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희술하여 모납에게 주다[戲述贈某衲]

천하한량 2007. 3. 9. 20:14
희술하여 모납에게 주다[戲述贈某衲]

묘희(妙喜)가 편집한 《정법안장(正法眼藏)》환기(幻寄)가 각(刻)한 《지월록(指月錄)》의 이 두 서는 약간의 법칙이 되는 공안(公案)을 채취하여 후학들에게 보여준 것인데, 다만 어구(語句)가 첨신(尖新)하고 기봉(機鋒)이 민첩한 것만을 숭상하였으며 관문을 뚫는 안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염제(拈提)한 것이 스스로 먼저 잇점을 상실하여 진종(眞宗)에 합치되지 못한 것이다.
무릇 이 불료(不了)의 언구(言句)에 대하여 역대의 명안(明眼)과 선지식(善知識)들은 그것이 제일의 의체(義諦)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혹은 조·부(祖父)가 물려준 것으로서 단지 전해 내려온 가보로 삼기도 했고 혹은 제방(諸方)의 점검(點撿)으로 인하여 다투는 꼬투리를 일으킬까 해서 곡호(曲互)함이 없지 않으며, 비단 분명히 지척(指斥)하려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우선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 취하여 부합하고 염제(拈提)하여 방촌(方寸)의 나무를 가져다 솟겨 올려 잠루(岑樓)와 높이를 같이한 것이니, 역시 어찌할 수 없어 애오라지 문전(門前)에서 감돌고 선뜻 나가지 못한 것이지 어찌 진실로 조사(祖師)의 전법(傳法)이 이에 있다 여겼으리오. 초기(初機)와 후학(後學)들은 사람마다 생지(生知)의 혜안(慧眼)을 갖추지 못했은즉 사람을 그르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부대사(傅大士)라든가 대주해(大珠海)라든가 단하천연(丹霞天然)이라든가 영운근(靈雲勤)이라든가 덕산감(德山鑒)이라든가 흥화장(興化獎)이라든가 장경릉(長慶綾)이라든가 풍혈소(風穴沼)라든가 분양소(汾陽昭)라든가 단사자(端師子)라든가 대혜종고(大慧宗杲)라든가 홍각범(弘覺範)이라든가 고봉묘(高峯妙) 같은 이들은 다 종문(宗門)에서 역대로 추앙하여 후학을 제지(提持)하는 종장(宗匠)으로 삼았는데도 어쩐지 그 기연(機緣)과 시어(示語)가 하나도 뽑을 만한 것이 없다.
애오라지 두어 끝을 들어 그 지(旨)를 보이는 바이다. 부대사의 이른바,

밤마다 부처를 안고 졸며 / 夜夜抱佛眠
아침이면 도로 함께 일어나곤 하네 / 朝朝還共起
일어나나 앉으나 늘 서로 따르며 / 起坐鎭相隨
말을 하건 안하건 거처를 함께 하네 / 語黙同居止
능히 만상의 주가 되고 / 能爲萬象主
사시를 따라 시들지 아니하네 / 不逐四時凋

의 글귀들이며, 장경릉이 당(堂)에 올라 말하기를 "도반(道伴)을 붙들어 어깨를 어울리고 일생을 지내며 학에 참(參)하는 일을 끝마쳤다." 한 것과 중[僧]이 흥화장에게 묻되 "사방 팔면에서 올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흥화는 "중간을 타(打)한다."라 한 이와 같은 어구는 모두 단지 한낱 조조(照照)하고 영령(靈靈)함을 해득했을 뿐이다. 곧 부대사가 이른바,

빈 손으로 호미를 쥐고 / 空手把鉏頭
걸어가며 수우를 탔네 / 步行騎水牛
사람은 다리 위에서 지나가니 / 人從橋上過

다리는 흘러도 물은 흐르지 않네 / 橋流水不流
라는 것도 역시 범정(凡情)의 집착한 소견을 벗어나는 데 도달했을 따름이며, 보화(普化) 같은 이는 "밝은 데로부터 오면 밝은 데를 향하고 어두운 데로부터 오면 어두운 데를 향하고 사방 팔면으로부터 오면 선풍(旋風)을 향하고 허공으로부터 오면 연가(連架)로 향한다." 했는데, 이 말은 비록 구경(究竟)은 아니나 흥화의 "중간으로 향한다."는 말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뿐이겠으며 방거사(龐居士)의 "한 입으로 서강(西江)의 물을 다 들이마신다. [一口吸盡西江水]"와 같은 것은 바로 종래에 전해 내려 극칙(極則)으로 삼은 자가 많으나 다만 한낱 "빛이 만 형상을 삼킨다. "는 것을 알았을 따름이며 어찌 일찍이 발뿌리가 땅에 붙었겠는가. 때문에 오조(五祖)는 부연한 바,
한 입으로 서강 물을
다 들이마시니 / 一口吸盡西江水
만 길의 깊은 못이
다 되어 바닥이 났네 / 萬丈深潭窮到底
약약하여 조주의 교와
같지 않으니 / 略約不似趙州橋
밝은 달 맑은 바람에
어찌 비할까본가 / 明月淸風安可比
라고 한 이 송(頌)은 가위 방온(龐縕)의 결함을 보충했다 할 것이며, 방파(龐婆)의 "백초의 머리 가에 조사의 뜻[百草頭邊祖師意]"이라는 글귀는 더욱 추솔(粗率)하고 천박한데 무지(無知) 광참(狂參)들은 일컬어 구경(究竟)의 설로 삼고 있다. 분양소(汾陽昭) 같은 이도 십지동진(十智同眞)을 제외하면 기타의 어구(語句)는 하나도 취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견지라면 십지동진의 설도 역시 해로(解路) 속에서부터 얻어 온 것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와 같이 추연(推演)하고 부포(敷布)하려 한다면 어찌 한정이 있겠으며, 십지동진이라는 것도 역시 무엇이 그다지 중하다 하리오. 만약 초학의 의심나는 점을 열어주기로 한다면 어찌 꼭 이와 같이 말이 많아야 하겠는가. 한갓 진참(眞參)과 실오(實悟)의 사람으로 하여금 견련(牽連)되어 해로(解路)로 들어가게 할 뿐이다.
