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사폐변(私蔽辨)

천하한량 2007. 3. 7. 00:33
사폐변(私蔽辨)

도교(道敎)와 석교(釋敎)는 스스로 그 신식(神識)을 귀히 여기는 반면, 유자(儒者)는 사정(事情)을 잘 다스리는 데에 중접을 두고 있다.
대체로 사람의 걱정 거리가 두 가지가 있으니, 즉 사(私)와 폐(蔽)인데, 사는 욕심[欲]의 실착에서 생기는 것이고 폐는 지혜(知)의 실착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씨(異氏 이단(異端)을 이름)는 욕심 없애는 것을 숭상하고 군자(君子)는 폐가 없게 하는 것을 숭상한다. 이씨의 학문은 정(靜)을 이루는 것으로써 지극함을 삼거니와, 군자는 서(恕)를 힘써 행하여 사(私)를 버리고 학문을 하여 폐(蔽)를 제거하되, 충신(忠信)을 주로 삼아 명선(明善)에서 그친다.
대체로 그 마음에서 생기어 반드시 그 일에 발현(發見)된다. 사(私)란 것은 사욕을 풀어서 욕심을 마음대로 부리고 선량한 덕이 없어 일찍이 밝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데, 설령 이 사는 없다 하더라도 오히려 폐(蔽)는 없을 수가 없다. 그리고 폐란 것은 사정(事情)에서 구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의리(義理)라고 믿어서, 공적으로 염결(廉潔)을 밝히지 못하고 각박한 데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대체로 사람에게는 혈기(血氣)와 심지(心知)의 성(性)이 있어 일정한 때가 없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감각에 응해서 외물(外物)에 접하여 발동한 다음에 심정이 이에 따라 드러난다."
하였다. 대체로 혈기와 심지가 있어 이에 욕심이 있게 됨으로써 성(性)이 성색취미(聲色臭味)의 욕심에 징험되어 사랑과 두려움이 나누어진다. 이미 욕심이 있고 나면 이에 또 정(情)이 있게 됨으로써 성이 희로애락의 정에 징험되어 가혹함과 느슨함이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미 욕심과 정이 있고 나면 이에 교(巧)와 지(智)가 있게 됨으로써 성이 미악시비(美惡是非)의 교와 지에 징험되어 좋아함과 싫어하는 것이 나누어진다.
생양(生養)의 도는 욕심에 있는 것이고, 감통(感通)의 도는 정에 있는 것인데, 이 두 가지는 자연의 부험이기에 천하의 일이 거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악(美惡)의 극치를 다하는 것은 교(巧)한 자에 있는 것이니, 재어(宰御)하는 방도가 이로 말미암아 나오고, 시비(是非)의 극치를 다하는 것은 지(智)한 자에 있는 것이니 현성(賢聖)의 덕이 이로 말미암아 갖추어진다. 이 두 가지도 또한 자연의 부험이니, 이를 정밀하게 하여 필연(必然)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능사가 거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그 정을 얻고 각각 그 욕심을 이루되 도의에 어긋나게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군자가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정과 욕심을 도의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대체로 욕심을 막아버리는 해는 냇물을 막는 해보다 심하고, 정(情)과 지(智)를 끊어버리면 인의(仁義)가 막혀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음식으로는 그 혈기(血氣)를 기르고 학문으로는 그 심지(心知)를 기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스스로 얻는 것을 귀히 여긴다. 혈기가 길러지면 아무리 약했더라도 반드시 강해지고, 심지가 길러지면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반드시 밝아지는 것이니, 이 때문에 확충(擴充)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군자가 홀로 있을 때에는 인(仁)을 생각하고, 공적으로 말을 할 적에는 의(義)를 말하며, 행동거지를 모두 예(禮)에 맞게 하는 것이니, 할 수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밝힌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신(信)이라 하며, 베푸는 것을 균평하게 하는 것을 서(恕)라 하는데, 이것을 점차로 이루어서 인(仁)하고 또 지(智)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私)와 폐(蔽)를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군자가 일을 대하기 전에는 방자함이 없이 공경하여 그 소루(疏漏)함이 있을까를 염려하고, 일이 있어 행동할 적에는 사곡됨이 없이 바르게 하여 그 거짓됨이 있을까를 염려하며,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바르게 하여 기어코 중화(中和)를 이루려고 힘써서 그 편벽됨과 어긋남이 있을까를 염려한다. 그런데 소루함을 경계하는 것은 남이 보고 듣지 않은 데서도 계신 공구(戒愼恐懼)하는 데에 달려 있고, 거짓됨을 제거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달려 있으며, 중화를 이루는 것은 예(禮)에 통달하고 의(義)에 정밀하며, 인(仁)에 지극하고 인륜[倫]을 극진히 함으로써 온 천하 사람이 다 함께 선(善)으로 돌아
가게 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지선(至善)이라 이를 만한 것이다.
대체로 이(理)를 학(學)으로 삼고 도(道)를 통(統)으로 삼고 심(心)을 종(宗)으로 삼아, 매우 아득하고도 어두운 데서 진리를 찾는 것이 돌이켜 육경(六經)에서 찾는 것만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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