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후서를 첨부하다[附後敍] 이것은 기원(杞園) 민 노행(閔魯行)이 지은 것이다.

천하한량 2007. 3. 7. 00:27
후서를 첨부하다[附後敍] 이것은 기원(杞園) 민 노행(閔魯行)이 지은 것이다.

요순 우탕 문무 주공 시대의 학술(學術)은 도의(道義)를 숭상하고 덕행(德行)을 힘써 실용 시비(實用是非)의 법칙에서 진리를 찾고 심성 명리(心性名理)의 분변에 급급하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이 도가 절로 밝아져서 근원을 추구하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실(實)이 바르면 명(名) 또한 바르지 않음이 없었던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성인이 죽고 정학(正學)이 쇠미해지자, 게다가 경적(經籍)을 불태우는 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처사(處士)들이 각자 제멋대로 의논을 함으로써 육경(六經)이 갈기갈기 분열되고 학도(學徒)가 서로 흩어져 혼란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유(漢儒) 제자(諸子)들은 서책을 품에 끼고서 같고 다른 이론을 서로 탐색하였는데, 유학도(游學徒)가 3만여 명에 이르도록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우뚝이 우리 도의 종주가 되었던 이로 말하자면 전한(前漢) 시대에는 동 강도(董江都)가 있었고, 후한(後漢) 시대에는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정현(鄭玄)의 자) 이 있었는데, 그들의 학문은 훈고(訓詁)를 깊이 연구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오로지 근엄(謹嚴)을 독실히 하는 것을 법칙으로 삼아, 실없는 허공을 밟지 않고 고원(高遠)한 데로 치달리지 않아서 삼대(三代)의 전형(典型)이 거의 민멸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유향(劉向)은 동자(董子 동중서를 이름)를 칭도하여 이르기를,
"이윤(伊尹)·여상(呂尙)이 이보다 더할 수 없고, 관중(管仲)·안영(晏嬰)은 여기에 못 미친다."
하였고, 범사(范史 범엽(范曄)이 지은 《후한서》를 이름)에서는 정씨(鄭氏 정현을 이름)를 높여 이르기를,
"중니(仲尼)의 문도(門徒)로서도 여기에 더할 수 없다."
하였으니, 덕을 숭상하는 이들은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한·후한 때의 인사들은 대체로 많이 본실(本實)을 도탑게 하고 부화(浮華)함을 수치로 여겨 일을 실천하는 데에 독실하였다. 그러나 순황(荀況)·양웅(揚雄)의 무리는 심성(心性)을 알지 못하였고, 성인 시대와 멀어져 성인의 은미한 말이 단절됨으로 인하여 동중서·정현의 무리 또한 이 도를 크게 미루어 밝히지는 못하였다. 그후에 다시 불행히도 불씨(佛氏)의 설(說)이 그 사이에 복잡하게 얽히고 설킴으로써 이 도의 본체가 거의 식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자못 도의와 덕행의 실상이 심성의 고유(固有)한 것에 근본하는 것을 모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송(宋) 나라의 진유(眞儒)가 이에 그 근본을 추구하여 그 방술을 말해 놓았는데, 그 추구한 것이 자상하여 그 방술이 더욱 넓어졌다. 그러나 치수(錙銖)를 변별하고 절목(節目)을 논의하는 데 털끝만한 차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전해진 지 백 년도 채 안 되어 서로 갈라져서 노경(路逕)을 달리하게 되었고, 더 내려와서는 구이(口耳)에만 익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 가닥이 헝클어진 실보다 더 분잡하게 되었고, 끝에 가서는 가지와 다리가 더욱 많아졌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글을 읽고 이치를 담론하는 선비들이 헛된 말만을 간직하여 길을 헤매며 그것으로 세월을 다 보내면서 되돌아올 줄을 모르고, 한창 또 이 일을 매우 좋아하여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른다. 그래서 이른바 실용 시비(實用是非)라는 것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벌써 잊어버리고 있는 실정이니, 아, 애석하도다.
