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34] |
정판교(鄭板橋)의 난정(蘭幀 난을 그린 족자)은 아마도 이것이 원필(原筆)임을 감히 확정지을 수 없을 듯합니다. 판교의 난(蘭)은 모두 필묵(筆墨)의 흔적 밖에 따로 묘체(妙諦)를 갖추어서 그림의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예를 들면 고모란분도(高帽蘭盆圖)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란(帽蘭)은 한 획도 그림의 의미 같은 것이 없으므로, 어떤 흔적을 가지고 법칙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별법(撇法 별은 삐침획을 이름)으로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평생에, 장점이 사람마다 그의 법칙을 근사하게 닮을 수 없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족자는 그림의 의미가 퍽 갖추어져 있고, 비록 매우 방자하기는 하나 흔적을 찾을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약간만 힘을 들이면 또한 거기에 근사하게 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필세(筆勢)의 거리낌없이 방자함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모란의 화법과 상대하여 본다면, 모란은 극히 방자한 가운데도 원만하고 간결하고 조용한 의미가 있는데, 이 족자는 다만 방자하기만 할 뿐입니다.
또 그 인장(印章)은 모두 본인 스스로 각(刻)해서 썼기 때문에 그 난정에 낙관한 반쯤 이지러진 판교인(板橋印)은 그 신기한 정취가 특이합니다. 그런데 이 족자의 두 인장은 모두 스스로 새긴 것이 아니어서 도리어 천해 보이는 기미가 있습니다. 이 몇 가지 단서로 보아서 감히 그의 진필임을 확정지을 수가 없습니다.
판교의 문하에는 능히 안작(贋作)을 내는 이가 있었고, 또한 혹은 대신 그려서 사람들의 요구에 응해 준 경우도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판교의 진필을 얻기가 가장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문하에서 나왔다면 이것은 진적(眞迹)보다 한 등급만 낮을 뿐이니, 또한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곧장 그것을 굳이 버릴 필요는 없겠거니와, 유리창(琉璃廠)에 진열된 안작들과는 또한 차이가 있습니다. 굳이 흠을 잡는다면 이는 다만 장탕(張湯)·조우(趙禹)의 법으로 그림을 논하는 것입니다. 비록 옛날의 감상가(鑑賞家)들도 혹 안작을 용인한 적이 있었으니, 지금에 통행되고 있는 종요(鍾繇)의 글씨가 바로 그것이요, 당(唐) 나라 때에 모사한 글씨의 경우는 또 도리어 그것을 보배롭게 여겼습니다.
동기창(董其昌)의 서권(書卷)은 과연 모사본(摸寫本)인데 모사의 법칙이 매우 좋습니다. 이러한 것은 곧장 원필(原筆)로 간주하여도 되겠습니다. 풍승소(馮承素)·탕보철(湯普澈)이 난정계서(蘭亭禊序)를 모사할 적에도 비궤(棐几)의 진영(眞影)에 구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잡체(雜體)를 한덩어리로 합작(合作)하는 데 있어서야 훌륭한 솜씨가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동기창의 작품은 본대 제가(諸家)의 법칙을 합해서 한 것이 많으므로 모방하여 지은 작품에 나아가서 보면 그 원본(原本)이 있고 없는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단(段)마다의 관제(款題)는 모두 화선실(畫禪室 동기창의 실명(室名))로 되어 있고, 그 원발(原跋)은 각기 소속에 따라 문집 가운데 나타나 있으니, 동기창이 굳이 이전의 작품을 거듭 답습하여 나누어 써서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쓴 필법은 또한 동기창의 정수(精髓)를 깊이 체득한 것으로서, 시골 구석의 비속한 장인(匠人)이 가짜를 만들어 남을 속인 것은 아닌데, 필기(筆氣)가 약간 약할 뿐입니다. 바라건대 머물러 두고 완상거리로 삼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오봉(文五峯)의 화권(畫卷)은 대단히 좋은 작품입니다. 대치(大癡)의 구학(邱壑)에다 자신의 가풍(家風)을 참작하여 곧장 부춘도(富春圖)로부터 속투를 벗어나 새로운 법칙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매양 오봉의 작품은 청초(淸峭)한 데에 지나쳐서 심후(深厚)한 정취가 적은데, 이것은 오로지 대치의 화법(畫法)에서 온 것이므로 또 그 본래의 국면(局面)을 변개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둔암(鈍葊)에 대해서는 감히 둔옹(鈍翁)이 인법(印法)이라고 확정지을 수는 없으나 매우 예스러워서 좋습니다. 또 둔연(鈍硏)과 쌍벽(雙璧)을 이룬 것이 또 한 가지 기이한 일입니다. 대체로 이러한 취합(聚合)은 진실로 한때 지나가 버리는 인연이 아닙니다.
