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윤현부에게 써서 주다[書贈尹生賢夫]

천하한량 2007. 3. 9. 20:38
윤현부에게 써서 주다[書贈尹生賢夫]

서법은 종요(鍾繇)·색정(索靖)에서부터 이래로 일정하여 바뀌지 않는 법이 있다. 비록 때에 따라 격을 변하여 스스로 자기 법을 세운 것도 있지만, 그러나 발등(撥鐙)·포백(布白) 등의 식은 근일의 대가로서 왕허주(王虛舟)·장득천(張得天)·유석암(劉石庵) 여러 사람에 이르러도 마치 인(印)이 인주에 찍힌 것과 같아서 일호도 감히 그 테두리 안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우군(右軍)·대령(大令)의 진적에도 오히려 현존한 것이 있어 증거가 명백한데, 동쪽 사람은 다 꿈에도 미쳐가지 못하고 벽을 향해 헛되이 만들어내며 전혀 억설로써 스스로 속이고 남까지 속이는 것이다. 궁벽하고 먼 시골 구석은 더욱 이 무리들에게 미오(迷誤)되고 있으니 깊이 서글프고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청성(靑城) 윤생이 자못 혜식(慧識)을 갖추어 송 나라 대관(大觀) 시대의 고천(古泉) 한 개를 얻게 되자 그 서체를 사랑하여 크게 힘을 내어 임하고 익혀 능히 그 뜻을 터득하였으니, 만약 그 천면(泉面)의 네 글자를 영해(領解)한다면 백 글자를 당할 수 있어서 천게일주(千偈一炷)의 묘리(妙理)가 모두 족하여 모자람이 없음을 볼 것이다.
지금 두 왕씨의 진적으로는 오직 쾌설시청(快雪時晴)송리삼백(送梨三百)이라는 약간의 글자일 뿐인데 오히려 비궤(棐几)의 풍류를 볼 수 있어 산음(山陰)의 길을 물을 수 있으니 천면(泉面)의 네 글자도 역시 그와 다름이 없다. 천(泉) 자는 본시 송 나라 도군(道君)의 수금서(瘦金書)인데 이는 저하남(褚河南)의 신수(神髓)가 되어 위로 서한(西漢)의 동용(銅甬)의 글자를 소급할 수 있다.
지금 윤생의 글씨를 보니 저도 몰래 경이함과 동시에 희환(喜懽)의 인연을 말릴 수 없어 이를 써서 준다.
윤생은 예전에 숙신(肅愼)의 석노(石砮)를 수장하였으니 이를 얻은 것만으로도 이미 속물(俗物)의 산부(酸腐)한 기를 갉아버리기에 족한데 하물며 겸하여 대관의 천자를 익힘에 있어서랴. 힘써주기 바란다.

[주D-001]발등(撥鐙) : 서법의 명사임. 광천서발(廣川書跋)에 오융(隖融)이 일찍이 회소(懷素)에게 발등법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니, 말하기를, “이를테면 나란히 말을 탔는데 등자(鐙子)가 서로 범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하였음. 대개 등(鐙)은 마방(馬旁)의 각답(脚踏)을 이름이고 발등은 필획의 서로 추양(推讓)함을 이름인데 말을 탄 자가 능히 발전(撥轉)하여 서로 피하는 것과 같다는 말임. 누약(樓鑰)의 시에 "李王深得撥鐙法 筆力遒勁雄江東"이라 하였음.
[주D-002]포백(布白) : 서법에 관한 말인데 그 공백(空白)의 곳을 포치(布置)하여 착묵(着墨)의 곳과 소밀(疏密)이 상간(相間)하게 함을 이른 것임. 청 등석여(鄧石如)는 이르기를, “密處不使通風 疏處可使走馬"라 하였는데 곧 포백의 묘(妙)를 가리킨 것임.
[주D-003]고천(古泉) : 즉 고전(古錢)임. 고대에는 전(錢)을 천(泉)이라 일렀는데 사방에 유행하여 막힘이 없음을 이른 것임.
[주D-004]괘설시청(快雪時晴) :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을 이름인데 왕희지의 진적(眞跡)으로 첫머리 네 글자를 따서 첩명이 된 것임. 현재 대만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
[주D-005]송리삼백(送梨三百) : 송리삼백첩을 이른 것인데 왕헌지(王獻之)의 진적으로 현재 대만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
[주D-006]비궤(棐几) : 비목(棐木)으로 만든 궤를 말함. 《진서(晉書)》 왕희지전(王羲之傳)에 "일찍이 문생(門生)의 집에 들러 비궤가 활정(滑精)함을 보고 갑자기 필흥(筆興)이 솟아 글씨를 썼는데 진초(眞草)가 서로 반반이었다. 그 뒤에 그 아버지가 잘못 알고 깎아버렸는데 문생이 깜짝 놀라 여러 날을 두고 고심하였다." 하였음.
[주D-007]송 나라……수금서(瘦金書) : 송 휘종(宋徽宗)이 스스로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라 하였고, 수금서는 휘종은 행초(行草)나 정서(正書)의 필세(筆勢)가 다 경일(勁逸)하여 처음에는 설직(薛稷)을 배우다가 그 법도를 변하여 스스로 수금체라 하였음.
[주D-008]동용(銅甬)의 글자 : 동용명(銅甬銘)을 이름인데 그 명(銘)에 "谷口銅甬 始元四年 在馮翊造"라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