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심동암 희순 에게 주다[與沈桐庵 熙淳][27]

천하한량 2007. 3. 9. 04:20
심동암 희순 에게 주다[與沈桐庵 熙淳][27]

봄 그늘이 먹빛과 같아 곧장 사람을 물들이려 하고 창 그림자는 눈에 어른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는데 갑자기 영감의 편지를 받으니 바로 구름이 걷히는 듯하며 따라서 청안(靑眼)을 닦게 되었소. 어찌 우울한 가슴이 활짝 열리기만 하오리까.
더욱이 이때에 영감의 시체 안복(晏福)하시다니 더욱더 칭송하여 마지않는 바이며 하물며 거룩한 서한이 아울러 빛나 예전과는 크게 달라진 곳이 있으니 이처럼 정진한다면 장래의 경지는 실로 헤아리지 못할 것이외다.
그 자리잡은 것이 너그럽고 단정하며 파(波)와 별(撇)이 트이고 밝아 남다른 일종의 풍미가 배어 있어 세속으로부터 온 것 같지 않으니 매양 영감 글씨를 보면 형예(形穢)의 부끄러움이 저절로 생기는 반면에 감탄과 부러움을 이기지 못하외다.
대개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천지묘리로써 점설(店楔 창문과 문설주)과 토석(土石)으로 땅에서부터 쌓아 올리는 공력을 운용(運用)하면 신이 힘에 따라 생기게 되며 점차로 계단 밟아 문경(門徑)과 당오(堂奧)에 나아가기 어렵지 않으리니 뒤에 오는 영수(英秀)들에게 진실로 촉망이 크고말고요.
그러자면 반드시 옛 법서에 있어 그 진본을 구득해야 하며 가짜 옥과 거짓 금의 그르침을 입어서는 안 될 것이외다.
모(摹)한 편액은 매우 아름다워요. 이 글씨는 구양(歐陽)의 묘법을 매우 터득하여 기봉(機鋒)이 다 드러났군요. 옛사람이 구양을 논하여 금강(金剛)의 노목(努目)이라 했는데 이 글씨는 그 형세가 있으니 대개 규도(規度)와 공력이 김생(金生)과 더불어 갑을(甲乙)을 다투겠으며 곧장 북조(北朝)로 거슬러 올라갈 만하외다.
이제 적어 보인 것을 보니 깊이 착안(着眼)을 더한 곳이 있는 듯한데 이는 학이 얕은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간신히 적으며 나머지는 갖추지 못하외다.

[주D-001]파(波)와 별(撇) : 서체의 용어로서 파는 파임이고 별은 내리삐침을 이름.
[주D-002]금강(金剛)의 노목(努目) : 설도형(薛道衡)이 종산(鍾山) 개선사(開善寺)에 노닐면서 소승(小僧)에게 묻기를 "금강은 어찌하여 눈을 부릅쓰고 보살은 어찌하여 눈을 내리감는가?"하자, 그 대답이 "금강의 노목(努目)은 사마(四馬)를 항복시키기 때문이고 보살의 내리감는 눈은 육도(六道)를 자비(慈悲)하기 때문이다." 하였음. 여기서는 구양순(歐陽詢)의 서체가 험경(險勁)하여 금강의 노목과 같은 기세가 있어서임.
[주D-003]김생(金生) : 우리나라 신라의 명필.
[주D-004]북조(北朝) : 중국의 남북조 시대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