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이 천하(天下)에 있어 수백 년을 지나면 반드시 변하게 되는데, 그것이 장차 변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한두 사람이 그 단서를 엶에 따라 천백 사람이 시끄럽게 그것을 공격하게 되고, 그것이 이미 변한 뒤에는 또 한두 사람이 그 이룬 것을 한데 모음으로써 천백 사람이 모두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시끄럽게 그것을 공격할 적에는 온 천하 사람이 학술의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되므로 그 폐단이 드러나지 않지만, 모두가 그것을 따를 적에는 천하 사람이 학술의 서로 다른 것을 보지 못하므로 그 폐단이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한두 사람이 그 폐단을 바로잡아 의연히 이를 견지하게 되고, 그 변한 것이 이미 오래됨에 미쳐서는 국가를 소유한 자가 법제(法制)로 얽어매고 이록(利祿)으로 유인하여, 아이들은 그 학설을 익히고 늙은이들은 그것이 그른 줄을 모름으로써 천하 사람이 서로 그것을 편히 여기게 된다. 그러다가 천하 사람이 그것을 편히 여긴 지 이미 오래되면 또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그것을 변개시킬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천고 이래 학술 변천의 대략이다. 한(漢) 나라가 일어나서는 오경 박사(五經博士)를 세웠으니, 《주역(周易)》에 대해서는 시씨(施氏 시수(施讐를 이름)·맹씨(孟氏 맹희(孟喜)를 이름)·양구씨(梁丘氏 양구하(梁丘賀)를 이름)·경씨(京氏 경방(京房)을 이름)가 맡았고, 《상서(尙書)》에 대해서는 구양씨(歐陽氏 구양고(歐陽高)를 이름)·대하후씨(大夏侯氏 하후승(夏侯勝)을 이름)·소하후씨(小夏侯氏 하후건(夏侯建)을 이름)가 맡았으며, 《시경(詩經)》에 대해서는 제인(齊人 부구백(浮丘伯)을 이름)·노인(魯人 신공(申公)을 이름)·한씨(韓氏 한영(韓嬰)을 이름)가 맡았고, 《예경(禮經)》에 대해서는 대대(大戴 대덕(戴德)을 이름)·소대(小戴 대성(戴聖)을 이름)·경씨(慶氏 경보(慶普를 이름)가 맡았으며, 《춘추(春秋)》에 대해서는 공양씨(公羊氏 공양고(公羊高)를 이름)·엄씨(嚴氏 엄팽조(嚴彭祖)를 이름)·안씨(顔氏 안안락(顔安樂)을 이름)·곡량씨(穀梁氏 곡량적(穀梁赤)을 이름)가 맡아서 시골 학교에까지도 학문을 달리한 것이 없었고, 사제(師弟)가 서로 수수(授受)하는 데에는 전문가가 있었으니, 서경(西京 전한(前漢)을 이름) 시대의 융성함은 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애제(哀帝) 때에 유흠(劉歆)이 《좌씨춘추(左氏春秋)》·《모시(毛詩)》·《일례(逸禮)》·《고문상서(古文尙書》에 대하여 모두 학관(學官)을 세우려고 하자, 제유(諸儒)들이 원한을 품고 중의(衆議)가 물끓듯했으며, 공승(龔勝)은 벼슬을 사퇴했고, 사단(師丹)은 크게 노여워하였다. 그리고 건무(建武 후한 광무제의 연호 25~56) 초기에는 한흠(韓歆)이 《비씨역(費氏易)》·《좌씨춘추》에 대해 학관을 세우려고 하자 범승(范升)은 불가론을 견지하였고, 진원(陳元) 또한 쟁집하여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시끄럽게 공격하는 자들이 이렇게 많았으니, 이것이 어찌 맨처음에 변개하기 몹시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에 수가(數家)의 학(學)은 비록 학관은 세우지 못했으나 사적으로 서로 강습하여 고제에(高第)에 발탁된 사람도 있었다. 