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35]

천하한량 2007. 3. 9. 03:58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35]

석전(石田)의 묵묘(墨妙)에 대해서는 어제 석양의 창문 앞에서 잠시 회광(回光)을 이용하여 그 인장을 보니, 바로 '보하(普荷)' 두 글자였습니다. 보하는 곧 명(明) 나라 말기의 유민(遺民)으로 명 나라가 멸망하자 치의(緇衣)를 입고 머리를 깎고서 중이 된 사람인데, 보하는 이름이고 호는 담당(擔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관(題款)은 담당이지, 격당(格堂)이 아닙니다. 담(擔) 자의 초법(草法)이 본디 격(格) 자와 비슷하거니와, 그 밑의 인장을 자세히 보면 또 이것이 바로 '담당' 두 글자임이 명확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지라,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책상을 치면서 기이함을 외치는 바입니다.
이 승려가 출가(出家)하기 전에 일찍이 동현재(董玄宰)를 사사(師事)하여 서화(書畫)를 모두 잘하였으니 의당 그 필법이 유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림은 오로지 운림(雲林)의 법칙을 숭상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석전의 진적(眞迹)을 보게 된 것만도 이미 대단한 묵륜(墨輪)인데, 또 더구나 보하가 심정(審定)한 것임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석전의 진적임은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어쩌면 이렇게도 대단히 유쾌하고 기쁜 일이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안석(案席) 아래서 직접 대증(對證)할 길이 없으므로, 마음이 조급하여 참고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나무 하나, 돌 하나, 준(皴) 하나, 점(點) 하나가 다 신묘불측하지 않은 것이 없거니와, 그 문전(門前) 어부(漁夫)의 버드나무 가지에 꿴 고기는 하나의 스쳐 지나간 묵점(墨點)에 불과한데도 신채(神采)가 더욱 기변(奇變)스러우니, 석전의 진필이 아니면 누가 이런 작품을 창출하겠습니까. 다른 종류는 아직 다 열람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시 여기에 그대로 두고 석전의 화권(畫卷)만 먼저 이렇게 우러러 울립니다.
석곡(石谷)의 것은 이것이 진적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비록 변필(變筆)이 있기는 하나, 석곡은 본디 일률적으로 줄이고 불리고 하지 않거니와, 이것은 또 아주 힘을 들인 곳이요, 그냥 슬쩍 지나간 붓이 아닙니다. 이것 또한 묵연(墨緣) 속에 주입(湊入)되어 온 것이니, 참으로 매우 좋습니다.
역산(歷山)은 바로 명(明) 나라 말엽, 청 나라 초기 사람인데, 성은 오씨(吳氏)이고 이름은 잊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로 목재(牧齋 전겸익(錢謙益)의 호)·어양(漁洋 왕사정(王士禎)의 호)이 깊이 허여했던 사람입니다. 이 본(本)은 감히 질정하여 말하지는 못하겠으나, 만일 여력(餘力)이 있다면 거두어 두는 것이 무어 해로울 것 있겠습니까.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의 호)의 마도(馬圖)는 삼희법물(三希法物)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건륭제(乾隆帝)의 어필(御筆)은 안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곧 이것 일단(一段)만으로도 이미 보배롭기에 충분하거니와 이 글씨가 진짜임을 인하여 이 그림도 안작이 아님을 확정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내부(內府)의 모든 감상인(鑑賞印)들도 다 진짜임을 의심할 것이 없는데, 다만 의자손(宜子孫)이라는 것이 이전에 본 것과 조금 다르니, 또 이것은 별인(別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 감히 이 조금 다른 것 때문에 다른 인(印)들까지 아울러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왕희(王熙)가 발(跋)한 것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화법(畫法)이 과연 다른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말[馬]을 그리는데 있어서는 자못 모양을 달리한 것입니다.
