : 사륙(四六) 대우(對偶)의 문(文)을 이름.
[주D-042]혼·계(惲桂) : 혼은 청 무진인(武進人)으로 이름은 경(敬), 자는 자거(子居), 호는 간당(簡堂)이며 고문을 전치(專治)하여 소순(蘇洵)과 더불어 서로 상하(上下)하며 법가(法家)의 언(言)에 가까웠다. 세상에서 양호파(陽湖派)라 칭함. 계는 계복(桂馥)인데 청 곡부인(曲阜人)으로 자는 동훼(冬卉), 호는 미곡(未谷)이요, 건륭 진사로 운남(雲南) 영평지현(永平知縣)에 데두되었다. 소학(小學) 및 금석, 전각에 정(精)했으며 일찍이 《설문(說文)》과 제경(諸經)의 의(義)를 취해 서로 소증(疏證)하여《설문해자의증(說文解字義證)》을 찬집(撰輯)하였음.
[주D-043]남천이우(南遷二友) : 송 소식(蘇軾)이 영해(寧海) 간에 귀양가 있던 시절에 도연명(陶淵明)·유 자후(柳子厚) 두 집(集)을 가장 좋아하여 남천이우라 일렀음. 《老學菴筆記 九》
[주D-044]해봉(海峯) : 유대괴(劉大槐)인데 청 동성인(桐城人)으로, 자는 경남(耕南), 호는 해봉, 고문(古文)은 장자(莊子)를 희학(喜學)하고 더욱 창려(昌黎)를 역추(力追)하였음. 요희전(姚姬傳)이 그를 종유하여 드디어 동성파의 지목이 있었음.
[주D-045]왕척보(王惕甫)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기손(芑孫), 자는 염풍(念豐), 호는 척보이며 또 호는 능가산인(楞伽山人)이다. 공시(工詩) 선서(善書)하여 《연아당시문집(淵雅堂時文集)》의 저술을 남겼음.
[주D-046]원자재(袁子才) : 청 전당인(錢塘人)인데 이름은 매(枚), 자는 자재, 호는 간재(簡齋)요, 건륭 진사로 강녕(江寧)에 출재(出宰)하다가 소년(少年)으로 기관(棄官)하고 강녕성 서쪽에 수원(隨園)을 복축(卜築)하여 음영 저작(吟詠著作)으로 낙을 삼았다. 저술로는 《소창산방시문집(小倉山房詩文集)》 및 필기(筆記) 등이 있음.
[주D-047]진소현(秦小峴) : 청 무석인(無錫人)으로 이름은 영(瀛), 자는 능창(凌滄), 일자는 소현이며, 건륭 거인(擧人)으로 가경(嘉慶) 때에 관은 형부 우시랑(刑部右侍郞)에 이르렀다. 시와 고문이 다 고인의 품격을 역추(力追)하여 능히 자득(自得)한 바 있었으며 저술로는 《소현산인시문집(小峴山人詩文集)》이 있음.
[주D-048]조미신(趙味辛) : 청 무진인(武進人)인데 이름은 회옥(懷玉), 자는 억손(億孫), 일자는 미신이며 건륭 거인으로 관은 등주지부(登州知府)이다. 호학 심사(好學深思)하고 공시(工詩)하여 동리(同里)의 손성연(孫星衍)·홍양길(洪良吉)·황경인(黃景仁)과 더불어 손홍황조(孫洪黃趙)라 병칭(並稱) 되었으며, 저술로는 《역유생재집(亦有生齋集)》이 있음.
[주D-049]증남풍(曾南豐) : 송 남풍인(南豐人)으로 이름은 공(鞏), 자는 자고(子固)임. 가우(嘉祐) 진사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발탁되었다. 경술(經術)에 깊고 문장에 공(工)하여 저술로는 《원풍유고(元豐類稿)》가 있음. 당송팔가(唐宋八家)의 한 사람임. 또한 《전국책(戰國策)》에 주(注)하고 고문전각(古文篆刻)을 모아 《금석록(金石錄)》을 만든 바 있음.
