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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비가 몹시 와서..(충청도 한산)-이곡(李穀)-

천하한량 2007. 3. 1. 19:38
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기축년 가을에 비가 몹시 와서 마산(馬山) 객관(客館)의 남쪽 낭사(廊舍)가 무너졌다. 비가 이미 개고 농사 또한 틈이 나니, 고을 사람들이 이를 수리하려고 하였다. 군수 박군(朴君)이 말하기를, ‘남쪽 낭사뿐 아니라 본 청사도 거의 무너졌으니, 어찌 한꺼번에 새로 짓지 않으랴.’ 하니,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지방에는 재목이 나지 않아서 한 길 정도의 목재도 백리 밖의 다른 산에서 취해 오며, 또 우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권세 있는 자들에게 매어 있으니, 누가 즐겨 우리 역사를 하여 주겠는가.’ 하였다. 박군이 말하기를, ‘다만 해보자. 무슨 어려울 것이 있으랴.’ 하고, 또 말하기를, ‘묵은 집을 헐지 않으면 사람들이 힘쓰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고는, 하루아침에 다 철거해 버렸다. 고을 사람들이 처음에 의심도 하고 걱정도 하자, 군이 이에 아전들의 재능을 헤아려 익숙한 자에게는 큰 집을 맡기고 인부를 많이 주고, 미숙한 자에게는 적게 하여 이미 일을 나누어 맡게 하였다. 또 명령하기를, ‘옛사람[孟子]이 이르기를, 「백성을 편케 하기 위하는 도리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수고롭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하였다. 이제 너희들이 이 고장에서 옷 입고 밥 먹으면서 못살겠다는 한탄이 없는 것은 모두가 임금의 은혜인 것이다. 여기에 오는 빈객(賓客)은 크게는 천자(天子)의 은혜로운 윤음(綸音)을 펴고, 작게는 국가의 명령을 반포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것인즉, 이 객관을 짓는 것도 필경은 백성을 위한 일이다. 그러니 이번 역사가 너희들을 편하게 하기 위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객관의 옛 제도가 거칠고 소박한데다가 또 장차 무너지게 되어, 사신을 맞이하여 조서(詔書)와 명령[令]을 받들 수가 없으므로 군수는 오직 공경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어찌 감히 태만하랴. 감히 어기는 자는 벌하리라.’ 하였다. 이에 호적에 의하여 인부를 내게 하고 늙은이와 어린이만을 면제하였다. 바닷길로 재목을 가져와서 멀고 험한 것을 꺼리지 않으니, 돈을 거두어 돕는 자와 밥을 싸다가 먹이는 자가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 그해 윤달에 역사를 시작하여 겨우 두어 달만에 청방(廳房)과 낭무(廊?)가 다 얽어졌으나, 때가 바야흐로 추워 얼어붙는 시기인지라 흙을 바를 수 없어 잠시 공사를 멈추었었다. 다음해 2월에 이르러 준공을 하게 되었는데,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서 면세(面勢)에 맞고,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서 시의(時宜)에 적합하였다. 처음에 의심하고 걱정하던 자들도 마침내 기뻐하여 감복하고, 전일에 세력을 믿고 대항하던 자들도 이제는 시키는 대로 복종하였다. 또 주관(州官)이 사무를 보는 청사와 서적을 두는 시렁,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도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계획을 이미 정하여 놓았는데, 군이 마침 갈려 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부모를 잃은 것같이 여기니, 군은 역시 유능한 관원이로다. 내가 젊었을 적에 시골에서 자라 백성의 화복(禍福)이 실로 수령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고, 우리 고을에서 더욱 그러함을 보았는데, 중간에 서울에 있으면서 우리 고장의 아전과 백성들이 가끔 도망해 숨곤 하여 읍(邑)의 길이 가시밭을 이루어 빈객들이 들어갈 곳이 없으매, 군수가 어찌할 바를 몰라 인(印)을 품고 가버린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한숨 짓고 말하기를, ‘이것은 아전과 백성들의 죄만이 아니라, 고을을 다스리는 자도 또한 그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병술년 봄에 원 나라에서 조서를 받들고 돌아오니, 이자(李資)가 이 고을에서 정사를 시작하자 아전을 통솔하고 백성에게 임하는 것이 모두 법도가 있어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치적을 눈을 닦고 대하였다. 반년이 못 되어 내직(內職)으로 불려가자, 이자장(李自長)이 그의 정사를 이어 더욱 부지런히 하여 아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말하기를, ‘국가 제도에 수령이 거처하는 곳을 공아(公衙)라 하는데, 이 고을 수령은 몸 붙일 곳이 없어서 백성의 집에 우거하고 있으니, 어떻게 고을을 다스려 가겠는가.’ 하고는 고을 아전에게 명하여 부서를 나누어 역사를 담당시켰더니, 기일도 안 되어서 이루어졌다. 또 객관을 차례로 수리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상사(喪事)를 당하여 고을을 떠났다. 박군이 이르자, 두 이군(李君)의 재능을 겸하여 수년 사이에 이익되는 일은 일어나고 해독을 제거되어, 일이 잘 되고 백성들이 화평하여 실로 전일의 한산(韓山)이 아니었다. 또 사람을 성의로 대하고, 빈객을 접대하는 데에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공급하는 물건인 상(床)ㆍ요[褥]ㆍ집기(什器) 등의 미세한 데 이르기까지 모두 깨끗이 완비하여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청 창고의 재물로 충당한 것이요, 털끝만큼이라도 백성에게서 거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명성이 대단하여 한 도(道)에 으뜸이 되었다. 나는 이 고을 사람이다.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다행히 듣고 본 바가 있었는데, 이제 관사(館舍)의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그 사실의 대략을 쓰는 바이다. 아, 이 뒤에 군의 후임으로 오는 자가 한결같이 군을 본받아서 공적의 완성하지 못한 것과 일을 마치지 못한 것을 마침내 성취한다면, 훌륭한 관리가 되지 못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군의 이름은 시용(時庸) 이요, 자(字)는 도부(道夫)이며, 밀성(密城)은 그의 본관이다. 과거에 올라 문한(文翰)의 직을 맡았고,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었다가 예(例)에 따라 수령으로 나왔던 것이다.” 하였다.