조중목(趙中穆)의 마권(馬卷)에 대해서는 감히 진짜라고 확정할 수는 없으나, 오씨(吳氏) 발문(跋文)의 필의(筆意)는 또한 비속한 작품이 아니어서 자못 좋은 데가 있습니다. 번납노인(藩衲老人)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대단히 비속한 작품이 아니니, 바로 한 상감가(賞鑑家)인 것입니다. 그 두 인장은 매우 희미하나, 대개 그 인각(印刻)은 또 보통 솜씨가 아니니, 곧 이 한 번납노인만으로 애중(愛重)히 여기기에 충분합니다. 또 그 원도(原圖) 또한 본가(本家)의 필의를 잃지 않은 듯도 합니다.
선화(扇畫)는 매우 좋습니다. 대단히 좋은 데가 있기는 하나 다만 묵법(墨法)이 부족합니다. 대체로 당송(唐宋) 시대는 이미 멀어져서 연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근래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태창(太倉) 일파(一派)를 남종(南宗)의 적전(嫡傳)으로 삼고 황자구(黃子久 자구는 황공망의 자)를 조인(祖印)으로 삼은 다음, 형만민(荊蠻民 예찬의 별호임)의 황한(荒寒)함과 고상한 운치를 참작하는데, 이는 모두 먹을 퇴적(堆積)시켜서 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하는 곳은 매양 마른 붓에 묽은먹[枯筆淡墨]으로 하고, 점차로 첩가(疊架)를 쌓아 나가는데, 산(山)의 멀고 가까움과 구학(邱壑)의 깊고 얕음과 수목(樹木) 빛의 묽고 진함이 바로 묵법(墨法)의 환현불측(幻現不測)한 데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만일 묵법이 아니면 문득 하나의 인판(印板)일 뿐이니, 무슨 멀고 가까움과 깊고 얕음과 진하고 묽음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찍이 금대(金臺)의 한 명수(名手)가 하나의 단폭 소경(短幅小景)을 그리는 것을 보니, 묘시(卯時)·진시(辰時) 사이에 시작하여 마침내 등잔불을 켜고서야 이에 먹을 거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먹[墨]을 쌓아서 더디고 또 더디게 하는 것입니다. 또 그림에 제(題)하는 법은 옛날에는 없었고 당(唐) 나라 사람들의 작품은 겨우 나무 뿌리나 돌 모서리 사이에 승두(蠅頭)처럼 잔 글씨로 그 성명(姓名)만을 표시할 뿐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그림의 공처(空處)이지만 모두 그 화의(畫意)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그 공처를 범하지 않는 것이니, 만일 범한다면 그림 위에 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원(元) 나라 사람들로부터 이후로 점차 제관(題款)을 하였으니 이것은 곧 그림의 공결(空缺)된 곳을 보충한 것이요, 또 함부로 그 공처를 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것 또한 대단히 살펴 재량해서 할 일입니다. 또 악찰(惡札)을 잡제(雜題)해서는 안 됩니다. 청진(淸眞)한 구학(邱壑) 가운데 또 어찌 더러운 비계덩이 같은 말들을 붙여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일시적인 유희이기는 하나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마침 근대 사람의 문자(文字)를 얻었는데 퍽 볼 만한 것이 있기에 두서너 편을 기록하여 이에 감히 우러러 바칩니다.
