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완당척독 서(阮堂尺牘序)

천하한량 2007. 3. 7. 00:10
완당척독 서(阮堂尺牘序)

내가 일찍이 마음속으로 완당 김공의 한묵(翰墨)을 사모하였노니, 대체로 그 정화(精華)가 말 밖에 넘쳐흐르고 신묘함이 묵흔(黙痕)에서 생동하여 충분히 사람들의 문아한 마음과 운치를 감발시킬 만하였다. 만일 뛰어나게 고상하고 예스러운 것이 아니면 어찌 능히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내가 정묘년 여름에 뜻밖의 질병에 걸려 겨울까지 처박혀 있으면서 질병을 잊을 방도를 생각하여 공의 척독을 수집해서 장차 간행을 하려고 하였는데, 어느 날 밤 꿈에 공이 와서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이 늙은이의 추한 것을 폭로하는가? 이것은 바로 이 늙은이가 손 가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한만하게 수응수답한 것들인데 어째서 이토록 장황하게 일을 벌이는가?" 하였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선생 같은 학식으로 세상에 전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시는 약간 정도가 있고 문도 전한 것이 드문데, 오직 이 척독은 비록 해타(咳唾)의 나머지라고는 하지만, 혹은 경사(經史)·백가(百家)와 고문(古文)·시사(詩詞)를 논하였고, 혹은 노불(老佛)·금석(金石)과 해례(楷隷)·명물(名物) 등을 고증하면서 고금을 드나들어 우뚝이 홀로 깊은 경지에 들어감으로써, 향상(香象)과 문표(文豹)가 지묵(紙墨) 사이에 분주하여 은은히 비추이니, 문장의 전형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진실로 이것은 숙상(鷫鸘)의 날개 하나나 큰 고기솥의 고기 한 점에 불과합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응, 그렇지 않다. 어찌 그렇겠는가. 나는 그렇다는 것을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때에 몸을 뒤척여 꿈을 깨고 나니 등잔불은 희미하고 빈 방에는 밝은 빛이 생기었다.
정묘년 남지일(南至日)에 의산 남병길은 서하다.

[주D-001]향상(香象)과 문표(文豹) : 향상은 전설상의 향기를 띤 코끼리를 이르는데, 향상은 큰 하수(河水)를 건널 때도 물에 뜨지 않아 밑바닥에 닿는다는 데서 즉 문장을 평론하는 데에 철저함을 비유한 말이고, 문표는 문채가 있는 표범인데 이 표범은 자기 의모(衣毛)를 윤택하게 해서 문채를 빛내기 위하여 안개가 낀 때에는 10일간을 굶으면서도 밖을 나가지 않는다는 데서, 즉 좋은 문장을 남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2]숙상(鷫鸘) : 서방(西方)을 지키는 신조(神鳥)라고 하며, 일설에는 봉황(鳳凰)의 일명이라고 한다.
[주D-003]빈……생기었다 : 이는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서 나온 말로, 본뜻은 사람이 상념(想念)을 텅 비움으로써 저절로 진리(眞理)에 도달하게 됨을 비유한 것인데, 여기서는 별 의미 없이 쓰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