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에게 써서 보이다[書示佑兒] |
서법은 예천명(醴泉銘)이 아니면 손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이미 조이재(趙彝齋) 때로부터 예천명을 해법(楷法)의 규얼(圭臬)로 삼았으니 그때에 어찌 우군서(右軍書)의 황정경·악의론이 없었으랴마는 다 돌고 돌아 번와(飜訛)되어 준칙을 삼을 수가 없으니 원(原) 석탑(石搨)에서 진적을 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때문에 부득불 머리를 숙이고 예천·화도(化度) 등 비(碑)에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화도는 지금 원석은 없고 송탑(宋搨)으로 범씨서루본(范氏書樓本) 같은 것은 동인이 더욱 얻어 볼 수가 없는 것이나 오히려 예천의 원석 탑본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설사 많이 낡고 부스러졌다 해도 이것이 아니면 종·색(鐘索)의 옛 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어찌하여 이를 버리고 딴 것을 구한단 말이냐.
네가 말한바 "겨우 두어 글자를 쓰면 글자 글자가 따로 놀아 마침내 귀일(歸一)되지 않는다. "는 것은 곧 네가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진경(進境)의 곳이다. 모름지기 잠심(潛心)하고 힘써 따라 꾹 참고 이 한 관문을 넘어서야만 쾌히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니 절대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퇴전(退轉)하지 말고 더욱더 공덕을 쌓아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육십 년이 되어도 오히려 귀일됨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너 같은 초학자이겠느냐.
그러나 나는 너의 이 말을 듣고서 매우 기뻐하며 반드시 소득이 이 한 말에 있다고 여긴다. 절대 범연히 보고 부질없이 지내지 말아야만 묘체(妙諦)가 될 것이다.
예서(隸書)는 바로 서법의 조가(祖家)이다. 만약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하면 예서를 몰라서는 아니된다. 그 법은 반드시 방경(方勁)과 고졸(古拙)을 상(上)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 졸한 곳은 또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예(漢隸)의 묘는 오로지 졸한 곳에 있다.
사신비(史晨碑)는 진실로 좋으며 이 밖에도 예기(禮器)·공화(孔和)·공주(孔宙) 등의 비가 있다. 그러나 촉도(蜀道)의 여러 각이 심히 고아(古雅)하니 반드시 먼저 이로 들어가야만 속예(俗隸)·범분(凡分)의 이태(膩態)와 시기(市氣)가 없어질 수 있다.
더구나 예법은 가슴속에 청고 고아(淸高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속의 청고 고아한 뜻은 또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완하(腕下)와 지두(指頭)에 발현되지 않으며, 또 심상한 해서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법의 장본(張本)이며, 예를 쓰는 신결(神訣)이 된다.
근일에는 조 지사(曹知事), 유기원(兪綺園 유한지(兪漢芝)) 같은 제공(諸公)이 예법에 깊으나 다만 문자기(文字氣)가 적은 것이 한스러운 것이다. 이원령(李元靈)은 예법이나 화법이 다 문자기가 있으니 시험삼아 이를 살펴보면 그 문자기가 있는 것을 해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 해야 할 것이다. 집에 수장된 예첩은 자못 구비해 있다. 서협송(西狹頌) 같은 것은 촉도 제각(諸刻)의 극히 좋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화란(畫蘭)에 있어 오래도록 작자가 없었는데 오직 선묘(宣廟)의 어화(御畫)를 보니 천종(天縱)의 성(聖)으로서 잎 부치는 식과 꽃 만드는 격이 정소남(鄭所南)의 법과 흡사하다. 대개 그때에 송 나라 사람의 난법이 우리나라에 유전(流傳)되었는데 역시 어화도 그를 임방(臨倣)한 것이다. 소남의 그림은 역시 중국에도 드물게 전하며 근일에 익히는 것은 또 원·명(元明) 이후의 법이다.
비록 그림에 능한 자는 있으나 반드시 다 난(蘭)에 능하지는 못하다. 난은 화도(畫道)에 있어 특별히 한 격을 갖추어 있으니 가슴속에 서권기(書卷氣)를 지녀야만 붓을 댈 수 있는 것이다.
봄은 무르익어 이슬은 무겁고 땅은 따뜻하여 풀은 돋아나며 산은 깊고 해는 긴데 사람은 고요하고 향기는 뚫고 든다. 이 한 조(條)는 이재의 말임.
옛 사람은 난초를 그리되 한두 종이에 지나지 아니하며 일찍이 여러 폭을 연대어 다른 그림같이 하지 않는다. 이는 우격다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난화를 요청하는 자들은 이 경지가 극히 어렵다는 것을 모르고서 혹은 많은 종이로 심지어는 팔첩(八疊)을 강청(强請)하는 자도 있지만 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사절할 따름이다.
[주D-001]규얼(圭臬) : 규는 일영(日影)을 헤아리는 데에 쓰는 것이고, 얼은 표준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표준이 될 만한 자를 역시 규얼이라 칭한다. 두보의 팔애시(八哀詩)에 "圭臬星經奧"의 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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