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사계 상희 에 주다[與舍季相喜][5]

천하한량 2007. 3. 7. 00:53
사계 상희 에 주다[與舍季相喜][5]

세후(歲後)에 여기서 부친 편지는 과연 어느 때나 도착하였던가? 북선(北船)은 세전·세후를 막론하고 일체 오래도록 막혀 있어 조석으로 기다리고 바라다가 요즘에는 더욱 목이 타는 듯이 다급해졌네. 그런데 2월 24일에야 성노(聖奴)가 처음으로 와서 사중과 사계의 두 서신을 받아보게 되니, 세전·세후를 통틀어 처음 온 소식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보름 동안도 다 안 되는 최근의 소식이기에 매우 기쁘기가 마치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활연관통(豁然貫通)을 맛보는 것과 같았네.
또 사계가 손자를 얻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으니, 그 누군들 자식과 손자를 두지 않은 사람이 있으리오마는, 특히 우리 집에서는 하나의 득남(得男) 정도로만 말할 수가 없네. 이는 바로 가문의 큰 경사이며 음덕을 쌓은 데 따른 보람인 것일세. 곽아(霍兒)의 자신에 있어 자녀(子女)들이 슬하에 가득 많이 번성하여 우리 가문을 창대(昌大)하게 한 것은 이치가 의당 이러할 것이거니와, 조상의 영혼께서 복을 내리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마치 무형(無形)의 가운데서 뵙는 것 같으니, 기쁨을 만나 감동되는 마음이 또 의당 어떠하겠는가.
금(黔)의 손자는 또 하나의 금이요, 곽(霍)의 아들은 이와 같이 성각(騂角)하여 골상(骨相)이 범상하지 않다니, 참으로 기이하구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니 마치 우리 집에만 있는 일 같네. 사계(舍季)가 50년 동안이나 궁곤하게 지낸 나머지 만년에야 음(陰)이 가고 양(陽)이 돌아오는 길조(吉兆)가 또한 지금에 나타나게 된 것이니, 오랫동안 비색했던 가운(家運)이 형통한 데로 돌아가는 것은 한 이치의 밝음이거니와, 또는 시우(時雨)가 내리려고 산천(山天)이 먼저 구름을 내는 격이 아니겠는가. 다만 사계가 모든 일을 간섭하지 않고 손자나 안고 희롱하면서 얼굴에 기쁨이 가득 쌓인 모습을 즉시 볼 길이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네.
소식이 있은 후로 한 달이 다 되어가서 봄이 이미 다하여 가는데, 그동안 온 집안이 다시 어떠한가? 사중(舍仲)의 제절은 한결같이 그리 손상됨이나 없고, 경향(京鄕)의 상하대소의 제절도 모두 편안한가? 수씨(嫂氏)는 요전에 또 건강이 좋지 않았다가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걱정스러운 마음을 실로 늦출 수가 없네. 이 수씨의 이달 집안 생활은 과연 어떠한가? 사중은 수씨를 일개 권속(眷屬)으로 보아서 조금의 소홀함이라도 없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아마 서울로 데려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매양 이 일을 쉽게 해내지 못하여 먼 외지에서 염려되는 마음을 더욱 말할 수가 없네.
아부(兒婦)의 분만(分娩)할 날이 또 머지않다고 하니 마음속으로 기도할 뿐이네. 팔진탕(八珍湯)을 달마다 쓰는 것은 비록 노산(老産)이 아니라도 좋은 것인데, 근래의 상황은 과연 편안한가? 강상(江上)의 새 아이의 백일(百日)은 이미 지났을 듯한데, 점차로 더욱 두각(頭角)이 우뚝 뛰어나고 유도(乳道)도 다른 데서 구하지 않는다 하니, 또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네. 두 자씨(姊氏)와 늙은 서모(庶母)는 계속해서 편안하시고, 평동(平洞)의 제절도 그리 손상됨이 없다 하니, 다행스러움을 이루 감당치 못하겠네.
나의 상황은 일체 이전의 모양과 같으나, 가래 기침이 크게 더쳐서 그 기침이 급하여 기(氣)가 통하지 않을 때는 혈담(血痰)까지 아울러 나오는데, 이는 모두 장습(瘴濕)이 빌미가 된 것이네. 게다가 수천(水泉)도 좋지 않아 답답한 기운이 뱃속에 가득차서 풀리지 않고, 눈의 어른어른한 증세도 더하기만 하고 줄지는 않네. 봄 장기(瘴氣)가 또 일찍 발작하여 장기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전보다 더욱 심해지니, 아마도 더이상 지탱할 수 없을 듯하네.
우(佑)는 심하게 아픈 데는 없으나 수시로 폐(肺)가 아파서 건강치 못하다 하는데, 들으니 이것은 묵은 병증(病症)으로서 몹시 걱정이 되네. 아랫것들은 모두 이전과 같네. 성노(聖奴)는 내가 안질(眼疾) 때문에 마음대로 글자를 쓰지 못함으로 인연하여 이제야 돌려보내게 되었네. 종이가 짧아서 후일의 서신으로 미루고 더 기록하지 않네.

[주D-001]곽아(霍兒) : 김정희(金正喜)의 막내 아우인 김상희(金相喜)의 아들 김상준(金商駿)을 가리킨 것인데, 곽(霍)은 혹 그의 아명(兒名)이었는지 자세하지 않다.
[주D-002]금(黔)의……금이요 : 이는 손자가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으로, 금은 곧 김정희의 막내 아우인 김상희를 지칭한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3]성각(騂角) : 소의 빛이 붉고 뿔이 바르게 잘 난 것을 이름. 자식이 아비보다 훌륭함을 비유한 말로, 춘추 시대 공자의 제자인 염옹(冉雍)이 그의 아비는 전혀 취할 것이 없는 위인이었으나, 그는 덕행이 훌륭하였으므로, 공자가 그를 칭찬하여 이르기를 "얼룩소의 새끼일지라도 색깔이 붉고 뿔이 바르게 잘 났으면, 비록 쓰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산천(山川)의 신령이 그냥 놓아버리겠는가."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