덕산(德山) 같은 이는 바로 종래 역대의 추숭(推崇)하는 고추(古錐)이지만 자세히 수구(搜求)하여 보면 수시(垂示)한 기연(機緣)은 도리어 한 칙(則)도 채택할 만한 것이 없고 한낱 ‘본래 언설이 없다[本無言說]’는 이치를 획득한 데 지나지 아니하며, 천하의 늙은 화상(和尙)들의 혀 끝으로 지위를 속이는 일을 입지 않았을 뿐이요, 향상의 일착(一着)은 밟아 가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위산(潙山)의 말이 진흙 속에 가시가 있어 "덕산(德山)이 뒤로 고봉정상(孤峯頂上)을 향하여 초막을 얽어놓고 부처를 비웃고 조(祖)를 꾸짖으러 갔다."라 하였으니, 가위 덕산을 들어 두어 마디 말로 판가름을 다한 것이다. 그 탁발(托鉢)의 공안 같은 것은 역시 초학의 의심난 점을 계발(啓發)할 만한 정도이며 본분(本分)과 더불어는 털끝만큼도 교섭(交涉)이 없는데 하물며 무슨 기이하고 특별한 것이 있어서 곧장 수백천년의 제창(提唱)을 얻었겠는가. 자못 이해가 되지 않으며 암두(巖頭)·설봉(雪峯) 같은 이는 실로 사(師)에 비해 나은 점을 보였지만 그러나 역시 원통(圓通)의 곳에는 이르지 못하여 그 법사(法嗣) 현사(玄沙)와 비교하면 오히려 백 보나 모자란다. 대주해(大珠海)의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같은 것은 초기(初機)를 제창한 것에 불과하며 오로지 정문(頂門)의 정안(正眼)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그 마조(馬祖)의 상탄(賞歎)하였다는 말은 반드시 확실한 것이 아니다. 묘희(妙喜) 같은 이는 바로 수백 년 동안 명망이 해내(海內)에 중했던 사람이지만 그 《무고전록(武庫全錄)》은 상세히 뒤져보니 그 시어(示語) 기연(機緣) 속에서는 한 가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으며, 그 고덕(古德)을 염제(拈提)한 것도 또한 간간이 투탈(透脫)의 논은 있으나 지리(支離)하고 오류(誤謬)한 곳이 매우 많은 것을 보면 참다운 지견을 갖춘 자는 아니고 역시 한낱 본래의 미광(微光)을 인식하여 식해(識解)와 학문을 써서 면강(勉强)하고 확충한 소치이며 실지로 관을 뚫은 반려(伴侶)는 아니다.