내가 일찍이 여기에 대해서 속으로 의심을 가진 나머지, 우연히 김원춘(金元春 원춘은 김정희(金正喜)의 자)에게 이 말을 해주었더니, 원춘이 즉시 자기가 지은 실사구시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가 논한 고금(古今)의 학술(學術)에 대한 변천 내력과 문경(門逕)이며 당실(堂室)의 비유는 순수하거니와, 그 사이에 또 한유(漢儒)들을 추존하여 '경전(經傳)의 훈고(訓詁)에 대해서 모두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어 정실(精實)함을 잘 갖추었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내 또한 무릎을 치며 이렇게 감탄하는 바이다.
한대(漢代)의 학자들도 오히려 실용 시비에서 진리를 찾은 것이 이와 같으니, 이른바 동 강도와 정강성의 학문에서 대강 알 수 있겠다. 그런데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실(實)이 일변하여 후한 때의 명절(名節)을 숭상하게 됨에 이르러서는 또한 어떤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삼대(三代)의 학문은 모두 실로써 하였는데, 실이란 곧 도의이며 덕행이니, 실이 바름으로써 명도 반드시 바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후 맹자(孟子)의 세대에 와서만 해도 오히려 명이 밝지 못한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맹자가 이미 그 근본을 추구하였으니, '성은 본디 선하다.[性善]' 또는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른다.[存心養性]'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진 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로 인해 겨우 조금 남은 상태를 지나 한대(漢代)의 초창기에 미쳐서는 이른바 명이 밝지 못한 것이 또 맹자의 시대 정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동 강도 같은 이는 서재(書齋)에 꽉 들어앉아 분발하여 큰 학업(學業)을 깊이 연구해서 후학(後學)들로 하여금 대략 귀의할 곳을 알게 하였으니, 그 공이 장하다 하겠다. 그러나 명이 이미 밝지 못한데다 말해놓은 것도 자상하지 못하고 보면 '사람마다 모두 알고 있어서 깊이 논할 필요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순황(荀況)과 양웅(揚雄)은 심성(心性)에 대한 견해를 잘못함으로써 스승마다 도(道)가 다르고 사람마다 논(論)이 달라서 백가(百家)가 각각 방향을 달리하여 지취가 서로 같지 않았으니, 이것을 어떻게 '사람마다 모두 알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실로 동 강도나 정강성 등 제공(諸公)이 성실하고 언론(言論)이 적어서 구이(口耳)의 자료를 만들지 않았고 또 박실(樸實)한 곳으로 좇아 일을 실천하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러나 동 강도의 말에,
"인(仁)이란 사랑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사의(辭意)의 순수하고 심원함과 명리(名理)의 어긋나지 않은 것이 또 한자(韓子)의 박애(博愛)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만일 동 강도·정강성 등 제공의 앎이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사리에 맞는 말이 아니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양한(兩漢 전한과 후한) 시대의 문자(文字)·학술(學術)·명리(名理)는 매우 정독(精篤)하고 친절(親切)하여 허공에 치닫는 후세의 학문 경향과는 같지 않았다. 이는 의당 엮어 모아 고증 보충해서 그윽이 스스로 근본을 도타이하고 실제를 힘쓰는 뜻에 붙이려고 하나, 돌아보건대 곤궁하여 이를 겨를하지 못하고 그지없이 태만한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후일에 스스로 힘써서 의당 다시 원춘(元春)과 함께 의논하기로 하고 우선 이렇게 붙여 기록하여 실사구시설의 후서(後敍)로 삼는 바이다. 병자년 계동(季冬)에 쓰다.

[주D-001]동 강도(董江都) : 전한 때의 대유(大儒)인 동중서(董仲舒)를 이름. 그가 무제(武帝) 때에 강도상(江都相)이 되었기 때문에 일컫는 말이다.
[주D-002]사람마다……없었다 : 이 말은 앞에 나오는 김정희(金正喜)의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3]한자(韓子)의 박애(博愛) : 한자는 당(唐) 나라 때의 한유(韓愈)를 이름. 박애는 한유가 지은 원도(原道)를 말한 것으로, 원도의 글이 맨 처음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 한다. [博愛之爲仁]'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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