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정다산 약용 에게 주다[與丁茶山 若鏞]

천하한량 2007. 3. 9. 03:59
정다산 약용 에게 주다[與丁茶山 若鏞]

하문하신 잡기(雜記)에 나타난 정주(鄭注)의 글월에 대하여는 마침내 소가(疏家)가 정의 본의(本義 이하에서는 정의로 약칭함)를 어지럽힌 것에 의거하여 가르침을 주신 것 같사오나, 아무래도 소가가 이와 같이 했다 해서 정의를 따를 수 없다고 여겨서는 불가할 듯하옵니다.
정주에 있어서도 역시 조복(弔服)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온데, 다만 천자의 조복을 따로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조문에 또 천자의 조복이라는 어떤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까?
정설(鄭說)에는 변질(弁絰)을 들어 조복으로 삼은 것이 자주 나타나서 낱낱이 다 들 수가 없는데, 지금 소가가 어지럽힌 것을 들어 그대로 정설이라 둘러씌워서는 아무래도 불가할 것이옵니다. 소가가 이를 어지럽히게 된 까닭 또한 근거가 있으니, 곧 상대기(喪大記)에 "임금이 대렴(大斂)하게 되면 아들은 변질한다.[君將大斂子弁絰]"라는 대문을 들어 서로서로 증명함으로써 갈등을 면치 못한 것이나 대개 대렴에 ‘아들이 변질한다.’는 것으로 또 미루어 소렴(小斂)을 증명할 만하여 마침내 잡기의 대문과 서로 끌어 맞춘 것입니다.
"아들이 변질한다."가 이미 특별히 드러난 큰 절문이 되어 있으니, 지금 만약 고례(古禮)를 증명한다면 "아들이 변질한다."의 질(絰)이 또한 환질(環絰)의 제(制)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까? 《의례(儀禮)》의 사상례(士喪禮)에 나타난 습질(襲絰)을 살펴보면, 일고(一股)의 환(環)은 아닌 것 같사오나 변(弁)하고 질(絰)을 더하는 것은 모두 일고로 제를 삼았으며, 사상례의 습질은 이미 분명히 말한 것이 있으니, 마땅히 사상례로써 귀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상례에는 질만 있고 변은 없으며, 상대기에는 변이 있고 질이 있는데, 질이란 관이 없이는 머리에 얹지 못할 것이온즉 이 역시 상대기로써 사상례의 빠진 것을 보충하여 위아래를 통해야 마땅할 것이오니, 이는 바로 옛사람의, 찬언(纂言)은 하되 찬례(纂禮)는 하지 않는다는 의의입니다.
대저 정주가 의심나는 곳이 매우 많지만 이는 다 사설(師說)이요 가법(家法)이니, 비록 지금 사람의 견문에 합당하지 않은 점이 있을지라도 만약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의 자(磁)나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의 요(窯)를 가지고 봉우파사(鳳羽波沙)에 의심이 가게 한다면 너무도 불가한 것입니다. 뒷사람이 정(鄭)을 반박하는 까닭은 자기의 한 가지 반토막에 지나지 않는 식해(識解)를 가지고서 어쩌다 새롭고 기특하여 기뻐할 만한 곳을 발견하게 되면 의연히 떨치고 일어나 공격하여 있는 힘을 남기지 않곤 하였으나 돌이켜 생각하면 자기가 공격한 그 자체는 특별히 사설(師說)도 없고 또 가법도 아닌 것입니다.
왕숙(王肅) 같은 무리들이 힐난한 것은 뜻을 두고 이 설을 세워 스스로 독특함을 자랑한 것이며, 경(經)의 뜻이 날로 부스러지고 없어지는 데에 이르러서는 전혀 생각조차 아니한 것이니, 이는 또 뒷사람들이 크게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육향(六鄕)이 왕성(王城)에 있다는 것도 어떤 분명한 증거가 있사옵니까? 보내온 가르치심이 너무도 간략하여 감히 근거삼아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대저 육향이 교(郊)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鄭)도 또한 가·마(賈馬)의 의(義)를 벽파하였으니, 이미 정의 시대로부터 일정한 논이 없었는데, 더구나 뒷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허공에 매달고서 부연하여 추측하기를 마치 몸소 그 땅에 다다르고 눈으로 그 일을 본 듯이 착착 말하는 것입니까? 설사 옛사람과 암암리에 합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자기 의견을 스스로 세우고 자기 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은, 경(經)을 설명하는 처지로서는 감히 못할 바이며, 다만 갈수록 갈등만 더하여 뒷사람의 안목을 어지럽히는 데에 족할 따름이요 경에는 보익됨이 없을 것입니다.
관자(管子)의 시대에도 육향은 벌써 주(周) 나라 제도가 없어져서 증거를 삼을 수 없으며, 이를테면 "제후(諸侯)는 삼향(三鄕)인데 송(宋)은 유독 사향(四鄕)이다." 한 것은, 주의 제도에 대하여 참증(參證)할 수는 있을 것이오나, 향(鄕)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은 이제 와서 억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졸곡(卒哭)의 변(辨)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선유(先儒) 역시 혼합하여 일치시킨 것이 있을뿐더러 이미 정·가(鄭賈)가 나열 변파한 것을 거쳤으니, 이후 여러 말들이 서로서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너무도 그들의 요량 모르는 것을 보여줄 뿐이며, 어리석은 저의 소견으로는 다만 정설을 준수할 따름입니다.