영운근(靈雲勤)의 "청산은 원래 움직이지 않는데 흰 구름은 자유로이 가고 오누나[靑山原不動 白雲任去來]"라는 글귀 같은 것은 역시 일류(一流)에 속하지만 풍혈소(風穴沼)의 기록 속에 기재된 것에 이르러서는 삼현지요(三玄指要)를 묵오(黙悟)한 데에 불과하며, 그 어구로 노승(老僧)·도리(闍黎)와 조사(祖師)·교의(敎意) 같은 것은 다 좌우로 양쪽을 치는 설이니 가국(家國)이나 야로(野老)나 노승이나 도리가 어찌 두낱이 있으리오. 비록 좌우 양박(兩拍)을 가져 해로(解路)를 분식(粉飾)하여 같은 속에서도 다른 점이 있고 다른 속에서도 같은 점이 있는 것 같이 하였으나 그 빈축(顰蹙)과 안첩(安貼)이 두 토막으로 이루어졌으니 어떻게 그를 덮어갈 수 있겠는가. 수연불변(隨緣不變)을 답(答)하면서는 "도롱이를 펼치고 비스듬히 일천 봉(峯) 밖에 서서 물을 끌어 오로봉(五老峯) 남새밭을 적셔 준다.[披簑側立千峰外 引水澆蔬五老峯]"라는 것이며, 또 이를테면 "벽(壁)이 천 길을 높이 솟으니 뉘 감히 정안(正眼)으로 넘겨다 보랴."라는 글귀는 현요(玄要)의 속으로부터 지해(知解)하여 온 것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 비단 제일 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우선 후학과 불법에 그르침을 끼쳐 줄 뿐이어서 털끝만큼도 비익(稗益)될 게 없다. 이 진위(眞僞)의 분변은 만약 눈 밝은 사람을 만난다면 단연코 그림자도 도망하지 못할 것이다.
단하(丹霞)가 목불(木佛)을 태운 것 같은 것은 그 어록을 살펴보면 견지(見地)가 단지 무심에 그칠 뿐이니 단하의 소견에 의거하면 목불의 밖에 별도로 부처가 있단 말인가. 단하에 있어서는 불견(佛見)을 제외하고서 기(奇)를 세우고 상(相)을 쓸어버렸다 여긴 것이지만 온몸을 통한 흙탕물은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다.
이를테면 한 고덕(古德)이 전(殿) 앞에서 부처를 등지고 앉고 또 한 고덕이 전에 들어가 부처를 향해 침을 뱉으니 곁에 중이 말하기를 "왜 부처를 등지고 앉고 부처를 향해 침을 뱉는가? " 하자, 대답이 "부처 없는 곳에 오면 아무개와 더불어 침을 뱉고 부처 없는 곳을 지적해 오면 아무개와 더불어 등지고 앉는다."라는 이 등(等)의 견해는 단하와 더불어 마찬가지여서 다만 소월(掃月)하기 이전의 한 상(像)만 알 뿐이요, 도리어 스스로 천상 만상을 잡은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홍각범(弘覺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월록》 중에서 그 염제를 채택한 곳이 몹시 많은데 그 지리(支離)하고 유망(謬妄)한 곳은 환기(幻寄)와 더불어 동일하여 가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하겠으니 재론(再論)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심지어 삼끽시자(三喫侍者) 파자소암(婆子燒庵) 끽유자(喫油糍) 야호(野狐) 참묘(斬猫) 서우선(犀牛扇) 대산파자(臺山婆子) 자호구(子湖狗) 향엄상수(香嚴上樹) 운문선자(雲門扇子)와 화산고(禾山鼓), 그리고 자명방(慈明榜)의 등속 같은 공안은 다 예나 이제나 총림(叢林) 속에서 나날이 들어 보여주는 것이니 역시 다 취하지 않는다.
대개 언어로는 말할 수 없다지만 초기(初機)를 계발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며 이것이 구경은 아니다. 다만 이 등의 공안으로 해서 오히려 향상의 일로(一路)가 진무(楱蕪)한 데 이르지 않은 것이다.
총이논지(總以論之)하면 이 일은 따가운 해가 빛나는 것 같고 큰 불이 모인 것 같아서 제(提)하면 오로지 제하고 인(印)하면 오로지 인하는데 마침내 너무도 부처의 정지(正旨)를 통달하지 못하고 다 정(精)을 탈롱(奪弄)하는 데에 속하고 말았으니, 그 말이 비록 다 수천백 년 이래에 사람마다 제창하는 바요, 그 사람이 비록 다 수천백 년 이래로 다 추숭(推崇)하는 바이지만 다 두어두고 논하지 않는다.
대개 역대로 그 이름에 떨어서 지적해 낸 사람이 없었는데 후학이 어찌 능히 다 참방(參方)의 안목을 갖추었으리오. 그 눈빛이 팥만한 자는 반드시 금인지 놋쇠인지 구별이 없고 흰지 검은지 분별을 못할 것이며 이 지위에 이르면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어떤 고덕의 이르러 간 경지에 이르렀다 하며 망령되이 참학(參學)의 일을 끝냈다고 하니 이 어찌 ‘구주의 철을 다 모아서 저 하나의 착도를 만들다 못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등의 어구는 비록 초기를 제철(提掇)하고 사람의 정신(淨信)을 일으키는 데에는 당초에 공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러나 그 공이 매우 적어서 능히 진정으로 마음을 일으켜 참학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화성(化城)에 중지하게 하는 것은 허물이 이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니 그 과실이 너무도 크다 하겠다.

