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완당김공 소전(阮堂金公小傳)

천하한량 2007. 3. 7. 00:11
완당김공 소전(阮堂金公小傳)

김공 정희(金公正喜)의 자는 원춘(元春)이고, 호는 완당(阮堂)이며, 또 다른 호는 추사(秋史)인데 경주인(慶州人)이다. 모친 유 부인(兪夫人)이 임신한 지 24개월이 되어 공을 낳았으니, 그때가 바로 정종(正宗) 병오년(정조 10, 1786)이었다.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 많은 책을 널리 읽고 나서 순조(純祖) 기사년(순조 9, 1809) 생원시에 합격하고, 기묘년(순조 19, 1819)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說書)·검열(檢閱)·규장각 대제(奎章閣待制)를 역임하고, 호서 암행어사(湖西暗行御史)로 나가서는 암행어사의 풍도가 있었다. 그후 필선(弼善)·검상(檢詳)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고 벼슬이 병조 참판에 그쳤다.
공의 7세조 휘 홍욱(弘郁)은 효종(孝宗) 갑오년(효종 5, 1654)에 황해도 관찰사로 상소를 올려 강빈(姜嬪)의 옥사(獄事)를 말했다가 효종의 뜻에 거슬려 체포되어 옥사함으로써 마침내 명신(名臣)이 되었고, 그후로는 고관대작이 혁혁하여 가문이 매우 창성하였다. 부친 판서 휘 노경(魯敬)은 의연하게 도량이 있었는데 화를 만나 먼 섬[島]에 유배되자, 공은 슬퍼서 살고 싶지 않았고, 밤이면 반드시 잠도 자지 않고 울면서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추우나 더우나 옷도 갈아입지 않다가 판서공이 4년만에 풀려 돌아오자 공 또한 4년 만에 비로소 옷을 갈아입었다.
이에 앞서 판서공이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갈 적에 공도 따라 들어갔는데 이때 공의 나이는 24세였다. 당시 각로(閣老)인 완원(阮元)과 홍려(鴻臚)인 옹방강(翁方綱)은 모두 당세의 대유(大儒)로서 큰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였고 지위도 현달하여 선뜻 남들을 접견하지 않은 터였으나, 그들이 공을 한번 보고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경의(經義)를 변론하면서 그들과 승부를 맞겨루어 조금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완원이 《경해(經解)》를 찬술하였으나 중국의 여러 대가(大家)들은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특별히 공에게 먼저 초본(抄本)을 부쳐주었던 것이다.
헌종(憲宗) 경자년(헌종 6, 1840)에 옥사가 일어나 말이 공에게 관련되어 의금부의 군졸들이 황급하게 움직이자, 공을 위해 걱정하는 이들이 모두 두렵게 여기었다. 그러나 공은 행동거지가 평소와 똑같았고, 법관을 대해서는 요점을 잘 지적하여 변석하니, 그 준엄하고 명백한 기상이 일성(日星)을 능가하고 금석(金石)을 꿰뚫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공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라도 중요한 단서는 잡아내지 못했으나, 끝내 제주(濟州)에 유배되는 것은 면치 못하였다.
제주는 옛 탐라(耽羅)인데 큰 바다가 사이에 끼어 있어 거리가 매우 멀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사람들이 이곳을 건너가려면 보통 10일에서 1개월 정도가 소요되곤 하였다. 그런데 공이 이곳을 건널 적에는 유독 큰 파도 속에서 천둥 벼락까지 만나 죽고 삶이 순간에 달린 지경이라,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고 서로 부둥켜안고서 호곡하였고, 뱃사공도 다리가 떨려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은 타두(柁頭)에 꼼짝 않고 앉아서 소리를 높여 시를 읊으니, 시 읊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서로 오르내렸다. 공은 인하여 손을 들어 어느 곳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사공은 힘껏 키[柁]를 끌어당겨 이곳으로 향하라." 하였다. 그렇게 하자 항해(航海)가 빨라져서 마침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제주에 당도하니, 제주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날아서 건너온 것이다."고 하였다. 공이 적사(謫舍)에 들어간 뒤에는 원근에서 글을 배우려고 찾아온 자가 대단히 많았다. 그래서 겨우 두어 달 동안에 인문(人文)이 크게 열리어 찬란하게 서울의 기풍이 있게 되었으니, 탐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철종(哲宗) 신해년(철종 2, 1851)에 상국(相國) 권돈인(權敦仁)이 예론(禮論)으로 배척을 받았는데, 배척하는 자가 공이 실제로 그 예론에 참예했다고 하여 공을 북청(北靑)에 유배시켰다. 이때 공의 나이는 66세였고 두 아우 또한 늙어 백발이었다. 두 아우는 공의 손을 잡고 말도 못한 채 통곡만 하였고, 친척이나 옛 부하 관리들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슬피 부르짖어 우니, 통곡 소리가 장옥(墻屋)을 진동하였다. 그러자 공이 정색을 하고 두 아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못난 사람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자네들같이 글을 읽은 사람들도 이러한단 말인가." 하고는, 얘기하며 웃고 또 위로하면서 손수 책 상자를 정연하게 정돈하였다. 병오년에 공이 별세하니 수가 71세였다.
공은 매우 청신하고 유연하며 기국이 안한하고 화평하여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모두를 즐겁게 하였다. 그러나 의리(義理)의 관계에 미쳐서는 의론이 마치 천둥 벼락이나 창·칼과도 같아 사람들이 모두 춥지 않아도 덜덜 떨었다.
공은 겨우 약관의 나이에 백가(百家)의 서적을 관철하여 학식이 대단히 깊고 넓어서 그것이 마치 헤아릴 수 없는 하해(河海)와 같았다. 특히 전심하여 공부한 것이 십삼경(十三經)이었고, 그 중에서도 《주역(周易)》에 더욱 조예가 깊었으며, 금석(金石)·도서(圖書)·시문(詩文)·전례(篆隷) 등의 학문에 대해서도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더욱이 서법(書法)으로는 천하에 명성을 드날렸다. 일찍이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저술하여 이르기를 "학문하는 도리는 이미 요순(堯舜)과 주공(周公)·공자(孔子)를 귀의처(歸依處)로 삼았으니, 굳이 한(漢)·송(宋)의 한계나 주(朱)·육(陸)과 설(薛)·왕(王)의 문호를 나눌 필요가 없고, 다만 심기(心氣)를 침착하게 갖고서 독실히 배우고 힘써 실천할 뿐이다." 하였으니, 대체로 공의 경학(經學)은 오직 성인의 지취에 맞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역관(譯官)이 일찍이 《시헌력(時憲曆)》을 가지고 오자, 공이 잠깐 열람해 보고는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중기(中氣)의 차례가 잘못되었구나." 하였는데, 운관(雲觀)이 청(淸) 나라 흠천감(欽天監)에 이를 변정(辨正)해 주기를 요청하니, 청 나라 사람들이 그제야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었다. 그러니 공은 천상(天象)·지리(地理)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남을 대해서 여기에 언급한 적은 없었다.
공은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젊은 시절에 엮어놓은 것들은 두 차례에 걸쳐 다 불태워 버렸고, 현재 세상에 전하는 것은 평범하게 왕복했던 서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도의(道義)의 바름과 심술(心術)의 밝음과 경례(經禮)의 발휘(發揮)에 있어 공의 대략을 알 수가 있다.
아, 공이 남쪽에서 10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고 또 북쪽에서 2년 동안 유배생활을 할 적에 거센 바람, 거친 파도와 장기(瘴氣)와 충사(蟲蛇)의 악물이 득실대거나 기구하고 험난하며 눈·서리가 무섭게 차가운 곳에서 지냈으니, 참으로 구사일생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전혀 근심 걱정이 없이 잘 넘기고 천수를 누릴 수 있었으니, 학문에 남달리 얻은 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러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함에 따라 백성들 또한 그 은택을 입지 못하게 된 것은 운명일 뿐이다.
공이 오랫동안 투병하던 때에 중씨(仲氏) 또한 병중에 있었으므로 공이 그를 조석으로 부호해 주고 병이 더한가 덜한가를 살폈으며, 공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도 오히려 중씨가 약을 쓰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곤 하였다.
중씨의 이름은 명희(命喜)이고 자는 성원(性元)인데 어질고 덕이 있었으며 박식하여 저술한 것도 많았다. 익종(翼宗)이 항상 경사(經史)의 심오한 문의(文義)나 전고(典故)의 의심스럽고 어려운 것들을 공에게 자문하면 공이 유(類)에 따라 숨김없이 대답하였고, 간혹 응지(應旨)의 문자(文字)를 지을 경우에는 이따금 중씨의 손을 의뢰하기도 했다고 한다.
무진년 중추(仲秋)에 문인 민규호(閔奎鎬)는 삼가 기술하다.