그윽이 생각하오면 육경(六經)의 전·주(傳注)는 마땅히 육경의 정문(正文)과 함께 천고에 남아야 하며, 위공(僞孔)·두예(杜預)·왕필(王弼)·하안(何晏)에 있어서도 다 폐기하지 못할 것이 있사온데 하물며 정의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주D-001]잡기(雜記) : 《예기(禮記)》의 편명임
[주D-002]정주(鄭注) : 《예기》49편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를 말함. 정현은 동한(東漢)의 거유(巨儒)인데 유가(儒家)에서 송 나라 주희(朱熹)와 더불어 양대 경사(經師)로 지칭함.
[주D-003]소가(疏家) : 《예기》에 나타난 공영달(孔穎達)의 소(疏)를 말함. 공영달은 당 나라 사람으로 자는 충원(沖遠)이며 경학에 통하여 특히 《좌전(左傳)》·《상서(尙書)》·《역(易)》·《모시(毛詩)》·《예기(禮記)》에 밝았으며, 또 안사고(顔師古) 등과 함께 조명(詔命)을 받고 《오경정의(五經正義)》1백 80권을 찬정하여 국자감(國子監)에 넘겨 시행하였음.
[주D-004]변질(弁絰) : 변은 상복의 굴건(屈巾)이고 질은 상복에 쓰는 삼[麻]을 이름. 《주례(周禮)》 하관(夏官) 변사(弁師)에 "왕의 변질은 변(弁)을 하고 환질(環絰)을 가한다." 하였으며, 그 주에 "환질은 왕의 조상시에 착용하는 것인데 그 변은 작변(爵弁)과 같으나 색이 희니, 이른바 소관(素冠)이란 것이다." 하였다.
[주D-005]상대기(喪大記) : 《예기》의 편명임.
[주D-006]대렴(大斂) : 죽은 이에 대한 입관(入棺)을 이른 것임. 대렴하기 전에 죽은 이를 위하여 염의(斂衣)를 가하는 소렴을 하는데 소렴은 죽은 다음날에 염상(斂床)을 방안에 설치하여 염의와 복금(複衾)을 시신에 입히고서 시신을 대청으로 옮기어 염사(斂事)를 행함.
[주D-007]사상례(士喪禮) : 《의례(儀禮)》의 편명임.
[주D-008]습질(襲絰) : 질(絰)을 입는 것을 말함.
[주D-009]일고(一股) : 질마(絰麻)의 한 가닥을 말함.
[주D-010]봉우파사(鳳羽波沙) : 《예기》 희준소(犧尊疏)에 "술항아리에다 봉을 그려 깃을 치며 훨훨 춤을 추는 형상을 만들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고대(古代)의 희준(犧尊)을 말한 것임.
[주D-011]왕숙(王肅) : 위(魏) 동해인(東海人)으로 자는 자옹(子雍)이고 왕낭(王朗)의 아들이다.
[주D-012]육향(六鄕) : 주(周) 나라 제도에 왕성(王城) 밖 백 리의 땅에 대하여 성과 가까운 50리는 근교(近郊)로 하고, 근교의 밖 50리는 원교(遠郊)로 삼아 육향을 나누고 사도(司徒)가 이를 관장하였음. 《禮記 王制》
[주D-013]가·마(賈馬) : 가규(賈逵)와 마융(馬融). 가규는 한(漢) 평릉인(平陵人)으로 자는 경백(景伯)이다. 약관(弱冠) 시절에 능히 《좌씨전》 및 오경(五經) 본문을 외웠으며, 영평(永平) 연간에 《좌씨전해고(左氏傳解詁)》30편과 《국어해고(國語解詁)》21편을 조정에 바치니, 명제(明帝)는 그 설을 중히 여겨 써서 비관(秘館)에 사장하게 하고 명하여 반고(班固)와 함께 비서(秘書)를 고교(考校)하게 하였음. 마융은 동한(東漢) 무릉인(武陵人)으로 자는 계장(季長)이다. 안제(安帝) 때에 교서랑(校書郞)이 되었으며 재고 박흡(才高博洽)하여 저술이 매우 많아 세상의 통유(通儒)가 되었음.
[주D-014]관자(管子) : 춘추 시대 제(齊) 나라 관중(管仲)을 이름. 그는 일찍이《관자》란 책을 저술하였음.
[주D-015]졸곡(卒哭) : 때없이 곡하는 것을 마쳤다는 말인데, 사람이 죽으면 곡성을 끊이지 않으며 장사를 지낸 후에도 생각이 나면 곡을 하다가 백일이 지나면 조석으로만 곡한다.
[주D-016]위공(僞孔) : 위공전(僞孔傳)을 이름. 한(漢) 공안국(孔安國)이 조명(詔命)을 받들어 고문상서전(古文尙書傳)을 만들었는데 그 즈음에 무고사건(巫蠱事件)이 일어나서 미처 헌상하지못하고 죽었다. 진(晉) 나라 때에 와서야 그 글이 나오니 후유(後儒)들이 진인(晉人)의 위조라고 의심하였다. 공영달(孔穎達)의 소(疏)가 그 본(本)임.
[주D-017]두예(杜預) : 진(晉) 두릉인(杜陵人)으로 자는 원개(元凱)이다. 태시(泰始) 연간에 하남윤(河南尹)이 되었다. 경적(經籍)을 닦아 《춘추좌전집해(春秋左傳集解)》를 지어 현재 유행함.
[주D-018]왕필(王弼) : 삼국 시대 위(魏) 산양인(山陽人)으로 자는 보사(輔嗣)임. 《주역》 및 《노자》의 주(注)를 저술하였다. 24세에 죽었음.
[주D-019]하안(何晏) : 삼국 시대 위의 완인(宛人)으로 자는 평숙(平叔)이고 하진(河進)의 손자인데, 젊어서부터 수재(秀才)로 이름나 도덕론(道德論) 및 문부(文賦) 수십 편을 저술하였으며, 세상에 전하는 《논어집해(論語集解)》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