[주D-001]묘희(妙喜) : 종고(宗杲)를 말함인데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로 자는 담회(曇晦), 호는 묘희, 또는 운문(雲門)이라고도 한다. 선주(宣州) 영국인(寧國人)으로 속성은 해씨(奚氏)인데 13세에 향교(鄕校)에 들어가 유학(儒學)을 닦고 16세에 동산(東山) 혜운사(慧雲寺)의 혜제(慧齊)에게서 득도(得道)하여 이듬해에 구족계를 받았음. 효종제(孝宗帝)의 귀의를 받아 대혜선사(大慧禪師)라는 칭호는 하사받고 융흥(隆興) 원년에 입적하였음.
[주D-002]정법안장(正法眼藏) : 청정법안(淸淨法眼)이라고도 하는데 선가(禪家)에서는 이것을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심인(心印)으로 삼고 있음.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 一)》에 "佛在靈鷲山中 大梵天王以金色婆羅華 持以獻佛 世尊拈華示衆 人天百萬悉皆罔攝 獨有迦葉破顔微笑 世尊曰吾有正法眼藏涅槃妙 一心 分付迦葉"이라 하였음.
[주D-003]환기(幻寄) : 환기정유(幻寄正猷)를 이름인데 조동종(曹洞宗)으로 호는 죽거(竹居), 또 화화선(化化禪), 환기수(幻寄叟)라고도 칭함. 살마이집원(薩摩伊集院)의 사람으로 속성은 장씨(長氏)임.
[주D-004]지월록(指月錄) : 지(指)로써 교(敎)에 비유하고 달로써 법(法)에 비유한 것임. 《능엄경 2(楞嚴經二)》에 "如人以手指月示人 彼人因指當應看月 若復觀指以爲月體 此人豈亡失月體 亦亡其指何以故 以所標指爲明月故"라 하였음.
[주D-005]염제(拈提) : 술어(術語)임. 선림(禪林)의 설법이 그 결말에 있어 고측(古則)을 염기(拈起)하여 법좌(法座)를 마치는 것을 염제결좌(拈提結座)라 이르는데 곧 염제고측(拈提古則)의 약칭임.
[주D-006]진종(眞宗) : 진실의 종지(宗旨)로서 각기 자기가 소신(所信)하는 종(宗)을 일컫는 말임. 《대승의장 1(大乘義章一)》에 "辨此實性 故日眞宗"이라 하였음.
[주D-007]불료(不了) : 실의(實義)를 은부(隱覆)하고 방편(方便)의 설을 만드는 것을 이름. 《열반경 6(涅槃經六)》에 "不了義經是聲聞乘"이라 하였음.
[주D-008]잠루(岑樓) :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方寸之木 可使高於岑樓"라는 대문이 있는데, 조기(趙岐) 주(注)에 "잠(岑)은 산의 예정(銳頂)이다." 했고, 초순(焦循)은 "석명(釋名)이다." 했는데, 잠(岑)은 참참연(嶄嶄然)하게 높다는 것이요, 누(樓)는 곧 배루(培樓)의 누로 역시 퇴고(堆高)의 뜻이라고 함.
[주D-009]초기(初機) : 처음 시작과 같은 말임.
[주D-010]부대사(傅大士) : 인명인데 성은 부(傅), 이름은 옹(翁), 자는 현풍(玄風)임. 남제(南齊)건무(建武) 4년생으로 진 선제(陳宣帝) 대건(大建) 원년에 죽었다. 유발(有髮)의 도사(道士)이므로 성을 들어 부 대사라 했고 자칭(自稱)은 선혜대사(善慧大士)라고 했는데, 대사란 바로 보살의 번명(翻名)이다. 부대사전(傅大士傳)이 있어 《용화참법(龍華懺法)》의 뒤에 붙여 있으며 또 《부대사록(傅大士錄)》 4권이 있어 세상에 현행(現行)함.
[주D-011]대주해(大珠海) : 당(唐) 사문(沙門) 혜해(慧海)인데 속성은 주(朱)요, 건주인(建州人)으로 월(越) 대운사(大雲寺) 도지화상(道智和尙)에게 귀의하여 수업하였으며 강서(江西)에 이르러 마조(馬祖)에게 참알(參謁)하여 깨침을 얻었다. 마조는 중(衆)에게 이르기를, “월(越)에 대주(大珠)가 있어 원명 광투(圓明光透)하고 자재(自在)하여 가리고 막힌 곳이 없다." 하였다. 중들 가운데 사(師)의 성이 주씨임을 아는 자가 있어 서로서로 추식(推識) 결계(結契)하여 당시에 대주화상이라 호하였음.
