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역서변(易筮辨) 상(上)

천하한량 2007. 3. 7. 00:29
역서변(易筮辨) 상(上)

대저 성인(聖人)이 《주역(周易)》을 지어서 겨우 사람들의 점(占) 치는 데에 이바지했는가 하고 나는 의심해왔다. 그러다가 《춘추전(春秋傳)》의 여러 서법(筮法)을 보고는 또 성인이 《주역》을 지은 의도와는 현격하게 다르므로 나는 더욱 의심을 갖게 되었다.
《주례(周禮)》 춘관(春官)에 이르기를,
"서인(筮人)이 삼역(三易)을 맡아 구서(九筮)의 명칭을 분변한다."
하였는데, 춘추 시대에 점치는 자들은 구서를 알지 못하고 별도로 서법을 만들었으니, 즉 그릇되고 허망하게 사적으로 주사(繇辭)를 지어 이것을 점법(占法)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경중(陳敬仲)이 태어난 데에 대해서는 '그가 다른 나라[異國]에서 창성해질 것이라'고 말하였고, 진백(秦伯)의 싸움에 대해서는 '반드시 진군(晉君)을 포획할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초자(楚子)가 정(鄭) 나라를 구해줄 적에는 남국(南國)이 쭈그러지고 그 원왕(元王)을 쏘아 눈을 맞힐 줄을 알았고, 목자(穆子)가 태어났을 때에는 참소할 사람의 이름이 우(牛)인 줄을 알았으니, 이것이 어찌 삼역과 구서에서 분변할 바이겠는가.
오직 자복 혜백(子服惠伯)은 이르기를,
"충신(忠信)한 일이면 될 수가 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주역》으로는 위험한 일에 대해서는 점칠 수 없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옛날의 점법(占法)으로서 그에게는 옛 점법의 한 가닥 실마리가 아직 남아 있어 여러 술사(術士)들의 말과 달랐는데, 당시 사람들은 서로 견강부회하여 성경(聖經)을 오도했었다. 그래서 공자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주역》을 많이 열독(閱讀)하여, 《주역》이 한갓 복서(卜筮)만 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허물을 적게 하는 글임을 밝혔던 것이다.
춘추 시대의 점법은 성인의 본지에 크게 어긋났으니, 저 신료(辛廖)·복초구(卜楚丘)·복도보(卜徒父)·사소(史蘇)의 무리들은 후세의 경방(京房)·관로(管輅)의 화주림(火珠林)·비복(飛伏)·납갑(納甲) 등의 법칙과 서로 같은 것이니, 이것이 어찌 성인이 《주역》을 만들어 가르친 뜻이겠는가.

