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선 상적 에게 주다[與李藕船 尙迪][5] |
거년에 대운(大雲)·만학(晩學) 두 종의 서(書)를 부쳐 왔고 금년에는 또 우경문편(藕耕文編)을 부쳐 왔는데 이는 다 세상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머나먼 천만리 밖에서 여러 해를 걸려 구득(購得)한 것이며 한때의 일이 아님에 있어서리오.
더구나 온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이익만을 붙쫓는데 이와 같이 심력을 허비하고도 권세·이익에 돌리지 아니하고 마침내 해외의 한 초췌 고고(枯槁)한 사람에게 돌리기를 마치 세상이 권세·이익에 붙쫓는 것과 같이 하니 어인 일인지요.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권세·이익으로 어울리는 자는 권세나 이익이 다 떨어지면 사귐이 성글어진다." 하였는데 그대 역시 세상의 풍조 속에 한 사람으로서 초연히 스스로 권세·이익의 테두리 밖에 벗어나서 권세·이익을 가지고 나를 보지 않는 것인지요.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지요.
공자(孔子) 말씀에 "세한을 만난 연후에야 송백(松柏)의 후조(後凋)를 알게 된다."라 하였는데 송백은 바로 사시를 일관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고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인데 성인은 특히 세한 이후를 들어 칭하지 않았소.
지금 그대는 나에 대해 이전이라서 더함도 없고 이후라서 덜함도 없지 않았소.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할 게 없다면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소.
성인이 특별히 칭한 것은 한갓 후조의 곧은 지조, 굳센 절개를 위함뿐만 아니라 역시 세한의 때에 감발(感發)된 바 있어서인 것이외다.
아! 서한(西漢)의 순후한 세상에 급암(汲黯)·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진 이로도 빈객(賓客)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으며 하규(下邽) 사람이 문에 방을 써서 건 일 같은 것은 박절함이 너무도 극단적이었으니 슬픈 일인지고.
[주D-001]대운(大雲) :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庫)》를 이름. 혼경(惲敬)은 청(淸) 무진인(武進人)으로 자는 자거(子居)요, 호는 간당(簡堂)이며, 건륭(乾隆)의 거인(擧人)이다. 관(官)은 동지(同知)이고 고문(古文)을 다스려 한비(韓非)·이사(李斯)에게서 힘을 얻었으며 소명윤(蘇明允)과 더불어 서로 상하(上下)한다. 세상에서 양호파(陽湖派)라 칭한다. 《대운산방문고》는 그의 저술임.
[주D-002]만학(晩學) : 《만학집(晩學集)》을 이름. 계복(桂馥)은 청 곡부인(曲阜人)으로 자는 동훼(冬卉)요, 호는 미곡(未谷)이며, 건륭 진사로 운남(雲南) 영평지현(永平知縣)에 제수되었다. 소학(小學) 및 금석(金石)·전각(篆刻)에 정(精)하였음.
[주D-003]우경문편(藕耕文編) : 하장령(賀長齡)은 청 호남(湖南) 선화인(善化人)으로 자는 우경(藕耕)이요, 호는 서애(西涯)이며, 만년에는 내암(耐庵)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가경(嘉慶) 진사로 관(官)은 운귀총독(雲貴摠督)에 이르렀으며 《내암문존(耐庵文存)》을 저술하였고 아울러 청《경세문편(經世文編)》을 집성(輯成)하였음. 여기서는《경세문편》을 말한 것임.
[주D-004]하규(下邽) 사람이……일 : 적공(翟公)은 한(漢) 하규인(下邽人)인데 문제(文帝) 때에 정위(廷尉)가 되니 빈객이 문 앞을 메웠다가 파직되자 문 밖에 참새그물을 칠 정도로 한산하였다. 뒤에 다시 등용되자 빈객이 또 몰려오려고 하니 적공은 그의 문에 방을 써 붙이기를 "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이라 하였음.
[주D-002]만학(晩學) : 《만학집(晩學集)》을 이름. 계복(桂馥)은 청 곡부인(曲阜人)으로 자는 동훼(冬卉)요, 호는 미곡(未谷)이며, 건륭 진사로 운남(雲南) 영평지현(永平知縣)에 제수되었다. 소학(小學) 및 금석(金石)·전각(篆刻)에 정(精)하였음.
[주D-003]우경문편(藕耕文編) : 하장령(賀長齡)은 청 호남(湖南) 선화인(善化人)으로 자는 우경(藕耕)이요, 호는 서애(西涯)이며, 만년에는 내암(耐庵)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가경(嘉慶) 진사로 관(官)은 운귀총독(雲貴摠督)에 이르렀으며 《내암문존(耐庵文存)》을 저술하였고 아울러 청《경세문편(經世文編)》을 집성(輯成)하였음. 여기서는《경세문편》을 말한 것임.
[주D-004]하규(下邽) 사람이……일 : 적공(翟公)은 한(漢) 하규인(下邽人)인데 문제(文帝) 때에 정위(廷尉)가 되니 빈객이 문 앞을 메웠다가 파직되자 문 밖에 참새그물을 칠 정도로 한산하였다. 뒤에 다시 등용되자 빈객이 또 몰려오려고 하니 적공은 그의 문에 방을 써 붙이기를 "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이라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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