[주D-012]단하천연(丹霞天然) : 인명으로 등주(鄧州) 단하산(丹霞山)의 천연선사(天然禪師)인데 석두(石頭)를 사승(嗣承)하였다. 처음 강서(江西)에 가서 마조(馬祖)를 뵐 때 두 손으로 복두각(幞頭脚)을 벌리어 마조가 그것을 보고서 말하기를 "남악(南岳)의 석두가 네 스승이다." 하였다. 그래서 바로 석두를 찾아가 역시 손으로 복두각을 벌리니, 석두는 말하기를 "조창(槽廠)에 가 있거라." 하므로 단하는 예사(禮謝)하고 행자(行者)의 방에 들어가서 찬역(爨役)을 잡은 적이 무릇 3년이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석두가 중(衆)에게 이르기를 "내일은 불전(佛殿) 앞의 풀을 베고자 한다." 하였다. 이튿날 대중(大衆)이 모두 가서 각기 괭이와 낫을 가지고 풀을 베는데 단하는 유독 분수(盆水)로 머리를 씻고 석두 앞에 꿇어앉으니 석두는 웃으면서 설교하여 주었다. 단하는 드디어 귀를 가리고 달려가서 다시 마조(馬祖)를 알현하고 승당(僧堂)에 들어가 성승(聖僧)의 목에 앉으니, 마조는 말하기를 "내 아들 천연(天然)이다." 하므로 곧 마조에게 절하고 사(師)가 준 법호(法號)를 감사히 여겨 천연이라 이름하였다. 장경(長慶) 4년에 86세로 입적(入寂)하여 칙시(勅諡)는 지신선사(智神禪師)이다.
[주D-013]영운근(靈雲勤) : 인명으로 당 복주(福州) 영운산(靈雲山) 지근선산(志勤禪師)인데 본주(本州) 장계인(長谿人)임. 처음 위산(潙山)에 있을 때 도화(桃花)를 보고 오도(悟道)하였다. 송(頌)이 있어 이르기를 "三十年來尋劍客 幾回葉落又抽枝 自從一見桃花後 直至如今更不疑"라 했는데, 위산이 송을 보고 그 깨달은 바를 말하여 서로 합부(合符)가 되었다. 《五燈會元 四 靈雲章》
[주D-014]덕산감(德山鑑) : 인명으로 당 낭주(郎州) 덕산원(德山院) 석(釋) 선감(宣鑑)인데 성은 주씨(周氏), 검남인(劍南人)이며 어려서 출가하여 경률(經律)에 깊고 밝되 가장 《금강경》에 통달하니 당시에 주금강(周金剛)이라 일컬었음.
[주D-015]흥화장(興化獎) : 인명으로 위부(魏府) 홍화산 존장선사(存獎禪師)인데 임제현(臨濟玄)의 법사(法師)이며 후당(後唐) 장종(莊宗)의 사(師)이다. 입적 후에 칙시(勅諡)는 광제선사(廣濟禪師)이다. 《傳燈錄 十二》
[주D-016]장경릉(長慶稜) : 장경혜릉(長慶慧稜)을 이름인데 속성은 손씨(孫氏)로 13세에 출가하여 소주(蘇州) 통현사(通玄寺)에서 수계(受戒)하여 영운지근(靈雲志勤)·설봉의존(雪峯義存) 등에게 참(參)하고 뒤에 설봉의 법을 이어받았다. 천우(天祐) 3년에 천주자사(泉州刺使) 왕정빈(王廷彬)의 청에 의하여 초경원(招慶院)에 주거하였고 그 뒤에 복주(福州) 장경원(長慶院)에 주거하여 초각대사(超覺大師)라 하였음.
[주D-017]풍혈소(風穴沼) : 풍혈연소(風穴延沼)를 이름인데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부(杭州府) 여항현(餘杭縣) 사람으로 성은 유씨(劉氏)이다.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응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출가하여 항주 개원사(開元寺) 지공(智恭)에게 귀의하여 낙발(落髮)하고 천태(天台)의 지관(止觀)을 익혔음. 후당(後唐) 장흥(長興) 2년에 여주(汝州)의 풍혈사에 들어가 7년을 주거(住居)하고 후진(後晉) 천복(天福) 2년 정월에 주목(州牧)의 청에 의하여 풍혈사에서 개당(開堂)하자, 학도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임제(臨濟)의 법도가 크게 떨쳤음. 송(宋) 개보(開寶) 6년 8월에 78세로 입적하였다. 《景德傳燈錄 第十三》
[주D-018]분양소(汾陽昭) : 송(宋) 지소선사(智昭禪師)를 이름.
[주D-019]단사자(端師子) : 송 오흥(吳興) 사람으로 속성은 구씨(丘氏), 법명은 정단(淨端), 오산(吳山)에 주석하였다. 1103년에 시적(示寂).
[주D-020]홍각범(弘覺範) : 송 적음존자(寂音尊者) 청량선사(淸涼禪師)를 이름인데 이름은 혜홍(慧洪), 자는 각범(覺範)임.
