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심동암 희순 에게 주다[與沈桐庵 熙淳][14]

천하한량 2007. 3. 9. 04:09
심동암 희순 에게 주다[與沈桐庵 熙淳][14]

베개맡에서 빗방울이 오동잎에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마을과 들녘의 환호소리와 함께 시원하고 좋사외다. 지난날 공중을 맷돌 돌리던 불바퀴는 또 어느 곳에 있는지요.
그 사이 영감 서한을 받기는 했으나 병상에 누워 있어 스스로 연묵(硯墨)을 가까이할 힘이 없어서 회답(回答)이 이와 같이 늦었으니 혹시 눌러 짐작하실는지요. 근일 들어 갑자기 서늘한데, 영감 체력이 강건하신지 우러러 비외다.
아우는 설사병에 걸리어 통의 밑바닥이 빠진 듯하여 걷잡을 수 없으니 원기가 크게 탈진하여 겨우 한 가닥 약한 목숨만을 유지하는 중이라 장래 어떻게 회복이 될는지 아득만 하외다.
어제 오늘, 며칠 사이에 정신을 차려 조금씩 인사를 챙기는데, 방군이 마침 와 주어서 흐뭇하며, 또한 억지로 팔을 놀려 약간의 글자를 시험하여 초초하게 이만 갖추지 못하외다. 따로 보여준 금함(錦椷)은 삼가 영수하였거니와 이 세상에도 역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오. 이는 이른바 흐름을 받들어 은택을 펴고, 상(上)의 은화(恩化)를 선포하는 한 가지 길하고 상서로운 좋은 일로서 현재의 공덕과 다른 날의 복전(福田)이 되기에 그칠 뿐만 아니라 유원(幽冤)이 쾌히 펴지고 이상(彝常)이 바른 데로 돌아올 것이며, 인인군자(仁人君子)와 신명한 재관(宰官)들의 세밀한 마음으로 미루어 생각한 것이니, 장차 전호(全湖)의 생령(生靈)이 우러러 당음(棠蔭)을 더위잡아 요순의 거룩한 덕화 속에 함육(函育)됨을 볼 것인즉 찬송하고 감탄하여 마지않사외다.
선지(善地)에 이르러서는 그가 도산 검수(刀山劍樹) 속에서 살아 나온 것만도 이미 상상조차 못하던 일인데도 어찌 두 번째 분수 밖의 망령된 계획을 한단 말이오. 그 처지로는 감히 양에 과중한 일은 하지 말고 기회를 타 다시 나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니 헤아려 주소서.

[주D-001]통의 밑바닥이 빠진 듯하여 : 통저탈(桶底脫)인데 불가에서는 좌화(坐化)라 이름. 조속선 화상(趙洬仙和尙)의 좌탈시(坐脫詩)에 "桶底脫時無一物"의 구가 있고,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桶底脫自合歡喜"라 하였음.
[주D-002]당음(棠陰) : 감사의 음덕을 말함. 《시경(詩經)》국풍(國風) 소남(召南)에 "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이 있으므로 이에 근거하여 감사의 정청(政廳)을 당헌(棠軒)이라 칭함.
[주D-003]도산 검수(刀山劍樹) : 혹형을 말함. 《송사(宋史)》유진전(劉辰傳)에 "作燒炙剝剔刀山劒樹之刑"이라 하였음.
[주D-004]상상조차 못하던 일 : 《능엄경(楞嚴經)》"如是一類 名非想非非想處"에서 나온 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