[주D-050]서중거(徐仲車) : 송 산양인(山陽人)으로 이름은 적(積), 자는 중거임. 3세에 부친이 죽었는데 부친의 이름이 석(石)이었으므로 종신토록 석기(石器)를 쓰지 아니하였으며, 길을 걷다가도 돌을 만나면 밟지 않았다. 정화(政和) 중에 시(諡)를 내려 절효처사(節孝處士)라 하였으며 그의 한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절효어록(節孝語錄)》과 《절효집》이 있음.
[주D-051]진형중(陳瑩中) : 송인(宋人)인데 이름은 관(瓘), 자는 형중, 호는 요옹(了翁)임. 학문이 있어 진사 갑과(進士甲科)에 올랐다. 간관(諫官)이 되었을 때 채경(蔡京)을 써서는 안된다고 극언(極言)하였으므로 채경이 깊이 유감을 품어 누차 귀양을 갔었는데 사면을 받아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학자가 요재선생(了齋先生)이라 칭했다. 저술로는 《요옹역설(了翁易說)》·《존요집(尊堯集)》이 있음.
[주D-052]맹동야(孟東野) : 당 호주인(湖州人)인데 이름은 교(郊), 자는 동야이며 숭산(嵩山)에 은거하였다. 천성이 경개(耿介)하여 해합(諧合)이 적었는데 한유(韓愈)는 한번 보고 망형(忘形)의 벗이 되었음. 나이 50에 진사제(進士第)를 얻어 평양현(平陽縣)에 조용(調用)되었음. 시체(詩體)는 철마(鐵馬)를 깊이 몰아 층빙(層氷)을 밟아 깨뜨리는 것 같았고 문체(文體)는 춘산(春山)의 고죽(孤竹)에 두우(杜宇)가 피를 흘리며 우는 것 같았음.
[주D-053]촌심(寸心)이 천고(千古) : 두보의 시에 " 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라는 글귀가 있음.
[주D-054]노동(盧仝) : 당인(唐人)으로 누거 부중(累擧不中)하여 동도(東都)에 살면서 스스로 옥천자(玉川子)라 하였다. 한유가 하남윤(河南尹)이 되어 그의 시를 사랑하여 후례(厚禮)를 올리고 시를 지어 보냈음.
[주D-055]정상(頂上)에……자 : 불가어로서 정문상유안(頂門上有眼)의 약칭임. 마해수라천(摩醯首羅天)에 삼목(三目)이 있는데 그 수(竪)의 한 척안(隻眼)은 정문안이라 이르며 그 눈은 가장 상안(常眼)보다 뛰어나다. 《벽암(碧巖)》 35칙 수시(垂示)에 若不是頂門上有眼 肘臂下有符往往當頭蹉過"라 하였음.
[주D-056]서산 : 오자서(伍子胥)는 춘추시대 초인(楚人)인데 이름은 원(員)이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섬겨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무너뜨리고 패업(霸業)을 이루었는데 뒤에 태재(太宰) 비(嚭)의 참소를 듣고 자서에게 칼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다. 서산은 자서의 묘(廟)가 있는 곳임.
[주D-057]멱라 : 초 나라 굴원(屈原)이 처음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참소를 입고 상강(湘江)으로 귀양가서 이소(離騷)·구가(九歌)를 지어 임금의 회오(悔悟)를 기다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음.
[주D-058]유자산(庾子山) : 남북조(南北朝) 신야인(新野人)으로 이름은 신(信), 자는 자산이며, 군서(群書)를 박람하고 문장의 이조(摛藻)가 염려(艶麗)하여 서릉(徐陵)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서유체(徐庾體)라 일컬었음. 양 원제(梁元帝) 때에 우위장군(右衛將軍)을 지냈으며 누천(累遷)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므로 세상에서는 유개부(庾開府)라 칭한다. 유신은 직위가 비록 현달했지만 행상 향관(鄕關)의 생각이 있어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었다. 그 병우(騈偶)의 문(文)은 실로 육조(六朝)의 집대성이었음.
[주D-059]하수부(何水部) : 남조(南朝) 양(梁) 동해(東海) 섬인(郯人)으로 이름은 손(遜), 자는 중언(仲言)임. 8세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약관(弱冠)에 범운(范雲)과 더불어 망년(忘年)의 교호(交好)를 맺었다. 관(官)은 상서수부랑(尙書水部郞)에 이르고 문(文)은 유효작(劉孝綽)과 더불어 제명하여 당시에 하류(何劉)라 칭하였음.
