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재종손 태제 에게 주다[與再從孫 台濟][2]

천하한량 2007. 3. 7. 01:02
재종손 태제 에게 주다[與再從孫 台濟][2]

승모(僧冒 승려가 쓰는 모자)를 반박한 데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감당치 못하겠다. 그러나 옛 사람의 관제(冠制)도 방(方)·원(圓)의 두 가지 법식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니, 지금 세상에 통행되어 착용하는 것이 바로 방정(方頂)의 건(巾)인 것이다. 너 또한 평상시에는 머리에 건을 쓰는 것 같은데, 너의 경우는 비록 둥근 건을 쓰고자 하더라도 한 치쯤 되는 상투가 있기 때문에 자연히 방정의 건에 편리함을 느끼고 둥근 건에는 편안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둥근 건이 국중(國中)에 통행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곧 원정(圓頂)의 건이다.
그리고 방정을 가지고 원정을 허물잡는 것은 바로 흰 것[素]만 옳게 여기고 붉은 것[丹]을 그르게 여긴 때문이 아니겠느냐. 이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게 아연실소하는 바이다. 네가 승모를 보고 싶으면 너의 안방을 들어가 보아라. 네 어머니와 네 아내가 쓰고 있는 것이 진짜 승모인 것이다. 승모가 어찌 일찍이 털끝만큼이나 원정의 제도가 있었더냐.
또 네가 평소에 입고 있는 것은 곧 승포(僧袍)이고, 네 아내가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승모인데, 자신에게서 허물을 잡지 않고 도리어 중국 사람들의 옛 제도인 원정의 건을 의심하고 있으니, 한갓 헤아려 논의한 것이 걸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는 전혀 방·원의 옛 제도를 모르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오로지 마음이 거친 소치이다.
요즘에는 중들로서 혹 이 제도(制度)를 빌려 쓰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중들이 잠시 이 제도를 빌려 쓰고 있다 해서 고인(古人)의 제도에야 무슨 방애될 것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도리어 이것을 버리려고 한다면 징갱(懲羹)·인열(因噎)에 가깝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가 타봉(駝峯)과 우호(牛胡)의 사이를 다투면서 너무나도 헤아리지 못하여 도리어 이것을 반박하려고 하니, 그 뜻은 비록 볼 만하나 그 처사는 삼가고 공손한 도리가 너무도 없구나. 이는 더욱 '아는 것도 삼가서 말하고 의심난 것은 말하지 말라.'는 경계에 해당하니, 매우 경계해야 한다.
또 너는 중국 사람들의 삿갓[笠]의 제도를 보지 못했느냐? 그것이 원정의 건에다 모첨(冒簷)만 달아서 태양을 가린 것일 뿐이다. 또 요즘 책문(柵門)에서 사오는 전모(氈冒)도 또한 원정의 제도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의 상투가 있기 때문에 또 별달리 뾰족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상투에 불편함이 없게 한 것이다. 옛 제도가 원래 다 이와 같은 것이라, 수천 년 동안에 아무도 감히 반박한 사람이 없었으니, 너는 바로 일개 대담(大膽)한 사람이구나.

[주D-001]징갱(懲羹)·인열(因噎) : 징갱은 뜨거운 국물에 입을 데어 놀란 나머지 찬 나물도 불면서 먹는다는 징갱취제(懲羹吹齏)의 준말이고, 인열은 밥 먹을 때 목이 메인 것 때문에 밥을 먹지 않는다는 인열폐식(因噎廢食)의 준말로, 즉 조그마한 장애(障碍)를 꺼려서 큰 일을 포기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2]타봉(駝峯)과 우호(牛胡) : 타봉은 낙타의 등에 불쑥 튀어나온 살덩이를 말하고, 우호는 소의 턱 밑에 축 늘어진 목살을 말한 것으로, 모두가 맛이 매우 좋은 별미(別味)로 일컬어진다.
[주D-003]아는……말라 : 공자가 자장(子張)에게 이르기를 "많이 듣되 의심나는 것은 빼놓고 그 나머지 아는 것도 삼가서 말하면 허물이 적다.[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爲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