[주D-001]홍욱(弘郁)은……옥사 : 강빈(姜嬪)은 바로 일찍이 무고를 받고 사사(賜死)된 소현세자비(昭顯世子妃)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를 이르는데, 효종(孝宗) 때 김홍욱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그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어 친국을 받다가 장사(杖死)된 사실을 가리킨다.
[주D-002]주(朱)……문호 : 주는 송(宋) 나라 주희(朱熹)를 말하고, 육(陸)은 육구연(陸九淵)을 이르며, 설(薛)은 명(明) 나라 설선(薛瑄)을 말하고, 왕(王)은 왕수인(王守仁)을 이름. 주희와 육구연은 동시대 사람으로, 학문하는 방도에 있어 주희는 문학(文學)의 필요성을 역설한 데에 반하여 육구연은 덕성(德性)을 존중하는 것을 주로 삼았는데, 명 나라 때에 와서 설선은 주희의 학문 방도를 존중하여 따랐고, 왕수인은 육구연의 학문 방도를 존중함으로써 서로 문호가 갈라졌던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3]시헌력(時憲曆) : 청(淸) 나라 때 흠천감(欽天監)에서 만든 역서(曆書)를 이름.
[주D-004]중기(中氣) : 매월(每月) 처음을 절기(節氣)라 하고 중간을 중기라고 하므로, 1년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 가운데 동지(冬至)를 기점으로 하여 즉 동지·대한(大寒)·우수(雨水)·춘분(春分)·곡우(穀雨)·소만(小滿)·하지(夏至)·대서(大暑)·처서(處暑)·추분(秋分)·상강(霜降)·소설(小雪)이 여기에 해당한다.
[주D-005]운관(雲觀) : 서운관(書雲觀)의 준말로, 조선 시대 천문(天文)·역수(曆數)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상감(觀象監)을 달리 이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