[주D-060]진윤천(陳允倩) : 청 전당인(錢塘人)으로 이름은 조명(祚明), 자는 윤천임. 박학하여 속문(屬文)을 잘 하였음. 생활이 가난하여 경사(京師)에서 용서(傭書)하다가 객관(客館)에서 죽었으며 저술로는 《계류산인집(稽留山人集)》이 있는데 《폐추집(敝帚集)》이라고도 함.
[주D-061]산중의 재상 : 도홍경(陶弘景)은 남북조 때 말릉인(秣陵人)으로 자는 통명(通明)인데 제고제(齊高帝) 때에 일찍이 제왕(諸王)의 시독(侍讀)이 되었다가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숨어 화양은거(華陽隱居)라 자호(自號)하고 늦게는 화양진일(華陽眞逸), 또는 화양진인(華陽眞人)이라 호하였다. 국가에서 매양 큰 일이 있으면 찾아와서 자문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산중 재상이라 불렀다. 그는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 比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이라 하였음.
[주D-062]장심여(蔣心餘) : 청 연산인(鉛山人)으로 이름은 사전(士銓), 자는 심여인데, 건륭 진사로 관은 편수(編修)이며 시와 고문사(古文辭)에 공(工)하여 성명(盛名)을 짊어졌다. 그가 찬(撰)한 구종곡(九種曲)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음.
[주D-063]미사(微詞) : 《공양전(公羊傳)》 정공(定公) 원년(元年)에 "定哀多微詞"라는 대문이 있는데 이는 존자(尊者)를 위하여 휘(諱)하며 그 과실을 현저하게 드러내고자 아니하여 살짝 그 뜻만 보인 것임.
[주D-064]강엄(江淹) : 남조(南朝) 양(梁) 고성인(考城人)으로 자는 문통(文通)이요, 관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젊어서 문장으로써 이름이 났는데 말년에는 재사(才思)가 미퇴(微退)하여 시문(詩文)에 가구(佳句)가 없으니 시인(時人)이 재진(才盡)이라 일렀음.
[주D-065]노련(老蓮) : 진홍수(陳洪綬)의 별호인데 명말(明末) 제기인(諸曁人)으로 자는 장후(章侯)임. 명경(明經)으로써 등제(登第)하였으나 벼슬하지 않다가 숭정(崇禎) 간에 불러들여 공봉(供奉)을 삼았다. 산수(山水)·인물을 잘 그려 용면(龍眠)·오흥(吳興)의 묘를 겸했고 설색(設色)은 도자(道子)를 배워 역량과 기국이 구영(仇英)·당인(唐寅)의 위에 있었으며 당시에 삼백 년 내에는 이런 필묵이 없다고 일렀다.
[주D-066]피일휴(皮日休) : 당 양양인(襄陽人)으로 자는 습미(襲美)요, 문장에 능하여 진사에 올랐으며 맹호연(孟浩然)과 더불어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여 스스로 취사(醉士)라 호하였고 또 주민(酒民)이라 하였다. 육구몽(陸龜蒙)과 벗이 되어 《송릉창화시집(松陵唱和詩集)》 이 있음
[주D-067]육구몽(陸龜蒙) : 당 장흥인(長興人)으로 자는 노망(魯望)이요, 젊어서부터 고방(高放)하여 송강(松江) 보리(甫里)에 살면서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며 혹은 보리 선생(甫里先生)이라 하였다. 뒤에 고사(高士)로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음.
[주D-068]심귀우(沈歸愚)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덕잠(德潛), 호는 귀우이며, 건륭 진사로서 늦게 예부 시랑에 발탁되었는데 연력(年力)이 쇠약하므로 고귀(告歸)를 허락하고 원함(原銜)으로 녹을 받게 하였다. 졸년(卒年)이 97이며 시호는 문각(文慤)임.
[주D-069]심 진사(沈進士) 두영(斗永) : 청송인(靑松人)인데 전남 옥과(玉果) 출신으로 시(詩)에 공(工)하여 일세(一世)의 교유(交遊)가 모두 현사대부(賢士大夫)였었고, 특히 김이양(金履陽)과는 망형(忘形)의 교분이었음.