[주D-021]고봉묘(高峯妙) : 고봉선사의 호로 이름은 원묘(原妙)이다. 송 가희(嘉熙) 무술년에 태어났지만 운암(雲巖) 흠(欽)을 북간(北磵)에서 참알하여 득법(得法)하였다.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 기묘에 천목 서봉(天目西峯)에 올라 장공동(張公洞)에 들어가 제(題)하기를 사관(死觀)이라 하고 문밖을 나가지 않은 것이 15년이었으며, 학도들이 참정(參請)하여 한가한 날이 없었다. 《고봉록(高峯錄)》이 있어 세상에 성행하며 57세에 입적하였음.
[주D-022]기연(機緣) : 기는 근기(根機), 연은 인연을 이름인데 중생이 선근(善根)의 기(機)가 있어 교법을 받는 인연이 된 것을 말함.
[주D-023]중간을 타(打)한다 : 《오등회원(五燈會元)》11 흥화장(興化章)에 "僧問四方八面來時如何 師云打中間底 僧便禮師云 山僧昨日赴個村齌"라 하였음.
[주D-024]보화(普化) : 인명으로 당 진주(鎭州) 보화화상(普化和尙)을 이름인데 어느 곳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며 반산(盤山) 보적선사(寶積禪師)를 섬겨 진결(眞訣)을 밀수(密受)했는데 오직 목탁 1개만 두드리며 양광(佯狂)하여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감통(感通) 원년에 흔들리는 목탁소리가 공중에 퍼지며 조용히 서거하였다. 《高僧傳 二十》·《傳燈錄 十》
[주D-025]방거사(龐居士) : 인명인데 마조(馬祖)를 사승(嗣承)하여 "좋은 눈 조각조각 별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 [好雪片片 不落別處]"는 기어(奇語)가 있음. 《碧巖 四十二則》
[주D-026]십지동진(十智同眞) : 분양소선사(汾陽昭禪師)가 중(衆)에게 설교하기를 "무릇 설법하는 자는 모름지기 십지동진을 갖추어야 한다. 1은 동일질(同一質), 2는 동대사(同大事), 3은 총동참(總同參). 4는 동진지(同眞智), 5는 동편보(同徧普), 6은 동구족(同具足), 7은 동득실(同得失), 8은 동생살(同生殺), 9는 동음후(同音吼), 10은 동득입(同得入)이다. 만약 십지동진을 갖추지 못하면 사정(邪正)이 분간되지 못하고 치소(緇素)가 나누어지지 못하여 능히 인천 안목(人天眼目)이 되지 못함으로써 시비를 결단하지 못한다." 하였다.《人天眼目 卷上》
[주D-027]위산(潙山) : 당 담주(潭州) 위산선사로서 이름은 영우(靈佑)인데 복주(福州) 장계인(長谿人)으로 나이 15세에 출가하여 항주(杭州) 용흥사(龍興寺)에서 대소승교(大小乘敎)를 강구하였으며, 23세에 강서에 노닐면서 백장해선사(百丈海禪師)를 참알하여 명심법(明心法)을 궁구하였다. 그리고 위산(潙山)에 가서 범우(梵宇)를 지었는데 무종(武宗)의 훼석(毁釋)을 만나 머리를 싸매고 민간에 숨었었다. 태종(太宗) 초에 배휴(裵休)가 사(師)를 청하여 위산으로 돌아갔으며 태종 7년에 83세로 입적하였다.
[주D-028]탁발(托鉢)의 공안 : 설봉(雪峯)이 덕산(德山)에게 있으면서 반두(飯頭)가 되었는데 하루는 밥이 더디어 덕산이 탁발(托鉢)하고 법당에 이르자, 설봉은 반건(飯巾)을 말리면서 덕산을 보고 말하기를, “這老漢 鐘未鳴 鼓未響 托鉢向什麽處去" 하니, 덕산은 바로 방장(方丈)으로 돌아왔다. 설봉은 그 일을 암두(巖頭)에게 말하니, 암두는 말하기를, “대소(大小)의 덕산이 아직 끝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자, 덕산은 듣고서 시자(侍者)를 시켜 암두를 불러왔다. 그리고 묻기를 "너는 노승(老僧)을 좋아하지 않느냐?" 하니, 암두는 가만히 그 뜻을 열어주었다. 덕산은 다음날에 와서 당(堂)에 오르니 과연 보통 때와 같지 않았다. 암두는 승당(僧堂) 앞에 와서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우선 노한이 끝 구를 이회(理會)한 것은 기쁘지만 다른날 천하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다.《會元巖頭章 無門關》
[주D-029]현사(玄沙) : 당 복주(福州) 현사산(玄沙山) 종일선사(宗一禪師)로서 이름은 사비(師備)인데 소년에 어자(漁者)가 되었다가 30세에 갑자기 출가할 생각이 들어서 부용(芙蓉)의 훈선사(訓禪師)에게 가서 체발수구(剃髮受具)하였으며, 이윽고 설봉 존선사(雪峯存禪師)에게 나아가 현지(玄旨)를 계오(契悟)하였다. 양 태조(梁太祖) 개평(開平) 2년에 75세로 입적하였음.《會元 七》·《傳燈錄 十八》
[주D-030]도리(闍黎) : 승도(僧徒)의 사(師)인데 그 뜻은 정행(正行)으로 제자의 품행을 능히 바로잡음을 이름이다.
