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심동암 희순 에게 주다[與沈桐庵 熙淳][17]

천하한량 2007. 3. 9. 04:10
심동암 희순 에게 주다[與沈桐庵 熙淳][17]

창포 술이 파랗게 뜨고 석류꽃이 불을 뿜는다는 구절은 지금 보내온 부채의 머리에 씌어 있는 말인데 바로 곧 현재의 절물(節物)이기도 하여 갑자기 이 몸이 묵림(墨林)·시경(詩境) 속에 들어앉은 것 같구려.
따라서 살핀 이 지랍(地臘)에 영감의 시체 동정이 위로 천록(天祿)에 응하여 온갖 아름다움이 물밀려오듯 하리니 축하하여 마지않사외다.
아우는 예와 같이 병들고 어리석어 명절이 돌아와도 알지 못하며 애호(艾虎)와 분단(粉團)은 아손(兒孫)들의 작용에 일임할 따름이라오.
보여주신 편액 글자는 너무도 좋아서 만일 다른 데 가는 것이 아니라면 곧장 빼앗아 차지하고 싶소. 이 작품을 풍·심(馮沈) 제공들로 하여금 한번 감상하게 한다면 또한 내가 면전의 허찬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텐데 그리 못해 한이외다.
첩모(帖摹)한 여러 글자는 일일이 열람한바 예학명(瘞鶴銘)은 그 두셋은 터득했으나 결속이 약간 부족한 듯하구려. 그러나 영감 글씨는 매양 결속하지 않은 곳에서 그 아름답고 좋음을 보여주며, 근래 사람 글씨는 모두 결속에 힘을 들였는데 영감 글씨의 속되지 않은 점은 오로지 결속하지 않은 데에 있으니 절대 이로써 스스로 적게 여겨서는 안 되외다.
예학명의 신묘하여 측량 못할 점은 결속하지 않은 가운데 결속이 있는 그 점이니 만약 점점 진경에 들어간다면 결속을 아니 해도 저절로 결속이 될 거요.
사람들이 반드시 영감의 성글고 느림을 들어 구실을 삼을 것이나 이는 다 초요(鷦鷂)의 소견이외다. 함부로 적으며 나머지는 뒤로 미루고 갖추지 못하외다.

[주D-001]창포 술 : 5월 단오에 마시는 술. 《세시기(歲時記)》에 "단오에 창포의 뿌리나 가루를 술에다 띄운다." 하였음. 여기서는 계절이 5월이므로 한 말임.
[주D-002]석류꽃이 불을 뿜는다 : 석류꽃이 매우 붉어 불같아서 한 말임. 당인(唐人) 시에 "五月榴花照眼明"의 구가 있음.
[주D-003]지랍(地臘) : 도가(道家)의 용어임. 《운급칠첨(雲笈七籤))에 의하면 5월 5일을 지랍이라고 하였음.
[주D-004]애호(艾虎)와 분단(粉團) :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5월 5일에는 오색 비단을 오려 작은 범을 만들어 쑥잎을 붙이고서 내인(內人)들이 다투어 머리에 인다." 고 하였음. 그래서 단오절을 애절(艾節)이라고도 함. 분단은 분말로 만든 경단을 말함.
[주D-005]초요(鷦鷂)의 소견 : 초요는 뱁새임.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에 "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소견이 좁다는 뜻으로 쓴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