[주D-070]위관(衛瓘) : 진(晉) 안읍인(安邑人)으로 자는 백옥(伯玉), 관은 상서령(尙書令)이며 상서랑(尙書郞) 색정(索靖)과 더불어 때를 같이하여 초서를 잘 쓰니 시인(時人)이 이름하여 일대이묘(一臺二妙)라 하였음.
[주D-071]지영(智永) : 남북조 진(陳)의 영흔사(永欣寺) 승(僧)으로 속성(俗姓)은 왕(王)이요, 회계인(會稽人)인데 호는 영선사(永禪師)라 했다. 선서(善書)하여 능히 제체(諸體)를 겸했고 초서는 더욱 승(勝)하여 임서(臨書)한 30년에 진초 천문(眞草千文) 8백여 본을 만들었음.
[주D-072]최열(崔悅) : 후조(後趙) 동무성인(東武城人)으로 자는 도유(道儒)인데 석호(石虎)에게 벼슬하여 벼슬은 사도우장사(司徒右長史)이며 재학(才學)으로 일컬음을 받고 글씨를 잘 써 범양(范陽) 노침(盧湛)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였는데 침(湛)은 종유(鍾繇)을 본받고 열(悅)은 위관(衛瓘)을 본받았음.
[주D-073]노침(盧湛) : 제8권 주 72) 참조.
[주D-074]고준(高遵) : 후위(後魏) 수인(蓨人)으로 자는 세례(世禮)요, 문사(文史)를 섭렵하여 자못 필찰(筆札)에 공(工)했으며 제주자사(濟州刺史)에 올랐음.
[주D-075]심복(沈馥) : 북위 선무제(宣武帝) 때 사람으로 서(書)에 공했다. 후위(後魏) 경명(景明) 3년에 일찍이 정정비(定鼎碑)를 정서하였는데 일명은 어사비(御射碑)라고도 함.
[주D-076]요원표(姚元標) : 북조 제(齊) 위군인(魏郡人)으로 관은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이르렀으며 공서(工書)로써 이름이 당시에 알려졌음.
[주D-077]조문심(趙文深) : 북주(北周) 완인(宛人)으로 자는 덕본(德本)임. 어려서 예해(隷楷)를 배워 11세 때에 글씨를 위제(魏帝)에게 올렸는데 자못 종·왕(鍾王)의 법칙이 있었음.
[주D-078]정도호(丁道護) : 수인(隋人)으로 관은 양주제주종사(襄州祭酒從事)에 이르렀으며 정서(正書)를 잘 써 후위(後魏)의 유법을 겸했다. 수·당(隋唐)의 즈음에 선서(善書)하는 자가 많았으나 다 한 법에서 나왔는데 도호의 얻은 바가 가장 많았다. 그가 쓴 양양(襄陽) 계법흥국사비(啓法興國寺碑)가 가장 정(精)하여 우세남(虞世南) · 구양순(歐陽詢)의 소자출(所自出)이 되었음.
[주D-079]채옹(蔡邕) : 동한 진류인(陳留人)으로 자는 백개(伯喈)이며, 영제(靈帝) 때에 낭중(郞中)에 제수되어 양사(楊賜) 등과 더불어 육경(六經)의 문자를 주정(奏定)하여 비(碑)를 태학문(太學門) 밖에 세웠는데 이윽고 사건이 생겨 면관(免官)되었다. 동탁(董卓)이 불러 좨주(祭酒)를 삼아 누천(累遷)하여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렀는데 뒤에 탁당(卓黨)으로 지목되어 옥중에서 죽었음.
[주D-080]위탄(韋誕) : 삼국 시대 위(魏) 경조인(京兆人)으로 자는 중장(仲將)인데 문재(文才)가 있어 사장(辭章)을 잘 하고 또 선서(善書)로 이름났다. 태화(太和) 중에 능서(能書)로써 시중(侍中)에 보직되어 관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마쳤으며 위씨(魏氏)의 보기 명제(寶器銘題)는 다 그가 쓴 것임.
[주D-081]한단순(邯鄲淳) : 삼국 시대 위(魏) 영천인(穎川人)으로 자는 자숙(子叔)이요, 박학유재(博學有才)하여 창아충전(蒼雅蟲篆)을 잘 썼음.
