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동경(東京)의 객사에 이르러 동루(東樓)에 오르니 도무지 아름다운 경치가 없었는데, 서루(西樓)에 오르니 자못 웅장하고 아름답고 시원히 트여서 성곽과 산천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썼다고 하는 의풍루(倚風樓) 석자가 있을 뿐, 제영(題詠)한 것이 없다. 생각하건대, 이 부(府)는 천년구도(千年舊都)로서 옛날 어진 이들의 유적(遺跡)이 곳곳에 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 동경(東京)으로 삼은 지도 또한 곧 5백 년이 되려 한다. 번화하고 아름다움이 동남에서 으뜸이며, 봉명사신(奉命史臣)의 절월(節鉞)을 잡고 와서 풍속을 살핀 이(감사), 병부(兵符)를 쪼개어 받아 교화(敎化)를 펼친 이(부윤)들 중에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많았다. 내 생각으로는 반드시 홍벽사롱(紅?紗籠)과 은구옥근(銀鉤玉筋)이 그 사이에 서로 빛날 것이라 하였는데, 이제 본 바로는 다만 빈헌(賓軒)에 써 놓은 절구(絶句) 한 수(首)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선유(先儒) 김군유(金君綏)가 처음 지은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옛날에 객관에 화재가 나서 시를 쓴 현판들이 따라 다 없어졌다.’ 한다. 그러나 김씨의 시는 어찌 홀로 불타지 않았으며, 화재 뒤에 지은 글은 또한 어찌 보이지 않는가. 어떤 이가 하는 말은 징빙(徵憑)하기에 부족하다. 향교(鄕校)의 유생(儒生) 한 사람이 말하기를. ‘김씨의 시가 우연히 남아 있어서 백년 전의 풍류와 인물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대개 그때에는 백성들은 순박하고 정사는 간략하여서 사건이 있으면 곧 처리하고, 흥이 나면 바로 즐겼습니다. 문부(文簿)가 앞에 펼쳐 있고, 풍악이 뒤에 벌여 있어도 남들이 비난하지 않았으며, 자신도 혐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백년이 지난 뒤에는 조급하고 스스로 닦고 조심하기를 힘써서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일도 혹시나 때가 아닐까 두려워하니, 어찌 감히 경치를 찾아 시를 읊어서 썩은 선비라는 비난을 자취(自取)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선생께서는 풍속을 살피고 교화를 펼치는 수고로움도 없이, 심신의 경계와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을 일로 삼아 오셨습니다. 풍악(楓岳)과 설악(雪嶽)의 높은 산들을 마음껏 보고, 또 철관(鐵關)을 넘어 동해(東海)에 들어가서는 섬들의 기이하고도 신비스러움을 남김 없이 다 구경하였으며, 드디어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총석정(叢石亭)의 옛 비석과 삼일포(三日浦)의 돌에 새긴 붉은 글씨 여섯 자를 손으로 어루만지고, 영랑호(永郞湖)와 경포(鏡浦)에 배를 띄워 사선(四仙)이 놀았다는 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성류굴(聖留窟)에 촛불을 비춰 그 그윽함과 기이함의 극치를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으니, 놀고 구경하는 일에는 마음껏 하였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라 고도의 웅장한 형세와 멀리 트인 조망이 이 누(樓)에 다 모였는데 여기에 한마디의 말씀도 없이 간다면 선생을 위하여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내가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다만 시인묵객의 유(流)와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여러 교생(校生)들의 말에 깊이 느낀 바 있고, 또 시대의 변함을 살필 수 있다.’ 하고 인하여 장구 사운(長句四韻)을 지어 이 누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보인다. 동도(東都)의 문물(文物)이 아직도 번화한데, 다시 높은 누를 세워 붉은 노을 스치네. 성곽에는 천년 된 신라 때의 나무요, 여염에는 반가량 절이었네. 구슬발[珠簾] 걷고 보니 산빛은 그림 같고, 옥피리 불고 나니 해는 아직 기울지 않았네. 기둥에 비껴서서 시를 읊고 스스로 웃노니, 다음에 다시 올때에 홍벽사롱(紅壁紗籠) 필요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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