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사직 겸 진정하는 소[辭職兼陳情疏]

천하한량 2007. 3. 7. 00:46
사직 겸 진정하는 소[辭職兼陳情疏]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죄가 하늘에 달하고 과악이 깊게 쌓이어, 신하로서는 무상(無狀)한 신하요, 자식으로서는 불효한 자식이라, 위로는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는 가정에 욕을 끼침으로써 죄 없는 늙은 아비가 천고에 없는 흉측한 무함을 입고 천고에 없는 뜻밖의 억울함을 둘러쓴 채 염장(炎瘴)의 지역에 몸을 던져 풍파의 험난함을 갖추 겪고 있음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신에게 조금이라도 지극한 정성이 있다면 결단코 의당 배를 갈라 하늘에 바치고 심장을 쪼개서 태양을 향하여 조금이나마 지극한 원통함을 토로했어야 할 일이로되, 몹시도 완악하고 잔인하여 이 일을 해내지 못하고서 편안하게 목숨을 부지하여 가만히 앉아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이때에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천지가 만물을 재생(再生)시키는 인(仁)을 넓히시고 해와 달이 빠짐없이 비춰주는 은총을 내리시어, 소인들의 참소 가운데서 원통한 무함을 통촉하시고 엎어진 동이 밑까지 태양의 빛이 들게 하시되, 십행(十行)으로 된 은혜스런 윤음(倫音)을 크게 선포하여 밝게 하유하심으로써 천리 먼 곳으로부터 풀려 돌아와 쌓였던 억울함이 밝게 씻어졌습니다.
아, 죽은 자를 살려주고 뼈에 살을 붙여주는 일은 고인(古人) 또한 그 은혜에 대해서 다시 더할 수 없이 극언(極言)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아비가 선대왕으로부터 얻은 것이야말로 어찌 이것으로 그 만분의 일이나마 비겨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에 만일 선대왕의 하늘 같은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신의 한 가문 모든 식구가 어육이 됨을 면하기 어려웠고, 신의 아비에 대한 흉측한 무함과 뜻밖의 억울함도 영원히 밝힐 날이 없게 되어 신의 불효한 죄는 여기에서 더욱 드러났을 것이니, 아무리 태양이 거듭 광명하더라도 신의 면목은 더욱 부끄러워서 실로 인간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신의 아비를 발탁하시어 관직 제수하는 교지를 연해서 내리시었고, 또한 우리 자성전하(磁聖殿下)께서는 선조(先朝)의 유지(遺志)를 깊이 추술하여 은전의 교지를 크게 내리시고 이어서 성비(聖批)를 거듭거듭 선포하시어 그 측은하게 여기심이 융숭하고 진지하기가 보통보다 월등히 뛰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부자(父子)만 유독 머리를 모으고 은혜에 감격하여 두 손을 모아 성인(聖人)을 축수하면서 한 글자 한 눈물을 골수에 새길 뿐이 아니라, 진실로 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감격하여 감탄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관직의 제수가 또한 신에게도 미쳐서 승지(承旨)의 제명(除命)이 달마다 내리어 경패(庚牌)가 계속해서 임하고 칙교(勅敎)가 거듭 엄중하십니다. 그러나 신의 사의(私義)를 돌아보건대 감히 무릅쓰고 응할 수가 없어 여러 날 동안 명령을 어기었으니, 신의 죄는 더욱 많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아,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천지 사이에 도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은우(恩遇)의 후박과 처지(處地)의 근밀하거나 소원함 때문에 간격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중에도 은우가 두텁고 처지가 근밀한 경우에 이르러서는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견마(犬馬) 같은 미물들도 오히려 충성을 바치는 것인데, 더구나 신의 집안 사람들은 유독 우리 선대왕의 도야해주신 은덕을 많이 입어 잠필(簪筆)의 반열에 주선하고 규벽(奎璧)의 광채를 가까이서 의지하였으니,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모발(毛髮)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은혜로 만들어주신 것으로서 이는 마치 구덩이에 빠진 자를 구해내주고 또 생성(生成)시켜준 것과 같았습니다.
예로부터 남의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군부(君父)로부터 이런 은혜를 입은 사람들 중에 신의 부자만큼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붕지통(天崩之慟)을 만나 진유(眞遊)가 날로 멀어지니, 굽어보나 쳐다보나 기가 막히어 부여잡고 호곡하여도 미칠 수가 없고, 오직 천지에 사무치는 지극히 원통하고 애통함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현세(現世)와 내세(來世)를 통틀어 수많은 자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분골 쇄신으로 은혜에 보답하려고 했던 것이 이미 선대왕께서 생존하시던 때에 미치지 못하고 천지가 아득하기만 해졌으니, 이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
생각하건대, 옛 사람이 이른바,
"선대(先代)를 추모하고 금세(今世)에 보답하며, 돌아간 이를 장사지내고 생존한 이를 섬긴다."
