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33] |
17년 동안을 해와 달이 비추지 않는 그늘진 벼랑과 깜깜한 구덩이에서 지내노니, 이것이 울단주(鬱單洲)입니까, 소속산(疏屬山)입니까? 이런 사람으로서 어떻게 헌발(獻發)과 신구(新舊)를 함께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높은 연세에 한 해를 더하시고 합하의 복이 비록(祕籙)에 증가되었으니, 머리를 들고 우러러 송축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내 사사로운 정리에 있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주저할 겨를도 없습니다.
다만 해가 바뀌고 달은 하순(下旬)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식이 묘연하던 중, 상원(上元 정월 대보름날)날 저녁에 김생 중유(中游)가 전편(專便)으로 와서 합하가 '평안(平安)'하시다는 두 글자를 보여주고, 김생은 또 합하의 칠언시(七言詩)를 아울러 첨부하여 왔습니다. 늘 생각하고 있던 중이라 기뻐서 열 길이나 솟구치며 이를 받들고 죽 읽어보니, 강조(江調)는 노련하고 선명하며, 협운(峽韻)은 건장하고 짙푸르며, 높은 연세에 나오기 드문 것으로 진력(眞力)이 가득 넘쳐 흐르며, 마치 옛 거문고의 매화 흔적(梅癍) 같기도 하고 옛 청자(靑瓷)의 비색(祕色) 같기도 하여 오랜 세월이 경과하고 시절이 전환하는 즈음에 더욱 정채(精采)가 뛰어나심을 깨닫겠습니다. 그리하여 체(體)가 상(相)을 좇아 변하거나 경(境)이 물(物)로 인하여 변천하지 않고, 글자마다 화엄법계(華嚴法界)로부터 나왔는데, 이는 바로 노파(老坡)가 일생 동안 유희삼매(遊戲三昧)를 수용(受用)하던 곳으로서, 곱고 윤택한 기운이 빙첨 설벽(氷簷雪壁)에 충만하니, 이것이 곧 야마천(夜摩天)·도리천(忉利天)에서 곧바로 살진 고기와 하얀 옥액(玉液)의 맛을 취한 것입니다.
세후에 추위가 다시 심해지니, 참으로 태호(太昊)가 겸손을 지키고 전욱(顓頊)이 청렴하지 않다고 이를 만합니다. 옛 병년(丙年)의 유별난 추위가 지금 60년 만에 또다시 극성을 부리니, 아직도 기억하건대, 당시 운종가(雲從街 종로 서쪽 시가의 옛 이름)에는 다니는 사람이 없었던 듯합니다. 이것이 어찌 희화(羲和)의 일월부(日月簿) 또한 세간(世間)에서 전례(前例)를 등록(謄錄)해 놓은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자나간 자취를 굽어 따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또한 이상한 일입니다.
온 하늘에 봄눈이 내리니 갑자기 강정(江情)이 생각납니다. 이때에 균체후(勻體候)는 한결같이 평안하시고 깊은 복이 따라서 통창하시며, 언 잉어회와 찬 김치가 초반(椒盤)에 함께 올랐습니까? 한편으로는 간곡히 염려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그리워하며 송축하는 바입니다.