돼지 불고기는 바로 금화산(金華山)의 옛 맛이니, 장차 사중(舍仲)의 무리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한번 먹을 것입니다.
전번에 보내온 두 벼루와 여섯 병풍에 대해서는 거듭 살펴보니, 더욱 좋은 데가 있으므로 이제 아울러 완벽하게 올립니다.
팔대산인(八大山人)의 그림은 거듭 조사해 보니, 진필이 아닙니다. 화법(畫法)은 진실로 좋으나 습기(習氣)를 퍽 띠었습니다. 팔대산인의 그림은 원래 흔적을 찾을 데가 없는데, 어떻게 습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유완암(劉完庵)의 산관도(山館圖)를 가지고 평정(評訂)을 받으러 온 사람이 있었는데 결코 안필(贋筆)로 모방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중규(吳仲圭)의 신수(神髓)를 얻은 것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경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왕몽루(王夢樓)의 발문(跋文) 또한 진필임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또 장정(粧幀)을 한 뒤에 글씨를 쓴 것이 아니고, 종이가 몹시 얇은 까닭에 묵각(墨角)이 밖으로 비치는 것이 몇 군데가 있을 뿐입니다. 즉시 가져가게 하였으니, 만일 다른 데에 팔아 버리면 애석할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것을 거두어 두시어 보주(寶廚)에 금상첨화를 이루신다면 또한 새해의 승사(勝事)가 될 것입니다.
석전(石田)의 그림은 거듭 보니, 더욱 그 신변불측(神變不測)한 묘를 보겠습니다. 학해도(學海圖)는 경연(耕煙)의 작품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도서(圖序)의 순접(筍接)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간혹 고화(古畫)를 금도(今圖)로 만들어 버리는 예(例)가 있는데, 이것 또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대치(大癡)의 작은 족자는 과연 진품(眞品)입니다. 운종(雲從)의 준법(皴法)이라고 하신 말씀은 실로 합하의 정밀한 감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와 같은 준법은 나무 하나, 돌 하나가 모두 중봉(中鋒)에서 온 것이니, 속필(俗筆)로는 도저히 흉내낼 바가 아닙니다. '건륭어람(乾隆御覽)'이라는 보인(寶印) 또한 가짜가 아니니, 그것이 내부(內府)의 구장(舊藏)이었음을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건륭(乾隆)·가경(嘉慶) 연간에 석거각(石渠閣)의 옛 서적들을 교정(校正)한 여러 신하 가운데는 송원(宋元) 시대의 여러 가지 그림들을 특별히 분사(分賜)한 은전을 입은 일이 많았으니, 이것이 바로 내부로부터 나와서 다시 세간에 유행하게 된 연유입니다.
전순거(錢舜擧)의 문희귀계도(文姬歸溪圖)는 화품(畫品)이 특이하고, 그 위아래의 제관(題款)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송비옥(宋比玉)의 인수인(引首印)의 예자(隸字)는 매우 아름답고, 동 문민(董文敏 문민은 동기창의 시호)의 소제(小題)는 또 하나의 신화적(神化的)인 필법입니다. 또 심도(沈度)의 경우는 바로 구양순(歐陽詢)의 서법을 잘 배운 사람으로서 필의(筆意)에 대단히 묘처(妙處)가 있습니다.
