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남규재 병철 에게 주다[與南圭齋 秉哲][5]

천하한량 2007. 3. 9. 04:03
남규재 병철 에게 주다[與南圭齋 秉哲][5]

이별 역시 가지가지이겠지만 이 이별은 모르괘라 안인(安仁)의 부(賦)에도 이 한 경지를 건드린 바 있는지요?
성존(盛存)을 받들고 보니 거듭 성광(聲光)을 더위잡은 듯하오나 마음속에 감촉됨은 다시금 더하옵니다. 다행히도 영감의 비호를 입어 여러 날을 경쾌히 보냈으며, 자고 먹는 것도 두루 좋으니 조금도 염려를 말아주소서.
명일에는 아주 떠날 작정이오니 오직 복성(福星)이 비치는 곳에 온갖 것이 따라서 순조롭기를 비오며, 중산보(仲山甫)의 긴 생각에 대해서는 특별히 동경을 가질 따름입니다. 우선 이만 줄이오며 갖추지 못하옵니다.
난정(蘭亭)에 대해서는 정무본(定武本)이 가장 난정의 진(眞)이라 일컫지만 그러나 구양(歐陽)의 모(摹)는 끝내 구양의 필의(筆意)가 있어 마치 신룡본(神龍本)이 하남(河南)의 필의가 있는 것과 같으니, 지금 정무본을 표준하여 왕우군(王右軍)의 서(書)가 반드시 이와 같다 생각한다면 깊은 고거(考據)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소릉(昭陵)의 원본을 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군의 이름에 떨고 난정의 설(說)에 사로잡혀 시말도 원류도 상고하지 않고 산음(山陰)의 진구(眞榘)라고 마구 일컬으니, 이 어찌 진·당(晉唐)의 유파를 안다 하오리까. 저 악의론(樂毅論)·황정경(黃庭經)·도덕경(道德經) 등의 서 같은 것을 들어 세상에서는 일소(逸少 왕희지의 자)의 진적(眞跡)으로 여기지만 그 내력에 대하여는 다 분명히 밝힐 수 없으니, 유식자들은 입에 올리지 않는 것입니다.

[주D-001]안인(安仁) : 진(晉) 반악(潘岳)의 자인데 중모인(中牟人)으로 자태가 아름답고 문사(文詞)가 절묘하였으며, 일찍이 별부(別賦)를 지은 일이 있음.
[주D-002]복성(福星) : 고대에 목성(木星)을 가리켜 세성(歲星)이라 불렀는데, 그 별이 비치는 곳은 모두 복을 받으므로 복성이라 하였음. 송(宋) 나라 선우선(鮮于侁)이 절동전운사(浙東轉運使)가 되어 떠나게 되자 사마광(司馬光)이 말하기를 "지금 동토(東土)의 폐단을 구하자면 자준(子駿 : 선우선의 자임)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이는 일로(一路)의 복성이다." 하였음.
[주D-003]중산보(仲山甫) : 주 선왕(周宣王) 때의 어진 신하인데, 그 당시 시인(詩人) 윤길보(尹吉甫)는 증민(蒸民)을 지어 선왕(宣王)의 임현사능(任賢使能)을 아름답게 여기면서 "仲山甫徂齊 式遄其歸 吉甫作誦 穆如淸風 仲山甫永懷 以慰其心"이라 하였음. 《詩經 大雅 蒸民》
[주D-004]난정(蘭亭)에……정무본(定武本) : 왕희지의 친필 난정서(蘭亭序)를 이름인데, 정무본은 성세창(成世昌) 난정고(蘭亭考)에 의하면 "당 태종이 난정의 진적(眞跡)을 얻어 임첩(臨帖)하여 학사원(學士院)에 각하게 하였다. 오대(五代) 양(梁)의 시대에 변도(汴都)에 옮겨 두었는데 요(遼) 야율덕광(耶律德光)이 후진(後晉)을 깨뜨리고 그 석각을 가지고 북으로 가다가 도중에 병이 들어 죽고 그 돌은 살호림(殺虎林)에 버려졌다. 송(宋) 경력(慶曆) 연간에 발견되어 정주(定州)의 주치(州治)에 두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구본(歐本 : 구양수(歐陽脩) 모본(摸本))이라 칭한다.
[주D-005]신룡본(神龍本) : 난정서의 각본인데 당 신룡 연간에 하남(河南) 저수량(褚遂良)을 시켜 임모하였으므로 신룡저본(神龍褚本)이라 칭함.
[주D-006]소릉(昭陵)의 원본 : 소릉은 당 태종의 능인데 섬서(陝西) 예천현(醴泉縣)에 있음. 태종이 이왕(二王)의 서법을 매우 좋아하여 그의 7세손 중 지영(智永)으로부터 희지(羲之)가 잠견지(蠶繭紙)에 서수필(鼠鬚筆)로 쓴 난정진적(蘭亭眞跡)을 얻어내어 그것을 모각(摸刻)하여 황자(皇子)와 근신(近臣)에게 내려 주었는데, 겨우 수본에 그치고 그 석(石)은 부서졌으며, 진본은 순장(殉葬)되어 다시 나타나지 않았음.
[주D-007]산음(山陰) : 산의 북쪽인데 왕희지의 난정서에 "永和九年 歲在癸丑暮春之初 會于會稽 山陰之蘭亭"이라는 글이 있음으로 인하여 후인이 왕희지의 대명사로 쓰고 있음.
[주D-008]악의론(樂毅論)……도덕경(道德經) : 모두 왕희지의 글씨라고 하여 현재까지 유행되고 있는데 후인의 안작(贋作)이라는 설이 파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