[주D-082]위개(衛凱) : 삼국 위 안읍인(安邑人)으로 자는 백유(伯儒)요. 젊어서부터 재학(才學)으로써 칭도(稱道)되었다. 한말(漢末)에 사공연(司空掾)이 되어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며 위국(魏國)이 건립되어서는 시중(侍中)에 제수되어 왕찬(王粲)과 더불어 제도(制度)를 맡았다. 그는 문장으로 현달하여 고문을 좋아하며 조전예초(鳥篆隷草)를 잘 하지 못한 것이 없었음.
[주D-083]장지(張芝) : 후한 서가(書家)인데 주천인(酒泉人)으로 자는 백영(伯英)이요, 초서를 잘 썼다. 임지학서(臨池學書)하자 못물이 다 검어졌으며 세상에서 초성(草聖)이라 일컬음.
[주D-084]두도(杜度) : 후한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度)임. 초서에 공하였고 그 법을 최원(崔瑗)·최 실(崔實) 부자가 이어받았음.
[주D-085]왕허주(王虛舟) : 청 금단인(金壇人)으로 자는 약림(若霖), 호는 허주, 또는 양상산인(良常山人)이라 한다. 강희 진사로 관은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에 이르고 서화에 공하였음. 저술로는 《우공보(禹貢譜)》·《학용본의(學庸本義)》·《정주격물법(程朱格物法)》·《순화각첩고정(淳化閣帖考正)》 등이 있음.
[주D-086]오봉루(五鳳樓) : 《명의고(名義考)》에 "양 태조(梁太祖)가 오봉루를 건립했는데 주한(周翰)이 이른바. 땅에서 백 길을 솟아 하늘의 반공(半空)에 있어 다섯 봉이 날개를 쳐든다는 것과 같다." 하였음.
[주D-087]옹유(甕牖)와 승추(繩樞) : 깨진 항아리 입으로 문을 만들고 노끈으로 돌조구를 동인다는 것으로 극히 가난한 집을 이름.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에 "陳涉甕牖繩樞之子"라는 대문이 보임.
[주D-088]환중(環中) : 공허를 비유한 말임.《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이라는 대문이 있고, 그 주(注)에 "시비가 반복하여 서로 다함이 없으므로 환(環)이라 이른다. 환중은 공(空)이니 지금 시비로써 고리를 삼아 그 중(中)을 얻은 자는 시도 없고 비도 없다." 하였음.
[주D-089]손건례(孫虔禮) : 당 진류인(陳留人)으로 이름은 과정(過庭), 관은 솔부녹사참군(率府錄事參軍)에 이르렀으며 서(書)에 공하여 일찍이 서론(書論)을 저술했는데 절묘하여 그 지취(旨趣)를 다했으니, 곧 서보(書譜)이다. 원서(原書)는 6편인데 지금 전하는 진적(眞蹟)은 겨우 그 총서(總序)의 문(文)만 있고 전서(全書)는 이미 없어졌음.
[주D-090]양소사(楊少師) : 오대(五代) 주(周)의 화음인(華陰人)으로 이름은 응식(凝式), 자는 경도(景度)임. 외모는 못생겼으나 정신이 영오(穎悟)하여 문조(文藻)가 부유함으로 당시 사람들이 중히 여겼다. 후한(後漢)에서 소부(少傅)·소사(少師)를 지냈으므로 세상이 양 소사라 칭한다. 시가(詩歌)에 장(長)하고 더욱 필찰(筆札)을 잘 하였으며 서법은 안진경(顔眞卿) 이후로는 따라갈 자가 없었다. 황정견(黃庭堅)은 그 서(書)가 산승입성(散僧入聖)과 같다고 일렀으며, 조맹부(趙孟頫)는 그 서가 견지(見知)의 밖에 벗어났다고 일렀다. 구화첩(韭花帖) 일종은 더욱 유명함.
