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징》을 읽고서[讀喪服徵] |
《상복징》이란 바로 불간(不刊)의 서이며 서문 중에 낱낱이 든 여러 조문도 다 정밀하고 적확하여 크게 예가(禮家)에 공이 있다 하겠으나 다만 "장자를 위하여 참한다[爲長子斬]"한 조문은 능히 의심이 없지 않으며 그 "서자는 삼 년을 하지 않는다에 대한 술[庶子不爲三年述]"과 "정체가 상(上)에 있다의 의에 대한 술[正體於上義述]" 두어 편은 아무래도 상량(商量)이 있어야 될 것 같다.
대개 이 의는 이미 서건암(徐健菴)의 《독례통고(讀禮通考)》와 진미경(秦味經)의 《오례통고(五禮通考)》 두 서에 나타났는데 당초에 초주(譙周)·유지(劉智)에게서 그르쳤고 이양년(李良年)·성세좌(盛世佐) 같은 여러 사람들이 따라서 부화하여 정현(鄭玄)의 의를 등지고 억설을 신빙함을 면치 못하였다.
정 현이 그 선사 마융(馬融)의 의를 살짝 벽파한 까닭은 조(祖)를 계승하지 않는다는 대문을 의거한 것이며 가소(賈疏)와 공의(孔義)는 분명히 그 세수(世數)를 말했고 정의 의는 너무도 명백하다.
무릇 장자를 위하여 참한다는 것은 지극히 중하고 지극히 엄하여 복술(服術)의 안에서도 이 복과 같은 비례(比例)는 있지 않았다. 부모의 복은 은혜로써 더하거니와 장자의 복은 오로지 의로써 중한 것이니 이는 천경지의(天經地義)로써 일호(一毫)라도 사의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뇌차종(雷次宗)이, 천지를 능멸하고 존·친(尊親)을 혼동했다는 것으로써 말했으니 그 엄하고 중한 것이 이와 같다 하겠다.
정·체가 혹은 자기에 속하거나 혹은 장자에 속한 것은 모두 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정·체가 만약 선조의 정·체가 아니면 장자의 정·체는 어디로부터 찾아본다는 말인가. 이 때문에 이 정주(鄭注)는 선조의 정·체에 해당하게 한 것이니 이는 변역할 수 없는 의이다.
그 선조라 칭한 것은 장자를 위하여 복하는 사람의 스스로 일컬은 것이니 조(祖)의 글자 위에 또 선(先)의 글자를 더한 것으로서 더욱 명백하다. 만약 장자를 위하여 복하는 사람이 그 장자를 위하여 일컬었기에 조로써 일컬었다고 하면 단지 조라고만 칭하여도 족할 텐데 무슨 까닭으로 다시 선(先)의 글자를 더한단 말인가. 이는 정주의, 자기로부터 말하지 않은 것은 바로 조를 잇지 않는 의에 따라서 부연하여 한 말이며 마땅히 장자를 위하여 복하는 사람의 자칭한 것으로써 정하는 것이 아마도 옳을 것이다.
《소기(小記)》에 이른바 "서자는 조를 제사하지 못하는 것은 그 종(宗)을 밝힘이다."라 했고, 또 그 아래에 연달아 이르기를 "서자가 장자를 위하여 참하지 않는 것은 조(祖)와 예(禰)를 계승하지 못하는 때문이다."라 하였으니, 조를 제사하지 못한다는 조의 자(字)와 조를 계승하지 못한다는 조의 자가 아무래도 다른 것이 없을진대 그 장자의 신상에 속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의심할 것이 없을 것 같다.