그후 정군 강성(鄭君康成 강성은 정현(鄭玄)의 자)이 나옴에 이르러서는 대전(大典 대부(大部)의 서적을 이름)을 총괄하고 중가(衆家)를 망라하여 제경(諸經)에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은 모두 양한(兩漢) 시대에 학관을 세우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때에 《주역》은 비씨(費氏), 《상서》는 고문(古文), 《시경》은 모씨(毛氏)를 취하고, 《예경》은 고문을 참교하여 가장 나은 것을 취했으며, 《좌씨전》은 특별히 복자신(服子愼 자신은 복건(服虔)의 자)에게 전수하였다. 그러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비록 그러나 동한(東漢 후한을 이름) 때에 세운 십사 박사(十四博士)는 오히려 서경(西京) 시대의 옛 제도를 바꾸지 않았었다. 그런데 위진(魏晉) 시대 이후로 정현의 《주역》·《상서》·《시경》·《예경》과 복건의 《좌전》이 비로소 학관에 세워졌고, 영가(永嘉 진 회제(晉懷帝)의 연호 307~313) 이후에 이르러서는 서경 시대에 학관을 세웠던 경서들이 마침내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으니, 이것이 학술의 일대 변혁인 것이다. 위(魏) 나라 왕보사(王輔嗣 보사는 왕필(王弼)의 자)는 공언(空言)으로 《주역》을 강의하였는데,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서로 다투어 조술(祖述)하게 되자, 범녕(范寧)은 그의 죄가 걸주(桀紂)보다 더하다고 여기었고, 대체로 식견 있는 자들이 오히려 간혹 그를 비난하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두예(杜預)의 《좌씨춘추》가 나왔고, 또 얼마 안 되어 매색(梅賾)의 《고문상서》가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동진(東晉) 태흥(太興 동진 원제(東晉元帝)의 연호 318~321) 초기에는 《주역》은 왕씨(王氏), 《상서》는 공씨(孔氏)의 고문(古文), 《좌전》은 두씨(杜氏)를 취하여 각각 박사(博士) 1인씩을 두었고, 《의례(儀禮》·《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 및 정현의 《주역》에 대해서는 끝내 박사를 생략하여 두지 않았다. 이로부터 이후로 남북(南北)이 분열되던 즈음에는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이 서로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강좌(江左) 지역에서는 왕보사(王輔詞)의 《주역》, 공안국(孔安國)의 《상서》, 두원개(杜元凱 원개는 두예(杜預)의 자)의 《좌전》을 숭상하였고, 하락(河洛) 지역에서는 정강성(鄭康成)의 《주역》·《상서》, 복자신(服子愼)의 《좌전》을 숭상하였으며, 《시경》은 남북이 똑같이 모공(毛公)의 것을 주로 삼았고, 《예경》 또한 똑같이 정씨(鄭氏)의 것을 따랐는데, 대체로 천하에 그를 공격하는 자들이 절반이었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절반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를 만난 것은 또 위진(魏晉) 시대 초기와 같지 않았었다. 그후 당(唐) 나라 정관(貞觀) 연간에는 국자제주(國子祭酒) 공영달(孔穎達) 등에게 조칙하여 오경(五經)의 《정의(正義)》를 찬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주역》은 왕필(王弼)·한강백(韓康伯 강백은 (韓伯)의 자)의 주(注)를 사용하였고, 《상서》는 매색이 올린 《공씨전(孔氏傳)》을 사용하였으며, 《시경》은 모공(毛公)의 훈고전(訓故傳) 및 정씨의 전(箋)을 사용하였고, 《예기》는 정씨의 주를 사용하였으며, 《춘추좌전》은 두예의 주를 사용하였는데, 천하 사람들이 비로소 모두 그것을 따름으로써 정현·복건의 학은 쇠미해졌다. 