[주D-031]수연불변(隨緣不變) : 연(緣)을 따른 동작에도 불변의 뜻이 있다는 것임. 진여(眞如)는 비록 그 체(體)가 변하지 않으나 연(緣)에 닿으면 만유(萬有)가 생겨나므로 수연불변이라 한다.
[주D-032]단하(丹霞)가……것 : 단하천연선사(丹霞天然禪師)가 일찍이 낙동(洛東) 혜림사(慧林寺)에 당도하여 추운날을 만나자 마침내 전중(殿中)에서 목불(木佛)을 가져다 태우면서 불을 쬐고 있으니, 원주(院主)가 우연히 보고서 꾸짖으며 "어째서 내 목불을 불태우는가?" 했다. 사(師)는 지팡이로 재를 뒤적이며 "나는 태워서 사리(舍利)를 가지려고 한다." 하니, 주(主)는 "목불이 사리가 어디 있는가?" 하자, 시는 "이미 사리가 없으니 다시 양존(兩尊)을 청하여 태워 갖겠다." 하였다고 함.《五燈會元 丹霞章》
[주D-033]불견(佛見) : 불(佛)의 정지견(正知見)을 이름. 《범망경 상(梵網經 上)》에 "轉一切見入佛見 佛見入一切見"이라 하였음.
[주D-034]고덕(高德) : 높은 덕을 지닌 승으로서 옛사람이 된 자를 말함.
[주D-035]파자소암(婆子燒庵) : 공안(公案)임. 옛날에 파자가 한 암주(庵主)를 20년간 봉양하였는데 항상 젊은 여자를 시켜 밥을 보내 받들게 하였다. 하루는 그 여자로 하여금 동침하게 하며 "다른 때와 어떠한가?" 하고 물어보도록 하였는데, 암주는 "마른 나무가 한암(寒巖)에 기대니 삼동(三冬)에 따스한 기운이 없다."고 하였다. 여자가 돌아가서 파자에게 전하니, 파자가 "나는 20년 동안 일개 속한(俗漢)을 공양했다." 하고 드디어 암주를 내쫓고 암자를 소각하였음.《五燈會元》
[주D-036]끽유자(喫油糍) : 당낭주(朗州) 덕산원(德山院) 선감(宣鑑)이 어려서 출가하여 경률(經律)에 깊고 밝되 가장 《금강경》을 통달하였다. 그는 남방 선종의 도를 믿지 아니하고 그것을 때려부수고자 하여 《금강경》을 소초(疏鈔)하여 풍주(灃州)에 당도하니, 한 파자(婆子)가 유자(油糍)를 팔고 있으므로 그것을 사서 점심거리로 삼으려고 했다. 파자는 선감이 짊어진 것을 가리키며 그것이 뭐냐고 하자, 사(師)는 《금강경》소초라고 대답하였다. 파자는 말하기를 "내가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으니 만약 알아맞힌다면 내가 유자를 대접할 것이고 알아맞히지 못한다면 딴 곳으로 가시오." 하니, 물어보라고 했다. 파자가 "경중(經中)에 '過去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이라 했는데 상좌(上座)는 어느 심(心)을 점(點)치고자 하는가?" 하니, 사는 아무 말을 못했다. 파자는 드디어 용담(龍潭)으로 가서 참알하라고 지시하므로 곧장 풍주 용담사에 가서 법당에 당도하여 이르기를 "용담을 들은 적이 오래인데 담(潭)도 보이지 아니하고 용도 나타나지 아니한다." 하자, 용담화상
[주D-037]야호(野狐) : 백장 대지선사(百丈大智禪師)에 대한 야호를 말한 것임. 백장이 당(堂)에 오르면 항상 한 노인이 설법을 듣고 중(衆)을 따라 흩어져가는데 하루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백장은 묻기를, “앞에 서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자, 노인은 "저는 아무개인데 지나간 가섭불(迦葉佛) 때에 일찍이 이 산에 머물렀었는데 학인(學人)이 있어 묻기를 '크게 수행한 사람도 도리어 인과(因果)에 떨어지는가?' 하기에 저는 대답이 그런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5백 년 뒤에 나서 야호의 몸으로 떨어진다.' 하였습니다. 지금 청하오니 화상(和尙)은 저를 대신하여 한 전어(傳語)를 내리어 야호의 몸을 벗게 해 주소서." 하므로 백장은 말하기를 "인과는 어둡지 않다." 하자, 노인은 그 말을 듣고 당장에 대오(大悟)하여 "저는 이미 야호의 몸을 벗어났습니다. 산 뒤에 머물러 있겠으니 망승(亡僧)의 사례에 의해 주소서." 하였다. 사(師)는 유나(維那)를 시켜 백퇴(白椎)로 대중에게 고하기를, “식후(食後)에 망승(亡僧)을 보낸다." 하니, 대중은 말하기를, “온 중이 다 편안하고 열반당(涅槃堂)에도 병든 사람이 없는데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식후에 사는 중을 거느리고 산 뒤 바위 밑에 가서 막대로 한 죽은 여우를 끌어내어 법대로 화장하여 주었다. 《會元 三 大智章》
