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22] |
7월 초 10일에서 그믐까지에 걸쳐 두 차례의 높으신 서함을 차례로 받아 보니, 족제비·다람쥐나 다니는 좁은 길에 합하의 음성 소리가 반갑고 이매(魑魅)가 득실거리는 고장에 합하의 얼굴이 비추는 듯하였습니다. 나는 이에 힘입어 처참하고 무료함 속에서 스스로 건장해졌습니다. 다만 살피건대, 숭체(崇體)가 신명의 보우로 복을 받으시어 소인들이 기뻐하며 득실거리는 곳에서 짐을 벗고 한산한 곳에서 한가로움을 찾으신다고 하니, 매우 우러러 송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고향 행차를 준비하시고, 석각(石刻)의 일도 이미 완결되어 뜻하신 일들을 다 이루셨으니, 흠앙하여 송축하는 마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이 탁본(拓本)을 얻어 한번 완상하는 것이야말로 어찌 바다 밖에서 헤아릴 수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필의(筆意)가 극히 좋아서 경군(景君)·백석(白石) 양비(兩碑)의 체도(體度)가 있는데, 혹 합하의 팔목 아래 스스로 재량(裁量)하여 쓰신 것입니까, 아니면 혹 우연히 신기하게 서로 합치된 것이란 말입니까? 어쩌면 그리도 이상하단 말입니까? 우리나라에는 예서(隸書)의 비(碑)가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만일 전장(田莊)으로 돌아가시면 되돌아오실 행차가 아마 더딜 듯하니 이 서신이 도착할 때쯤에는 또한 반드시 본제(本第)에 돌아가 계시겠습니다. 운산(雲山)이 마음에 들고 순로(蓴䲐)에 정이 끌리는데도 다시 열 길이나 되는 뿌연 먼지 속을 찾는다면 어조(魚鳥)가 사람을 비웃는 꼴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죄인은, 초췌한 몰골은 예전과 같은데 그동안에 또 이 큰 바다 가운데 귀양지에서 넷째 자씨(姊氏)의 비보(悲報)를 듣고는 살을 에는 듯이 몹시도 놀라고 비통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간의 정리상 편안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바다에 들어온 이후로 친척(親戚)이나 고구(故舊)들의 존몰(存沒)에 대한 감개가 이와 같이 회포를 어지럽히므로, 비록 등골뼈를 곧게 일으켜 정신을 가다듬고 눈물을 억제하여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려 하여도, 속에서 우러나오는 비감을 단절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넋을 상하고 정신이 꺾이게 될 줄을 분명히 알지만, 장차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두 다리는 오래 앉아 있는 관계로 몹시 야위어서 지팡이를 붙들고 어렵게 운신(運身)하는 형편이라, 울밑을 산보하려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앉았을 때나 혹 누웠을 때에도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생각되는 것이 모두가 비참하고 울적한 것뿐이니, 어디에 의지를 하고 무엇으로 이 처지를 견뎌 내겠습니까.
평소에 좋아하던 서권(書卷)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여, 가지고 온 두어 권의 서책에 대해서 마치 약 먹기 싫어하는 어린애에게 숟가락 머리로 혓바닥을 누르고 억지로 약물을 쏟아 넣는 것과 같은 형편이니, 또한 무슨 별 맛이 있겠습니까. 또 하룻밤의 길이가 1년처럼 느껴져 잠깐 졸다가 이내 깨곤 하면서 새벽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마치 사면(赦免) 받기를 바라는 심정과 같으니, 일찍이 《안반수의(安般守意)》 한 법문을 공부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지난날 우리 친구와 더불어 이것을 논하였으나 깊이 연구하지 못하고 보니, 다만 끝까지 뜻만 거스를 뿐입니다.