그리고 오직 자주(資州) 이정조(李鼎祚)만이 《주역집해(周易集解)》를 찬하면서 한진(韓晉) 이전의 옛것을 조금이나마 보존시켰는데, 이른바, 고 한 것으로서, 꿋꿋하게 옛것을 견지한 자는 이같을 뿐이었으니, 이것이 또 학술의 일대 변혁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수백 년을 행해진 동안에 비록 그 글은 양한(兩漢)의 남긴 것을 다하지 못하였으나, 학자들이 훈고(訓詁)를 지켜서 천착하지 않았고, 제도(制度)를 상고하여 반드시 자상하게 하였다. 그래서 육씨(陸氏 송(宋) 나라 육유(陸游)를 이름)가 이르기를, "당(唐) 나라 및 국초(國初)의 학자들은 감히 공안국·정강성도 비난하지 못했는데, 더구나 성인(聖人)이겠는가." 하였으니, 당시에 오경의 《정의》를 삼가 지킨 것이 이와 같았다. 그리하여 당 나라 때 담조(啖助)와 조광(趙匡)이 삼전(三傳 《공양전》·《곡량전》·《좌씨전》)을 버리고 따로 《춘추》를 설(說)해 놓은 것이 있었지만 당시 사람이 아마도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그러다가 송(宋) 나라 유원보(劉原父 원보는 유창(劉敞)의 자)의 《칠경소전(七經小傳》이 나와서는 조금씩 스스로 전주(傳注)와 뜻을 달리하였는데, 이를 이어서는 《주역》 계사(繫辭)의 작자(作者)에 대하여 의심을 가진 이가 있었고, 시서(詩序)와 서서(書序)를 배척한 이도 있었고, 사서(四書)란 이름을 육경(六經)의 위에 더하였으며 그 한당(漢唐) 시대 제유(諸儒)의 설(說)에 대해서는 마치 아무 쓸모 없는 물건을 내버리듯이 하였다. 그러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랐는데, 그것은 한위(漢魏) 시대에 전주(傳注)를 높이던 것과 수당(隋唐) 시대에 의소(義疏)를 신봉하던 것에 비교하면 자못 더 심하였다. 그리하여 원 인종(元仁宗) 황경(皇慶) 2년에는 조서(詔書)를 내려서 《주역》은 정씨(程氏)·주씨(朱氏)의 것을 쓰고, 《상서》는 채씨(蔡氏)의 것을 쓰고, 《시경》은 주씨의 것을 쓰고, 《춘추》는 삼전(三傳) 및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을 이름)의 것을 쓰고, 《예기》는 옛 주소(注疏)를 쓰고, 사서(四書)는 주씨의 장구집주(章句集注)를 쓰도록 하였는데, 명(明) 나라 초기에도 이것을 따랐으니, 이것은 또한 학술의 일대 변혁이었다. 원명(元明) 이래로는 유자들이 정주(程朱)의 설을 굳게 지키어 또한 마치 수당(隋唐) 시대의 유자들이 정복(鄭服 정현과 복건을 이름)의 설을 굳게 지키던 것과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당 나라 때 원행충(元行沖)이, "차라리 공성(孔聖 공자를 이름)의 잘못을 이를지언정, 정복(鄭服)의 잘못은 말하기를 꺼린다." 고 한 데에 대해서는 또,"차라리 공성의 잘못을 이를지언정, 정주(程朱)의 잘못은 말하기를 꺼린다." 고 말할 정도였다.그러다가 고릉(固陵)이 나와서는 염(濂)·낙(洛)·관(關)·민(閩)의 틀을 크게 배반하여 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이 중정의 도에 지나치고 강압적으로 독단한 것이 가장 많아 고훈(古訓)에 다 합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송유(宋儒)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아서, 이른바 천하에 학술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폐단은 장차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게 되었다. 