정희는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또한 세월을 마치 도가(陶家)의 바퀴[輪]처럼 용이하게 돌려보내 버리고, 심지어 산 사람의 일상적인 안부조차도 언급할 겨를이 없으며, 형과 아우도 서로 괴로워 부르짖고 있으니 무슨 세월이란 말입니까? 한 실낱 같은 생명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나, 쓸모가 없기는 계륵(鷄肋)보다 심하고 험난하기는 양장판(羊腸坂)보다 심한 지경이니, 또한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매양 한 사자(使者)를 시켜서 하다가, 오늘은 대단히 힘을 들여 얼어붙은 붓을 입김으로 불어 녹여서 이와 같이 정성껏 써서 올립니다. 또 학명(鶴銘)의 고정(攷定)에 대해서도 약간 그 면목을 보았기에 아울러 올리오니, 다시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천지석벽도(天池石壁圖)는, 대치(大癡)의 원본(原本)이 이미 내부(內府)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부로 들여갈 때에 호사자(好事者)가 그림의 내용을 별도로 기록하여 세상에 전한 것이 있었는데, 석곡(石谷)·녹대(麓臺)가 세간에 전하고 있는 다른 한 본(本)을 여기에 합하여 모사(摸寫)하고는 '당(唐) 나라 때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법첩(法帖)을 모사한 것은 진적(眞蹟)보다 한 등급이 낮은데, 그와 같은 것이 천하에 오직 이 한 본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인들이 또 서로 이 그림을 모사함으로써 자못 화가(畫家)들이 천지석벽(天池石壁)을 구실(口實)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림 내용을 별도로 기록한 문자(文字)를 가지고 참고해 보면, 나무 하나, 돌 하나도 그 위치를 감히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이 그림은 다른 그림과 달라서 마치 문장가(文章家)의 전칙(典則)에 기승전려(起承轉捩)와 조응(照應)·수결(收結) 등의 법이 있어 한 가지도 빠뜨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만일 일절(一節)만 빠지면 문득 체재를 이루지 못하므로, 반드시 그 위치를 한결같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도인(道人)의 가슴속에는 구학(邱壑)이 절로 갖추어져서 일종의 특별한 정취가 있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하나의 속장(俗匠)일 뿐인 것입니다. 나무 하나, 돌 하나, 산봉우리 하나, 시내 하나야 누구든 그리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 그림의 내용을 별도로 기록해 놓은 문자를 일찍이 거두어서 옛 상자에 넣어둔 것이 있기에, 먼지가 쌓이고 좀이 득실거리는 곳을 수일 동안 샅샅이 뒤져 찾아내서 이에 감히 기록하여 올리오니, 이 그림과 서로 맞지 않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또 이 그림에는 천지석벽이 본래의 면목인데, 이 그림 속에는 지(池)와 벽(壁)이 있는 것은 볼 수 없는 반면, 기타 산세의 굴곡이며 중첩한 모양과 나무를 세우는 격식에 있어서는 혹 과다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튼 지도 없고 벽도 없는 것을 천지석벽이라고 하는 것은 될 수가 없을 듯합니다. 그러니 다만 하나하나를 세밀히 참고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더구나 이 그림의 법식은 지극히 엄중하여 함부로 가감을 할 수 없는 것임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이 그림이 언뜻 보면 틀림없는 가작(佳作)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묵(墨)을 퇴적(堆積)시킨 뜻이 없고 필(筆)도 천박한 곳이 많으며, 조응(照應)·결속(結束) 등의 체식(體式)이 없습니다. 서화(書畫)를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는 금강저(金剛杵)와 같은 안목과 혹리(酷吏)와 같은 솜씨로 구핵(究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실로 까다롭게 찾아낼 수가 없어 여러 사람의 견해에 따라 부질없이 응해 주지만, 합하에 대해서는 실로 감히 내 마음속에 만족하지 못한 것을 적당히 미봉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천지석벽도는 잡수(雜樹) 한 숲으로부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제일층(第一層)이 되고, 숲 밖의 계곡 건너편에 바로 큰 산을 일으켰는데 산의 우측에는 한 못[池]이 있어 인가(人家)가 못에 임해 있으며, 못 가로는 가파른 절벽을 세워 놓았고 절벽 틈에서는 폭포가 나와 내리 쏟고 있는데, 여기에는 잔도(棧道)를 접주(接住)시켜 수구(水口)가 드러나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천지석벽의 점제(點題)가 되는 것입니다.
