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박중회 묘표(朴仲恢墓表)

천하한량 2007. 3. 9. 20:12
박중회 묘표(朴仲恢墓表)

군(君)의 휘(諱)는 홍량(弘量)이요 자(字)는 중회(仲恢)이다. 그 선조는 안동(安東) 사람인데 전조(前朝)로부터 대대로 송경(松京)에 살았다. 증조부는 지광(枝光)이요 조부는 우빈(遇彬)이요 부친은 종복(宗馥)인데 무과(武科) 출신이며, 모친은 홍씨(洪氏)와 이씨(李氏)인데 군은 이씨 소출이다. 영종(英宗) 을축 8월 25일에 나서 정종(正宗) 임인(壬寅)에 무과를 맞혔고 경신 정월 2일에 죽으니 송경 다비현(多肥峴) 태봉(胎峯) 서쪽 기슭 인좌(寅坐)의 벌에 장(葬)했다. 선조(先兆)를 따른 것이다. 초취(初娶)는 삭녕 최씨(朔寧崔氏)요 계취(繼娶)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인데 묘의 좌편 우편에 나누어 부(祔)하였다. 유언(有彦)·유항(有恒)·유간(有幹)·유점(有漸)·유재(有宰)·유화(有華)·유상(有象)·유수(有秀)·유성(有成)·유근(有根)·김언량(金彦亮)·최유혁(崔有奕)은 열 아들에 두 딸이요, 시엽(時燁)·시혁(時爀)·시섭(時燮)·시영(時榮)·시형(時炯)·시경(時慶)·시한(時翰)·시돈(時敦)·시정(時正)·시태(時泰)·시풍(時豐)·시백(時栢)·시징(時徵)·시겸(時謙)과 관기(觀基)·천기(天基)·영기(永基)는 손자 및 증손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군은 지성(至性)을 지니어 어렸을 적에 모친의 정구(井臼 물 긷고 방아 찧는 일)의 역사를 대신하니 모친이 말렸으나 막무가내였다. 기축, 경인 양년에 연달아 양친상을 만나고 조모 박씨는 상기도 살아남았는데 나이가 높아 앞을 못보니, 군은 아침 저녁으로 곁을 떠나지 않으며 옷도 입히고 머리도 빗기며 매양 식사 때면 고기·김치·간장·젓갈을 말로써 아뢰고 손으로써 받들어 원하는 것을 물어 올리되 수십 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며, 박씨의 세상을 마치는 동안 벼슬살이에는 뜻을 끊었는데 군도 마침내 늙어버렸던 것이다.
누이 하나가 일찍이 과부가 되었는데 우애가 독실하여 보호하기를 어린아이와 같이 하였으며, 자신은 끝내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집사람이 후사(後事)를 물으니 평범한 대답으로 "인륜에 돈독하라." 하고, 더 말을 해 달라 하자 "다시 할 말이 없다."라고 하였다. 아! 군의 시종(始終)을 이에서 볼 수 있다.
지금 군은 번창한데도 선조의 규모를 깍듯이 받들어 집은 다르면서도 울은 하나이며 살림은 나누어 가졌지만 재물은 달리함이 없고 화기가 애애하며 닭과 개들까지도 안락한 빛을 띠었으니 사람들이 여기가 임씨(林氏)의 촌장(邨莊)임을 알게 되며, 향리(鄕里)가 부러워 칭송하고 완염(惋琰)이 빛남을 발하니, 하늘이 효도하고 우애하는 어진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그 몸에 못하면 반드시 그 자손에게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D-001]완염(琬琰) : 석비(石碑)를 이름. 《효경 서(孝經 序)》에 "寫之琬琰 庶有補於將來"라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