듣건대, 항씨(項氏)의 역설(易說)을 성람(省覽)하려고 하신다 하니, 매우 좋은 일입니다. 만일 내가 곁에서 논의에 참여하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이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송원(宋元) 이후로 《주역》을 말한 사람이 다른 경(經)에 비해 가장 많아서, 상수(象數)의 의리(義理)에 관한 것 이외에 또 하도(河圖)·낙서(洛書)에 관한 한 문호를 더 개척함으로써 분잡하게 얽히고 설키어 끝까지 밝혀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오직 정자(程子)의 《역전(易傳)》만이 일월(日月)처럼 우뚝하니, 비록 삼백팔십사 효(三百八十四爻)를 삼백팔십사 사(三百八十四事)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주 부자(朱夫子)로부터 또한 남긴 논의가 있게 됨을 면치 못하였으나, 주 부자의 《본의(本義)》로서는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주역》은 다 폐할 수 있어도 정자의 《주역》은 끝내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씨의 역설은 실로 정자의 《역전》에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 상(象)을 퍽 많이 설명하여, 또 주한상(朱漢上)의 지리하고 천착됨과 내지덕(來知德)의 자기 의견만 스스로 옳게 여긴 것과는 다르니, 정자의 《역전》을 읽으려면 항씨의 역설까지 아울러 읽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개괄하여 논하건대, 《주역》의 상(象)을 설명한 것으로는 순상(荀爽)·우번(虞飜)의 역설만한 것이 없으나, 이들은 승강(升降)·방통(旁通)·소식(消息)에 밝지 못하므로 끝내 《주역》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개권 제일의(開卷第一義)인 '건은 원하고 형하고 이하고 정한다.[乾元亨利貞]'는 것이 끝내 무슨 말이며,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에 이른바, 변괘(變卦)의 건괘가 '구괘로 가고 곤괘가 복괘로 간다.[乾之垢坤之復]'는 등의 설(說)은 비록 《좌씨전(左氏傳)》에도 나타나 있어 옛 서법(筮法)의 일의(一義)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변점(變占)의 대의(大義)를 다 포괄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이 한 관문을 투과(透過)한 다음에야 《역》을 말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시수(施讐)·맹희(孟喜) 이하의 가법(家法)과 사설(師說)이 순상(荀爽)·우번(虞飜)에 미친 것입니다.
송(宋) 나라 때의 《주역》에 이르러서는 정자의 《역전》과 항씨의 《주역완사(周易玩辭)》를 능가할 것이 없고, 그 후로 또 송 나라 때의 《주역》에 회통(會通)한 것은 곧 호후(胡煦)의 《함역(函易)》인데, 이것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아주 드물어 세상에 거의 양본(兩本)도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내부(內府)의 서적 가운데 이것이 들어 있어 일찍이 한 번 열람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항씨의 《주역완사》 또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없어 세상에 행해진 것을 보지 못하였고, 이것은 곧 내부본(內府本)을 영초(影鈔)한 것입니다.
만일 이곳에 한둘이라도 이런 것을 얘기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소일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혹 유자(儒者)의 관(冠)을 쓴 사람이라도 와서 묻는 것은 고작 시부(詩賦)를 짓는 데 있어 항목 펼치는 법칙이나 《통감절요(通鑑節要)》의 언토(諺吐)에 관한 것뿐입니다. 대해(大海) 가운데 신산(神山)의 영숙(靈淑)한 기운이 고작 노란 등자[橙黃]·푸른 귤[橘綠]·수선화(水仙花)·빙 두른 푸른 바다[碧環]에만 있단 말입니까. 유주(柳州)가 이른바 '사람은 적고 돌은 많다.[少人多石]'는 것 또한 같은 이치일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질없이 쓰다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을 줄을 알기 때문에 약간 외약(畏約)의 경계에 범람하였습니다. 육 선공(陸宣公)이 의방(醫方)만을 편집하였던 뜻은 아니나, 보신 즉시 소각(燒却)에 부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서화(書畫) 여러 건(件) 및 약료(藥料)를 두 차례 인편에 계속하여 보내주신 것은 하나하나 다 잘 받았습니다. 큰 병을 치른 뒤에는 반드시 이것을 필요로 하지만, 이곳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우러러 사례드립니다.
또 옥두(屋頭)에 비친 호남 노성(弧南老星)을 가지고 멀리 사사로이 축원하는 마음을 펴는 바입니다. 이 별은 추분절(秋分節)부터 정방(丁方)에 나타나서 밤마다 상서로운 광채를 발하는데, 집에 비치면 집이 가득하게 됩니다.
만일 지평상한의(地平象限儀) 하나만 있으면 측후(測候)를 할 수 있고, 또 아울러 북극 출지(北極出地)도 관측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한탄스럽습니다.
일찍이 기억하건대, 세종조(世宗朝) 때에 서운관(書雲觀)에서 한라산(漢拏山)을 표준하여 북극 출지의 고도(高度)를 관측해 낸 것이 《서운관지(書雲觀志)》에 기재되어 있었는데, 그 몇 도[幾度]인지는 또 자세하게 기재하지 않았었습니다. 우리나라 문헌(文獻)들의 홀략하기가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혹 서운관에 재직한 사람으로 문하에 출입하는 이가 있으면 시험삼아 한번 그것을 물어 보신 다음, 제게 자세히 가르쳐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머지는 남겨 두고 다음에 갖추겠습니다.
