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허는 지금 화엄회(華嚴會) 석상에서 날마다 아미타불을 외어 천 소리에서 만 소리까지 이르는데 염불은 본시 정토(淨土)의 법문(法門)이다. 사람들이 혹은 의심도 하나 화엄의 정토는 바로 곧 자심(自心)의 정토임을 모르는 것이다. 비로자나(毘盧遮那)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서로서로 주반(主伴)하고 겹겹으로 주반하여 제망(帝網)이 어울려 비치는 것 같으니 곧 화엄의 대의이며 태허와 체(體)를 같이하고 천지와 용(用)을 함께 하는 대의이니 옅은 무리로는 사의(思擬)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또 혹시 원융무량(圓融无量)으로써 망령되이 비기는 것은 더욱 화엄의 대의에 참여하여 미칠 수 없는 것이니 원융이 어찌 화엄의 의이랴. 지금 대천(大千)의 밖에 붓을 던졌으나 저도 몰래 그것이 스스로 화엄장(華嚴場) 속에 떨어졌으니 한번 웃는다.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성인은 태허와 더불어 체를 함께 하고 천지와 더불어 용을 같이한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의를 강구하다 못하여 마침내는 억측하여 말하기를 "태허의 체(體)를 체하여 써 체로 삼고 천지의 용(用)을 용하여 써 용을 삼는다."라 하였으니, 이 말은 창을 사이에 두고 해를 엿보는 격이어서 그 빛과 그림자를 본 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만약 태허의 체를 체받아 써 체를 삼는다 말한다면 바로 이 한낱 태허가 존재하여 체에 붙는 것이니 어떻게 능히 태허가 될 것이며, 만약 천지의 용(用)을 용하여 써 용으로 삼는다 말한다면 바로 이 한낱 천지가 존재하여 용에 붙는 것이니 어떻게 해서 능히 천지가 되리오. 그런데 대관절 태허는 그 체가 있음을 아는 건가, 그 체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건가? 천지는 그 용이 있음을 아는 건가, 그 용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건가? 태허는 체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데 천지의 용이 태허에 들어 있고 천지는 용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데 태허의 체는 천지의 용에 들어 있다. 그 체한 바를 체한 것은 그 용한 바를 체한 것이요 그 용한 바를 용한 것은 그 체한 바를 용한 것인데 마침내 분쇄(粉碎)와 허공(虛空)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들어맞게 된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대개 본체의 태허는 공(空)이다. 만약 허공상(虛空相)에 집착한다면 바로 본체가 아니요, 허공은 본시 분쇄한 것이나 만약 분쇄할 마음을 지니면 바로 허공이 아니다. 그러므로 허공이 있음을 알지 못한 연후라야 태허 천지의 허공을 말할 수 있고 분쇄가 있음을 알지 못한 연후라야 태허 천지의 허공을 말할 수 있다. 마침내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미 일찍이 허공의 본체는 규파(窺破)했지만 다만 본체를 허공의 속에 편안히 하지 못한 것뿐이다. 곧 《화엄경》에 이르기를 "법성(法性)은 허공과 같고 제불(諸佛)은 그 가운데에 머물러 있다." 했으니, 그 경지에 가면 스스로 허공이 바로 본체요, 본체가 바로 허공임을 알게 된다. 태허가 매양 한마디 말을 요청하므로 이와 같이 써서 보인다. [주D-001]비로자나(毗盧遮那) : 불(佛) 진신(眞身)의 존칭임. 노자나는 광명조(光明照)를 이름인데 불(佛)이 신지(身智)에 종종광명(種種光明)으로써 중생을 비추어 준다는 것이요, 비(毗)는 편(遍)의 뜻임. [주D-002]제망(帝網) : 제석천궁(帝釋天宮)의 그물인데 인타라망(因陀羅網)과 같음. 그 그물의 선(線)이 주옥(珠玉)이 교락(交絡)하였으므로 물(物)이 교락하여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섭입(涉入)하는 것에 비유하여 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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