[주D-091]정도소(鄭道昭) : 북위(北魏) 형양인(滎陽人)으로 출사(出仕)하여 광주자사(光州刺史)가 되었으며 스스로 중악 선생(中岳先生)이라 칭하였음. 서(書)에 공하여 처음에는 심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청(淸) 가·도(嘉道) 간에 이르러 운봉산(雲峯山)의 여러 석각(石刻)이 발견됨에 따라 포세신(包世臣)·장기(張琦)·오희재(吳熙載) 등이 극히 추중(推重)하여 마침내 북비(北碑)를 익히는 자의 종(宗)하는 바가 되었음.
[주D-092]초산명(焦山銘) : 초산정명(焦山鼎銘)을 이름.
[주D-093]왕자유(王子猷) : 진인(晉人)으로 이름은 휘지(徽之), 자는 자유이며, 희지(羲之)의 아들이다. 산음(山陰)에 살면서 하루는 밤눈이 개자 달빛을 타고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가 그 문앞에 당도하여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는데 어찌 꼭 만나보아야 하느냐."고 대답하였다.
[주D-094]용매(龍媒) : 준마(駿馬)의 이칭임. 한 무제(漢武帝)의 천마가(天馬歌)에 "天馬徠兮龍之媒"라 하였음. 당(唐)에는 비황(飛黃)·길량(吉良)·용매·도여(騊駼)·쾌재(駃騠)·천원(天苑) 등 육한(六閑)이 있는데 모두 천자의 말을 기르는 곳임.
[주D-095]섭운(籋雲) : 섭(籋)은 섭(躡)과 같음. 사장(謝莊)의 무마부(舞馬賦)에 "蘊籋雲之銳景 戢追電之逸足"이라 하였음.
[주D-096]육좌(衄挫) : 육(衄)은 절(折)로서 꺾는다는 뜻이고 좌(挫)도 같은 뜻임. 서법의 술어임.
[주D-097]발등법(撥鐙法) : 제7권 주 328) 참조.
[주D-098]분항(分行)·포백(布白) : 서법에 관한 말인데 분항은 줄을 나누는 것이요, 포백은 곧 그 공백처와 착묵처(着墨處)를 포치(布置)하여 소밀(疏密)이 상간(相間)하게 하는 것임.
[주D-099]황백사(黃伯思) : 송인(宋人)으로 자는 장예(長睿), 별자는 소빈(宵賓)이며, 운림자(雲林子)라 자호하였다. 원부(元符) 진사로 비서랑(祕書郞)에 제수되었으며 책부(冊府)의 장서를 종관(縱觀)하여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다. 천성이 고문 기자(古文奇字)를 좋아하여 이기관지(彝器款識)를 모두 능히 변증하였으며, 육경(六經) 및 자사 백가(子史百家)를 정구(精究)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시문에도 공(工)했다. 글씨로는 전(篆)·예(隷)·행(行)·초(草)·비백(飛白)이 다 묘절(妙絶)했다. 저술로는《동관여론(東觀餘論)》 및 문집이 있음.
[주D-100]부서혁봉(腐鼠嚇鳳) : 《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위에 자세히 보임.
[주D-101]비이 : 범이 성을 내어 갈기털이 꼿꼿하게 서는 모양을 말한 것임.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孟毅髬髴"의 구가 있음.
[주D-102]책비(責備) : 책현자비(責賢者備)의 준말로서 어진 자에게는 항상 구비하기를 책한다는 뜻임. 춘추(春秋)의 법은 항상 현자에게 책비하였으므로 나온 말임.
[주D-103]훈유(薰蕕) : 《좌전(左傳)》 희공(僖公) 4년에 "一薰一蕕 十年尙猶有臭"라는 대문이 있는데, 훈은 향초요 유는 취초(臭草)로서 두 가지를 한 곳에 모아 두면 아무리 십 년이 가도 오히려 취기가 있다. 그러니 선(善)은 소멸되기 쉽고 악은 제거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가어(家語)》 치사(致思)에 "薰蕕不同器而藏"이라 하였음.
[주D-104]조미숙(晁美叔) : 송인으로 이름은 단언(端彦), 자는 미숙이며 장돈(章惇)과 더불어 동생(同生)하여 동방급제(同榜及第)이고 또 관(館)의 직을 함께 지냈다. 그래서 항상 서로 삼동(三同)이라 불렀다. 소성(紹聖) 초에 장돈이 입상(入相)하자 단언이 그의 소위를 보고 힘써 간하다가 쫓겨나서 협수(陜守)가 되었다. 문장과 서법이 조야(朝野)의 종상(宗尙)하는 바 되었음.