또 소나무 네 그루가 높이 솟아 있고 돌 곁에는 띠집[茆屋]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체로 전폭(全幅)을 통틀어 오직 한 대산(大山)이 주축이 되고, 산꼭대기 밖으로는 소산(小山) 두 층을 배열하여 담담하게 국외(局外)에 머물러 있게 하였으며, 큰 산과 작은 봉우리가 서로 연결하여 일어나고 엎드리고 하는 것으로써 수결(收結)의 무궁한 정취로 삼았고, 그 밖에도 남기(嵐氣)가 전폭에 넘치어 그 혼륜(渾侖)함과 웅후(雄厚)함이 참으로 장관(壯觀)에 속합니다.《대운고(大雲藁)》가 합하의 서실에 수장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내가 일찍이 그 글을 한번 보니, 구증(歐曾)의 정파(正派)이며 근래의 거벽(巨擘)이라고 일컬을 만하였습니다. 그의 의론(議論)은 약간 종횡무진함에 가까운데, 혹은 파공(坡公)의 규제(規制)와 같이 대단히 엄정(嚴整)하여 개보(介甫)에게 손색될 것이 없고, 방자함이나 빈틈이 전혀 없어 곧장 위로 방류(方劉)를 엄습하려 하나 방류에 돌진하여 넘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만 그의 기백이 약간 커서, 희전(姬傳)의 담아(澹雅)한 곳에 이르러서는 끝내 한 수가 부족하지만, 원자재(袁子才)·왕염풍(王念豐) 등 제인(諸人)은 의당 물러나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품은 지극히 고상하여 말을 가려서 함으로써 반드시 후인(後人)들에게 징신(徵信)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의 비지(碑志)는 읽을 만한 것이 있으니, 전혀 아첨하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안목으로는 미칠 수 없는 바이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치한 말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잔뜩 늘어놓는 습관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다. 《초이집(初二集)》 이외에 또 외집(外集)이 있는데, 합하의 서실에 만일 다 갖추어 있으면 잠시 뽑아서 보여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또 혹 근래에 나온 문자(文字)로서 볼 만한 것이 있을 경우, 아울러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이곳에 온 이후로는 자못 조용히 연구를 하여 안력(眼力)이 퍽 투진(透進)한 곳이 있기는 하나, 다만 곁에서 그 예봉(銳鋒)을 발전(撥轉)시켜 줄 사람이 없는지라, 수시로 책을 덮고 혼자 웃곤 할 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합하께 한번 질정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인(古人)들은 글씨를 쓰는 데 있어 간찰(簡札)이라는 한 가지 체식이 따로 없었습니다. 순화각첩(淳化閣帖)의 경우는 진(晉) 나라 때 사람들의 글씨가 많은데, 거기서는 간찰을 오로지 주장하지 않았으니, 간찰은 바로 우리나라의 나쁜 습관입니다. 나의 글씨는 비록 말 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 동안에 걸쳐 10개의 벼루를 갈아 닳게 했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으나 한번도 간찰의 법칙을 익힌 적이 없어 실로 간찰에 한 가지 체식이 따로 있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와서 글씨를 요구하는 자는 매양 간찰을 써 달라고 하므로 감히 하지 못한다고 거절합니다마는, 그 중에 승배(僧輩)들이 더욱 심하게 간찰을 요구하고 있으니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주D-001]울단주(鬱單洲) : 강소성(江蘇省)의 외진 해중(海中)에 있는 울주산(鬱州山)을 이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2]소속산(疏屬山) : 산서성(山西省)의 외딴 곳에 위치한 산명(山名)이다.
[주D-003]헌발(獻發) : 새해가 오고 봄기운이 발양하는 것을 이름.《초사(楚辭)》 초출(招魂) 난(亂)에 "해가 새로이 이르고 봄기운이 발양하건만, 나만 혼자 쫓겨나서 남으로 가네.[獻歲發春兮 汨吾南征]"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유희삼매(遊戲三眛) : 원래는 배우(俳優)가 오로지 연기(演技)에 몰두하는 것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문학상에 있어 일정한 방법에 흥미를 집중시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5]야마천(夜摩天)·도리천(忉利天) : 불교의 용어로, 야마천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제삼천이고, 도리천은 육계 육천의 제이천이라고 한다.