주자(朱子)가 왕자합(王子合)에게 답한 편지에서 소자(邵子)의 선천 괘위(先天卦位)를 일러 부회 천착(附會穿鑿)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한 때는 순희(淳熙 송 효종(宋孝宗)의 연호 1174~1188)의 15~16년 사이였고, 《본의(本義)》는 순희 정유년(송 효종 4, 1177)에 이루어졌으니, 앞에서 한 말이 《본의》가 이루어진 때보다 10년 뒤에 있었던 것입니다.
《주자가훈(朱子家訓)》은 바로 주백려(朱柏廬) ―용순(用純)임― 가 주자의 거가 격언(居家格言)을 가지고 만든 것입니다. 주백려는 강희(康熙) 연간 사람입니다.[주D-001]경군(景君)·백석(白石) : 경군은 한(漢) 나라 때 익주 태수 경군비(益州太守景君碑)를 말한 것으로 산동성(山東省) 제령현(濟寧縣)에 있는데, 음기(陰記)는 팔분서(八分書)로 쓰였다고 한다. 백석은 후한 영제(後漢靈帝) 때 하북성(河北省)의 태항산(太行山) 기슭에 세운 백석산 신군비(白石山神君碑)를 말한 것인데, 이 역시 팔분서로 쓰였다고 한다.
[주D-002]순로(蓴鱸)에……끌리는데도 : 간절한 고향 생각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장한(張翰)이 벼슬을 하다가, 가을이 되자 고향의 순채와 농어회가 생각나서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오중(吳中)으로 돌아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3]《안반수의(安般守意)》 : 후한(後漢) 때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불경(佛經)의 이름인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의 약칭인데, 내용은 즉 수식관(數息觀)을 말한 것으로, 좌선(坐禪)하면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의 수를 세면서 산란한 마음을 지식시키고 뜻을 지키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주D-004]항씨(項氏)의 역설(易說) : 항씨는 송(宋) 나라 때의 학자이며 문신인 항안세(項安世)를 말하고, 역설은 곧 항안세의 저서인 《주역완사(周易玩辭)》를 말한다.
[주D-005]주한상(朱漢上) : 송 나라 때의 학자인 주진(朱震)을 이름. 한상은 그의 존칭인 한상 선생(漢上先生)의 약칭인데, 특히 《주역》에 정통하여 《한상역집전(漢上易集傳)》등의 저서가 있다.
[주D-006]내지덕(來知德) : 명(明) 나라 때의 학자로 특히 《주역》에 정통하였고, 《주역집주(周易集注)》·《이학변의(理學辨疑)》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주D-007]호후(胡煦) : 청(淸) 나라 때의 학자로서 특히 《주역》에 밝았고, 저서로는 《주역함서(周易函書)》·《보박당문집(葆璞堂文集)》이 있다.
[주D-008]유주(柳州) : 여기서는 곧 당(唐) 나라 때 문장가로서 일찍이 유주 자사(柳州刺使)로 폄적(貶謫)되었던 유종원(柳宗元)을 말한다.
[주D-009]외약(畏約) : 약은 빈천 검약(貧賤儉約)의 뜻으로, 즉 자신이 빈천 검약함으로써 항상 남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10]육 선공(陸宣公)이……뜻 : 육 선공은 당(唐) 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육지(陸贄)를 이름. 선(宣)은 그의 시호이다. 육지는 덕종(德宗)의 신임을 크게 얻어 국가의 대사(大事)를 모두 참재(參裁)하면서 중서 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가, 배연령(裵延齡)의 참소에 의해 충주 별가(忠州別駕)로 폄적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남의 비방을 꺼려서 저서(著書)는 쓰지 않고, 《고금집험방(古今集驗方)》이라는 의서(醫書)만을 편집하여 향인(鄕人)들에게 보여 주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一百五十七》
[주D-011]지평상한의(地平象限儀) : 각도(角度)를 관측(觀測)하는 의기(儀器)임.
[주D-012]북극 출지(北極出地) : 북극성(北極星)이 지상(地上)으로 나온 고도(高度)를 말한 것으로, 즉 북극성과 지평선(地平線) 사이의 각거리(角距離)를 이른 말이다.
