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초의에게 주다[與草衣][26]

천하한량 2007. 3. 9. 18:19
초의에게 주다[與草衣][26]

근래에 온 편지는 있어도 답을 보낸 일은 없으니 태만해서가 아니라 편지가 있는 것도 마음이요 답이 없는 것도 역시 마음일지니 마음이 어찌 둘이 있겠는가. 진공(眞空)묘유(妙有)의 의(義)가 이에서 환히 드러날진대 사의 혜관(慧觀)은 응당 주재하여 그 마음이 생기게 하는 일은 없으리니 노 행자(盧行者)가 아마도 그 묘를 독차지하지는 못할 거외다.
붉은 바퀴가 이마 위를 맷돌질하는데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대하여 열뇌(熱惱)의 장애는 없는지요? 이 몸은 쇠한 꼴이 날로 더해 가니 사의 노년(驢年)도 나와 더불어 다름이 없는데 정말 다른가 같은가? 자못 웃을 만한 일이로세.
전도리(顚闍黎)는 곧 백파노납으로부터 와서 백파의 살활(殺活) 기용(機用)을 성대히 얘기하는데, 모르괘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과 역대 조사(祖師)나 담연(湛然)원묘(圓妙)도 다 살활 속에 들어가서 교갈(膠葛) 곤전(滾轉)했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오네그려.
두 자루 부채는 짝지어 보내니 웃고 받아둠이 어떠한지요. 전일에 보내준 다병(茶餠)은 이미 먹어 다 떨어졌으나 싫증없는 요구라서 대단월(大壇越)을 바랄 수야 있겠소. 모두 뒤로 미루고 불선. 정미년 유둣날.
근자에 들으니 남천축(南天竺)에는 관음궁전(觀音宮殿)이 상기도 보타낙가(補陀洛迦)에 남아 있다고 하고 또 비나성(毘那城) 안에는 유마(維摩)의 방장(方丈)이 역력히 증거할 만하다 하니 이는 너무도 기절(奇絶)하여 총림(叢林)에 들려줄 만한 것이외다. 여래(如來)가 발등을 보였다는 것은 어떤 경에서 보았는가? 매양 《전등록(傳燈錄)》을 들어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은 우리 속가 사람들의 천문(淺聞)과 마찬가지라네. 선문에는 그 원본을 구정(究訂)한 자가 있을 것 같으니 행여 자세히 고출(考出)하여 새 목사(牧使)가 들어오는 편에 보내주면 어떠한지요. 심히 바라고 바라외다. 듣건대 영행(嶺行)을 떠나고자 한다니 함부로 망동해서는 안 되며 굳건히 초암(草庵) 속에 좌정해야만 마침내 좋을 것이외다.

[주D-001]진공(眞空) : 소승(小乘)의 열반(涅槃)인대 거짓이 아니므로 진이라 이르고 상을 떠났기 때문에 공이라 이른 것임.
[주D-002]묘유(妙有) : 비유(非有)의 유(有)를 말하는데, 이로써 비공(非空)의 공(空)을 상대하여 진공(眞空)이라 이름.
[주D-003]노 행자(盧行者) : 인명임.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성은 노씨인데 처음에 오조(五祖) 홍인(弘忍)의 밑에서 도를 닦았으므로 노 행자라 하고 혹은 노 거사(盧居士)라 칭하였음. 행자라는 것은 유발(有髮)로 수행한 자를 이름.
[주D-004]노년(驢年) : 기한이 없이 오래 사는 것을 이름. 12간지(干支) 중에 나귀의 해는 없으므 로 비유한 것임.
[주D-005]전도리(顚闍黎) : 미치광이 도리(闍黎)라는 것임.
[주D-006]담연(湛然) : 인명으로 태주(台州) 국청사(國淸寺)의 중인데 성은 위씨(威氏)요, 당(唐) 진릉(晉陵) 형계인(荊溪人)이다. 율(律)이 삼엄하여 지관(止觀)의 오지(奧旨)를 극진히 하였음.
[주D-007]원묘(圓妙) : 공(空)·가(假)·중(中)의 삼체(三諦)가 원융(圓融)하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을 이름. 《사교의집주 하(四敎儀集註下)》에 "三諦圓融不可思議名圓妙"라 하였음.
[주D-008]보타락가(補陀洛迦) : 산 이름인데 역(譯)으로는 광명산(光明山)·해도산(海島山)·소화수산(小花樹山) 등으로 인도의 남해안(南海岸)에 있어 관음(觀音)의 주처(住處)가 되었음.
[주D-009]비나성(毘那城) : 땅 이름으로 비야리성(毘也離城)인데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살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