[주D-006]태호(太昊) : 봄을 맡은 신(神)으로 동방 청제(東方靑帝)를 말한다.
[주D-007]전욱(顓頊) : 북방(北方)에 위치하여 수덕(水德)을 맡은 별이름으로 즉 겨울의 추위를 비유한 것이다.
[주D-008]희화(羲和) : 태양(太陽)을 싣고 다니는 어자(馭者). 전하여 일월(日月)을 맡은 신(神)의 뜻으로 쓰인다.
[주D-009]초반(椒盤) : 신년(新年)에 쓰는 주효(酒肴)를 이름. 정월 초하룻날에 초주(椒酒)를 상에 차려다가 손에게 권하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10]학명(鶴銘) : 비명(碑銘)의 이름으로 양(梁) 나라 때, 호가 화양진일(華陽眞逸)인 도홍경(陶弘景)이 글을 짓고, 상황산초(上皇山樵)라는 은사가 글씨를 썼다고 전하는 예학명(瘞鶴銘)의 약칭인 듯하다. 특히 이 비명은 글씨의 품격이 고아(高雅)하기로 이름이 높다고 한다.
[주D-011]대치(大癡) : 원(元) 나라 말기의 문인화가로 호가 대치 도인(大癡道人)인 황공망(黃公望)을 이름.
[주D-012]석곡(石谷)·녹대(麓臺) : 모두 청 나라 때 이름이 높았던 화가들로서 석곡은 왕휘(王翬)의 호이고, 녹대는 왕원기(王原祁)의 호이다. 이들 두 사람 외에 역시 명화가인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을 합하여 함께 청초(靑初)의 사왕(四王)으로 일컫는다.
[주D-013]기승전려(起承轉捩) : 시문(詩文)을 짓는 데 있어 그 배열(排列)의 명칭. 원래는 첫머리를 기(起), 첫머리의 뜻을 이어받는 것을 승(承), 한번 뜻을 전환시켜는 것을 전(轉), 말미에서 전체를 결합시키는 것을 결(結)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결(結)을 끊어 매조지한다는 뜻에서 려(捩)로 전용한 듯하다.
[주D-014]조응(照應) : 시문 등을 짓는 데 있어 전후(前後)를 대조하여 균형을 잡는 것을 이름.
[주D-015]점제(點題) :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배경의 재료(材料)를 뜻함. 화제(畫題).
[주D-016]《대운고(大雲藁)》 : 청 나라 때의 문장가인 운경(惲敬)의《대운산방문집(大雲山房文集)》을 이름.
[주D-017]구증(歐曾) : 송(宋) 나라 때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와 증공(曾鞏)을 합칭한 말이다.
[주D-018]개보(介甫) : 송 나라 때의 문장가인 왕안석(王安石)의 자이다.
[주D-019]방류(方劉) : 청 나라 때의 문장가인 방포(方苞)와 유대괴(劉大櫆)를 합칭한 말이다.
[주D-020]희전(姬傳) : 청 나라 때의 문장가인 요내(姚鼐)의 자이다.
[주D-021]원자재(袁子才)·왕염풍(王念豐) : 원자재는 청 나라 때의 원매(袁枚)를 이름. 자재는 그의 자이다. 왕염풍은 역시 청 나라 때의 왕기손(王芑孫)을 이름. 염풍은 그의 자이다.
[주D-002]소속산(疏屬山) : 산서성(山西省)의 외딴 곳에 위치한 산명(山名)이다.