손소(孫疏) 한 편은 일시적인 규잠(規箴)만이 아니고 만세의 법도가 될 만합니다. 건륭(乾隆) 원년에 60년 이후의 일을 미리 헤아리어 마치 머나먼 거리의 진(秦)·월(越) 사이에 서로 타국 사람의 장부(臟腑)를 환히 들여다보고 그 뱃속에 찬 응어리를 지증(指證)해 낸 것과 같았으니, 어쩌면 이러한 신감(神鑑)이 있단 말입니까. 건륭황제는 본디 영주(英主)였거니와, 그 식견 있는 신하가 앞날의 계책을 지나치게 걱정한 것이 이러하였으니, 어찌 매우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건륭의 60년 동안 태평의 치적을 이룬 것이 실로 이 말 한 마디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화신(和珅)의 한 사건은 끝내 이 말 한 마디의 타격으로 화를 입었으니 또 어찌 대단히 경외(敬畏)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견륭의 조정에는 이와 같은 명신(名臣)들이 서로 줄을 이어 한둘로 헤아릴 수 없었는데, 모두 함께 대성(臺省)에 그득하고 조정(朝廷)에도 가득 차서 군신(君臣)이 서로 잘 만나 상하가 서로 공경하고 화협함으로써, 그 문사(文思)와 무공(武功)이 곧장 위로 올라가 한당(漢唐) 시대를 능가하려 하였으니, 자광각(紫光閣)의 도상(圖象)과 현량사(賢良祠)에 입사(入祀)한 것이 한대(漢代)의 기린각(麒麟閣)과 운대(雲臺)의 공신(功臣)들에게 손색될 것이 없습니다. 매양 그들의 풍채(風采)를 상망(想望)하면 부러워서 칭송됨을 감당치 못한 때문에 이토록 요량 없이 말씀드리고 보니,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이림(二林)의 문자에 대해서 처음에는 퍽 대단한 것으로 들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열람해 보니, 곧 양명(陽明)의 일파(一派)로서 곧장 유(儒)를 끌어다가 석(釋)으로 들여 놓으려고 하는 것이 또 왕용계(王龍溪)·도석궤(陶石簣) 무리보다 더 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 사람들의 사상(事狀) 가운데는 약간 볼 만한 것이 있어 원수원(袁隨園 수원은 원매(袁枚)의 호)의 근거 없는 것과는 같지 않아서 후일의 사료(史料)를 넓히기에 충분하나, 다만 너무 잗단 것이 흠입니다. 《소서록(消暑錄)》은 보잘것이 없고 한두 가지 의방(醫方)을 모아둔 것 중에는 혹 채택할 만한 것도 있으므로 장차 초록해 두려고 합니다.
《주역우의(周易虞義)》에 대해서는 연해서 현로(玄老)가 참여하여 듣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 뜻은 또한 역도(易道)가 여기에서 다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일의(一義)로서 고학을 서로 전수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을 뿐입니다. 장씨(張氏)가 여기저기서 부스러기들을 수습해 놓은 것도 역시 이 뜻입니다. 그런데 만일 역도가 여기에서 다한다고 하면,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 역(易)의 본의가 아니요, 또는 장씨가 발명한 본의도 아닐 것입니다. 삼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번남문(樊南文) 한 통을 이에 써서 올립니다. 이 글은 뛰어나게 아름답고 떨쳐오르고 기발하여 하나의 큰 구경거리가 될 만한 문장(文章)이니, 비록 황보지정(皇甫持正)·손가지(孫可之) 같은 이들도 반드시 그를 쫓아가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고서 그의 뒤만 바라볼 것입니다. 내가 소년 시절부터 지금 백발의 늘그막에 이르기까지 이 글을 독송(讀誦)하면서 대단히 좋아한 지가 이미 40여 년이 되었으니, 한갓 굴기(屈芰)증조(曾棗)
의 치우침 정도뿐만이 아닙니다. 풍아(風雅)를 주재하고 문장 점출(拈出)을 재정(裁定)하는 이는 더욱 의당 완색(玩賾)하여야 하므로, 감히 똑같이 좋아하는 것을 할애하여 바쳐서 삼가 지보(至寶)를 서로 함께 보배로 삼을 뜻을 부치는 바이니, 거두어 주시겠습니까?