아, 학술이 변할 때에 당해서는 천백 사람이 시끄럽게 공격하는데 그들은 모두 용렬한 위인들이고, 학술이 이미 변한 뒤에는 또 천백 사람이 모두 그것을 따르는데 그들 또한 용렬한 위인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폐단을 바로잡아 꿋꿋하게 견지할 자가 그 누구란 말인가. [주C-001]학술변(學術辨) : 이 글은 청(淸) 나라 능연감(凌延堪)의 저서인 《교례당문집(校禮堂文集)》제 23권의 여호경중서(與胡敬仲書)에서 앞뒤로 수항(數行)씩만을 덜어내고 전문(全文)을 그대로 기재한 것인데, 다만 중간에 가끔 약간의 글자 변동만을 볼 수 있다. 독자의 참고에 대비하고자 밝 혀두는 바이다. [주D-001]공승(龔勝)은……사퇴했고 : 한 애제(漢哀帝) 때에 유흠(劉歆)이 종래의 학통(學統)과 다른《좌씨춘추(左氏春秋)》·《모시(毛詩)》등에 학관(學官)을 세우려고 하자, 제유(諸儒)들이 분노하여 비난이 분분하므로, 유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게 글을 보내 꾸 짖었다. 그러자 당시 명유(名儒)였던 공승은 유흠의 절실한 말에 충격을 입어 깊이 스스로 죄책을 느끼고 마침내 벼슬을 사퇴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三十六》 [주D-002]사단(師丹)은……노여워하였다 : 사단은 한 애제(漢哀帝) 때의 유자(儒者)로서 벼슬은 대사공(大司空)이었는데, 주 86)에 보이는 유흠의 처사에 대해서 크게 노하여 유흠을 몹시 책망하는 뜻으로 상주(上奏)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三十六》 [주D-003]보사(輔嗣)의……보충한다 : 보사는 왕필(王弼)의 자이고, 강성(康成)은 정현(鄭玄)의 자인데, 이 말은 이정조(李鼎祚)의 《주역집해(周易集解)》의 서문에 나타나 있다. [주D-004]《주역》……있었고 : 종래에 공자(孔子)가 지었다고 전해오는 《주역》의 계사편에 대하여, 송(宋) 나라 때 구양수(歐陽脩)가 맨 처음으로 계사뿐만이 아니라 문언(文言)·설괘(說卦) 이하의 글들이 모두 공자의 작(作)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이른 말이다. 《歐陽文忠集 卷七十八 易童子問》 [주D-005]시서(詩序)와……있었고 : 시서의 작자에 대해서는 종래에 공자·자하(子夏)·위굉(衛宏) 등 여러 사람이 거론되었을 뿐 일정설(一定說)이 없었는데, 송 나라 때에 이르러 소철(蘇轍)은 《시전(詩傳)》에서 서(序)를 반박하였고, 정초(鄭樵)는 《시변망(詩辨妄》을 지어 서(序)를 해야 한다는 설을 제창하기까지 하였으며, 서서(書序) 또한 종래 정현(鄭玄)·공영달(孔穎達) 등 많은 학자들이 이를 공자의 저술이라고 일컬어왔는데, 송 라 때 주자(朱子)는 이를 절대로 공자의 말이 아니라고 단언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6]사서(四書)란……더하였으며 : 《대학(大學)》·《중용(中庸)》은 본디 《예기(禮記)》의 편명(篇名)들이었는데, 송 나라 때에 이르러 정자(程子)·주자(朱子)가 이를 《예기》 속에서 빼내어 단행본으로 만들어서 논어(論語)· 맹자(孟子) 와 함께 사서라는 명칭을 붙인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7]고릉(固陵) : 능연감(凌延堪)의 《교례당문집(校禮堂文集)》에 의하면 고릉 모씨(固陵毛氏)라고 되어 있으니, 즉 청(淸) 나라 초기의 고증학자(考證學者)로서 특히 주자(朱子)의 학설에 대해서 많은 이의를 제기했던 모기령(毛奇齡)을 가리킨 말인데, 고릉은 그가 살았던 지명인지 자세하지 않다. [주D-008]염(濂)……민(閩)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합칭한 말로, 전하여 이들이 제창한 학 문을 이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