[주D-003]헌발(獻發) : 새해가 오고 봄기운이 발양하는 것을 이름.《초사(楚辭)》 초출(招魂) 난(亂)에 "해가 새로이 이르고 봄기운이 발양하건만, 나만 혼자 쫓겨나서 남으로 가네.[獻歲發春兮 汨吾南征]"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유희삼매(遊戲三眛) : 원래는 배우(俳優)가 오로지 연기(演技)에 몰두하는 것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문학상에 있어 일정한 방법에 흥미를 집중시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5]야마천(夜摩天)·도리천(忉利天) : 불교의 용어로, 야마천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제삼천이고, 도리천은 육계 육천의 제이천이라고 한다.
[주D-006]태호(太昊) : 봄을 맡은 신(神)으로 동방 청제(東方靑帝)를 말한다.
[주D-007]전욱(顓頊) : 북방(北方)에 위치하여 수덕(水德)을 맡은 별이름으로 즉 겨울의 추위를 비유한 것이다.
[주D-008]희화(羲和) : 태양(太陽)을 싣고 다니는 어자(馭者). 전하여 일월(日月)을 맡은 신(神)의 뜻으로 쓰인다.
[주D-009]초반(椒盤) : 신년(新年)에 쓰는 주효(酒肴)를 이름. 정월 초하룻날에 초주(椒酒)를 상에 차려다가 손에게 권하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10]학명(鶴銘) : 비명(碑銘)의 이름으로 양(梁) 나라 때, 호가 화양진일(華陽眞逸)인 도홍경(陶弘景)이 글을 짓고, 상황산초(上皇山樵)라는 은사가 글씨를 썼다고 전하는 예학명(瘞鶴銘)의 약칭인 듯하다. 특히 이 비명은 글씨의 품격이 고아(高雅)하기로 이름이 높다고 한다.
[주D-011]대치(大癡) : 원(元) 나라 말기의 문인화가로 호가 대치 도인(大癡道人)인 황공망(黃公望)을 이름.
[주D-012]석곡(石谷)·녹대(麓臺) : 모두 청 나라 때 이름이 높았던 화가들로서 석곡은 왕휘(王翬)의 호이고, 녹대는 왕원기(王原祁)의 호이다. 이들 두 사람 외에 역시 명화가인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을 합하여 함께 청초(靑初)의 사왕(四王)으로 일컫는다.
[주D-013]기승전려(起承轉捩) : 시문(詩文)을 짓는 데 있어 그 배열(排列)의 명칭. 원래는 첫머리를 기(起), 첫머리의 뜻을 이어받는 것을 승(承), 한번 뜻을 전환시켜는 것을 전(轉), 말미에서 전체를 결합시키는 것을 결(結)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결(結)을 끊어 매조지한다는 뜻에서 려(捩)로 전용한 듯하다.
[주D-014]조응(照應) : 시문 등을 짓는 데 있어 전후(前後)를 대조하여 균형을 잡는 것을 이름.
[주D-015]점제(點題) :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배경의 재료(材料)를 뜻함. 화제(畫題).
[주D-016]《대운고(大雲藁)》 : 청 나라 때의 문장가인 운경(惲敬)의《대운산방문집(大雲山房文集)》을 이름.
[주D-017]구증(歐曾) : 송(宋) 나라 때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와 증공(曾鞏)을 합칭한 말이다.
[주D-018]개보(介甫) : 송 나라 때의 문장가인 왕안석(王安石)의 자이다.
[주D-019]방류(方劉) : 청 나라 때의 문장가인 방포(方苞)와 유대괴(劉大櫆)를 합칭한 말이다.
[주D-020]희전(姬傳) : 청 나라 때의 문장가인 요내(姚鼐)의 자이다.
[주D-021]원자재(袁子才)·왕염풍(王念豐) : 원자재는 청 나라 때의 원매(袁枚)를 이름. 자재는 그의 자이다. 왕염풍은 역시 청 나라 때의 왕기손(王芑孫)을 이름. 염풍은 그의 자이다.
'▒ 완당김정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35] (0) | 2007.03.09 |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34] (0) | 2007.03.09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32] (0) | 2007.03.09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31] (0) | 2007.03.09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30] (0) | 2007.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