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심동암 희순 에게 주다[與沈桐庵 熙淳][1]

천하한량 2007. 3. 9. 04:04
심동암 희순 에게 주다[與沈桐庵 熙淳][1]

봄 바람은 본시 항성(恒性)이 없어 갰다 흐렸다 백 가지로 변하고, 따뜻하고 쌀쌀함도 일정하지 않으니, 침석(枕席)의 사이에 더욱 알맞게 조리하기가 어렵구료.
아침 창이 아직 밝지 못하고 눈꼽은 끼어 정신이 어지러운데 갑자기 영감 편지를 받으니, 한갓 해청(楷靑)의 쾌함만이 아니라 거거(車渠)·목난(木難)과 진주(珍珠)·산호(珊瑚)가 한데 모여 앞에 가득하여 그 빛깔이 지붕 모퉁이까지 날아 오르려 하니, 영감 서법(書法)이 무리를 뛰어난 특재가 있음을 진작 익히 아는 바라 늘 탄복하는 바이지만 이렇게 마음과 넋을 놀라게 할 줄은 생각조차 못했사외다.
두어 쪽의 연서(聯書)는 결코 압록강 동쪽의 기격(氣格)이 아니며, 저 김수문(金壽門) 정극유(鄭克柔)처럼 천기(天機)가 유동(流動)하고 기굴착락(奇崛錯落)한 솜씨로도 이를 넘어설 수 없으니, 나 같은 사람은 육십 년 동안 이에 전력하여 스스로 한두 가지는 들여다 보아 소득이 있다고 여겼는데도 얼마나 뒤떨어졌는지 알지 못하겠구려.
이 연(聯)은 얼마나 글씨 복이 있는 사람이 얻어 가게 될 것인지 모르겠소. 그 가운데 하나의 대련(對聯)을 빼앗아 차지하여 이미 좌석 모퉁이에 붙여 놓았으니 나무람이나 당하지 않을는지요.
근일에 서법이 모두 급하고 촉박한 한길로만 치달아서, 항상 즐겁게 여겨지지 않더니만 지금 영감 글씨를 보니, 첫째는 바로 사군자(士君子)의 평탄하고 가 없는 도량이 팔목 밑에 흘러나오는 것이요, 둘째는 순전히 천기로써 움직여 필묵의 계경(蹊逕) 밖에 있어 일점의 속된 기운이나 일호(一毫)의 기교가 없는 점이라 이 때문에 항상 대해도 싫증나지 않는 거외다.
남들이 보면 이를 만필(漫筆)이나 희묵(戲墨)으로 여겨 여러 말이 곁에서 일어날 것이나 교계하고 변명할 거리도 되지 않으니, 속된 눈들이 어찌 알 수 있으리오.
모서(摹書)한 동권(桐卷)은 각기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반갑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 그 보는 데로 따라 임서(臨書)했고 임서하면 반드시 한 권을 다했으니, 어찌 그리 마음과 힘이 굳고 가라앉아서 물러날 줄을 모르고 정신과 공부가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단 말이오.
다만 결구(結搆)에 있어 매양 조금 덜 간 곳이 있으니, 이는 바로 타고난 재간은 우수한데 공부가 적은 까닭이며, 그 공부 면에 있어서는 이르러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타고난 재주로서 어찌 인공(人工) 면을 근심하리오.
구비(歐碑)는 오래 남겨두어도 무방하나, 두 번 열람하고자 하면 마음대로 다시 가져가도록 하시오. 마침 《구성궁명(九成宮銘)》 잔본 1책을 찾아냈는데, 비록 낡기는 했으나 오히려 구탑본(舊搨本)이므로 언제나 좋게 보곤 했지요. 이제 또 받들어 보내니, 영감 글씨가 이 구서(歐書)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며, 구(歐)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저·우(褚虞)보다 쉬울 것 같기 때문에 선뜻 구서를 들어 자주자주 말하는 것이니, 이는 늙은 말이 길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외다.
이 서첩은 근자의 탑본(搨本)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으니, 행여 마음을 쏟아 세밀히 열람할 뿐더러 열 백번 임(臨)하고 지나가도 좋을 것이외다. 나머지는 뒤로 미루고 이만 줄입니다.

[주D-001]해청(偕靑) : 해는 닦는다는 뜻이고 청은 청안(靑眼)을 이름인데 곧 청안을 닦고 반갑게 본다는 약칭임.
[주D-002]거거(車渠)·목난(木難) : 거거는 거거(硨磲)라고도 하는데 문합류(文蛤類)의 가장 큰 것으로, 오려서 갈면 흰옥과 같아서 장식품이나 정주(頂珠)를 만드는 재료가 됨. 목란은 보주(寶珠)임. 《남월지(南越志)》에 "목란은 금시조(金翅鳥)의 거품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벽색(碧色)의 구슬이다." 하였음.
[주D-003]김수문(金壽門) : 수문은 청(淸) 김농(金農)의 자임. 호는 동심(冬心). 김농은 전당인(錢塘人)으로 시·서·화에 능하고 기고(嗜古)하여 금석문자의 수장이 매우 많았음.
[주D-004]정극유(鄭克柔) : 극유는 청 정섭(鄭燮)의 자임. 정섭은 흥화인(興化人)으로 호는 판교(板橋)이다. 건륭(乾隆) 때 진사(進士)로, 벼슬은 지현(知縣)을 지냈다. 난죽화(蘭竹畫)에 능하고 서법은 예(隸)·해(楷)·행(行)을 상참(相參)하여 고수독절(古秀獨絶)하였음.
[주D-005]《구성궁명(九成宮銘)》 : 구양순(歐陽詢)이 쓴 것으로 곧 예천명(醴泉銘)을 말함.
[주D-006]저·우(褚虞) : 저는 저수량(褚遂良)이고 우는 우세남(虞世南)으로 주 53) 참조. 저수량은 당(唐) 전당인(錢塘人)으로 자는 등선(登善)이다. 문사(文詞)에 박섭(博涉)하였으며 해서(楷書) 예서(隸書)에 능하여 당 사대가의 일원이 되었음.
[주D-007]늙은 말이……것 : 춘추 시대에 관중(管仲)과 습붕(隰朋)이 환공(桓公)을 따라 고죽(孤竹)을 정벌하면서 봄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오는데 길을 잃었다. 관중이 말하기를 "늙은 말의 지혜를 이용해 볼 만하다." 하고 늙은 말은 풀어놓고서 그 뒤를 따라 마침내 길을 찾았다고 한다. 《韓非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