[주D-038]참묘(斬猫) : 남천산(南泉山) 보원선사(普願禪師)의 참묘를 말한 것임. 하루는 동서(東西) 양당(兩堂)에서 고양이 새끼를 다투므로 남천은 보고서 고양이 새끼를 일으키며 "일러 맞추면 고양이 새끼를 구해 줄 것이고 맞추지 못하면 곧 베겠다." 하였다. 중이 대답이 없자, 남천은 곧 고양이 새끼를 베어 두 동강으로 만들었다.《傳燈錄 南泉章》
[주D-039]서우선(犀牛扇) : 염관(鹽官)의 서우선자(犀牛扇子)를 말함. 염관이 시자(侍者)를 불러 "나에게 서우선자를 갖다 달라." 하자, 시자는 "선자가 부서졌습니다." 하였다. 염관은 말하기를 "선자가 부서졌으면 나에게 서우(犀牛)를 돌려달라." 하니, 시자는 대답이 없었다고 함.
[주D-040]대산파자(臺山婆子) : 대산은 오대산(五臺山)을 이름인데 그 산의 노상(路上)에 한 파자가 있었다. 무릇 승(僧)이 대산을 가자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으면 파자가 "곧장 가면 된다고 하여 중이 겨우 서너다섯 걸음을 가면 파자는 또 말하기를 "사승(師僧)은 옆을 보지 말고 그대로 가시오." 하였다 함 《趙州錄》
[주D-041]향엄상수(香嚴上樹) : 당 등주(鄧州) 향엄산 지선사(智禪師)는 말하기를, “이를테면 사람이 나무에 올라서 입으로만 나뭇가지를 물고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잡지 못하고 다리도 나무를 밟지 못했는데 나무 밑에서 사람이 서래(西來)의 뜻을 물을 때, 대답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물은 바를 거역하는 것이 되고 대답하기로 하면 자기 목숨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자, 호두상좌(虎頭上座)가 말하기를, “나무에 오르면 곧 묻지 않거니와 나무에 오르지 않았으니 청컨대 화상께서 일러 주소서." 하니 사(師)는 크게 웃었다. 설두(雪竇)는 말하기를 "나무 아래에서 말하기는 쉬우나 나무 위에서 말하기는 어렵다. 노승이 나무에 오르거든 한번 물어보아라." 하였음《傳燈錄 十一》·《會元 九》
[주D-042]화산고(禾山鼓) : 화산해타고(禾山解打鼓)의 약칭임. 화산은 길주(吉州) 화산(禾山) 무은선사(無殷禪師)임. 화산이 하루는 승(僧) 조(肇)에게 보장론(寶藏論)의 말을 끌어대어 보이면서 "학(學)을 익히는 것을 문(聞)이라 이르고 학을 끊는 것을 인(隣)이라 이르는데 이 두가지를 넘어서야만 이것이 진과(眞過)가 된다." 하자, 승(僧)은 나와서 묻기를 "어떻게 해야 바로 진과입니까?" 하니, 화산이 말하기를 "解打鼓"라 하고, 또 묻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바로 진체(眞諦)입니까?" 하니, “解打鼓"라 하고, 또 묻기를 "즉심즉불(卽心卽佛)은 곧 묻지 않거니와 어찌 해야 바로 비심비불(非心非佛)입니까?" 하니, “解打鼓"라 하고, 또 묻기를 "향상(向上)의 사람이 올 때는 어떻게 대접해야 합니까?" 하니, “解打鼓"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을 화산의 사타고(四打鼓)라 함. 《碧巖 四十四則》·《會元 六》
[주D-043]자명방(慈明榜) : 자명은 승명(僧名)으로 조송(趙宋) 담주(潭州) 석상산(石霜山) 자명선사인데 이름은 초원(楚圓)이요, 분양소(汾陽昭)의 사(嗣)로 임제(臨濟)의 6세손임. 방(榜)은 봉(棒)을 이름인데 대고(待考).
[주D-044]구주의 철을……못 만들었다 : 《五代史 羅紹威傳》에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