또 퇴밀인(退密印)·묵림인(墨林印) 등 제인(諸印)은 모두 방사(坊肆)에서 가짜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손세창인(子孫世昌印)' 하나는 곧 한대(漢代)의 인장으로 극히 예스러운 것인데, 송원(宋元) 시대의 수장가(收藏家)들이 흔히 이 인장을 압봉(押縫)으로 썼으니, 이것은 진탑(眞搨)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수재도(樹齋圖)에 대해서는 뜻밖에도 육주(六舟)의 화법이 이토록 대단히 고묘(高妙)하여 석선(釋仙)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림 가운데 제관(題款)한 것들도 모두 뛰어난 명류(名流)들로서 능곤(凌堃)·명악(銘岳) 같은 이는 바로 익히 들어본 인물인데, 지금 그들의 시문을 읽어보니, 매우 유쾌합니다. 그림 가운데 찍은 인장(印章)들은 모두가 너무 신기하여 넋을 잃을 지경인데, 끝내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도 나온 것이 없음은 또한 무슨 까닭이란 말입니까?
[주C-001]서른네 번째 : 이 편지 내의 "笠屐圖……伺以辦有也"의 한 편은 제24번째의 편지에 나왔고, “二帖……恨無由對訂如山房雪几耳"의 한 편은 제25번째의 편지에 나왔으며, “文衡山西苑軸……必無收藏贋本之理耳"의 한 편은 제26번째의 편지에 나왔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번역하지 않는다.
[주D-001]정판교(鄭板橋) : 청 나라 때 사람으로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정섭(鄭燮)을 이름. 판교는 그의 호이다.
[주D-002]장탕(張湯)·조우(趙禹) : 모두 한(漢)나라 때의 혹리(酷吏)들로서 조금의 여유도 없이 법을 대단히 각핵(刻覈)하게 적용했었다.
[주D-003]비궤(棐几)의 진영(眞影) : 비궤는 비자나무로 만든 책상을 이름. 진(晉) 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일찍이 문생(門生)의 집에 갔다가 비자나무 책상이 아주 반드럽고 깨끗함을 보고는 인하여 거기에 글씨를 썼는데, 해서(楷書)와 초서(草書)가 절반씩이었다는 데서 온 말로, 즉 해서와 초서를 섞어 쓴 왕희지의 글씨를 뜻한다.
[주D-004]문오봉(文五峯) : 명(明) 나라 때의 화가인 문백인(文伯仁)을 이름. 오봉은 그의 호이다.
[주D-005]구학(邱壑) : 화가(畫家)를 형용하는 말로, 전하여 화법(畫法)을 의미한다.
[주D-006]둔암(鈍葊) : 암(葊)은 암(菴)의 고자로, 둔암은 청 나라 때의 서화가인 서세강(徐世剛)의 호이며, 학자인 왕완(汪琬)의 호이기도 한데, 여기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주D-007]돼지……맛 : 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돼지 불고기를 매우 좋아하였으므로, 당시 금화산(金華山)에 머물고 있던 그의 친구인 고승(高僧) 불인(佛印)이 돼지 불고기를 마련해 놓고 소식을 대접했던 데서 온 말이다. 소식의 희답불인(戲答佛印)이라는 시에 "혜원법사는 술을 사서 도잠을 대접했는데, 불인법사는 돼지고기 구워 자첨을 대접하네.[遠公沽酒飮陶潛 佛印燒猪待子贍]"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五十》
[주D-008]팔대산인(八大山人) : 명(明) 나라의 종실(宗室)로 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주답(朱耷)의 호이다. 자세한 것은 위의 주 167)에 나타나 있다.
[주D-009]유완암(劉完菴) : 명 나라 때의 문인인 유각(劉珏)을 이름. 완암은 그의 호이다.
[주D-010]오중규(吳仲圭) : 원(元) 나라 때의 화가인 오진(吳鎭)을 이름. 중규는 그의 자이다.
[주D-011]왕몽루(王夢樓) : 청(淸) 나라 때의 문인으로 서화에도 유능했던 왕문치(王文治)를 이름. 몽루는 그의 호이다.
[주D-012]석전(石田) : 명 나라 때의 문인으로 서화에도 뛰어났던 심주(沈周)의 호이다. 당인(唐寅)·문징명(文徵明)·구영(仇英)과 함께 명 나라의 사가(四家)로 일컬어진다.
[주D-013]경연(耕煙) : 청 나라 때의 명화가인 왕휘(王翬)의 호이다.