[주D-013]주자(朱子)가……하였는데 : 왕자합(王子合)은 주자의 문인인 왕우(王遇)를 이름. 자합은 그의 자이다. 주자가 팔괘(八卦)의 방위(方位)에 대한 왕자합의 질문에 답하기를 "소강절(邵康節)의 설(說)에 의하면, 복희씨(伏羲氏)의 팔괘는, 건(乾)의 방위는 본디 남(南)에 있었고 곤(坤)의 방위는 본디 북(北)에 있었는데, 문왕(文王)이 《주역》을 연(演)할 때에 이 방위를 경정(更定)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대체로 부회 천착에 가깝기 때문에 일찍이 여기에 깊이 유의하지 않았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朱子大全 卷四十九》
[주D-002]순로(蓴鱸)에……끌리는데도 : 간절한 고향 생각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장한(張翰)이 벼슬을 하다가, 가을이 되자 고향의 순채와 농어회가 생각나서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오중(吳中)으로 돌아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3]《안반수의(安般守意)》 : 후한(後漢) 때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불경(佛經)의 이름인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의 약칭인데, 내용은 즉 수식관(數息觀)을 말한 것으로, 좌선(坐禪)하면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의 수를 세면서 산란한 마음을 지식시키고 뜻을 지키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주D-004]항씨(項氏)의 역설(易說) : 항씨는 송(宋) 나라 때의 학자이며 문신인 항안세(項安世)를 말하고, 역설은 곧 항안세의 저서인 《주역완사(周易玩辭)》를 말한다.
[주D-005]주한상(朱漢上) : 송 나라 때의 학자인 주진(朱震)을 이름. 한상은 그의 존칭인 한상 선생(漢上先生)의 약칭인데, 특히 《주역》에 정통하여 《한상역집전(漢上易集傳)》등의 저서가 있다.
[주D-006]내지덕(來知德) : 명(明) 나라 때의 학자로 특히 《주역》에 정통하였고, 《주역집주(周易集注)》·《이학변의(理學辨疑)》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주D-007]호후(胡煦) : 청(淸) 나라 때의 학자로서 특히 《주역》에 밝았고, 저서로는 《주역함서(周易函書)》·《보박당문집(葆璞堂文集)》이 있다.
[주D-008]유주(柳州) : 여기서는 곧 당(唐) 나라 때 문장가로서 일찍이 유주 자사(柳州刺使)로 폄적(貶謫)되었던 유종원(柳宗元)을 말한다.
[주D-009]외약(畏約) : 약은 빈천 검약(貧賤儉約)의 뜻으로, 즉 자신이 빈천 검약함으로써 항상 남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10]육 선공(陸宣公)이……뜻 : 육 선공은 당(唐) 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육지(陸贄)를 이름. 선(宣)은 그의 시호이다. 육지는 덕종(德宗)의 신임을 크게 얻어 국가의 대사(大事)를 모두 참재(參裁)하면서 중서 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가, 배연령(裵延齡)의 참소에 의해 충주 별가(忠州別駕)로 폄적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남의 비방을 꺼려서 저서(著書)는 쓰지 않고, 《고금집험방(古今集驗方)》이라는 의서(醫書)만을 편집하여 향인(鄕人)들에게 보여 주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一百五十七》
[주D-011]지평상한의(地平象限儀) : 각도(角度)를 관측(觀測)하는 의기(儀器)임.
[주D-012]북극 출지(北極出地) : 북극성(北極星)이 지상(地上)으로 나온 고도(高度)를 말한 것으로, 즉 북극성과 지평선(地平線) 사이의 각거리(角距離)를 이른 말이다.
[주D-013]주자(朱子)가……하였는데 : 왕자합(王子合)은 주자의 문인인 왕우(王遇)를 이름. 자합은 그의 자이다. 주자가 팔괘(八卦)의 방위(方位)에 대한 왕자합의 질문에 답하기를 "소강절(邵康節)의 설(說)에 의하면, 복희씨(伏羲氏)의 팔괘는, 건(乾)의 방위는 본디 남(南)에 있었고 곤(坤)의 방위는 본디 북(北)에 있었는데, 문왕(文王)이 《주역》을 연(演)할 때에 이 방위를 경정(更定)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대체로 부회 천착에 가깝기 때문에 일찍이 여기에 깊이 유의하지 않았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朱子大全 卷四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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