[주D-001]삼역(三易) : 1.《연산(連山)》, 2.《귀장(歸藏)》, 3.《주역(周易)》을 합칭한 말이다. 《周禮 春官 筮人》
[주D-002]구서(九筮) : 1. 무경(巫更), 2. 무함(巫咸), 3. 무식(巫式), 4. 무목(巫目), 5. 무역(巫易), 6. 무비(巫比), 7. 무사(巫祠), 8. 무참(巫參), 9. 무환(巫環)인데, 자세한 것은 《주례(周禮)》 춘관(春官) 서인(筮人) 참조.
[주D-003]진경중(陳敬仲)이……말하였고 : 진경중은 춘추 시대 진 여공(陳厲公)의 아들로 이름은 완(完)이고, 경중은 그의 시호이다. 그는 뒤에 제(齊) 나라에 망명하여 환공(桓公) 밑에서 벼슬하면서는 진(陳)을 전씨(田氏)로 바꾸어 행세하였는데, 그의 후손이 점차 창성해져서 경대부(卿大夫)가 되었고, 그의 9세손 전화(田和)에 이르러서는 끝내 강씨(姜氏)의 제(齊) 나라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에 앞서 진경중을 낳았을 때 주(周) 나라 태사(太史)가 경중의 장래를 두고 점을 친 결과 관지비괘(觀之否卦)를 얻고는 말하기를 "나라의 빛남을 볼 것이니 왕(王)의 빈객이 되기에 이롭다. 이 사람이 진(陳) 나라를 대신해서 나라를 가질 것인데, 이 나라에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그렇게 창성해질 것이요, 또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손이 그렇게 될 것이다."고 한 것을 이른 말이다. 《左傳 莊公 二十二年》
[주D-004]진백(秦伯)의……말하였으며 : 진백은 진 목공(秦穆公)을 이름. 진 혜공(晉惠公)이 무도하므로, 진 목공이 그를 치려고 할 때에 복도보(卜徒父)가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고괘(蠱卦)를 만났으니 크게 길(吉)하다. 세 차례 패한 다음에 반드시 진군을 포획하게 될 것이다. 고괘의 괘사에 '천승(千乘)의 나라가 세차례 패한 다음에 적의 웅호(雄狐)를 포획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일은《좌전》의 본소(本疏)에서도, 고괘의 괘사에 이런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근거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左傳 僖公 十五 年》
[주D-005]초자(楚子)가……알았고 : 초자는 초 나라 임금. 춘추 시대 진(晉) 나라가 정(鄭) 나라를 치려고 하자, 정 나라에서 초(楚) 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진 나라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점을 치게 하니, 사관이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길하다. 복괘(復卦)를 만 났는데, 괘사에 '남국(南國 : 초 나라를 이름)은 쭈그러들고 그 나라 임금을 쏘아 그 눈을 맞힐 것이다.'고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또한 복괘의 괘사가 아니기 때문에 한 말이다. 《左傳 成公 十六年》
[주D-006]목자(穆子)가……알았으니 : 목자는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대부(大夫)인 숙손표(叔孫豹)의 시호. 숙손표는 처음 노 나라를 떠나 제(齊) 나라에 망명해 있다가 몽 조(夢兆)를 인하여 우(牛)라는 사환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끝내 그 사환을 데리고 노 나라에 돌아온 후로 그 사환의 참소(讒訴)와 간계(奸計)에 의해 자기 큰아들을 무고하게 죽였고, 자신도 끝내 굶어죽고 말았었다. 그런데 앞서 숙손표가 태어났을 때에 그의 부친인 숙손득신(叔孫得臣)이 점을 쳐서 명이지겸괘(明夷之謙卦)를 얻어 복초구(卜楚丘)에게 이를 물으니, 초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장차 고국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대(代)를 이을 것인데, 참소하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리니 그의 이름은 우(牛)이고, 이분은 끝내 굶어서 죽을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昭公 五年》
[주D-007]자복 혜백(子服惠伯)은……없다 : 자복 혜백은 노(魯) 나라 대부인 자복초(子服椒)를 이름. 혜백은 그의 시호. 춘추 시대 노 나라 비읍재(費邑宰)로 있던 남괴(南蒯)가 장차 모반(謀叛)을 하기 위해 점을 친 결과 곤지비괘(坤之比卦)를 얻었는데, 괘사에 "누런 치마를 입으면 크게 길하다.[黃裳元吉]" 하였으므로, 이 일을 자복 혜백에게 물으니, 혜백이 말 하기를 "충신(忠信)한 일을 하려면 되겠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그리고《주역》으로는 위험한 일에 대해서 점칠 수 없는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昭公十二年》
[주D-008]신료(辛廖)……사소(史蘇) : 신료는 춘추 시대 진(晋) 나라 대부. 이때 필공고(畢公高)의 후예인 필만(畢萬)이 진(晉) 나라에 벼슬할 일로 점을 쳐서 둔지비괘(屯之比卦)를 얻었는데, 신료가 이 점을 풀이하기를 "둔(屯)은 견고한 것이요 비(比)는 친밀하여 잘 파고드는 것이니, 이보다 더 길할 수가 없다. 그의 후손이 반드시 번창하리라." 하였다. 그런데 과연 필만이 진 헌공(晉獻公)을 섬겨 공(功)으로 위(魏)에 봉해졌고, 그 후손이 끝내 위 나라를 차지하여 제후가 되었다. 복초구(卜楚丘)·복도보(卜徒父)의 일은 앞의 주석들에 나타나 있 다. 사소는 진(晉) 나라 때의 복서(卜筮)하던 사관(史官)임. 진 헌공이 딸 백희(伯姬)를 진(秦) 나라에 시집보내려 하면서 점을 친 결과 귀매지규괘(歸妹之睽卦)를 얻었는데, 사소가 점을 쳐보고 불길하다고 하였는바, 그 주사(繇辭)에 "남편은 피없는 양을 잡고, 여자는 실물 없는 광주리를 받는다.[士刲羊亦無衁也 女承筐亦無貺也]"고 나왔었다. 그런데 이 주사를 소(疏)에서는 《주역》의 본 이론과 같지 않다고 평하였다. 《左傳 僖公 十五年》《史記 卷 三十九》
[주D-009]경방(京房)……납갑(納甲) : 경방은 전한(前漢) 때 사람으로 《주역》에 정통하였고, 관노(管輅)는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그는 특히 풍각 점상(風角占相)의 법에 정통했다고 한다. 화주림(火珠林)은 경방이 만들었다고 하는, 시초(蓍草) 대신 전(錢)을 사용하여 점 치는 방법이고, 비복(飛伏)은 역시 경방의 학설로서 괘(卦)가 나타나는 것을 비(飛)라 하고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복(伏)이라 하는 것이며, 납갑 또한 경방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십간(十干)을 팔괘(八卦)에 분납(分納)시키는 법칙인데, 이를테면 건(乾)은 갑임(甲壬)에, 곤(坤)은 을계(乙癸)에, 진(震)은 경(庚)에, 손(巽)은 신(辛)에, 감(坎)은 무(戊)에, 이(離)는 기(己)에, 간(艮)은 병(丙)에, 태(兌)는 정(丁)에 각각 분납시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