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재종손 태제 에게 주다[與再從孫 台濟][3]

천하한량 2007. 3. 7. 01:03
재종손 태제 에게 주다[與再從孫 台濟][3]

비오는 날 집에 앉아 무료하여 부채 머리에다 '호천신류(湖天新柳)'의 조그마한 경치를 만들어 놓고 보니, 너로 하여금 곁에서 참견하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삿갓을 쓰고 잠시 올 수 없느냐? 요즘은 날마다 조눌인(曺訥人)으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하는데, 또한 네가 곁에서 함께 증명해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 그리고 너는 비록 여기에 있지 않으나 또한 너를 위하여 몇 장의 좋은 편액을 써놓았는데, 글자의 형세가 웅장하고 기걸하여 매우 볼 만하니, 반드시 일간에 나와서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 연(硯)과 판(板)은 내가 받았다. 연은 조군(曺君)에게 한전(漢篆)을 한 번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찾아온 것이니, 후일에 만일 다시 빌려가고 싶거든 마음대로 하거라.
지난번에 보여준 중(中) 자의 뜻에 대해서는 참구(參究)한 것이 깊은 곳을 보겠다. 그러나 이는 모두 문 밖에서 빛을 구하고 그림자를 훔치는 격이다. 지금 네가 다니고[行] 머물고[住] 앉고[坐] 서고[立] 하는 곳이 모두가 중(中)이다. 그래서 이 중이 아니면 다닐 수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고, 설 수도 없는 것이니, 굳이 따로 한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곧 다니고 머물고 앉고 서고 하면서도 이것이 곧 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바로 이른바, 당나귀를 타고서 당나귀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는 한두 마디 말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자신에 반성하여 구하는 것이 바로 구함이 유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 지나치게 구하는 것은 중이 아니다. 주역(周易)의 삼백 팔십 사효(三百八十四爻) 육십사괘(六十四卦)도 서로 끊임없이 왕래하고 반복하여 오르내려서 중을 향해 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 때문에 중용(中庸)이 주역과 서로 통하는 것이다.

[주D-001]조눌인(曺訥人) : 눌인은 조광진(曺匡振)의 호. 조광진은 서예가로서 맨 처음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고, 당시의 명필인 신위(申緯)·김정희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