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규장각 대교를 사양하는 소[辭奎章閣待敎疏]

천하한량 2007. 3. 7. 00:45
규장각 대교를 사양하는 소[辭奎章閣待敎疏]

삼가 신(臣)이 일전에 전망(前望)의 특점(特點)을 받아 규장각 대교가 되었는데, 이어서 또 영과(瀛館)의 화려한 명성을 일시에 아울러 차지하게 되니, 신은 참으로 당황스럽고 놀랍고도 두려워서 오정(五精)이 벌벌 떨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국조(國朝) 관각(館閣)의 선발은 그 얼마나 모두가 청준(淸峻)했습니까마는 그 중에도 반드시 내각(內閣)을 중히 여겼고, 각직(閣職) 중에도 또 대교를 신진(新進)의 극선(極選)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내각을 설치한 이래로 이 선발을 받아 이 직(職)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박식하고 문장을 잘하며 인품이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훌륭한 명성과 높은 인망이 조정에 표준이 되고, 뛰어난 풍채와 아름다운 문장이 문단에 영수가 되어, 그러한 조건으로 모훈(謨訓)을 받들어 가까운 곳에 처하고 논사(論思)에 참여하여 고명(誥命)을 관장하였습니다.
크게 생각하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글을 숭상하고 인재를 양성하신 교화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그 책임의 막중함과 간선(揀選)의 신중하고 엄격함에 있어 어찌 신 같은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구차하게 자리에 채워진 자가 있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대왕께서 일찍이 어제하신 본각(本閣) 제명기(題名記)의 서문에서 이르기를,
"전수(典守)나 편집(編輯)이나 봉심(奉審)의 직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으나, 능히 그 선발(選拔)에 맞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어떠한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당시 조정 인물의 성대하기가 저러하였는데도 성고(聖考)께서 그 어렵게 여기시고 신중히 하시어 정녕스럽게 권면하고 경계하심이 또 이러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리 전하께서 의당 준수하실 바입니다.
신은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하였고 재주 또한 용렬하여 오경(五經)에 대해서는 담장을 마주한 듯 깜깜하고, 삼사(三史)도 전혀 읽지 못해서 바로 이 40세가 되도록 아무런 명성이 없는 무식한 일개 비루한 사내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선음(先蔭)을 힘입어 외람되이 과거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을 출입하면서 측근의 반열에 주선한 지가 또한 이미 4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신의 좋고 나쁨과 길고 짧은 것이 의당 전하의 깊은 감식을 도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빛나는 은총의 고명(誥命)이 갑자기 미쳐서는 안될 사람에게 미쳤습니다. 가사 신으로 하여금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일에 분주히 종사하게 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능히 해내기 어려움이 걱정되는 터이니, 선발에 맞는지 여부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추호도 비길 만한 처지가 못됩니다. 그렇다면 전하의 즉철(則哲)의 밝으심으로 신에게서 무엇을 취하시어, 그릇된 은총은 한갓 벼슬을 가벼이 제수하는 데로 돌아가고, 신중히 간선하는 일은 자못 차례나 따르는 것과 같게 하심으로써 이 각(閣)의 규모(規模)와 제치(制置)의 성대함을 신으로 말미암아 쉽사리 무너지도록 하신단 말입니까.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두려워서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또 신이 외람되이 포사(曝史)의 일을 당하여 이미 조정에 하직인사를 올렸으니, 도리상 바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만 신의 아비의 병이 마침 환절기를 만나서 설사병이 갑자기 더침으로 인연하여 마음이 졸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지경이라, 도저히 그냥 떠나버릴 수가 없어 부득불 하룻밤을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신명(新命)을 받았는 바 아패(牙牌)가 엄연히 임하였는지라, 비록 즉시 장황하게 외람되이 사은한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군명(君命)을 재우지 않는 의리에 위배되었고 종당에는 또 서적 포쇄의 일에 시기를 놓친 과실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정리는 진실로 긴박한 데서 나왔으나 행적은 절로 군명을 지체시킨 데에 관계되는지라, 몹시 황공한 마음에 비단 새 직함만 무릅쓰기 어려울 뿐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이에 감히 신의 정실(精實)을 다 드러내서 우러러 숭엄하신 성명께 아뢰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아울러 양찰(諒察)하시어 신에게 새로 제수한 직명을 속히 깎아버리시고 이어서 신의 제대로 봉직하지 못한 죄를 다스려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소서.

[주D-001]제명기(題名記) : 관서(官署)의 벽에 퇴관(退官) 한 사람의 성명과 이력(履歷)을 기록해 는 것을 말한다.
[주D-002]삼사(三史) :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를 합칭한 말이다.
[주D-003]즉철(則哲) : 《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에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은 곧 어짊이니, 사람들을 제자리에 쓸 수 있을 것이다.[知人則哲 能官人]"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포사(曝史) : 조선 시대에 각 사고(史庫)의 서적들을 점검하고 거풍시키던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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