[주D-014]운종(雲從) : 원명(元明) 시대에 운종이란 자를 가진 문인(文人)이 몇 사람 있기는 하나, 여기서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주D-015]준법(皴法) : 화법(畫法)의 하나로서 즉 산악(山嶽)·암석(巖石) 등 굴곡(屈曲)·중첩(重疊)한 모양 등을 그리는 법칙을 말한다.
[주D-016]전순거(錢舜擧) : 원(元) 나라 때 사람으로 시·화에 능했던 전선(錢選)을 이름. 순거는 그의 자이다.
[주D-017]송비옥(宋比玉) : 명 나라 때의 서화가인 송각(宋珏)을 이름. 비옥은 그의 자이다.
[주D-018]인수인(引首印) : 서폭(書幅)의 맨 첫머리에 찍는 인장(印章)을 이름.
[주D-019]심도(沈度) : 명 나라 때의 서가(書家)이다.
[주D-020]압봉(押縫) : 종이의 서로 연접(連接)하는 곳에 날인(捺印)하는 것을 이름.
[주D-021]육주(六舟) : 청 나라 때의 승(僧) 달수(達受)의 호이다. 달수는 한묵(翰墨)을 좋아하였고, 특히 고기(古器)·비판(碑版) 등의 감정을 아주 잘하였으므로, 금석승(金石僧)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다.
[주D-001]정판교(鄭板橋) : 청 나라 때 사람으로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정섭(鄭燮)을 이름. 판교는 그의 호이다.
[주D-002]장탕(張湯)·조우(趙禹) : 모두 한(漢)나라 때의 혹리(酷吏)들로서 조금의 여유도 없이 법을 대단히 각핵(刻覈)하게 적용했었다.
[주D-003]비궤(棐几)의 진영(眞影) : 비궤는 비자나무로 만든 책상을 이름. 진(晉) 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일찍이 문생(門生)의 집에 갔다가 비자나무 책상이 아주 반드럽고 깨끗함을 보고는 인하여 거기에 글씨를 썼는데, 해서(楷書)와 초서(草書)가 절반씩이었다는 데서 온 말로, 즉 해서와 초서를 섞어 쓴 왕희지의 글씨를 뜻한다.
[주D-004]문오봉(文五峯) : 명(明) 나라 때의 화가인 문백인(文伯仁)을 이름. 오봉은 그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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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6]둔암(鈍葊) : 암(葊)은 암(菴)의 고자로, 둔암은 청 나라 때의 서화가인 서세강(徐世剛)의 호이며, 학자인 왕완(汪琬)의 호이기도 한데, 여기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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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8]팔대산인(八大山人) : 명(明) 나라의 종실(宗室)로 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주답(朱耷)의 호이다. 자세한 것은 위의 주 167)에 나타나 있다.
[주D-009]유완암(劉完菴) : 명 나라 때의 문인인 유각(劉珏)을 이름. 완암은 그의 호이다.
[주D-010]오중규(吳仲圭) : 원(元) 나라 때의 화가인 오진(吳鎭)을 이름. 중규는 그의 자이다.
[주D-011]왕몽루(王夢樓) : 청(淸) 나라 때의 문인으로 서화에도 유능했던 왕문치(王文治)를 이름. 몽루는 그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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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13]경연(耕煙) : 청 나라 때의 명화가인 왕휘(王翬)의 호이다.
[주D-014]운종(雲從) : 원명(元明) 시대에 운종이란 자를 가진 문인(文人)이 몇 사람 있기는 하나, 여기서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주D-015]준법(皴法) : 화법(畫法)의 하나로서 즉 산악(山嶽)·암석(巖石) 등 굴곡(屈曲)·중첩(重疊)한 모양 등을 그리는 법칙을 말한다.
[주D-016]전순거(錢舜擧) : 원(元) 나라 때 사람으로 시·화에 능했던 전선(錢選)을 이름. 순거는 그의 자이다.
[주D-017]송비옥(宋比玉) : 명 나라 때의 서화가인 송각(宋珏)을 이름. 비옥은 그의 자이다.
[주D-018]인수인(引首印) : 서폭(書幅)의 맨 첫머리에 찍는 인장(印章)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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