대개 이 복은 곧 조를 높이는 의에서 나왔으니 오로지 조정조중(祖正祖重)으로써 극복(極服)을 한 것이다. 공·가(孔賈) 소설(疏說)에 나오는 "부적(父適) 조적(祖適)"이라는 것도 역시 공·가의 스스로 한 말이 아니요, 곧 전해 내려온 사설(師說)이니 아무래도 바꿀 수 없을 것이며, 또 복술(服術)이 사세(四世)에 마치는데 장자를 위하여 참최의 복을 하는 자는 반드시 조를 이은 연후에야 복을 하게 되며 자기 조가 자기 장자의 몸에 있어서는 사대의 대수(代數)가 되니, 이 또한 복술의 끝지는 것으로서 그 사이에 가감하거나 손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적(適)과 적이 서로 계승한 연후라야 마침내 복을 한다."와 같은 의는 지극히 엄하고 지극히 중하므로 이 때문에 그 아래에 사종(四種)의 설을 두어 거듭 발명한 것이다. 이를테면 "체(體)이면서 정(正)이 아닌 아들은 비록 전중(傳重)의 처지라도 중자(衆子)를 복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그 의가 엄하고 중함이 이러한 것이며, 더구나 체이면서 정이 아닌 아들이 오늘에 아들이 되어 체이면서 정이 아닐진대 다른 날 조가 되어도 역시 체이면서 정이 아닌 의가 되는 것이니 아들이 되건 조가 되건 다를 바가 없으며, 그 아들과 손자가 만약 또 그 장자를 복할 경우에는 부적(父適), 조적의 의로써 한 가지로 극복(極服)을 입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말하는 자가 그 자손으로서 부·조의 적(適)이니 서(庶)이니를 따져서 경하고 중하게 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기는데 이 또한 너무도 그렇지 않다. 이는 바로 천경(天經)과 지의(地義)로서 특별히 존재하여 우주의 사이에 떠받고 있으니 성인이 이 때문에 복을 제정하면서 감히 일호(一毫)의 사(私)를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어찌 그 자손이 스스로 그 복을 제정하여 복을 입는 자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말은 바로 대의를 모르는 것이니 어찌 족히 예를 말하는 데 참여하여 논할 수 있다 하랴.
[주D-001]불간(不刊)의 서 : 아무도 간삭(刊削)하지 못할 책이라는 뜻임. 유흠(劉歆)의 답양웅서(答揚雄書)에 "是懸諸日月 不刊之書也"라 하였음.
[주D-002]장자를……참한다 : 참(斬)은 참최(斬衰)의 상복을 말함인데 장자는 계조(繼祖)를 하므로 아비가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다.
[주D-003]서건암(徐健菴) : 청 곤산인(崑山人)으로 이름은 건학(乾學), 자는 건암이요, 강희 진사로 관은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며, 문학으로써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명하여 《일통지(一統志)》·《고문연감(古文淵鑑)》 등 서를 찬수하였음.
[주D-004]진미경(秦味經) : 청 금궤인(金匱人)으로 이름은 혜전(蕙田), 자는 수봉(樹峯), 호는 미경(味經)이며, 건륭 진사로 관은 형부 상서에 이르렀다. 입조(立朝)한 30년에 강개자수(剛介自守)하여 곡의순물(曲意徇物)하지 않았으며 그 학(學)은 궁경(窮經)을 위주하고 강학(講學)의 이름에는 거(居)하지 않았다. 저술한 《오례통고(五禮通考)》는 만유(萬有)를 낭괄(囊括)하여 논자의 말이, 주자가 마치지 못한 뜻을 능히 마쳤다고 했다. 시호는 문공(文恭)임.
[주D-005]초주(譙周) : 삼국 시대 광안인(廣安人)으로 자는 윤남(允南), 탐고독학(貪古篤學)하여 육경(六經)을 연정(硏精)하였으며 천문에 밝았다. 촉한(蜀漢)에 벼슬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어 항위(降魏)의 책(策)을 올렸으며 진실(晉室)이 들어서자 여러 번 예우(禮遇)를 가하였음.
[주D-006]유지(劉智) : 진인(晉人)으로 자는 자방(子房), 시호는 성(成), 관은 시중상서(侍中尙書)이다. 소싯적에 빈고(貧苦)하여 부신송독(負薪誦讀)하였으며 유행(儒行)으로 이름났다.
[주D-007]이양년(李良年) : 청 수수인(秀水人)으로 자는 무증(武曾)인데 젊은 시절에 형 승원(繩遠), 아우 부(符)와 제명(齊名)하여 삼리(三李)라 불리었고 또 주이준(朱彝尊)과 제명하여 주리(朱李)라고도 했다. 서건학(徐乾學)과 종유하였으며 저술로는 《추금산방집(秋錦山房集)》이 있음.
