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대사성을 사양하는 소[辭大司成疏]

천하한량 2007. 3. 7. 00:46
대사성을 사양하는 소[辭大司成疏]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성조(聖朝)의 지극한 인자함과 지극한 대우로 곤경(困境) 속에서 끌어내시어 죄를 깨끗이 씻어주는 열(列)로 거두어주신 은혜를 두터이 입었습니다. 그러니 아, 신이 눈을 감기 전까지는 숨 한 번 쉬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밥 한 술 떠먹는 것이 모두가 인자하신 하늘이 신을 재생시켜준 날이라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비록 신으로 하여금 산림 속에 한가히 지내면서 성상의 은택이나 노래하며 여생을 마치게 하더라도 신의 분수에는 스스로 만족하여 소원이 이미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벼슬을 제수하는 은전이 조석으로 누차 이르니, 감격하고 황송하고 두려움으로 말하면 빨리 달려가는 것이 공손함이겠거니와 대궐에서 가까이 뫼시던 것도 이미 많은 기간이었습니다. 또 더구나 두 성조(聖朝)의 어제(御製)를 편집 간행하는 일은 바로 죽지 못한 천신(賤臣)의 일을 마치는 자료가 되는 것이라, 일월(日月 여기서는 임금을 비유함)의 위광(威光)의 나머지를 의지하여 운한(雲漢)의 유묵(遺墨)을 받들어서 작은 정성을 다하여 변변찮은 보답이나마 바치려고 하니, 다만 여기에 참여하는 것을 다행으로 알고 있을 뿐, 외람됨이 송구스러움은 염려하지도 않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두터운 은총을 우러러 빙자하여 다시 청현하기를 바라서 망녕되이 꿈에라도 영명(榮名)의 길을 반걸음이나마 가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에 성균관 대사성의 새 제명(除命)이 갑자기 천만 생각 밖에 내려왔는지라, 신은 삼가 은지(恩旨)를 받들고는 하도 두려워 놀랍고 경황이 없어 식은 땀이 옷을 흠뻑 적시는 가운데 진실로 몸둘 곳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아, 이 직임은 바로 영도(榮塗)의 높은 선발이요 명장(名場)의 더없는 인망으로서 세상에서 '사유(師儒)의 장(長)'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고 용렬하여 가장 남의 밑에 맴돌며, 재주와 식견 또한 천박하여 한 가지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 신 같은 위인이야말로 한갓 자신을 반성해 보아서 잘 알뿐만 아니라 또한 온 조정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니, 또 어떻게 감히 굽어 통촉하시는 성상의 지감을 스스로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리 긴중하지 않는 한산한 부서의 별볼일 없는 직임이라 할지라도 신은 실로 삼가고 주저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더구나 인재(人材)를 양성하고 문풍(文風)을 크게 천양하는 일을 어찌 신이 책임질 수 있겠으며, 상술(庠術)의 제도를 거듭 밝히고 고과(考課)의 법을 모범적으로 하는 것을 어찌 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으며, 《주관(周官)》의 성균 악정(成均樂正)이 중화(中和)를 교도하는 직임으로 우리 성조(聖朝)께서 맨 처음 선포하신 치화(治化)를 돕는 일을 더욱 어찌 신이 감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이상과 같은 불합당한 조건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서 달려가 응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청요직을 잘못 제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미천한 사람의 소신도 억지로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헤아리시고, 잘못 내려진 은명을 속히 거두어서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돌려주시어 공기(公器 관직을 뜻함)를 엄중하게 하고 사분(私分 개인의 분수)을 편안하게 하소서.

[주D-001]일을 마치는 :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 그 지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행해야 한 다는 뜻에서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데 있어 신하로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 마치고 물러나는 것이 신하로서의 충후(忠厚)함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상술(庠術)의 제도 : 지방 학교의 제도를 이름. 고대의 제도에 의하면, 가(家 : 25 (家))에는 숙(塾)이란 학교가 있고, 당(黨 : 5백가)에는 상(庠)이란 학교가 있으며, 술(術 : 1 만 2천 5백가)에는 서(序)란 학교가 있고, 국(國 : 국도)에는 학(學 : 태학)이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禮記 學記》
[주D-003]《주관(周官)》의……직임 : 《주관》은 곧 《주례(周禮)》인데, 주례에 대사악(大司樂 : 대악정(大樂正))이 성균(成均)의 법을 맡아서……악덕(樂德)으로 국자(國子)들에게 중(中)·화(和)·지(祗)·용(庸)·효(孝)·우(友)를 교도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