[주D-105]이소온(李少溫) : 당 조군인(趙郡人)으로 이름은 양빙(陽氷), 자는 소온이며 건원(乾元)간에 진운령(縉雲令)이 되었다가 뒤에 당도령(當塗令)으로 옮겼는데 전서를 잘 썼음. 서원여(舒元輿)는 그 전서를 이사(李斯)에게 내리지 않는다고 일렀다. 지금도 그 유적이 전해 옴.
[주D-106]윤백하(尹白下) : 이름은 순(淳),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인데 해평인(海平人)으로 이조 판서 유(游)의 제(弟)이다. 숙종(肅宗) 계사년에 문과에 올라 관은 이조 판서에 이르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경신년에 평안 감사로 임소(任所)에서 졸했다. 선서(善書)하여 절예(絶藝)를 이루었으며 후학을 계발한 공이 석봉(石峯)·안평(安平)에 비할 바 아니었음. 원교(圓嶠)가 그 문하로서 사문(師門)의 진수를 얻었다 함.
[주D-107]박(璞)을……였던가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마원이 유소시(幼少時)에 큰 뜻이 있어 일찍이 제시(齊詩)를 배우면서도 능히 장구(章句)에 뜻이 가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형 황(況)을 하직하고 변군(邊郡)으로 나가서 목축(牧畜)을 하고자 하니, 황은 말하기를 '너는 대재(大才)라 마땅히 만성(晩成)할 것이니 양장(良匠)은 사람에게 박(璞)으로써 보이지 않는다. 너의 소호(所好)를 따르라.' 했다." 하였음.
[주D-108]고족(高足) : 품학(品學)이 넉넉한 문인(門人)을 이름.《세설(世說)》 문학(文學)에 "鄭玄在馬融門下 三年不得相見 高足弟子傳授而已"라 하였음.
[주D-109]강표암(姜豹庵) : 이름은 세황(世晃),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이요, 진주인(晉州人)으로 일찍이 부사(副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갔었는데 청조(淸朝) 사람들이 세황의 서화(書畫)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청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였다. 세황은 소기(小技)를 자랑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마지못해 몇 사람에게만 응하고 말았다. 일강관(日講官) 석암(石菴) 유용(劉鏞)·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이 글씨로 천하에 유명하였는데 세황의 글씨를 보고 천골개장(天骨開張)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음.
[주D-110]상세창(桑世昌) : 송 회해인(淮海人)으로 천태(天台)에 세거(世居)하였으며 육유(陸游)의 생(甥)이다. 저술로는《난정고(蘭亭考)》가 있으며《회문유취(回文類聚)》를 편집하였음.
[주D-111]유송(兪松) : 송 전당인(錢塘人)으로 자는 수옹(壽翁), 호는 오산(吳山)이며, 관은 승의랑(承議郞)이다. 저술로《난정속고(蘭亭續考)》가 있음.
[주D-112]조불흥(曹不興) : 삼국 시대 오(吳)의 오흥인(吳興人)인데 황무간(黃武間)에 화명(畫名)으로써 일시에 관절(冠絶)하였음. 이때 오 나라에 팔절(八絶)이 있었는데 불흥이 그 중 하나에 참여했으며, 그 화룡(畫龍)이 더욱 묘하다고 함.
[주D-113]장승유(張僧繇) : 남북조 양(梁)의 화가인데 오인(吳人)으로 관은 우군장군(右軍將軍)·오흥태수(吳興太守)에 이르렀으며, 산수와 불상을 잘 그렸다. 또 일찍이 네 용을 그리고 점정(點睛)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굳이 점정하기를 청하여 점정하자 점 찍힌 두 마리 용은 벽을 부수고 날아가고 점 찍지 않은 것은 그대로 있었다 함.
[주D-114]오도현(吳道玄) : 오도자(吳道子)인데 당 양적인(陽翟人)으로 회사(繪事)를 잘하여 필법이 초묘(超妙)하니 당시에 화성(畫聖)이라 칭하였다. 현종(玄宗) 때에 불러들여 공봉(供奉)이 되었으며, 또 불상을 잘 그렸음.