고 한 말에 대해서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으나 또한 일찍이 이런 의리를 조금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렇게 좋은 벼슬을 내려주시고 특별한 대우를 거듭 베푸신 데에 있어서야말로 어찌 더욱 허둥지둥 달려가 은명을 받고 외람되이 사은하는 뜻을 조금이나마 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곧 사람이 되는 까닭과 신자(臣子)가 군친(君親)을 섬기는 데에는 오직 대륜(大倫)이 있을 뿐이니, 여기에 조금만 분의(分義)를 다하지 못한 것이 있어도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사람으로서 대륜을 무너뜨린다면 곧 금수(禽獸)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남들의 지목하는 말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그 뜻의 소재는 감히 알지 못하게습니다마는, 신의 집을 멸족시키려는 마음에 의해서 가혹한 무함이 신의 아비에게 먼저 미친 것이고 보면, 신의 몸 또한 어느 겨를에 논할 것이 있다고 무슨 말을 가려서 하며 무슨 모욕을 가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에 이르러서 신의 아비가 무함을 입은 것은 이미 우리 두 성조(聖朝) 및 자성전하(慈聖殿下)께서 통촉하시고 환히 밝혀주심을 입어 다시 더 남은 것이 없게 되었으니, 신이 어찌 감히 기왕지사를 뒤늦게 제기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신의 괴로운 마음과 지극한 정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만합니다. 비록 나가서 임금을 섬기려고 하더라도 자뢰삼아 효도를 옮겨 시행할 것이 이미 남김없이 무너졌으니, 이것만으로도 세상에 사람으로 일컬어질 수가 없는데, 더구나 감히 의관(衣冠)을 갖추고서 맑은 조정의 반열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오직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자취를 감추고서 생각마다 은혜를 떠올리고 시각마다 허물을 참회하여, 혹시라도 상유(桑楡)의 거둠경의(黥劓)의 보충이 이뤄지기만 바랄 뿐입니다. 변함없는 전일한 이 마음을 밝은 태양이 환히 굽어 비추신 바이므로,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호소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께서는 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조적(朝籍)에서 신의 이름을 깎아버리시고 이어서 신의 포만(逋慢)한 죄를 다스려 주신다면 더없이 큰 소원을 이루었다 하겠습니다.

[주D-001]성인(聖人)을 축수하면서 : 임금을 축수하는 것을 비유한 말. 요(堯) 임금이 화(華) 땅을 순찰할 적에 화땅의 봉 인(封人)이 말하기를 "성인께 축수를 드리노니, 성인께서 (壽)·부(富)·다남자(多男子)하시기를 원합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잠필(簪筆) : 붓을 머리에 꽂는다는 뜻으로, 즉 하급 문관(下級文官)을 가리킨 말이다.
[주D-003]규벽(奎璧) : 규와 벽은 모두 제후(諸侯)를 봉(封)해주는 옥(玉)이므로, 전하여 제후의 뜻으로 쓴 말이다.
[주D-004]진유(眞遊) : 임금이 출유(出遊)하는 것을 ‘천유(天遊)’라고 하듯이, 이는 곧 임금의 참모습이 거동(擧動)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5]부여잡고 호곡하여도 : 임금의 죽음을 애통하는 것을 비유한 말. 황제(皇帝)가 형산(荊山)에서 솥을 다 주조하고나자, 용(龍)이 수염을 드리워서 황제를 맞이하여 등에 태우고 하늘로 올라갈 적에, 뭇 신하들은 용을 타지 못하고 용의 수염을 부여잡았으나 수염이 뽑혀 떨어짐으로써 모두 황제를 따라가지 못한 채 황제의 활과 용의 수염을 안고 호곡(號哭)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封禪書》
[주D-006]상유(桑楡)의 거둠 : 상유는 해가 지는 곳의 명칭인데, 전하여 말년(末年)의 뜻으로서 즉 늦게나마 평소의 포부를 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7]경의(黥劓)의 보충 : 경은 얼굴을 자자(刺字)하는 형벌이고, 의는 코를 베는 형벌로, 상고 시대 허유(許由)가 의이자(意而子)에게 이르기를 "요(堯)가 이미 인의(仁義)로써 너의 얼굴을 자자했고, 시비(是非)로써 너의 코를 베어버렸다."고 하자, 의이자가 대답하기를 "……저 조물주(造物主)가 나의 자자받은 흔적을 고쳐주고 나의 베어진 코를 소생시켜 주어 나로 하여금 완전한 형상을 갖추고 선생을 따르게 하지 않을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다만 과거의 허물을 씻어버리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莊子 大宗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