[주D-008]성세좌(盛世佐) : 청 수수인(秀水人)으로 자는 용삼(庸三)임. 거인(擧人)이며 건륭 때에 관(官)은 용리지현(龍里知縣)이다. 《의례집편(儀禮集編)》을 찬하고 또 양복(楊復)의 《의례도(儀禮圖)》를 정정(訂正)하였는데 다 지론(持論)이 근엄하고 변증이 심히 소상하였음.
[주D-009]가소(賈疏) : 가공언(賈公彦)의 소(疏)를 말함. 공언은 당 영년인(永年人)으로 영휘(永徽) 중에 관은 태학박사에 이르렀으며, 저술로 《주례의소(周禮義疏)》·《의례의소(儀禮義疏)》가 있음.
[주D-010]공의(孔義) : 공영달(孔穎達)의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이름.
[주D-002]장자를……참한다 : 참(斬)은 참최(斬衰)의 상복을 말함인데 장자는 계조(繼祖)를 하므로 아비가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다.
[주D-003]서건암(徐健菴) : 청 곤산인(崑山人)으로 이름은 건학(乾學), 자는 건암이요, 강희 진사로 관은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며, 문학으로써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명하여 《일통지(一統志)》·《고문연감(古文淵鑑)》 등 서를 찬수하였음.
[주D-004]진미경(秦味經) : 청 금궤인(金匱人)으로 이름은 혜전(蕙田), 자는 수봉(樹峯), 호는 미경(味經)이며, 건륭 진사로 관은 형부 상서에 이르렀다. 입조(立朝)한 30년에 강개자수(剛介自守)하여 곡의순물(曲意徇物)하지 않았으며 그 학(學)은 궁경(窮經)을 위주하고 강학(講學)의 이름에는 거(居)하지 않았다. 저술한 《오례통고(五禮通考)》는 만유(萬有)를 낭괄(囊括)하여 논자의 말이, 주자가 마치지 못한 뜻을 능히 마쳤다고 했다. 시호는 문공(文恭)임.
[주D-005]초주(譙周) : 삼국 시대 광안인(廣安人)으로 자는 윤남(允南), 탐고독학(貪古篤學)하여 육경(六經)을 연정(硏精)하였으며 천문에 밝았다. 촉한(蜀漢)에 벼슬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어 항위(降魏)의 책(策)을 올렸으며 진실(晉室)이 들어서자 여러 번 예우(禮遇)를 가하였음.
[주D-006]유지(劉智) : 진인(晉人)으로 자는 자방(子房), 시호는 성(成), 관은 시중상서(侍中尙書)이다. 소싯적에 빈고(貧苦)하여 부신송독(負薪誦讀)하였으며 유행(儒行)으로 이름났다.
[주D-007]이양년(李良年) : 청 수수인(秀水人)으로 자는 무증(武曾)인데 젊은 시절에 형 승원(繩遠), 아우 부(符)와 제명(齊名)하여 삼리(三李)라 불리었고 또 주이준(朱彝尊)과 제명하여 주리(朱李)라고도 했다. 서건학(徐乾學)과 종유하였으며 저술로는 《추금산방집(秋錦山房集)》이 있음.
[주D-008]성세좌(盛世佐) : 청 수수인(秀水人)으로 자는 용삼(庸三)임. 거인(擧人)이며 건륭 때에 관(官)은 용리지현(龍里知縣)이다. 《의례집편(儀禮集編)》을 찬하고 또 양복(楊復)의 《의례도(儀禮圖)》를 정정(訂正)하였는데 다 지론(持論)이 근엄하고 변증이 심히 소상하였음.
[주D-009]가소(賈疏) : 가공언(賈公彦)의 소(疏)를 말함. 공언은 당 영년인(永年人)으로 영휘(永徽) 중에 관은 태학박사에 이르렀으며, 저술로 《주례의소(周禮義疏)》·《의례의소(儀禮義疏)》가 있음.
[주D-010]공의(孔義) : 공영달(孔穎達)의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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