[주D-115]연문귀(燕文貴) : 송 오흥인(吳興人)으로 도화원(圖畫院)에 들어왔는데 인물·산수를 잘하여 세쇄 청윤(細碎淸潤)하여 일가(一家)를 자성(自成)하였음.
[주D-116]역원길(易元吉) : 송 장사인(長沙人)으로 자는 경지(慶之), 사생(寫生)을 잘하여 집 후원에 원포(園圃)를 쌓고 물새와 산 짐승을 순양(馴養)하여 그 동정을 엿보아 화사(畫思)의 바탕을 삼았다. 더욱이 노루와 원숭이를 잘 그려 식자(識者)는 서희(徐熙) 이후 일인이라 일렀음.
[주D-117]심석전(沈石田) : 명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주(周), 자는 계남(啓南), 호는 석전이며,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문(文)은 좌씨(左氏)를 배우고 시는 백거이·소식을 배우고 글씨는 황정견을 배웠다. 더욱이 화(畫)에 공하여 당인(唐寅)·문징명(文徵明)·구영(仇英)과 더불어 병칭하여 명의 사가(四家)가 되었음.
[주D-118]임조(林藻) : 당인으로 피(披)의 아들인데 자는 위건(緯乾)임. 소싯적부터 기지(奇志)를 품어 농(農)이 되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구양첨(歐陽詹)과 더불어 문학에 각의(刻意)하여 굉사과(宏詞科)에 탁제(擢第)하였음. 관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임.
[주D-119]소릉(昭陵)에서……옥갑(玉匣) : 소릉은 당 태종(唐太宗)의 능임. 태종이 평소에 왕희지의 진적(眞跡)을 몹시 아껴 차마 손에서 놓지 못했는데, 그 뒤 고종(高宗)이 그것을 옥갑에 넣어 소릉에 저장하였음.
[주D-120]가사도(賈似道) : 송 태주인(台州人)인데 이종(理宗) 때에 자기 누나가 귀비(貴妃)로 되는 바람에 누진(累進)하여 관은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으며 추밀사(樞密使)를 겸했다. 원병(元兵)이 건강(建康)에 육박하자 송군(宋軍)이 자주 패하니, 진의중(陳宜中) 등이 사도의 죄를 탄핵하여 내쳤는데 도중에서 피살되고 말았음.
[주D-121]양흔(羊欣) : 진(晉) 남성인(南城人)으로 유소시(幼少時)부터 정묵(靖黙)하여 용지(容止)가 아름답고 언소(言笑)를 잘 하였으며, 경적을 박람하고 더욱 예서(隷書)에 장(長)하였음. 흔의 나이 12세 때에 왕헌지(王獻之)가 오흥태수(吳興太守)가 되어 몹시 지애(知愛)하였다. 그 서법은 더욱 당송인(唐宋人)의 일컫는 바가 되었음.
[주D-122]도 은거(陶隱居) : 도홍경(陶弘景)을 말함. 제8권 주 61) 참조.
[주D-123]건초척(建初尺) : 건초는 한 장제(漢章帝) 연호인데 그 당시 통용하던 동척(銅尺)을 말함. 완당이 옹성원(翁星源)으로부터 건초척 탁본을 기증받은 바 있음.
[주D-124]야율초재전(耶律楚材傳) : 원(元)의 명신으로 자는 진경(晉卿)이요, 요동단왕(遼東丹王) 돌욕(突欲)의 후손인데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원 세조는 군국(軍國)의 대사를 맡길 만하다고 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몽고의 누풍(陋風)을 다 개혁하였으며, 원 나라의 입국 규모(立國規模)는 다 초재의 소정(所定)이었음.
[주D-125]각단(角端) : 짐승 이름임.《송서(宋書)》 부서지(符瑞志)에 "각단은 하루 1만 8천 리를 가며 또 사예(四裔)의 언어를 이해한다." 하였고,《원사(元史)》에는 "원 태조(元太祖)가 동인도(東印度)에 이르러 각단이 능히 말하는 것을 보았다." 하였음.
[주D-126]《담연집(湛然集)》 : 야율초재가 저술한 문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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