다만 그 종이가 뻣뻣하기는 마치 말가죽 같고, 지저분하기는 마치 달팽이 침 발라놓은 것 같은데다 이 망가진 붓과 약한 팔로 도저히 글씨를 제대로 써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추잡하고 졸렬한 온갖 모양이 마치 자갈밭에서 미인(美人)이 춤추는 것을 보는 것과 같으니, 다시 매우 우스움을 깨닫겠습니다.

[주D-001]보하(普荷) : 시·서에 뛰어났던 명 나라 말기의 승려로 본성(本姓)은 당씨(唐氏)이고 보하는 이름이다.
[주D-002]운림(雲林) : 원(元) 나라 때의 화가인 예찬(倪瓚)의 호이다.
[주D-003]삼희법물(三希法物) : 삼희당에 소장된 법첩(法帖)을 이름. 청 고종(淸高宗)이 왕희지(王羲之)의 쾌설첩(快雪帖), 왕헌지(王獻之)의 중추첩(中秋帖), 왕순(王珣)의 백원첩(伯遠帖)을 매우 보배롭게 여겨, 이 세 법첩을 간직한 곳을 삼희당이라 명명하고, 위진(魏晉) 시대로부터 원명(元明)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법첩들을 여기에 소장하도록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4]태창(太倉) 일파(一派) : 청 나라 초기의 태창인(太倉人)들로서 사대왕씨화가(四大王氏畫家)로 일컬어진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원기(王原祁)·왕휘(王翬) 등을 가리킨다.
[주D-005]손소(孫疏) : 손씨의 상소문을 지칭한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6]화신(和珅) : 청(淸) 나라 때의 대신(大臣)으로 건륭(乾隆) 연간에 벼슬이 대학사(大學士)에 이르렀는데, 가경(嘉慶) 연간에 왕염손(王念孫) 등의 탄핵을 입어 자진(自盡)의 명을 받고 죽었다.
[주D-007]이림(二林) : 청 나라 때 사람으로 호가 이임거(二林居)인 팽소승(彭紹昇)을 이름. 팽소승은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을 좋아하였고,《이임거집(二林居集)》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주D-008]왕용계(王龍溪)·도석궤(陶石簣) : 왕용계는 명(明) 나라 사람으로 왕수인(王守仁)의 제자인 왕기(王畿)를 이름. 용계는 그의 호이다. 저서에《용계전집(龍溪全集)》 등이 있다. 도석궤는 역시 명 나라 사람으로 호가 석궤인 도망령(陶望齡)을 이름. 그의 저서에는《해장(解莊)》 등이 있다.
[주D-009]현로(玄老) : 순조 때의 문신으로 벼슬은 도승지에 이르렀고, 글씨를 잘 썼던 조석원(曺錫元)의 자이다.
[주D-010]번남문(樊南文) : 당(唐) 나라 때의 시인(詩人) 이상은(李商隱)의 글을 이름. 원래《번남문집》이 있었으나 원본은 오래 전에 없어졌고, 청 나라 때에 와서 주학령(朱鶴齡) 등이 여러 서적 가운데서 이상은의 글을 찾아 모아 문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D-011]황보지정(皇甫持正)·손가지(孫可之) : 황보지정은 당(唐) 나라 때의 문장가이며 한유(韓愈)의 제자인 황보식(皇甫湜)을 이름. 지정은 그의 자이다. 손가지는 역시 당 나라 때의 문장가이며 한유의 제자인 손초(孫樵)를 이름. 가지는 그의 자이다.
[주D-012]굴기(屈芰) : 춘추(春秋) 시대 초(楚) 나라의 굴도(屈到)가 평소에 마름열매[芰]를 대단히 좋아하였는데, 그는 임종시에도 역시 자신의 제사(祭祀)에는 마름열매를 꼭 써달라고 유언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左傳 襄公 十五》
[주D-013]증조(曾棗) : 증자(曾子)의 아버지인 증석(曾晳)이 양조(羊棗)를 대단히 좋아하였으므로, 증자는 차마 양조를 먹지 못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孟子 盡心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